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禪師_깨달음의 자리

醉月 2012. 11. 15. 08:21

예산 정혜사 · 부산 선암사 ‘혜월선사’

혜월 선사가 말년에 살다 열반한 선암사에서 본 부산시내 전경.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세상 천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덕숭산 정혜사에 한 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쌀가마를 훔쳐내 지게에 지고 있었다. 쌀가마가 너무 무거웠던지 도둑은 일어서지 못해 쩔쩔맸다. 그 때 누군가 지게를 살짝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도둑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는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쉿! 들킬라.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가게. 그리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또 오게나.”

 

도둑한테 쌀지게 져주며 “또 오게나”

혜월 선사(1862~1936)였다. 11살에 이곳 정혜사에 출가해 19살에 경허선사를 만나 24살에 깨달음을 얻고서도 끼니도 잇기 어려운 절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논을 개간하고, 밭을 갈고, 소를 키우던 그였다.

“절에 먹을 것이 없는데도 도둑이 들면 도둑을 기는 커녕 절 살림을 훔쳐내 도둑에게 지워 보낸 어른이었지. 도둑에게 참 잘혔어. 잘혔어.”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은 혜월을 기리며 수덕사 염화실에서 껄껄 웃었다. 혜월의 사제이자 그가 시봉했던 만공 선사 등으로 부터 어린 시절 늘 듣던 얘기들이다.

혜월은 몸을 숨긴 채 북녘땅 갑산에서 열반한 스승 경허의 시신을 만공과 함께 모셔와 다비를 치르고서는 홀연히 덕숭산을 떠났다. 51살이었다.

 

논 속아 팔고도 ‘논 그대로 있다’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백양산 선암사. 625년 원효대사가 세운 조그만 절에 훗날 혜월이 찾아왔다. 그러자 수행을 하려는 납자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었지만 사형 수월선사와 마찬가지로 밤낮으로 머슴처럼 일했다. 그는 덕숭산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소를 키웠다. 혜월은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 다름 없이 소 ‘얼룩이’를 대했다. 어느 날 선암사에도 도둑이 들었다. 새벽에 보니 혜월이 그토록 아끼던 소가 사라진 것이다. 승려들은 난리법석이었지만 혜월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뒷산을 올랐다. 그리고선 “얼룩아!”하고 불렀다. 그러자 도둑에게 끌려가던 소가 “음메”하고 응답했다. 소는 혜월의 부름에 울음으로 응답할 뿐 아무리 도둑이 때려도 뒤를 돌아보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울음 소리를 좇아 간 승려들이 도둑을 잡아 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혜월은 “소를 찾았으면 됐지 사람은 왜 때리느냐”며 도둑을 일으켜 세워 쓸어주며 내려가도록 했다.

혜월은 까막눈으로 알려져왔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를 통해 혜월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알려진 대로 까막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초발심자경문(막 출가한 승려가 읽는 경전)을 겨우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혜월은 이미 주인과 도둑, 사람과 짐승의 경계도 차별도 없었다. 무차별과 무등, 무소유. 그것이 천진도인 혜월의 안목이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원장을 지냈던 내원정사 주지 정련 스님은 혜월의 법제자인 석호 스님의 제자 석암 스님을 은사로 1957년 이곳 선암사에 출가했다. 혜월이 열반한 지 20년이 넘은 뒤였지만 향곡·석암·동춘 스님 등 혜월의 선을 이은 스님들이 주지로 머물며 소림선방을 운영해 지월·서옹·석주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환희심을 내곤 했다. 중증장애인시설 반야원을 만들어 대중의 보시를 자비로 환원하는 그의 지표가 된 것은 당시부터 귀가 닳도록 듣던 혜월의 삶이었다.

 

헐벌은 대중 보시하러
자나깨나 산비탈 개간
도둑을 주인처럼
소를 사람 대하듯 무차별

혜월은 절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가는 곳마다 산비탈을 개간해 논을 만들었기 때문에 ‘개간 선사’로 불렸다. 그가 밤낮으로 몇 년을 일해 산비탈에 논 10마지기를 개간했다. 산이 가팔라서 논이 거의 없던 아랫마을의 한 사람은 이 논을 탐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살려야하니 그 논을 팔아라”라고 사정하는 소리를 들은 혜월은 논을 팔았다. 그런데 혜월이 원주(절 살림을 맡은 승려)에게 내놓은 돈은 논 여섯 마지기 값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이 순진무구한 혜월을 속인 것이다. 절 대중들은 그 논 열 마지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한 일을 생각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며 혜월을 탓했다.

그러자 혜월은 대중공사(전체회의)에서 “논 열 마지기는 저기 그대로 있고, 여기에 여섯 마지기 값까지 생겼으니, 더 번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경허 선사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을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혜월과 제자들이 개간했던 땅엔 이제 모조리 아파트가 지어졌거나 지어지고 있다. 선암사는 80억여 원의 보상금이 적다며 위헌 소송까지 제기하며 140여 억 원을 받아냈다.

 

개간땅 재산권다툼 ‘무소유’ 퇴색

그러나 종단 재산을 팔면 20%를 종단에 내야하는 규정보다 적은 돈만을 내놓아 주지는 멸빈(승적 박탈)되고, 그 주지는 종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놓고 있다. 재산권을 둘러싸고 분쟁 중인 조계종의 대표적인 사찰이 된 것이다.

선암사를 뒤로하니 다만 개간하되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천지가 내 집인 듯 자유로웠던 천진도인 혜월의 할(외침)과 방(주장자)이 탐욕에 물든 세속인의 가슴을 친다. 땅은 누구의 것인가. 무엇이 진정한 소유인가.

 

덕숭산 만공선사

 
만공 선사가 깨달음을 펼치며 사자후를 토했던 덕숭산 금선대에서 바라본 산하대지.

새벽종소리 타고 ‘無’ 의 화답이

신통술을 부려도 의심덩어리를 도려내도
“그건 깨침이 아니다”
스승 경허
새끼사자 벼랑 밀치듯 ‘죽비’
장맛비 걷힌 어느날...

 

 

아름다운 숲길이다. 적송이 신장처럼 서 있는 길의 풍경은 가히 비길 데가 없을 정도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봉곡사 들어가는 길이다. 100년 전 이곳을 걸어 들어갔던 젊은 승려 만공(1870~1946)도 이처럼 빼어났다.

 

근대 한국불교 선풍 탯자리

사자 새끼를 기를 때는 강아지를 키울 때와 달라야 한다고 했던가. 스승 경허는 13살에 서산 천장암에 온 만공을 10년이나 부엌데기로 부려먹기만 할 뿐 화두 하나 주지 않았다. 이 무렵 만공은 이른바 ‘타심통’이 열려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알게 돼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경허는 “그것은 술법이지, 도가 아니다”며 신통을 금했다. 수월과 혜월같은 사형처럼 도를 깨친 것도 아니요, 신통조차 못 부리게 하니 혈기왕성한 만공의 가슴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던 어느 날이었다. 천장암에 들른 한 어린 승려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처음 듣는 화두에 만공은 앞이 캄캄해졌다. 이 물음에 꽉 막힌 만공이 천장암을 무작정 빠져나와 찾은 곳이 ‘봉황의 머리’ 형상 아래 지어진 봉곡사였다. 이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한 지 2년이 지난 1895년 7월25일. 면벽 좌선 중 무념 상태에서 벽이 사라지고 허공법계가 드러나는 체험에 이르렀다. 이어 새벽녘에 종성 게송(종을 치면서 읊는 경전) 가운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라는 귀절을 외던 중 홀연히 의심 덩어리가 해소됐다.

산책 중인 봉곡사의 비구니 주지 묘각 스님 앞쪽의 야트막한 동산에 ‘세계일화’(世界一花: 우주는 한 송이 꽃)라는 탑이 세워져 있다. 만공 스님이 늘 하던 법어다. 1969년 이 절에 온 묘각 스님이 86년 만공 스님을 기려 세운 탑이다. ‘세계일화’는 만공의 손상좌로 최근 열반한 숭산(만공의 법제자인 고봉 선사의 제자) 선사가 서구에 선을 전하면서 가장 즐겨 쓰던 말이기도 하다.

 

친구 김좌진과 팔씨름 승부 못내

그러나 만공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3년 동안 보임했으나 경허는 새끼사자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리듯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며 다시 경책한다. 스승이 준 ‘무’(無)자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1901년 경남 양산 영축산의 흰구름 떠도는 외딴 암자 백운암에 이르렀다. 장마를 만나 보름 동안 꼼짝 못한 채 참선만 하던 어느날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상대 세계가 무너지고 마침내 우주의 본심이 드러났다. 31살 때였다.

 

그 뒤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에 금선대를 지어 수덕사, 견성암 등을 일으키니 이로써 덕숭문중이 태동했고,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이 여기서 일어났다.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출가한 12살 때부터 만공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그를 시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 만공은 인근 홍성이 고향인 청년 김좌진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했다. 김좌진은 젊은 시절부터 천하장사였다. 만공 또한 원담 스님이 “조선 팔도에서 힘으로도 우리 스님을 당할 자가 없었지”라고 할 정도였다.

“둘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몰라. 어린 아이들처럼 ‘야, 자’하곤 했어. 앞에 놓인 교자상을 김 장군이 앉은 채로 뛰어넘으면 스님도 그렇게 했지. 언젠가는 둘이 팔씨름을 붙었는데, 끝내 승부가 나지 않더라고.”

