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대사

醉月 2012. 12. 4. 06:36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대사

 

파룬궁(法輪功)은 파룬따파(法輪大法)로도 불린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탄압하기 전까지 중국대륙에서만 1억명이 파룬궁을 수련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 수련을 견지하고 있다. 현재 파룬궁은 전 세계 114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져 다양한 민족,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배우고 있으며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에서 파룬궁에 수여한 상장만도 수천개에 달한다.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大師)는 2007년 ‘세계100대 천재’ 중 12위에 올랐고 현재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인(華人)이다. 2009년에 ‘정신적인 지도자상’을 수상했으며 4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2002년 이후 미 의회는 제188호, 304호, 605호 결의안을 통과시켜 중국정부에 즉시 파룬궁 박해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본보는 중공의 탄압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던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대사의 이야기를 특집 보도한다.

 

중국 지도를 멀리서 바라보면 한 마리 금으로 만든 닭(金鷄)처럼 보이는데 이 금계의 눈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지린성 창춘(長春)이다. 이곳에는 중국 10대 명산의 하나인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이 있다. 리훙쯔 대사는 바로 이곳 장백산과 가까운 궁주링(公主嶺)의 한 지식인 집안에서 1951년 5월 13일 태어났다.

 

1994년 출판된 중국어판 ‘전법륜(轉法輪)’에는 당시 파룬궁연구회에서 정리한 창시인 리훙쯔 선생의 소전(小傳)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리훙쯔 대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수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첫 번째 사부는 불가(佛家) 독전대법(獨傳大法)의 제10대 전인(傳人)인 전각법사(全覺法師)였다. 이 사부는 어린 리훙쯔에게 오직 심성(心性)수련만을 가르쳤으며 다른 동작은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비밀리에 도제(徒弟)에게 전수하는 다른 공법(功法)과 유사하게 일반인들은 전각법사를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수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 리훙쯔는 친구들과 다툴 경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넘어지곤 했으며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때로는 손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또 그가 마음속으로 이런 상황에 불복할 때면 갑자기 큰 아이들이 몰려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때리곤 했다. 사부는 이런 식으로 어린 그에게 심성수련을 가르쳤으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후에야 미소를 보였다.

 

그가 12세 되던 해 전각법사는 그에게 앞으로 다른 사부들이 찾아와 각 문파의 정수(精髓)를 전수해 줄 거라고 알려주었다. 가장 먼저 온 사부는 팔극진인(八極眞人)인데 그는 리훙쯔를 인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 도가의 내외겸수(內外兼修)공법을 전수했다. 또 마보참장(馬步站樁) 등을 연마하게 했는데 한번 연마하기만 하면 몇 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참장을 할 때마다 늘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지만 몸은 오히려 더욱 유연하고 단단해졌다. 그는 매일 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1974년 이후에는 대도(大道)의 사부가 왔다. 나중에는 불가(佛家)의 여(女)사부가 와서 주로 불가의 공리(功理)와 공법(功法)을 전수했다. 이때 리훙쯔는 불과 23~24세의 나이였지만 공력은 이미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1982년 리훙쯔는 근무하던 군부대에서 나와 창춘시로 직장을 옮겼지만 연공은 그치지 않고 계속했다.

 

그 후 10여년간 거의 매 한 층차(層次)에 도달할 때마다 사부가 바뀌었고 아울러 늘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곤 했다. 그가 당시에 겪은 많은 시련들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몇 십 년에 걸친 간고한 수련을 거쳐 리훙쯔 대사는 절세의 공력을 닦아냈다. 전기에서는 리 대사가 이 시기에 이미 공력이 극히 높은 층차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보았고 우주 중에 이미 존재했던 많고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으며 인류의 기원과 발전,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외부인의 눈에 리훙쯔 대사는 낯을 가리고 내향적인 성격을 지닌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번도 남과 다툰 적이 없었고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어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요구해야 할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확실히 이런 경지에 도달했으며 속인의 각종 욕망이나 개인의 이익 따위는 모두 잊고 일체를 자연스러움에 따라 담담하게 보았다. 억울함이나 비난에 직면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신해 불평할 때조차 그는 웃어 넘겼다.

