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채로 지는 능소화(凌霄花)
서울에 이상한 식물이 있는데, 나무에는 백송(白松)이 있고 꽃으로는 자위(紫葳)가 있다. 자위는 달리 능소화라고도 하는데, 중국이 원산이다. 수백 년 전에 조선 사신이 연경에 가서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다지 아름다운 꽃은 아니지만, 매우 보기 드문 꽃으로 유명하다.
과거의 전고(典故)에 밝은 이동운(李東芸)을 만나서 들어보니, 오늘날 서울 안에 이 능소화가 있는 곳은 오직 사직동의 도장궁 한 곳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소장한 《한성지략(漢城識略)》 하권 각동조(各衕條)를 보니 능소화에 대해 이러한 기사가 실려 있다.
백운동은 인왕산 아래 있다. 월성위궁(月城尉宮)이 이 거리에 있다. 월성위 궁에는 능소화가 있는데, 6,7월 사이에 꽃이 피니 주황색이다. 덩굴이 노송 위로 나온다. 또 북송현(北松峴)의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 대감 댁에 홀로 능소화가 있다.
또 같은 책의 사묘조(祠廟條)에도 능소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덕흥부원군의 사당은 사직동에 있다. 적장손(嫡長孫)이 대대로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데, 사당의 앞 뒤에 능소화가 있다.
백운동(白雲衕)은 지금 자하문(紫霞門) 안쪽 일본 요리점 백운장(白雲莊)이 있는 곳이다. 옛날 이염의(李念義)가 살던 집이었는데, 그 후 영조대왕의 사위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궁(月城尉宮)이 되었다. 이 궁에 능소화가 있었다. 북송현(北松峴)은 오늘날 수송동(壽松洞) 사범학교로부터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에 이르는 일대의 땅이다. 두실(斗室)은 순조조(純祖朝) 대신 심상규(沈象奎)이니 이 집에도 능소화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월성위궁과 심상규의 저택에 있던 능소화는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오직 덕흥군사당에 있던 능소화만 남아 있을 뿐이다.
덕흥군은 말할 것도 없이 중종대왕의 아드님이시오, 선조대왕의 아버님이시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대통을 이으셨다. 덕흥의 맏아드님은 대대로 군(君)으로 봉해서 덕흥군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오늘날 속칭 도장궁이 바로 그 집이다. 이 도장궁의 후원에 덕흥군의 사당이 있고, 사당의 담장 둘레에 능소화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 안에 남은 단 하나 뿐인 역사적인 꽃이다. 경기도 이남 지방에는 이 꽃이 간혹 있다.
능소화는 덩굴로 자라는 나무다. 다른 나무나 담벽을 타고 올라가 거기에 붙어서 산다. 그 잎은 등나무 잎과 같고, 꽃은 주황색으로 나팔꽃과 비슷하게 생겼다. 6,7월 복중(伏中)에 피어 꽃 피는 기간이 한 달 반에 이른다. 꽃이 질 때는 꽃받침 채로 떨어지므로 시들지 않고 싱싱한 채로 떨어져 땅에서 시든다. 이것이 이 꽃의 한 가지 특징이다.
청초한 자태 그윽한 향기, 난화(蘭花)
요새 창경원에는 작약(芍藥)이 지고 모란이 피어 화왕(花王)의 향궁(香宮)에 봉신(蜂臣)과 접사(蝶使), 즉 벌 나비가 쉴 새 없이 오락가락 한다. 또한 꽃에 취한 부유층 남녀들의 꽃구경이 한창이다.
그러나 모란은 너무 농익게 아름다워 그림으로 비유하면 서양의 수채화와 같아, 일반 사람이 보고 모두 기뻐하지만, 다만 빼어난 운치가 적은 것이 결점이다. 동양적 정조(情調)를 담고 있는 꽃은 모란이나 작약 같은 화려한 꽃보다도 차라리 매화나 난초꽃 같은 고아(高雅)한 꽃이 될 듯하다.
