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시작 세계 9위의 군사력 확보한 대한민국 국군
한국군에는 불가능이 없다. 그들은 마치 요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공산 침략자의 공격을 받고 무참히 짓밟혔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그들의 조국 수호에 대한 투혼과 천부적인 자질은 이 참담한 荊棘(형극)을 딛고 일어섰다. 우리는 이 우수한 군대를 자유 수호의 역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 (마크 W. 클라크 전 UN군 총사령관,「From the Danube to the Yalu」)
<요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기습공격 받은 한국군>
일각에서는 국군의 정통성을 대한제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역사 단절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태어난 신생 독립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군의 始原(시원)은 조선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이하 경비대)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가을 美(미)군정 당국은 해방 정국의 치안 유지와 난립하는 사설 군사 단체로 인한 불안을 해소키 위해 경찰을 포함하는 한국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했다.
이에 1945년 11월13일 군정법령 제28호가 공포됐고 국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軍(군) 창설 준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군정은 급선무였던 기간요원 양성을 위해 군사 영어 학교를 설립했다. 1945년 12월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5월1일 그 후신인 경비 사관학교가 설치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건군 주역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됨에 따라 미국은 한국국방군 창설 계획을 보류시키게 된다. 이에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당면한 치안 유지를 위해 점령군 사령관 재량 하에 소위 뱀부계획(Bamboo Plan)을 수립, 규모를 줄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해 1946년 1월15일 Korean Constabulary(조선국방경비대)를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 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대전Å이리Å광주Å부산Å대구Å청주Å춘천에 2연대~8연대까지 창설되고 11월16일 제주도가 道(도)로 승격됨에 따라 9연대가 창설됐다. 경비대는 1947년부터 본격적인 증편이 이뤄져 정부 수립 때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증강된 규모의 군대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2006년 1월5일자 국방일보 참고)
<6Å25 直前 육군 총병력, 8개 사단 9만5천여 명>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군으로 명명된 한국군은 아직 걸음마를 배울 정도의 유치한 수준이었다. 이때의 한국군은 중대규모의 전투훈련도 제대로 못한 경비대 수준에 머믈러 있었다. 같은 시기 소련군 점령하의 38도선 이북에서는 실질적인 북조선 단독정부인 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2.8)가 성립됐고, 동시에 사단 규모의 군대가 조직되었다. 2월 8일은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부터 6.25의 기습남침까지 4년간 남침준비를 한 인민군은 걸음마 한국군에 비하면 대학생 같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한국군이 기습당한지 사흘 만에 수도서울을 빼앗기고 대구 외곽까지 일사천리로 쫓겨 가면서도 전멸되지 않고 버틴 것은 반공정신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클라크장군 말대로 한국군은 「요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공산 침략자의 공격을 받고...」 잘도 버티고 싸웠다. 싸우면서 장교들은 집단으로 미국에 건너가 선진 군사기술을 배웠다. 1950년대 말까지 10,000여 명이 미 군사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8월15일 國父(국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 政府(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됨에 따라 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됐으며, 경비대에 입대하지 않은 광복군Å일본군Å만주군 군사경력자들과 남북한의 순수 민간인 출신들이 대거 입대했다.(정부 수립으로 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편되고,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육군에서 분리 독립함으로써 현대적인 3군 체제로 정립됐다.)
이와 함께 1948년 11월에는 국군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함에 따라 같은 해 12월15일 국방부에는 참모총장, 육군본부에는 총참모장과 참모부장을 보직하게 되어 초대 육군총참모장에는 이응준 준장, 참모부장에는 정일권 대령이 각각 임명됐다.
또한 1948년 12월에는 兵科制度(병과제도)를 창설, 보병Å포병Å기갑Å통신Å항공Å병참 Å경리Å감찰Å군의Å헌병 등으로 구분하고 일반 참모 제를 제정하는 한편 1949년 5월에는 국방부 참모총장 제를 폐지하고 육Å해군의 지휘를 국방부 장관(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이 관장토록 했다.
이와 함께 육군은 편제상 종전의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제7Å8사단을 추가로 창설했으며,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護國軍(호국군) 및 각 지구 병사구 사령부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1950년 6Å25 직전까지 육군의 총병력은 8개 사단 9만5천여 명에 달하게 됐다.
그러나 창군 과정에서 군내에 잠입한 공산주의자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허위선전과 모략으로 부대 내 좌익세력들과 함께 폭동을 획책했다. 이러한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1948년에 제주4Å3사건을 시작으로 여수Å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사건 등이 터졌다.
이에 군은 미처 자체조직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폭동진압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작전을 수행했다. 군내 자체정화를 위한 肅軍(숙군)작업을 단행, 1948년 10월~6Å25 전쟁직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1,300여 명에 달하는 불순분자를 색출했다.
<6.25 勃發, 反共정신으로 뭉친 국민 입대 쇄도>
이런 가운데 북한은 6Å25 남침을 앞두고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따라 유격대를 침투시켜 지리산Å오대산Å태백산 지구에서 잔존공비와 합세, 후방을 교란시켰고 1950년도 초부터는 38선상에서 빈번히 무력충돌을 야기 시켰다.
