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강불식하는 군자, 무궁화
목근화(木槿花)는 무궁화의 한자 이름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상적인 명화다. 이 꽃을 두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여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라고 하지만, 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드는 것이니, 조개모위(朝開暮萎)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듯 하다. 따라서 꽃이 지지 않는 것을 이 꽃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것은 영고무상(榮枯無常)한 인생의 원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계속적으로 피는 것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군자의 이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꽃 피는 기간이 오랜 것은 꽃의 품격이 청아한 것과 함께 이 꽃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꽃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최고의 예찬을 받는 이유도 주로 여기에 있다.
무궁화의 다른 이름은 순(蕣)이다. 《시경》에 “얼굴이 무궁화 같다.(顔如蕣華)”고 하여 여자의 아름다운 용모를 무궁화에 견준 것이 있다. 무궁화의 빛깔이 몇 가지가 있지만 분홍색과 흰색이 가장 곱다. 여름 아침 일찍 동산에 나가면 무성한 가지와 잎 사이로 여기저기 하얗게 핀 꽃은 이슬에 젖은 그 청아한 자태가 맑은 시냇물에 갓 목욕을 마친 선녀의 풍격을 어렴풋이 생각나게 하는 바가 있다.
이 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층 더 깊은 유래가 있다. 중국 고대의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다.
군자의 나라에는 훈화초(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여기서 말한 훈화초는 곧 근화초(菫華草)라 하며, 근화초가 바로 무궁화다. 《지봉유설》에 인용한 《고금주》란 책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군자의 나라는 땅이 사방 천리인데, 목근화가 많다.
우리나라를 근역(槿域)이라 일컬음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이전은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고려 예종 때 중국에 보낸 국서에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것이 현존한 사료로는 최초인 듯 하다. 이로부터 100년쯤 지나서 신종(神宗) 강종(康宗) 연간에 활동했던 천재시인 이규보가 무궁화를 논한 것이 있다. 이규보의 벗 가운데 문(文)과 박(朴)이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무궁(無窮)이 옳다고 하고, 한 사람은 무궁(無宮)이 옳다고 고집하여 끝내 결정을 짓지 못했다. 마침내 백낙천(白樂天)의 시운(詩韻)을 취하여 두 사람이 제각기 근화시(槿花詩)를 1편씩 짓고 또 자신에게 권하여 화답케 하였다고 했다. 이로 보면 무궁화의 명칭도 그 유래가 퍽 오래된 것을 알겠다. 근세에 우리나라가 이 꽃으로 나라꽃을 삼은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유구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곱기가 연꽃 같은 목련화(木蓮花)
앞에서 무궁화를 예찬하였으니 목련화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목련에 대해 이런 언급을 남겼다.
잎사귀는 감잎 같고, 꽃은 백련 같다. 씨방은 도꼬마리 같은데 씨는 붉다. 산 사람들이 목련이라 부른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매월당(梅月堂)이 말한 것과 비슷하게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꽃은 곱기가 연꽃 같아서 목부용이니 목련이니 하는 명칭이 있다.
이로 보면 목련이란 이름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라는 책에는 이렇게 나온다.
목부용은 꽃과 열매가 모두 무궁화와 비슷한데 더 크고 어여쁘다.
또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며, 가지마다 몇 송이씩 번갈아 피어 날마다 무성한 것과,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것 또한 무궁화씨처럼 가볍고 텅 비어, 얇은 껍질에 싸여 있다고 했다.
겨울에 잎이 다 지더라도 씨가 든 봉오리는 오히려 떨어지지 않아, 거상화(拒霜花)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8, 9월에 비로소 꽃이 피기 때문에 거상화란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목련이 예로부터 이름 높은 꽃인 것만은 분명하다.
꽃의 빛깔도 붉은 색과 노란 색과 흰 색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흰색의 목련이 있을 뿐이다. 또 실제로도 가장 고운 것은 흰색이라고 한다.
이 꽃은 정원에서도 기르지만 깊은 산 속에 흔히 자생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개성의 천마산(天摩山) 대흥동(大興洞)에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진 속에 목련화가 활짝 피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른다고 했다.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를 보면 금강산의 혈망봉(穴望峰)에는 목련과 적목(赤木), 동청(冬靑)과 측백(側柏) 및 해송의 종류가 많다고 했다. 금강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명산에는 대개 이 목련이 있는 모양인데, 특히 절 같은 데는 이 꽃을 아주 즐겨 심는 경향이 있다. 순천 송광사는 목련이 많기로 이름 높은 곳 가운데 하나다. 서울 안에도 산속 정자나 별장 같은 곳에 간혹 심는 경우가 있다.
