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연행 일을 12월12일로 정했다.
이 날은 육군진급심사 발표 날이었기 때문에 진급심사에 충격을 주지 않을 저녁 시간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두환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12.12라는 숫자가 좋아서 그날을 역사적인 날로 택했다고 진술했다.
<전두환은 12.12라는 숫자가 좋아서 그날을 역사적인 날로 택했다고 진술했다>
12월6일, 전두환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사건의 관련 범’으로 연행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재가문서는 이학봉 수사1국장이 작성했다. 당시에는 군의 주요 지휘관이 형사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를 할 경우 국방장관을 경유함이 없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박임항 내란음모사건, 윤필용 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승만 때에는 특무대장 김창룡 대령이 늘 이승만 대통령에게 直報(직보)를 해서 군의 고급 지휘관들을 얽어 넣었다. 더구나 당시 정국은 노재현과 정승화의 콤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에 노재현 장관에게 정식으로 보고한다면 이는 즉각 정승화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에 의해 역공을 당할 것이 뻔했다. 이에 이학봉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월8일 전두환에 보고했다. 한편 정승화에 대한 연행 계획은 이렇게 작성되었다.
<최규하 79.12.6 대통령에 선출, 12.21 취임선서. 그 사이에 12.12사건>
1) 대통령 보고 시점에서 정확히 30분 만에 연행 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2) 연행 조는 우경윤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종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3)총장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 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병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12월12일 아침 9시 반, 전두환은 부관인 황진아 소령에게 대통령 비서실과 협조하여 그날 오후 7시에 보고시간을 잡으라고 명했다. 절충결과 보고시간은 그날 오후 6시30분으로 잡혔다. 이에 따라 정승화 연행 시간은 7시로 정해졌다. 당시 최규하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따라서 12월12일에 최규하는 대통령 신분이었다.
<정승화가 만일 불응하면 긴급구속 절차에 따라 강제연행하기로 했다>
12월8일에 이학봉 이 전두환에게 보고한 연행계획은 정승화가 연행요구에 순순히 따라 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작성됐다. 대통령에게 사전보고가 된 다음에 연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 충돌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연행 팀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학봉은 전두환을 수행하여 대통령 공관에 가야함으로 연행 지휘는 허삼수 보안사 조정통제국장과 우경윤 수사2국장이 맡기로 했다. 원래 우경윤의 당시 직책은 육군 범죄수사 단장이었다. 당시 전두환이 허삼수를 지명한 것은 그가 똘똘한 장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행 팀은 총 9명, 위 두 대령과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편성했다. 연행절차는 가급적 정승화로부터 협조를 이끌어 내서 ‘임의동행’하는 것을 기조로 할 것이지만, 만일 불응하면 긴급구속 절차에 따라 강제연행하기로 했다. 당시 군법회의법에 의하면 구속영장 발부 권한은 군법회의 관할관에 있었다. 그런데 육군본부 계엄군법회의의 관할관은 바로 정승화였다. 당시 국방부에는 군법회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계엄군법회의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국방장관에게는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할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정승화를 구속하려면 정승화로부터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적인 맹점으로 인해 부득이 긴급구속이라는 법절차에 따라 사전영장 없이 강제연행 할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학봉은 연행을 대통령실과 약속된 보고시각으로부터 30분 후에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30분의 간격만을 둔 것은, 전례로 보아 대통령의 재가는 보고 즉시 이루어 질 것으로 예상을 했고, 국가 최고위 자에 대한 연행계획이 누설되면 커다란 반발과 혼란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비밀의 노출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허삼수는 정승화가 경비병들을 동원할 경우를 대비했다>
