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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찰의 자존심 황운하 총경

醉月 2009. 6. 15. 08:55

한국 경찰의 자존심 황운하 총경
“경찰은 정치권력에 굴종하고 알아서 기는 습성 버려야”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 경찰개혁의 선봉장이냐 위험한 돈키호테냐
● “성매매 없는 ‘클린 대전’에 목숨 걸었다”
● 다양한 경험과 조직 안정 위해 첫 승진시험 거부
● “정치권력, 검찰권력, 언론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 “노무현 정권의 수사권 독립 추진 중단에 배신감”
● “‘촛불시위 유모차 부대’ 수사 무리한 면 있었다”

 
 

한국 경찰은 정치권력의 주구(走狗)다. 한국 경찰은 검찰의 종이다. 한국 경찰은 언론의 밥이다….

황운하(黃雲夏·47) 총경은, 조금 과장하자면 경찰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을 깨고자 분연히 일어선 독립군이다. 위계질서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경찰 조직에서 그는 돈키호테처럼 창을 휘둘러왔다. 조직에서 튀면 이단아, 꼴통이라 불린다.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혼자 외치면 꼴통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그래서 꼴통은 외롭다. 욕먹기 일쑤다. 하지만 의식 있는 꼴통은 그 외로움과 비난을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고스란히 껴안고 살아간다. 그 길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정신의 바닥에는 강렬한 프라이드와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

현직 경찰관 중 황 총경만큼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사람도 없다. 자부심 가득한 경찰대 1기 출신인 그는 경찰 지휘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거의 유일한 경찰간부다. 그 대가는 ‘당연히’ 인사상 불이익이었다. 2006년 대전서부경찰서장이던 그는 경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지휘부가 수사권 독립에 미온적”이라고 비판한 직후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좌천됐다. 2007년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사건에 대한 수사 축소 의혹과 관련해 이택순 경찰청장의 사퇴를 주장했다가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황운하라는 이름이 경찰 안팎에 알려진 것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6월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그는 검찰에 파견된 소속 경찰관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 경찰관이 검찰에 파견돼 수사를 보조해야 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상 초유의 ‘항명’ 사태에 검찰은 당황했고 경찰은 환호했다. 경찰 수뇌부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거침없는 행보를 주시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다뤘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몇몇 매체는 인터뷰 기사까지 실었다. 비급(秘·#54622;)을 품고 중원에 홀연히 나타난 무림고수처럼, 황운하는 그때부터 경찰수사권 독립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조직의 상부에서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으나 하부에서는 경찰개혁의 선봉장으로 떠받들어졌다. 누군가는 그에게 ‘수사권 독립군’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성매매업소 뿌리 뽑겠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사권 독립투쟁사는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최근 얘기부터 해보자. 3월 하순 그는 대전중부경찰서장에서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으로 전보됐다. 수사권 독립투쟁의 전사(戰士)가 생활안전과장이라니.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를 만난 5월11일, 대전은 후텁지근했다. 역에서 10분쯤 걸으면 경찰청에 도착한다는 그의 권유에 따라 택시를 타지 않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5분‘씩이나’ 더 걸렸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사진기자에게는 고역이었다.

대전경찰청은 현재 청사가 따로 없어 모 증권회사 건물에 세 들어 있다. 이곳이 본관 턱이고 인근에 있는 폐교 건물이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2년 전 충청남도경찰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 청사를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황 총경의 얼굴은 몇 년 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으로 일할 때와 비교하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는―내 생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생활안전과 직원은 정복 근무가 원칙이라며 정복으로 갈아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원칙과 규정을 준수하는 그답다. 그가 사람들에게 고지식하고 반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텐데, 그의 언행은 과격한 글과는 달리 점잖고 온순한 느낌을 준다.

그는 수사통이다. 경정 시절 서울 시내 여러 경찰서의 형사과장을 지냈다. 대형사건 수사를 통해 경찰이 검찰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음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그는 지난 인사 때 수사부서, 곧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장과 수사과장을 지원했다. 지방 경찰서장을 두 차례나 지냈기에 서울로 들어갈 순번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상부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그를 서울로 불러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사와는 관련 없는 부서로 보냈다.

