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太乙金華宗旨

醉月 2012. 11. 16. 10:03

1, 天心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절로 그러함을 眞理 내지는 理致라고 한다.[自然曰道]
진리[道]는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하나의 본성[性]일 뿐이요, 사람의 생명 활동을 主宰하는 하나의 으뜸 된 신[元神]일 뿐이다.
本性과 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빛[天光]에 의지하여 있는데 하늘의 빛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의 두 눈에 의지하여 있다.
옛날부터 仙人이나 眞人이라 하는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서로 가르쳐 전하였는데, 하나[一]를 가르쳐 전하면 하나를 체험을 통하여 얻곤 하였던 것이다.

 

가장 높은 스승이신 太上老君께서 세상에 몸을 두신 뒤로 東華帝君이 전하여 받고, 다시 차례대로 呂祖에게 내려와서, 다시 차례대로 전하여져서 南宗과 北宗이라는 두 큰 맥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의 태어나기 이전 상태를 온전히 보존하라고 가르치는 全眞의 가르침이 극도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큰 세력을 떨친다는 것은 그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뿐, 오히려 그 마음에서 마음으로 남모르게 전해지던 가르침과 깨달음은 날로 희미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내면의 세계에 남은 것이라곤 없을 정도로 끓어 넘쳐서, 사람들은 분수를 모르고 잘난 체만 하는 풍조가 극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극도에 다다르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이치인지라, 東晉때의 許眞君의 가르침을 따라서 맑고 밝음을 굳게 지키는 淨明敎가 慈悲로움을 베풀어 사람들을 널리 건지기 위하여, 문자만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떠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주고자 하는 뜻을 특별히 세우고, 높은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맞이하여 이끌어 주게 되었다.
이를 듣는 사람은 千劫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난 것이요, 이를 전하여 받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한때에 진리의 모임[法會]를 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許眞君의 애쓰심을 우러러보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사회생활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倫理를 잘 지키고, 日常生活을 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서 확실한 뿌리를 내린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야, 태어나기 이전의 참다운 세계[眞]를 닦고 본성[性]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猥濫(외람)되게도 스스로 사람들을 건지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먼저 太乙金華宗旨라는 말의 뜻을 밝혀 낸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太乙이란, 이보다 더 이상의 위는 없다는 말이다.
丹을 가르치는 法들은 모두 有爲한 것들을 빌어서 無爲함에 이르고 있는 것들이지, 有爲를 단번에 뛰어넘고 無爲에로 곧바로 들어가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그 전하고 있는 宗要로운 뜻은 본성을 닦고 불리는 일과 그 효과를 곧바로 드러내 놓고 있어서, 첫째 가는 가르침에 속하고 둘째 에 가는 가르침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묘하다"[妙]라고 한다.


@金華란 말은 곧 빛을 말한다.

빛에는 색이 없으므로 황금 꽃[金華]으로 상징을 삼았는데, 그 꽃[華]이라는 글자의 뜻 가운데에는 보통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하나의 빛이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 다름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위없고 참된 태을의 기'[先天太乙之氣]라는 것이다.  『입약경入葯經』에서, "내면의 세계에서 經驗하는 물을 고향으로 하는 鉛(납)은 그 맛이 한가지이다."[水鄕鉛, 只一味]라고 말할 때의 납[鉛]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그 납이라는 것은 물을 상징하는 坎卦의 두 陰爻 가운데에 있는 陽爻에 해당한다.

 

빛을 되돌려 비추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스르는 법[逆法]을 써서, 하늘의 중심[天心]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쏟아 붓는 것이다.
하늘의 중심[天心]은 해[日]와 달[月]의 가운데에 있는데, 『황정경黃庭經』에서는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 가운데의 사방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 힘차게 살아 나오고 있는 참된 기[眞氣]를 다스릴 수 있다" [寸田尺宅, 可治生]라고 말하고 있다.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이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니, 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天心]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사방 한치 정도 되는 가운데에는, 약초들이 빽빽하게 널려 자라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평탄한 공간이 높다랗게 걸려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든가, 玉皇上帝께서 사시는 하늘나라 서울에 세워진 단청 입힌 궁궐이 보기에도 기묘한 모습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나아가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神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儒家에서는 이를 '虛中'이라 하고, 佛家에서는 '靈臺'라 하고, 道家에서는 '祖土'·‘黃庭'·'玄關'·' 先天竅'라고 한다.
어떻든 간에 하늘의 중심은 마치 사람이 사는 집과 같은 곳인데, 빛이 그곳의 주인 어른이다.
그러므로 빛이 한번 그곳으로 되돌아 비치게 되면,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氣가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는 마치 聖人이 임금으로 되어서 서울을 定하고 지극한 法則을 세우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보물과 비단을 들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수없이 많게 되는 것과 같고, 한 집의 주인이 깔끔하고 밝으면 그에 따른 사람들이 저절로 시키는 일을 잘 받들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저 빛을 돌리는 일[回光]만을 하면 될 뿐이다. 위없이 묘한 비결이다[無上妙諦].
빛이라는 것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한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되돌려 비추어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이 빛이 모여서 엉기게 된다. 이 빛이 엉겨 모인 것은 곧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진리 자체로 된 몸[法身]이라는 것이며, 아홉 하늘[九宵] 위에 神이 엉겨 모이게 된 것이다. 『心印經』에서 이른바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느님이 있는 곳을 지키노라면, 진리의 태아가 그곳으로 날아올라 가게 된다" [靜朝飛昇]는 것이다.

 

그 宗要로운 뜻을 행함에는, 힘들여 찾거나 한발 두발 밀어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잡됨이 없이 하느님이 있는 이곳[上丹田]에다가 생각을 못박아 두면 될 뿐이다. 『능엄경』은 중생들이 본디 마음을 잃고 헤매므로 일곱 세계에 輪廻하게 되는 이치[七趣]를 설명하는 곳에서,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것만이 있는 순수한 생각은 그 자체로서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 위에 나게 된다" [純想卽飛, 必生天上]라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공기로 이루어진 푸르고 푸른 바깥 세계의 하늘이 아니고, "진리의 몸을 先天八卦方位 가운데 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에 태어나게 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이다.
이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 바깥에 또다시 어떤 몸이 있게 되는 경지가 이루어진다.
황금 꽃[金華]는 다름아니라 金丹이다.

 

신의 밝음[神明]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 스승들이 누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妙한 방법의 가르침은, 비록 털끝만큼도 어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힘찬 미꾸라지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聰明하여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여야 한다.
아주 聰明한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행하여도 얻지를 못하고, 아주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


 

2. 元神과 識神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하루살이같이 보고, 큰 진리는 하늘과 땅도 물거품같이 본다.
오직 생명 활동을 主宰하는 으뜸 된 신[元神]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본성[眞性]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그 위에 있다.
그 精이나 氣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을 따라서 썩거나 허물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으뜸 된 神이 그에 머물러 있게 되면 곧 無極이 이루어진다.

 

하늘을 생기게 하거나 땅을 생기게 하는 것도 모두 이 이치에 말미암는다.
배우는 사람이 다만 이 으뜸 된 神만을 감싸서 지킬 수 있으면, 陰과 陽이 변화하는 굴레를 뛰어넘어서 그 바깥에 태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길을 잃고 欲界, 色界, 無色界라는 굴레 속을 輪廻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것이 곧 禪을 하는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크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가르침을 전할 때에 흔히 쓰는 "본성을 보아야지..." [見性方可]라는 가르침이다.

이른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는 본래의 모습' [本來面目]이라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어머니의 胎에 태어날 때에 그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元神은 사방 한치 되는 곳[方寸]에 머물러 살게 되고, 意識의 神[識神]은 그 아래에 있는 心臟에 살게 된다.
아래에 있고 피와 살로 된 心臟은 모양이 마치 큰 복숭아 같은데, 허파가 그것을 덮어서 감싸고 있고, 肝이 옆에서 돕고 있으며, 큰창자, 작은창자가 밑에서 떠받치고 있다. 만일 사람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아니하면, 心臟에 아주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놀라운 말을 들으면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화나는 일을 들으면 심장이 괴롭고 답답하며, 死亡을 보면 슬퍼지고, 아름다움을 보면 눈길을 빼앗긴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고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에야 어찌 아주 미미한 흔들림이라도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은 절대적으로 움직일 줄 모르는 곳이란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사방 한치 되는 곳 가운데에 있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뜻[眞意]은 어찌하여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움직일 때에는 별달리 妙한 일이란 없지만, 별달리 妙한 일이 없는 그것이 또한 가장 妙한 일이기도 하다.
보통사람이 죽을 때에도 이것이 움직이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 별일이 아니다.
가장 妙하다는 것은, 빛이 이미 모여서 엉겨지고 뭉쳐져서 되고, 眞理 그 자체인 몸[法身]이 차츰차츰 神靈스럽게 通하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은 모두가 지금까지 몇 천년이 지나도록 가르쳐 전하여 주지 아니하였던 秘密이다.
아래에 있는 의식의 신(識神)이 마치 邊方에 있고 勢力이 剛한 제후의 나라의 사나운 장군과 같아져서, 귀, 눈, 입, 코, 피부 같은 감각기관을 주재하고 있는 임금에 해당하는 심장[天君]을 속이고 그를 외롭게 몰아세워 두고는, 멀리 떨어져서 한 몸의 법도를 잡고 있기를 오래 계속하게 되면, 마침내 보검의 칼끝이 거꾸로 임금에게로 향하는 반역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빛을 엉기게 하여 으뜸된 신[元神]이 있는 궁궐[元宮]을 비추면서 지키게 되면, 마치 지혜가 빼어나고 밝은 임금이 위에 있는 것 같고, 두 눈을 통하여 밖으로 나가던 빛이 내면으로 되돌아 들어오게 되면, 마치 왼쪽에 서 있는 文臣과 오른쪽에 서 있는 武臣이 마음을 다하여 보필하는 것과 같아진다.

 

안으로 다스림이 엄숙하게 이루어진 뒤에는, 모든 간사한 무리들이 저절로 창 끝을 아래로 향하여 내려뜨리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丹을 이루는 길[丹道]에 있어서는, 精이라는 水와 神이라는 火와 뜻[意]이라는 土, 이 세 가지를 위없는 보물로 삼는다.
精이라는 水는 무엇인가 하면, 다름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참되고 하나뿐인 기 [先天眞一之氣]이다.
神이라는 火는 곧 빛이다.
뜻[意]이라는 土는 곧 가운데 궁궐 속에 있는 하늘의 중심이요, 하늘의 마음[天心]이다.
神이라는 火는 作用이 되고, 뜻[意]이라는 土는 本體가 되고, 精이라는 水는 터전(丹田)이 된다.
보통사람은 뜻[意]으로 因하여서 몸[身]을 낳는데, 몸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2미터도 채 안 되는 그 모습에 그치지 아니한다.
몸에는 넋[魄]이라는 것이 있는데, 넋은 의식에 붙어서 작용을 하게 되고, 의식은 넋에 힘입어서 생겨난다.

넋은 陰하고, 의식[識]의 바탕이다.

 

의식은 끊임이 없으니,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한 世代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며, 넋의 모습이 바뀌어지거나, 그 넋이 몸담고 있는 그릇이나 그것을 이루게 되는 재료가 변하게 되는 일은 끝나지 아니한다.
오직 얼[魂]이라는 것이 있어서, 神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 된다.
얼은 낮이 되면 두 눈에 깃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간(肝)에 가서 머문다.
얼이 두 눈에 깃들이게 되면 눈이 볼 수가 있고, 肝에 가서 머물면 꿈이 이루어진다.
꿈이라는 것은 神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위로는 아홉 단계의 하늘[九天]과 아래로는 아홉 층계의 땅[九地]을 눈 깜짝할 동안에 모두 다녀오기도 하는데, 깨어나면 그 모든 것이 언제 있었더냐 는 듯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치 깊은 연못 속같이 된다.
어떤 형태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넋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게[回光] 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얼[魂]을 불리게 되고, 神을 保存하게 되면 넋[魄]을 눌러 놓게 되며, 의식[識]을 끊어버리게 된다.

 

옛 사람들이 세상을 벗어난 方法은, 陰한 찌꺼기들을 모조리 불로 불려서 잡된 것 하나 없이 純粹한 陽으로 이루어진 狀態 곧 八卦 가운데의 乾卦 상태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며, 넋을 녹여 없애고 얼을 穩全(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陰을 녹여 없애고 넋을 눌러 놓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순수한 陽만으로 된 상태인 乾卦의 상태로 돌아오는 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빛을 돌리는[回光] 방법만이 있을 따름이다.
빛은 곧 순수한 陽만으로 이루어진 상태인 乾이고, 그것을 되돌려 비춘다는 것은 곧 그것을 떠나갔던 상태로부터 되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방법만을 지키고 있노라면, 저절로 精이 가득 차게 되고, 神이라는 火가 피어 나오게 되고, 뜻[意]이라는 土가 엉겨서 흩어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스러운 태아[聖胎]가 맺힐 수 있게 된다.

쇠똥구리라는 곤충이 쇠똥을 동글동글 굴리면 그 알맹이 가운데에서 흰 빛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神을 그것에 쏟아 부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神의 작용에 의한 보람[神功]이다.
이와 같이 쇠똥 알맹이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의 조짐을 낳고 그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거늘, 나에게 있고 참다운 마음이 쉬고 있는 하늘의 가운데[天心]라는 곳에다가 神을 쏟아 붓는다면, 어찌 또 하나의 새로운 몸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하나의 신령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성[眞性]이 하늘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공[乾宮]에 떨어지고 나면, 그것은 곧 얼[魂]과 넋[魄]으로 나누어진다.

 

얼[魂]은 하늘의 중심[天心]에 있게 되는데 陽하고 가볍고 맑은 氣이다. 이것은 텅 비고 고요한 우주의 근원[太極]으로부터 온 것인데, 우주에서 가장 으뜸이며 근원이 되는 창조주[元始]와 같은 모습이다.
넋[魄]은 陰하고 무겁고 탁한 氣인데, 모양·모습이 있는 모든 생물의 육체에 붙어 있다.
얼[魂]은 살기를 좋아하고, 넋[魄]은 죽기를 바라는 성질이 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色]을 좋아하여 움직이는 모든 氣는 모두가 넋[魄]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다름아니라 의식의 신[識神]인 것이다.
붙어 있던 생물이 죽은 뒤에는 피로 된 음식을 받아먹는데, 되살아나는 경우에는 陰한 것들이 陰한 것에게로 돌아가서 같은 것끼리 뭉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큰 不幸이 일어난다.
배우는 사람은 그 精과 氣와 神을 불리는 과정에서 이 陰한 넋[魄]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리면, 곧바로 잡된 것 하나 없이 순수한 陽으로 되는 것이다.