 

김좌진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만공 또한 출가한 몸이었지만 서산 앞바다 간월도에 간월암을 복원해 애제자 벽초와 원담으로 하여금 해방 직전 1천일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이에 앞서 일제의 힘 앞에 굴종을 강요받던 1937년 3월11일 만공은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마곡사 주지로 참석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사 가풍의 기개를 보여준 바 있었다. 총독 미나미가 사찰령을 제정해 승려의 취처(아내를 둠)를 허용하는 등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전 총독 데라우치를 칭송했다. 이때 만공은 탁자를 내려치고 벌떡 일어나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전 총독은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요. 그를 구하고 조선 불교를 진흥하는 길은 총독부가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고 조선승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상원사 한암 선사

 

한암 선사가 한국전쟁 때 군군의 방화에 맞서 지켜냈던 상원사 문수전 뒤로 눈쌓인 오대산이 펼쳐져 있다.

아궁이불 때다 8만4천 번뇌 ‘전소’

세속과 탈속의 경계일까. 맨몸을 드러낸 산천이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접어들자 설경으로 바뀐다. 온통 하얗다. 하늘은 안과 밖이 없지만 오대산 안팎의 산천은 경계가 엄연하다.

오대산 본찰인 월정사에서 차로 30분가량을 오르니 상원사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한암 선사(1876~1951)가 1926년 당시 깊은 산골이던 이곳에 들어가 열반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서울 강남 봉은사 조실이던 한암은 일본 불교와 통합을 꾀하던 친일 승려가 도움을 요구하자 “차라리 천년 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백년 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그 뒤 열반 때까지 26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은 대도인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 때 경북 금릉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친견한다. 경허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금강경〉 한 구절로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친일 승려 도움 구하자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
오대산 깊숙한 곳으로
전쟁 총알 날아들어도
꼿꼿한 좌선
26년간 산문밖 안 나가
보름간 곡기끊고 좌탈열반

 

한암은 근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승려다운 승려로 첫손에 꼽힌다.

그만큼 일상사에서 그의 삶은 털끝만큼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런 삶의 자세는 스승 경허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암도 4개월이나 그의 뒤를 좇아 이 절 저 절을 다닌 끝에야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가 아니던가.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성행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했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이 되랴!”

그러나 한암은 오히려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 있는데, 뜬구름 같은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어라’라는 시로 화답한 채 스승을 좇지 않았다. 경허와 한암은 그 뒤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암은 경허의 천거로 불과 29살의 나이에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됐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을 자각하던 그는 평양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정진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8만4천 번뇌 망상을 찰나에 연소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6살. 그러나 이 깨달음조차 인증해줄 스승 경허가 이미 없음을 슬퍼하고 탄식했다.

▲ 앉은 채로 열반한 모습.

 

한암은 훗날 사형 만공이 주도한 〈선사 경허 화상 행장〉을 쓰면서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다”고 한탄하면서도 “당신의 본분사는 허물이 없으나 뒷사람이 (행동을) 배울까 두렵다”고 염려했다.

 

한암의 행장과 일화를 정리 중인 월정사 주지 정렴 스님은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 판단해 (경허의) 겉모습만을 따름으로써 한국 불교에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암은 법랍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세랍으로도 여섯 살 연상이던 사형 만공 선사가 1946년 입적했을 때 문상하지 않았다. 너와 나, 아름답고 추악함의 경계를 넘은 그들의 견처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후학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기생집에 드나드는 행실을 미화하고 본받는 것을 차단해 청정 승가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결단이었다.

한암은 온종일 좌선하면서도 다리를 펴는 법조차 없었다. 그는 어떤 경계에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오대산 상공에서 수없이 총탄이 날아들어 대중들이 혼비백산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도 어느 날 두 승려가 술의 절집 은어인 ‘반야탕’을 마시고 돌아오자 직접 회초리를 들어 무섭게 내리쳤다.

당시 월정사 주지인 지암 이종욱은 조계종 행정수반인 종무원장이었다. 그가 출타했다가 돌아오면 오대산의 승려들이 산문 밖까지 나가 고을 원님처럼 가마에 태워 모셔오곤 했다. 어느 날 노승 한암이 주지를 마중하는 대중들과 함께 산문 밖으로 나왔다. 주지가 황송해 “큰스님께서 어인 일이냐”고 묻자 “이 늙은이도 대중의 일원이니 함께 마중 나온 것”이라고 답했다. 주지가 그 뒤 다시 가마에 오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꾸중하지 않고도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게 한 것이다.

한암은 15일 동안 곡기를 끊으며 좌선하다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열반을 미화하기 위해 일부러 좌탈열반을 조작하는 일까지 생기는 세태 속에서도 그의 삶을 지켜본 선승들은 그의 좌탈열반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흐트러지는 삶의 자세를 곧추세우는 한암의 서릿발이 매섭지 않은가. 적멸보궁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이 서릿발처럼 살을 에며 미망을 베고 지난다.

 

‘조선불교 간섭 말라’ 일제에 호통

이날 밤 만공이 안국동 선학원에 가자 만해 한용운은 기뻐서 맨발로 뛰쳐나오며 “사자후에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하였겠소. 할도 좋지만 한 방을 먹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소”했다. 이에 만공은 “사자는 포효만으로도 백수를 능히 제압하는 법”이라며 껄껄 웃었다.

만공이 머물던 덕숭산 금선대에 올랐다. 방안엔 스승 경허와 사형 수월, 혜월과 나란히 만공의 진영이 놓여 있다. 산마루에서 시린 바람이 산하대지에 휘몰아친다. 기개를 일깨우려 토하는 만공의 사자후가 아닌가.

 

백양사 만암선사

운문선원에서 지선스님이 만암선사의 철저한 정신과 삶의 자취가 스며 있는 백양사를 가리키고 있다.

 

‘주는불교’ 설파 빈민구제 혼신

흉년들면 공사벌여 품삯
“눈이 오니 풍년 들겠구나”
대중들과 기뻐하다 입적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백양호수 맑은 물 옆길을 거슬러 발자국이 나있다. 서산대사의 부도탑지 옆에서 눈 길을 걸으니 어찌 대사의 시가 더욱 간절하지 않을까.

부도탑 인근 절 입구엔 쌍계루가 있다. 백암산의 산봉우리 백학봉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냇물이 되어 만나는 곳이다. 이 물을 만암 선사(1876~1957)가 막아 보를 쌓았다.

백양사는 예부터 가장 가난한 절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만암은 주지가 되자 죽을 쑤어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하촌의 집들에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 때 신세를 진 마을 사람들이 가을 추수 때 흉년인데도 곡식을 지고 되갚으려하자 다음해부터 보막이 공사를 벌여 노임을 줘서 구제사업을 펼쳤다. 일거리가 사라지면 멀쩡한 보를 다시 터서 또 공사를 벌여 노임을 주곤 했다.

 

‘이뭣꼬’ 씨름 7년만에 득도

전북 고창에서 빈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만암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살 때 어머니마저 잃자 곧 출가했다. 어머니가 흰양을 안은 태몽을 꾸고 그를 얻었다니 흰양을 뜻하는 백양사 출가는 필연이었을까.

당대의 대강백 한영·환응 스님 등으로부터 배워 불과 25살 때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됐던 그는 교학에 그치지 않고 ‘이뭣꼬’(이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7년 동안 정진하다 마침내 운문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학명 스님을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만암을 만암이게 한 것은 그의 삶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300년간 닫혀 있던 산문을 중생을 위해 활짝 열어젖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노승들의 반대에도 산내 청류암에 광성의숙이란 교육기관을 만들어 훗날 조국과 불교계를 이끌 인재양성에 나섰다. 이런 열정으로 만암은 1928년부터 3년 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고, 1947년엔 광주 정광중고교를 설립했다.

그는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며 스님들에게 산에서 칡넝쿨과 싸리나무를 베어다 소쿠리를 만들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바구니를 만들게 했다. 또 곶감을 만들고 벌을 쳤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동안 신세진 불자들에게 보내졌다. 처음엔 “중들이 수행이나 하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불만의 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만암은 직접 낫을 들고 일에 앞장섰다.

 

“선과 농사는 둘이 아니다”

일이 많다고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새벽과 저녁 예불에 참여하지 않는 중은 밥도 주지 말라고 엄명했다. 만암의 말년에 3년 간 그를 시봉했던 서울 용화사 한주 학능 스님(67)은 “큰스님은 뒷방에 거처하지 않고 대중방인 향적전 옆에 조그만 방에서 거처하며 늘 대중생활을 했으며, 열반하기 며칠 전까지도 늘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조석예불에 참석하고, 방에 돌아와서는 밤새 좌선 정진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만암의 슬로건은 ‘선농일여’(禪農一如:선과 농사가 둘이 아님)였다.

그렇다고 그가 사찰 운영을 ‘독재적’으로 한 게 아니었다. 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대소사를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게 대중공사다. 그는 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중의 합의로 일을 해나갔다. ‘백양사에서 (대중)공사 자랑 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만암의 삶의 방식은 조계종 종정이던 당시 ‘취처승(아내가 있는 승려)을 절에서 몰아내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불붙은 ‘정화’ 때도 잘 드러났다. 그는 강경파들이 대처승들을 절에서 폭력적으로 몰아내려하자 종정직을 홀연히 벗고 백양사로 돌아갔다. 그는 대처승들도 절을 돕도록 하되 상좌(제자)는 두지 못하도록 해 자연스럽게 정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가장 철저히 계율을 지킨 청정 비구승이었지만 대처승들을 불가 안에서 활로를 찾아주고자 했다.

