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비화 58년 전 가버린 어느 여간첩의 숨겨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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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씨를 사랑합니까?”
“…아뇨. 그가 사라진 이후 애정이 식었습니다.”
1950년 6월15일.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의 한국인 여성이 군사법정에 서서 변호사에게 답했다. 희대의 ‘붉은 간첩’,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린 김수임이었다. 한때는 엘리트 신여성으로 이름을 날렸고, 위트 있는 말재주로 사교계 명사들을 사로잡았던 그였지만, 고개를 숙인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처참한 몰골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학교 선배였던 여류시인 모윤숙은 이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수임의 얼굴은 초췌하고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지워진 죄목은 ‘간첩이적행위’. 미8군 헌병사령부 대장인 존 E.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며 그로부터 미군 철수계획 등 주요 정보를 빼내 북측에 전달했고, 사회주의식 투쟁을 선언해 체포령이 내려져 있던 남로당원 이강국을 은닉하는 한편 그의 월북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른바 엘리트 신여성이었고 사교계의 유명인이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해 영어회화에 능했고, 지적인 화술과 당당한 매력을 뽐냈다.
국내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도 자주 얼굴을 드러냈고, 그들과의 친분도 두터웠다. 그런 그가 미군 간부에게 접근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공산주의자 남자 때문에…. 온 나라는 한편의 소설 같은 이 사건에 주목했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1950년 6월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6·25가 발발한 탓에 27일로 예정됐던 사형은 이틀 앞당겨 시행됐다.
그런데 반세기 전 39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형을 당한 이 여성에게 최근 세상이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 당시 미군 헌병사령관이었고 김씨와 동거했던 존 E. 베어드 대령에 대해 미국 육군성이 조사한 기록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 해제된 것이다.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보고서의 복사본을 입수해 <월간중앙>에 제공했다.
AP통신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당시 김씨의 증언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내렸다”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존 E.베어드 소령이 북측에 빼돌릴 만큼의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기사화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간첩 김수임’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김수임의 실화는 영화·소설·연극, 그리고 최근에는 드라마로까지 극화됐지만, 그 중 하나라도 진정한 김수임의 모습을 비춘 것이 있을까?
김씨의 간첩 행적에 관한 의문을 품기 전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자식인 그가 어떻게 당대 최고의 여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는지 그의 과거부터 거슬러 올라가보자. 1911년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수임은 열한 살에 민며느리로 팔려간다. 김씨의 여동생은 “당시 어머니가 계모여서 썩 예뻐하지 않아 남의 집 수양딸로 줘버렸다. 아버지가 가 보니 시골에 딸을 팔아버렸기에 찾아다 서울에 데려다 놨다”고 증언했다.
빈농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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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이후 김씨는 성공회의 한 기숙사에서 기거했는데, 이때 같은 방을 쓰던 이가 시인 모윤숙이다. 이화여전 선배이기도 한 모윤숙은 이후 김수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모씨가 이강국을 김수임에게 소개해주니, 인연이 곧 악연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강국. 그는 잘생기고 훤칠한 미남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난 엘리트였다. 보성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재학 중 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고 독일 베를린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건국준비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정치활동을 펼치며 투옥되기를 반복했다. 모윤숙의 회고에 따르면 김씨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모씨가 이강국이 갇힌 감옥에 사식과 책 등을 넣어주기 위해 갔던 날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광복 후 재회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씨가 유부남이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둘은 공개적으로 연애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수임이 종로에 세를 얻어 살고 있었는데 이강국이 놀러 와 셋이 사진을 찍고 놀고는 했지. 사실 ‘김수임은 저렇게 자그마한데 이강국은 뭐가 그리 좋을까?’하는 생각도 했어.”
김씨의 후배가 회상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강국은 옥고를 치르고 좌익 정치활동에 바빠 안정적으로 김씨와의 만남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드문드문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었다. 전숙희의 소설에는 당시 김씨의 애절한 심리가 묘사돼 있다.