 

3. 回光守中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말이 어찌하여 나왔는가?
文始眞人 곧 關尹子의 『文始眞經』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빛을 돌게 하면, 하늘과 땅의 陰하거나 陽한 氣가 모두 모여서 엉기지 아니함이 없게 된다.
이른바 깔끔하고 세밀하게 깊이 생각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 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려보는 생각[想]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 방법을 행할 때에는 어떤 존재가 있는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없는 듯이 느끼며 행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계속하여 보람이 이루어져서 피와 살로 된 보통의 몸 바깥에 또 하나의 어떤 몸이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그 어떤 존재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는 동안 오로지 이 일만을 하게 되면, 그제야 빛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참답게 된다.
이렇게 된 뒤에야, 그 빛이 신령한 불[神火]이 되고, 바른 생각[正念]을 이루게 된다.
위와 같이 배우고 닦으면서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고 나면, 빛이 저절로 모여들고 그 가운데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참으로 양[眞陽]한 어떤 하나의 점이 저절로 갑자기 생겨 나오는데, 마치 기장쌀 알맹이 같은 구슬이다.
부부가 서로 합하면 아이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땅히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빛이 돌면 몸 속에 있는 불[火]이 운행을 하는데, 마치 해가 운행을 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생기듯, 빛이 되돌려 비추는 곳에 따라서 몸 속의 불[火]이 운행하면서 여러 가지 정황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빛의 돌아감이 곧 몸 속의 불[火]이 엮어내는 계절[節候:火候]가 되는 것이다.

 

우주 자연의 운행과 변화 가운데에는 어떤 陽한 빛이 있어서 그것을 主宰하고 있는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日]가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눈[目]에 해당된다.
神과 인식능력[識]을 밖으로 달려나가 버리고 흘러나가 버리게 하는 일은 이 陽한 빛을 병들게 하는데, 그것은 이것이 매우 순하게 변화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금꽃[金華]를 피우기 위한 길은 모든 것을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을 쓴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한 사람의 몸에 있고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를 돌린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를 일으키는 그 先天의 참된 기[眞氣]를 돌린다는 말이며, 그때그때 일어나는 헛된 생각을 한때 그친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千劫 동안이나 돌고 돌 輪廻를 그쳐서 빌붙을 바 없는 空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거치게 되니, 인간의 시각으로 따져서 일 년이 흐른 것과 같고, 캄캄한 가운데에서 숨 한번 쉬는 동안에 지옥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두루 돌아오게 되니, 그 欲界, 色界, 無色界를 거치는 기간이 마치 백년 동안이나 걸리는 긴 밤중과 같다.

 

보통 사람은 '으앙' 하고 한번 크게 울면서 땅에 떨어진 뒤로 계속해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대로 따라서 살아갈 뿐, 늙기 전에 한 번도 그 변화를 거슬러 보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陽한 氣가 줄어들어 없어지고 마니, 곧바로 끝없는 밑바닥의 세계[九幽]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엄경』에서는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한 생각[想]은 그 자체로서 위로 날아올라 가고, 잡된 것은 그 자체로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純想卽飛, 純情卽墜]라고 말하였다.

보통 배우는 사람은 생각[想]은 적고 情이 많아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길을 따라 가라앉게 마련이다.

오직 진실하고 헛됨이 없는 진리를 깨달으면서 자세히 살피고[諦觀] 숨을 고르고 가늘고 길고 부드럽게 쉬어야만[息靜]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바로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陰符經』에서는 "그 열쇠가 되는 기틀이 눈[目]에 있다"라고 하였고, 『黃帝內經』 素問에서는 "사람의 몸에 있는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는 모두가 위에 있는 텅 빈 구멍으로 올라가서 쏟아 부어진다"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알아듣고 몸으로 얻으면, 오래도록 사는 사람도 이에서 나오고, 굴레를 벗고 뛰어넘어서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사람도 이에서 나온다.

 

이것은 儒 佛 仙이라는 세 종교의 어느 것에나 통하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工夫]이다.
빛은 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산과 물과 땅과 해와 달이 모두 이 빛 아닌 것이 없으므로, 오직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총명함이나 지혜나 肝에 모든 정신 작용이 운행되고 전환되는 것이 모두 이 빛 아님이 없으므로, 또한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과 땅과 빛은 그대로 이 세계를 천곱의 천곱을 또 천곱한 만큼의 세계[大千]에 가득 퍼져 있으며, 사람의 한 몸의 빛도 역시 저절로 한번 빛을 돌리면[回光], 하늘과 땅과 산과 물 모든 것이 모두 도는 것이다.

사람의 빛은 위로 눈[目]에 모여드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몸에 있어서의 큰 열쇠가 되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하루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靜坐] 있지 아니하면, 이 빛이 흘러서 돌아다닌다.
어느 곳에서 막아서 그치게 할 것인가?
만약 한 시각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 용히 앉아[靜坐] 있을 수만 있다면, 지나온 前生이 만겁 동안에 천 번을 태어났을지라도 이 한 시각으로 완전히 끝내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결국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라[靜]는 것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처 이루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묘한 진리[妙諦]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을 처음 시작함에 있어서는,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거친 곳에서부터 세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통틀어서 말하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이 계속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하며, 끊임이 없으면 묘한 보람이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一]라는 글자에 달려 있다.
다만, 그렇게 한결같이 하나를 지켜 내고 있노라면, 저절로 차가운 느낌도 오고 더운 느낌도 겪게 되는데[冷暖自知], 그러한 경지나 느낌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하늘은 텅 비어 있고, 바다는 드넓어져서, 모든 존재나 이치[萬法]가 하나같이 하나같아지고 평등해지느냐[如如]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바라던 바를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聖人에서 성인으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은 되돌려 비추는 방법[反照] 아닌 것이 없었다.

孔子는 "지혜에 이른다"[致知]라고 말하였고, 釋迦는 "마음을 살핀다"[觀心]라고 말하였고, 老子는 "안으로 살핀다"[內觀]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이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되돌려 비춘다[反照]는 용어를 사람마다 말로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실제로 얻지를 못한다면, 이 용어의 뜻을 참으로 알았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되돌린다[反照]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으면서 對象을 알고 깨닫는 능력[知覺]이 되는 마음 상태로부터 육신의 모습[形]과 그 神이 아직 드러나기 이전인 사람으로서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이 여섯 자밖에 안 되는 육신 가운데에서 하늘과 땅이 아직 생겨나기 이전의 본바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단지 한두 시간 할 일 없이 앉아서 자기만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고는, 곧 "되돌려 비추었다"[反照]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여서야 어찌 첫머리 시작이 되었던 곳에든 꼭대기 높은 곳에든 이르러 낼 수가 있겠는가?
佛敎나 道敎의 祖師들이 사람들에게 "코끝을 보아라[看鼻尖]"고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코끝에 매어 두라는 말도 아니고, 눈으로 코끝을 보면서 생각은 또한 단전丹田[中黃]에 쏟아 부으라는 말도 아니다.

 

눈길이 이르는 곳에는 마음이 또한 이르고, 마음이 이르는 곳에는 氣도 또한 이른다.
어찌 하나는 위에 있고 하나는 아래에 있게 할 수가 있으며, 또한 순간적으로 위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아래에 있다가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이 말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손가락을 달이라고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은 사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코끝'[鼻端]이라는 용어가 가장 그 뜻이 묘하다.
이 용어는 코를 가지고 눈길을 잡는 가늠쇠로 삼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 눈길을 코끝 가운데에 두지 아니하고, 눈을 크게 뜨면 먼 곳을 보게 되어 코를 보지 않게 되며, 눈을 너무 감으면 눈꺼풀이 붙어 버려서 역시 코를 보지 않게 된다.
눈을 크게 뜨면 눈빛이 바깥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어, 쉽게 흩어지고 어지러워지며, 너무 감으면 눈빛이 안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며, 쉽게 잠이 들어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오직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한[垂簾] 상태만이 옳은 방법에 맞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마치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듯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써 가늠쇠를 삼은 것이다.
이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함'[垂簾]이란 상태는 마치 햇볕이 자연스럽게 발을 뚫고 들어오는 상태이지, 애써 그것을 내려 쬐게 하거나 내려 쬐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코끝을 본다[看鼻端]는 것은, 제일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경우에, 눈길을 모아서 그곳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가늠쇠로서의 자리가 확실하게 잡히고 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내 버려 두어야 한다.
마치 泥水에 사는 훌륭한 목수가 줄을 이용하여 일을 하는 것과 같은데, 처음 시작할 때에 한 번 줄을 써서 좌우를 분명하게 갈라놓고는 끝마칠 때까지 그에 따라서 일을 해 나가는 것이지, 계속해서 줄을 잡고 좌우를 빈번히 맞추어 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인데, 원래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뜻을 부어가면서 두 눈으로 코끝을 살피듯이 보며, 몸을 바르게 하여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을 이끌어다가 緣中이라는 곳에다가 매어 두는 것이다.

 

道家에서는 丹田 즉 中黃이라고 하는 것을 佛家에서는 緣中이라고 하지만, 결국 같은 하나이다.
그리고 반드시 머리의 가운데에다가 생각을 매어 두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두 눈의 가운데로서 편편한 곳인 이른바 先天祖竅라는 곳에다가 생각[念]을 매어 두면 되는 것이다.
빛은 살아서 펄펄 뛰는 듯이 힘찬 물건이라서, 생각[念]을 두 눈 사이의 편편한 곳, 즉 祖竅에다가 매어 두면, 빛이 저절로 그곳으로 뚫고 들어간다.

반드시 뜻을 머리의 한가운데인 어떤 장소에다가 달라붙어 있게 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상의 몇 마디 말로써 모든 중요한 방법과 요령을 이미 모두 다 말하여 버렸다.
그 나머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에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요령과 그러한 요령에 앞서서 해야 하는 일과 그 뒤에 해야 하는 일들은, 아래의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핌[觀]에 대한 짤막한 글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緣中이라는 용어의 뜻이 지극히 묘하다.
中이라는 뜻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천곱에 천곱에 천곱을 한 그 많은 세계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의 기틀[造化之機]이 이를 말미암아서 질서 있게 제자리를 잡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치는 용어인 것이다.
緣이라는 용어는, 이로 말미암아서 무엇인가 이루어지게 되는 실마리 또는 인연이라는 뜻이며, 확실하게 어느 하나의 사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中이라는 용어와 緣이라는 용어의 뜻은 매우 걷잡을 수 없도록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매우 알아내기 힘드는 것이지만, 깨닫고 보면 참으로 훌륭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뜻과 "비추어 살핀다"[觀]는 뜻은, 각각 용어의 뜻은 다르지만, 그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는 경우의 실제에 있어서는 본래 따로 떨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흩어짐 없이 한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으로 조용히 비추고 있는[慧]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이루어진 뒤에는,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구태여 지난날처럼 다리를 틀고 오붓이 앉을 필요는 없게 된다.
마땅히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어떠한 곳에 들어 있는가?", "어디에 가서 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거듭거듭 끝까지 헤치고 들어가 봐야 하지만, 마침내 그러한 곳을 붙잡아 낼 수는 없고, 다만 그 자체로써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곳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그곳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토론할 필요도 없으니, 이른바 마음을 찾는다는 일[覓心]도 깨닫고 보면 본래 그렇게 될 수 없었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와 너 즉 主觀과 客觀의 마음이 안정된 상태, 이것이 곧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는 일[正觀]이고,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 곧 비추어 살피는 마음과 그 대상이 서로 맞지 아니하는 것을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邪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태로 되는 일은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처음 배우고 익힘을 시작하였던 때의 상태를 그대로 계속해서 끊어짐 없이 이어나가노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헛된 생각을 그치고[止],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비추어 살피는[觀] 경지가 이루어지고, 비추어 살피는 경지에 이르러서[觀],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헛된 모든 생각이 그쳐지게[止] 된다.
이러한 이치가 곧 "마음을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이 조용히 비치게 함[慧]을 함께 닦는다[雙修]"는 가르침이 된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이 되는데, 돌린다[回]는 것은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것과 같은 내용이고, 빛[光]이라는 것은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생각을 그쳤다고 하는데[止], 비추어 살핌이 되지 아니하면, 돌리는 일[回]은 하고 있으나 빛[光]이 없다고 말하고, 비추어 살피는 일[觀]은 하고 있으나 헛된 생각이 그쳐지지[止] 아니하였으면, 빛[光]은 있으나 돌리는 일[回]은 없다고 말한다.


 

4. 回光調息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 가장 으뜸이며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다만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실천하여 나가는 것일 뿐이다.
여러 가지 效驗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크게 몽뚱 그려서 볼 때, 처음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것은,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散亂], 두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잘못을 물리치고 나면, 하늘의 비밀을 열어 볼 수 있는 어떠한 구멍[竅]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마음[心]을 숨[息]에 함께 붙어 있도록 하는 수밖에는 없다.

 

숨[息]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은 숨[息]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곧 氣가 생기게 되는데, 그 이유인즉, 氣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람의 생각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빨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헛된 생각[妄念]이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그러는 과정에 한 번의 呼吸이 그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속에서 일어나는 호흡[內呼吸]과 밖에서 일어나는 호흡[外呼吸]은 마치 사람의 목소리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결국, 하루에 몇 만 번의 숨[息]을 쉬니, 그 자체로써 몇 만 번의 헛된 생각[妄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흘러서, 內面 세계의 밝음을 유지하는 정신[神明]이 다 새어나가 버리면, 마치 나무가 죽어서 마르는 것과 같고, 불 꺼진 재가 싸느랗게 식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고 생각[念]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생각[念]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숨[息]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숨[息]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결국, 그러한 病을 일으키는 숨(息) 자체가 바로 藥으로 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름아니라, 마음과 숨이 서로 붙어서 의존하는 일[心息相依]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는 일[回光]은 반드시 숨을 고르는 일[調息]과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데,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가지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빛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눈의 빛[目光]이라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이다.
눈의 빛[目光]이라는 것은 바깥에 접해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빛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고, 귀의 빛[耳光]이라는 것은 속에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精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다.

그런데 精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빛[光]이 엉겨서 한곳에 머물러 있는 장소이고, 같은 뜻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귀로는 잘 듣고[聰] 눈으로는 잘 보는[明] 것을 통틀어서, 그 모두가 하나의 신령한 빛에 지나지 아니한다.
배우고 익힘에 들어 자세를 잡고 앉을 때에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마치 발을 내린 것과 같은 상태로 되는데, 그런 뒤에는 눈길을 코끝에다 맞추어 놓고 그 상태를 그대로 지켜낼 수 있게 되면, 모든 긴장과 의식을 풀어서 억지스러운 요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서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 숨[息]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숨의 들고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 배우고 익히는 요령이니, 여기에서 숨[息]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가리킨다.
한번 소리가 나게 되면, 그 숨은 거칠고 들떠 있는 것이라서 가늘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잘 참아내면서, 숨을 가볍고 가벼우며 알듯 모를 듯하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억지스러움을 다 내려놓고 더욱더욱 숨이 없는 듯한 상태로 되며, 숨이 없는 듯한 상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어지고 더욱더욱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상태로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오래도록 지켜 나가노라면, 그 숨이 없는 듯한 상태조차도 갑자기 뚝 끊어진다.
이것이 곧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숨[眞息]이라는 것이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과 몸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이 가늘게 되면 숨도 가늘어지니, 마음이 하나로 되면 氣를 움직이고, 숨이 가늘게 되면 마음도 가늘어지니, 氣가 하나로 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마음을 흩어짐 없이 한곳에 머물게[定心] 하려면, 반드시 그보다 먼저 氣를 길러야[養氣]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마음을 가지고는 처음으로 손을 대서 시작할[入手] 곳이 없으므로, 氣로 말미암아서 그 실마리를 삼는 것이다.
이른바 잡된 것 없이 순수한 기[純氣]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움직인다'[動]는 용어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고 있는데, 움직인다[動]는 것은 끈으로 묶어 당겨서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니, 결국 '끌어당긴다'는 용어의 別名에 해당한다.