전두환은 이학봉의 위 연행계획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9일, 허삼수와 우경윤을 불러 이학봉과 함께 실무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총장공관 주위를 답사하여 경비상황을 파악했다. 그 결과 10.26사태 이후 총장공관에 대한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10여명의 육군헌병이 상주하고 있고, 50여명의 해병대 헌병들이 공관 외곽 초소들을 경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삼엄한 경비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두환에게 이학봉이 작성한 연행계획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우경윤은 연행 시에 헌병감실 성환옥 대령과 육본헌병대장인 이종민 중령을 총장 공관에 동행케 하여 경비헌병들에게 연행의 배경을 설명하고 마찰을 예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환옥은 전직 육본헌병대장이고, 이종민은 현직 육본헌병대장이기 때문에 육군 헌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얼굴들이었다. 육군 헌병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복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허삼수는 정승화가 경비병들을 동원할 경우를 대비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합수부에 파견돼 있는 33헌병대를 한남동 로터리 근처에 대기시켰다가 긴급한 경우에 사용하기로 했다. 12월12일, 5시40분, 정승화 총장이 공관으로 퇴근했다. 부관인 이재천 소령(육사28기)이 오늘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정승화는 “저녁 먹고 외갓집(처가집)에나 가보자”고 했다. 그의 처가는 청운동 경기상고 근방에 있었다. 그날 끝난 진급심사에서 그의 처남 신대진 대령(육사15기)의 진급소식을 장모에게 알리고 기쁨을 나누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재천 소령과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육사31기)가 청담동까지의 경호를 위해 사복 속에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7시에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간다. 모두 들 신중하게 하라” 공관지도 보여주며 임무 분담>
6시 10분, 보안사령관 수석부관인 황진아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퇴근길에 보고드릴 급한 보고서가 있으니 받아서 총장께 드리라”며 차종과 차량번호를 알려주었다. 12월12일 오후3시, 이학봉은 서빙고 수사 분실에 있는 한길성 수사계장(소령)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정 총장을 연행한다. 연행에 필요한 준비를 하라”는 아주 짧은 지시를 했다. 이에 한길성은 총과 포승줄 등을 준비했다. 이어서 이학봉은 또 다른 수사계장 김대균 소령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총장을 연행한다. 수사관들을 대기시켜라”는 지시를 했다. 이에 김대균 소령은 수사관들을 선발했다. 5시, 허삼수가 신동기 준위를 분실장 방으로 불러 합수부장의 의전용 차량인 일제 토요다 슈퍼살롱을 운전 연습하라고 지시했다. 신동기는 61년 경희대 체육학과를 수료하고 일반병으로 입대했다가 63년 대간첩작전으로 공을 세워 하사로 특진하여 64년부터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체격이 매우 건장했고, 단련돼 있었으며 허삼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허삼수 로부터 명령을 받은 신동기는 ‘오늘 사령관에 아주 중요한 비밀모임이 있구나’ 혼자 생각하면서 40분간 연습을 했다. 6시, 허대령이 다시 불러 공관촌의 약도를 주면서 “오늘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가는데 네가 운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6시40분, 수사 분실장 방에는 허삼수 대령, 우경윤 대령, 김대균 소령, 한길성 소령, 신동기 준위, 박원철 상사, 양일근 준위, 김덕수 준위, 이장석 준위 모두 9명이 모였다. 허삼수 대령 주재로 회의가 열렸다. “7시에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간다. 모두 들 신중하게 하라”. 그는 공관지도를 보여주며 임무를 분담했다. 한길성 소령, 김대균 소령, 박원철 상사는 총장 부관실에서 우발상황에 대치하고, 양인근, 이장석, 김덕수는 성환옥 대령과 함께 경비병을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아빠, 보안사 사람들이 급한 보고를 드리러 왔대요”>
7시, 토요다 슈퍼살롱에는 6명이 탔다. 앞좌석에는 신동기(운전), 김대균, 박원철이 탔고, 뒤에는 우 대령, 허 대령, 한 소령이 탔다. 당시 슈퍼살롱 앞좌석은 지금과 같이 운전석, 조수석으로 칸이 처진 것이 아니라 긴 소파처럼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프차에는 성환옥 대령과 나머지 수사관 3명이 타고 출발했다. 7시5분, 공관촌 입구 해병초소에서 차를 세우고 검문을 했다. 당시 공관촌 일대의 경비는 해병 헌병이 담당하고 있었다. 검문 병에게 우경윤 대령이 유리문을 내리고 말했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이미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으로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7시10분, 슈퍼살롱이 총장공관 현관에 도착했다. 우경윤 대령은 헌병출신이라 총장 경호대장인 김인선 헌병대위가 금방 알아보고는 거수경례를 했고, 이에 우대령은 악수를 청했다. 급히 총장님께 보고할 사항이 있어서 왔다고 하자 이재천 소령이 우대령과 허대령을 응접실로 안내하고 다시 부관실로 와서 책상에 놓여 있는 인터폰으로 2층 거실에 인터폰을 했다. 이때 부관 실에는 김인선 대위, 한길성 소령, 김대균 소령, 박원철 상사가 서있었다. 인터폰은 정승화의 둘째 아들인 정태연이 받았다. 정태연은 당시 연대 식품공학과 3학년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정이연은 육사 2학년으로 사건당시 육사에 있었다. “아빠, 보안사 사람들이 급한 보고를 드리러 왔대요.” 7시15분경, 총장이 2층 계단으로 내려오자 이재천 소령이 뛰어가 응접실 문을 열고 총장을 안내하고 다시 부관실로 갔다.