 

수련계(修煉界)에는 활불(活佛)이 세상에 전생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노(老)활불이 생전에 자신의 공력을 다른 수련인에게 전해주고 다시 인간세상에서 소(小)활불로 전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 노활불의 전수를 받은 수련인들이 다시 소활불을 찾아내 노활불의 원래 법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이처럼 한 세대 한 세대 전해 내려가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누가 그 법(法)의 진정한 주인인지 알기 어렵다.

 

리훙쯔 대사는 1996년 5월 27일 발표한 ‘급히 깨어나라’는 문장에서 이 부분에 대해 밝히고 있다.

 

“사실 나의 금세(今世)의 몇 사부가 나에게 전수해 준 것 역시 몇 세기 이전에 내가 의식적으로 그들더러 얻게 한 것이며 연분이 닿기를 기다려 그들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 전수하도록 하였고, 그리하여 나의 법의 전부를 계발하고 깨닫도록 배치하였다.”

 

현대인에게 적합한 수련

 

법(法)을 전하기 전에 리훙쯔 대사는 이미 장래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울 것임을 알았다.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받는 교란을 감소시키기 위해 리훙쯔 대사는 처음부터 자신의 생활을 일반 대중들 속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을 모방해 배울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기공사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가 채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먹는 음식을 모두 먹었으며 가리는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는 1984년부터 역대로 단독 전수되고 제자를 골라 비밀리에 수련했던 공법을 현대인들의 바쁜 생활에 적합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공법으로 개편하기 시작했다. 1989년 공법의 틀을 완성한 후 혹시 있을지도 모를 문제점을 확인하기 위해 리훙쯔 대사는 작은 범위에서 몇몇 제자들을 직접 지도했다. 2년이 넘는 관찰기간을 거쳐 이 제자들은 모두 아주 높은 층차에 도달했다.

 

1992년 5월 13일, 리 대사가 41세가 된 생일을 기해 창춘 제5중학교에서 첫 파룬궁 학습반이 열렸다. 중국기공과학연구회(中國氣功科學研究會)는 파룬궁의 공리와 공법 및 그 효과를 인정하고 파룬궁을 직속공파(直屬功派)로 받아들였다. 1992년 5월 13일부터 1994년 12월 30일까지 리훙쯔 대사는 대륙 각지에서 56차례의 파룬궁 학습반을 개최했다. 참가한 사람은 연인원 6만여명에 달했다. 학습반은 모두 현지 기공협회에서 주최했으며 기공협회 책임자가 장소를 구하고 표를 팔며 세금을 내는 등 모든 사항을 책임졌다. 기공협회는 그 대가로 학습반 수입의 40%를 가져갔고 리훙쯔 대사는 나머지 60%로 교통비와 숙박비, 자료비, 함께 일한 사람들의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기공보고회가 크게 유행했다. 기공사가 자신의 몸에서 강대한 공을 내보내어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자면 체력과 공력의 소모가 아주 심했다. 일반 기공사는 하루 한 차례 보고회에서 1인당 100위안의 비용을 받았으며 가장 싼 것도 50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리훙쯔 대사는 매 학습반마다 9~10일을 강의하면서도 9차례 강의 전부를 듣는데 겨우 40위안을 받았다. 이미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수련생은 여기서 다시 50% 할인해 20위안만을 받았다. 그러자 일부 지역에서는 기공협회 측에서 비용이 너무 싸다며 리 대사에게 항의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10여일간의 여행과 생활에 드는 비용을 제하고 나면 그의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리훙쯔 대사는 창춘, 베이징, 타이위안(太原) 등 23개 도시에서 직접 파룬궁을 전수했다. 베이징에서는 13회를 개최해 가장 많은 학습반이 열렸다. 그 외 창춘에서 7회, 광저우에서 5회의 학습반이 열렸다. 이 때 학습반에 참가한 6만여명의 수련생이 씨앗이 되어 파룬궁은 중국 전역에 급속히 전파되기에 이른다.