바쁘게 달림으로써 그것을 '움직이게'[動] 할 수 있다면,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여 순수하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읨[靜]으로써 그것을 '편안하게'[寧] 할 수 없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큰 聖人들께서 마음과 氣의 어울림을 살펴 가지고 그때그때 알맞게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 세워서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 된다.

丹에 관한 책에서 "닭은 알을 품고서 마음으로 변함 없이 알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알을 깔 수 있는 까닭은 따뜻한 기운[暖氣] 때문이다.
따뜻한 기운은 다만 알 껍질만을 따뜻하게 함에 그치고, 그 알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데, 닭이 마음으로 그 기운을 이끌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마음을 그곳에 쏟아 붓는다.
마음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氣도 들어가게 되고, 따뜻한 기운을 얻어서 알이 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이 가끔씩 둥지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변함 없이 알속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 神을 쏟아 붓는 바에는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아니하게 한다.
神을 쏟아 붓는 바에 조금도 틈이 없게 하니, 따뜻한 기운도 역시 밤이나 낮이나 틈이 없게 된다.
神이 살아 있는 것이다.
神이 살아나기 위하여 는 먼저 그 마음이 죽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을 죽여 버릴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전체를 主宰하는 가장 으뜸된 신[元神]이 살아난다.

그런데 마음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나무가 말라죽듯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서[專一] 나누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께서는 "마음을 한곳에 놓아두고, 무엇이든 일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 [置心一虛, 無事不辨]고 말하였다.
마음은 달아나기를 잘하므로 氣로써 그것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되도록 하며, 氣는 거칠어지기를 잘하므로 마음으로써 그것을 가늘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어찌 흩어짐이 없이 한곳에 머무르지[定] 아니하는 일이 있겠는가?
크게 묶어서 말하면,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散亂]이라는 두 가지 잘못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잘못은 오직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는 일[靜功]에 의하여서만 고쳐진다.

 

하루하루 끊어짐 없이 그 조용히 하는 일을 배우고 닦아 나가노라면 저절로 크게 쉴 곳이 있게 된다.
만약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 있는 일을 배우지 않는 경우라면, 비록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더라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게 된다.
일단 마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 알아차렸다는 자체가 그와 같이 마음이 흩어짐을 막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어도 스스로도 그러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어두움 속으로 빠져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서로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진짜 빠져 있는 것이고,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어두움 속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맑고 밝음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은 신(神)이 이리저리 달려가기 때문이고,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신(神)이 아직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잘못은 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잘못은 치료하기가 어렵다.
病에 比喩해 보면, 아프거나 가려운 것은 藥으로 治療할 수가 있으나, 精神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 또는 팔다리의 감각이 없어지는 마비 증세와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흩어지는 것은 거두어들일 수가 있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것도 가지런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멍청하고 또 멍청하여 깜깜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지더라도, 그 흩어지고 어지러운 장소는 아직 있기 마련인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오로지 넋[魄]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경우에는 아직도 얼[魂]이 남아 있는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완전히 陰만이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어서 조용함을 배우며 익히려고 하는 경우에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잠을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호흡을 고르는 일[調息]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호흡[息]은 입과 코로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을 말한다.
비록 태어나기 이전부터 쉬고 있던 상태와 같은 참다운 숨[眞息]은 아니지만, 그 참다운 숨이라는 것도 역시 이 입과 코로 쉬는 호흡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마음과 氣를 닦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드시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여야 하며, 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할[靜]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있다.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오직 마음으로만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되지, 귀에 그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 된다.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가늘어지고[細], 가늘어지면 맑아지는데[淸], 거꾸로 소리가 들리면 氣가 거칠어지고[粗], 거칠어지면 흐려지고[濁], 흐려지면 곧 저절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昏沈] 잠이 오게 마련이다.
비록 그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작용을 올바른 쪽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훌륭하게 그 작용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도 결국 작용하지 아니하는 작용이다.
오직 알듯 모를 듯하게[微微]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들어야만[聽] 할 뿐이다.
"알듯 모를 듯하게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듣는다[聽]"는 이 구절에는 숨겨진 뜻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을 두고 빛으로 비춘다[照]고 말하는가?
눈의 빛[眼光]이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니, 눈은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바깥을 보지[外視] 아니한다.
바깥을 보지 아니하면서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는 것이 곧 안으로만 보는 것[內視]이 되고, 실제로 몸 속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는가?
귀의 빛[耳光]으로 스스로를 듣는 것이니, 귀는 오직 안으로만 듣고[內聽] 바깥을 듣지[外聽] 아니한다.
바깥을 듣지 아니하는데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으면 곧 안으로만 듣는 것[內聽]이 되고, 실제로 몸 속에서 나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聽]는 것은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본다[視]는 것은 그 모양 없는 모양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는 바깥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는 바깥을 듣지 아니하면, 氣가 닫혀 막혀서 안으로 달려들어가려고 한다.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안으로만 들어야[內聽] 氣가 바깥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고 안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게 되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마땅함[中]을 얻어서 어두움에 빠져 들어가지 아니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해와 달이 정精을 어우르고 빛을 어우름' [日月交精交光]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두움에 빠져들어서 잠이 오려고 하거든, 즉시 일어나서 천천히 걷다가 정신이 맑아진 뒤에 다시 앉아서, 배우고 익힘에 들라. 맑은 새벽의 한가한 틈이 있을 때에 향 한 자루가 타도록 앉아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참 좋다.
오후가 되면, 세상살이의 일들이 아주 어지러워져서 쉽게 어두움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오후에는 배우고 익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 앉아 있는 시간도 꼭 향 한 자루가 다 타도록 계속할 필요는 없다.
오직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잠시 앉아 있도록 하여야 할 뿐이다.
그렇게 오랜 나날이 지나노라면 무엇인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고,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된다.


 

5. 回光差謬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의 경지에 들어 차츰차츰 잡된 것이 없어지고, 속속들이 익어가게 되면, 겉보기에 마치 마른 나무나 바위같이 앉아만 있을지라도, 그 나아가는 앞에는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질 일들이 많이 놓여 있으므로, 참으로 자세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이 가운데의 消息은 직접 몸으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나, 그 가운데 몇 가지는 내가 지금 規則을 세워서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과 禪學과는 같지 아니하여서,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에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나타나는 效驗이 있다.
먼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과 禪學과의 差別이 되는 곳을 말하고, 그런 뒤에 다시 그 나타나는 效驗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의 宗要로운 뜻을 밟아 나가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경우 경우에 맞는 방법들을 마련해 두어야 하고, 일을 당하여서 꾀를 쓰거나 알음알이를 내어서 마음을 자꾸만 작용시켜서는 아니 된다.

 

스승의 가르침들이 더하거나 빠짐이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서 힘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대지 말라.
氣는 調和를 이루고 마음은 한 가지 일에 오로지 일치하고 있도록 하라.
그런 뒤에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에 드는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 때에는 반드시 하늘이 비밀로 하고 있는 어떤 기틀을 얻어내야 하고, 그 기틀에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구멍[竅]를 얻어내야 한다.

그냥 할 일 없이 마치 거북이가 등껍질 속에 들어가 있듯이 앉아만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른바 善이다 惡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빌붙을 바 없는 텅 빔[無記空]이라는 것이다.
모든 因緣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말똥말똥 깨어 있으면서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어떤 뜻[意]를 일으켜서 어떤 현상이나 일을 맡고자 하여서는 아니 된다.
무릇 참다운 것만을 지나치게 인정하게 되면 이러한 결과로 되는데, 그렇다고 참다운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참다운 소식[眞消息]은 그것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若存若亡] 사이에 있는 것이어서, 뜻[意]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어서 어두움에 빠지지 아니한 가운데,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蘊界]에 떨어져서도 안 된다.
이른바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라는 것은, 다섯 가지 陰한 魔가 맡아서 左之右之하는 세계이다.
만약 보통사람이 마음의 흩어짐 없이 한곳에 머무는 상태[定]에 들 때에, 마른 나무 등결 같고 불꺼진 재와 같은 뜻이 많고, 큰 누리에 따뜻한 봄이 오는 듯한 뜻이 작은 상태로 되면, 陰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니, 그 氣는 차갑고, 그 숨[息]은 무거우며, 또한 여러 가지 춥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경치와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러한 상태대로 오래도록 나가게 되면, 나무나 돌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因緣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게 되면, 명주실 타래를 헝클어 놓은 듯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문득문득 찾아오는데, 그것을 쳐 없애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도리어 그것을 따라서 그 속에 빠져 버리면 오히려 흐름을 탄 듯이 편안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두고, 주인이 노예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상태로 오래도록 나아가면, 欲心이 들끓거나 아니면 물질로 이루어진 헛된 세계[色慾界]에 떨어지게 된다.
잘되어서 위로 간 사람이라야 神들이 사는 여러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잘못되어서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이리 같은 짐승이나 남의 노예로 태어난다.

천년 먹은 여우[狐仙] 같은 것이 이것인데, 그것은 이름난 산 속에서 스스로 그 공기와 달빛과 꽃과 열매를 남모르는 나무와 풀의 精氣를 받아 이용하면서,
삼백 년 또는 오백 년, 많으면 몇 천 살까지도 지내 다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쌓았던 노력에 대한 보답[報]이 다하고 나면, 다시금 그 쌓은 공덕에 따라서 여러 가지 유한한 세계[趣] 가운데에 태어나게 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는 모두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임을 이제 알게 되었으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에 일어나는 效驗들을 찾아보아도 좋다.


 

6. 回光徵驗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타나는 효험도 역시 여러 가지이다.
뿌리가 얕고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는 맡길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衆生을 모두 건질 생각을 일으킨 사람이어야 하며, 巧慢하고 가벼운 마음이나 조그마한 것에 만족하는 게으른 마음에게는 맡길 수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스스로를 낮추어 聽하고 배우고,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이 말을 하여 주어야 한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가운데 가늘고 길게 끊어짐이 없으면, 神이 기쁘고 즐거워져서 마치 술에 취한 듯하고 따뜻한 물 속에 푹 담겨 있는 듯하다.

이렇게 되면 온몸이 陽으로 調和되고, 황금 꽃[金華]이 갑자기 吐해져 나온다.

모든 것이 이미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변화를 떠나서 함께 고요하게[寂] 되고 나면,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에 떠 있고, 온 누리가 모두 함께 빛나고 밝은 경계[回明境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마음과 몸이 밝아지기 시작하니, 황금 꽃[金華]이 막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온몸에 빛과 밝음이 꽉 차게 되면, 찬바람과 서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되니, 남들은 그 일을 만나게 되면 그 일에 대하여 흥미를 싹 잃어버리는 어떤 일일지라도 내가 만나게 되면, 오히려 정신이 더욱 왕성해진다.
黃金으로 집을 세우고, 흰 옥으로 臺를 쌓더라도, 그러한 世間의 썩고 낡아 허물어질 物質에 대하여는, 나의 참된 기[眞氣]를 가지고 웃어 버리고, 나는 生命을 확실하게 세운다.
붉은 피가 흰 젖으로 변하고, 일곱자 밖에 안 되는 고깃덩어리 몸이 금과 보배 아님이 없게 된다.
이러한 경지가 곧 황금 꽃[金華]이 크게 뭉친 것이다.

제일 첫째 단계는 『觀經』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해가 떨어지고, 큰물이 흐르며, 나무들이 쭉 늘어선 것과 같은 이치의 모습 [日落大水 行樹法象]이다.
해가 떨어진다[日落]는 것은 陰과 陽이 나누어지기 이전 상태인 소용돌이[混沌]부터 터전을 세우는 것이니, 無極인 것이다.
큰물이 흐른다는 것은 높은 선[上善]은 마치 물[水]과 같아서 맑고 흠이 없음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지는 太極이 主宰하는 경지이다.
솟아오르는 해요 東宮을 막 나온 黃帝와 같은 경지로 되는데, 동쪽을 뜻하는 震을 五行으로 나누면, 木 즉 나무에 속하므로, 쭉 늘어선 나무[行樹]라는 말로써 상징하였던 것이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겹으로 늘어선 나무[七重行樹]요, 일곱 구멍에서 나오는 빛의 밝음[七竅光明] 이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後天八卦圖에서 서북쪽은 乾괘의 方位인데, 한 자리를 옮겨가서 坎괘의 자리로 되니, 해가 떨어지고[日落] 큰물이 흐른다[大水]는 것은 건乾이 감坎으로 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坎은 子라는 方位이며 冬至에 해당하는데, 이때에는 천둥[雷]이 땅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힘찬 세력을 감추고 있는 때이다.
떨어졌던 해가 震괘의 방위 곧 동방에 이르러서야 그 밝은 [陽]이 비로소 땅 위로 나오게 된다.
이러함이 마치 列을 지어 쭉 늘어서 있는 나무[行樹]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나머지 것들은 이와 같은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된다.

둘째 단계는, 이와 같은 생태를 토대로 하여 그 위에다가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온 누리가 얼음판으로 되어서, 유리를 깐 보배로운 땅으로 변하고, 빛의 밝음이 점점 더 뭉쳐진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神仙界에 있다는 봉래산이나 극락세계에 있다는 蓮花臺가 있게 되고, 이어서 부처가 나타난다.
금빛 나는 본성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니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처라는 사람은 크 게 깨달은 金仙인 것이다.
이상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험을 큰 묶음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옛 분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현재에 있어서도 찾아볼 수 있는 효험으로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배우고 익힘에 들어서 앉아 있노라면 神이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마치 몇 리나 떨어져 있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하게 듣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또렷또렷하게 들린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모두 마치 깊은 산골짜기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 소리 같지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아닌게 아니라 들린다.
들리기는 하지만 내가 일찍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이다.
이러한 효험은 神이 골짜기 가운데에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 그때그때 스스로 경험하여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어 있는 가운데에 눈의 빛[目光]이 높이 더 높이 올라가고, 눈앞에는 온통 흰 빛으로 꽉 차서 마치 구름 가운데에 들어 있는 듯하다.
눈을 떠서 나의 몸을 찾아보아도 찾아서 볼 곳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것을 두고 "텅 빈 방에 흰 빛이 생긴다" [虛室生白]고 말한다.
안과 밖이 서로 통하여 밝고 길하고 상서로운 일들이 가득하고 또 가득하다.

또 하나는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어 있는 가운데에 몸뚱이가 마치 솜뭉치 같고 옥돌 같으면서, 그 몸뚱이에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기운이 왕성하다.
앉아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고자 하여도 머무를 수가 없고, 위로 둥둥 뜨곤 한다.
이러한 상태는 神이 맨 꼭대기의 하늘[頂天]로 돌아간 경지이다.