“지방청 참모는 처음이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더라. 서장을 할 때는 관할구역 내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유천동 성매매 집결지를 단속하면서 유성과 둔산 지역의 성매매업소는 건드리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비효율적이고 형평성에도 어긋났다. 그렇지만 내 관할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대전 전역에 걸쳐 단속할 수 있다. 대전 전역에 파급효과가 미치는 경찰 시책을 펴나가는 것에 대해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있다.”

   

2008년 7월 대전 유천동 성매매 집결지 해체를 진두지휘한 황운하 총경.

‘부당한 인사’에 이골이 난 탓일까. 원칙주의자적인 기질 때문일까. 속내야 어쨌든 자신의 뜻이 무시된 인사에 대해 그다지 낙담하지 않는 태도다. 하긴 생활안전과장 발령을 얼토당토않은 인사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게 그의 말마따나 업무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밤길 조심하라”

생활안전과의 주요 업무는 성매매업소와 불법오락실 단속이다. 지난해 그는 대전중부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속칭 ‘방석집’으로 유명한 유천동 성매매집결지를 해체하는 성과를 거뒀다. 몸이 몇 개로 잘려도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뱀처럼 여간해 근절되지 않는 게 성매매업소지만, 적어도 유천동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당시 그의 활약상을 보도한 일간지 기사 중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번 단속이 관심을 끄는 것은 경찰이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이 거리의 완전 해체를 공언한 데다 황 서장이 경찰 내부에서 소신파로 통하는 인물이기 때문.”(동아일보 2008년 8월1일자)

황 총경이 새 임지로 와서 내건 표어가 ‘성매매 없는 클린 대전’이다. 성매매 유형은 업소형과 비업소형으로 나뉜다. 업소형은 안마나 마사지 등의 간판을 내걸고 성매매를 일삼는 것이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성매매를 하는 건 비업소형으로 분류된다. 업소형은 다시 전업형과 겸업형으로 구분된다. 전업형은 집창촌이나 마사지업소 등 성매매를 주영업으로 하는 곳이고, 겸업형은 룸살롱이나 안마시술소 등 주영업 행태가 따로 있고 이른바 ‘2차’가 부업인 곳이다.

그가 성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 계기는 뭘까.

“유천동 업소에서 빠져나온 여성들이 여성단체 상담과 언론 접촉 등을 통해 감금과 갈취 실태를 폭로했다. 경찰을 불신하기에 신고나 고소 같은 건 없었다.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경찰은 뭐 하냐’는 소리가 나왔다. 인권유린 실태가 심각한데도 성매매 집결지를 방치하는 건 업소와 유착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비난이었다. 유천동 집결지가 존속하는 한 경찰의 자존심과 명예를 얘기하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재임기간 중 유천동 집결지를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공교롭게도 유천동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중구 산성동의 바로 옆 동네다. 고향친구들 중에 업주의 친구도 있었다. “밤길 조심하라”는 업주의 협박성 발언이 전해졌다. 경찰 내부에서도 냉소적 시각이 있었다. 밖에서는 경찰과 업소의 유착 의혹, 업주의 강력한 저항 등을 들어 실패할 거라 예상했다. 그의 고집을 과소평가한 탓이었다.

그가 진두지휘한 성매매와의 전쟁은 두 달 만에 승리로 끝났다. 30년 전부터 1년 365일 내내 불이 꺼진 적 없던 유천동 업소가 암흑가로 변한 것. 처음엔 서장이 바뀔 때마다 벌이는 의례적 행사로 여겼던 업주들은 황운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서는 하나 둘씩 업소 문을 닫고 떠났다. 네온사인과 대형 간판이 내려지고 반라의 여성들이 ‘진열’돼 있던 쇼윈도가 텅 비워졌다. 경찰의 끈질긴 단속과 지속적인 감시 외에 구청과 세무서, 소방서, 시민단체 등 외곽 단체의 지원사격도 한몫했다. 그 결과 전체 67개 업소가 모조리 문을 닫았고 300여 명의 여성이 떠났다.