 

1993년 4월 리훙쯔 대사의 ‘중국법륜공(中國法輪功)’이 군사의문(軍事誼文)출판사에서 발행됐고 1994년 9월에는 리훙쯔 대사가 직접 파룬궁 공법을 가르친 비디오테이프가 베이징TV예술센터(北京電視藝術中心)에서 발행됐다. 1994년 12월에는 리훙쯔 대사의 주 저서인 ‘전법륜’이 국무원 라디오텔레비전부(廣播電視部) 산하의 중국광파전시출판사(中國廣播電視出版社)에서 발행됐다. 수련효과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마치 비온 뒤에 죽순이 자라듯 각지에서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1995년 3월 13일,리훙쯔 대사는 프랑스 주재 중국대사관의 요청으로 파리중국대사관 문화처에서 설법보고회를 가졌다. 이는 해외에서 최초로 열린 파룬궁 학습반이었다. 같은 해 4월 14일,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제2회 해외 파룬궁 학습반이 열렸다. 이후부터 리훙쯔 대사는 법(法)을 전할 뿐 더 이상 공법(功法)을 전수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는 많은 이들이 비디오테이프나 서적, 각지의 파룬궁 연공장을 통해 파룬궁을 배웠다. 파룬궁은 처음부터 완전히 자발적인 수련을 강조했으며 관리하는 사람이나 조직, 기구 혹은 사무실이 없고 명부가 없다. 수련을 강요하지 않고 수련을 통해 아무런 보수나 명예,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다.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만이 있을 뿐이다.

 

中 언론서도 긍정적 보도 잇따라

 

중국공안부 내부 조사에 따르면 1992년 5월부터 1999년 7월까지 7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수는 약 7000만~1억명으로 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륙 매체들도 많은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1996년 1월, 베이징청년보(北京青年報)는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을 베이징 10대 베스트셀러로 선정했다.

 

1997년 3월 17일 다롄일보(大連日報)는 ‘무명노인의 묵묵한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한 노인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1100여m의 길을 수리한 이야기를 실었다. 1998년 7월 19일 중국경제시보(中國經濟時報)는 ‘나는 일어났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허베이성 한단(邯鄲)의 가정주부 셰슈펀(謝秀芬)이 16년간 하반신마비로 지내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보행 능력을 회복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1998년 11월 24일 상하이 TV는 파룬궁이 이미 유럽, 미주, 호주, 아시아 등 4개 대륙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상하이와 세계 다른 나라에서 광범위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얼빈 공안국은 1999년 3월 4일 하얼빈시 파룬궁 총보도소를 거리에서 물건을 주워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선진단위’로 평가했다.

 

1999년부터 독단적인 탄압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1999년 7월, 당시 중공 주석 장쩌민은 파룬궁 수련자 수가 중공 당원수를 초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단적으로 파룬궁 탄압을 결정했다. 1998년 초 리훙쯔 대사가 ‘걸출한 인재’ 자격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온가족이 뉴욕에 정착한 후의 일이다.

 

1999년 7월 20일, 새벽을 기해 탄압이 시작됐다. 많은 파룬궁 자원봉사자들이 중국 공안에 의해 체포됐다. 이날 리훙쯔 대사는 미국에서 ‘나의 한 가지 성명’을 발표해 “나는 수련하는 사람으로 본래 정치권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으며 단지 수련을 가르칠 뿐이다. 한 사람이 연공을 잘 하려면 반드시 도덕이 고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상 나는 이 한 점을 해냈으며 1억여명이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했다”라고 밝혔다. 탄압은 계속됐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16세기 프랑스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제세기’에서 “1999년 7월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말로 파룬궁 탄압을 예언했다. 사람들은 이를 지구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오해했다. ‘예언의 달’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빗나갔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은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을 기뻐하면서 그 해 7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세계를 경악케 한 사건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1999년 중국은 예언 성취와 동시에 그 불가해성도 함께 드러낸 무대였다.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 (사진=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란 무엇인가?