<“이놈들, 가긴 어딜 가. 내가 육군참모총장이야. 너희들 누구 지시 받고 왔어, 대통령 전화 대, 장관 전화 대”>
응접실에는 정승화 총장이 상석에 앉고 그 앞에 길게 놓인 소파에 우 대령과 허 대령이 앉았다. 우 대령(육본범죄수사단장)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진급을 시켜주실 줄 알았는데 서운했습니다.” 이에 대해 총장이 웃으면서 “다음에 하면 되지” 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그래 보고할 사항이 무어요.” 하고 서둘러 물었다.
우대령: 김재규 재판과정에서 새로운 진술이 나와 총장님의 진술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총장: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하자. 허삼수: 여기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총장: 김재규가 뭐라고 했는데 그래.(짜증을 내며) 허 대령: 총장님과 돈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총장: “그런 일 없다고 했잖아” 하고 고함을 쳤다. 허대령: 저희들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절차상 필요하니 같이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1962년에 방첩부대장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정승화는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에 총장은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가긴 어딜 가. 내가 적어도 육군참모총장이야. 너희들 누구지시 받고 왔어, 대통령 전화 대, 장관 전화 대” 두 대령은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된 것이니 조용히 같이 가시자 했지만 총장은 연행을 거부하면서 “부관, 경호대장, 이놈들 잡아” 하면서 고함을 쳤고, 두 대령은 총장의 겨드랑이를 끼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용히 가시지요”하면서 일어섰다.
<총을 휴대한 상황에서 누가 기선을 제압하느냐, 마음속에서는 불꽃 튀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부관 실에서는 이재천 소령과 김인선 대위가 3명의 수사관들에게 앉으라고 권했지만, 수사관들은 두 장교들이 사복 속에 권총을 차고 있는 것을 금방 감지하고 소파를 그들에게 극구 양보했다. 앉으면 제압당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양측이 총을 휴대한 상황에서 누가 기선을 제압하느냐, 마음속에서는 불꽃 튀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총장의 고함소리를 들은 근무병들 7-8명(허삼수는 5-6명이라고 진술, 우경윤은 7-8명이라고 진술)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놀라 들어와 지켜보기만 하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에 유경윤이 총장의 겨드랑이를 놓고 이들 근무병들에게 “너희들은 무엇 하는 놈들이야, 나가”하고 소리를 치며 다가섰더니 그들의 일부가 슬금슬금 나갔다. 혹시 외부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밖을 살펴보고 현관으로 돌아오는 순간 총성이 울리면서 우대령이 쓰러졌다. 이 장면에 대해 우대령은 이렇게 진술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나로부터 2-3m 지점에 옅은 갈색 옷을 입은 청년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알은 우 대령의 오른 쪽 팔뚝을 위에서 아래로 뚫고 들어가 좌측 하복부 쪽에 박혔다. 위에서 밑으로 쏜 것이다. 우 대령과 합수부측은 이 청년을 정승화의 아들이거나 공관경비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누가 우 대령을 쏘았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우 대령은 그 청년이 총장의 아들일거라는 생각에 규명하지 말고 그냥 덮어두라고 했고, 우 대령이 후송된 다음 합수부는 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1994년 7월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근무하는 총기분석실장을 맡고 있던 이정필씨는 서울지방경찰서에 나와 당시의 X-레이 사진을 판독하며 사진 상으로는 우경윤의 몸속에 박힌 총알이 38구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술했다. 우경윤이 어떤 상태에서 누구로부터 총을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심증만 가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 우경윤은 미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있다. 38구경의 권총이라면 총장의 것이거나 수사관들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수사관이 우 대령을 쏘았을 만큼 복잡하게 엉키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과잉액션을 부르는 것이다> 이 틈에 총장은 소파의 은밀한 곳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부관을 부르는 벨이 울렸다. 이 소령이 뛰어나가 응접실 문을 열고 “부관입니다” 하고 복명했다. 총장은 “총리나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대” 하고 화가 난 음성으로 지시했다. 부관실로 뛰어온 이 소령이 수화기를 들고 막 전화를 돌리는 순간 응접실에서 “경호대장, 경호대장” 하고 김인선을 긴급히 부르는 소리가 또 들렸다. 총장의 위기를 감지한 김인선 대위가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가면서 응접실로 뛰어가려 했다. 이 모션을 수사관들은 김 대위가 권총을 뽑아들고 총장에게로 가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되면 연행이 어렵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박원철 상사가 왼손으로 김 대위의 손을 권총에 대고 누르면서 오른 손으로 가슴에 차고 있던 리볼버를 꺼내 개머리판으로 김 대위의 좌측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바로 이 때 복도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이 총알에 의해 현관문 가까운 복도에서 우 대령이 맞고 쓰러져있었다. 위 총소리와 동시에 부관실에 있던 3명의 수사관이 흥분하여 김 대위와 이 소령을 마구 쏘았다. 이 소령은 복부에 1발을 맞고 김 대위는 5발을 맞았다. 상대방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듯 과잉액션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심리인 것이다. 이 소령에게 두 발을 쏜 사람은 한길성 소령이었다. 한발은 복부에 맞고 다른 한 발은 요행이도 권총 피에 맞았다.