“성매매업소는 부패의 온상이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장을 맡으면 강남 지역의 대형 성매매업소를 완전히 거덜 낼 작정이었다.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을 투자한 불법업소를 계속 운영하려면 경찰의 협조가 불가피하다. 경찰이 집요한 로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천동 집결지 해체로 우리 사회 부패의 한 축, 부패의 큰 서식처 하나가 제거됐다. 국민에게 ‘클린 경찰’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황운하 총경이 집무실인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고향에서 두 차례 서장 지내

유천동 업주들 중 일부는 서장이 바뀐 후 영업을 재개할 속셈으로 경찰간부 인사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서장의 임기는 통상 1년. 황 총경이 떠나긴 했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하필 성매매 단속을 총괄 지휘하는 대전경찰청 생활안전과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오는 6월 대전경찰청 신청사가 들어설 지역은 황 총경이 유성과 더불어 2차 성매매 전쟁의 표적으로 꼽고 있는 서구 둔산동이다. 둔산동은 대전에서 가장 번화한 신시가지이고 유성은 관광지다. 연구단지가 많이 들어선 유성구는 전반적으로 청정한 이미지를 풍기는데, 유흥업소가 밀집한 봉명동에 성매매업소가 즐비하다. 두 지역에서 벌일 성매매 전쟁은 유천동과는 다른 양상을 띨 것이라는 게 황 총경의 조심스러운 예상이다.

“두 지역에는 신종·변종 성매매업소가 범람한다. 완전한 근절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업소형 성매매는 뿌리를 뽑으려 한다. 하지만 유천동에서처럼 시민들의 큰 공감을 끌어낼지는 알 수 없다. 유천동 집결지를 척결하는 명분은 인권이었다. 유성과 둔산의 성매매 양상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지역경제 위축을 내세워 경찰의 단속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도 예상된다. 또 안마시술소 단속은 시각장애인들의 생존권과 충돌할 수 있다. 일단 유천동처럼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려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매매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비행환경 속에서 자라나 어쩔 수 없이 성매매 하는 것을 자발적이라고 할 순 없다. 사회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최근 그 지역의 한 안마시술소를 조사했는데, 여종업원을 감금하고 ‘삼촌’들에게 시범이라며 성적 서비스를 강요하고 구타를 자행한 사실이 적발됐다.”

유흥업소에서 ‘삼촌’이란 일본말 ‘기도’라 불리는 관리직원을 일컫는다. 경찰력을 투입해 집중단속을 펼치는 한편 대전시의 지원을 받아 성매매 근절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다는 것이 황 총경의 복안이다. 아울러 구청과 소방서, 세무서 등 유관기관과 협조체제를 구축해 업소들을 압박할 계획이다.

그는 대전에서 경찰서장을 두 차례 지냈다. 2006년 3월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이던 그가 대전서부경찰서장으로 부임한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2006년 1월 경찰수사권 독립을 강력히 추진하던 허준영 경찰청장이 농민시위대 사망사건으로 퇴진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인사이동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수사구조개혁팀에서 더 일하길 바랐지만 새 수뇌부는 그의 열정을 식히기로 결정했다. 이후 수사권 독립운동은 추동력을 잃고 표류하다 결국 흐지부지됐다.

   

 

2007년 8월29일 무궁화클럽 전현직 회장단이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황운하 총경에 대한 징계를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모범생

황 총경은 생애 첫 경찰서장직에서 6개월 만에 하차했다. 수사절차 문제로 대전지검과 갈등을 빚고 수사권 독립에 소극적이던 경찰 지휘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 원인이었다. 한직인 경찰종합학교에서 1년6개월간 ‘묻혀 지내던’ 그는 2008년 3월 또다시 대전 지역의 서장으로 부임했다. 이번엔 중부경찰서장이었다. 두 차례나 같은 도시의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인사다. 그런데 이번엔 자원이었다. 모친의 병을 수발들기 위해서였다. 폐암 통보를 받은 모친은 그가 부임한 지 2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는 모친에 대해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두루 좋은 평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합리적이고 지혜로워 분쟁 조정에 능숙했다고 한다.