--전 세계 1백여 개 국가에서 1억명 이상 수련

 

【대기원】[해설] 5월 13일은 세계 파룬따파의 날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과 그 지지자들이 5월 13일 각종 활동을 펼쳐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이 1992년 5월 13일 창춘(長春)에서 처음으로 파룬궁을 공개 전수한 것을 경축함과 아울러 리훙쯔 선생의 57세 생일을 축하했다. ‘신기원(新紀元)’에서는 이번에 5개 부문에 걸쳐 파룬궁 특집 기사를 게재하며 본문은 이중 2번째에 해당한다.

 

파룬따파(法輪大法)란 무엇인가?

1999년 7월 파리에서 유럽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에 참가한 수련생들이 단체 연공하는 모습(명혜망)

 

수련(修煉)은 인류 문명 속에서 그 연원이 아주 길고 오묘하며 무궁한 영역으로, 보통 원칙에 해당하는 심법(心法)과 공법(功法) 두 부분으로 나뉘며 수련의 내포는 철학이나 건강의 범주를 훨씬 초월한다. 공법은 일반적으로 몸을 닦는데 사용되며 심법이란 마음을 닦고 사람의 경지를 승화시키는 관건이다.

 

수련의 정수(精髓)는 비록 자고이래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깊이 토론되거나 보급된 적은 없지만 인류와 물질이 존재하는 다양한 공간,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드러내는 능력 때문에 중국문화와 서방문명 중에서도 모두 수련에 관한 각종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국 고대의 태극(太極), 하도(河圖), 낙서(洛書), 팔괘(八卦), 인도의 요가, 서방의 일부 정수(靜修) 방법에는 모두 수련의 오묘한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변천에 따라 그 심법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이미 수련방법이 원래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에 대해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불가(佛家)의 상승(上乘) 수련대법(修煉大法)으로 우주 특성 ‘진(眞)선(善)인(忍)’을 원칙으로 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5가지 동작의 공법을 포함한다. 1992년 중국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전수되기 시작했다. ‘진(眞)선(善)인(忍)’은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자 우주 중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이다. 파룬따파를 수련하려면 단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전법륜(轉法輪)’을 반복적으로 통독하면서 책에서 언급한 진(眞)선(善)인(忍) 표준에 따라 개인의 심성(心性)을 제고하고 연공으로 보조하기만 하면 되는데 짧은 기간 내에 생각하지 못했던 높은 층차에 도달할 수 있으며 반본귀진(返本歸眞)할 수 있다.

 

파룬따파는 ‘진(眞)선(善)인(忍)’ 수련 표준에 따라 선(善)을 닦으며 평화롭다. 모든 활동이 공개적이고 자발적이며 비용을 전혀 받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련할 수 있으며 삼척동자부터 구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련자 매 사람은 모두 사회의 일원이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파룬궁 수련은 단지 질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성실하고 선량하며 너그럽고 평화롭게 만든다. 아울러 지혜를 열어주고 점차적으로 인생과 우주의 오묘한 신비를 통찰한 자유자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파룬궁 수련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포용력과 상화(祥和)함을 증가시키며 사람들의 전반적인 정신생활의 질을 향상시킨다.

 

통계에 따르면 2007년 5월 13일까지 ‘전법륜’과 다른 파룬궁 서적들은 이미 3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발행되고 있다. 또한 세계 각지에는 약 110개의 파룬궁 사이트가 있으며 파룬궁은 지금까지 1000여 차례 이상의 표창과 지지 결의안을 받은 적이 있다.(출처: 명혜망 http://www.minghui.ca)

 

 

참혹한 중공의 파룬궁 박해

 

1999년 7월 중국 공안은 내부조사를 통해 대륙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수가 7천만에서 1억에 달한다고 했다. 같은 해 7월 20일 중공은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미 박해로 사망한 것이 확인된 파룬궁 수련생들의 수는 3150명에 달하며 박해사망 사건은 중국의 30여개 성, 시, 자치구에서 모두 발생했다. 판결 받은 파룬궁 수련생의 수는 6000명이 넘으며 2001년 중국의 어느 노교소(勞敎所 강제노동수용소) 부소장이 밝힌데 따르면 전국적으로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들의 수가 21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의 많은 노교소에서 살아 있는 파룬궁 수련생의 몸에서 장기를 떼어 팔아먹은 놀라운 만행이 발생했음이 밝혀졌다.