이에 군은 태백산Å지리산 및 호남지구에 공비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했으나 미처 작전을 종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6Å25남침을 당하게 됐다. 전쟁 발발 전 남북 간의 군사력 격차는 현저했다. 남한은 일반 병력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기계화Å특수부대를 망라한 19만8000여 명이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통해 국군 정원 63만 명 확정>
국군은 전차가 1대도 없었고 인민군은 242대나 됐다. 연습Å연락기만 22대였던 국군과 달리 인민군은 전투기Å전폭기 등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저한 전력 격차 속에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反共(반공)정신으로 뭉친 국민들의 입대가 쇄도했다.
7월 초 바로 학도의용군 약 30여만 명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 중에는 여자 학도의용군 심지어 재일교포 학도의용군도 있었다. 소년지원병 3,000여 명이 낙동강으로 달려가 분전했고, 만 17~40세의 장정 30만 명이 국민방위군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메운 카투사(KATUSA) 장병 4만3천여 명이 미군과 함께 장진호Å군우 리 Å 펀치 볼 등의 격전지를 누볐다. 지게부대인 한국 勞務團(노무단)단(KSC) 30여만 명은 전선의 보급대원이 됐다. 국군과 UN군 통제 하에서 유격부대도 운용됐는데, 호림부대를 비롯해 명Å백봉부대, 백골병단, 동키 부대와 울프팩 예하의 유격부대, 그리고 제8240Å8250부대 등이 그들이었다.
여자 의용군이나 일반 주민들도 무장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전세의 전환은 UN군의 참전으로 이뤄졌다. 국제적 연대에 의한 연합전력은 적어도 전선의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고, 바로 국군의 전투력 증강으로 연결됐다.
한편, 미국은 밴 플리트 계획으로 명명된 국군 확장계획을 클라크(Mark W. Clark, 前 UN군 총사령관)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PFÅPTÅPCSÅLSSL) 50척을, 공군은 F-51 무스탕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국군 정원이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했다. 이와 함께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 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대장)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 총감부를 창설해 육군의 군 구조를 정비했다.
이로써 19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6.25 전쟁기간 동안 국군은 창군요원의 29%를 포함, 25만 7천여 명의 희생을 통해 국가를 수호했으며,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작전 수행 시 북한주민의 약 절반인 400만 명이 국군을 따라 피난길에 나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정통정부 임을 입증했다.
특히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가운데서도 국군은 수백 만 명에 달하는 북한피난민의 보호활동을 전개하면서 군 철수작전 수행에 지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북한피난민을 흥남부두에서 10만여 명, 성진부두에서 1만여 명을 군 수송선에 태워 철수시켰다.
<서해안서 6만, 동해안서 수만 철수시킨 국군 국민의 군대 입증>
또한 해군은 미리 확보해 둔 백령도Å명천양도 등지를 근거로 서해안에서 6만여 명, 동해안에서 수만 여 명의 피난민 구출작전을 전개해 국군이 국민의 군대임을 입증했다.
참고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 총 병력동원 수 5백76만 4천1백43명, 전사자 3만 3천6백67명, 기타 사망 3천2백49명, 부상자 10만 3천2백84명이었다.(1998년판 뉴욕타임스 발행 「WORLD ALMANAC」참고)
6.25전쟁 이후 줄곧 전투력의 증강 및 정비에 총력을 경주 하던 국군은 1964년 9월, 베트남 정세가 극도로 악화되자, 지원군으로서 베트남에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한 데 이어 1965년 2월에는 공병 및 수송부대를 증파, 그 통상명칭을 비둘기 부대라 호칭하고 사이공에는 주월 한국군사원조단을 설치했다.
<軍출신 박정희 前 대통령, 自主국방 기틀 다져>
1965년 10월에는 전투사단으로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견하고, 연이어 1966년 9월에는 제9사단(백마부대)을 증파했으며, 이로써 파월병력이 5만여 명에 다다라 종전의 주월 한국 군사 원조 단은 주 월 한국군사령부로 개편됐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창군 이래 최초의 해외원정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과 함께 자유진영의 공동 방어전선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4,000여 명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국군은 참전 기간 중 총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부대 작전을 전개, 적 사살 4만1,000명이라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국군은 1965년도에 이르러 현대전에 적응한 제222방공포병 나이키 유도탄 대대를 창설했고 6.25와 더불어 창설된 정훈병과가 활발히 움직여 정신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1971년 초 주한 미 제7사단이 철수, 휴전선 방어를 국군이 전담하게 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다음해인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병행해 7Å4공동성명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남북대화 중에도 북한은 남침땅굴을 파서 1974년도에 최초 땅굴이, 1975Å78Å90년도에 제2Å3Å4땅굴이 계속 발견되어 세계를 경악케 했으며, 수많은 침투도발과 함께 1976년 8월에는 8Å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켜 전쟁발발 일보직전 까지 이르게 했다.