백양사 뒤 산길을 올라 호남제일선원이라는 운문선원에 이르니 선원장격인 유나 지선 스님이 정진 중이다. 그는 “만암 선사는 자신에겐 가혹했지만 중생에겐 한 없이 자비로웠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만암의 제자 서옹 선사의 제자로 만암의 손상좌인 지선 스님 또한 선승이면서도 실천불교승가회 이사장으로서 불교계에서 선구적인 실천가로 활동했다.

만암은 세납 80살이던 어느 날 대중들과 함께 죽로차를 마시다 “눈이 저렇게 오니 풍년이 들겠구나”고 기뻐하며 그대로 입적했다.

평생 흉년에 배곯이하고 배울 학교조차 갖지 못한 중생들과 동고동락해온 만암의 상여길도 이처럼 눈밭이었으리라.

백양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누가 또 길 없는 산하대지에서 뒷사람의 나침반이 될 자취를 남길 것인가.

 

대각사 용성 선사

용성 선사가 창건하고 열반에 든 대각사. 선구적인 도심 사찰이었다.

산사에 갇힐쏘냐…불상에 매일쏘냐

뒤늦은 한파에 싸인 22일 서울 종로구 봉익동 3 대각사. 출세간과 세속의 경계 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다.

대각(큰 깨달음)은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지 않는다. 1500여년 동안 이런 분단을 깨고, 산사에 갇힌 깨달음을 도심에서 꽃피우고자 한 곳이 바로 대각사다.

대각사를 창건한 용성(1864~1940) 선사는 세간에선 3·1운동 때 33인 민족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불교계에선 근대 선을 꽃피운 대선사로 손꼽힌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용성은 15살에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해 양주 보광사 도솔암, 선산 아도모례원, 청암 수도암, 지리산 칠불암, 송광사 삼일암 등에서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속세 절 지어 불교혁파 선구
사대근성 깨려 경전번역
우쭐대는 중국 고승에게
“해와 달이 누구의 것인가”
사자후 토하며 자존 세워
3·1운동때 33인 민족대표로

 

공부를 마친 44살의 그가 1907년 발길을 돌린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베이징 관음사 등에서 동안거를 보내며 법거량을 벌여 관음사 방장으로부터 대선지식으로 추앙을 받았다. 다음해 2월엔 통주 화엄사에 갔는데 한 선승이 그에게 “어디서 비구계를 받았느냐”며 “우리 중국의 계가 언제 조선에 들어갔는가?”라고 비꼬듯이 물었다. 유교적 관념으로 상하차별심을 내서 중화의 우월의식을 내보인 것이다. 그 때 마침 범종소리가 울렸다. 용성이 물었다.

“저 소리는 그대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이에 선승은 “그야 어찌 내 것, 그대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용성은 다시 물었다.

“하늘의 해와 달은 중국의 것인가, 조선의 것인가”

“어찌 해와 달이 중국 것이 있고, 조선 것이 있겠는가.”

이에 용성은 “그런데 어찌 불법도 그와 같음을 보지 못하는가. 불법이 어찌 어느 쪽에선 크고, 어느 쪽에선 작아지겠는가”고 일갈했다.

그리고 용성은 ‘태양이 부상(신성한 나무)국을 비추니/강남의 바다와 산이 붉네/같으냐 다르냐는 묻지 마시게/영묘한 빛은 예와 이제에 통하네’라고 시를 지어 불렀다.

조선 500년의 중국 사대주의와 불교의 피폐, 기울어가는 조국 등은 ‘멸시’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개를 잃지 않아 중국에서도 ‘해동의 선지식’으로 추앙받은 그였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의 가야에서 온 공주 허왕옥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했고, 여기서 탄생한 일곱 왕자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수행 정진해 모두 성불한 일화를 갖고 있다. 원효와 의천 등 수많은 이 땅의 고승들은 독특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도 이를 도외시한 채 중국 사대주의만이 팽배했던 시절에 용성은 홀로 우짖는 사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의 대표종단조차 중국 육조대사가 머물던 뒷산 조계산을 본따 조계종이라고 이름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용성의 뜻을 따르는 대각회 이사로 동국대 총장을 지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지관 스님은 “원효 대사는 중국의 송고승전에서 원효의 신묘한 이적 등을 소개할 만큼 고승으로 추앙됐고, 대각국사 의천도 중국 불교를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시찰을 갔음이 중국의 고승들로부터 받은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다”면서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사대 근성을 버리지 못했지만 용성 선사는 중국의 고승들을 능히 제압할 (내적인) 힘이 있었고 자존을 지키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 중국 사대주의를 벗어나 한국불교의 자존을 세우려 했던 용성 선사. 한 차례 혹한은 더욱 진한 매화 향기를 얻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용성은 이미 도인이었지만 또 한차례 혹한이 그를 새롭게 변모케 했다. 만해의 권유로 3·1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힘든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때 용성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한글로 번역돼 누구나 볼 수 있는 성경과 찬송가를 읽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출소 뒤 왜색화한 불교와 절연하기 위해 불상이 아닌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각교를 설립했고, ‘한자’속에 갇힌 불교의 혁파에 나섰다. 그러나 승려들은 “경전을 한글로 풀어 아무나 읽게 되면 스님을 존경치 않고 법사와 강사를 우습게 알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용성은 “본래 한문은 중국 문자이고 한글은 우리 문자인데 중국의 문자를 진서라고 하고 우리 글을 언문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은 돼먹지 아니한 사대주의의 발로”라며 불철주야 번역을 했다. 그리고 직접 찬불가를 작사하고 대각사에 풍금을 들여와 노래를 부르게 했다. 개화된 산중 노승의 혁신이 불상에 절하며 복을 비는 불교외엔 접근하기 어려웠던 깨달음을 일반 대중도 맛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돌봤다. 훗날 일제의 밀정에 의해 이 사실이 드러나 대각교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해방 5년 전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입적했지만 그를 따르는 용성문중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움직이는 최대 문파가 됐다.

그가 열반에 들었던 대각사에선 풍금소리에 맞춘 새싹들의 법향이 새어나온다. 추위가 매서울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고 그 기개는 더 곧은 매화 향기처럼.

 

 

 

심우장 만해선사

서울 성북동에 북향으로 지어진 심우장. 만해는 그 음지에서 조국 해방의 희망을 북돋웠다.

‘돌집’ 등진 북향집 그칠줄 모르고 탄 ‘님의 구국혼’

서울 성북동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달동네를 오른다. 좁디좁은 골목길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른 집이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가 54살에 지어 65살에 입적할 때까지 산 집이다.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만해에게 소는 무엇일까. 만해가 심우장에서 한 첫 작업은 〈유마경〉 번역이었다. 붓다 당시 유마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을 남긴 재가 거사다. 〈유마경〉에선 붓다의 수제자 사리자를 비롯한 10대 제자들이 유마거사에게 쩔쩔맨다. 유마는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의 몸이었지만, 이미 ‘자타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의 ‘대승(불교)’을 체화했기에 불도를 이룬 강물조차 한입에 들이마신 큰 바다였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참선 수행해 1917년 스승 만화 선사로부터 ‘한입으로 온 바다(萬海)를 다 마셨다’고 ‘만해’라는 법호를 받은 ‘선사’였던 그는 다시 중생들의 ‘고해바다’에 뛰어들었다.

 

일제 앞잡이 잘못 몰려
독립군에 두번 죽을 고비
훗날 사죄하자
“씩씩해서 맘 놨네” 격려

 

만해는 나라와 자유를 잃고 핍박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의 중생들의 아픔에 평생 열병을 앓았다.

만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인했으나 18살에 백담사로 출가했고, 잠시 홍성에 돌아왔다가 24살에 재입산한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만해는 젊은 시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세계지리책을 읽고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안 만해는 27살에 세계일주여행을 단행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곳에선 일제에 쫓겨 고향을 등진 대한의 청년들이 머리 깎은 사람만 보면 ‘왜놈 앞잡이인 일진회원일 것’이라며 뭇매를 때려 죽이거나 산 채로 바다에 수장했다. 만해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격투 끝에 사지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32살 때는 만주에 갔다가 다시 ‘왜놈의 첩자’로 몰려 독립군에게 총을 맞았다. 이때 맞은 여러 발의 총알이 목 부위에 박혀 있어 만해의 목은 평생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몰려 죽을 뻔한 두 시기 중간엔 일본의 은혜를 입었다. 1908년 도쿄에 조동종이 세운 대학에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공부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같은 개인적인 수난과 은혜에 의해 친일 또는 친미, 반공 등의 노선을 오갔다. 그러나 만해는 달랐다.