황 총경은 대전이 고향이긴 하지만 토박이는 아니다. 그의 집안이 대전에 터를 잡은 것은 6·25전쟁 때다. 황해도가 고향인 그의 부친이 구월산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 월남했던 것.

3남1녀 중 막내인 그의 저항적인 기질은 어릴 때부터 돋보였다.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모범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부모나 교사 말도 잘 듣는 편이었지만, 한번 틀어지면 좀처럼 돌아서지 않았다. 아버지 상에 놓인 반찬을 먹다 꾸중을 들으면 아예 밥 먹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친구와는 여간해 화해하지 않았다.

고교 2학년 때는 교사와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 두들겨 맞기도 했다. 윤리시험에 단답형 주관식 문제가 출제됐는데, 황운하가 쓴 답은 윤리교사가 제시한 정답과 달랐다. 황운하는 “이것도 답이 되지 않느냐”고 따졌다. 교사가 아니라고 했으나 황운하는 “내 생각엔 이것도 맞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나중엔 “선생님이 틀린 것 같다”며 정면대결을 벌였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윤리교사는 황운하를 교무실로 불러 매질을 했다.

그의 부친도 동네에서 고집 세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선 물러서지 않았다. 소년 황운하는 아버지가 사람들과 싸우는 걸 자주 목격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편이었다. 반 학생들을 경제적 척도로 상중하로 나눌 경우 하에 속했다. 부친은 지역 신문사를 그만둔 뒤 막노동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갔다. 자존심이 강해 남 밑에서 고분고분 일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나중엔 자신의 형이 운영하는 과수원 일을 거들기도 했다. 부친은 2004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황운하는 중학교 때 전교 10등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대전 최고의 명문인 대전고에 한 해 40명씩 진학했다. 우등생이던 그는 뜻밖에도 대전고 입학시험에 떨어져 후기인 서대전고에 들어갔다. 거기서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무렵 경찰사관학교를 표방하고 탄생한 경찰대는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큰 서광이었다. 당시 경찰대 커트라인은 서울대 중위권 학과와 비슷했고 고려대 법대보다 높았다.

“꼭 가난 때문에 경찰대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10·26사태가 터진 고2 때 ‘신동아’와 ‘월간조선’을 사서 읽을 정도였다. 과외가 금지된 고3 때는 이념서적에 가까운 ‘민주주의의 자살’ ‘민족경제론’ 따위를 탐독했다. 경찰이 되면 사회문제를 직접 다루면서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진만 해서 뭐하냐”

경찰대 3학년 때 형사소송법을 배우면서 그는 수사권 문제에 눈을 떴다. 수사권 독립이 조직의 숙원이라는 점을 알게 됐고, 그 염원을 이루는 것이 경찰대 1기생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여겼다.

경찰대를 졸업하면 초급간부인 경위 계급장을 단다. 2년이 지나면 경감 승진시험 기회가 주어진다. 그를 비롯한 1기생들은 졸업 직후 모임을 갖고 향후 5년간 승진시험을 보지 않기로 결의했다.

“‘조직원으로서 분노할 만한 당면과제가 쌓여 있는데 승진만 해서 뭐하냐. 승진 빨리 하기 위해 경찰대에 들어온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동기생이 2년 후 첫 승진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반면 제때 시험을 봐 승진한 몇몇 동기는 이후 진급에서 다른 동기들보다 한두 단계 앞서나갔다.”

경찰대 졸업생은 매년 120명. 졸업 후 24년이 지난 1기생들의 평균 계급은 총경. 그중 2명은 경찰에서 셋째로 높은 계급에 해당하는 치안감까지 진출했다. 희귀한 경우지만 아직 경위 계급장을 단 1기생도 있다. 24년 동안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경찰에선 계급정년제가 경정부터 적용된다. 참고로 경찰관 계급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경무관-치안감-치안정감-치안총감(경찰청장)이다.

고속승진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1기생들은 초급간부 시절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는 뜻에서 최소한 경위 5년, 경감 5년은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황 총경의 경우 경위로 6년, 경감으로 4년을 보냈다.

