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 만에 북한 탈출한 국군포로 최초의 수기
약 달포 전부터 크로싱이라는 국산영화가 영화관마다 滿席(만석)을 이루고 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非赤色(비적색) 영화의 흥행성공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보는 非赤色 영화 흥행 성공>
스토리는 단순명쾌하다. 함경북도의 한 탄광촌에서 탄을 캐는 광부와 그 아내와 아들의 이야기다. 폐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내의 건강회복을 위해 기르던 애완견을 잡아 먹이자 아들이 화를 낸다. 이웃집에선 ‘남조선 TV녹화’를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주인공(차인태扮)은 아내 약을 구하러 얼떨결에 두만강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독일대사관으로 난입한다. 그는 결국 서울로 갔다.
그러나 자나 깨나 병든 아내 생각, 보건소에서 약을 공짜로 준다니까 신나서 약봉지를 들고 도로 고향으로 가려는데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아들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으로 남았다.
그 아들도 탈북 한다. 소개자의 중개로 부자의 휴대전화 통화가 이루어진다. 몽골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어찌 어찌하여 홀로 中(중). 蒙(몽) 국경을 넘은 어린 아들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에서 몇 날 몇 일을 굶고 걷다가 쓰러진다. 그는 영영 못 일어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싸늘한 아들의 볼에 볼을 비비는 아버지. 여기서 관객은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며 손수건을 꺼낸다.
이건 실화다. 한번 있었던 실화가 아니라 매일 밤낮으로 되풀이 되고 있는 실화들의 한 콤마를 배우들이 연기했을 뿐이다.
우리 민족은 先代(선대)들이 무슨 큰죄를 저질렀기에 저토록 기막힌 비극을 반세기 이상 되풀이해야 하나.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비극을 일상적으로 맛보고 있는 동포는 얼마나 될까?
그 비극 중에서도 더 지독한, 한 개인의 50년간의 비극을 엮은 책이 있다. 휴전을 불과 3주일쯤 앞둔 1953년 7월 4일 밤 북한강 옆 수도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허재석 하사는 윙~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찔했다. 팔과 다리 뼈속 깊이 포탄 파편이 박혀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그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인터넷으로 욕지거리하는 젊은이들, 아오지 탄광으로>
그로부터 2000년 7월 탈북, 고향인 진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48년 동안 허 씨는 매일 밤낮으로 ‘똥 간나 새끼’ 소리를 들어가며 1천여m 땅속에서 석탄을 캐내며 살았다. 강냉이죽도 제대로 못 얻어먹으면서─.
휘발 유값이 나날이 올라도 아랑곳없이 매일 혼자타고 출퇴근하는 한국인, 미국 쇠고기를 핑계로 청와대를 쳐들어가야겠다는 한국의 데모 폭도들, 이름은 감추고 비겁하게 인터넷으로 욕지거리나 일삼는 젊은 한국인들...이들은 허씨가 반세기동안 ‘똥 간나 새끼’ 소리를 들으며 탄을 캐던 아오지탄광 1천m 땅속을 한번 ‘관광’으로라도 보내고 싶은 群像(군상)들이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부모님 모시고 행복하게 살던 허씨,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6.25로 징집된 청소년과 기타 수십만 장병 가운데 허씨와 같이 반세기의 고역을 치룬 사람(국군포로)은 5만 명이 넘는다고 허씨는 밝히고 있다. 허씨의 이 증언은 중공의 홍위병 출신으로 개과천선한 張戎(장융)이 쓴 MAO(마오=毛澤東)의 다음과 같은 대목과 일치된다. 좀 길지만 중요한 기록이라 인용해 본다.
<모택동이 한국군 포로 보내지 말라, 김일성에 지시>
“...중국인 전쟁포로 2만1천3백74명 가운데 3분의 2는 공산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절, 그 대다수가 대만으로 갔다. 본토로 간 3분의 1은 (적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叛逆者(반역자)의 딱지가 붙어 모택동정권이 끝날 때까지 모진 취급을 당했다. 또 한 가지, 모택동은 한민족의 불행에 잔혹한 공헌을 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모택동은 휴전당시 북한에 불법 억류된 6만 명 이상의 한국군 포로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결정에 손을 빌은 것이다. 한국군 포로를 보내지 말도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이다.(이때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 彭德懷(팽덕회)에게 이양하고 있었다) 한국군 포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에서도 가장 후진 벽촌으로 분산수용했다. 생존자가 있다면 지금도 이런곳에 그대로 수용돼 있을 것이다.”