이 같은 북한의 도발 위협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70년대 초부터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3년 베트남 철수와 함께 북한 기갑부대 운용양상에 대처하고 부대구조의 기계화Å기동화 필요성에 부응해 1개 기계화 보병사단을 창설했다.
또한 1974년부터 1981년을 목표년도로 한 제1차 율곡계획(戰力增强事業-전략증상사업)에 착수해 후방사단의 전력화, 전방사단의 4각 편제개편, 개인화기의 전면교체, 예비사단 포병부대의 증Å창설, 육군 항공 전력의 대폭증강 등 획기적인 전력증강으로 自主(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아울러 방위산업 분야에서 소화기는 물론 각종 공용화기와 대구경화포의 생산과 장갑차Å전차 등을 자체 개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1978년도에는 중Å장거리 유도탄과 다연장로켓의 개발에 성공했다.
이와 함께 국군은 1973년 7월 제3군사령부를 창설했으며, 1975년에는 현 전선 固守槪念(고수개념)을 설정, 경인지역 방어사령부를 수도군단으로 개편하고, 4개 훈련단을 창설했다.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로 연합 방위태세 확립>
특히 자유 베트남 패망에 자극되어 1976년부터 팀 스피리트 한미연합 훈련을 시작해 매년 그 규모를 확대 실시했으며, 1978년 11월에는 한미연합사령부(CFC)를 발족시켜 한미관계를 안보협력의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군은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 미얀마 아웅산 암살 폭파사건, 1987년 11월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등 거듭되는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堡壘(보루)로서 그 사명을 다해 敵(적) 도발을 억지하고 안정과 번영을 보장함으로써 86 아시안 게임과 제24회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가능케 했다.
아울러 군은 자주 국방력 강화에 더욱 주력해 공세적 방어전략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기초로 강력한 전력 확보에 주력해 명실 공히 자주적 지상전투 태세를 확립했다. 그리고 1981년 5월에는 육군 교육사령부를 창설해 한국적 교리 개발과 미래 지향적인 전투발전 업무를 전담케 하는 한편 지휘체계를 재정비했다.
1989년도에는 육Å해Å공군 본부를 地勢(지세)적 要衝地(요충지)인 계룡대 지역으로 이동해 전략적 이점을 배가시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방위력 개선 목표달성 및 즉응전력을 강화하고 주요부대를 개편해 단위부대 전력을 향상시켰으며, 합동참모부의 통합작전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명실 공히 자주국방태세를 완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자유 베트남의 패망과 함께 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한동안 국군의 해외 파병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이에 대한 미국의 반격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18년 만에 국군의 해외 파병이 다시금 논의되기 시작했다.
UN 결의에 의한 다국적군이 구성되고 전후 복구 사업 참여를 위해 참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자 비전투병 파병을 조건으로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1991년 1월부터 4월까지 의료지원단 154명과 공군 수송단 160명(수송기 5대) 등 비 전투 요원 314명이 쿠웨이트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파견됐다. 다시금 국군이 해외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상록수부대 등 세계 각지에서 UNPKO활동 벌여>
국군은 또 1991년 9월 UN가입과 함께 UN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게 된다. 국군은 1993년 7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 상록수부대(공병대대)를 파견, PKO에 처음 참여한 이후 10여 년 동안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UN과 국제 사회의 노력에 적극 동참해 왔다.
국군 최초로 PKO에 참여한 상록수부대는 1993년 7월30일 현지에 도착한 이래 연인원 540여 명의 병력을 투입, 현지 UN평화유지군(PKF)사령부가 부여한 도로 보수 공사 임무와 주민 지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상록수 부대원들이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사랑의 학교와 기술학교를 운영, 한국인의 博愛(박애)정신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다국적군의 왕으로 `평가받은 한국군>
이런 성과를 발판으로 국군은 1994년 9월 서부사하라 의료지원단 파견에 이어 1994년 10월 그루지야 정전감시단 참가, 1994년 11월 인도Å파키스탄 정전감시단 참가, 1995년 10월 앙골라 공병대대 파견 등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PKO에 참가하게 됐다.
이러한 국군 PKO 활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사상 처음으로 국군 장성이 2002년 1월 UN평화유지군 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1999년 9월7일 UN 감시 아래 주민 투표를 실시한 결과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자 親(친)인도네시아 계열의 민병대들이 유혈 폭력 사태를 유발, 혼란이 발생했다.
1999년 9월15일 UN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은 같은 해 10월 육군 특수 전 사령부 병력을 주축으로 한 보병부대(상록수부대)를 파병했다. 1973년 3월 베트남 철수 이후 26년 만에 전투병 파병이 이뤄진 것이다. 이로써 국군의 PKO는 명실 공히 질적Å양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파병된 한국군은 2003년 10월까지 주둔하는 동안 책임 지역을 완벽히 통제하는 등 치안 유지에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나아가 상록수 부대원들은 의료 지원Å영화 상영Å이발Å농기구 수리 등 여러 기능을 통합한 민사 작전인 푸른 천사(Blue Angel) 작전을 실시, 현지 주민들로부터 다국적군의 王(왕)으로 평가받는 등 두터운 신뢰를 받기도 했다.