난으로 말하면 그 꽃의 자태가 고아할 뿐 아니라 꽃대와 잎이 청초하고 향기가 그윽하게 멀리까지 퍼진다. 난은 기품이 우아하고 운치가 풍부한 점이 풀꽃 중에 뛰어나다. 예로부터 군자의 덕이 있다고 일컬어져 문인 묵객(墨客) 사이에 크게 사랑을 받아왔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난초와 지초(芝草)를 나란히 일컫는다. 하지만 지초는 선계(仙界)에서 나는 신령스러운 풀로 실물을 직접 본 사람은 드물다. 어떤 이는 지초에는 자주색과 흰색의 두 종류가 있어 줄기의 길이가 한 자가 넘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위 위에 나고, 모습은 돌과 같으며, 사람이 먹기 때문에 가을에 채취한다고도 하는데, 잘 알 수 없다.
또 흔히 난초와 혜초(蕙草)를 함께 말하는데, 이 둘의 구별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박세당(朴世堂)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양화편(養花篇)〉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 줄기에서 한 송이가 피면서 향기가 진한 것이 난초이고, 한 줄기에서 예닐곱 송이가 피지만 향기는 부족한 것이 혜초이다.
간단히 말해 난(蘭)은 꽃이 적고 향기가 짙다. ‘향문십리(香聞十里)’ 즉 향기가 십리에 이른다고 하는 말이 반드시 턱없는 한문식의 과장만은 아니다. 난초의 꽃을 향조(香祖)라 하거나 제일향(第一香)이라 일컫는 것이 어찌 까닭 없이 나온 말이겠는가.
우리나라에는 진짜 난이 없다고도 하나, 호남 바닷가의 이름난 산에는 난이 있다. 제주도 한라산에도 말 그대로 유곡방란(幽谷芳蘭), 즉 깊은 골짝의 향기론 난초가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 또 제주읍 서편으로 20리 쯤 떨어진 곳에 맑은 시내가 흐르는 도근촌(道根村)에 진짜 난이 있는데, 꽃빛이 하얀 것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강희맹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호남 지역 바닷가 여러 산에서 나는 품종이 아름답다. 서리 맞은 뒤에는 아래로 뻗은 뿌리를 손대면 안 된다. 원래 있던 흙을 두르고 예전 심겨져 있던 방향대로 화분에 심으면 좋다. 초봄에 꽃이 핀다. 등불을 밝혀 책상 위에 두면, 잎새 그림자가 벽에 찍힌다 아련해서 구경할 만하니, 책 읽는 여가에 졸음을 물리칠 수 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난초가 놓인 방에서 그윽한 향기가 몸과 마음에 배어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난에는 춘란(春蘭)과 추란(秋蘭)이 있다. 춘란은 이른 봄에 핀다. 꽃과 잎이 우아하고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부록] 1. 난화(蘭花)와 난초(蘭草)
난초지초(蘭草芝草) 온갖 향초(香草)
꽃 따먹던 입 그리고.
이것은 토끼화상이란 타령(打鈴) 중에 있는 한 구절이다. 난초(蘭草)를 향초(香草)의 첫 머리에 내세웠다. 또 흔히 유행하는 동요에
한림풍월 이태백이
난초지초 그려 들고
옥녀 방에 놀러갔네.
라고 한 것이 있다. 여기서도 난초를 맨 처음에 내세웠다. 그러나 난초와 난화(蘭花)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본초강목》에는 이렇게 말했다.
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난초와 택란(澤蘭)은 둘 다 물 가 습한 곳에 난다. 자줏빛 줄기와 흰 가지, 붉은 마디와 초록 잎이 서로 같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은 난초는 그 줄기가 둥그스름하고, 마디가 길며, 잎이 번쩍이고, 가늘다. 줄기가 조금 세고, 마디가 짧고, 잎이 복슬복슬한 것은 택란(澤蘭)이다. 또 난초 중에 산중에 사는 것을 산란(山蘭)이라 한다. 이 세 가지의 난(蘭)은 대개 같은 종류로 가을에 꽃이 피며 이들을 꺾어서 차기도 한다. 《예기(禮記)》에서 ‘난채(蘭茝)를 찬다’ 고 한 것과, 《초사(楚辭》에서 ‘ 추란(秋蘭)을 꿰어찬다’ 한 것, 《풍속통(風俗通)》에 이른바 ‘회향악란(懷香握蘭)’, 즉 향을 품고 난을 쥔다고 한 것이 모두 난초라 한다.