총을 쏜 독립군 청년이 훗날 만해를 찾아와 사죄하자 그는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씩씩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나는 이제 맘을 놓게 됐다”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는 늘 스스로 지옥의 문지기가 되기를 마다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대중 공양 도중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한일병합 소식듣고 울분
“밥이 먹어가느냐” 밥상 걷어차
민족대표 죽음 두려워하니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 똥물

▲ 3·1운동으로 3년을 감옥에서 지내고 출옥한 뒤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할 정도로 중생을 위해 지옥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만해 선사. 서울 평창동 정토사 조실 설산(87) 스님은 만해의 제자 의산 스님의 제자다. 손상좌로서 심우장과 건봉사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곤 했던 그는 혜화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일제에 징병되자 작별인사를 드리러 심우장에 갔다. 개인적인 친밀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만해는 떠나는 손상좌를 보자 두던 바둑판을 집어던지며 “이놈아 죽지 마라”고 세 번을 울부짖었다. 스승의 말이 가슴에 박힌 청년 설산은 서울역에서 달리는 기차 바퀴에 발을 넣어버렸다. 설산 스님이 이렇게 발가락을 잘라 징병을 피하고 다시 만해에게 가서 인사드리자 만해는 “조선 사람이 살아왔다”며 기뻐 외쳤다. 설산 스님은 “할아버지(만해)는 일제에 호적조차 올리지 않아 배급조차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처지에서도 만해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평의 국유림을 불하해주겠다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총독부와 연계된 한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모두가 희망을 잃은 때에도 “보라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 않느냐”며 청년들에게 ‘희망의 햇살’을 비춰주던 만해는 ‘해방의 봄’을 한 해 앞둔 44년 열반에 들어 비쩍 마른 몸마저 꽁꽁 얼어붙은 시대의 불쏘시개로 바쳤다.

3·1운동으로 3년을 감옥에서 지낸 뒤 출옥한 직후 찾아온 한 기자에게 만해는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했다. 불교에선 스스로 지옥에 들어간 이가 있다. 모든 중생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으로 지옥문을 나서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이다. 심우장의 앞산과 마을을 바라보니 봄이 성큼 다가온 양지다.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어 북풍 눈보라를 자처한 심우장에서 양지녘 중생을 보고 미소짓는 이가 과연 누구였을까.

 

금강산 신계사 효봉선사

지난해 11월 복원된 신계사 대웅전. 효봉 선사가 출가했고, 죽음을 건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반야 최고봉 ‘금강’ 에 살어리랏다

금강산의 자비로운 관음봉 아래 부처 이름을 딴 세존봉을 바라보는 터전에 목조 건물 한 채가 외로이 서 있다. 근대의 고승 효봉 선사(1888~1966)가 출가한 사찰이다. 효봉은 송광사를 일군 구산 선사와 법정 스님, 환속한 박완일 전 동국대 교수, 고은 시인 등의 스승이다.

신라 법흥왕 6년(519) 보운 스님이 창건한 신계사는 해방 전까지 거대한 사찰이었으나 6·25 때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됐다. 조계종 총무원이 북쪽과 협의해 지난해 11월 대웅전만을 복원했고 2007년까지 복원을 마칠 계획으로 공사 중이다.

1925년 이곳에 한 엿장수가 찾아왔다. 그는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선사에게 막무가내로 머리를 깎아달라고 청했다. 그는 평안도 양덕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로 일제의 판사가 된 이찬형이었다. 판사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며 1남2녀의 자식까지 둔 그였다. 식민지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한 몸의 행복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조선 동포란 동포들이 한마음으로 동참했지만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동참자가 아니라 동포의 심판자였다. 일제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단죄를 조선인인 그에게 맡겼다. 고등법원격인 평양복심법원에서 그는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동포를 죽이는 짓을 하고 말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같은 인간임에도 그는 자신만의 살 길을 좇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독립투사의 그런 의연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의 시작이었다.

 

조선인 첫 일제 판사로
3·1 만세 사형선고 ‘멍에’
양심의 고뇌끝 늦깎이 출가
내면의 불 태우고 또 태워
“중벼슬은 닭벼슬만 못한다”
직위·명예 허상 꿰?W어

그는 양심이 점화시킨 열기를 못 이겨 집을 뛰쳐나갔다. 판사직을 던지고, 어머니와 아내, 세 자녀까지 뒤로한 채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막 걸음마를 떼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아빠, 빨리 와요”라고 재롱부리던 막내딸의 모습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엿판을 등에 메고 3년간 하릴없이 길을 헤맸다. 37살에 출가한 효봉은 늦깎이 출가를 만회하기 위해 수행에 정진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서 타는 불 때문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해 다시 만행 길에 나섰다. 간도까지 ‘숨은 도인’ 수월 선사를 찾아갔고, 다시 남하해 경남 양산 통도사 내원암의 용성 선사에게 법을 구했다. 그러나 위대한 스승도 내면의 불을 꺼줄 수는 없었다. 효봉은 2년간의 만행을 뒤로하고 다시 신계사로 돌아왔다. 그는 선원에서 참선 중 쉬는 시간조차 거부한 채 용맹정진했다. 제자 고은 시인은 “큰스님은 엉덩이가 짓물러 방바닥에 눌러붙을 만큼 처절히 수행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절구통수좌’였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2년의 용맹정진에도 깨달음이 없자 결단을 내렸다. 깨닫기 전엔 절대로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며 신계사 건너편 기슭 법기암의 조그만 토담집에 들어갔다. 방엔 용변을 볼 수 있는 구멍 하나와 하루에 한번씩 밥을 넣어줄 창구멍 하나만을 내고 봉쇄해버렸다.

겨울 산의 강추위마저 범접하지 못한 삼매에 드는 처절한 수행을 한 지 1년 반. 그가 드디어 장발에 씻지 않은 귀신 같은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 순간 그가 찬 것은 생사의 문이고, 허상과 실상의 문이었다.

그 뒤 효봉은 송광사와 해인사의 방장으로, 또는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으로서 선지를 드날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한 것”이라며 직위와 명예의 허상을 직시했다.

또한 효봉의 면모가 드러난 것은 스승에 대한 태도에서였다. 석두 선사는 늘그막에 파계를 해 자식을 낳았다. 대처승들을 절에서 몰아내는 정화를 이끄는 조계종의 지도자인 그에게 은사의 파계는 당혹스런 일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스승을 바꾸는 승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효봉은 손가락질을 당한 스승을 통영 미래사에서 열반 때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출가 뒤 통영에서 3년2개월간 효봉을 직접 시봉하다 환속했던 박완일 교수는 말했다.

“큰스님이 판사 생활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해 한 말씀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일체를 꿈으로 생각하신 분이다. 그런 분에게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석가모니는 왕좌조차 버리지 않았는가.”

그는 큰 집을 위해 직위와 명예와 평판을 과감히 흘려보냈다. ‘금강’이란 불교에서 최고의 반야(지혜)다. 무엇이 금강 반야이던가. 금강산은 맑디맑은 신계천의 물도, 세존봉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조차 붙잡지 않은 채 담담히 서 있다.

 

극락암의 경봉선사

깨달음 좇아 줄행랑 되돌아온 자리에 아!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한 곳의 이름을 딴 경남 양산 영축산. 불보사찰 통도사에 드는 영축산문을 지나 천년 솔향을 품은 계곡을 거슬러 십리길을 오른다. 천상과 지옥을 모두 함께 잊게 하는 극락암이다. 경봉 선사(1892~1982)의 처소인 삼소굴 옆엔 그를 평생 시봉했던 극락선원 선원장 명정 스님의 처소인 원광제가 있다. 머리가 하얀 명정 스님이 문을 연다. “일 없어!” 전날 분명히 전화까지 했는데 모르쇠다. 겨우 들어가 극락암은 초행이라고 했더니 “‘극락’이 처음이냐?”고 되묻는다. ‘네 놈이 지옥이나 드나들었겠지 언제 극락에 와보았겠느냐’는 투다.

“행실이 깨끗한 그 자리가 극락인데 요즘은 행실이 엉망진창인 놈들도 극락으로 들어온단 말이야.”

보자마자 방망이질부터다. 비루한 육신을 내쫓고 진정한 주인을 부르는 선가의 접대법이다. 차의 대가답게 방엔 차향이 그윽하다. 다구의 배가 터질 듯이 차를 가득 채워 우려낸 그만의 제조법을 통해 나온 찻물은 아예 샛노랗다.

“이게 스님의 오줌맛이지 차맛입니까?”

찻상을 면전에 집어던질 듯하던 그가 슬며시 묻는다.

“니(네)가 차 맛을 알어?”

한 방 때리고 한바탕 웃음으로 영축산의 밤이 깊어간다. 육두문자와 음담패설이 태반인 그의 말에 베이거나 넘어지지 않으면 능히 그가 감춰둔 차까지 받아 마시고, 경봉 선사가 만해·용성·한암 선사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깨달음의 경지를 겨뤘던 국보급 유필들까지 열람할 수 있다.

 

어머니 여읜 열다섯 소년
삶과 죽음 의문품고 출가
참선 고해 십여년…
떠는 촛불속에 ‘주인공’ 이

설법중 아랫도리 벗고
“이 도리를 아느냐”
안팎 따로 없음 보여줘

 

명정 스님의 스승 경봉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고선 어머니를 목메게 그리다 삶과 죽음의 의문을 풀고자 15살에 출가했다. 출가 전 이미 한문에 조예가 깊었고, 출가 뒤 강원까지 마친 경봉은 스승 성해 스님의 신임을 받아 행정 업무를 맡아보게 됐다. 그러나 절 행정일을 보는 것을 마뜩치않아했던 경봉은 어느 날 경에서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는 구절을 읽었다. 남의 글이나 읽는 서생살이를 걷어치우고 스스로 맛을 보고 싶었다. 23살이던 1915년 통도사를 나온 그는 가야산 해인사 선방으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스승 몰래 도망쳐 나온 그를 반긴 것은 졸음과 망상뿐이었다. 그 때마다 허벅지에 피나 나도록 못으로 찍고 계곡에서 얼음을 가져와 입에 물었다. 그리고 기둥에 머리를 박아 이마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집중이 안될 때는 뒷산에 올라가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처절한 싸움이었다.

