그들을 만나면 세상이 즐겁다
웹툰 등 새로운 영역에서 뛰어난 작가가 속속 얼굴을 내밀고 있다.
<시사IN>이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를 소개한다.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들. 맨 왼쪽부터 <노근리 이야기> 박건웅,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짬> 주호민, <내가 결혼할 때까지> 노란구미, <마음의 소리> 조석. |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희망은 만화 시장이 몰락하는 가운데에도 만화를 접할 기회는 시시각각 늘어가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있다. 컴퓨터를 켜면 포털 사이트 초기 화면에 늘 인기 작가의 연재 만화가 뜬다. 강풀씨나 강도하씨처럼 페이지뷰가 수천만에 이르는 작가들이 제법 많다. ‘디시인사이드’ 등 젊은 누리꾼이 모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의 강풀을 꿈꾸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부지런히 태블릿 펜을 놀린다. 웹툰이 아니어도 장르별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오프라인 작가가 여럿이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웹툰이 누리꾼의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다시 한번 사회적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인기 캐릭터 총집합 <도대체 왜?인구단>
너무 많은 작가가 넘쳐나다보니 오히려 취향에 따라 ‘옥석’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시사IN>은 만화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를 선정해 소개한다. 웹툰뿐 아니라 오프라인 만화 잡지 등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함께 추렸다.
한국 만화 100주년을 유쾌하게 돌이켜보고 싶은 이라면 현용민씨의 <도대체 왜?인구단>을 추천한다. ‘신의 아들’ 최강타는 진짜 병역면제자가 되고, 머털도사는 겨드랑이 털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겨털도사’로 살아가고, 까치는 말로는 ‘엄지가 좋아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어’라면서도 지나는 아가씨에게 한눈을 파는 응큼남이 됐다. 이 밖에도 둘리, 독고탁, 하니, 영심이 등 1980~1990년대 한국 만화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캐릭터들을 배꼽 잡는 캐릭터로 비틀었다. 이야기 얼개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따왔지만, ‘왜?인구단’은 축구팀이다. 지나친 희화화로 인해 원작의 감동이 사그라드는 것 아니냐고? 그런 염려를 하기에는 현 작가의 패러디 내공이 가히 ‘지존’급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시길.
엉성한 그림, 놀라운 스토리
최소한의 채색도 하지 않고, 펜으로 슥슥 그린 데생 수준의 선, 얼핏 보면 일반인의 습작 노트에나 실릴 것 같은 그림들. 웹툰 작가 ‘마사토끼’의 작품을 처음 본 이라면 누구나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 엉성한 선들 사이에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다. 어느 깊은 산속의 산장에서 만난 세 남자. 그들은 재벌 그룹 손녀딸을 유괴하는 데 협력해주면 사례를 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모였다. 하지만 산장에 도착한 순간, 유괴를 제안한 ‘울새’라는 이는 이미 죽었고, 재벌 그룹 손녀딸만 남아 있다. 남은 세 남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손녀에게 걸린 현상금 100억원을 얻기 위해 서로 치열한 신경전을 펼친다. 지난 3월 출간된 ‘마사토끼’의 작품 <누가 울새를 죽였나?>의 줄거리이다.
평자들의 말마따나 ‘개인 블로그를 통해 선보인 조악한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스토리’ 덕에 누리꾼의 입소문을 타다 오프라인 책으로 엮인 작품이다. 혹자는 ‘천재’라는 상찬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이미 지난해 <킬 더 킹>이라는 작품으로 ‘독자만화대상’ 온라인 만화상을 수상했을 만큼 웹에서는 검증된 작가다. ‘만화만 그려서 먹고사는 방법’을 궁리하는 그의 작품은 블로그(http://blog.naver.com/masaruchi)에서 볼 수 있다.