국군은 또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 국제 연대에 동참함으로써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한미동맹 관계의 공고한 발전을 위해 2002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2003년부터 이라크에 병력을 파견해 國威(국위)를 宣揚(선양)하고 있다.
<합동 直擊彈(직격탄-Joint Direct Attack Munition)으로 開戰(개전) 4일 내 북한 長射程砲(장사정포) 진지 焦土化(초토화)>
한국군 주도 첫 韓美(한미)연합훈련 을지 프리덤 가디언(UFG-Ulchi Freedom Guardia)실시
이상희 국방장관은 지난 8월19일 북한의 전면 남침에 대비한 韓美(한미)연합훈련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UFG: Ulchi Freedom Guardian)연습 중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D-데이 H-아워는 우리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는 시점이다. 전쟁 선포 당시 시나리오는 북한군의 長射程砲(장사정포) 일부가 남한에 대해 사격을 시작했으며 전투기는 남한 공격을 위해 발진 직전이었다. 북한의 해군기지를 떠난 잠수함은 기뢰 부설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한의 포항, 부산, 울산 등의 앞바다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이 장관은 UFG연습에서 대통령에게 전쟁선포를 건의하기 전에 한Å미 군사회의(MC)와 안보회의(SC)를 열고 미국 정부로부터 전쟁 선포에 대한 동의를 받아놓았다.
지난 8월18~22일까지 닷새 일정으로 실시된 UFG연습은 韓美(한미)연합훈련 사상 처음으로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이번 연습은 군단, 함대, 비행단급 이상 지휘부 등 5만6천여 명의 한국군과 해외 전개 미군 및 주한미군 1만여 명 등이 참가했으며 위기상황 조성보고, 위기관리연습, 모의지원연습, 훈련강평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전쟁이 터지자 한Å미군은 북한의 전략 시설과 무기를 제거, 북한군의 예봉을 꺾는데 주력했다>
UFG연습에서 국방부는 전쟁 선포에 앞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관한 가상적인 시나리오를 세웠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북한의 도발 소지가 크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약 일주일 전부터 위기관리에 들어갔다. 이 국면에서 각 참모들이 외교, 정보, 군사, 경제부문 등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때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전쟁 징후와 관련된 주요 체크 리스트의 변화다. 체크 리스트는 북한이 최 정예부대인 기계화군단을 남하시키고 야포를 꺼내 탄약 장전을 준비하거나, 전쟁과 관련된 통신량의 대폭 증가, 군 비축식량 분배, 북한 전쟁지도부가 지하벙커로 이동하는 등의 움직임이다. 전쟁 직전에 이런 움직임은 대개 동시에 포착된다.
이에 따라 국방부와 합참은 미 국방부 및 駐韓(주한) 미군 측과 함께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쟁억지(deterrent)방안을 강구했다. 먼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에 대해 즉각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 해군 항모인 조지 워싱턴 호가 이끄는 航母(항모) 타격 단을 한반도 근해에 투입했다. 항모 타격 단은 F-14 등 85대의 함재기를 실은 항모 1척과 북한 전 지역 동시 정밀 타격이 가능한 토마호크를 실은 이지스 함과 핵잠수함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군이 연습을 주도하도록 합의한 것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또 알라스카와 괌 등에 있던 미 공군 전투기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등도 긴급하게 한반도에 배치했다. 8.18 도끼만행사건 이나 88서울올림픽 등에서와 같이 남북관계가 전쟁 직전으로 치달았을 때 또는 대남도발 가능성이 있을 때도 북한이 도발하지 못하도록 항모 전투단을 배치한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북한에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에 특사를 가상적으로 파견했다.
그런데도 북한의 국지적인 도발이 잦아지면서 전면전에 가까워지자 정부는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와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동원령과 계엄령을 선포했다. 전쟁이 터지면 300만 명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각종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정부 지원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남한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터지자 한Å미군은 북한의 전략 시설과 무기를 제거하는데 주력했다. 북한군의 예봉을 꺾기 위해서다. 전쟁이 발발한지 첫 3일 동안 한Å미군은 북한군의 눈과 귀, 우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무기를 제거해야만 전쟁을 수월하게 끌고 나갈 수 있다. 북한의 전쟁지휘소와 통신시설Å방공망, 장사정포와 탄도미사일 등이 주요 목표다.
이번 훈련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군 관계자가 전했다. 예상보다 빨리 한반도에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또 수도권을 가장 위협하는 400여문의 북한군 장사정포도 계획보다 일찍 공략했다고 한다. 훈련 중에 국방부와 합참은 이 대통령에게 북한의 장사정포 진지를 파괴하는 동영상을 직접 보여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군은 훈련에 앞서 북한군의 장사정포 동굴진지 여러 개를 우리 군 훈련장에 꼭 같이 만들어 놓고 파괴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에서는 공군 최신예 전투기 F-15K가 투하한 합동 직격탄(JDAM) 3발이 정확하게 3개의 동굴진지 입구에 명중했다.