그러한 상태가 오래도록 끊임없이 일어나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일도 어렵지 않게 곧 이루어지리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는 모두 현재 경험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말만으로는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마다 심어 놓은 前生의 뿌리와 타고난 그릇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止觀論』가운데에서 말하고 있는바 "前生에 착한 씨앗을 뿌려서 이루어진 착한 뿌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善根發相]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 일은 마치 사람들이 물을 마셔보고, 그것이 찬지 더운지를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몸소 경험하여 믿게 된 다음에야 참다운 것이 된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一氣]가 그 자체로서는 눈앞에 나타나는 확실한 경험을 하노라면, 저절로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을 가지고 따져보게 된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一氣]를 얻게 되면, 丹도 역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크기는 겨우 기장 알 만하지만, 진리의 세계에 있는 한 알의 참다운 황금 구슬[黍珠]이다.

한 알 또 한 알씩 모아서,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상태로부터 아주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까지 이른다.
그때 그때의 경우에 해당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가 있는데, 한 알의 기장 알 만한 황금 구슬이 그것이고, 본바탕을 통틀어서 거느리는 '하늘과 땅이 구별되기 이전부터 있어 온 하나의 기'[先天]가 또한 있는데, 그것은 한 알의 알갱이일 수도 있지만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상태[無量]에까지도 이른다.
한 알의 알갱이에는 한 알의 알갱이로서의 능력의 크기가 있는 것인데, 그 능력의 크기를 본바탕을 통틀어 거느리는 경지의 헤아릴 수 없는 크기[無量]로 까지 키우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에 따라서 그가 지니고 있는 얼의 크기를 가장 첫 번째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


 

7. 回光活法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리는 일이 제대로 순서 있게 돌아가게 되면, 성현들이 가르친 도덕 규범에 따라서 살아나가는 한, 그 세상 생활[正業]을 버릴 필요는 없다.

옛 사람은 "일거리가 생겨서 내 앞에 닥치게 되면, 그에 응하여 넘겨야 하고, 물건이 있어서 내 앞에 놓이게 되면,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 버려야 한다" [事來要應過, 物來要識過]라고 말하였다.
내가 바른 생각[正念]을 가지고 나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다스려 나간다면, 빛은 사물에 영향을 받아 굴러가지 아니하고, 빛 그 자체로서 스스로 돌게 된다.

이러한 것을 그때그때 알맞게 응하되, 어떠한 모습에도 한정됨이 없이[無相] 빛을 돌리는 일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떠한 모습에도 한정됨이 없이 빛을 돌릴 수도 있는데, 하물며 누가 보더라도 틀림없이 유한한 모습에 달라붙어 있다[着相]고 판단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서, 그러한 빛을 돌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루 하루의 생활 사이에는 그때 그때의 일에 따르면서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비출[返照]수가 있으며, 털끝만큼도 나라든가 너라든가 하는 유한한 모습[相]에 달라붙어 있지 아니할 수가 있는데, 이러함을 두고 각각의 경우에 따르면서 빛을 돌림[隨地回光]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첫째 가는 일이며, 배우고 익히는 일을 妙하게 運用해 나가는 것이다.
맑은 새벽에,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털어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 채로 조용히 두세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 이상 훌륭한 일은 없다.

 

모든 일거리에 응하고 물건에 부닥치게 될 때에는, 오직 빛을 돌이켜 내면의 세계를 되 비추는 가르침을 이용할 뿐인데, 그렇게 하면 한 순간도 틈이 생기거나 끊어짐이 없도록 된다.
이와 같이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나가기를 2~3 개월 하게 되면, 하늘 위에 있는 모든 진인[眞]들이 반드시 내려와서 나의 배우고 익힘이 잘못되지 아니하였음을 證明하여 준다.


 

8. 逍遙訣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原始天尊이 살고 있다는 玉淸宮으로부터 여유있고 한가롭게 배우고 익히는 법이 내려왔는데 다음과 같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혀서[無爲而爲], 神을 엉겨 모이게 하여[凝神] 氣穴로 들어가서, 한여름[六月]에도 갑자기 흰 눈이 날리는 것을 보게 되고, 한밤중[三更]에도 둥근 해가 이글거림을 보게 되거든, 물 속에서도 숨을 쉬면서 거센 호흡[巽風]과 눈빛의 힘을 빌리고,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우라[食坤德]. 아직도 이 한마디 가 우리의 가르침에 맞으면서도 훌륭한 곳[玄中玄]이라는 말이 있으니, 世俗의 티끌과 번거로움이 없고 텅 빈 그곳[無何有鄕]이야말로, 永遠한 眞理와 通하는 나의 집[眞宅]이다.

 

위에 나오고 있는 글은 한 줄마다 일곱 글자이며, 律詩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道敎의 맛이 있으면서 진리를 완전히 다 드러낼 정도로 깊고 훌륭하다.
眞理를 이루는 큰 方法의 要點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 [無爲而爲]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므로, 어떤 방법이나 장소나 모양, 모습에 의하여 가로막히지 아니한다.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히므로, 겉모습으로만 조용함에 들어서 어리석은 공[頑空]이나 생명 없는 허망[死虛]에 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아니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작용은 하나의 中이라는 글자 밖에 있지 아니한데, 여닫이門의 지도리처럼 가장 重要한 核心은 두 눈에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두 눈이라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의 북두칠성의 자루[斗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圓의 중심이 되어서 돌아감으로써,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이루어지고, 陰과 陽을 바꾸어 가면서 굴러가게 하는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가장 가운데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坎괘의 가운데 爻 卽 陰한 가운데에 쌓여 있는 陽함을 뜻하는 '물 가운데의 금'[水中金]이라는 하나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水) 卽 坎괘의 본래 자리인 丹田에 들어 있는 납[水鄕鉛]이라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빛을 돌리는 방법은 걸음마를 배우는 처음 단계에서의 기틀을 가리킨 것이다.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혀서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신하[輔]의 도리로써 임금[主]을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배우고 익힘의 경지가 좀 낮은[中下] 사람들이 아래의 두 關門을 닦아서, 위에 있는 하나의 관문을 뚫는 일이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가는 길이 차차로 뚜렷하여지고, 배우고 익히는 일의 요령[機括]이 점점 익숙해진 경우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은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랑하지는 아니하니,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많은 시련이 놓여 있다.

이제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가르침의 위없이 귀중한 뜻[無上宗旨]을 곧이곧대로 말해 버리고자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함부로 남들 앞에 드러내지 말며, 오직 몸소 실천하기에 힘 다하기를 거듭 당부한다.
무릇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 용어이다.
배우고 익힌 경지가 한 층씩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빛[光華]의 밝기가 한 차례씩 커지고, 그 빛을 돌리는 방법도 한 차례씩 거듭 妙해져 나간다.

앞에서는 밖에서부터 배우고 익힘으로 말미암아 안쪽의 세계를 눌러 다스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살면서 밖의 세계를 거느리는 것이다.
앞의 것을 다시 말하면, 신하[輔]가 임금[主]을 옆에서 모시는 것이었고, 이제의 것은 임금을 받들면서 나라의 뜻을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 배우고 익히는 모습이 크게 한번 뒤바뀌게 된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法子]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려고[入靜] 하면, 먼저 몸과 마음을 진리의 가르침에 맞게 잘 거두어 잡아서[調攝], 아무런 걸림도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려서 실 한 오라기도 걸려 있지 아니한데, 하늘의 마음[天心]이 가운데의 바른 자리에 자리잡게 한 뒤에, 두 눈을 내려 떠서 발을 내린 듯이 한다.

 

마치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높은 신하들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으니, 감히 어느 신하가 달려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 두 눈의 초점을 이끌어서 안으로 단전[坎宮]을 비춘다.
빛[光華]이 이르는 곳에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참다운 양[眞陽]이 나타나서 그에 응한다.
性을 상징하는 離라는 卦는 바깥은 陽하고 속은 陰한데, 본바탕은 乾괘이다.
본바탕인 乾괘와 屬에 있는 爻에 하나의 음[一陰]이 들어와서 주인이 된 괘인 것이니, 생겨나고 변화하는 사물에 따라서 마음도 생겨나서 흐름을 따라 흘러나와서 이리 굽어 흐르고 저리 굽어 흐르곤 한다.
이제 빛을 돌려서 안쪽을 비추며, 사물의 생겨나고 변화함을 따라서 마음을 생겨나게 하지 아니하게 되었으니, 陰한 氣는 곧 머무르고, 빛[光華]이 쏟아지며 비춘다.

다시 말하여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양[純陽]이 된 것이다.
같은 종류끼리는 반드시 가까워지게 되어 있으므로, 命을 상징하는 坎이라는 卦의 가운데에 있는 陽이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이 위로 올라가게 되는 陽은, 본바탕이 되는 坤괘의 속으로 들고, 乾괘에서 하나의 양[一陽]이 들어와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본래 乾괘의 陽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나 坤괘의 陰이 乾괘의 陽에 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離괘 가운데의 陰과 坎괘 가운데의 陽이라는 두 물질이 한번 만나게 되면, 곧 서로 묶어지고 맺어져서 흩어지지 않게 되고, 우주 자연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기운이 가득 차서 살아 움직이는데, 아주 빠르게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한다.

나 스스로의 단전[元宮] 가운데가 마치 우주의 태초처럼 크게 텅 빈 듯하고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이 커진 듯하여서 어리둥절하게 되며, 온몸이 가볍고 妙하여져서 막 날아오르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산허리에 구름이 꽉 들어차 있는 모습 [雲滿千山]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오고 가는 발자취가 없어지고, 뜨고 가라앉는 구별이 없어지며, 맥박이 멈추고 氣의 운행이 멈춘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참으로 서로 어울려 합쳐졌다고 한다.

이른바 온 누리의 물마다에 달이 담겨 있다 [月涵萬水]라는 것이다.
그때에는 당연히 어둡고 어두운 상태인데, 그 어두운 가운데를 지키고 있노라면 문득 하늘의 마음[天心]에서 한 차례 움직임이 있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의 陽이 다시 찾아오는 것 [一陽來復]이며, 陽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자시 [活子時]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생겨나고 없어지며, 늘고 줄며, 변화하는 消息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보통사람은 한번 보거나 듣는 경우에는 귀나 눈이 사물을 따라가면서 움직이다가, 사물이 없어지면 그친다.
이러한 움직임[動]이나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모두가 보통사람들의 경우인데,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전체를 主宰하는 大腦의 能力을 의미하는 하늘의 임금[天君]은 사물을 지배하고 거느리는 본래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따라다니는 역할을 하게 되어서, 언제나 陰한 기운의 능력을 의미하는 鬼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이제는, 한번 움직이거나[一動] 움직이지 아니함[一靜]이 모두 鬼가 아니라 陽한 사람[人]이 나와 더불어 그러하게 되었으니, 나를 주재하는 하늘의 임금[天君]도 이제는 진리에 합쳐진 참다운 주재자[眞人]로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動] 다른 것들이 그와 더불어 함께 움직이는데[動], 이와 같이 움직일 때에는 上丹田을 의미하는 '하늘의 부리'[天根]에 근거하고, 그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으면 다른 것들도 그와 더불어 함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靜] 있는데, 이와 같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있을 때에는 丹田을 의미하는 '달이 숨어 있는 굴'[月窟]에 숨는다.
움직임[動]과 움직이지 아니함[靜]은 끝없이 꼬리를 물고 도는 것이니,
나도 역시 나를 主宰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을 끝없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한다.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쉬는 것[休息]은 위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나도 또한 나를 主宰하는 하늘의 임금[天君]과 더불어 위와 아래의 丹田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그치고 한가롭게 쉰다[休息].
이른바 하늘의 뿌리[天根]와 달이 숨어 있는 굴[月窟] 사이를 아무런 꾸밈없이 한가롭게 오고 간다는 것이다[天根月窟閑來往].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가라앉아서 조용한 상태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 시기를 어기게 되는 경우를, 너무 여린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이미 움직인 뒤에 나의 뜻이 움직여서 그것에 응하고자 하는 경우를, 너무 늙은 것을 캐려고 하는 잘못이 있다고 한다.

下丹田을 의미하는 天心이 한번 움직이려고 할 때에, 지체없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을 大腦의 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하고, 神의 빛으로 하여금 정수리를 보도록 하여서, 그 움직인 것을 이끌어 올린다.
이것이 바로 움직임이 있을 때에 정확하게 그 시기를 맞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下丹田[天心]에서 움직이던 丹이 이미 乾이라는 궁궐로 올라가 있게 되면, 물 속에 둥실 떠 있는 듯하고, 스스로 "이제는 되었다" 하고 만족하며, 갑자기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 지려고 한다.
이때에는 재빨리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으로써 그 丹을 이끌고 내려와서 中丹田을 의미하는 黃庭에 들어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丹田을 의미하는 中黃에 있는 神의 방[神室]을 본다.
이미 모든 변화를 여의고 고요해지려고 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면 한 생각도 생겨나지 아니한다.
그러니 내면의 세계를 보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한마당 크게 놓여 버리고, 모든 연분이 자취도 없어지고 마는 경지로 되어서, 이제까지 나의 下丹田과 上丹田의 神의 방[神室]에 차려 놓고서 불을 때고 丹을 불리던 화로[爐]와 솥[鼎]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나의 몸을 찾아보려고 하여도 그렇게 되지 아니한다.

이러한 경지를 두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간 경지[天入地中]요, 모든 훌륭하고 妙한 것들도 그 뿌리로 돌아간[衆妙歸根] 때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神)을 엉겨 모이게 하여, 下丹田을 의미하는 氣의 구덩이[氣穴]에 들어가게 하여 封하여 두는'[凝神入氣穴] 일이다.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하나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흩어진 것들을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과정으로서, 사람의 여섯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아니한다.
이 과정을 두고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本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涵養本源]이요, 등잔에 기름을 다시 채워서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내듯이 命을 잇는 과정[涵油接命]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거두어들여진 것들은 저절로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한가롭게 모여 있으니, 깃털 하나 들어올릴 힘조차도 쓰게 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사람이 비롯된 근원을 이루는 氣가 들어 있는 구멍을 의미하는 단전에 神이 편안히 있는 과정[安神祖竅]이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경지[翕聚先天]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그림자나 산울림 같은 것들이 모두 없어져 버리고 나면 마음이 쓸쓸할 정도로 고요하면서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두고 마음이 丹田을 의미하는 氣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는 경지[蟄藏氣穴]요, 여러 가지 훌륭하고 묘한 것들이 모두 그것이 자라 나온 본래의 뿌리로 들어간 경지[衆妙歸根]라고 한다.
이러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아홉 가지의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이치도 있는데, 그러한 이치는 배우고 익힘을 계속하며 기다리노라면, 뒷날에 가서 저절로 그러한 이치로부터 우러나는 능력을 떨쳐 낼 때가 온다.

지금은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는 경우에 대하여 말한다.

그 '사람의 본래 타고난 근원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과정'[涵養]에 들어서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靜] 때가 되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거두어들여서 모아 놓은 일[翕聚]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로 되고, 마음이 丹田을 의미하는 氣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蟄藏]도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로 되어 버리고, 뒤에 이르면 그러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를 기르듯 기르는 일[涵養]이 모두 마음의 丹田을 의미하는 氣의 구덩이[氣穴]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웅크려 감추어져 있게 하는 일[蟄藏]인 것이다.