대중 인지도가 높은 작가로는 <마음의 소리>를 그린 조석씨와 <삼봉이발소>의 하일권씨를 들 수 있다. 둘 다 1980년대생인 젊은 작가다. 2006년 9월 네이버 웹툰으로 유명해진 조석의 작품 <마음의 소리>는 오프라인으로 출간돼 이미 10만 권 넘게 팔렸다. 그의 만화는 일상에서 겪는 작가의 경험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강풀의 초기 작품과 닮았다. 하지만 ‘말발’ 좋은 대사와 뒤통수를 치는 기발한 반전은 조석 특유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혼자 식당에서 고기 구워먹기 9단계’ 따위를 그려놓은 작품을 읽노라면 아랫배를 움켜쥐게 된다. 조석이 기상천외한 유머 코드로 대중을 사로잡았다면, 하일권은 ‘외모 바이러스’나 ‘미래 시대의 왕따 문제’ 같은 심각한 소재로 독자에게 어필했다(85쪽 인터뷰 참조).
역사와 생태 천착하는 작가도 주목
사회성 짙은 작품을 그리는 작가로는 <노근리 이야기>의 박건웅씨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역사’라는 화두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작가다.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를 다룬 〈꽃〉, 그리고 한국전쟁 중 양민 학살을 소재로 삼은 <노근리 이야기>는 무거운 주제인데도 단숨에 읽힌다. 한지에 붓으로 그린 수묵만화라는 점도 독특하다. 유럽에서도 그의 작품이 잇따라 번역 출간됐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덕수궁 길에 노 전 대통령 대형 초상화를 그려 화제가 되었고, 지난해 촛불집회 때에는 시위 도중 전경들에게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작품만큼이나 그의 일상도 ‘현실 참여형’인 셈이다.
지난 5월 <식물탐정 완두>를 펴낸 황경택씨는 만화가이자 숲생태 연구가이다. <식물탐정 완두>는 추리 만화 형태의 스토리로 식물의 생태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주인공 강완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건을 여러 식물의 특징을 파악함으로써 해결한다. 황씨는 2003년 한겨레신문에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룬 <상위시대>를 연재하기도 했다. 작품 활동을 하는 틈틈이 숲 해설에도 나서며 일과 놀이의 접목을 꾀한다.
어린이 만화 쪽에서는 임덕영씨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어린이 만화 학습지와 과학 잡지에 <미션 키트맨> <별난 가족> 등을 연재하는 임씨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만화 100주년 전시회에서 ‘툰토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툰토이란 만화 주인공들을 재미있게 입체화한 캐릭터 인형을 말한다. 어린이에게 어필하는 토종 만화 캐릭터를 찾기 힘든 터라 임덕영씨의 활동이 더욱 눈에 띈다.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미션 키트맨> 임덕영, <도대체 왜?인구단> 현용민. (맨 왼쪽부터) |
여성 작가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법 판타지 <Ciel>을 만화 잡지 <이슈>에 5년째 연재 중인 임주연씨는 부드럽고 귀여운 그림체와 독특한 캐릭터로 독자에게 사랑받는다. <Ciel>은 일본 만화잡지 <윙스>에도 동시 연재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재일 동포 3세의 일상을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내는 노란구미씨도 주목할 만한 작가다. 2000년 한국에 온 노란구미씨는 미대 재학 중 연습 삼아 그린 만화를 자기 홈페이지(www.koomi.net)에 올렸다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 인사가 됐다. 일본인인 줄 알고 살다가 처음 자신의 뿌리를 알고 충격에 빠진 여동생, 한국에 수학여행 왔을 때 ‘반쪽바리’라며 놀림받았던 일 등 가슴 짠한 이야기들을 특유의 유머와 함께 버무려낸다. 최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내가 결혼할 때까지> 연재를 마쳤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숲으로 떠난 친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로드 만화 <아날로그맨>의 김수박씨와 2000년대판 군대 이야기 <짬>의 주호민씨는 이미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작가다. 지난해 말 ‘7080 한국 가요’를 주제로 엮은 <오늘까지만 사랑해>를 출간한 김수박씨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매우 잘 그려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는 그를 두고 “내가 아는 한 이 나라에서 사람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감정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현실을 가장 깊고 정직하고 재미나게 그려내는 작가다”라고 소개한다.