“김수임은 그를 붙잡을 수도, 그렇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 이강국의 가시밭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없는 김수임으로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를 미칠 듯 사랑한다는 사실 외에는 그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숙희, <사랑이 그를 쏘았다> 중-
이쯤에서 모윤숙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씨는 여류시인으로 활동하며 후에 민족주의를 담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김수임의 활동 당시에는 사교계의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유령 같은 군사재판… 기록 일절 남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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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학력에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미군 방첩대(CIC)는 내부 보고서에서 이 클럽을 가리켜 “일류 여대를 졸업한 엘리트 호스티스들의 집단으로, 한국 고위 관리와 군 장성들을 접대한다”고 적었다. 김씨 역시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며 미군을 비롯한 명사들과의 친분 관계를 쌓아나갔다. 다시 김씨의 과거로 돌아가보자. 대학을 졸업한 후 김씨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처음 근무한다.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세브란스병원 치과과장의 비서 겸 통역관으로 고용된 것이다. 고등교육을 마치고 일하는 전문 직업여성이 없었던 당시 김씨는 그 존재만으로도 화제가 됐고 <조선일보>가 발행하던 잡지 <여성>의 창간호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가 크게 실리기도 했다. 1946년에는 세브란스병원에서 반도호텔로 직장을 옮기면서 또 다른 미군과의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반도호텔은 사실상 미군정 사무실로 임시 사용되고 있었는데, 김씨의 통역 실력은 이곳에서도 화제가 됐던 것. 베어드 대령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 것도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미군의 비서와 통역관으로 일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김씨의 간첩행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가 간첩이었다면 어떤 구체적 행동을 했을까?
그의 재판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이 사실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김씨는 민간인임에도 군사법정에서 재판받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재판기록은 일절 남아있지 않다. 당시 김씨가 고문이나 강압에 의한 자백을 했다는 정황도 있다. 김수임의 일생을 영화화한 영화감독 이원세 씨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을 보자.
“어떤 수사관은 ‘김수임이 형무소에서 사형장으로 갈 때 걷지 못할 정도여서 리어카에 실어 형장으로 내보냈다. 의사가 감방을 계속 들락날락했다’고 말했다.”
베어드 보고서 역시 김수임의 자백 내용이 강압에 의해 허위로 작성됐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었다. 당시 재판에 미군 관계자가 한 명도 관여하지 않아 진행 과정을 일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은 한국인이 피의자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증언이 나오도록 만든다”고 말하며 불신감을 나타냈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근거는 베어드 대령에 대한 보고서와 본인의 진술 내용, 주변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 기록된 ‘베어드 보고서’뿐이다. 이 보고서의 앞부분에는 김수임이 재판에서 진술한 내용과 그 요약본이 포함돼 있다. 김수임과 동거하면서 사실혼 관계까지 갔었다는 베어드 대령은 김수임이 체포된 즈음 본국으로 돌아갔다.
베어드 보고서에 의하면 그의 상관들이 김씨와의 관계가 폭로될 것을 두려워해 그에게 돌아가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이 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은 베어드 대령은 자신이 김씨와 그 어떤 ‘개인적 관계’도 맺지 않았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영어가 유창하고 실적 좋은 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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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사를 했던 오제도 검사 역시 후에 수기 형식의 글을 통해 두 사람의 동거 사실이 공공연했음을 입증했다.
“서울 옥인동 19번지 집(두 사람이 함께 살던 집)은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이 지은 것으로, 정원만 60여 평이나 돼 당시 서울 시내에서 최고급 수준의 주택이었다. 사랑에 빠진 베어드 대령이 김에게 사준 집이다. 이 집에서는 매일 밤 화려한 파티가 열렸다. 베어드 대령과 김은 정부 요인, 군 장성, 경찰 수뇌부, 대사업가 등 내로라 하는 세도가들을 초청해 술과 노래, 댄스를 즐겼다.”
베어드 대령은 미군인 자신이 유부남임에도 한국인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상부에서 탐탁잖게 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보고서에서 김씨에 대해 ‘자신이 고용한 비밀 정보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적 관계에 대한 증언은 둘째치고, 김씨가 각종 정보를 베어드 대령에게 가져다준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베어드 대령은 “그는 내가 일하는 범죄조사단에 아주 유용한 정보원이었다”고 진술했고, 이는 다른 군 관계자들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다. 베어드 대령은 경찰 업무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정보원이 절실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진술한 김씨와의 첫 만남이다.