스승이 “빨리 돌아오라”고 사람을 보내자 그는 다시 줄행랑을 쳐 직지사로, 금강산 마하연으로, 안성 석왕사로 도망치며 참선에 몰두했다. 그는 어느 정도 화두에 몰입할 수 있게 되자 30살이 넘어서야 통도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도 정진을 쉬지 않던 그는 36살 되던 해 겨울 갑자기 벽이 무너지듯 시야가 툭 트이면서 오묘한 일원상만이 드러나는 경지를 체험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정진한 지 20여일 뒤 새벽 두시 반 문틈을 파고든 바람에 촛불이 ‘파 파 파 파’ 소리를 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순간 억겁의 의문이 찰나에 녹아버렸다.

 

▲ 경봉 선사가 여러 선방을 돌아다녔으나 정작 그가 깨달음을 얻은 곳은 떠난 그 자리였다. 평생 경봉을 시봉했던 명정 스님이 삼소굴 앞에 서 있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허허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우담발라와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

그는 깨달음을 노래하며 삼소굴 뒤에 올라가 달밤에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다음날 법회에 온갖 아낙들이 모인 대웅전의 법좌에 앉아 화엄경을 설했다.

“일이삼사오륙칠. 대방광불화엄경.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한 입에 그 도리가 다 있다.”

그의 법문은 이미 경계를 초탈했다.

“이 도리는 좆에도 있고, 씹에도 있다.”

경봉은 갑자기 옷을 벗고 남근을 쥔 채, “이 도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마을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함께 참가한 신자들의 충격과 고함으로 극락암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최근 니와노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한스 큉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의장은 경봉의 생전에 그를 만나 ‘신’에 대해 문답하던 중 나름대로 식견으로 “신은 내 안에 있다”고 답했다. 그 때 경봉은 “안팎이 따로 없다”고 말해 한스 큉에게 잊을 수 없는 체험을 안겨준 것으로 전해진다. 화엄경 법회에서 그가 벗은 것은 옷이 아니라 안과 밖의 경계, 고정관념과 분별의 외피였다. 그러나 경봉은 이 일로 정신병원에 갇힐 뻔했다.

명정 스님의 차에 취하고, 박대와 환대에 취한 채 텃마루에 나서니, 다시 삼소굴이다. 삼소굴(三笑窟)의 ‘삼’은 ‘우주의 극수’를 가리키며, ‘소’는 제 손에 염주를 두고도 온종일 찾아 헤매다 염주가 제 목에 걸려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고서 어처구니 없어하는 웃음이다. 주인공(깨달음 및 부처)을 찾아 수없이 줄행랑을 쳤던 경봉이 애초에 출발했던 그 자리에서 주인공을 찾았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연못의 무지개 다리 위에 서서 물 위에 누운 비루한 육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는데 영축산 솔바람이 경봉의 ’할‘(외침)인 듯 다시 주인공을 부른다.

“보는 그 놈이 누구냐?”

 

범어사 동산선사

금어선원 선승들이 도량 청소를 한 뒤 선방으로 향하고 있다.

‘마음의 병’ 고친 산사의 의사

‘이 문을 들어선 순간 가진 것을 모두 놓아라.’

태백산맥 최후의 혈처 부산 금정산 범어사 경내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 것은 날 선 글귀다. 선찰대본산의 칼날이다. 이야말로 일체 관념조차 ‘무소유’하라는 ‘선의 본가’다운 경책이다.

돌계단 위엔 요즘 매주 토요일 선사들을 초청하는 설선대법회가 열리는 보제루가 있다. 주위엔 대나무 숲이다. 동산 선사(1890~1965)가 깨달음을 얻어 억겁 동안 지고 다닌 천근의 무게를 단칼에 싹둑 베어내고 비상한 그 숲이다.

동산은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초석을 놓은 용성 선사의 제자다. 또한 선의 꽃을 피운 성철 선사의 스승이다.

동산이 스승 용성을 만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의학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22살 때였다. 그에게 용성이 물었다.

“상처와 종기가 든 육신의 병은 의사가 고친다하지만,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병은 어찌하겠는가?”

동산의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미치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의 병’은 어찌해야하는가. 이것은 벌써 동산의 화두가 되었다.

그는 의전을 졸업했지만 출세가 보장된 양의의 길을 포기하고 입산했다. 고향 충청도 단양에서 그를 기다리는 노부모와 아내, 아들에겐 충격적인 ‘가출’이었지만, 그에겐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 위한 ‘출가’였다.

그는 평안도 맹산 우두암과 도봉산 망월사와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전암, 태백산 각화사, 백운산 백운암, 황악산 직지사 등에서 용맹정진했다.

스승 용성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자 용성은 도봉산 망월사에 머물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만해의 제자로 그 역시 스승 옥바라지에 여념이 없던 춘성 선사는 훗날 동산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하고 오면 둘이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앉아 정진을 했다. 그런데 밤이 깊은데도 동산 스님은 통 눕지를 않았다. 그래서 ‘건강을 생각해 쉬어가며 하라’고 했더니, ‘우리 스님께서는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시는데 내 어찌 편히 지내며 잠이나 자겠소’라고 했다. 젊어서는 그의 정진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현대불교 초석 놓은 용성
의학전문 졸업 앞둔 청년에
“마음의 병은 어찌 하느냐?”
그 길로 출세 등지고 출가

흐트러짐 없는 정진
병든 불교계 대수술
제자 성철‘선의 꽃’피워

수행이 무르익어 범어사로 돌아온 뒤 37살에 바람에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의 병’을 놓아버린 동산은 이 때부터 중생의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동산의 품으로 수많은 이들이 찾아들었지만 당시 절은 양식이 늘 부족해 입 하나 느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구나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결혼을 해 가족이 있는 대처승들이 주지를 비롯한 주요 직책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조실인 동산이 이끄는 선원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양식만 올려보내주었다. 그런데도 동산은 사람을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 밑으로 출가한 상좌만 수백명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가운데 성철을 비롯하여 동국대 역경원장을 지낸 자운, 범어사 조실을 지낸 지효, 현 범어사 조실 지유, 불광사 창건주 광덕, 쌍계사 조실 고산, 동산반야회 회주 무진장 능가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그에게 출가했다.

그는 이토록 뛰어난 제자들과 수많은 불자들의 추앙을 받는 스승이었지만 새벽 2시면 일어나 온종일 수행자로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젊은 시절 범어사에서 동산을 6년간 시봉했던 고산 스님은 “큰스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예불을 빠지는 법이 없었다. 또 아침마다 손수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했다. 청소 뒤엔 금어선원에 들어가 참선 정진을 했다.”

동산은 청소를 위해 몸은 굽혔으나 마음은 당당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6일 범어사에서 전몰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령제가 예정된 오전 10시보다 1시간도 더 늦은 시간에야 범어사에 도착했다. 중절모를 쓴 채 대웅전에 들어선 이 대통령이 유엔사령관을 비롯한 외교사절들에게 법단 위의 불상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했다. 동산이 이 때 소리를 질렀다.

“이것 보시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감히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한 단 말이요. 그리고 법당 안에 들어오면 누구나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요.”

이에 이 대통령은 실수를 인정하며 용서를 청했다. 동산의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 대통령은 다음해 1월 범어사를 다시 찾았다. 이 때 대통령이 눈 쌓인 산사의 경치를 찬탄하자 동산은 “경치는 옛 모습 그대로지만 속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비로소 일제 36년 간 대처승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독신 수도승이 겨우 빌붙어 살아가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날 만남이 ‘대처승을 절에서 몰아내라’는 이 대통령의 특별유시로 이어졌다. 36년 간 병든 불교계 수술의 시작이었다. 동산은 조계종 종정을 두 번이나 지내며 불교 정화를 지휘했다.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출가한 의사 동산의 수술칼은 살인검인가, 활인검인가. 새벽녘 도량을 쓰는 눈 푸른 납자들과 서리를 인 푸르른 소나무가 말 없이 답하고 있을 뿐이다. 

 

보덕사 보월선사

만공선사의 의해 보월의 법제자가 된 안면도 송림사의 동산선사.

‘문자의 감옥’탈주 지혜에 닿다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국도에서 울창한 숲길을 10여분 오른다. 보덕사다. 샘가에선 단아한 비구니들과 행자가 과일과 야채를 씻고 있다. 봄볕 아래 빛나는 비구니의 빈 머리가 과일보다 오히려 싱그럽다.

보덕사는 보월 선사(1884~1924)가 너무나도 짧은 삶을 불태웠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바뀌었다.

보월은 만공 선사(1870~1946)의 수제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책도, 기록도, 사진 한 장도 남아 있는 게 없다.

20세기 초 한국의 선사 중 만공의 덕화를 입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만공은 선지를 드날리며 수많은 견성(깨달음) 도인을 길러냈다. 훗날 일세를 풍미하며 세상의 추앙을 받는 만공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보월은 단연 봉황이었다.