<보안사 박원철 상사 M-16들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정 총장 아들이 2층에서 총 겨누고 내려와>
두 사람을 제압한 후 박원철은 현관 밖으로 뛰어나오다가 우경윤 대령이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휩싸이면서 격한 감정이 폭발했다. 소위 전투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는 94년2월1일 수사관 앞에서 무서움과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박 상사는 하늘에 대고 권총으로 5발의 공포를 연속하여 쏘았다. 이 총소리에 공관관리관인 반일부 준위가 정문 초소 쪽을 향해 달려갔다. 박 상사는 “저 새끼 봐라”하고 소리쳤다. 이에 정문에서 현관 쪽을 감시하던 김덕수 준위 등이 앞으로 나섰다. 반준위는 다시 현관 쪽으로 달려왔다. 박 상사는 그를 향해 격발을 했지만 총알이 없었다. 이 사이에 반준위는 담을 넘어 해병대 내무반으로 피했다. 같은 시각, 한길성 소령은 복도에 쓰러져 있는 우 대령을 보고 놀라며, 허 대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 대령은 괴로운 표정에 손가락으로 응접실을 가리켰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총장이 “당신 누구야”하고 경계했다. “수사관입니다. 빨리 가시지요”하며 총장 옆으로 다가가 일어서기를 종용했다. 한편 권총 알이 떨어진 박원철은 슈퍼살롱 옆에 대기하던 신동기에게 달려갔다. “형, 트렁크 빨리 열어” M-16 소총 1정을 꺼내 옆구리 총 자세를 하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좌측 2층 계단에서 청년이 권총을 겨누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박원철은 그에게 M-16을 겨누며 “이 새끼” 하고 소리쳤다. 청년은 놀라 쏜살같이 2층으로 올라갔다. 박 상사는 복도에 더 있다가는 어느 곳에서 총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사격을 주고받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변수가 발생한다. 이는 상식이다. 박 상사는 유리창을 통해 응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총장의 좌측에는 허 대령이, 오른쪽에는 한 소령이 서 있었다. 연행을 조르고 있는 듯 했다. 박 상사는 M-16 개머리판으로 유리를 위에서 밑으로 내려쳤다. 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고 그 유리를 밟고 튀어 들어가 총장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다. “빨리 나갈 것이지 무얼 우물쭈물해”
<현관출발시간이 7시22분이었다. 불과 12분 만에 총장이 체포된 것이다>
이에 정승화는 겁을 먹었다. 총장의 양 옆에 서있던 허 대령과 한 소령이 총장의 겨드랑이를 끼자 총장은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이 때 정태연 군이 응접실문을 열고 들어와 “아버지 총 여기 있어요.” 하고 총을 내밀었다. 그러나 총장은 총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했다. 나오는 광경을 총장의 부인인 신유경(당시51세)씨가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동이 걸려있던 슈퍼살롱 뒷좌석 가운데에 총장을 앉혔다. 그 좌측에는 한길성, 우측에는 허삼수, 앞좌석에는 김대균 소령이 타고 신동기가 운전을 하고 나왔다. 현관출발시간이 7시22분이었다. 불과 12분 만에 총장이 체포된 것이다. 총장을 태운 차는 저항 없이 공관 정문을 나왔다. 해병대 초소에 이르자 헌병이 M-16 소총을 겨누며 차를 세웠다. 운전을 하던 신동기가 유리를 내리고는 “이놈들, 총장님이 타고 있는데 어디라고 총을 겨누느냐”하고 소리를 쳤다. 헌병이 차안을 들여다보자 총장이 “나다, 총장이다” 하고 신분을 밝혔다. 비상라이트를 켜고 클랙슨을 연속 울리며 달렸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바리케이드를 순순히 열어주었다. 서빙고 분실에 도착한 시각은 7시30경이었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과 범수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쓰러져 있는 우경윤 대령은 몸집이 매우 컸다. 두 사람이 달려들어 간신히 총장 차량에 태울 수 있었다. 박원철 준위는 조수 자리에 헌병 하사를 태운 후 총장 차를 운전하여 7시25분 정문을 출발하여 10분 후 수사 분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 소령이 그를 마이크로버스에 옮겨 싣고 통합병원 서울분소로 후송했다. 한편 이재천 소령은 의식을 회복하여 상황실장에 전화를 걸었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과 범수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리고 부상을 당했으니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했다. 7시40분경이었다. 그에게 시간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상황실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그는 상황실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윤성민 참모차장이 직접전화를 받았다. 