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 산그림자 드리운 맑은 물굽이
평범한 강과 비범한 인경(人境)이 결연한 명풍경
매화가 가득하다. 아직 찬 바람이 지리산 깊은 골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내려와 남쪽에서 밀려 올라오는 봄기운을 막고 있지만, 광양시 섬진 마을은 이미 봄이 가득했다. 아직은 찬 바람이 산기슭에 기대어 서 있는 마을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동쪽 산등성에 서 있는 매화의 개화를 막지는 못했다. 온 산에 매화꽃이 지천이다. 남해로부터 밀려오는 봄이 겨울과 계면(界面)을 이루고 있는 섬진 마을의 풍경이다. 나는 섬진 마을에서 봄기운 만연한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봄을 맞으려는 조바심에 못이겨 섬진강으로 달려왔다. 하동에서 섬진교를 건너 광양시로 접어들자 소담스러운 꽃이 가득 달린 매화나무가 길가에 줄지어 서 있었다. 키 낮은 나무의 잔가지에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은 듯 매화가 피어 있었다.
오백 리 물굽이, 오백 리 강길
봄기운은 겨우내 숨죽이며 긴장한 땅을 녹이고 강물을 느릿하게 풀어놓는다. 아직은 찬 바람이 강 한가운데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미 그 모진 차가움은 누그러져 있었다. 흰 모래가 넓은 강펄을 만들고 있었다. 한 가닥에서 만 가닥으로 퍼지는 것은 산이요 만 구비가 휘돌아 한줄기가 되는 것은 물이라는 소설가 박종화의 말처럼 마이산과 백운산,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모여 섬진강의 강펄을 적시고 있었다.
섬진강은 곡성군 압록(鴨綠)에서 제법 강폭이 넓어져 강다운 풍모를 지니게 된다. 나는 섬진 마을을 나와 861번 지방도를 따라 압록으로 향했다. 보성강이 남원과 곡성을 지나 좁은 물길인 섬진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부터 섬진강 풍경을 차근차근 보려고 한다.
길은 강굽이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조응하며 물가로 내리뻗은 산 능선과 골을 번갈아 들락거렸다. 차창으로 보는 풍경은 차의 속도에 따라 그 표정이 달라진다. 근경은 빠르게 사라지고 원경은 천천히 따라온다. 강은 빠르게 사라지는 근경의 가로수와 원경의 산 사이에서 적당한 속도로 보였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그 때마다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와 섬진강은 마치 댄서처럼 다가섰다가는 멀어지고 다시 만났다.
산 그림자가 강물 위에 드리워져 있는 풍경을 차창 너머로 자주 보았다. 산은 멀리 우뚝 서 있고 그 앞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강둑을 따라 가지런히 서 있는 숲 너머에 마치 산자락에 안기듯이 마을이 들어서 있다. 강을 얕은 다리가 건너고 있다. 물 위에는 먼 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861번 지방도가 구례에 들어서는 문척교 위에서 이 산자수명(山紫水明)의 풍경을 한참이나 보았다.
평범한 아름다움 지닌 강
▲ 저녁 무렵, 섬진강 하구 풍경.
유홍준은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섬진강은 보는 강이지 말하는 강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이 강의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하지만 섬진강만이 아니라 어떤 풍경이든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알다시피 섬진강은 빠른 여울과 깊은 소가 역동적으로 연출하는 화려한 강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도도하게 흐르는 대하(大河)의 풍모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강 건너 강둑에 서 있는 사람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너비의 강폭, 얕은 수심, 그리고 맑은 물과 부드러운 모래, 키 큰 강숲이 둑길 따라 무리지어 서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풍경은 얼마 전만 해도 웬만한 시골 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압록으로 다가가면서 차창으로 가끔씩 낙엽수가 가지런히 서 있고 그 사이에 작은 정자가 물가에 서 있는 풍경도 보았다.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가 '임천고치'에서 ‘산 위에 정자가 있으면 거기에 보는 풍경이 절경임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으레 정자가 있으므로 그림 속에 정자를 그려두면 그곳이 절경임을 암시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그 그림을 보는 우리를 마치 그림 속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그 정자 속에 들어가 그 풍경을 보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마찬가지로, 물가에 서 있는 정자는 그것만으로도 수려한 풍경이지만, 그 정자 속에 들어가서 바라보는 흐르는 물길 또한 절경임을 암유한다. 차 속에 있던 나의 몸이 어느 샌가 그 물가의 정자 속으로 들어가 맑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섬진강은 이런 친수행동을 유발하는 장치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은근하게 마련된 것이 인상적이다.