보월에 대해 알만한 이를 수소문 한 끝에 충남 태안 안면도 송림사 소나무 숲 움막에 숨어 지내는 동산 선사(92)를 찾았다. 동산 선사는 만공으로부터 전법게(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유일한 생존자다. 만공은 보월이 제자 금오 선사(1896~1968)에게 전법조차 못하고 입적하자 보월을 대신해 전법게를 내렸다. 그래도 보월의 법맥을 튼실하게 하고 싶던 만공은 동산에게도 전법게를 내리면서 ‘보월의 법을 이었다’고 했다.

보월은 동산이 행자 때 이미 열반해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으나 큰스승 만공이 맺어준 법은사였으니 동산이 보월의 삶의 여적에 귀가 기울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월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선 더욱 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충남 서산 운산면에서 태어나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가 왜 집을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처음엔 이 마을 저 마을을 유리걸식하는 탁발승이었다. 밥을 더 쉽게 빌어먹기 위해 머리를 깎고 동냥질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시절이었다.

 

▲ 보월선사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선승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보덕사.

 

유리걸식 동냥질하다 만공 찾아 선승의 길 깨달음 ‘게송’지어 보이자
“그것말고!”몽둥이 찜질 스승도 한때 글에 갇히니 보월이 꾸짖어 참선케
마흔 열반들자 만공 통곡

동냥중들과 떼로 몰려 다니던 그가 어느 날 홍성 월산암에서 하루 밤 잠을 자게 됐다. 그 때 월산암을 지키던 만공의 속가 형인 대은 스님은 보월에게 “일단 중이 되었으면 견성을 해야 하고, 견성을 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만공 선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그 즉시 덕숭산 위 정혜사로 올라갔다. 힘이 장사였던 그는 디딜방아를 찧어 참선하는 수좌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겨우 말석에서 참선을 시작했다.

걸인 보월은 하루가 다르게 수좌(선승)로 변모해갔다. 어느 날 보월이 눈 앞이 툭 트인 듯하자 게송(깨달음의 시)을 지어 만공에게 갔다. 게송을 적은 종이쪽지를 한 손으로 받은 만공은 글을 읽지도 않은 채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아니, 게송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것 말고!”

보월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을 또 내놓으란 말인가. 보월은 만공에게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방에서 쫓아나고 말았다. 스승 만공이 때려 부순 것은 보월의 몸뚱이가 아니라 아직도 그가 갇혀 있던 글과 깨달음이란 관념의 감옥이었다. 글은 전했지만 ‘글 밖의 소식’을 들려달라는 스승의 요구에 응대조차 못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였다. 만공과 같은 경허의 제자로 부산 선암사에 있는 혜월 선사 아래서 참선하던 운암 스님이 만공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부처님이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만공은 “위음왕불 이전(천지가 열리기 전)에 이미 다 말했다”는 답을 쓰고 있었다. 이를 본 보월은 “도대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고 계시냐”고 준엄히 묻고선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제자로부터 방망이를 맞은 격이었다. 충격을 받은 만공은 산 위의 누각 금선대에 올라 7일 동안 꼼짝 않고 용맹 정진했다. 그리고 내려와 보월의 손을 잡으며 “자네가 내게 10년 양식을 주었구나”라고 기뻐했다.

글에 갇힌 자신을 깨뜨려주던 스승이 글로서 다시 남을 옥 속에 안주케 하려는 것을 본 제자가 스승을 구해준 것이다. 제자의 가르침에 다시 자신을 내던질만큼 호쾌한 ‘위인’이었던 만공은 보덕사 조실 자리를 불과 30대의 보월에게 물러주었다. 그 뒤 보덕사엔 더 많은 선승들이 몰려들었다.

보월이 불과 40살의 나이로 열반하자 만공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대중 설법 도중 피를 토하는 듯 울며 애통해 했다. 보월은 만공에게, ‘지혜 제일’이었지만 붓다보다 더 일찍 열반한 사리불이었고, 공자보다 더욱 더 빛을 발했지만 너무도 일찍 꺼져버린 안회였다.

보월의 마지막 제자 동산은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욱 더 참선을 잘 할 수 있다”며 움막 밖까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불성을 깨운다. 출가자와 재가자, 걸인과 부처, 스승과 제자가 둘인가, 하나인가. 안면도와 서해안을 따른 상경길이 산과 들, 호수와 바다를 가른다. 그러나 황혼녘 낙조가 물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견성암 법회선사

법희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뒤 만공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비구니 선원총림으로 세운 덕숭산 견성암.

‘성의 굴레’ 깨고 성불 빗장 열다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호젓한 솔밭길을 5리쯤 오르니 견성암이다. 멀리 보면 돌담 너머로 옹색한 듯하지만, 정작 ‘견성’(성품을 봄·깨달음)의 자리는 툭트여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구니 수좌(선승)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오고가는 니승(여승)들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는 듯하다.

다시 수덕사에서 20여리 떨어진 가야산 보덕사 선방 옆 연못 위엔 단아한 부도탑이 서 있다.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날으는 백설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느 누가 당대의 문장가 탄허 선사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한 니승이었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역사 이래 정치와 종교의 지배자였던 남성의 편견과 업보론, 여성의 자기 비하 등이 만들어낸 이런 ‘정신적 감옥’은 여성 출가자가 넘어야할 첫 관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500년 동안 ‘남존여비’의 인습에 묶여 있던 뒤끝의 여성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었을까.

90여년 전. 그럼에도 덕숭산에 25살의 한 니승이 찾아왔다. 훗날 덕숭산의 비구니총림이 된 견성암의 초대 총림 원장 법희 선사(1887~1975)였다.

충남 공주 탄천면에서 태어난 법희는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맡겨졌다. 경북 김천 청암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던 그가 ‘덕숭산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허의 법제자 만공 선사를 찾아왔다. 홀로 3일을 쉬지 않고 걸어 녹초가 된 그가 덕숭산 정상 정혜사로 들어서자, 만공이 “이런 수좌가 올 줄 알았다”고 기뻐하며 입실(참선 제자로 받아들임)을 허락했다.

비구니가 비구들처럼 참선 정진하며 수좌가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던 시절이었으나 만공은 이 나라 여승들의 참선 길을 과감히 열어젖혔다.

화두선을 하려면 세 요소가 필수적이다. 신심(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 분심(그런데도 자신의 불성을 보지 못하는 분함), 의심(이토록 명백한데도 왜 나는 알지 못하는가 하는 의심)이다. 선사들은 이 마음이 없으면 수억 겁을 앉아있더라도 소용없는 짓일 뿐이라고 한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남존여비’ 인습딛고
만공과 당당히 ‘법’ 겨뤄
비구니 선맥 주춧돌

만공은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천재였다. 당시 덕숭산엔 가는귀가 먹어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한 니승이 있었다. 만공은 그 니승을 몰래 산 속으로 불러내 자신의 계략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다음 날 수많은 대중들이 수덕사 대웅전에 모인 법문 때였다. 법좌에 오른 만공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숨을 죽인 대중들 앞에 주장자를 높이 들었다. 그 때 그 니승이 대중의 뒤에서 일어나 벼락 치듯 “할”하고 외치더니, 법당 안을 조용히 세 바퀴 돌고선 물러나 앉았다. 만공이 “네가 드디어 알았구나”라고 (깨달음을)인가하니, 대중들은 ‘어떻게 저런 바보가 깨달을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의아해했다. 만공이 한참 설법을 하다가 이번엔 조용히 단주를 들어올렸다.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그 니승이 나와 만공에게 3배를 하고 물러앉았다. 만공은 “그것 봐라, 틀림 없지 않느냐”며 인가를 재확인해주었다. 저런 바보도 깨닫는데, 자신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다른 비구, 니승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덕숭산은 분심과 의심으로 넘쳐 흘렀고, 누구도 잠을 자려하지 않고 용맹 정진했다.

 

니승들은 결코 얻기 어려운 참선 기회를 놓칠세라 잠을 잘 수 없었고, 비구들은 그런 니승들에게 뒤지면 어쩌랴 싶어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심으로 정진하던 법희가 30살 되던 해. 드디어 마음이 홀연히 열려 만공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근대 비구니 선맥의 주춧돌이 놓여졌다.

북한산 승가사를 오늘의 거대 사찰로 키운 상륜 스님(76)은 출가한 날부터 스승 법희를 한 방에서 모셨다. 승가사에 이어 불사 중인 용인 원삼면 법륜사로 찾아갔다. 밤 12시면 일어나 활동을 시작해 새벽에 하루 일을 다해버려 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그의 부지런함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스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스님(법희)이 잠을 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낮엔 늘 울력하고 도량의 풀을 뽑았는데 얼마나 일을 했던지 손가락이 크게 휘어져 있었지요. 달 밤에도 남몰래 텃밭에서 호미질을 했고, 자는가 싶어 보면 늘 앉아 참선하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대중들이 법(진리·깨달음)을 물어도 법희는 아는 체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비구니 선맥이 자리 잡기도 전에 꺾일 것을 두려워한 만공의 뜻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다. 만공의 뒤를 이어 덕숭산을 이끌던 벽초 선사는 상륜 스님에게 입버릇처럼 “너희 스님의 진가는 200년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법희의 영정 사진을 뒤로 하고 법륜사 마당에 나서니 대웅전엔 대규모 돌부처가 모셔지고 있다. 단박에 ‘성’과 ‘편견’의 굴레를 벗어버린 법희의 할을 한 줄기 봄바람이 전해준다. 이 돌부처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성전암의 고봉선사

더럽고 깨끗한이 둘어더냐

홀로 화두 몰입 4년째 가슴속에서 태양 솟아
“조작된 마음 갖지마라” 일체의 틀 벗고 ‘기행’

 

대구 팔공산 서쪽 용담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30분 가량 오르니 파계사 성전암이다. 암자의 가파른 벼랑 아래엔 3백년 된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다. 일체의 틀과 형식을 격파해버린 고봉선사(1890~1961)처럼 뭇나무들과 어깨동무를 하지 않고 홀로 하늘을 벗 삼고 있을 뿐이다.