 

베이징 공안 내부 소식에 따르면 2001년 4월까지 베이징에 와서 청원하다 체포되어 기록이 남은 파룬궁 수련생만 83만 명(이름을 밝히지 않아 등록되지 않은 경우는 제외)에 달한다고 한다.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강제로 약물 주사를 맞거나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입당한 파룬궁 수련생이 수천 명에 달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세뇌반’에 보내졌고 무수한 사람들이 박해로 인해 집을 떠나 유랑하고 있다. 또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의 가족, 친지, 동료들이 모두 각기 다른 정도로 연루되어 불이익을 당하거나 세뇌 당했다.

 

중공은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 경제자원의 4분의 1일 동원했다.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기간에 세계 각지에서 온 2천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유엔광장 앞에서 평화적으로 청원하는 모습(명혜망)

 

1992년 5월 13일 중국 창춘에서 최초의 파룬궁 학습반이 열렸다. 이 날은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선생이 세계 최초로 파룬궁을 공개 전수한 날이자 리훙쯔 선생의 41세 생일이었다. 이때부터 파룬궁이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리 선생은 “나의 일생은 바로 이 대법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2000년 전 세계 파룬따파 학회(學會)에서 공동으로 매년 5월 13일을 세계 파룬따파의 날로 정해 리훙쯔 선생의 생신과 이런 고덕대법(高德大法)을 세상에 전한 것을 경축하고 있다.

 

고난을 초월해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한 파룬궁의 장거는 지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역사회고--파룬따파 중요 사건 기록

 

1992년 5월 13일 리훙쯔 선생은 창춘에서 최초의 파룬궁 전수반을 개최했다. 파룬궁은 이 해에 ‘중국 기공과학연구회’ 직속공파로 인정받았다. 리훙쯔 선생은 1994년 연말까지 약 2년여 동안 각지의 초청에 의해 중국 대륙 전역에서 모두 56차례 전수반을 열었다. 이 사진은 리훙쯔 선생이 1993년 3월 우한(武漢) 제 2기 전수반에서 강연하는 모습(명혜망).

 

1993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93년 동방건강박람회에 참가한 리훙쯔 선생이 박람회 최고상인 ‘변연(邊緣)과학진보상’과 대회 ‘특별금상’ 및 ‘가장 환영받는 기공사’ 칭호를 받았다. 12월 17일에는 중국공안부 소속의 중화 견의용위(見義勇爲) 기금회에서 수여한 영예증서를 받았다. (명혜망)

 

1994년 8월 3일 미국 휴스턴 시에서 리훙쯔 선생에게 명예시민증과 친선대사 칭호를 수여했다. 1996년 10월 12일에는 휴스턴 시장이 리훙쯔 선생이 처음으로 휴스턴에 와서 설법한 날을 기념해 ‘휴스턴 리훙쯔 대사의 날’로 정했다. 사진은 2001년 휴스턴 대법제자들이 연공하는 모습(명혜망)

 

1994년 9월 리훙쯔 선생이 직접 파룬궁 공법을 시연한 비디오테이프가 베이징 텔레비전 예술중심 출판사에서 정식 발행되었다. 같은 해 12월 리훙쯔 선생의 주요저작인 ‘전법륜(轉法輪)’이 국무원 광파전시(廣播電視)출판사에서 발행했다. 사진은 1994년 7월 다롄(大連) 제 2기 파룬궁 전수반 모습(명혜망)

 

1995년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리훙쯔 선생이 프랑스 파리에서 공법을 전수하고 파리 주재 중국대사관 문화처의 요청에 의해 강연했다. 이후 리훙쯔 선생은 1995년 4월 14일부터 20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전수반을 개최한 이후 더 이상 공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법만 전했다. 이후 새로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연공장을 찾아가거나 비디오테이프, 또는 자습으로 법을 배웠다. 리훙쯔 선생은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사진은 1995년 4월 스웨덴에서 파룬궁을 전수하는 모습(명혜망)