이 소령은 상황실장에게 했던 보고를 그대로 한 번 더 반복했다. 7시50분이었다. 이 7시 40분에 윤성민은 총장이 합수부에 의해 연행된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윤성민 역시 94년3월8일 918호 검사실에서 이를 인정했다. 보안사 권정달과 우경윤이 10.26과 관련하여 연행한 사실을 상황실에 와서 인지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하지만 윤성민은 어찌된 일인지 역사바로세우기재판 제17차 공판정에 나와 이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총장을 불순분자들이 납치해간 것으로 알고 비상령을 내렸으며, 병력도 그래서 동원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변호인들이 육성녹음을 들려주자 그때서야 시인을 했다. 윤성민을 증인으로 세워놓고 변호인과 검사가 벌이는 신문 과정에서 재판장이 편파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변호인들이 일괄 사퇴를 하게 되었다. 사실상의 법관기피였던 것이다.
<정 총장이 연행되어 공관지역 유유히 빠져나간 다음에 33헌병대와 해병대 헌병 간에 총격전이>
윤성민은 전두환 시절에 국방장관을 5년간 했다. 당시 전두환은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추진하던 ‘영 기점 예산제도’(zero base budgeting)를 행정부 전체에 도입하라 지시했고, 윤성민 장관은 군에 역사상 최초로 ‘예산개혁’을 추진했다. 그동안 장병들은 장비와 물자를 공기나 물처럼 자유재로 인식했었다. 윤성민은 이런 장병들에게 비용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는 일종의 정신 혁명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지금까지 가장 훌륭한 국방장관이었고, 가장 훌륭한 일을 했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에서는 입장과 철학의 차이 때문인지 일관되지 않은 진술을 했다. 총장실 이 소령과 김 대위는 통합병원에서 20일간 치료를 받고 서빙고 분실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80년1월31일 풀려났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94년 2월 당시 모두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정 총장이 연행되어 공관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간 다음에 33헌병대와 해병대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했다. 33헌병대는 11월 초순부터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합수부에 배속되어 합수부의 지시에 따라 수사업무를 보조하고 있었다. 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사19기)은 12월11일 오후에 허삼수 로부터 정승화 연행에 따른 임무를 부여받았다. 12일 오후6시까지 헌병 병력 50명을 이끌고 수사 분실에 와 대기하고 있다가, 연행조가 출발하면 즉시 한남동 로터리에 가서 대기하고, 요청이 있을 때 공관으로 진입하여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연행통로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12일 오후 황길수 한성동 차영복 대위를 불러 연행계획을 알려주면서 우발사태에만 대비하고 가급적 충돌을 피하도록 조심할 것을 지시했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1대의 지프차와 2대의 마이크로버스에 65명의 병력을 태우고 오후 6시경에 수사 분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연행조가 출발함과 동시에 출발하여 7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공관의 외곽초소로부터 150m 떨어진 한남동 로터리 근처의 슈퍼마켓 주차장에 도착한 후 거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한 후 10분 정도가 경과한 시각에 공관에서 총성이 났고, 공관 울타리 바로 밖에서 총소리를 들은 성환옥 대령은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최석립 중령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쳤다. 최석립 헌병대장은 황길수 대위 등 6명에게 해병 위병소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한성동 대위가 이끄는 팀은 총장공관으로 보내고, 차영복 대위가 이끄는 팀은 해병대 내무반으로 보냈다. 한성동 대위가 이끄는 팀이 공관에 갔을 때는 이미 총성이 멎은 상태였다. 그래서 성환옥 대령은 한성동 대위 팀을 공관 밖에 대기시킨 후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자 곧 총장을 태운 차량이 공관 외곽초소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무전을 접수했다. 이에 성환옥 대령은 한성동 팀에게 철수를 지시하고 그들과 함께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병대 매복조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장이 이미 연행되어 간 다음이기에 성환옥 대령은 해병대와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해병대 요구에 순순히 따르라고 지시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사관이 반 준위를 향해 드르륵 M-16을 갈겼다>