<한Å미는 임시로 한Å미군에 대한 「戰作權」을 분리해서 독립적인 사령부를 구성. 훈련에 임했다>
이때 충격으로 북한군 장사정포의 동굴진지 입구는 완전히 매몰돼 장사정포의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북한군 장사정포는 1개 포대 6문이 3개의 동굴 진지를 사용한다. 2문의 장사정포가 1개의 동굴진지에 보관돼 있는데 사격을 위해서는 동굴진지에서 나와 방열한다. 북한군 장사장포는 이때가 가장 취약하다. 우리 군은 일단 동굴진지 입구를 파괴한 뒤 미처 동굴로 대피하지 못한 장사정포를 다연장포(MLRS)와 K-9 자주포 등으로 공격한다. 북한군은 휴전선 북방에 이 같은 동굴진지를 300~400개 가량 구축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3 가 수도권 북방에 집중돼 있다.
이번 UFG연습은 1975년부터 실시해온 을지 포커스 렌즈(UFL)의 명칭을 바꾼 것으로 올해가 첫 번 째다. 한Å미가 지난해 UFL을 UFG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한미연합사령부를 제쳐두고 한국군이 연습을 주도하도록 합의한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 권)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2012년 4월17일로 예정된 전작 권 전환에 대비한 사전 예행연습 차원에서 한국군이 UFG연습을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형태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전작권이 한미연합사령관에서 한국 합참의장으로 전환되면 한국군이 한반도에서의 모든 전쟁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한미연합사(CFC)는 해체되고 한Å미군은 별도의 사령부를 구성하게 된다. 대신 한Å미군의 군사적인 협조를 위해 한Å미군으로 구성된 동맹군사협조본부(AMCC)를 편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Å미는 「戰作權(전작권)」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 이번 UFG연습에서부터 임시로 한Å미군에 대한 「전작권」을 서로 분리하고 각자 독립적인 사령부를 구성해보았다. 독립사령부로 한국군은 합동군사령부(JFC: Joint Forces Command)를, 미군은 미 한국사령부(US KORCOM)를 임시로 만든 것이다. 또 JFC와 US KORCOM 사이의 원활한 작전협조를 위해 동맹군사협조본부(AMCC)도 구성했다. JFC는 합참의 통제를 받는 한국군사령부다. US KORCOM은 현재 주한미군사령부를 대체할 미군사령부다. 김태영 합참의장은 한Å미가 독립적인 사령부를 구성하고 AMCC의 협조를 받는 만큼 처음해보는 상황이어서 연합사 부사령관인 이성출 대장에게 한국군에 대한 지휘임무를 맡기고 모든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국군통수권자 대통령이 을지 연습에 직접 참가해 군과 정부 대응태세를 점검한 것은 5년 만의 일>
UFG 연습에서 한Å미의 사령부들은 3개의 벙커를 하나씩 차지했다. 한국 정부와 국방부 및 군 당국은 과거 UFL훈련 때처럼 B1 벙커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군 합동군사령부(JFC)와 동맹군사협조본부(AMCC)는 CP 탱고를 차지했다. 주한미군은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작은 지하 지휘소인 CC 서울에 전시지휘소를 구축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한국군 사령부인 JFC가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가 관리하는 CP 탱고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CP 탱고는 평소 한미연합사가 이용하는 주한 미군의 전시지휘소다. 이번에 한국군 사령부인 JFC를 B1 벙커가 아닌 미군 시설인 CP 탱고에 둔 이유는 연합사 수준의 작전을 해보기 위해서다. 한국군이 전시에 한Å미군 전력을 활용해 電光石火(전광석화)처럼 작전을 수행하려면 CP 탱고 수준의 첨단 지휘통제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군이 미군의 첨단 지휘시설을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국군 지휘소도 미군 시설만큼 개선할 수 있다.
그동안 UFG의 전신으로 75년부터 시작된 을지 포커스 렌즈(UFL)연습에서는 한미연합사가 CP 탱고에서 모든 작전을 주관했다. 한국 정부와 국방부는 B1 벙커에 전시 정부를 차려 전시동원연습 등으로 연합사를 지원했다. B1 벙커는 한국군 수도방위사령부가 관리하는 전시 지휘소로 전시에 2000여명이 먹고 잘수 있는 지하시설로 핵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다. 연합사 지휘소인 CP 탱고도 B1 벙커와 유사하지만 미군의 첨단 지휘통제시설이 갖춰져 있다. 미군 4성 장군이 지휘하는 합동군사령부 기능을 갖고 있다. 미국의 인공위성과 정찰기 등 모든 정보 자산이 수집한 정보가 CP 탱고로 집중된다. 수집된 정보는 CP 탱고 내에 있는 각종 정보 분석 장치와 전문가들에 의해 재 종합 및 분류돼 필요한 부대와 무기체계 등으로 신속하게 분배된다. CC 서울은 용산 미군기지 내에 구축된 소규모 지하 지휘소다.