그러나 난화(蘭花)는 위에 말한 세 가지 난과는 아주 다르다. 봄에 피는 것은 그 잎이 맥문동(麥門冬; 약초명)과 같고, 가을에 피는 것은 그 잎이 관모(菅茅; 왕골)와 같다. 잎만 있고 가지가 없으며, 꽃에 향기가 있고 잎에는 향기가 없다. 이것은 난의 별종이요, 옛날에 이른 바 난초는 아니다. 옛날의 난초는 반드시 꽃과 잎이 모두 향기가 있어, 건조한 데서나 습기 많은 곳에서나 변함이 없다. 때문에 이를 베어 몸에 찼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난혜(蘭蕙)란 것은 다만 꽃에 향기가 있을 뿐 잎에는 향기가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한 난초는 아니라고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는 고증한 바 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도 흔히 난이 있다. 이것이 비록 《초사》에 보이는 난과는 다르지만 잘 기르기만 하면 오히려 한가한 중에 그윽한 벗으로 삼을 수는 있다. 이로 본다면 우리나라에만 진짜 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도 오늘 날에 와서는 진짜 난이 드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난화와 난초의 구별은 참으로 어렵다. 매란국죽의 네 벗 중에서도 항상 난을 그리면서도 알기 어려운 것이 바로 난이다.
[부록] 2. 난(蘭)의 편화(片話)
난이 고아(高雅)한 것을 사랑하여 예전부터 여자의 이름을 지은 예(例)가 있었다. 이를 테면 신라 미인 김정란(金井蘭) 같은 이가 바로 그 예다. 여자 뿐 아니라 남자의 이름까지 지은 예도 있다.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어릴 적 이름이 몽란(夢蘭)임을 보아도 알 것이다. 포은(圃隱)의 어머님이 포은을 잉태할 때 그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떨어뜨렸으므로 몽란이라고 지었다 한다. 어쨌든 간에 난은 남녀 모두 이름에 쓸 만큼 사랑을 받아 왔었다.
꽃을 사랑하는 것은 고상한 정취(情趣)에서 나온 것이다. 난화처럼 우아하고 깨끗한 꽃을 아끼고 사랑함에서 우리는 거기에 반영된 인품의 우아하고 깨끗함을 볼 수 있다. 수천 년 한시단에서 으뜸으로 꼽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난화를 가장 아꼈다. 그가 지은 《역옹패설(櫟翁稗說)》이런 대목이 있다.
예전에 여항(餘杭) 땅에 머물 때 일이다. 어떤 사람이 화분에 난초를 심어 선물로 주었다. 서안(書案) 위에 놓아두고, 손님과 응대하고 사물에 수작하는 동안에는 향기가 있는 줄을 깨닫지 못했다. 밤이 깊어 고요히 앉아 있는데, 달은 밝아 창문에 비치니 으뜸 가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맑고도 아득해서 아낄 만 하였다. 하지만 말로는 형언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명현(名賢) 중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매화를 항상 아껴 사랑하였으므로 매화를 노래한 시가 백 수가 넘는다. 이제현 선생 같은 분은 난화를 이처럼 아꼈다. 만일 아끼는 꽃을 가지고 그 인품이 어떠한 가 짐작할 수 있다면 매화를 너무도 아꼈던 이황 선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난화를 몹시 아낀 이제현 선생에 대하여 후세까지 그 높은 풍모를 느껴 볼 일이다.
그러나 난을 그리는 문인묵객이 많지마는 난초 그림에 아주 뛰어난 사람은 보기 드물다. 매화는 일찍이 조선 제일로 일컬어진 어몽룡(魚夢龍)이 있지만, 난초 그림에 있어서는 고금을 통하여 최고 예찬을 받을 만한 이가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대원군의 난초 그림을 일컬어 압록강 동쪽에 제일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오늘에 와서 볼 때 자못 의문이다.
제비처럼 날렵한 제비꽃
냇물 곁 언덕 위에 제비꽃 하나
물새 보고 방긋 웃는 제비꽃 하나.
