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꽃으로 피고 춤추는 설경
일상의 풍경을 부정하는 파조(破調)의 미
눈이 바람에 날린다. 얇고 고운 눈안개 사이로 은은한 양광이 새어나와 바람에 날려 올라간 눈가루를 반짝이고 있다. 하늘에서 보석가루를 뿌린 듯하다. 태백산 정상을 얼마 앞둔 망경사에서 보는 환상적인 광경이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독경 소리를 들으며 어깨와 배낭에 싸인 눈을 떨어냈다. 동쪽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돌부처의 어깨와 머리에 흰 눈이 가만히 쌓여 있다. 맑은 날 울릉도까지 원경을 조망하던 부처도 오늘은 설무(雪舞)만을 응시하고 있다. 앞산은 그 실루엣이 겨우 보일 정도로 운무(雲霧) 속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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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춘이 지난 2월 초순 눈꽃 만발한 태백산을 찾았다. 태백산의 눈은 아직도 고운 질감으로 내리고 있었다. 당골 계곡을 따라 눈부신 설경 속을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어 올라갔다. 걷는 걸음 위로 꽃이파리처럼 난분분 난분분 눈이 내렸다. 오늘은 눈 구경하기 좋은 날이다. 바람도 거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눈을 내려놓는 어두운 구름도 없다. 그저 이리저리 부유하는 싸락눈이 있을 뿐이다.
눈 풍경, 그 파조(破調)의 미학
눈 풍경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수필가 김진섭(金晋燮)이 말하듯이 눈이 내리면 누구나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그게 얼굴에 드러난다. 그러니 눈 오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즐거운 얼굴이다. 눈 덮인 태백산을 오르면서 마주치는 사람들 역시 하나 같이 천진한 웃음을 가득 담은 아이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눈 풍경 중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보는 눈 내린 광경일 것이다. 잠결에 싸아 하는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미 어제와는 전혀 다른 은백색의 세계로 변해있는 광경을 보고는 누구나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간밤의 눈 갠 후 경물이 달랐구나’(어부사시가 중에서)하고 윤선도도 그 감격을 노래했다. 대지와 수목과 건물과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은백색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눈 내린 아침 풍경이 이유 없이 아름답다.
망경사를 나와 천제단으로 오른다. 도중에 단종비각에 이르러서는 잠시 머물면서 지금까지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오른편으로 어렴풋이 산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부쇠봉, 문수봉일 것이다.
어제 본 대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눈 내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이 체험은 풍경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흥미 있는 주제다. 대지 고유의 윤곽선과 색조와 질감을 일순에 감추어 버리고 은백색이라고 하는 단일의 색조와 모서리와 가장자리를 가벼운 설편이 감싸안아 부드러운 곡선으로 드러난 그 풍경을 아름답게 여기는 이 태도는 미술사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술 양식의 구상과 추상의 변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은 미적 감수성의 순환적 원리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설경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다.
설경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일상의 풍경을 타성(惰性)의 풍경으로 폄하(貶下)하고, 이런 일상 풍경의 부정태(否定態)로서 설경을 자리매김하는 데에서 설경이 절경으로 치환된다. 다시 말해서 파조(破調)의 아름다움이다. 이 파조의 미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미니스커트나 샤넬라인 등 새로운 패션의 등장을 떠올리면 된다.
우리가 이런 파조의 풍경미에 동의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속에 있는 혁명의 욕구를 풍경이 대신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상생활과 쳇바퀴를 돌 듯 타성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본인 스스로가 혁신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그 생활의 배경으로 있던 풍경을 하루아침에 일신해버리는 눈에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폭설이 내리는 밤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혁명의 전야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능선에 핀 설화
천제단으로 올라섰다. ‘태백산(太白山)‘이라는 산명을 새겨놓은 검은 비석이 흰 대지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짙은 안개구름이 산정을 뒤덮고 있었다. 간간이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어두워졌다. 눈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산은 따뜻한 흰 모피를 두른 것처럼 따뜻하게 보였다. 보드러운 눈가루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고 가볍게 몸을 뒤척였다.
태백산의 눈은 그 질감이 고운 것이 특징이다. 태백지방 등 동해안은 설이 지나면서 습기를 머금은 함박눈이 내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습설은 보기에 탐스럽지만 이렇게 눈 속에서 설경을 즐기려는 풍경의 순례자에게는 지금 태백산의 눈처럼 습기가 적은 건설이 좋다. 구두 밑창에 늘어붙지도 않아 발길을 옮기면 가볍게 떨어지고, 머리에 내린 눈도 바람결에 날려 달아나 버린다. 어쩌다 미끄러지더라도 툭툭 털면 그만이다. 그래서 눈썰매로 하산해도 좋은 산이 태백산이다.
태백산이 설경의 명소가 된 것도 이런 눈의 건조한 질감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소백산보다도 태백산을 눈 구경의 명소로 치는 이유로 이런 눈의 질을 드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나는 천제단에서 나와 장군봉으로 걸었다. 약 10분 거리다. 곱게 갈아낸 옥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순백의 고원에는 키 낮은 관목이 군식하고 있었다. 태백산 철쭉이다. 가지 끝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것으로 바람 부는 방향을 알 수 있다. 철쭉가지에 흰 눈이 하얗게 붙어 있다. 그 설화 사이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꿈속 같이 아늑한 눈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시계가 좋으면 동해 바다가 보인다는 능선이지만, 오늘은 낮은 눈구름 때문에 산정 평원의 너비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다. 산정으로 몰려오는 짙은 잿빛 구름은 원경의 조망을 방해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이 고원을 원경의 세계와 단절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거절을 의미했다. 그렇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특별한 장소였다. 타자의 눈에 띄지 않는 낙원이었다. 아마 선경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아름다운 곳일 것이다. 그러니 이 설원을 걷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 눈을 헤치고 눈꽃 핀 설원을 걸어오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보았다.
문득 눈이 꽃으로 지천으로 피어 있는 이 고원의 풍경 속에서라면 나는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이곳에 있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산꾼들이 하는 것을 보고서는 대체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그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그 산꾼들의 심정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풍경으로서의 눈
장군봉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눈길을 헤치고 천제단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유일사쪽에서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올라온 사람들이다. 아마 새벽에 도회를 떠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설화 속으로 사라지는 풍경을 환영처럼 보고 있었다.
사실 눈은 손님처럼 불현듯 왔다가 그 해후의 감격이 채 가시기 전에 헤어져야 그 애틋한 감정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래서 눈의 고장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눈이 풍경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내리면 녹지 않는 북쪽지방의 눈은 이내 자명한 일상의 환경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눈 녹는 조춘(早春)의 하루하루가 일상의 부정태로서 인상적인 풍경일 것이다. 그래서 이 태백산의 설경은 새벽기차를 타고 내리는 여행객이나 제대로 그 감격을 맛 볼른지 모르겠다.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떠보니 그곳은 눈의 나라였다더라 하는 식으로.
유일사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사시나무를 배경으로 설편(雪片)이 보여주는 설무(雪舞)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의 풍경을 떠올리며 가급적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ㆍ기고자:강영조 동아대학교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mail.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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