‘군대를 소재로 한 만화 중 가장 재미있다’라는 평을 받는 <짬>은 무명의 주호민씨를 일약 전국구 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한국 남성 대다수가 겪은 군대 이야기를 깜짝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냈다. <짬> 연재 당시에는 ‘군대를 너무 미화한 것 아니냐’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지난해부터 포털 사이트에 연재한 20대 취업 만화 <무한동력>은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88만원 세대’ 젊은이가 겪는 불안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단순한 그림체를 보고 작가의 실력을 ‘얕봤다가’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다는 독자가 부지기수다. 감정 과잉이 없이 물 흐르듯 이어가는 스토리가 미덕이다.
윤태호씨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유명 작가다. 이미 불혹을 넘긴 그가 ‘주목할 만한’ 작가에 꼽힌 것은 최근 포털 사이트에 연재 중인 웹툰 <이끼>의 인기 덕분이다.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물인 <이끼>는 치밀한 스토리와 인상적인 캐릭터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강우석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최규석씨 역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의 호평을 받으며 젊은 나이에 ‘거물’로 우뚝 선 작가다. 최근 1987년 6월항쟁을 다룬 <100℃>를 오프라인으로 펴냈다.
물론 여기 소개된 작가가 다는 아니다. <삼국전투기>의 최훈씨, <입시명문 정글고>의 김규삼씨, <내일은 괜찮아>의 김의정씨 등 주목할 만한 작가가 넘쳐난다. <시사IN>이 소개한 작가 중 한 명에 꽂혀 작품을 읽노라면 고구마 줄기 캐듯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을 줄줄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만화에 관심이 없었던 이라면 뜻밖의 다양성과 풍부함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단, 한 가지는 잊지 말자.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나은 작품을 그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작가의 고단한 노동을. 그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를 하자.
불편한 이야기를 그린다
만화 <삼봉 이발소>는 하일권 작가(27·사진)가 대학 시절에 그려서 2006년 파란 웹툰에 연재한 작품이다. 당시 조회 수 총 1000만 회를 넘기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하 작가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하 작가는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 독자와 만화 전문가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왕따 소년이 로봇을 사랑하거나(<3단합체 김창남>) 괴물을 퇴치하는 능력을 갖춘 영웅들이 월급쟁이 회사원으로 사는 모습을 그리는(<히어로 주식회사>) 등 참신한 소재를 잘 다루고, 캐릭터나 풍경을 예쁘게 표현해낸다는 평을 받는다. <삼봉 이발소>와 <3단합체 김창남>은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보스의 순정>은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다시 만들어질 예정이다.
웹툰 사이에서 하 작가의 작품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뭘까. 그는 “조금은 불편한 얘기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대다수 작가가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생활공감형 웹툰’을 그리는 데 반해 자신은 외모 콤플렉스나 왕따 현상 같은 ‘조금 아픈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3단합체 김창남>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왕따 주인공 ‘호구’가 반 학생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다. 호구와 처지가 비슷한 옆반 친구는 심지어 옥상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일부 독자들은 이 만화를 보고 “짜증난다. 기분 더럽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하 작가는 그래도 계속 예쁜 이야기만 그리지만은 않겠다고 했다. “따돌림, 소외, 구타, 이런 것들은 분명 우리 주변에 있는 일들이잖아요.”