대구 목골마을에서 태어난 고봉은 18살에 결혼했으나 1년 뒤 방랑길에 나섰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란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청년 유생 고봉은 출가를 위해 경남 양산 통도사에 가서도 양반 행세를 했다.

“그놈들 집 한 번 잘 지어놨구나. 여보게, 거 누가 내 머리 좀 깎아주지않겠는가?”

젊디 젊은 청년이 천하제일사찰이라는 대찰에 와 승려들에게 반말지거리를 하자 승려들은 별 미친놈 다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대장부였던 혜봉 선사에게 데려다주었다.

“너를 거드름피우게 하는 물건이 무엇인고?”

혜봉이 아만에 대한 철퇴이자 그의 윤회를 끊어낼 검을 던져준 것이다. 혜봉은 고봉의 기고만장한 아만심이 꺾어지길 기다린 것인지 행자생활을 한 지 몇 개월이 지나도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다. 스승을 따라 상주 남장사로 간 고봉은 어느 날 새벽에 법당에서 예불을 마친 뒤 스스로 머리카락을 깎아버렸다. 고봉의 출가길은 처음부터 독불장군 식이었다.

고봉은 출가 뒤 스승을 떠나 공부길에 나섰다. 전라도의 외딴섬과 석금산에서 바위처럼 용맹정진하던 그가 성전암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더욱 화두에 몰입하던 그는 화장실에 앉았다가도, 또는 걷다가도 삼매에 들어 온종일 꼼짝 않을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출가 4년째인 1915년 4월 봄날이었다. 아침에 꿩 한 쌍이 서로를 부르며 울어대는 소리가 귓전에 닿는 순간 가슴 속에서 붉은 태양이 솟으며 그를 둘러싼 철벽이 자취를 감췄다. 해방이었다.

고봉은 견성 뒤 당대의 선지식 만공선사를 찾아 덕숭산으로 갔다. 고봉은 옷을 홀라당 벗고 몸에 먹을 가득 묻히고선 백지 위에 엎드렸다. 백지엔 그의 남근이 도드라지게 찍혔다. 고봉이 조실 방에 가 종이를 내놓으니 만공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지금 법(진리)을 묻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하는 것이냐?”

만공이 고봉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모진 매질에도 고봉의 얼굴은 구름을 시비 않는 하늘이었다. 경계에 끄달리지않는 고봉의 견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던 만공은 드디어 (깨달음의) 인가 법어를 내렸다.

 

‘법은 꾸밈이 없는 것, 조작된 마음을 갖지마라.’

드디어 산문 안에서 일대사를 해결한 고봉은 불현듯 승복을 벗어버린 채 대구로 향했다. 국권을 상실한 이 나라와 동포를 두고 볼 수만 없다는 것이었다. 고봉은 1919년엔 3천여 명이 대구 남문 밖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을 주도해 마산교도소에서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고봉은 이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그 뒤 평생 몸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몸은 기울어가도 그의 기상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었다. 덕숭산에서 고봉의 말년에 함께 정진했던 서울 화계사의 진암 스님(80)은 “고봉스님은 일체 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괴각(괴짜)이었다”고 회고했다.

고봉은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돌아와 시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자 짓궂은 승려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은 둘이 아닌데 발은 씻어 무엇 하냐”고 물으라며 시자를 부추겼다. 시자가 이 질문을 하기 무섭게 고봉은 발가락을 시자의 입에 넣었다. 놀란 시자가 연이어 침을 뱉자 “더럽고 깨끗한 것이 둘이 아닌데 발가락이 입으로 들어간들 무슨 대수더냐”며 껄껄 웃었다. 그의 선지는 이렇게 민첩했다.

고봉은 거칠 것 없는 언행에 풍채가 좋고 얼굴이 잘 생겼다. 그를 한 번 보고 반한 대구의 명기 명월관 주인이 목욕재계한 뒤 속옷까지 갈아입고 그를 초대했다. 술이 취한 고봉은 여인의 거문고소리에 맞춰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추었다. 여인이 잠자리에 그를 모시려 할 즈음 고봉은 “이제 안락 삼매에 들 시간이다. 내가 부를 때까지 나를 깨우지 마라”며 ‘이뭣고’(이것은 무엇인가) 화두를 든 채 죽은 듯 좌정했다. 고봉이 이렇게 앉은 채 3일을 삼매 상태에서 보내자 그 여인은 옷매무새를 고치며 불자의 길로 들어섰다.

성전암엔 몇 시간을 기다려도 고양이 한 마리 외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고봉, 성철 등 대선지식이 선의 길을 연 곳이지만 오던 외길 외에 달리 통하는 길도 없다.

고봉은 열반 때 ‘다만 알지 못할 것인 줄 알면 그것이 곧 견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지난해 12월 열반한 그의 제자 숭산 선사는 이를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로 바꿔 세계에 선을 알렸다. 선과 교 양쪽에서 모를 게 없을만큼 박학했던 고봉이 결국 일심으로 도달한 곳이 어디였던가. ‘오직 모를 뿐’이다.

 

정혜사 금봉 선사

덕숭산 정혜사의 마당을 한 선승이 거닐고 있다.

골초 곰방대 좋다~좋다~ ‘법향’

만취해 스승 엉덩이 차자
만공도 매질 깨달음 교유
후배 시비엔 “네말이 옳다”
제자 안남겨 담배연기처럼

충남 예산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는 마음의 눈까지 트이게 할만큼 시야가 트여있다. 눈이 시릴만큼 이 푸른 하늘을 향해 후련하게 내뿜는 담배의 맛은 오죽했을까.

늘 담배를 입에 달고 산 담배도인이 금봉 선사였다. 정혜사 만공 선사의 문하엔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즐비했다. 많은 제자들 중 만공의 뒤를 이은 조실이 금봉이었다. 문경 대승사로 출가했던 금봉이 덕숭산에 온 것은 1922년께였다.

금봉은 오전 참선을 한 뒤엔 절 아래 주막집으로 내려가 술을 동이째 들이붙곤 했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왔는데, 선방 복판에 만공이 버티고 앉아있었다. 술에 취한 금봉이 “만공! 너 왜 거기에 앉았노? 내려 와!”라며 양손으로 귀를 찢어질만큼 잡아당겼다. 귀를 당기니 만공은 금봉의 손을 따라 네 발로 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방 정면 큰문인 어간문에서 만공의 엉덩이를 발로 차버렸다. 만공은 방에서 툇마루로, 툇마루에서 마당까지 떨어져 버렸다. 천하의 만공은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없이 거처인 금선대로 내려갔다.

다음날이었다. 만공이 금선대로 금봉을 불렀다.

“어제 일을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이(理)로 그랬느냐, 사(事)로 그랬느냐”

죽고 사는 갈림길이었다. 이치를 따지자면 누구에게 지지않을만한 위인이 금봉이었다. ‘이로 그랬다’고 이치로 대거리를 한다면, 김좌진 장군도 당할 수 없었다는 천하장사 만공에게 맞는 일만은 능히 피할 수 있었다.

“사로 그랬습니다.

 ▲ 금봉선사가 입적하기 전 해인
1958년 쓴 <보장록>에 끼워져 있던 그의 사진.

그러나 금봉은 술취해서 한 ‘짓’을 이실직고했다.

만공이 엉덩이에 단소로 내려친 단 한방에 금봉의 엉덩이가 30센티나 찢어졌다. 금봉은 그 뒤 화장실에 갔다하면 찢어진 상처가 다시 터져버려 무려 40일 동안 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실책과 상처가 반드시 나락으로만 떨어지고, 극락으로 회향하는 파격이 없다면 어찌 선의 묘미가 있겠는가. 이 일로 만공은 금봉을 알아보고, 금봉은 만공을 알아보았다. 피터지는 매질 속에서 깨달음을 주고 받는 염화미소의 싹이 움튼 것이다.

덕숭산의 조실은 만공-금봉-전강 선사로 이어진다. 금봉이 부안 내소사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때 불과 23살에 견성(본성품을 봄·깨달음)한 전강이 찾아와 시비를 걸어왔다. 금봉이 버릇 없다는 표정으로 담뱃대를 털자 새파란 전강은 “깨달음에 선참(선배) 후참(후배)이 어디 있느냐”며 “스님이 틀렸다면 스님도 제게 인가를 다시 받아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네 말이 옳다. 그래 일러 보아라.”

이겨보았댓자 털끝만큼도 자랑스러울 것 없는 대거리에 금봉이 기꺼이 응수한 것이다.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64)은 “전강 스님이 평소에 가장 존경했던 사형이 금봉 스님이었다”고 회고했다. 불과 33살에 통도사 조실을 하고, 천하의 선지식들조차 그에게 3배를 할만큼 대단했던 전강조차 금봉의 너른 품엔 고개를 숙인 것이다.