사계절 모두 피는 사계화(四季花)
모든 꽃이 한 해에 두 번 피지는 못하는데, 이 꽃만은 네 계절을 독점하여 곱게 피어 있어, 꽃다운 마음이 조금도 그치지 않는다. 세조(世祖) 때의 명신으로 시와 글씨와 그림으로 삼절(三絶)의 기림이 높던 청천(菁川) 강희안(姜希顔)이 사계화에 대하여 예찬하여 한 말이다.
그가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이 꽃이 네 계절에 모두 피는 까닭에 속칭 사계화라 하지만,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또 이렇게 적었다.
이 꽃이 운격(韻格)이 있지만 옛 사람이 명품으로 치지 않았으니, 안타까워 할만하다. 하지만 매양 이름난 그림을 보면 흔히 이 꽃을 그리고 있으니, 어찌 명품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그 이름이 속칭과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임원경제지》 〈예원지(藝畹志)〉에는 《양화소록》의 사계화조를 인용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꽃은 세 종류가 있다. 꽃이 붉고 3월, 6월, 9월 12월에 꽃 피우는 것을 사계화라 한다. 분홍빛에 잎이 둥글고 큰 것은 월계화(月季花)라 한다. 푸른 줄기가 덩굴로 뻗어나가 봄가을에 한번씩 피는 것은 청간화(靑竿花)라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월계화가 사계화 중의 한 종류임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구별을 아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월계화와 사계화의 계(季)를 계(桂)자로 바꿔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강희안은 이 꽃을 가장 사랑하였다. 그의 고향인 지리산 아래 청천(菁川) 가에는 울타리 밑에 사철 내내 피는 것이 모두 이 꽃이어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귀여워하지 않는다고 탄식 비슷하게 말했다. 그가 서울에 와서 벼슬한 지 10년에 고향 생각이 아주 간절할 때 이 꽃을 보기만 해도 고향에 간 듯 하였으므로, 자기는 화훼 중에 이 꽃을 가장 많이 재배하여, 이 꽃의 성질을 더욱 자세하게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금을 통하여 이 꽃에 대한 노래와 시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고려 이규보의 〈사계화〉 시 세 수가 있다. 이 가운데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섣달 매화 가을 국화 추위를 잘 견디니
경박한 봄날 꽃은 범접하지 못하겠네.
이 꽃이 네 계절에 오롯함을 볼진대
한 때에 고운 꽃은 볼만함이 없어라.
臘梅秋菊巧侵寒. 輕薄春紅已莫干
及見此花專四序 一時偏艶不堪看.
수탉의 벼슬 같은 맨드라미
오자오자 옷나무
가자가자 갓나무
김치가지 꽃가지
맨드라미 봉선화
이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동요다. 흔히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던 것이다.
맨드라미는 그 꽃이 수탉의 벼슬과 같아서 한자로 계관화(鷄冠花)라고 쓴다. 똑같은 맨드라미라도 그 모양이 부채처럼 퍼진 것도 있고, 혹은 울타리처럼 넓적한 것도 있다. 또 혹은 덮여 늘어진 것도 있다. 그 이름이 제각기 다르고, 그 빛으로 말하더라도 아주 선연하게 붉은 것도 있고, 연분홍과 엷은 황색과 순백색도 있다. 혹은 한 송이에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다섯 가지 색깔이 뒤섞인 것도 있다.
이 꽃은 흔히 봉선화와 함께 장독대 너머나 울타리 밑에 심는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시에, “울타리 밑 맨드라미 새빨갛구나.籬下鷄冠紅的的”라 한 것이 있고, 추사 김정희의 〈계관화〉시 끝구에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장독대 이편 저편 운치를 더했거니
희고 붉은 봉선화와 함께 피어 있구나.
醬甕東西增一格. 鳳仙紅白共繁華.