‘스크롤 만화’ 넘어설 새 문법 궁리하라
ⓒ전문수 웹툰은 모니터를 벗어나 다양한 통로로 진화하는 중이다. 위는 PMP로 웹툰을 보는 시민. |
하지만 웹툰은 점차 모든 흐름이 포털 중심으로 흐르고 말았다. 독자의 호응을 끌어낼 창구와 원고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다보니 생긴 일이다. 명색이 ‘시장’이라 불릴 만큼 만화판을 주도하는 회사가 네이버·다음·야후 등 세 곳에 지나지 않으면서 이런 포털 중심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유료 웹툰을 시도한 바 있는 <만끽>이 1년여 만에 문을 닫은 사실은 국내 인터넷에서 콘텐츠 업체가 비포털·유료 전략을 택하는 게 얼마나 무리한 일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수익(페이지뷰)을 좇기 마련인 포털 사이트에서 페이지뷰를 높이지 못하는 장르의 작품은 서서히 자리를 잃어간다. 결국 웹툰은 포털이 아니면 돈을 만들고 돌릴 수 없다는 결론을 떠안은 채로 몇 안 되는 판 안에서 자기 복제를 거듭하는 정체기에 빠지고 만다.
웹툰의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미디어 다음은 2007년 웹툰이 표현할 수 있는 연출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웹툰의 기본 가로 너비를 확장하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넓어진 기본 너비를 연출을 확장하는 데 쓰는 작가는 거의 없었다. 결국 새 환경에 맞는 연출과 기법을 연구하며 탄생한 웹툰이 더 이상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출판만화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성 작가들이 기본기를 앞세워 웹툰 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일까. 요즘 포털은 영향력 면에서 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요즘은 오히려 블로그를 통한 활동이 대세인 형편이다. 포털은 점차 시장 안팎에서 ‘플랫폼’이 아닌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존 주류 출판시장과 포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방향을 찾는 사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카툰 연재 갤러리에서 인기를 끌었던 웹툰 작가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세계대전 만화>가 포털 연재를 통하지 않고 책으로 묶여 나오며 인기를 누렸던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일반적인 PC 기반 웹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디지털 기기 환경의 변화가 웹툰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큰 격변을 예고하는 중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미미하지만 준 PC급의 성능을 지닌 휴대전화인 스마트폰을 비롯해 넷북·전자종이· PMP· IPTV 등 다양하고 새로운 디지털 환경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다. 그중 스마트폰 쪽이 활용성 측면에서 주목된다.
디지털 환경의 변화로 만화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위는 만화 전문 서점. |
스마트폰은 전화 기능뿐 아니라 게임·사무용 프로그램 등 매우 다양한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다. 스마트폰 콘텐츠의 유통 공간으로는 앱스토어가 유명하다. 앱스토어(www.apple.com/iphone/appstore)는 매킨토시로 유명한 애플사가 자사 휴대전화 아이폰과 MP3 플레이어 아이팟에서 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누구나 제작해 올리고 유료로 판매할 수 있게끔 만든 온라인 시장이다. 개설 9개월 만에 전 세계 다운로드 횟수 1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운 애플 앱스토어에서는 프로그램뿐 아니라 뷰어에 탑재한 작품도 팔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작가 또는 기획집단이 직접 독자를 만나고 유료로 자기 작품을 팔아 수익을 낼 수 있는 창구로 인기를 누린다.
웹툰이 끌어냈던 문법적 자산은 이미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포털이 설령 더 이상 웹툰을 취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라질 흐름이 아니다. 그러나 좁은 시장과 작가들의 연구 미비는 웹툰을 몇몇 선각자가 마련해놓은 ‘스크롤 만화’라는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제 눈앞의 큰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웹툰이 전부가 아닌 시대가 오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산을 조금 더 연구해, 디지털 만화라는 화두를 새롭게 끌어안아야 할 때다. 국내에서도 이미 강풀·윤태호·양영순·박철권 등 유명 작가가 뭉쳐 만든 저작권 전문 회사 ‘누룩미디어’가 주목받고 있다. 누룩미디어를 비롯한 여러 에이전시 집단도 ‘포털 웹툰 이후’를 준비하며 사업 다각화를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서울 상도동에 있는 만화 전문 매장 ‘코믹커즐’. 1층에는 카페가, 2층에는 서점이 자리 잡았다. |
전혀 ‘만화스럽지’ 않은 동네에 ‘만화 같은’ 공간이 있다. 2007년 3월 서울 상도동에 문을 연 만화 전문 서점·카페인 코믹커즐. 코믹(만화)과 커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공간의 위치는 사실 좀 생뚱맞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고, 만화가들이 모여 살거나 작업하는 동네도 아니다. 한산한 도로변에 위치한 코믹커즐 건물은 원래 이불집이었다. “이곳에 한국 최고의 만화 전문 매장을 만들어달라”는 학산문화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온 일본 만화서점 관리 전문가 노다 마사토 점장(42)이 가게 입지를 보고 놀랐을 만도 하다.