<한미연합사 해체에 따른 우려 불식을 위해 6Å25의 영웅 백선엽 대장 등 예비역 장성과 군 원로 830여명을 초청 연습 현장 참관시켜>
연습이 실시되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전쟁지휘소를 찾았다. 이 대통령은 8월21일 B1 벙커와 CP 탱고를 들러 UFG의 진행과정을 보고받았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을지 연습에 직접 참가해 보고받고 군과 정부의 대응태세를 점검한 것은 5년 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에만 이 연습에 참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98년에 딱 한번 B1 벙커에 갔었다. 더 이상 참석하지 않은 것은 당시 UFL연습을 반대하는 북한을 의식한 면이 있었다. 북한은 이번에도 UFG연습을 북핵 검증문제까지 연계시켜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과거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을지 연습을 참관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날 정부 을지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B1 벙커에서 육군의 3군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해군작전사령관, 미 7공군사령관 등과 화상대화를 통해 지휘체계를 직접 점검했다. 한국 대통령이 B1 벙커에서 미군 지휘관과 화상통화를 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어 그는 이번 연습에서 군 지휘소로 이용되고 있는 CP 탱고로 이동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위한 연습상황을 보고받았다. 과거 노Å김 전 대통령은 을지 연습에 참석해 단순히 보고만 받았다고 한다. 또 지난 두 정부에선 대통령이 연합사 지휘소인 CP 탱고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번 훈련은 4가지 목표에 초점이 맞춰졌다. 우선 한국군이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주도해보는 것이다. 6.25 전쟁에서부터 우리 군이 대규모 전쟁을 한번도 주도적으로 치러본 적은 없었다.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파병 정도다. 특히 한국군은 지금까지 연합훈련에서도 훈련을 주도하기보다는 참관자와 같은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훈련에 참가해왔다.
<한,미군은 예상보다 빨리 한반도에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장사정포도 제압>
그러나 전작권이 전환된 뒤에는 한국군이 예비군을 포함해 수백만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쟁에서 모든 전투력을 장기 두듯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군이 과연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 우려가 있었다. 또 우리 군이 그런 지휘구조를 갖추고 있느냐는 것도 관심사였다. 이상희 국방장관은 「전작권」 전환에 따라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날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 등 예비역 장성과 군 원로 830여명을 초청해 UFG연습 현장을 보여줬다.
두 번 째는 한Å미군 간 협조문제다. 그동안 연합훈련은 「전작권」을 갖고 있는 연합사령관이 주관해왔다. 한반도 방위의 책임을 진 연합사령관의 통제 아래 한Å미군이 일체가 돼 일사불란한 작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작권이 전환된 뒤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따로 독립적인 사령부를 갖고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만큼 작전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제한된 정보를 가진 한국군이 미군의 정보를 지원받아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당연히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미군의 협조가 북한의 남침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는데 關鍵(관건)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Å미 양국은 이를 위해 동맹 군사협조 본부(AMCC)를 임시로 가동했다. 군사작전과 관련된 양국군 사이의 모든 협조는 AMCC를 통해서 이뤄진다. 이런 점을 감안, 한Å미군으로 구성된 AMCC는 한국군 JFC 곁에 바싹 붙어 24시간 함께 활동했다. 개전 초반에 북한군의 주요 표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북한군에 관한 정보 공유와 한Å미군 육Å해Å공군의 임무 분담 및 협조가 결정적이다.
이번 훈련 결과는 초기에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성공적이었다고 군 관계자가 전했다. 한Å미군 사령부의 임무, AMCC의 업무수행절차 등이 아직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습이 시작 된지 몇 일이 지나자 이런 혼란문제는 대부분 해소됐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전했다. 연합사의 기능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UFG연습 초기에는 한Å미군이 서로의 업무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금 새 각자가 할 일을 확인해 약속이나 한 듯이 잘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 한Å미군은 예상보다 빨리 한반도에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북한군 장사정포도 제압했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은 한 주 동안 훈련 결과 평가 문제점 보완>
세 번 째는 합참과 정부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는 연합사가 전략적인 판단과 작전 수행 등 모든 기능을 도맡았다. 그러나 이번에 합참은 순수한 작전 임무만 맡고 국방부는 전쟁억지를 위한 위기관리 기능과 전시지원임무를 맡았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UFG연습에 돌입하기 일주일 전부터 위기관리 연습에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임무 분담이다. 미국과 협조해 중국과 러시아에는 특사를 가상적으로 파견했다. 또 합참은 미 해군 항모인 조지워싱턴호가 이끄는 항모 타격 단을 한반도 근해에 투입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차원에서의 전략적인 논의와 판단도 내렸다.
또 전쟁 직전에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와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동원령과 계엄령을 선포했다. 전쟁이 터지면 300만 명의 예비군을 동원하고 각종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정부 지원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장관은 이를 위해 역대 국방장관 가운데 처음으로 훈련기간 내내 B1 벙커에서 밤을 지새웠다.