울긋불긋한 봉선화와 같이 피어있다고 한 것만 보아도 맨드라미는 울타리 아래거나 장독대 옆에 피는 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맨드라미는 5,6월이 되면 그 줄기 끝에 닭의 벼슬 같은 꽃이 피어, 8,9월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그대로 계속된다. 꽃이 고운 것보다도 피어있는 기간이 오래여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예전부터 이 꽃은 많이 재배했던 모양이다. 지금부터 7,8백 년 전에 고려의 시인 이규보가 자기 집 동산에 활짝 핀 맨드라미를 사랑해서 장편의 시로 노래한 것만 보더라도 이런 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이 꽃이 얼마나 흔하였던지 변소에까지 맨드라미가 피었으므로,
꽃을 사랑하고 시를 좋아했던 이규보는 다시 이 변소에 핀 맨드라미를 이렇게 노래했다.
닭이 이미 꽃으로 변화하여서
어이해 뒷간 가운데 있나.
아직도 옛 버릇 그대로 남아
구더기 쪼아먹을 생각있는 듯.
鷄已化花艶. 云何在溷中
尙餘前習在. 有意啄蛆虫
《군방보(群芳譜)》에는 이 꽃이 마른 땅을 좋아하므로 청명(淸明)에 심는 것이 좋다고 했다. 키가 큰 것은 비바람에 부러질 염려가 있으므로 댓가지 같은 것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하였다.
꽃 좋고 열매도 좋은 석류화(石榴花)
간밤에 비 오더니 석류꽃이 다 피겠다
부용당(芙蓉堂) 가에 수정렴(水晶簾) 걸어 두고
뉘 향한 깊은 시름을 못내 풀려 하노라
이 작품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상촌(象村) 심흠(申欽)의 시조로, 아주 청아한 기운이 담겨 있다. 석류는 본래 서역(西域)에서 나는 것으로, 한나라 때 장건(張蹇)이 안석국(安石國)에서 가져왔다 하여 석류(石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석류는 꽃이 좋을 뿐 아니라 그 열매가 볼 만하고 또 먹을 만하여, 예로부터 흔히 재배해 왔다. 천엽(千葉)은 열매를 맺지 않지만 단엽(單葉)은 열매를 맺는다. 천엽은 꽃잎이 여러 겹인 것을 가리키고, 단엽은 꽃술이 한 겹인 것을 말한다.
석류는 땅에 심기도 하고 화분에 기르기도 한다. 하지만 남쪽의 따뜻한 지역이 아니면 땅에 심기는 좀 곤란하다. 북쪽 추운 곳에서는 화분에 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석류 재배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층층이 뻗은 가지가 위는 뾰족하고 밑은 퍼진 것은 백양류(柏樣榴), 즉 잣석류라 한다. 줄기가 곧고 위쪽은 성글어 가지가 마치 일산(日傘)을 펼친 것 같은 것은 주석류(柱石榴), 곧 기둥석류라 한다. 몇 그루가 덤불로 나서 가지가 뒤엉긴 것은 수석류(藪石榴), 즉 기둥 석류라고한다.
이러한 몇 종류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아름다우냐 하면 잣나무 모양으로 아래는 퍼지고 위로 갈수록 뾰족하게 되는 백양류가 자장 좋다고 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석류 뿐 아니라 온갖 꽃나무에 대해 원예 기술이 발전하여, 혹은 가지를 구부리기도 하고, 혹은 가지를 둥글게 서려 놓기도 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기교에 감탄하게 하기도 한다.
《군방보(群芳譜)》에는 석류꽃에 아주 붉은 색과 분홍색, 황색과 백색 등 네 가지 빛깔이 있다고 하였다. 춘하추동 꽃이 피는 사계류(四季榴)라는 것도 있고, 꽃이 볼처럼 새빨간 화석류(火石榴)란 것도 있다. 꽃이 떡만큼 커다란 이른바 병자석류(餠子石榴), 즉 떡석류도 있으며, 꽃술이 누대(樓臺)처럼 우뚝 솟은 이른바 중대석류(重臺石榴)도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우리나라 땅에는 천엽과 단엽 등의 몇 종류가 있을 뿐이고, 그 빛깔 또한 붉은 색 아니면 흰색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라에만 있던 해석류(海石榴)란 것이 있어, 진작에 중국 땅에 수출하여 널리 당나라나 송나라 시인의 사랑을 받은 사실이 있다. 석류꽃은 향기는 없지만 색채는 곱고, 열매도 빼어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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