“1985년에 졸업해 1995년에 경정을 달았는데, 그것도 일반 경찰관에 비하면 빠른 승진이었다. 33세에 경정이 됐으니. 경찰대 출신은 여러 부서를 돌면서 조직에 기여해야 한다. 경무관 승진은 50세 이후에나 하고. 그래야 조직이 안정된다.”

경찰 안팎에서는 경찰대 폐해론, 나아가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승진 특혜, 사조직화, 엘리트주의로 인한 출신 간 갈등 심화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이에 대한 황 총경의 반박이다.

“허준영 전 청장도 말했듯 어느 조직이든 발전을 주도하는 핵심그룹이 있게 마련이다. 또 어느 조직이든 우수자원의 확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경찰대 출신이 경찰조직의 중추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직 발전에 기여하는 바도 크다.”

   

2007년 11월 경찰종합학교 교정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한 황운하 총경의 아내와 딸이 교정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통제가 아니라 지배”

그는 경찰의 당면과제로 3가지 독립을 꼽았다. 먼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정치권력은 경찰을 이용하지 말아야 하고 경찰도 권력에 알아서 기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통치권은 존중돼야 하지만 그것이 경찰의 중립성을 해쳐선 안 된다. 한국 경찰은 전통적으로 센 권력에 굴종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정치권력의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에 대해선 수뇌부가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한국 경찰 수뇌부 중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반면 일본의 역대 경찰 수뇌부 중에는 정치권력과 맞서 싸운 인물이 많다. 일본에서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가 정치권력과 경찰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한다. 경찰 고위직 임명과 해임 과정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우리도 비슷한 기구로 경찰위원회가 있지만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두 번째는 검찰권력으로부터의 독립. 한마디로 수사권 독립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본과 언론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수사지휘권을 가진 검찰이 경찰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경찰을 지배하려 한다. 통제가 아니라 지배다. 또 언론은 경찰을 함부로 공격한다. 비판 수준을 벗어나 모욕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나 검찰에 철저히 무시당하는 경찰이 국민한테 존중받을 순 없다. 자긍심이 부족하면 사고를 많이 칠 수밖에 없다.”

초급간부로 근무하면서 그는 경찰대 재학 중 이론적으로 인식했던 수사구조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꼈다.

“1992년 대전동부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일하면서 경찰 수사가 무시당하고 불신받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워 반드시 내 손으로 이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했다. 검찰의 행태는 수사 지휘가 아니라 경찰에 대한 전인격적인 지배였다. 그런 현실에 피가 끓어올랐다. 수사권 독립과 조직개혁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충돌이 빚어졌다. 그 때문에 종종 불이익을 받았으나 내 신념을 양보할 순 없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그는 행동으로 그의 신념을 지켜왔다. 1999년 ‘검찰 파견 경찰관 복귀명령’으로 파문을 일으킨 그의 이름이 또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3년 1월. 당시 경찰대 총동문회장이던 그는 경찰대동문회 홈페이지에 경찰 수뇌부를 맹렬히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수뇌부가 “수사권 독립에 소극적”이며 “패배주의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게 요지였다. 당시 사건에 대해 그는 “성공적이었고 보람을 느꼈다”고 자평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대선공약이었다. 내가 글을 올린 시점은 경찰청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수사권 문제와 관련한 보고를 하기 직전이었다. 경찰 수뇌부가 절도와 폭력, 교통사고 등 민생범죄 수사에 국한해 검찰 지휘를 받지 않겠다는 방안을 마련했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전을 짰다.”

‘거사’는 성공했다. 그의 글이 언론에 보도되는 바람에 경찰 내 여론이 들끓자 수뇌부가 방침을 바꿔 전면적인 수사권 독립 추진으로 돌아선 것이다.

 

“검찰의 호송지시를 거부하라”

경찰개혁에 대한 그의 꿈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허준영 전 경찰청장이었다. 허 전 청장은 2005년 2월 경찰청에 수사구조개혁팀을 신설하고 팀장에 황 총경을 임명했다. 황 총경은 자신의 염원이던 경찰수사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여한 없이 일했다. 팀원들과 매일같이 회의하고 토론하고 보고서와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한편 언론과 국회, 학계, 법조계 인사들을 상대로 왕성한 홍보활동을 펼쳤다.