고운 얼굴 물속에 비치어 보며
한들한들 춤추는 제비꽃 하나.
이것은 요즘 유치원(幼稚園)의 어린이들이 흔히 부르는 동요다. 하고 많은 꽃 중에서 이 제비꽃을 노래한 것은 초여름 맑은 시냇가에서 한들한들 웃고 서 있는 제비꽃의 자태에서 풀꽃이 지닌 청초한 아름다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늦봄에 붉었던 꽃이 모두 다 지고, 새로 펼쳐진 녹음의 천지에서 곱고 아름다운 꽃은 자취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때 제비꽃이 홀로 피어 아름다움을 자랑하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꽃인가. 더구나 이 꽃은 물가에 피므로 일종의 맑은 운치를 더한다. 초여름의 기후도 맑고 시내도 맑고, 이 꽃도 청초하여 세 가지 아름다움이 두루 갖추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꽃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또 하나 볼 수 있다. 봉선화의 모양이 봉황과 같으므로 봉선(鳳仙)이란 이름을 얻은 것처럼, 제비꽃은 그 모양이 제비와 같아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한자로는 연자화(燕子花)다. 《사원(辭源)》의 ‘연자화(燕子花)’ 항목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다년생 풀. 물가 습지에서 자란다. 높이는 두 자 남짓 되고, 잎 모양은 칼처럼 생겼다. 꽃대는 잎 덤불의 중앙에서 나온다. 여름에 꽃대 끝에서 큰 꽃이 핀다. 색깔은 자주색과 초록색, 혹은 흰 색이다. 꽃의 외피는 두 층으로 되어 있다. 바깥층은 큰데 아래 쪽으로 늘어졌다. 안쪽 층은 좁고 작으면서 뾰족하게 위로 향해 있다. 그 모습이 흡사 제비와 같기 때문에 제비꽃이라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제비꽃은 속칭 붓꽃[溪蓀]이나 꽃장포[花菖蒲]와 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제비꽃의 잎은 꽃창포의 잎처럼 중앙에 솟아오른 맥이 없다. 또 붓꽃의 잎처럼 가늘고 길지 않고, 아주 넓으면서 부드러운 것이 한 가지 특징이다. 그리고 꽃도 꽃창포보다는 적고, 붓꽃과는 상당히 다르다. 제비꽃의 줄거리는 잎사귀에 비해 흔히 그 키가 작은 편이다.
농염한 아름다움, 모란꽃
눈 온 뒤 찬 매화와 비 온 뒤 난초는
볼 때는 하찮아도 그릴 때는 어렵다네.
세상 눈에 안 찰 줄을 내 미리 알았던들
차라리 연지로 모란을 그릴 것을.
雪後寒梅雨後蘭. 看時容易畵時難.
早知不入時人眼. 寧把臙指寫牡丹.
이 시는 조선 초의 유학자로 불행히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참형(慘刑)을 받았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작품이다. 한강 가의 제천정(濟川亭) 벽 위에 써 붙였던 것이다.
시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세속을 풍자한 뜻이 깊어 오늘날까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매화와 난초는 너무 고아하므로 힘들여 그려 봤자 알아보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모란은 그 자태가 농염(濃艶)하여 그리기만 하면 어린 아이부터 미천한 병졸까지 모두 좋아 한다. 이것이 김종직이 자탄한 까닭이다.
고금을 통털어 모란을 노래한 시가 많기로는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를 따를 이가 없다. 실제 그의 문집(文集)을 뒤져보면 온통 모란을 노래한 시 뿐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로맨틱한 것을 찾는다면 〈절화행(折花行)〉이란 작품이 아마도 대표작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 작품은 비록 모란을 직접 읊은 것은 아니지만, 모란을 꺾어든 미인의 온갖 어여쁜 자태를 그릴 듯이 그려내고 있다.
진주알 맺힌 듯이 이슬 먹은 모란 송이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다가
웃음 담뿍 머금고 님에게 묻는 말이,
“꽃이 예뻐요, 아님 제가 예뻐요?”
서방님은 일부러 장난 치느라
꽃가지 더 예쁘다고 짐짓 말을 하누나.