허재석씨는 바로 그런 곳의 한군데인 아오지탄광에서 그의 청춘과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갇혀 산 것이다. 휴전 조건의 하나인 포로교환 약속~휴전협정 제3조 51~59항~에 따라 유엔군측이 북한으로 송환한 인민군 포로는 총7만5천823명이었는데 비해 공산군측이 돌려보낸 국군포로는 8천3백21명에 불과했다.(U.S.Army IN THE KOREAN WAR:Truce Ten t and Fighting Front 514p)
이렇듯 빨갱이들은 無道(무도)한 놈들이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대정부는 이 무도한 자들을 상대로 ‘대화’를 못해 안달을 했다. 허씨와 같은 제 백성이 50년 동안 잔혹무도한 공산당들에게 인간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희망 하나로 생을 이어왔다.
<“주인은 아이 셋을 죽여 쇠고기라고 속여 팔았다”>
‘내 이름은 똥 간나 새끼였다’라는 제명으로 된 363p의 허씨의 수기는 국군포로로서는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이 수기 가운데 분노와 비애를 느끼게 하는 기막힌 대목 몇 군데를 여기 소개한다. 김정일을 흠모하는 자들은 한번쯤 읽어볼만 하다.
“포로들이 성의 없이 치료한다고 말하면 의사들은 ‘이놈의 새끼 포로인 주제에 투정을 해. 너희들은 모두 죽어도 북조선의 국민이 아닌 이상...개보다 못한 놈들이야─”(34p)
“지하 막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 밖에 나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발싸개도 없이 신발을 신고 다니다 보니...신발을 억지로 벗으면 살 껍질이 벌겋게 묻어났고 나중에는 피가 나왔다.”(35p)
“탄광 안에서 갱이 붕괴되어 포로가 죽어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포로들을 또 그 작업장에 밀어넣어 일을 시켰다. 포로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38p)
“...지금은 총구가 가슴을 겨누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줄을 서고 열을 맞추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업)계획을 못 다한 포로들은 밤12시가 넘도록 비판서를 써야 했고 호된 비판을 받고 나서야 ‘하루 더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숨을 쉬며 차디찬 수용소 잠자리 속으로 들어가는 군군포로의 애달픈 삶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61p)
“...안전원이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배낭 안 무엇이 들었소?”하고 묻자 집주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안전원이 배낭을 빼앗아 열어보니, 손과 발목, 내장과 머리가 들어 있었다. 집안을 수색하자 사람의 살점을 떠 김칫독에 차곡차곡 소금에 절여 놓은 것이 발견되었다. 주인은 세 명의 아이들을 죽여 쇠고기라고 속여 팔았던 것이다.”(91~92p)
<“팬티 바람으로라도 돌아가겠다.”고 말한 재일교포 평생 정치범수용소에>
“노동자들만 설비자재를 훔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장을 보위한다는 안전원도 공장자재를 훔쳐서 팔아먹는다.”(94p)
“당 비서가 요구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자기의 몸도 허락한다. 1994년도 이후에(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여자들은 모두가 매춘부처럼 몸을 주고 입당 했다는 것이다”(94p)
“북한에는 도둑들이 너무나 많다. 돼지를 밖에서 키울 수 없어서 집 윗방이나, 단칸방일 경우에는 부엌 옆에 굴을 파고 그곳에서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다.”(96p)
“인민군대들은 돼지를 메고 가면서 ‘장군님의 戰士(전사)들이 먹고 싶어 왔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인민들이 인민군대를 도와주는 것은...장군님의 말씀인데...갖다 주지는 못할망정 군대가 직접 와서 가져가는데도 말썽을 피워?”(96p)
“...속옷도 입지 못하고 겨우 단벌옷으로 살아갔는데 옷이 너무 더러워 빨아서 밖에 널어놓았다. 그런데 넝마같은 옷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도둑맞은 사람은 입을 옷이 없어 앞을 대충 가리고 딴 집에 옷 도둑질을 갈수밖에 없었다.─”(98p)
“5만이 넘는 국군포로들의 인생을 망쳤고 6.25납북자 8만 여명과 정전 후 평화적인 생활을 하는 한국국민 약 480여명을 납치하여 그 가족들에게 사무치는 한을 남겼다.”(101p)
“재일동포 한사람은 북한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회를 했다...다 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가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한평생을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냈다.”(113p)
<“개인에게 외화가 들어오면 85%는 국고에 넣게 돼 있다”>
“함경북도 은덕군 금송리에 사는 김헌이라는 사람은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가 돈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청진 외화은행에서 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은행원은 ‘3천 달러가 왔다’면서 450달러만 주더라는 것이었다. 김헌씨가 당연히 항의를 했다. 은행측은 ‘외화가 들어오면 85%는 국고에 넣기로 되어있다’고 말했다”(159~160p)
“내가 포로가 되어 끌려간 곳은...작업조건이 열악하고 가스폭발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지반이 약해 붕괴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한해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사를 당하는...악명높은 아오지탄광이다...아침에 자고나면 성애가 가득 끼어있고 뼈마디마다 소리가 나고 물이 없어 세면도 못한다. 치약. 비누는 호화로운 사치일 뿐. 밖에 나가 햇볕을 쬐도 안전원들의 총구는 항상 가슴을 겨누었다. 그저 안전원들이...줄을 맞추라며 정강이를 걷어차는 수모를 당하면서 걸어야 했다─”(198p)