 

 

1996년 1월 ‘전법륜’이 ‘베이징 청년보’에 의해 베이징 시 10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다. 1998년 5월 15일 중앙텔레비전에서 ‘만간(晩間)신문’ 등에서 국가체육총국 보고서를 보도하며 파룬궁에 대해 긍정적으로 지지했다. 보고서에서는 파룬궁이 효과가 좋으며 사회 안정과 정신문명 건설을 촉진했다고 평가했다. 사진은 1994년 1월 리훙쯔 선생이 톈진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모습(명혜망)

 

1998년 베이징, 우한, 다롄, 광둥, 난창(南昌), 광시, 안후이 등 의학단체에서 3만 5천명에 달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의학조사를 실시해 수많은 의학기적을 발견했다. 1999년 2월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질병치료율 98%이상, 수련생 일인당 평균 의료비 절감액이 3600위안에 달했다. 사진은 1998년 약 2천명의 베이징 수련생들이 참가한 단체연공 모습(명혜망)

 

1999년 4월 25일 만 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베이징 중난하이 우측에 있는 국가청원사무실에 찾아가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헌법에서 인정한 수련환경을 보장해달라고 호소했다.(명혜망)

 

1999년 6월 25일 시카고 시장이 이 날을 ‘시카고 리훙쯔 대사의 날’로 정했고 일리노이 주 주지사와 주 재정부장이 리훙쯔 선생에게 상장을 수여했다.(명혜망)

 

1999년 7월 중국 공안부 내부 조사에서 대륙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수가 7천만에서 1억에 달한다고 인정했다(명혜망)

 

 

지금까지 파룬궁은 전 세계적으로 2천여 개의 포상과 감사패를 받았다. 2000년 5월 13일 제 1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로 정해졌다.(명혜망)

 

2007년 4월 8일 중국자유문화운동이 중국 지식인들을 대표해 파룬궁에 ‘특별 정신신앙상’을 수여했다. 심사위원회에서는 “파룬궁에 대한 참혹한 정치적 대박해 중에서 중공 폭정을 실패했고 지금 최후의 실패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중화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파룬궁의 모든 노력은 중국인들에게 복을 가져다 준 아주 선량한 행동이며 이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 존경할만한 고덕대법(高德大法)이다.”라고 평가했다.(명혜망)

 

2000년 8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사악을 징벌하고 세인을 일깨우기 위해 파룬궁은 해외에서 박해원흉 장쩌민 과 주요 지휘자들을 ‘집단학살죄, 고문죄, 반인류범죄’로 기소했다. 현재 약 30여개 법정에서 소송을 심리하고 있으며 이중 적지 않은 사건에서 이미 피고에게 유죄를 선포했다. 사진은 2000년 파룬궁 수련생들이 미국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장쩌민 일당이 중국 정부를 조종해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가했음을 폭로하는 기자회견 장면.(명혜망)

 

2006년 3월 중국 대륙에서 미국에 건너온 증인이 중공이 살아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몸에서 장기를 떼어낸 만행을 폭로했다. 이후 독립조사단에 의해 중국의 장기적출 만행이 보편적으로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현재 국제적으로 300여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파룬궁 박해진상 연합조사단을 결성해 중국에 들어가 조사활동을 펼치려 하고 있으나 중공측이 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사진은 2006년 10월 28일 타이완에서 열린 퍼레이드 대열 중에서 중공의 파룬궁 수련생 생체장기적출을 폭로하는 시연장면

 

2008년 5월 13일 세계 파룬따파의 날과 캐나다 파룬따파의 달을 맞아 캐나다의 하퍼 총리와 여러 명의 국회의원 및 주 의원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축전을 보냈다. 사진은 연속 3년 동안 파룬따파의 날을 기념해 축전을 보내 온 하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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