아가씨는 꽃에 진 것 질투를 내어
꽃가지 짓뭉개며 한다는 말이
“이 꽃이 이 몸보다 진정 낫거든
오늘 밤은 꽃하고 주무시구려.“
牧丹含露眞珠顆 美人折得牕前過
含笑問檀郞 花强妾貌强
檀郞故相戱 强道花妓好
美人妬花勝 踏破花枝道
花若勝於妄 今宵花與宿
[부록]1. 모란 때문에 받은 탄핵
연꽃을 군자라 하고, 장미를 가인(佳人)이라 하고, 모란은 화왕(花王)이라 한다. 모란은 부귀롭고 화려한 꽃으로 중국에서는 수당대(隋唐代)에 이미 많이들 아껴 감상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미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당대(唐代)에는 궁중과 민간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모란을 찬미하여, 당대 시인이 “모란 홀로 꽃 가운데 온갖 영화 누리네.(牡丹獨逞花中榮)”라고 노래하기까지 하였다. 침향정(沈香亨) 앞에 만발한 모란은 양귀비와 당현종의 연애담에 한 배경이 될 만큼 역사적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란이 비록 연애와는 관계가 없으나, 혹 여왕의 총명을 나타내고, 혹은 유신(儒臣)의 풍간(諷諫)을 돕게 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고려 예종이 모란을 아껴 감상하며 시 짓는 신하들과 함께 흔히 이 꽃을 노래했던 것은 태평시절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신종(神宗) 때 재상 차약송(車若松)이 동료인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모란을 재배하는 방법을 논하다가, 사관(史官)의 질책을 들은 것은 가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사실의 전말은 이러하다.
봄 정월. 기홍수와 차약송이 중서성(中書省)에 앉아 있었다. 차약송이 기홍수에게 물었다. “공작새는 잘 있는가?” “고기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죽었다네.” 인하여 모란을 기르는 방법을 묻자, 차약송이 자세히 말해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모란을 흔히 귀인의 정원에 재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정당(政堂)에 앉아 모란을 재배하는 방법을 말했기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이지, 만일 공석이 아닌 잔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굳이 따져 본다면 그들이 모란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공석에서 한 것이 잘못일 뿐, 아무리 재상이라 해도 모란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사관의 깎아 말한 논의가 너무나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록] 2. 모란과 선덕여왕
천향(天香)과 국색(國色)을 아울러 갖춘 아름답고 농염한 모란은 화왕(花王)의 존칭을 받아 마땅하다. 다만 화왕의 본향이 중국이나 인도냐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단정하기가 어렵지만, 식물학자의 말을 빌면 운남(雲南)이 원산인 듯하다 하니, 이 말을 시인한다면 모란이 저 연꽃처럼 인도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 고유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땅에 이 꽃이 수입된 연대와 경로는 어떠한가? 현존한 역사적 사실로는 신라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도와 그 종자가 최초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씨앗이 와서 얻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처음에 당태종이 모란 그림을 보내왔는데 홍색과 자주색, 그리고 백색의 세 빛깔이었다. 그리고 그 씨 세 되를 함께 보냈다.”고 했다. 이 두 책에 이 사실이 실려 있는 셈인데, 《삼국사기》는 다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도와 꽃씨만을 적은데 반해, 《삼국유사》는 당태종이 세 빛깔의 모란 그림과 그 씨 세 되를 보냈다고 한층 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모란은 중국에서도 호사의 극을 달리던 수나라 양제 무렵부터 아껴 감상하게 되었고, 당나라 현종 때 이르러서야 널리 재배하게 되었다. 이로 보더라도 진평왕 이전에는 도저히 수입되지 못했을 것이다.
《개원유사(開元遺事)》란 책에 따르면 현종 때 침향정(沈香亭) 앞에 모란이 활짝 피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에 두 송이가 달렸는데, 아침에는 아주 파랗고 저녁에는 아주 노랗게 빛이 변해 아침저녁에 따라 달라지므로, 현종이 화목(花木)의 요(妖)라 하며 그가 총애하던 양귀비의 종조(從祖)인 양국충(楊國忠)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때로부터 110년이나 앞선 당태종 때에 벌써 모란이 여러 가지 빛깔과 변종이 있었던 것은 진평왕에게 보낸 홍색과 자주색, 백색의 3색과 향기 없는 꽃까지 있었음을 보더라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모란의 특색이 농염한 꽃의 자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욱한 그 향기에도 있는 것인데, 신라에 처음 가져온 모란은 향기가 없었다.