마지막 초점은 이번 훈련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하고 한국군에 의한 한반도 작전계획을 작성하는 일이다. 연습에는 김관진 전 합참의장과 윌리엄 클라우치 예비역 대장이 각각 양측 동맹구조 선임 관찰관으로 참여했다. UFL 또는 UFG연습에 미군 예비역 대장이 참관하기는 처음이다. 이들은 연습의 진행과정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합참의장과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Å미 양국은 훈련을 마친 뒤 한주동안 훈련 결과를 평가해 한국군 단독의 작전계획 작성에 반영했다. 이번 연습이 나흘간의 방어 작전에 그친 것도 한국군 단독의 작전계획이 없어서라는 지적도 있다.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양자 이인수 박사 소회>
이명박 정부가 처음으로 건국이라 표현 감회가 깊다
Q건국 60주년을 맞으신 감회가 깊으실 것 같은데요?
이번 정부에서 처음으로 건국이라는 말을 썼고 건국 행사까지 하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지요. 특히 8월을 전후해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기리는 토론회나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경축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저로서는 더 더욱 의미가 크고 많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Q 이인수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어떻게 해서 양자로 가시게 됐는지를 정확히 아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이 대통령의 양자가 된 경위를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생 나라 걱정만 하신 분>
제 생부께서는 양녕대군 16대손이고, 저는 17대손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後嗣(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시어 종중에 양자될 젊은이를 천거하라 분부하시어 전주 이씨 대종회에서, 양녕대군 17대 손 가운데서 양자를 골라보자는 논의를 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1961년 7월이었습니다. 어머님(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외국인이니까 영어를 할 줄 아는 미혼 남성이 양자의 한 조건이 됐고 그런 형편에서 제가 결정이 된 것이죠.
Q.아버지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분으로 선생님 기억에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양자가 된 것이 1961년 11월이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후에 하와이로 건너가 처음으로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그 뒤에 수시로 국내와 하와이를 오가며 아버님을 모셨고 임종도 했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이국땅에서 노환으로 보내시는 아버님 이셨지만 대부분 국가 장래를 걱정하시어 과연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모습이 역력하였습니다.
Q.말씀하시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노심초사 하시던 모습은 어떤 것을 뜻하시는지요?
아버님께서는 독립운동을 하셨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 어떤 논리나 명분으로도 평가절하 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건국된 후 2년이 채 되지도 않아 발발한 6.25 동란 때는 온 몸을 던져 대한민국을 수호해낸 분이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었잖습니까. 그 뒤로 하야하시기 직전까지는 신생국가의 기반 구축과 경제 부흥 및 발전을 위해 진력 하셨습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한 분이 바로 아버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건국 대통령의 모습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Q.말씀하신 것처럼 이승만 박사의 공을 인정한다 해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요.
<이승만은 미국에 영향을 미쳤지 영향 받지 않고 국익위해 싸웠다>
아버님을 친미파로 모는 것은 일부 학계의 구부러진 시각입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평생 미 국무부를 상대로 싸우신 분이지 결코 친미파가 아니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하셔서 미국인 친구들이 많은 것하고 미국 정부의 사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전혀 다른 겁니다. 절대 영향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친미 운운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오히려 미국인 친구들을 활용해 미국 언론이나 의회에 영향력을 미쳐 미국 정부를 견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이익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아버님의 미국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에는 대다수 학자들도 동의합니다.
Q.여전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세력들이 있는 듯합니다. 특히 해방 이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출범시킨 결과 남북분단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닌 왜곡되고 편향되고 무지한 인식에 불과합니다. 해방 직후의 정세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북한은 이미 1945년 겨울부터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 돼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남한이 갈 길은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자유 민주국가를 세워 반공으로 국가 발전을 도모하면서 자유통일을 지향하든지, 이 두 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이러한 정세를 간파하고 한국 문제를 UN에 상정시킨후 미군정과 싸운 끝에 시장경제.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함으로서 우리 민족을 개방과 자유 라는 광명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金九, 어차피 붉은 군대 올 텐데 굳이 대한민국 세울 필요 없다.고>
Q.그 대목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의 엇갈린 선택과 그 결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 사회이니까 얼마든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 무렵 김구 선생은 평양에 가서 5.10 선거 직전인 4월30일자로 56개 정당 사회단체 성명서에 서명 함으로써 UN주관 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 했습니다. 그때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서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굳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그는 갖고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소련과 북한 공산당 정권의 편을 들었고, 결과적으로 해방정국의 迷兒(미아)가 되고 말았던 것 입니다.
Q.독립 운동가, 제헌국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등으로서 인정받아 마땅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자리 잡은 원인을 지난 10년간 좌익정권이 이대통령의 공훈을 부정 폄하 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의하시나요?
<건국의 역사를 가르쳐 국가 정체성 위기 극복해야>
다만 그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대통령하야 후 역대정부가 각기 자기정권의 이기주의로 나라에 대한 긴 안목이 없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 동안 아버님에 대한 일방적 매도와 부정, 비난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맞선 논리로 대응하거나 어디에다 하소연할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죠.
Q.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부재했던 데 대한 통탄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그 동안 버려졌던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국민이 그것을 알아서 자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건국 60주년에 이승만 박사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밝은 앞날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에 접근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봅니다.