이불 가게는 2년 만에 훌륭한 만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층에는 카페가, 2층에는 만화 서점이 꾸며져 있다. 만화 캐릭터 피규어와 인형이 곳곳을 장식한 1층 카페에서는 커피와 함께 국내외 만화책 시리즈의 첫 번째 권만을 따로 모아(80여 권) 즐길 수 있게 했다.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낄낄거릴 수 있는 만화방은 아니다. 1권을 보고 내용이 궁금해 몸이 근질거린다면 2층 만화 서점에서 만화책 세트를 살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면에는 국내외 유명 만화가들의 친필 사인이 가득 걸려 있다.
코믹커즐의 진짜 매력은 2층 서점에 있다. 오래된 만화 서점에 비해 권수는 적지만, 진열된 만화책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여 있다.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표지 그림이 보이게끔 무조건 앞면이 보이도록 배치한다”라는 매장 원칙에 따라 만화책은 모두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 작품마다 붙은 POP 광고물은 모두 점장과 점원들이 그리고 오려붙인 ‘또 하나의 작품’이다.
만화 콘셉트 카페 ‘한잔의 룰루랄라’(위)에서는 만화와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한잔의 룰루랄라’
보통의 ‘만화 카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인테리어에 조금 신경 쓴 만화방이 아니라, 아예 만화를 콘셉트로 잡고 꾸민 ‘제대로 된 카페’이다. 만화 편집자와 만화잡지 기자로 일한 이성민씨(37)가 ‘한잔의 룰루랄라’ 주인장이다. “홍대 앞에서 카페를 차리려면 색깔이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잘 알고 좋아하는 만화를 끌어왔다.
대충 만화책 몇 권 갖다 놓고 구색만 맞춘 게 아니다. 들어오는 입구부터 만화 잡지와 동인지를 깔아놓고 “무료로 가져가라”는 팻말을 세워두었다. 메뉴판에도 만화를 그려놓았다. 만화가들이 와서 편하게 작업하라고 넓은 탁자를 고르고 라이트박스(조명상자)도 갖다 놓았다. 곳곳에 꽂힌 만화책 500여 권을 뒤적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놓인 만화책은 손님이 자꾸 집어가 분실되지만 이곳 만화책은 손님이 한 묶음씩 기증해줘 나날이 수가 는다. 허영만의 <오! 한강>과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 등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옛날 만화책도 볼 수 있다. 주인장 이씨는 만화에 나오는 요리법을 응용해 ‘오늘의 만화 요리’ 같은 메뉴를 개발할 궁리도 하고 있다.
‘한잔의 룰루랄라’는 만화 전문 서점 ‘한양툰크(툰크샵)’ ‘북새통’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다. 한양툰크에서 만화책을 사면 ‘룰루랄라’ 1000원 할인 쿠폰도 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현재 공사 중)에서 세븐스프링스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곳들을 찾을 수 있다.
한국만화박물관·만화의 집
경기도 부천시 부천만화정보센터에 위치한 한국만화박물관은 한국 만화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박광현의 1950년작 <최후의 밀사>를 비롯해 1950~1970년대 희귀 만화 1208점이 소장돼 있다. 유명 만화가가 쓰던 필통과 화구도 고스란히 모아놓았다. 열람실에서는 100년 역사를 채운 한국 만화 작품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도 있다. 서울 남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안에 마련된 ‘만화의 집’도 한국만화박물관과 비슷한 곳이다. 무료로 입장해 옛날 희귀 만화부터 최신 작품까지 실컷 뒤적일 수 있다.
100년 역사를 한눈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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