“31전투포병단이 댄스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중 한 테이블에서 파프키 대위가 마리안 모(모윤숙)라는 이름의 한국인 여성을 소개해줬습니다. 아주 영어를 잘했고, 알고 보니 한국에서 유명한 여류시인이더군요. 우리는 당시 정부 물품을 아주 많이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테이블에 있는 동안 계속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를 위해 비밀리에 일해줄 사람을 몇 명 찾고 싶다고 말했지요. 마리안 모가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을 몇 명 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 1주일인가 10일 후 김수임 씨와 약속을 잡았습니다. 당시 그는 본부에 있는 사령관 사무실에서 미국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었죠. 여러 가지 계약건에 관한 번역 업무였습니다.”
베어드 대령은 비교적 소상히 김씨가 자신의 정보원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진술한다. 광복 후 각종 크고 작은 범죄가 벌어지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김씨는 미국인인 자신이 알아내기 힘든 정보를 제공해 도난당한 물품이 어디에 있고 폭동의 주모자는 누구였는지 등을 알아내게끔 도와줬다는 것이다. 보고서의 정황을 살펴봤을 때 김씨는 미군을 위한 정보원 노릇을 하다 베어드 대령의 동거녀가 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베어드 대령 본인은 “정보원들은 미군을 위해 일하고 한국인들 사이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줘 항상 적이 많다.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김씨에게 집을 얻어준 것일 뿐”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김씨가 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끄나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해 주변에 적을 만들게 됐다면 간첩 혐의를 받기 시작한 것도 누군가의 의도는 아닐까?
이강국과의 관계를 알고 김씨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까? 김씨의 혐의는 총 19가지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의 지프 차량으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 줬다. 1946년 12월 이강국이 북한에서는 쓸 수 없다며 남로당에 전달하라고 보낸 엔화 정치자금을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옮기고 그 일부를 받았다.
미군이 1949년 5월까지 철수한다는 사실을 베어드 대령에게 듣고 북측에 전달했다. 1950년 미 대사관이 남한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북측에 전달했다. 베어드 대령은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며 “내 분야에는 언제 병력 이동이 있을 것인가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보를 받을 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 정보는 일본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입수한 ‘베어드 보고서’의 복사본. |
친모의 흔적 더듬는 혼혈인 아들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준 부분에 관해서도 다시 한번 간첩혐의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남한과 북한이 하나의 정부를 구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던 시점이었다. 개성으로 넘어갈 때 검문 절차가 있기는 했지만, 이를 어긴다고 해도 ‘월경 금지에 관한 법’ 정도가 적용될 뿐이었다. 이강국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와준 것에는 범인은닉죄와 방조죄 정도가 적용됐을 것이다.
김씨 본인은 사망했고 재판 기록도 없다. 오랜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관계자가 사망한 이 시점에 김씨의 진짜 모습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김씨의 집에서 대량의 공산주의 서적과 무기가 한꺼번에 발견됐다는 당시의 수사기록도 의심스럽다. 당시 군법회의 법무사는 “물적 증거가 풍부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피고인 자백만으로도 증거가 되던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대량 증거들이 막상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석연치 않다. 수사 과정에서 남로당 군사부 빨치산책인 사형수 이중업이 도주하도록 도와줬다는 혐의 역시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사건 당시 김씨의 흉악한 범죄에 붉은 색을 덧칠하는 자극적 요소였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기소 내용 중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김씨가 진술한 내용에서도 이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김씨의 죄가 부풀려졌다는 의혹 중 하나로 꼽힌다.
김씨의 간첩 혐의에 둘러싼 여러 가지 의혹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친아들, 김원일(59) 씨 덕분이다. 김씨가 체포된 후 한 살배기였던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모윤숙 씨는 그를 돌봐줄 사람을 찾았다. 당시 모씨에게 아이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미국인 여성의 증언이 남아있다.
“모씨가 내게 아이를 봐줄 수 있느냐고 물어 나는 그녀와 함께 김씨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안은 온통 미국산 물건으로 치장돼 있었고, 아기를 위한 진동의자도 있더군요. 가구에서 음식까지 모두 미국 물건이어서 놀랐어요. 제가 ‘아이를 봐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모씨는 베어드 대령에게 전화하더군요. 후에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씨의 아내인 김마리아 여사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들었어요. 그는 아기가 베어드 대령의 아기라고 하더군요.”
김씨가 아이를 출산한 병원 관계자에게서도 베어드 대령의 이름은 거듭해서 나왔다.