이 시절 그는 전국 경찰서에 검사가 직접 수사하는 사건의 피의자에 대한 호송지휘를 거부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이 사건 역시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검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경찰청은 5일 만에 이 지시를 보류했다. 하지만 강릉경찰서 장모 경정이 이 공문에 의거해 검찰의 피의자 호송지시를 거부했다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6년 3월 대전서부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그의 독립군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구속 전 피의자를 검찰청사에 인치하라는 대전지검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번에도 황 총경의 무기는 법이었다. 경찰이 검찰의 피의자 인치 요구를 따라야 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 9월 들어선 대전지검이 절도 미수 피의자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 전(前) 면담을 요구하자 이 또한 법률적 근거가 명확지 않다며 거부했다.

그 와중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던 검찰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황 총경은 이에 동조해 경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검찰 지휘부가 수사권 독립에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황 총경 문제로 검찰의 항의에 시달리던 경찰 지휘부는 마침내 그를 인사조치했다. 서장 임기가 6개월 남은 상태에서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발령 낸 것. 이택순 당시 경찰청장은 기자들에게 “경찰간부로서 할 말이 있으면 계통과 체계를 밟아서 내부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도리”라면서 “현장으로 내려간 지휘관이 맡은 일에 주력해야지 노점상처럼 소리를 질러서야 되겠느냐”고 황 총경의 언행을 비판했다.

황 총경에 대한 징계성 인사에 대해 경찰 내 여론은 엇갈렸다. 경찰 내부통신망에는 “지휘부가 검찰에 굴복했다”는 중·하위직 경찰관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반면 고위간부들 사이에선 “황 총경의 ‘튀는 언행’이 수사권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처럼 그의 언행은 늘 경찰의 화젯거리였다. 마치 골프대회를 쫓아다니는 갤러리들처럼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한국경찰의 자존심’으로 떠받들며 방패막이로 나섰다. 2007년 8월 한화 사건과 관련해 경찰청장 퇴진을 주장한 그에 대해 경찰 수뇌부가 징계 방침을 정하자 현직은 물론 전직 경찰관들까지 반발하고 나섰다. 전·현직 경찰관 모임인 무궁화클럽은 기자회견을 열고 황 총경에 대한 징계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경찰대 총동문회와 개혁성향 중·하위직 경찰관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폴네띠앙도 크게 반발했다. 애초 강도 높은 중징계 방침을 천명했던 경찰 수뇌부는 이에 굴복해 ‘감봉 3개월’이라는 경징계를 내렸다. 조직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게 징계사유였다.

 

“열정이 없으니 비겁해진다”

황 총경이 그토록 염원했던 수사권 조정은 노무현 정부에서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는다. 경찰 내부도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약자(경찰)에 대한 동정과 강자(검찰)에 대한 견제심리로 경찰수사권 독립에 우호적이던 시민단체나 학계, 정치권, 경찰 유관단체 등 외곽의 지원사격도 멈췄다. 황 총경의 쓰라린 진단이다.

“참여정부 시절이 수사권 조정의 적기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검찰개혁 의지가 강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검찰권을 견제하기 위해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과 상설특검제 도입을 검토했다. 검·경의 수사권 조정도 검찰개혁 방안 중 하나였다. 임기 말 노 대통령이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수사권 독립과 관련해 ‘나는 하려 했는데 여러분의 조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언급하는 걸 보고 배신감이 들었다. 대선 때 경찰 표를 의식해 공약으로 내걸었을 뿐 수사권 조정에 대한 깊은 철학이나 실천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검찰의 강력한 반발을 제압하려면 청와대와 의회권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회도 검찰에 포위돼 있었다. 수사권 조정에 관한 법률안은 검사 출신들이 포진한 법사위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 잇따른 경찰관 비리사건과 청와대 행정관 로비사건, 장자연 사건 수사에 대한 실망감이 겹치면서 경찰의 수사력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센 권력에 약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나한테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내가 자꾸 수사부서에 가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과 같은 왜곡된 수사체계에서는 경찰 수사력이 향상할 수 없다.”