Q.말씀하신 것처럼 이승만 박사의 공은 가히 초인적인데도 공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일이 정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늦게나마 이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상이 제정돼 첫 번째 수여식이 있었는데, 우남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역사의 정통을 안다면 조선왕조 말의 구국운동에서 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과 건국 그리고 국가건설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한국을 만드신 아버님을 빼놓고는 한국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상은 진작에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부 학계의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늦어진 것이죠. 이제라도 아버님의 큰 공을 생각해서 우남 애국상이 제정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남 애국상은 김 길자 대한민국 사랑회 회장이 애국심을 발휘하여 제정한 것입니다. 이번에 이도형 한국논단 대표가 개인상을, 대령연합회 서정갑회장이 본부장을 맡고 있는 국민 행동본부가 단체상을 탔지요. 앞으로 아버님 같이 이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Q.건국 60주년 관련 행사에 자주 다니시는데, 혹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없는지요?
<만세 3창에대한민국건국이 왜 빠졌는지 못내 서운했다>
이번 정부에서 처음으로 건국이라는 말을 넣어서 행사를 한 것은 참으로 잘했습니다.
8월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행사에서 서운한 점이 한 가지 있었지요. 우리나라의 근간이 되는 대한민국과 건국이라는 말을 쑥 빼고 만세 삼창을 한 사실이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빼고 그냥 국민 만세희망 만세로만 할 때 나도 모르게 맥이 빠져 버렸습니다. 유수 대학의 총장까지 지내고 평생 학생을 가르친 학자의 의식을 다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역사적인 순간에 무엇이 두려워서 국민에게 외쳐야 할 것을 생략하였는지, 자기 일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는지, 이 일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학자의 양식이 문제이지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서운했습니다. 그렇게 넋 빠진 만세 삼창은 내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그것도 건국 60주년 기념식전에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정체성을 잃은 불쌍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Q.지난 해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우익보수 성향 정권이 새로 출범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보수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상황은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 박사님께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끼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해서 열리는 여러 형태의 세미나나 기념식 등이 아직도 초보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아버님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님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특히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저는 이 같은 상황이 건국 60주년을 맞이해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하고요.
<이승만 서신집 발간 거부한
프린스턴대학 수정주의학자 부르스 커밍스 책 출판>
Q.우리나라는 근대교육의 여명기였던 그 시절에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신 아버님을 생각하며 그 미국 대학들을 돌아 보셨겠지요?
네 물론입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뉴욕대학에 유학중의 일이었습니다. 지역이 달라서 한 번에 가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교를 돌아보고 모두 70년 전에 다니셨던 학교라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특히 박사학위를 받으신 프린스턴대학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실은 내가 이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가 허가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때 프란체스카 어머님은 아버님의 모교이긴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기부 한번 한 적이 없으니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므로 섭섭히 생각 말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Q.그 후 프린스턴대학과는 관계가 없었나요?
좀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1965년에 별세하신 후 이대통령의 외교 고문이던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가 이대통령과 주고받은 중요서신의 출판을 이 프린스턴 대학에 신청한 것이 거절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 서신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이 대학 출판부는 커밍스(Bruce G. Cumings)라는 좌파교수의 한국전쟁기원(The Origins of Korean War)을 발간하였지요. 올리버박사는 너무나 통탄스럽고 분하여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정부나 학계와 언론이 일치해서 이대통령을 극한적인 용어로 매도하는 상황이라, 귀중한 것이라도 팔리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장사에 재미 볼 책을 택하게 된 것이지요. 이래서 한국은 별 볼 일없는 소위 수정주의 학파가 휩쓰는 세상이 되고만 것입니다. 자학사관에 빠진 민족은 외세가 그것을 더욱 조장해 주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초청해다가 명예박사학위까지 수여하는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Q.좀 엉뚱한 질문 같습니다만 아버님 묘비 문을 외우고 계신가요?
<게으르다는 말을 욕으로 알던 이승만>
그럼요. 묘비명에 건국 대통령이란 표현이 빠진 것에 대해 확인하고 싶은 거지요? 그래요. 수 십년 만에 묘비가 세워지면서도 건국 대통령이란 碑銘(비명)이 들어간 묘비는 땅에 묻히고, 결국 다른 묘비가 세워져 있지요. 묘비명은 여초 김응현씨가 썼습니다. 지도자가 제대로 인식을 하고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확립 되면 지금의 묘비에 건국 대통령 이라는 비명이 들어갈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또 그렇게 돼야 마땅하고요. 묘역입구의 비명은 가실 때 제가 써 드리죠. 이제 다 끝났나요?
Q.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셨던 이승만 대통령의 생활 습관은 상당 부분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술, 담배는 어떠셨나요?
하와이에서 제가 모시면서 생생히 보았지요. 아버님께서는 게으르다는 말을 욕으로 아셨던 분이었습니다. 물론 술과 담배는 전혀 모르셨습니다. 나라 걱정이 되시면 오로지 기도로 지내셨을 뿐입니다. 아버님은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인수 선생님이 주신 비명은 다음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여 보았습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묘역 비명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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