“김씨는 우리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해 7월에는 우리가 아이를 맡았었죠. 그는 크라이슬러 차(베어드 대령의 차)를 몰고 병원으로 왔어요. 또 아이를 데리고 호놀룰루로 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아기 아버지의 부인이 와서 두렵다고 했어요.”
당시 김씨의 품에 안겨 있던 아들 김원일 씨는 후에 청량리 위생병원 간호사였던 여성과 그의 남편의 양자로 들어가 한국에서 성장했다. 김원일 씨는 중학교 때 생모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원일 씨가 20세가 되던 해 그들 가족은 세상의 관심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하늘에서 그의 친모가 돌본 덕분일까? 다행히 그는 좋은 양부모 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 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강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베어드 보고서가 기밀 해제되자 이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관심과 노력 덕분에 이 보고서의 내용이 언론에 알려지게 됐다. 베어드 대령은 1980년 사망했다.
이 사건의 진실의 대부분을 알고 있는 그가 죽음으로써 ‘김수임’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서 또 한 발 멀어졌다. 베어드 대령과 원일 씨는 생전에 한 번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1 김수임(뒷줄 오른쪽)과 모윤숙(뒷줄 왼쪽)이 1945년 디자이너 노라노 씨(앞줄 가운데)의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2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당시 상관인 치과 과장과 함께한 김수임. 3 지인과 함께 자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수임(오른쪽). 4 1936년 잡지 <여성>의 창간호에 등장한 스물다섯 살의 김수임. |
김씨가 체포된 이후 그의 측근들은 끈질기게 베어드 대령에게 “법정에서 그녀에 대해 진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어드 대령은 끝내 외면했고, 김씨가 사형에 처해지기 몇 주 전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하던 당시 이미 그곳 언론들이 김씨 사건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리자마자 그는 기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한 유명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는 베어드의 부적절한 행동을 맹렬히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의 일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어드 보고서를 보면 그도 나름의 고충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껏 김씨 사건에 관련된 유일무이한 기록과 다름없는 베어드 보고서지만, 이 보고서에 적힌 증인들의 진술에 대해서는 조사를 실시한 미군 측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군 내부의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진술의 진실성이 의심된다”고만 기재하고 있다. 어떤 진술자는 베어드 소령에 대해 “여자와 자주 어울리고 술을 좋아하고 파티를 즐겼다” “그는 부대에 압류된 물품을 마음대로 유흥에 사용했다”고 말하는 반면 “매사에 공정한 상관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씨의 집에 밤늦게 들어가 아침 일찍 나오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고, 정반대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군대라는 조직 특성상 베어드 소령의 향후 거취에 밀접하게 관련된 이 조사에서 군인들이 말하기를 꺼리고 진실을 왜곡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수임, 그 이름 석 자가 사회에 불러일으킨 엄청난 파장과 달리 그에 관해 이 세상에 남겨진 기록과 자취는 너무 미미하다.
모윤숙 씨와 전숙희 씨가 각각 책과 소설 등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남겼고, 연극인 윤석화 씨가 열연했던 <나, 김수임>은 다시 한번 그의 한 많았던 인생을 조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들 작품이 지나치게 ‘여인의 사랑’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지적도 나왔다. 격랑의 한국정치사에 휘말린 비극을 사회적 시각에서 보지 못하고 낭만적 극화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태어났다면 운명은 아주 다르게 흘렀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주변인들의 기억 속에 김씨는 재기 넘치고 총명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교클럽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외모보다 내면의 매력이었다고 지인들은 회상했다.
김씨가 법정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이라고 말했다던 이강국. 그 역시 북한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거쳐 최고인민회 초대 대의원을 지낸 그는 한국전쟁 휴전 무렵 일명 ‘남로당 사건’에 휘말려 체포됐다. 김씨는 북한을 위해 일한 간첩으로 몰려 남에서 죽은 반면, 이강국은 미국을 위해 일한 스파이로 몰려 북에서 사형당했다. 마치 한 편의 비극 같은 운명이었다.
김씨 사건은 흔히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활동했던 무희이자 간첩 마타하리 사건과 비견되기도 한다. 두 사건 모두 여성이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 두 사건이 ‘의혹이 명확히 해명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공통점을 추가하게 됐다.
마타하리 역시 처형된 이후 대단한 스파이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일종의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에 대한 의혹도, 진실도 앞으로 완전히 밝혀지기는 어렵겠지만 이 사건이 던져주는 역사적 교훈은 한국사회에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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