오늘날에 보면 거짓말만 같아 곧이 들리지 않지만, 사실인데야 어찌 하겠는가? 그런데 이 향기 없는 모란이 도리어 큰 인연을 지어 신라 역사상에 아름다운 일화를 영구히 남기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일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과 관계를 맺고 있음은 한층 더 정취를 자아내는 바가 있다.
중국에서는 모란이 저 양귀비의 연애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선덕여왕의 명민함을 크게 나타내 주었으니, 같은 모란이로되 하나는 망국의 빌미가 되고, 하나는 흥국(興國)의 바탕이 되었다.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임금이 된 것은 신라의 특수한 나라 체제 때문이지만, 그의 명민한 재덕에 힘입은 바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명민함은 어릴 때 이 모란화를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을 알아맞힌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 아버지 진평왕의 사랑이 두터워 여자이면서도 전례 없이 대통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본기에는 선덕여왕의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꽃이 몹시 아름답지만, 그림 속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이다. 심어서 길렀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녀의 명민한 선견지명에 대해 칭찬한 내용 중에 하나다.
아! 화왕 모란이 여왕 선덕을 만나 신라 역사상에 한 이채를 빛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년 이래 오늘날까지 이 선덕여왕의 위대한 공적을 말할 때 저절로 이 모란의 일화를 떠올리게 되고, 모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 때마다 반드시 선덕여왕의 명민함을 회상하게 된다.
[부록] 3. 화왕계(花王戒)와 설총(薛聰)
〈화왕계(花王戒)〉는 말 그대로 화중왕(花中王)인 모란을 빌어 설총이 신문왕(神文王)에게 풍간한 내용이다. 그 줄거리는 대개 이렇다.
봄철 좋은 시절을 만나 곱게 핀 모란이 온갖 꽃 위에 우뚝하게 군림하자 모든 꽃들이 다투어 이 화왕의 궁궐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그 중에 장미라는 요염한 가인(佳人)이 있어 야양을 부리며 화왕에게 여쭙기를, “첩이 일찍이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사오니 행여 버리지 않으신다면 하루밤 잠자리를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또 베옷 입은 빈한한 선비로 길 가에 있던 할미꽃(白頭翁)이 허리를 구부리고 와서 화왕에게 충언으로 직간(直諫)하며 자신을 써줄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화왕은 벌써 요염한 장미에게 마음을 빼앗겨 한사(寒士)인 할미꽃의 충언이 옳은 줄 알면서도 그것을 듣지 않고 오직 장미에게만 이끌렸다.
이를 본 할미꽃은 분연히 화왕에게 말했다. “신이 처음에는 왕의 총명함이 의리를 밝게 살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정작 가까이 와서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 하면 충직한 신하와 소원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패망을 부르지 않을 사람이 적습니다. 서시(西施) 같은 요염한 계집이 나라를 뒤집고, 맹자(孟子)와 같은 어진 이가 뜻을 얻지 못한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니, 신인들 어찌 하겠습니까?” 말에 담긴 뜻이 곧은지라 화왕이 그제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화왕계〉란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신문왕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명하므로, 그가 이 화왕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라 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문왕은 얼굴 빛이 변하며 “이것은 이른바 말 속에 뜻이 담긴 것으로 풍유가 깊고도 절실하다. 임금된 자의 경계로 삼을만 하니, 글로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대로 하자 설총의 벼슬을 높이 올려주고, 더욱 총애하였다.
기이한 것은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앞서 선덕여왕의 명민함을 나타내던 모란이, 이번에는 설총의 풍간 대상이 되어 신문왕을 돕게 된 것이다. 모란과 신라 왕실과는 어쩌면 이렇듯 깊은 인연을 갖게 된 것일까. 국화가 중국의 원산이지만 일본에 건너가 한층 더 유명하게 되었고, 모란은 당나라 때의 나라꽃인데 신라에 와서 도리어 도움을 준 것이 크다.