사실 섬진강은 평범한 강이다.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합수머리에서 모여 강폭을 넓히고, 간혹 길게 뻗어 내려온 산 능선을 만나면 거기서는 물길을 바꾸어 낮게 흐른다. 산골짜기에서 스며나온 물이 능선 자락을 비켜 굽이지고 또 물길 따라 아래로 흐르면서 강펄에 산 깊은 곳에서 운반해온 백옥 같은 모래를 토해놓은 광경은 산하의 지형적 윤회(輪回)가 보여주는 당연한 강 풍경이다.
또 유홍준은 ‘시인 김용택도, 고은도 그랬다’고 하면서 섬진강은 특히 저물녘이 아름다운 강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낙조청강(落照淸江)’이니 ‘석양강두(夕陽江頭)’라는 저물녘의 강 풍경을 양식화한 풍경언어가 이미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스름의 강은 어디든지 대개 아름답다는 것을 이미 양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압록역을 보고 있었다. 때마침 물오리 두어 마리가 황급히 뛰어가듯이 물을 차고 날아오른다. 물에 물새가 철마다 날아와서는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가고 또 회유어가 산란을 위하여 회유하는 것 또한 강으로서는 당연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강을 섬진강 말고 또 하나 더 찾아보려고 하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섬진강의 아름다움이란 강으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강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고 있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이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그 곳에 있는 풍경이다. 그러므로 섬진강은 충분히 아름답다. 평범하므로 찬란한 이 풍경은 그러므로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 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악양면 평사리로 갔다. 넓은 들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서 강이 들을 빠져 나온 샛강을 만나고 있었다.
강보다 강 주변이 아름다운 강
▲ 하동 평사리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섬진강.
아름다운 강의 조건으로 강물의 청명도나 물굽이의 선형, 또는 강펄의 경사나 사질을 들 수 있지만, 거기에다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강 주위의 풍경이다. 평범한 강인 섬진강이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강으로 기억되는 것은 맑은 물과 땅에 순응하여 저절로 굽이지는 물길의 모습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강 주변의 풍경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지리산 깊은 속살에 감추어져 있는 화엄사나 쌍계사 같은 고찰(古刹)에 접근하는 하동 강변길의 풍경이 그것이다. 봄 벚꽃, 가을 단풍, 여름의 나무그늘, 겨울에는 이파리를 떨군 가로수길 끝에 걸려 있는 눈 덮인 지리산을 보여주는 그 강변길은 그 길과 교향하듯이 흐르는 섬진강을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기억하게 한다. 또 그 길을 따라 매화마을, 산수유마을 등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풍경의 명품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강이 아름다우려면 강물만 맑아서는 곤란하다. 그 강이 주변의 산하와 인간의 삶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다. 이 말은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도시의 강을 보면 납득할 것이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은 산수의 맥락 위에 인경(人境)의 명풍경이 서로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데 있다. 이 절묘한 결연(結緣)이 질박한 섬진강을 명풍경으로 꼽게 한다.
평사리 한산사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그 모습은 애틋하다. 문득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가는 자도 이와 같을까. 주야로 흘러서 쉬는 일이 없구나(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흘러가는 강물처럼 인생이란 한 번 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평사리 언덕에 기대서서 유수(流水)의 비가역성이라는 당연한 풍경을 자신의 유한한 인생과 겹쳐보고 있었다.
ㆍ기고자:강영조 동아대학교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mail.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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