그렇게 되는 가운데에 들어 있는 한 층의 과정은 그러한 이치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있는 장소[處]를 바꾸지 아니하면서도 그 있는 장소가 여럿으로 나누어지니, 이러함을 두고 모습 없는 구멍[無形之竅]이라고 한다.
천개 만개 장소[處]가 결국 하나의 장소[一處]이다.
그 해당하는 시간[時]이 변경되지 아니한 채로 시간이 나뉘어지니, 그것들 두고 어떠한 시간적인 마디를 나눌 수 없는 시간[無候之時]이라고 한다.

태초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돌고 돌게 되는 시간의 큰 마디 작은 마디들[元會運世]이 결국 하나의 순간인 것이다.

 

무릇 마음은 더 이상 조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변화와 움직임[動]을 여의고 조용해지지[靜極] 아니하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움직이고 움직여서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본래의 바탕[本體]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을 느껴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性에서 피어 나온 욕심[欲]이라고 한다.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움직인다면, 곧 하늘의 움직임인 것이다.
그러하므로 어떠한 일이나 물질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性에서 피어나는 욕심[欲]이라는 것이며, 만약 어떠한 일이나 물건[物]에도 느껴지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하늘의 움직임에 의하지 아니하고 움직이는 경우에는 하늘[天]이라는 용어에 대립하여서 性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 경우에 쓰이는 性이라는 용어를 설명하자면 결국 욕심[欲]이라는 용어에 떨어지게 된다.
욕심[欲]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나 물건이 있는 곳[有物]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그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서 살피고 있는 생각[出位之思]이며,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하나의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면, 곧 큰길(道)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바른 생각[正念]이 생겨나니, 이것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주재하던 참되고 무의식적인 뜻'[眞意]이라는 것이다.
고요한 상태로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물러 있노라면, 하늘의 기틀[天機]이 갑자기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아니겠는가?
"저절로 그러한 대로 놔두고 인위적인 요소를 없애며 배우고 익힌다" [無爲而爲]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 章의 첫머리에 나오는 詩의 첫 두 구절은 황금꽃[金華]의 모든 작용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해[日]와 달[月]이 서로가 서로의 본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한여름[六月]이란 곧 괘로는 離괘요, 五行으로는 불[火]이다.

흰 눈이 날린다[白雪飛]는 것은 곧 離괘 가운데에 있는 陰爻에 해당하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음[眞陰]이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坤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밤중[三更]이란 곧 괘로는 坎괘요, 五行으로는 물[水]이다.
둥근 해[日輪]라는 것은 곧 坎괘 가운데에 있는 陽爻에 해당하는 하나의 양[一陽]이 이글거리며 그 본래 있었던 상태인 乾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坎괘의 것을 가져다가 離괘에 채우는 일[取坎塡離]에 대한 가르침이 이 가운데에 들어 있다.
그 다음의 두 구절은 돌아가는 바퀴의 바퀴통과 같은 역할을 하고 마음의 세계에서 북두칠성의 자루[斗柄]에 해당하는 것의 작용, 다시 말하면 빛[光]이 돌 때에 올라가고 내려가게 되는 모든 기틀을 설명하고 있다.
물 가운데에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센 호흡을 가리켜서 巽괘로써 상징되는 바람[巽風]이라고 하는데, 그에는 눈길을 어떻게 가지느냐 하는 문제도 포함된다.
눈빛[目光]을 나의 몸의 坎괘에 해당하는 곳에 비추어 들어가서 太陽한 精을 끌어 모으는 일인 것이다.
하늘 위[天上]라는 것은 곧 나의 몸의 乾괘에 해당하는 곳이다.

하늘 위로 헤엄을 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유순하고 모든 것을 싣고 있는 땅의 공덕으로 먹여 키운다는 것은 곧 神이 氣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늘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불을 기르는 것[養火]이다.
끝의 두 구절은 지극한 가르침[訣] 가운데 지극한 가르침이다.
지극한 가르침 가운데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씻고[洗心], 생각을 털어 버린다[滌慮]는 것으로서, 빛을 돌리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 가운데에서 따뜻한 물로 머리 감고 몸 씻는 일[沐浴]에 해당한다.

 

聖人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聖學]은 먼저 그칠 곳을 아는 것[地支]으로부터 비롯하여서 지극한 선[至善]에 그쳐 머무르는 것에서 끝나는데, 결국 끝없이 커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우주 자연의 큰 근원[無極]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큰 근원[無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에서는 "어떠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도록 하여서[無住], 그 마음 자체를 살리라[生其心]"는 것으로써 부처님과 여러 높은 스님들이 지은 불교경전[大藏經]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큰 가르침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道敎에서는 "텅 빈 상태에 이른다"[致虛]는 말로써 性과 命을 닦는 모든 일을 모두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갈래의 가르침[三敎]를 뭉쳐 보면 한마디 말에 지나지 아니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을 벗어나서 삶을 보호하는 신령한 단'[神丹]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단[神丹]이란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곳, 어떠한 경우에서든 언제나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것[無心]일 뿐이다.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인 道敎에서 가장 알기 어렵고 감추어져 있는 것은 '머리 감고 몸 씻음'[沐浴]이라는 것인데, 이 하나의 일을 온전하게 배우고 익히기 위하여서는,
"마음을 아무것도 빌붙을 바 없도록 비우라"
[心空]는 말만 가지고도 그 일을 다 이루어 마칠 수가 있다.

이제 한 마디의 말로써 가르쳐 주어서 막힌 벽을 깨뜨려 버렸으니, 이 일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얻으려고 이 스승 저 스승을 찾아 몇십 년을 허비하는지 모르는 어려움을 줄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대들이 하나의 마디 가운데에 세 가지 마디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 듯하므로, 佛家에서 말하고 있는 空觀·假觀·中觀이라는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세 가지 진리를 보는 입장으로는 먼저 空觀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물을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빈 것[空]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다음으로는 假觀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그와 같이 빈 것[空]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그 빈 가운데에다가 모든 것을 세워두는 입장이다.

또한 그와 같이 모든 사물을 허물어 버리지 아니하고 세워두면서도 그 모든 사물에 빌붙지 아니하는 입장이 있으니, 이것을 中觀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비어 있다고 보는 空觀을 닦을 때에도 모든 사물은 허물어 버릴 수 없음을 알면서, 또한 그에 빌붙지도 아니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상태는 세 가지 입장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 보는 입장이 비었음을 깊이 깨달아 얻게 된다.

그러므로 空觀을 닦으면, 空은 그대로 비어 있고, 假도 또한 비어 있고, 中도 또한 비어 있게 된다.

모든 사물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이 없어 비어 있지만 허물어지지 아니한다는 假觀을 닦으면, 작용과 이용하는 방면에서 깊이 깨달아 얻는 바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니, 假는 그대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空도 역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있고, 中도 또한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채로 남아 있다.

中의 길을 갈 때에도 역시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본질을 갖지 못하여서 비어 있다는 이치[空]을 그려보게 되지만, 사람들이 부르기를 空이라 하지 아니하고 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비어 있으면서도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보는 입장[假觀]을 가질 때에도 역시 그것을 假라고 하지 아니하고 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었으되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보지만, 그에 빌붙어 있지 아니하는 中을 지키는 입장일 때에는 더 말할 필요 없이 中이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때로는 離괘 하나만을 말하고 때로는 坎괘도 아울러서 말하였지만 끝에 가서는 말 한마디도 움직여 옮겨 놓은 것이 없다.
이 가르침을 처음 말할 때에, "배우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 여닫이 門의 지도리처럼 중요한 곳[樞機]은 두 눈[目]에 모두 들어 있다"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였다.

이른바 문 지도리[樞機]라는 것은 어떤 작용[用]이다.
그것[樞機]을 이용하여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수레바퀴 구르듯 굴러 나간다는 것이지, 그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가 그것[樞機]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섯 가지의 감각 기관[六根]이나 얼굴의 일곱 구멍이 모두 빛[光明]이 갈무리 되어 있는 곳인데, 어찌 두 눈만 가지고 말하고, 다른 것은 모두 언급하지 아니하는가?
坎괘의 가운데에 있는 陽을 이용하면서, 離괘에 해당하는 곳의 빛[離光]을 이용하여 그것을 비추고 끌어 모으면, 다름아니라 밝음이요, 해와 달의 합쳐짐[明]이 된다.

이름을 元育이라 하고, 北宗의 법파인 朱雲陽 스승께서는 일찍이 "눈먼 사람은 진리의 길을 닦기에 마땅하지 아니하지만, 귀 먹은 사람은 괜찮다"라고 말하였는데, 나의 말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특별히 그 主되는 것과 보조[輔]되는 것의 중요하고 중요하지 아니함을 밝혔을 뿐이다.
해[日]와 달[月]은 근원에 있어서 하나의 물건으로 보아야 한다.
해[日] 가운데에 품어져 있고 어두운 부분이 참다운 달의 속 알맹이[精]이다.
달굴[月窟]이라는 것은 달에 있지 아니하고 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달의 굴'[月之窟]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달[月]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달 가운데에 있는 흰 부분이 참다운 해의 빛이다.

햇빛[日光]은 오히려 달 가운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뿌리'[天之根]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하늘[天]이라고만 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로 나누어 버리면, 각각 半개씩에 그치게 되고, 합하여야만 한 개의 온전한 덩어리로 이루어진다.
마치 홀아비와 홀어미가 각각 홀로 살면 가정을 이루지 못하지만, 지아비와 지어미가 되고 나면 하나의 가정이 완전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건에 있어서는 꼭 사람의 경우와 같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지아비와 지어미가 나누어져 버려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지만, 해와 달이 나누어져 버리면 온전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눈과 귀의 관계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내가 눈이 보이지 사람을 말할 때에는 귀도 이미 없는 경우이며, 귀가 먼 사람을 말할 때에는 눈도 이미 없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사물을 보게 되면, 어떠한 하나의 물건을 말하거나, 어떠한 두 개의 물건을 말하거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말하거나 간에 같은 이치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을 말할 때에는 그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전체로서 하나의 감각 기관[一根]이 되는 것이며,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七竅]을 말할 때에는 그 일곱 구멍이 전체로서 하나의 구멍[一竅]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말은 그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이든, 다만 그 서로 통하는 곳만을 뚫어서 드러내놓는 입장에서 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둘'[兩]이라는 것을 보지 아니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그 서로 가로막혀 있는 곳에만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곳과 경우에 따라서 보는 눈빛[眼睛]을 다르게 바꾸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

 

9. 百日立基

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心印經』에서 `호흡과 빛을 섞어서 任督脈을 돌리기[回風混合]를 백날 동안 계속하면, 그 효험이 신령해진다`[百日功靈]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터전이 되는 일을 배우고 익히기를 백날 동안 계속하면, 진리의 참된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그대들의 현재 상태의 눈빛은 신령한 불[神火]도 아니요, 본성의 빛[性光]도 아니요, 슬기의 횃불이나 촛불[慧智炬燭]도 아니지만, 백날 동안 계속해서 任督脈을 돌리게 되면, 精과 氣가 저절로 충분해지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은 참된 양[眞陽]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진리의 참된 불[眞火]이 저절로 물[水] 가운데에 있게 되는데, 이러한 일을 그침이 없이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나가면, 저절로 坎과 離가 서로 어우러지게[交構] 되고, 진리의 태아[道胎]가 맺혀지는 일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고서야 나는 한 번 가본 적도 없고 들어서 안 적도 없는 하늘에 가 있게 되고, 진리의 아들[靈兒]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애를 쓰거나 꾸밈이 있으면, 그것은 옆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백날 동안 계속해서 터전을 쌓는다 [百日立基]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낮과 밤이 백 번 움직이는 그러한 백날[百日]이 아니다.
한 날 동안 터전을 세운다 [一日立基]고 말할 때에도 낮과 밤으로 이루어지는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숨에 터전을 세운다 [一息立基]라고 말할 때에도 공기를 들여 마시고 내뿜는 호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숨[息]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숨으로 되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사람의 본바탕을 이루고 있는 으뜸되는 신[元神]과 으뜸되는 기[元氣]와 으뜸되는 정[元精]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올라가거나[昇] 내려가거나[降] 서로 떨어지거나[離] 서로 합쳐지는[合] 것이 모두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며, 있음[有]과 없음[無]과 속이 비었음[虛]과 속이 차 있음[實]은 모두 생각[念]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숨[一息]은 한평생 지켜 나가야 되는 것이니, 어찌 백날 동안 계속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런가 하면, 백날[百日]이라는 것도 또한 한숨[一息]이다.

 

백날[百日]이라는 것은 다만 깊이 깨달아 얻는 바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낮 동안에 깊이 깨달아 얻은 것이 밤 사이에 받아서 이용하고, 밤 동안에 깊이 깨달아 얻은 것은 낮 사이에 받아서 이용한다.
`백날 동안 계속해서 터전을 쌓는다` [百日立基]고 하는 말에는 단학의 깊은 뜻[玉旨]이 들어 있다.
높은 진리의 용어는 사람의 몸에 적용해서 맞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참된 스승의 말은 배우는 사람마다에 적용되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은 아득한 가운데 아득함이요, 道敎의 진리 가운데 진리[玄中之中]로서, 보통사람은 풀어낼 수 없는 것이다.
본성을 보고 깨닫게[見性]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참된 스승의 말이나 글로 써서 가르쳐 주심을 찾아서 배우고 익혀야 하며, 그렇게 하여 본성에 맡겨서 저절로 피어 나오게 하여야 하며, 하나하나 모두 證驗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10. 性光識光
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리는 법[回光之法]은 원래 사람의 모든 행동 곧 가거나[行] 멈추거나[住] 앉거나[坐] 눕거나[臥] 모두에 통하는 것인데,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 그 통하는 기틀의 구멍[機竅]을 찾아서 가지는 것일 뿐이다.

내가 앞에서 `텅 빈 房에 흰 것이 생긴다` [虛室生白]고 설명하여 보인 적이 있었는데, 빛[光]이 곧 흰 것[白]이 아니겠는가?
다만, 처음에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이러한 효험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서, 만약 빛이 나타났다고 여기에 그것에 뜻을 붙여 놓게 되면 그 자체로써 의식意識에 떨어지게 되니, 본성의 빛[性光]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대들은 그와 같이 빛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생각 없이[無念] 생각을 살려야[生念] 할 뿐이다.
어떻게 하는 것을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가?

모든 경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여도[千休] 모든 경우를 저절로 깨달아 얻게 되는 것[千處得]이다.
어떻게 하는 것을 생각을 살린다[生念]고 하는가?
한평생 지킬 수 있는 하나의 생각[一念]은 빗나감이 없는 바른 생각[正念]이니, 보통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같지 아니하다.
알고 보면, 마음이 생각으로 되는 것이니, 생각이라는 것은 나타나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그 자체가 빛[光]이요, 황금 꽃 가운데의 암꽃술[葯]인 것이다.
보통사람이 물건을 볼 때에는 우선 눈[眼]으로 비추어 보게 되는데, 처음에는 가름[分別]을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가 본성의 빛[性光]이다.

