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가 특히 아름다운 것은 풍경에 가꾼 사람들 마음이 배어 있기 때문
뱃머리가 간이 접안시설에 닿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모자의 챙을 꼭 잡고 섬으로 상륙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백색의 햇살이 내리퍼붓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만 눈을 찡그렸다. 사람들을 다 토해 놓은 유람선은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가 곧바로 그 자리를 메웠다.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거제 해금강을 잠시 거쳐 여기 외도에 온 것이다. 5월 말, 외도 해상농원의 선착장은 도시의 택시 승강장처럼 붐비고 있었다.
나는 외도에 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다 채우고 유람선의 출발시각에 맞추어 다시 선창으로 돌아와 있었다. 1시간 45분은 편한 걸음으로 섬 여기저기를 다 볼 수 있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처럼 아쉬운 마음으로 방금 돌아본 섬을 뒤돌아보았다.
외도, 그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섬
섬을 둘러싸고 있는 키 큰 동백나무 이파리들이 밝은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태 전 이른 봄에도 여기를 찾았었다. 그때는 저 동백나무들이 붉은 꽃송이를 한껏 피우고 있었다. 가끔 길 위로 그 꽃송이가 툭, 하고 떨어지 때는 목 잘린 짐승의 머리처럼 느껴져 섬뜩했지만, 지금은 오래된 가지에 매단 싱싱한 이파리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길섶에 자라는 이대와 영산홍, 그리고 팔손이나무가 풍성하게 넘쳐나는 길을 따라 오르면 시계가 탁, 하고 열리면서 상록수와 야자류 식물, 그리고 그 속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밝은 얼굴의 사람들로 가득 찬 코카스 정원을 만났다. 그 정원에 키 높이 자라난 종려나무가 마치 갈채하듯이 이파리를 흔들고 있는 그 광경에서 나는 귀한 손님으로서 이 섬의 주인에게 초대 받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털가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노란 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장군 선인장, 그리고 꽃을 피우고 나면 죽어 버린다는 용설란도 꽃대를 쭉 뻗고, 그 끝에 꽃망울을 매달고는 이른 여름의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걱정 따위는 없는 행복한 광경이었다.
선인장 동산을 지나 비탈을 감아 오르는 길을 따라 시선이 끌리는대로 눈길을 돌리자 여기저기에 원래부터 놓여져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서 있는 그리스 조각들이 보였을 때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익숙했졌다. 그리고 그 비탈 위를 오르자 사각형의 대지 중앙을 거침없는 직선으로 가르는 사철나무의 열식과 지중해풍 건물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사랑하는 여인이 기다리는 지중해의 어느 섬에 상륙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까닭 없이 설레었다.
그러나 내 발길을 한참이나 묶어 둔 것은 그 비너스 정원이 아니라 그 정원을 왼쪽으로 걸어 나와 제1전망대로 오르는 길가에 핀 화사한 꽃들이었다. 먼저 보라색 라벤다가 멋쟁이 아가씨처럼 허리를 쭉 펴고 뽐내듯이 서 있었다. 그 뒤로 스파르티움이 노란 색 꽃이파리를 흔들며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힐링가든이다. 나는 그 허브 향기 속을 느릿하게 걸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화려한 꽃을 만개하고 있는 꽃양귀비가 언덕배기를 뒤덮고 있는 광경이 압권이었다. 섬 언덕으로 밀려오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봄 처녀의 얇은 스커트 자락처럼 화사한 꽃이파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꽃이파리들의 화려한 율동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어제 불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화원은 다소 거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꽃양귀비가 관능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언덕길에 서서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에 드문드문 서 있는 카이즈카 향나무와 그 왼쪽으로 하얀 벽과 작은 창문을 가진 집, 그리고 비너스 정원의 사철나무가 바다로 향해 쭉 뻗어 있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작은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방금 이 섬의 주인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혹시 뒤따라 걸어올 손님을 배려해서 문을 꼭 닫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화원을 지나면서는 바다가 볼거리였다. 제1전망대와 파노라마 휴게실에서는 멀리 해금강과 거제 먼바다가 보였다. 명상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물위에 떠 있는 거제도가 보였다. 나는 제1전망대에 서서 멀리 거제 해금강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5월의 하늘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거제 해금강 뒤로 펼쳐지고 있었고, 그 섬 주위에서 갑작스레 피어오른 해무가 암봉을 덮었다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때마침 내가 서 있는 절벽 아래에도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다에서 섬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물안개를 섬의 절벽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섬은 마치 면사포를 쓰고 있는 신부처럼 보였다. 외도는 5월의 신부처럼 싱싱했고 또 화사했다. 멋진 풍경이었다.
사람을 맞이하는 풍경
접안시설의 빈 자리를 차지한 유람선에서 사람들이 모두 내리자 그 배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구조라로 다시 데려다줄 배를 기다렸다. 섬은 어느새 해무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자연이 수억 년 동안 만들어 놓은 해산기승을 간단히 스쳐 지나친 유람객들이 사람이 만든 화원에서는 1시간 45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물고도 이곳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간단하지는 않은 이 물음의 대답이 외도의 아름다움이다.
외도의 아름다움은 실은 동백나무도, 허벅지게 핀 꽃양귀비도, 향기 내는 허브 꽃이파리도 아니다. 깎아지른 암벽도, 푸른 하늘도, 우리가 외도에서 경험하는 미적 감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거대 자본이 만든 테마 파크나 수목원도 이 외도보다 더 귀한 식물과 색조 화사한 화초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미적 감동을 준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바다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을 몇 번이고 찾아오지는 않았으리라.
다소 어려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풍경의 체험이란 세계를 '너'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늑한 숲에서 초원으로 홀로 나왔던 태고의 인간이 처절하게 실감했던 고독감,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는 그 고독감이야말로 세계와 시각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다고 하는 풍경 욕구의 근원이다. 풍경체험이 세계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만든 자의 의취를 겹쳐서 보는 것이라는 말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잘 다듬어진 초원에서 우리는 그 초원을 가꾼 사람의 성실함과 사려 깊음을 함께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도라는 작은 섬에 핀 화려한 꽃과 잘 다듬어진 나무, 그리고 손질 잘한 방풍림, 섬 비탈에 안기듯이 자리 잡은 키 낮은 건물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 풍경을 가꾼 사람들의 뜨거웠던 가슴과 성실함과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자상하게 배려한 완만한 경사길과 길섶의 수목들, 솜씨 좋은 정원사가 잘 다듬어 놓은 토피아리와 잘 깎은 잔디. 이런 풍경들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이 정원을 가꾼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를 그 풍경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구조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외도에 함께 내렸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었다. 모두들 외도의 풍경들이 자기들을 즐겁게 맞이해 준 것에 흡족해 하는 듯한 얼굴들이다. 어쩌면 그 풍경 뒤에 숨어 있는 그 정원만큼이나 따뜻한 주인의 마음이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겠다.
배는 뒷걸음치면서 섬과 벌어지더니 선수를 돌려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해무 속으로 배가 숨었다고 여겨진 순간 나는 뒤에 남겨 둔 외도를 돌아보았다. 섬은 안개에 싸여 겨우 그 형체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하얀 해무 속에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섬을 빠져나가는 우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길은 느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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