반면 위병소와 해병 내무반으로 간 황길수 대위 및 차영복 대위가 이끄는 팀들은 매우 난처한 상황을 맞게 됐다. 차영복 대위 팀이 해병내무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병 내무반에 비상이 걸려 있었다. 총장공관을 관리하던 반인부 준위가 해병내무반으로 가서 불순분자들이 공관을 습격했다는 허위제보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차영복 대위 팀이 해병내무반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병대 주력이 이미 실탄을 지급받고 배치를 완료한 상태에 있었고, 나머지 일부는 내부반에서 실탄을 지급받고 있던 중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차영복 팀은 내무반으로 가서 내무반에 있던 병사들을 제압했지만 곧이어 역공을 당했다. 밖에 나가 있던 해병들이 돌아와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병대원들이 합수부요원 40명을 마이크로버스에 쳐넣고 감금>
밖으로 배치돼 있던 30여명의 해병이 두 갈래로 나누어 한 팀은 해병대 내무반을 장악하고 있던 차대위 팀에 사격을 가했고, 다른 한 팀은 위병소를 포위하여 황길수 팀에게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위병소에 있던 황길수 대위 등 4명이 죽고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반면 해병 내무반에 갔던 차대위 팀은 차대위의 지시에 따라 무장을 버리고 연금을 당했다. 이처럼 이들 33헌병대는 연행 시에 공관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연행업무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정승화는 자서전에서 이런 취지의 글을 썼다. “반인부 준위가 공관의 정문 쪽에 있는 내무반 안을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보초병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사복 수사관들이 소총으로 보초병들을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 반 준위와 수사관의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수사관이 반 준위를 향해 드르륵 M-16을 갈겼고, 반 준위(1987년 당시 택시기사)는 총탄들이 귓전을 스치는 상황 하에서 높은 담을 뛰어 넘어 해병대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해병대를 관장하던 해병 황 소령의 사무실에서 반 준위와 황 소령 그리고 해병대원들이, ‘수사관들이 데려온 경호원 복장을 한 수많은 부대원들’에게 질질 끌리고 짓밟히고 무자비한 폭행을 당해 피가 튀었으며, 이 때 밖에 나가 있던 해병대 병력이 들이닥쳐 이들을 제압했다. 이제는 해병대원들이 합수부 요원들을 붙들어 개 패듯 한 뒤 바깥에 세워둔 마이크로버스 안으로 떠밀어 넣었다. 해병대원들은 40명쯤 되는 합수부 요원들과 헌병들을 버스에 가두어 놓은 뒤 이들을 에워싸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자서전 173쪽) 자서전의 내용은 일목요연하지 않고 들쑥날쑥하여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특히 수사관이 공관에서 반 준위에게 M-16을 난사했다는 것은 믿겨지지 않는다. M-16을 난사했다면 반 준위는 높은 담을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
<부질없는 행동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다치고 숨진 것이다>
이상은 모든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필자가 역은 것이다. 검찰 조서에는 전속부관, 경호대장, 당번병, 반 준위 등 정승화 측 사람들의 진술이 담겨있고, 모든 수사관들과 당시 헌병 요원들의 진술이 모두 담겨 있지만 이들의 진술은 기억력과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위에 정리한 내용들은 필자가 이들의 진술 중, 군의 상식과 전술적 식견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선택하여 정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승화가 조사에 순순히 응했다면 사상자도 없었을 것이고 양 측이 병력을 동원하는 극한 상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시기에 이르기까지 정승화는 군 내외로부터의 의혹에 시달려왔다. 그렇다면 신분이 확실한 육군범수단장인 우 대령과 보안사의 허삼수 대령이 수사 분실로 가자고 했을 때에는 이미 저항해야 별 도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어야 했다. 이 순간에 소리를 지르고 저항한 것은 매우 미련하고 무모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부질없는 행동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다치고 숨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