그러나 꽃은 실리보다 취미로 보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아 논한다면 〈화왕계〉에 실린 할미꽃 같은 것은 볼만한 것이 없고, 장미꽃은 요염한 미인에 비길 만큼 진작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장미꽃이 유럽에서는 미의 상징이나 사랑의 표시로, 또는 온갖 환락과 지혜의 표지로 사랑을 받아, 금발의 처녀들은 ‘로즈’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붉은 입술에 미소를 흘린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모란을 화왕이라고 하나, 서양에서는 장미를 화왕이라 하여 3천년 전 시성(詩聖) 호머가 이미 이 꽃을 노래한 바 있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 말엽에 어느 시인이 처음으로 장미를 읊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날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 볼 때 설총이 처음으로 장미를 말하였다. 영국에서는 이 꽃이 장미전쟁 이래로 나라꽃으로서, 역사나 문학작품을 통해 이상적인 명화로 되어 있는 것은 누구든지 다 아는 바다. 영국 사람의 정원에는 반드시 이 장미 한포기가 없으면 수치로 여긴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명화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에드워드의 역사에 나타나기 몇 백년 전에 우리 역사 기록과 문학작품 상에 먼저 소개가 되어 있는 것은 자못 흥미를 끄는 일이라 하겠다.
꿈결에도 사무친 향기, 서향화(瑞香花)
이 꽃의 다른 이름은 수향(睡香)이다. 본래 중국 여산(廬山)에 있던 화훼(花卉)다. 한 여승(女僧)이 낮잠을 자는데 꿈결에 아름다운 향기가 사무치듯 느껴져 깨어 보니 이 꽃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 이름을 수향(睡香)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을 듣고 사방에서 기이하게 여겨 꽃 가운데 상서로운 꽃이라 해서 마침내 서향(瑞香)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다.
《산림경제(山林經濟)》의 〈화훼편(花卉篇)〉을 보면 서향화(瑞香花)는 자주색 꽃 푸른 잎인데, 그 잎이 귤잎처럼 두터운 것이 향가가 가장 훌륭하니, 한 덩굴만 피어도 향기가 정원에 가득하고, 꽃이 지면 앵두 같은 빨간 열매가 맺힌다고 적고 있다.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따르면 서향화(瑞香花)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온 것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라고 한다. 이 꽃은 매혹적인 향기 때문에 꽃을 재배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크게 받아 다투어 재배하였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죽는다.
그러나 강희안(姜希顔)은 이 꽃을 몹시 사랑하여, 기르는 방법을 터득해서 손수 물을 주고 가꾸자, 꽃과 잎이 전보다 배나 무성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서향화를 찬미하여 이렇게 말했다.
꽃 한 송이가 막 꽃망울을 터뜨리자 향기가 온 뜰에 가득하였다. 꽃이 일제히 피어나니 향기는 수 천리를 진동했다. 꽃이 지자 열매가 맺혔는데, 앵도 같이 붉은 것이 푸른 잎 사이에 찬란하였다. 참으로 한가한 가운데 빼어난 벗이다.
어쨌든 서향화는 너무나 향기가 짙어 이 꽃 있는 곳에는 다른 꽃의 향기가 없어지므로 서향을 화적(花賊)이라고도 한다. 서향화의 뿌리는 가늘고 연한 것이 마치 엉클어진 머리털 같다. 볕에 너무 오래 쬐거나 젖은 곳에 오래 두면 손상될 염려가 있으니 주의해서 가꾸어야 한다. 비료를 너무 많이 주어도 화분의 흙이 걸어져 실뿌리가 ?기 쉬우므로, 맑은 물을 천천히 주는 것만은 같지 못하고 하였다.
또한 어떤 꽃이든 더러운 똥을 싫어하지마는 이 서향화처럼 인분을 싫어하는 꽃은 없다. 인분을 싫어할 뿐 아니라 사향(麝香)을 특히 싫어하여, 사향 냄새만 쏘여도 금세 죽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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