“국군포로가 말 한마디 실수해도 붙잡혀 가면 (보위부가) 돌팔매질로 살던 집 유리창을 모두 깨고 가족들도 집에 살 수 없게 했습니다.”(203p)
“앞과 옆, 뒤에서 총을 겨누고 수용소에서 아오지탄광 굴속으로, 굴속으로, 굴속에서 또 수용소로 다람쥐 챗바퀴 돌듯 일 년 열두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시키고 있으면서 잠자는 곳은 돼지우리요, 먹는 것은 돼지죽보다 못한 것이 우리 국군포로들의 삶이었다. 악의에 찬 시선과 끌고 다니는 곳마다 천대와 멸시가 따라오는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국군포로들이었다.”(219~220P)
“수백 명의 포로들을 열을 세우고 줄을 지어 후방으로 갈 때의 일. 내무원들의 통솔 하에 하루에도 백리가 넘게 걷자니 발이 부르트고, 먹지 못해 넘어지기 시작했다. 내무원들은 총을 겨누어 빨리 일어나라고 하면서 세번 셀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즉석에서 쏘아 죽였다. 그렇게 수십명의 국군포로들이 말 한마디 못해보고 황천객이 되었다.
<‘대중 앞에서 대변보시오’ 해놓고 바지 내리고 변 보자 따다-ㅇ 총 두발 잘생긴 젊은이 가슴에 붉은 피가...>
계속 행군하다 생리현상 때문에 어떤 포로가 큰소리로 “대변 좀 보게 해 달라”...고 했다. 내무원이 와서 ‘누가 대변보겠다고 했나, 나오시오’ 소리치자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가 나왔다... 내무원은 ‘대중들 보는 앞에서 대변보시오’했다. ...키 크고 잘생긴 포로는 바지를 내리고 앉아서 변을 보았다. 이때 내무원의 총이 따탕! 하며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키 크고 잘생긴 포로의 가슴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앉은 상태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갔다─.”
잔인무도한 장면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다. 가스폭발로 죽은 수많은 국군포로들, 굴이 무너져 갱속에서 깔린 동료들의 시체를 찾다가 줄인줄 알고 잡아당긴 것이 줄이 아니라 압사된 몸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내장을 잡아당기고 있던 일, 탄광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한꺼번에 80여명이 숨졌는데 시체를 분간 못해 호명을 하여 대답이 없으면 죽은 걸로 처리했다는 등등... 이루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을 허재석씨는 반세기동안 겪으며 살아남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그들(북한당국)이 요구하는 간첩과 비전향 장기수 60여명은 북한으로 보내주고 우리가 데리고 와야할 국군포로는 단 한명도 귀국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건 또 어떤 경우인가.
한국은 몇 십만 톤의 비료와 식량을 북한에 갖다 바치면서도 국군포로 문제는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250p)
허재석씨의 절규는 이어진다. 그냥 보면 ‘밥은 숟가락으로 먹는다.’는 식의 평범한 말 같지만 그의 처지에 서서 읽으면 가슴 찢어지는 斷腸(단장)의 호소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들은 조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무너질 위험에 처했을 때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 입대를 한 열혈청년들이었다. 조국을 위해 열심히 싸웠기에 나는 화랑무공훈장도 받았고 표창도 받은바 있다.
<나는 조국을 잊어버린 적 없어 하지만 조국은 날 영영 잊었다>
그러나 중공군 놈들의 포격으로 나는 심한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나는 그곳에 가서도 50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고 언젠가는 대한민국에 가서 잘 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나를 영영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5만 명의 국군포로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5만의 포로가 이젠 거의 다 죽고 생존자는 몇 백 명에 불과하지만 한국정부는 그들을 옛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주어야 하며 그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250~251p)
마지막으로 허재석씨는 ‘아-아- 내 조국,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그리웠던 고향땅’하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대한민국, 내 조국을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싸웠기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 敵地(적지)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삶을 이어온 끈질긴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광화문에서 배부른 흥정하며 때려 부수기를 일삼는 폭도들도 틈 있으면 한번 읽어보라. 인생관이 달라질 것이다.
(허재석씨의 동생 허태석씨는 98~99년 형님과 10여명의 다른 국군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부산에서 택시기사를 하며 모은 돈 1억5천여만 원을 써가며 한. 중 국경지대를 10여 차례 왕래했다.(한국논단 2002년 9월호) 형 재석씨는 그 덕에 탈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 태석씨는 안타깝게도 형 재석씨의 완전 귀국을 못 본채 200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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