 

마치 거울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고, 물[水]이 아무런 마음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 의식의 빛[識光]이 생긴다. 거울에 그림이 비쳐서 나타나니, 이미 거울은 없어진 것이고 물(水)에 모습이 비치어 나타나니, 이미 물(水)이 아닌 것이다.
빛에 意識이 생기고 나면 이제는 빛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의 경우, 처음에는 본성의 빛[性光]이었지만 그것이 생각으로 바뀌게 되면 意識이 되는데, 의식이 일어나게 되면 빛[光]은 어두워져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빛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빛이 이미 의식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黃帝內經』에서 `소리가 움직이면 소리를 생기게 하지 아니하고 울림을 생기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의미이다.
『능엄경』의 어떤 해설서의 앞부분에서, `티끌에도 있지 아니하고[不在塵], 의식에도 있지 아니하고[不在識], 오직 뿌리를 가려 잡을 뿐이다[惟選根]`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티끌[塵]이란 바깥 세계의 물질이니, 이른바 일체 중생이 모여서 사는 세계[器界]라는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 나 자체와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 티끌을 쫓아가게 되면 바깥 세계의 물질을 나[己]라고 여기게 된다.
물질은 반드시 어디론가 돌아가는 곳이 있으니[有還], 통함[通]은 문과 창[窓戶]에로 돌아가고, 온전한 밝음인 해와 달의 합쳐짐[明]은 해[日]와 달[月]로 각각 돌아가게 된다.

 

남[他]을 빌어서 나[自]라고 하니, 끝내 나[吾] 아닌 것만 있게 되지만, 『능엄경』에서처럼, 이치를 파고들어서, 마침내 네[汝]가 돌려보내지 못하게 됨에 이르게 된 것[不汝還者]에 이르면, 너[汝]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해와 달이 합쳐진 밝음[明]은 해[日]와 달[月]로 돌아가지만, 해나 달의 밝음[明]을 보는 자체[見]는 돌아가지 아니하는 것이다.
하늘에는 해나 달이 없는 때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해나 달을 보는 본성이 없을 때가 없다.
그와 같다면 해와 달을 가름[分別]하는 것은 모두 내가 있다는 이치[吾有]에로 돌아갈 수 있지 아니하겠는가?
밝음과 어두움을 원인으로 하여서 본성이 가름[分別]을 일으킨다고 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성의 세계 곧 내가 있다는 이치[吾有]에로 돌아가서, 밝음과 어두움이 둘 다 없어질 경우에 이르면, 가름[分別]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게 될까?
그러므로 가름이라는 것[分別] 즉 의식[意識]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내면의 세계에 있는 티끌[內塵]이 된다.

오직 `본성을 봄`[見性]만이 돌아감이 없다고 하는데, 본성을 볼 때에의 그 `본다는 것`[見]은 `봄`[見] 자체가 아니니, `본성을 본다는 것`[見性]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것[還者]은 그 의식이 온갖 세계를 돌고 돌면서 변하는 가운데에서 본성을 보게 되더라도, 그와 같이 본성을 봄[見性]은 돌아갈 곳이 있어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능엄경』에서 `아난阿難아, 너로 하여금 온갖 세계를 돌고 돌면서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과 눈탓이다`[使汝流轉, 心目爲咎]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능엄경』에서, 처음에 밝음[明]· 어두움[暗], 통함[通]· 막힘[壅]· 연분[緣]· 어리석은 텅 빔[頑虛]· 힘차게 가득 참[鬱勃]· 맑고 밝음[淸明]이라는 여덟 가지 돌아갈 곳이 있는 모습들[八還]과 본다는 관념[見]을 가려 밝히는 때에 위의 일곱 가지는 모두 그 하나 하나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본성을 본다는 것`[見性]만이 남아서 阿難으로 하여금 마치 길을 가는 禪僧들이 주장자라는 지팡이를 잠시도 손에서 떼어놓지 않듯이, 그것을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본성을 본다는 것`[見性]에는 이미 여덟 가지 의식[八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참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가장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상태조차도 한 번에 깨뜨려 버려야 `참다운 의미에서 본성을 깨달음` [眞見性]이 될 것이고, `참다운 의미에서 돌아갈 곳이 없는` [眞不還] 나 자신의 주인主人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빛을 돌린다[回光]고 할 경우에는 바로 그 가장 처음의 더 이상 돌아갈 곳 없는 빛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털 한 오라기만한 意識과 생각[念]도 이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汝]로 하여금 온갖 세계를 돌고 돌면서 변하게 하는 것은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에 지나지 아니하지만, 너[汝]로 하여금 깨달음[菩리]을 이루게 하는 것도 역시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일 뿐이다.

티끌[塵]과 의식은 어느 것이나 쓰이지 아니한다.

감각기관[根]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 감각기관의 가운데에 있는 본성[根中之性]을 쓰는 것이다.
이제 意識에 의하여 빛을 돌리는 잘못[識回光]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감각기관[根] 가운데에 있는 근본된 본성[元性]을 쓰게 되는 것이고, 의식에 의하여 빛을 돌리면, 감각기관 가운데에 있고 의식으로 변한 성[識性]을 쓰는 것이다.
털끝 만한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가려내는 기준이 또한 여기에 있다.

마음을 쓰면[用心] 그 자체로서 意識에 떨어진 빛[識光]이 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대로 본성의 빛[性光]이 된다. 털끝 만한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니, 가려내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意識을 끊어 버리지 못하면 神이 살아나지 못하고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지[空] 못하면 丹이 맺히지 아니한다.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면[靜] 곧 丹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으면[心空] 그 자체로서 丹을 이루는 原料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황금꽃의 암꽃술[葯]이 된다.
하나의 사물도 붙여 두지 아니하는 것[不着一物]을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다[心靜]고 부르고, 하나의 사물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不留一物]을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도록 비어 있다[心空]고 부른다.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으로 보게 되면, 그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은 아직 참으로 비어 있음이 되지 못한다[未空].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되[空], 그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어 있음[空]조차도 잊어버려야 참으로 아무것도 그에 빌붙을 수 없는 비어 있음[眞空]이 된다.

 

11. 坎離交婚
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精과 神을 새어나가게 하고, 변화하고 움직여서(動) 사물과 엇갈리는 것은 모두가 離卦로써 상징할 수 있다.
무릇 神과 意識을 거두어들여서 바꾸어 놓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여서[靜] 가운데로 가라앉는 것은 모두가 坎卦로써 상징할 수 있다.

離卦의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음[一陰]은 色을 쫓거나 소리[聲]를 따르기를 主로 하고, 坎卦의 가운데에 있는 하나의 양[一陽]은 몸 속에서 나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거나[返聞] 생각의 실마리와 함께 눈길을 몸 속의 한곳에 모아 놓기를[收見] 主로 한다.
坎卦와 離卦라는 것은 곧 陰과 陽이다.
陰과 陽은 그 자체가 性과 命이고, 性과 命은 그 자체가 마음[心]과 몸[身]이고, 마음[心]과 몸[身]은 그 자체가 神과 氣이다.
한 번 스스로 숨[息]을 거두어들이는 것만으로도 精과 神이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흘러내려 가면서 변화하는 어리석음을 짓지 아니하게 되니, 그렇게 하면 곧 陰과 陽에 해당하는 두 가지 것들이 참으로 어우르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가르침에 맞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게 깊이 진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들 경우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12. 周天
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圓을 그리는 軌度를 도는 일[周天]은 氣를 主로 삼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훌륭하고 妙한 方法이라고 한다.
만약 끝까지 따져 보아서 `어떻게 하면 圓을 그리는 軌度를 돌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마치 어린 모[描]를 빨리 자라라고 뽑아 올려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씀이 없이[無心] 지키고, 뜻함이 없이[無意] 행하는 것이다.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면 圓을 그리며 360度를 도는데 한순간 한순간마다 변하고 자리를 옮겨가고 하지만, 북두칠성의 첫째별[斗樞]을 포함하여 그 자루[斗柄]가 가리키는 북극성은 끝내 옛 자리를 옮기지 아니한다.
나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곧 북두칠성의 첫째별[斗樞]이고, 氣는 곧 많고 많은 뭇 별들이다.
우리 몸의 氣는 원래 팔다리와 모든 뼈마디에 통해 있어서, 조금도 힘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불로 불려서, 의식으로 떨어져 있는 신[識神]을 불리게[鍛鍊] 되면 거짓된 것을 보는 일[妄見]이 끊어져 없어지니, 그렇게 된 뒤에야 꽃에 있어서 암꽃술과 같은 알짜[葯]가 생겨난다.
암꽃술과 같은 알짜[葯]라는 것은 모양, 모습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빛[性光]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참된 기[先天之眞氣]이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과 氣가 흩어짐 없이 한곳에 크게 머무른[大定] 뒤에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캐어내는 방법도 없다.
그것을 캐어내는 방법을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크게 잘못이다.
그것을 오래도록 보고 있노라 면, 마음 자리가 빛나고 밝아지며 저절로 마음이 그에 아무것도 빌붙을 수 없이 비우게 되고, 마음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번뇌가 그치게 된다.

 

만약 오늘은 龍과 범[虎]을 찾고, 내일은 물[水]과 불[火]을 찾게 되면, 끝내는 헛된 생각[妄想]을 그리고 만다.
나는 지난날 火龍眞人이 말로 전해주던 가르침을 이와 같이 받았었다.
丹을 말하고 있는 다른 책들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一日]에는 하루대로 圓을 그리는 궤도를 하늘이 한 바퀴 돌고, 한 시각[一刻]에는 한 시각대로 한 바퀴를 도는데, 사람에게 있어서는 서로 반대 방향에 자리잡고 있는 坎괘와 離괘가 서로 어우르는 곳이 바로 圓을 그리는 軌度의 한 바퀴이다. 나에게 있어서 두 가지가 서로 어우름이 하늘에 있어서는 圓을 그리며 도는 것과 같다.

그 어우름[交]을 쉴 수가 없으니, 어우르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우르지 아니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늘이 願을 그리는 軌度를 돎은 일찍이 조금도 그쳐본 적이 없다.
그러한 결과로 陰을 대표하는 坤괘와 陽을 대표하는 乾괘가 서로 어우러져서 모든 사물이 편안함을 뜻하는 地天泰괘가 이루어지고, 온 누리가 봄처럼 따뜻하고 조화로워지며, 나의 몸에 있고 한 가운데 되는 곳[中宮]이 바른 자리를 잡게 되고, 모든 사물이 한꺼번에 힘차고 가득하게 되니, 다름아니라 丹을 가르치는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머리 감고 몸 씻는 방법[沐浴]인 것이다.

이것이 큰 願을 그리는 궤도를 도는 것 [大周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가운데에서 일어나게 되는 時節의 변화나 내면적인 氣의 변화의 모습[火候]을 볼 것 같으면, 구체적으로 그 하나 하나에는 크거나 작거나 하여서 서로 같지 아니함이 있지만, 깊이 따져보게 되면 마침내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이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경지[自然]에 이르게 되면, 坎이니 離이니 하는 것이 무슨 물건인지, 하늘[天]이니 땅[地]이니 하는 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 무엇을 어우름[交]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두고 願을 그리는 軌度를 한 바퀴[一周] 또는 두 바퀴[兩周] 돈다고 하는지 모르게 된다.
어느 곳에서 이것은 크다 저것은 작다 하는 가름[分別]을 찾을 수 있겠는가?
통틀어서 말하자면, 사람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願 軌度의 돎[旋運]은 어떠한 경우에도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뿐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것이 아닌 경우에는 아주 큰 것을 보아서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작은 것이다.
참된 것인 경우에는 圓 軌度를 단 한 바퀴만 돌더라도 하늘과 땅과 모든 것들이 모두 그와 함께 圓을 그리며 돈다.
다시 말하면, 사방 한치밖에 안 되는 곳[方寸處]에 있을지라도 그 매우 작음[極小]이 또한 아주 큼[極大]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丹을 이루게 되는 氣의 변화하는 모습[火候]은 그 배우고 익힘이 처음부터 끝까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하면, 결국 하늘은 하늘로 돌아가 그저 하늘일 뿐이고, 땅은 땅으로 돌아가 그저 땅일 뿐이며, 모든 것[萬物]도 제각각 모든 것으로 돌아가 제각각일 뿐이다.

만약 억지로 그것들을 합쳐 놓더라도 끝내는 합할 수 없게 된다.
마치 氣候가 대단히 가물어서 陰과 陽이 조화되지 못한 경우와 같으니, 해와 달이 하루도 돌지 아니하는 적이 없지만, 끝내 여러 가지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이 나타남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내가 능히 陰과 陽을 수레바퀴처럼 돌게 할 수 있어서, 몸이 조화롭게 길러지고 살아나서 저절로 그러함에 이르게 되면, 한때에 문득 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비가 내리며, 풀과 나무가 술기운이 가득 오른 듯이 싱그럽고, 산이 푸르고 강이 힘차게 흐르며, 온몸이 탁 풀리되 가슴이 빠르게 쿵쾅거리는 듯하다가 곧 단박에 풀어짐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곧 큰 원의 궤도를 도는 것[大周天]이다.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의 모습이 매우 설명하기 어렵고 妙한데,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때[正子時]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하니, 마치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매이는 일 같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다.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때[正子時]를 또렷하게 가리켜 내지 못한다면, 어디로부터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이미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를 알아냈으면 확실히 그 무엇이 바른 자리를 자리잡고 있는 때[正子時]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가 곧 둘인 경우이고, 바른 자리를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따로 있지도 아니하고,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따로 있지도 아니하는 경우이다.

모든 것은 결국 배우고 익히는 그 사람이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데 달려 있다.
하나가 진리에 합하는 참된 것이면, 그것이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요, 그것이 살아 나오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지 못한 것을 보는 경우라면, 어떤 것이 살아나게 되고, 어떤 것이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와 같으므로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라는 것은 때때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 무엇이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때[正子時]에 이르게 되어, 뜻[志]과 기氣과 맑고 밝으면, 그 무엇이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때[活子時]가 깊은 病에서 살아나듯 잠에서 깨어나듯 피어 나와서 나타나게 된다.
만약 미처 살아 나오는 때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오직 바른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때에 대하여서만 경험을 가지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바른 자리에 바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正者]은 눈앞에 나타나 있지만, 살아 나오기 시작하는 것[活者]은 헤아리기 어렵게 신령하고 묘하지[神妙] 아니함이 없다는 말이다.

 

13. 勸世歌
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제 세상을 건져 丹이 속속들이 익었으니, 친절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한 마디 하노라.
釋迦께서도 큰 因緣을 위하여, 生死의 본 자리를 바로 가리켰건만, 안타깝도다, 깨달은 자 얼마이던가!
老子께서도 우리 몸을 걱정하시어, 谷神을 가르쳐 주셨건만, 사람들은 알아내지 못하네.
내가 이제 진리의 길을 찾는 일을 간추려 말하니, 한가운데 길을 쭉 통하는 이치가 易이라는 큰 진리에 실려 있구나.
내 몸의 어딘가에 바른 자리 있을까? 알고 보니 진리의 관문[玄關]이며,
子와 午의 중간에서는 숨을 안정시킨다[定息]
빛이 있어 태어난 뒤로 막혀 버린 그 구멍[祖竅]으로 돌아오면, 온몸의 神이 편안해지고, 藥이 몸에 흐르는 강물의 근원에서 생겨나니, 하나의 氣가 솟아 나온다.