그에게 경찰수사권 독립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경찰관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자 삶의 목표다. 그는 이와 관련해 경찰 내부에 팽배한 패배주의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국민 신뢰가 우선돼야 한다는 시기상조론이나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상황론은 비겁함과 소신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소신이 부족하니 열정이 안 생기고 열정이 없으니 비겁해진다. 수사권 독립이 정치권력의 선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시각도 문제다. 전략적 고려가 아니라 수사권 조정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소신이 부족해 하는 얘기다. 그런 논리라면 영원히 이룰 수 없다. 경찰 내부 동력이 결집되지 않는 게 안타깝다.”

그렇다고 그가 비관론에 함몰된 건 아니다. 그는 “결국 수사권 독립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낙관했다. 우리 사회가 각자의 자율적 영역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희망의 근거다. 그는 “수사권 독립이 이뤄지면 경찰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권력자 눈높이에 맞춘 법집행

2008년 들어와 그는 경찰 안팎의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었다. 그가 모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진압과 종교 편향 시비 등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어청수 당시 경찰청장을 감쌌다는 이유에서다. 네티즌들은 그가 경찰 내부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 청장을 옹호한 것은 경찰 이기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하며 그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표출했다. 경찰 내부의 공감대와 국민의 공감대가 일치할 수는 없는 법인데 황 총경답지 않게 국민의 정서보다 경찰의 정서를 앞세웠다는 것이다. 그의 반론을 들어보자.

“이택순 청장 퇴진을 요구할 때는 경찰 내부에서도 그의 행동을 부끄러운 처신으로 간주하고 조직의 명예를 위해 퇴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어청수 청장의 경우 달랐다. 조직 내부에서 퇴진 사유에 공감하는 여론이 조성되지 않았다. 물론 경찰 내부 공감대가 국민의 공감대보다 중요하진 않다. 그렇다고 특정세력이 청장을 물러나라 할 때마다 갈아치우면 임기제 청장의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는 결코 조직 보호 논리가 아니다. 정치적 공방에 의해 임기제가 무력화되는 건 막아야 한다. 사실 조직 내 신망도로 치면 어 청장보다 용산참사로 취임조차 못한 김석기 청장 내정자가 훨씬 더 높았다. 그렇더라도 어 청장을 밀어내고 취임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지난 2월 경찰 고위직 인사 두 사람의 상반된 퇴임사가 화제가 됐다. 용산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퇴임사에서 “경찰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불법과 불의에 더욱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경찰의 강경진압이 정당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경찰을 떠난 박종환 전 경찰종합학교장은 “법질서 확립을 강조한다고 해서 현장에서 법집행을 함에 있어 무조건 강경대응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공권력 남용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황 총경은 상반된 두 퇴임사에 대한 의견을 묻자 “두 분 다 상관으로 모셨다”며 곤혹스러워했다. “법질서 확립과 인권 보호는 경찰을 이끄는 수레의 두 바퀴”라는 원론적인 말부터 꺼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인권 쪽에 더 비중을 뒀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법질서 확립과 엄정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한다. 두 쪽의 얘기가 다 맞다. 정당한 법집행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박종환씨의 얘기는 6명이 희생된 용산참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좀 더 철저한 안전대책을 세우고 진입했더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경찰의 강경진압이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을 의식한 탓이라는 여론도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참가자들을 수사하면서 이른바 ‘유모차 부대’를 조사해 과잉수사라는 비난을 들었다. 순수한 주부들이 아니라 일부 불순세력이 아기들을 방패 삼아 운동권 방식으로 투쟁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대해 황 총경은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태도라기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코드 맞추기로 비친 면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판론자들에게는 국민의 눈높이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으로 비쳤다. 그 점에서 촛불시위 수사과정에 무리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법질서 확립은 경찰의 당연한 의무다. 지난 정권의 공권력은 무력했고 반대로 지금은 강경일변도다. 경찰이 균형감각을 갖고 국민의 공감을 얻는 법집행을 해야 한다. 권력은 결코 경찰의 편이 될 수 없다. 경찰의 지지기반은 힘없고 돈 없는 사회적 약자다. 경찰이 평소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용산참사 때 그토록 비난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1년간 집무실에서 숙식 해결