가려진 막을 뚫으면, 변화가 일어나서 금빛[金光]이 찬란하며, 한 덩어리 둥그런 해가 변함 없이 붉게 빛난다.
세상사람들은 坎과 離의 속 알맹이라 잘못 알고 있지만, 腎에서 心까지 옮겨가려면 아직도 그 사이가 가로막혀 있다.
어찌하면 사람의 길이 하늘의 중심[天心]에 합할 수 있을까?
하늘이 만약 符合해 준다면 사람의 길은 저절로 합해질 텐데…

모든 연분[萬緣]을 내려놓고 털끝 하나도 일으키지 말면, 이것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先天]이요, 진리에 합하는 참된 無極이다.
太初 같은 텅 빔[太虛]이 아름답도록 조용하여, 어떠한 낌새도 녹아 들어가 버리고, 性과 命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意識을 잊어버린다.
意識을 잊은 뒤에야 본래의 참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니, 물이 맑으면 구슬이 보이되 깊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처음을 알 수 없는 번뇌의 가로막음이 하루아침에 휑하니 터져 버리면, 하늘나라[玉淸]에서 아홉 마리의 龍이 수놓인 책을 내린다.
구름과 은하를 걸어서 하늘의 궁궐에 오르고, 천둥 번개를 손에 잡고 벼락을 타고 달린다.

神을 엉겨 모이게 하거나[凝神], 숨을 안정시키는 것[定息]은 처음 배우고 익히는 기틀[初機]이요, 남모르는 자리에 되돌아와 감춤이 바로 모양·모습[相]을 여의고 변함이 없음[常]이며, 번뇌를 끊음[寂]이다.

내가 어느 때에 張珍奴라는 사람에게 두 마디 글귀를 주어서 우리의 가르침의 큰 진리를 깨닫게 하여 이끌어 주었다.
子의 뒤이니, 午의 앞이니 하는 것들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後天 八卦 方位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後天 팔괘 방위에 있어서의 坎괘와 離괘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람의 몸에 있어서 그 방위에 해당하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숨을 머무른다[定息]는 것은 숨을 쉴 때마다 그 숨이 마음과 서로 하나가 되고 氣가 우리 몸의 가장 한가운데[中黃]에 있는 뿌리[丹田]로 돌아가는 모습[息息歸根]을 말한다.

앉아 있다[坐]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등뼈[夾脊]라는 것은 등뼈의 마디마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곧바로 뚫고 올라가는 큰길 즉 督脈을 말한다.
등뼈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관문[雙關]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神이 지켜 주어서 마음을 텅 비우게 하고 번뇌를 끊으며, 아무것도 없음[無]에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이 관문을 보게 되고 또한 뚫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옥 같은 액체[玉液]도 이곳에서 변화되고, 피도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요소들도 이곳에서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며, 氣도 이곳에서 神으로 돌아가고, 神도 이곳에서 텅 빔[虛]으로 돌아가며, 텅 빔[虛]도 이곳에서 진리의 길에 합하게 되고, 진리의 길도 이곳에서 그 公變된 뜻[志]의 처음과 끝을 이어서 圓을 이루어 완전하게 할 수 있으며, 公變된 뜻[志]도 이곳에서 그 바라는 바를 다 채울 수 있는 곳이다.

말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이곳이다.

그리하여 땅에서 번개와 천둥이 쳐서 산봉우리를 흔들어 놓는 경지에 이르면, 진리에 합하는 참된 기[眞氣]가 생기는 것이다.
노란 새싹[黃芽]이 땅속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진리에 합하는 참된 약[眞藥]이 생기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의 터전은 오직 나란히 있는 두개의 관문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큰길[雙關]을 神이 지킴으로 말미암아 쌓여진다.
위의 두 글로써 진리의 길을 닦아 나아가는 일을 이미 다 말하였다.
이것들을 똑똑하게 알게 되면, 남들의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어느 때에 孔子와 그의 제자인 顔子가 태산의 봉우리에 올라가 오나라 땅[吳門]에서 노니는 흰 말의 떼를 바라본 적이 있다.
안자는 그것을 보고, 비단을 필[疋]채로 쭉 펴놓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공자가 급히 그의 눈을 가려 주었는데, 그 이유는 안자가 눈의 능력을 너무 많이 써 버려서 神의 나타남인 빛[神光]을 다 써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자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빛을 돌리는 일[回光]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빛을 돌리는 일[回光]은 잡됨이 없어 순수한 마음으로 배우고 익혀 나가느냐 아니냐 하는 데 달려 있으니, 오직 마음과 숨이 하나로 합하여져서 몸의 한가운데 해당하는 곳[中宮]을 초점을 맞추어 비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신령해질 수 있고, 변화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하며[心靜], 氣가 안정되어야만 그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 자체를 잊어버리고[心忘], 氣는 엉겨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氣조차도 끊어지고, 마음에는 아무것도 빌붙을 바 없이 비어 있게 되면[空], 丹이 이루어진다.
마음과 氣가 완전히 섞여서 하나로 되면, 마치 어머니가 사람의 태아를 열 달 동안 따뜻이 기르듯이 진리의 태아[道胎]를 따뜻이 기르게[溫養] 된다.

 

마음이 밝게 빛나고 본성이 나타나면[明心見性], 진리의 길을 다 지나와서 마친 것이다.
그대들은 각자 제나름대로 힘써 배우고 익혀 왔지만, 세월을 헛되이 보냈으니, 안타깝다.
勸世歌로 하루동안 이 일을 배우고 익히지 아니하면, 하루가 곧 사람을 죽이는 귀신이 되는 것이며, 한 번 숨을 쉴 동안 이 일을 배우고 익히면, 한 번 숨쉴 동안은 참으로 죽음을 초월한 神仙인 것이다.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와 생물의 자라남[化育]에 참여하고 그를 돕는 일도 이 일을 배우고 익힘에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라.

 

金華闡幽問答
問 : 태어나기 이전의 배움은 마음이고, 태어난 뒤의 배움은 발자국이 있는 것인 줄 압니다.
輪廻를 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습 없는 것을 좇아서 배우고 익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答 : 모습 없는 것을 좇아서 배우고 익히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여야 된다는 것이냐?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 조용함[靜] 가운데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할 것이나, 그렇다면 변화와 움직임[動]은 잃어버릴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動]을 잃게 되는 그 까닭을 알아내지 못하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읜다[靜] 할지라도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도[靜] 얻는 바가 없고, 움직이게 되면 잃어버리고 한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진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모습이 있는 것보다 위에 있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은 말이 끊어진 말이요, 마땅히 그러하여야 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현재 실제로는 발자국이 있는 경지에 머물러 있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발자국 없는 것만을 찾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발자국이 있는 경우이든 없는 경우이든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에는 천리 바깥까지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깨닫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것이다.


問 : 어떠한 경우를 두고 발자국이 있으면서 발자국이 없는 것만 찾는 것이라고 합니까?

 

答 : 참으로 부질없구나. 사나이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배우고, 妙한 것 속에서 또다시 향기로운 것을 찾으니, 모조리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될 뿐, 바르고 치우침이 없는 가운데에 또다시 바르고 치우침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구나.
아무런 실마리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곳, 그곳이 참다운 진리요, 우리의 가르침[眞玄]인 것이다.


問 :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게 됩니까?

 

答 : 일이나 물건마다 하나하나 분석하여 파고들면 어렵고, 순간 순간마다 보존하면 쉬워진다.
보존이라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인데, 마음이 보존되면 주재함이 있게 되고, 주재함이 있게 되면, 일과 물건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 제대로 되느냐, 아니면 한번 잘못되느냐 하는 데 따라서 하늘이냐 사람이냐 하는 것이 갈라지고, 어진 이가 되느냐 어리석은 이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끊어지기도 쉽고 잇기도 쉬운데 보존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저절로 틈이 없어지고, 틈이 없어지면 이어지고, 이어지면 빛이 밝아지고, 빛이 밝아지면 氣가 가득 찬다. 氣가 가득 차면 마음이 어두움에 빠지거나 흩어지는 일을 굳이 없애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없어진다. 아! 하늘 아래의 일로서 이 일보다 큰 것이 있는가!
나머지 것들은 모두 끄트머리들이다.
온갖 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보존함을 지키면, 모든 일 가운데 하나의 진리가 쭉 통하게 된다.
이 짧은 구절의 말을 몸으로 배워 익히지 아니하고는 끝내 聖人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問 : 빛을 돌려 되비춘다[回光]는 것을 묻습니다.

 

答 : 비추지 아니하면 어떻게 보이겠는가?
뗏목이 아니면 건널 수 없지만 건너는 것은 건너는 것이고 뗏목은 어디까지나 뗏목이다.
뗏목을 본다고 하여서 보는 것이 뗏목일 수 없고, 건널 줄 안다고 하여서 아는 것이 건너는 것일 수는 없다.
빛을 돌리는 것은 눈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음은 곧 눈인지라, 오래도록 빛을 돌려서 神이 한곳에 엉기면[凝神], 마음 자체를 볼 수 있고 눈도 밝아진다.
겪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이러한 경지를 말하기 어렵다. 닫힌 것을 열지 아니하고, 집착하는 폐단은 자제하고 텅 비우게 되는 것을 배우고 익혀서 그 효험을 몸으로 겪어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마음을 살피고 구멍[竅]을 깨닫게 되면 그 속에 깔끔한 속 알맹이[精]를 생겨나게 할 수 있는데, 깔끔한 속 알맹이[精]는 조금이라도 엉기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리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玄關]과 구멍[竅]의 묘妙한 이치가 나타나게 되고, 몸으로 직접 배우고 익혀서 깨닫는 일이 그 효과를 보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아득하고 먼 구름 잡는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눈동자를 모아서 배꼽 아래를 보는 것은 아직도 바깥을 닦는 일에 지나지 아니하고, 내면의 세계를 닦아서 마음의 눈이 생겨야 비로소 참다운 丹田이라고 할 수 있다.
氣가 왼편으로 올라가서 오른편으로 내려오는 일과 오른편으로 올라가서 왼편으로 내려오는 일도 있는데, 그 이치는 본래 같은 것이다.
丹學의 經典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邪되거나 거짓된 이치는 말하지 아니한다.
또한 눈동자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차원이 낮은 빛이고, 元神과 元氣의 빛이 아니다.
마음의 빛은 바깥에도 속하지 아니하고, 안에도 속하지 아니하니, 만약 인식의 대상에 끌려서 보고싶어 하게 되면, 魔로 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때묻고 물들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한순간에 깨끗하게 하기가 어렵지만, 알고 보면 이 일이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큰 일이다.
한번 빛을 돌리고, 精과 神을 거두어 다시 살려서, 스스로의 마음에다가 빛을 쏟아 붓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부처께서 전해주셨던 등불인 것이다.
부처께서 전해 주셨던 등불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함 없이 꺼지지 아니하는 촛불을 켜서 비추는 것이다.


問 : 배우고 익히는 일은 性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性을 배운다고 해서 命을 배우는 일을 다해 마치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다.
먼저 性을 찾아내서 그로부터 이끌어 가서 命에 이르도록 하여서 命에 막힘이 없어지면, 性도 탁 터지게 되는 것이다.
性은 命이 아니면 탁 터지지 아니하고, 命은 性이 아니면 다 이루어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易』에서는, `이치를 끝까지 깨닫고 性을 다해서 命에 이른다 [窮理盡性, 以至於命]` 라고 하였다.
바닥 끝 까지 들어가서 깨닫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神靈한 물건이 그곳에 숨어 있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죽고 사는 것이 오직 이 하나에 달려 있을 뿐, 달리 알 수 없는 묘한 관문[玄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問 : 마음을 하나의 곳에 이르도록 한다는 뜻을 묻습니다.

 

答 : 마음을 하나의 곳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있어야 하도록 정해진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힘찬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살아서 움직이면서 무엇이든지 찾아내기를 잘 하고, 모양, 모습이나 색깔의 굴레 속에 들어 있지 아니한 것이다.
모양·모습이나 색깔이라는 것은 모두가 한 차원 아래의 것, 다시 말해서 후천後天의 것이다.
대상을 안다는 것[知者]은 마음의 작용이고, 참다운 속 알맹이가 없으므로 텅 비고[空] 타던 불이 꺼진 듯 고요함[寂]은 마음의 본바탕이다.
만약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세계 곧 後天에 매달려 있으면, 당연히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탁한 기[氣質]가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니, 아무리 다스리려고 하여도 결국 끝까지 이를 수가 없으며, 일을 다해 마치려고 하여도 결국 그렇게 할 수 없게 된다.


問 : 神이 氣의 가운데에 들어가는 일을 묻습니다.

 

答 : 어떻게 神이 어디에로 들어갈 수 있느냐?
神이란 氣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들어가 있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神이 氣의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태어난 뒤에 이루어진 後天의 神이 그러한 것이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先天의 神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정해져 있는 길을 가기 위하여 그 관문을 들어가는 일을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는, 氣의 가운데라는 것이 곧 마음의 가운데인 것이니,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이 곧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 열려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만약 힘을 들여서 억지를 부리면, 문이 아닌 곳을 파고들어 가게 되니,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을 여는 곳이 아니다.
온몸을 도는 氣라는 것은 아주 위험하기도 하므로 잘 알아두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하늘의 한가운데이니, 구멍[竅] 가운데에서 가리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가리켜 낼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곧 만물의 운행 변화를 말하는 五行이라는 굴레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일은 그러한 운행 변화를 벗어나 있는 일이다.
우리의 가르침과 배움[玄學]은 만물의 운행 변화 속으로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한 운행 변화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의 몸으로 힘써 실천하지 아니한 사람이다.
말과 말을 가지고 그 숨은 비밀을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글 구절을 가지고 그 속의 사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 깨달을 뿐이요, 여러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問 : 자세하게 몸소 겪어 나가는 모든 배움과 익힘에 있어서는, 반드시 별난 짓을 하지말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을 묻습니다.

 

答 : 어떠한 배움과 익힘이든지, 엄격하지 아니하고서 빈틈없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있겠으며, 엄숙하지 아니하고서 공경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두텁고 공손하여서 스스로를 무너지지 아니하도록 하고, 나타나는 경우와 어두움에 묻히는 경우에도 한결같아서 그것을 하나로 합하며, 본바탕과 작용의 사이에 서로 다름이 없도록 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일이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 이른바 큰 진리는 말없이 부드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때이든 事理에 맞고 일에 열중하지 아니하는 때가 없게 되며 어떠한 일이든 너그럽고 막힘 없이 통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게 된다.


問 : 숨을 고르는 일[調息]을 묻습니다.

 

答 : 코로 쉬는 숨은 바깥 세계의 숨이니, 눈에 보이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과 숨이 서로 의지하게 되어야만[心息相依] 비로소 참다운 숨[眞息]이 되어서, 나가는 숨도 모든 緣分을 따르지 않게 되고, 들어오는 숨도 物質이 쌓여서 이루어진 세계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 열리고 닫히는 기틀과 관문이 되는 구멍[竅]의 묘함은 한때의 우연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오랜 세월 노력이 쌓이고 쌓여야 된다.
그렇게 하노라면 하루아침에 환하게 꿰뚫어 터지니, 하늘과 땅이 나의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그 가운데 큰 존재로서 하늘과 땅이 함께 서있으며, 모든 운행 변화가 하나의 뿌리에서 피어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몸에서 찾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참다운 숨이 이루어지게 된다.
참다운 숨은 숨을 쉬지 않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숨이 힘차고 솟아나는 듯이 이루어진다.
몸의 어디를 살펴보면서 숨을 쉰다든가, 몸 속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숨을 쉰다든가 하는 것들도 역시 눈에 보이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이러한 숨의 힘을 빌어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命으로 이어지는 脈이 안 된다.
命으로 이어지는 참다운 脈은 어디까지나 참다운 것 가운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問 : 元神을 가리키는 己土는 죽고, 元精을 가리키는 戊土는 살아난다는 것을 묻습니다.

 

答 :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는 元神을 가리키는 己土도 역시 죽지 아니한다.
元神이 죽으면 元精을 가리키는 戊土도 살아나지 못하며, 丹田의 元精이 살아나면 그것이 곧 上丹田의 元神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하지 아니하고 막힌 곳을 뚫고 숨은 것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길은 없다.


問 : 반드시 元神을 가리키는 己土를 불려서 실 한 올 걸려 있지 아니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그 다음에 元精을 가리키는 戊土가 丹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元神을 가리키는 己土가 어느 정도 불려지게 되면, 丹田의 元精을 가리키는 戊土가 곧 발생한다.
반드시 丹田의 元精을 가리키는 戊土가 살아나야만, 元神을 가리키는 己土 속에 들어 있는 陰한 찌꺼기들을 없앨 수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단지 陰한 靈에 지나지 못하니, 제나름대로 무엇을 얻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鬼仙일 뿐이다.
우리가 따르는 진리의 길(道)은 그와 같지 아니하여, 하늘에 통하고 땅을 뚫고 나가서 그 묘한 작용이 넘쳐흐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게 된다.
그대들의 자질은 높은 편이 아니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되고, 단계를 건너뛰어서 갈 수가 없지만, 性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性의 하늘을 보지 못하면, 마치 검은 옻칠을 한 통 속에서 이리저리 발자취를 더듬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마른 나무등걸 같이 앉아만 있는 겉모양뿐인 禪에 의하여, 아무것도 얻어내는 것이 없는 경우에 높은 경지로 뛰어올라서 윗 세계에 뚜렷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태아와 같은 숨[胎息]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식 세계를 벗어나 있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신령한 숨[神息]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숨이 아니면 태아가 있을 수 없고, 태아가 아니면 그러한 숨을 쉬지 아니한다.
태아와 같은 숨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 곧 眞人의 숨을 이루는 일인데, 그것은 발뒤꿈치로 깊이깊이 쉬는 숨이다.
그 안에 들어간 경지를 말하게 되면, 안과 밖을 나눌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안과 밖을 오히려 구분하여야 할 때도 있다.
안과 밖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세 개의 관문이 있다는 말이고, 안과 밖으로 구분됨이 없다는 것은 움직일 때나 움직임을 여의고 있을 때나 한결같아서 움직임[動]과 움직임을 여읨[靜]이 하나로 합하여져서 서로 섞여 가지고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서 질적인 변화[化]를 한다는 말이다.
질적인 변화[化]가 아니면 神靈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진리를 지혜의 빛으로 비추어 보지 아니하고, 제 나름대로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터진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問 : 늘어나고 줄어듦이라든가, 들어오고 나감이라든가 하는 것[消息]이 氣 아니겠습니까?

 

答 : 그렇다. 氣는 반드시 진리에 맞게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하여야 하며,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여야 하는데, 우리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있어서는, 陽으로 되어 위로 올라가고, 陰으로 되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그것이다.


問 : 神과 氣가 부족한 것을 묻습니다.

 

答 : 神과 氣가 모자라면, 스스로의 根本이 자꾸만 소모되게 되니, 너무 오래 되기 전에 잘 채워 주어야 한다.
그것을 채워 주면 불을 때는 것처럼 위로 올라가고, 龍이니 범[虎]이니 이해하기 어렵고 묘한 진리의 관문[玄關]이니 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단박 깨우쳐 나타난다.


問 : 나의 몸 안에서 坎괘와 離괘에 해당하는 것들이 어우러지면, 그로 말미암아서 大藥이 나오니, 한 점의 根本된 성[元性]이 坤괘에 해당하는 아랫배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그 빛을 발하여 은은히 비쳐 나오는 줄로 압니다.
티 없이 깨끗하고 잡념을 끊어 버려서, 숨은 멈춘 듯하고 氣는 편안하며, 오직 텅 빈 가운데 밝음만이 있는 경지를 하늘과 땅의 마음[天地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모든 사물의 운행 변화를 맡아서 처리한다고 압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答 : 氣가 편안하고 숨이 멈춘 듯한 것이 바로 나의 性과 命의 기틀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이치이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다시 걷잡을 수 없이 힘차게 살아서 뛰어오를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사람들이 살아나는 자시[活子時]라고 한다.


問 : 하늘과 땅은 해와 달이 아니면 드러나지 아니하니, 해와 달이 공간에서 사라지면 하늘과 땅이 소용돌이치게 됩니다.
神과 氣가 합치고, 氣가 맺히며 神이 엉기면, 그것이 곧 坎과 離가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 : 坎과 離는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는 경지에서 어우러지게 되지만, 숨을 쉬는 것은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다.
하늘의 길은 옮겨가지 아니하는 때가 없으나, 妙한 것은 정해진 時期 없이 합쳐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하늘이라는 곳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이 있는가?


問 : 빛을 돌려 되 비추는 것이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뗏목이요, 玉液을 마셔서 온몸에 퍼지게 하는 것은 몸속 의 물[水]로서 불[火]을 제어하는 일을 妙하게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깨닫는 것을 두고 말한 것 같으면, 그 본바탕은 하나이지만 그 작용은 둘이니,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깨달음과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깨달음은 마치 번갯불이 번쩍 하는 것과 같고, 눈과 귀 가 보고 듣는 것과 같으나, 저절로 진리를 깨닫는 깨달음은 마치 소리가 저절로 귀에 들어오고, 물건이 저절로 눈에 와 닿는 것과 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지만 하지 아니함이 없고, 아무런 것도 없지만 없는 것이 없는데 생각이 한번 일어나면 神이 저절로 밝게 빛납니다.

『역易』繫辭傳 상에 `… 그 낌새를 아는 것, 그것은 신神이로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고자 하지말고, 언제나 변함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응하면서 언제나 변함 없이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있으면, 이것이 곧 이른바 위없는 眞人의 가장 높은 자리[最上一乘]가 아니겠습니까?

答 : 이 비유는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확인 證明해야만 되는 것이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 얽히고 얽혀서 몸에 휘감기는 가운데에서도 날과 씨가 되는 가닥을 용케 뽑아내는 묘한 방법을 얻고자 하여야 된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찌 남다르다고 하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순탄한 경우[順境]에야 누군들 지낼 줄 모르겠는가마는, 그저 조금만 어려운 경우[逆境]를 보태어 놓아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니, 평소에 어떤 일을 배우고 익혀 놓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늘과 땅의 낳고 길러주는 보답을 받을 수 있기 위하여 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問 :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함[靜]을 몸에 익히는 것을 묻습니다.

答 : 어디 한번 그대는 어떠한 때와 어떠한 곳에서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고 조용함을 익히는가 물어보자.
만약, 이 몸뚱이가 평안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건강이나 기르는 조그만 기술이요, 하늘과 땅이 싫어하는 바이니, 이른바 게으른 놈팡이라는 것이다.
어찌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넓고 크고 높고 밝은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막힘 없이 통하니, 그러함이 그 흐름이고, 그것이 만물을 만들고 키움인 것이다.
진리는 삶[生]으로써 그 길을 삼고,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니, 진리의 길을 닦는 사람들은 움직임과 변화 속에서 있으면서도 티끌을 떠나 있고 세상의 일을 벗어나 있고자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그 빛을 조화시키고 그 티끌과 함께 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니 어찌된 말이냐?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사람은 사람이되, 사람에게서 떠나 있지 아니하다.
어찌 사람과 멀리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진리야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하여, 매일 매일의 쓰임에서 언제나 운행하는 것이 진리 아님이 없음에 있어서랴!
진리의 운행이 하늘과 땅에 있으면 하늘과 땅이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이 되고, 神이 보존되고 만물의 운행 변화하는 이치를 알게 된다.
어찌 진리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다고 하겠는가?

 

問 : 사람에게는 영리하고 아둔한 구별이 있고, 가르침에는 그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타고난 자질이 밝고 튼튼하다면, 그 사람의 본래 바탕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음의 빛이 밝아서 그 기틀을 살펴보기에 충분하며, 건강은 일의 끝을 보기에 충분하니, 가르침을 배우고 익힘이 저절로 쉽고 간결하게 이루어져서 부처의 길을 좇아가는 지름길을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되어 있다. 한번 좇아가서 곧바로 如來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본래의 바탕이 어둡고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텅 빈 경지에 이르는 배움과 익힘이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
텅 빈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일의 옳음을 모으는 일[集義]입니다.
어떤 경우에 마땅함이 있을 때에, 그 마땅함에 맞고 합치되는 것을 일의 옳음이라고 말하는데, 그 마땅함에 맞고 합치된다는 것은 곧 사람의 마음에 아주 꼭 들어맞는 경우인 것입니다.
아주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있다면 어떠합니까?


答 : 사람의 마음이 어둡고 가려져 있으면, 뚫고 들어가서 비추는 수가 있다.
단지 어렵게 아느냐 타고난 능력으로 아느냐 하는 구별과, 노력을 하여야 하느냐 노력을 하지 아니하여도 되느냐 하는 구별이 있을 따름이다.
오직 비추어내기만 한다면 텅 빔에 이를 수 있는 것이요, 아주 꼭 들어맞는 곳이라는 것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人情이 차고 더운 것이나, 세상살이의 변하고 헛됨을 미리 예측하기는 참으로 어려워서 하나도 정해져 있는 것이 없다.
꽃이 필 때에는 사람들이 즐겁게 보지만, 꽃이 질 때에는 한 무더기 거름풀에 지나지 아니하여서, 쓸어 버려야 할 것으로 되니, 쓸어 버려서 깨끗하게 되면, 다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이치[道]로 남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치를 담고 있는 그릇[器]으로 남는다.
나의 얻음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그 悠久함을 같이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好生之心]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그와 같은 바람[願]을 일으켜서, 능력과 재주에 따라 스스로에게는 손해를 끼치지 아니하고, 남에게는 이익을 주며, 때와 일에 따라 힘껏 행하되, 오직 마땅함에 맞고 허물이 없도록 한다면, 禍를 바꾸어 福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吉한 별이요, 우리의 가르침이 吐해내 놓은 큰 弟子이니, 다음에 죽어서 저 세상의 보답을 받고, 사람들의 禍福을 左之右之하는 권한을 얻을 것이요, 나보다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나의 말하는 바가 흘려 버리는 이야기가 아니니, 반드시 잘 알아듣도록 하라.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들 움직임과 변화를 여의는 것만을 좋아하고 움직임과 변화는 싫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에게 얽혀 있는 원한이나 골치 아픈 일을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여도 여전히 그 인연을 마쳐 버리지 못한다는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제멋대로 사람과 만남을 끊고 세상을 피해 산림[山林]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호랑이나 승냥이나 늑대나 도깨비나 두억시니가 거친 벼락이나 매운 바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神을 떨게 한다.

더구나 피와 살로 된 몸뚱이는 옷을 입고 먹을 것을 먹어야 하거늘, 그것을 공급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에게 빌며 돌아다니게 되니, 추위와 더위와 장마비가 몸을 파고들어서, 신진대사의 조절과 건강의 보호를 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괴로움과 병이 생긴다.
때가 이르러도 깨닫지 못하고 옆길로 달려가서는 오히려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무런 이익도 없다고 후회하니, 남들을 해치기에 아주 알맞다.
또 하나의 부류는, 山林을 그리워하여, 지금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그렇지 아니한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티끌을 떠나겠다 고만 하여서, 세속의 흐름과 다르고자 하는데, 이것은 찾아온 기회를 망치고 이룰 수 있는 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든 몸이든 모자라는 곳이 많게 되고, 정신이 날로 무너져 내리며, 진리도 물론 알아낼 수 없게 되지만, 스스로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옆문으로 달려가서는, 오히려 `본래 善은 昌盛하지 못하는 것이며, 眞理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한다.
거기에다가 邪된 스승과 이상한 파벌을 만들어서, 우뚝하게 솟아 있는 진리의 용마루[道宗]를 어지럽게 만들고, 명예나 낚으려고 한다.
털끝 만한 차이가 결국 천리의 차이를 가져와서, 우리의 가르침을 해치게 된다.

오호라! 두세 제자가 뜻을 높게 일으켜서, 우리의 가르침의 묘함을 몸으로 익혀 보고, 그 아득한 이치를 뚫고 나가서,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힘들여 그것을 닦으니, 오히려 山林에서 닦는 것보다 훌륭하다.
우리의 가르침은 아랫대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내려갈 것이지만, 언제나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닦아 지닐 것이고, 깊은 산의 음험한 굴에 들어앉아서 세상을 피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끊고는 스스로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사람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태초의 우주같이 섞여서 잠겨 있는 가운데에서 後天의 氣를 품게 되어, 그 바탕이 생겨나게 되고, 그 知覺이 있게 됨에 이른다.

그럴 때에는 陰과 陽이 이미 나누어져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나 욕심이 대단히 뚜렷하게 물들어 있는데, 吉하고 凶하고 후회[悔]되고 아까워함[吝]이 드넓게 자리잡아도 스스로는 모른다.
陰과 陽이 크게 아주 나누어져 버리면, 元氣를 다시 일으킬 수 없고, 그대로 이어나가 죽음으로 이를 뿐이다.
그러한 後天의 氣의 바탕이 되는 先天의 氣는 바로 하늘과 땅의 氣로서, 그대들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 진리의 통함이 보존되어 있으니, 善한 사람은 그것을 善하게 하고, 惡한 사람은 그것을 惡하게 한다.
惡한 삶의 세계에 떨어지거나, 이단의 무리에 떨어지거나, 그 넋[魄]이 陰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얼[魂]이 흩어지거나, 그 느낌이 얇거나, 남의 알게 됨을 만나고자 하거나 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서 볼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큰 실마리를 볼 것 같으면, 벼[禾]에서 기장[黍]이 생기지 아니하며, 봉황이 까마귀를 기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각각 우리의 가르침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좇아가고 있는 방향이 어떠한지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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