직무에 대한 그의 책임감은 ‘오버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투철하다.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을 맡았을 때는 1년 동안 집에서 잔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숙식을 집무실에서 해결했다. 야전침대가 그의 잠자리였다. 주말에만 집에 들러 빨랫감을 갖다놓고 새로운 옷가지를 챙겨왔다.

“경찰의 60년 숙원사업을 우리 팀이 맡았다는 데 큰 압박감을 가졌다. 검찰이라는 거대 권력과 싸우는 것이라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의 심정이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며 그도 대단하지만 그의 아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의 집은 서울 명일동에 있는 전세 아파트였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공식적인 외박’을 일삼는 동안 대전에 있는 친정집과 전남 목포와 서울 목동에 있는 두 여동생 집에 번갈아가며 머물렀다.

“언론보도를 통해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나서 이해해줬다. 당시 딸이 첫돌을 맞았는데 주변에 알리지 않고 우리끼리 조용히 치렀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99년. 황 총경의 경찰대 후배인 이모 경정이 다리를 놓았는데, 만난 지 100일 만에 결혼에 이르렀다. 나는 그가 팔불출의 전형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착하고 예쁘고 이해심 많은 아내는 남자들의 로망 아닌가. 그런 여자를 찾느라 결혼이 늦어졌는데, 딱 들어맞았다.”

내 짐작대로 그의 장모는 결혼에 반대했다고 한다.

“직업도 별로인데다 인상도 맘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상견례 때 내 표정이 굳어 있어서 무서운 느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당시 일선서 형사과장을 맡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상한 이미지의 사위를 원했는데 그렇지 않으니 실망스러워하셨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생각이 달라지셨다.”

 

“착하고 예쁘고 이해심 많은 여자”

그는 3월1일에 결혼한 데 대해서도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검찰로부터 경찰이 독립한다는 뜻으로 삼일절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가 경찰관의 삶이 불안한 건 간부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혼의 달콤한 꿈에 젖어 있어야 마땅한 그해 6월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남편은 검찰과 맞짱을 떴다. 앞서 소개한 검찰 파견 경찰관에 대한 복귀명령 사건이다. 경찰 수사권 독립 투쟁사에 기록될 만한 이 사건으로 황 총경은 유명세를 탔지만 부인은 불안하기만 했다. 공무원 신분이라 안정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검찰이 남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그의 ‘닭살 멘트’를 들어야 하는 고역을 겪었다.

“지금은 이골이 나서 많이 이해해주는 편이다. 정말 장가를 잘 간 것 같다. 남자들이 착하고 예쁘고 이해심 많은 여자를 찾지만 꼭 어느 하나가 안 맞지 않은가.”

그는 아직까지 집을 산 적이 없다. 인사명령에 따라 서울과 지방을 전전하며 전세로만 살아왔는데, 전세자금 중 일부를 빼내 차이나 펀드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했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전세자금 포함해 전 재산이 3억원가량 된다고 한다. 지난 3월 인사 때 서울로 발령 날 줄 알고 미리 목동에 전셋집을 구해놓았다가 다시 물리는 소동도 있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계 진출설에 대해 단호히 부인했다.

“내가 정말 억울한 것이 그런 의심을 받는 것이다. 튀는 행동으로 인지도를 높여 정치권으로 진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얘기는 내 행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나는 경찰관으로서 성공하고 싶을 뿐이다.”

황 총경에 대한 경찰 내 평가는 대체로우호적이다. 그렇지만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특히 고위간부들 사이에서 그렇다. 2006년 9월 그가 경찰종합학교로 좌천될 때는 “영웅주의에 젖은 미운 오리새끼”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개인의 ‘돌출행동’은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혀를 차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로선 억울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염원인 경찰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면 새겨들어야 할 쓴 소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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