금봉은 평소 괴각(괴짜)과는 거리가 먼 무골호인이었다. 화계사 진암 스님(81)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던 금봉 스님은 사람이고 음식이고 뭐든 통 싫어하는 게 없었다.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무슨 음식을 보아도 ‘좋다, 좋다’ 할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1950년대 중반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던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엔 효봉·동산·금오·청담 선사 등 선지식들이 머물고 있었다. 한 때 금봉이 이곳에 머물자 담배 연기가 싫어 어느 누구도 그와 한 방을 쓰려하지 않았다. 훗날 종정을 지낸 효봉은 “너희들은 어찌 담배만 보고, 금봉의 도(道)는 보지못하느냐?”고 꾸짖고는 스스로 목침을 들고 금봉의 방으로 갔다. 효봉은 지독한 담배 연기 속에서 연신 쿨룩쿨룩 기침을 해가면서도 법향(깨달음의 향기)을 맡듯이 금봉의 곁에 머물렀다.

만공으로부터 역시 전법(깨달음 인가)을 받은 태안 안면도 송림사의 동산 선사(92)는 해인사 조실로 있던 금봉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1959년 가을 어느날 금봉은 시자를 떼어놓고 홀로 계곡으로 올라가 목욕을 한 뒤 바위에 앉아 그대로 몸을 벗었다고 한다.

그런 금봉임에도 근현대 선사의 수많은 전기와 논문, 기사에서 그는 늘 열외였다. 무려 1천600여쪽에 달하는 조계종의 선원총람에서도 일언반구가 없다. 어떤 문중에 속하거나 상좌(제자)를 두는데 무신경했던 이에 대한 불교계의 대접이 이렇다. 그래서 그의 생몰연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평생의 도반인 고봉(1890년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동국대 중앙도서관 이동은 사서와 이철교 출판부장은 한나절을 씨름한 끝에 고서실에서 금봉의 생전 법어집인 <보장록>과 그 책에 끼워진 흑백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금봉은 지금 명성과 함께 이 책과 사진마저 연기로 날려보내지 못한 것을 자탄하며 장죽을 털고 있을까.

 

덕숭산 벽초선사

세계 최대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의 한 방에 내걸려 있던 벽초 선사의 사진. ‘숨은 도인’에 대한 비구니 선승들의 존경과 흠모는 남달랐다.

이랴 이야~쟁기질이 법문이라

손수 사찰 짓고 종일 노동
일꾼 다름없는 ‘머슴 주지’
법거량 말장난에 목판 부수고
오직 보고 행함에서 선 찾아

홍성에서 예산으로 들과 들에서 봄이 자라고 있다. 석니(釋尼)뜰이다. 백제시대부터 이 들녘은 석가모니와 비구니를 뜻하는 이름으로 불렸으니 무슨 연고였을까. 훗날 한 선사가 이 들판을 가꾸고, 비구니들에게 성불의 길을 닦아주리라는 것을 들 예언한 것일까.

이 들을 개간해 일군 이가 덕숭총림 2대 방장 벽초 선사(1899~1986)였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벽초는 9살 때 탁발 나온 만공 선사에게 감화돼 수덕사로 출가했다. 그의 부친 연등 스님도 함께 출가해 그는 연등을 은사로 삼아 만공의 손상좌가 되지만, 실제로는 만공이 거두고 다듬은 직제자였다. 그는 만공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 명산 대찰을 찾아 무섭게 정진해 생사의 철벽을 타파했다.

 

법 물으면“자신을 알라” 경책

1930년에 수덕사로 돌아온 그는 1940년부터 무려 30년 간 주지를 지냈다. 빈한하기 그지없던 수덕사를 오늘날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5대 총림의 하나로 일군 이가 벽초였다. 그는 통념상의 주지가 아니었다. 불목하니(절 머슴)나 다름없이 몸소 일을 했다. 오늘날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 전월사 등 덕숭총림 안 사찰들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

특히 벽초는 세계 최대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설계도 없이 돌을 하나하나 올려 지어갔다. 일터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던 그는 다른 일꾼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다 목이 마르면 함께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일꾼들을 독려하며 일을 시작했다.

그는 힘이 장사였다. 20대 때는 맨손으로 늑대를 때려잡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졌다. 그는 목소리가 워낙 커서 산 아래 견성암에서 일하다 덕숭산 정상 부근 정혜사를 향해 ‘무슨 무슨 연장을 가져와라’고 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한 번은 물건을 훔쳐서 슬금슬금 도망치던 족제비가 그가 내지른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기도 했다고 한다.

1946년 스승 만공이 입적한 뒤 벽초는 덕숭산의 호랑이였다. 덕숭산에서 수행한 선승들이라면 견성암과 정혜사 사이의 보초를 잊지 못한다. 산 위 정혜사는 괴각(괴짜) 선승들이 많기로 유명했던 비구선원이다. 산 아래 견성암은 수많은 여성수행자들이 정진하는 비구니선원이다. 혹 비구와 비구니가 야밤에 산에서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삼경에 보초를 선 이가 바로 벽초였다. 만약 벽초에게 걸리면 뼈를 추리기 어려웠기에 젊은 비구·비구니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들판에서 일꾼들과 술을 한 잔 마신 그는 덕숭산에 들어서면서 “야! 이 놈들아. 공부해라. 공부해라!”라고 외쳤다. 그러면 덕숭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입을 열어 한 법문이라면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스승을 흉내 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스승의 법이 타성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낸 장본인이었다. 화두선을 체계화한 송나라 대혜선사는 당시 수행자들이 자신의 스승인 원오 극근 선사가 선사들의 법거량을 담아 펴낸 <벽암록>에만 도취해 말장난을 일삼자 그 목판을 모아 쪼개 불태워버렸다. 그 역시 말과 글을 버렸다. 수좌(참선수행자)들이 법(깨달음)을 물으면 오직 “이놈(자신)을 알라”고 경책할 뿐이었다.

그는 승려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도 반대했다. 먹물이 들면 겉으론 중이지만 마음은 속인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말과 글에서 법을 찾지 말고, 보고 듣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법을 찾야야한다며 행동으로만 법을 보여주었다. 선재동자가 수많은 마음 세계의 선지식을 순례하고 최후에 도달한 실천의 화신 보현보살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버리지 말라” 시궁창 국숫발 주워먹어

그는 석니뜰의 개울보를 막아 땅 120마지기를 개간해 덕숭산 대중들을 먹여 살렸다. 개울보는 비만 오면 터지곤 했는데, 그는 그 때마다 끼니도 잇기 어려웠던 아랫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노임을 주고 보를 막았다. 한 번은 그가 없는 사이에 제자 원담(현 덕숭총림 방장)이 굴착기를 불러 단단히 보를 쌓았다. 절에 돌아온 그는 칭찬은커녕 “원담이 내 일을 망쳤다”며 혀를 찼다. 인근 빈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주던 생계거리를 없애버린 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또한 시줏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가장 경책했다. 벽초의 손상좌(원담의 제자)인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공양주를 하면서 시궁창에 빠진 국숫발을 주워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엌 수챗구멍이 아랫마당으로 연결돼 있었는데, 노스님(벽초)이 구멍 속의 몇 가닥의 국수를 바가지에 주워 담고 있었어요. 얼른 받아들어 씻지도 못하고 ‘제가 먹겠습니다’고 먹을 수밖에 없었지요.”

누가 반농반선(半農半禪)이라 했던가. 87살로 열반할 때까지 무슨 일이건 그것에 전념했으니 전농전선(全農全禪)이 아닌가.

방장 원담 선사에게 평소 법문이라곤 하지 않았던 벽초의 법문을 청했다. 봄날 들판의 쟁기질하는 소를 향해 드디어 벽초의 법문이 나온다.

“이랴, 이랴. 쭈 쭈 쭈 쭈. 이랴, 이랴…”

 

상원사 보문선사

상원사에서 1박2일간 열린 수행학림에서 재가불자들이 밤을 세워 참선하고 있다.

90일 뜬눈 정진…본성을 꿰뚫다

6일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성산 오대산 상원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문수보살 상이 모셔진 문수전에서 행자복을 입은 40여 명의 재가불자들이 참선 중이다. 철야 용맹정진이다.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선사(1876~1959)의 탄신을 맞아 오대산문은 재가 불자들을 초청해 월정사와 상원사에서 1박2일 동안 수행학림을 열었다. 70여 년 전 상원사에선 한암의 지도 아래 전설 같은 용맹정진이 있었다. 한국 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종정 조실 한암은 독방에 머물지 않고 평생 대중방에서 살았다. 승려들이 함께 자는 대중방은 비좁기 그지 없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자야 할 정도였다. 절에선 드디어 조실채를 지었다. 그러나 한암은 조실채에 살기를 거부한 채 한사코 대중방에만 머물렀다. 한암은 아까운 새집을 비워둘 수는 없어 수좌(선승)들이 정진하도록 했다.

수좌들은 “조실 스님 모시려고 지은 집에 우리가 들어가는데, 평소와 똑 같이 정진해선 안 될 일”이라며, 가행(평소보다 더)정진으로 동안거(겨울철 90일 집중 수행)를 나 조실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했다. 1) 90일간 잠을 자지 않는다. 2) 만약 중도에 포기하면 다시는 오대산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3) 이 기간에 죽으면 시신을 눈 속에 넣어두고 장례는 90일이 지난 뒤에 치른다.

이런 살벌한 전제조건에도 지원자가 30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 30살이 넘어 갓 출가한 신참도 말석에 앉아 용맹정진 대열에 동참했다. 보문 현로(1906~1956)였다.

용맹정진에서 눈꺼풀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선종의 초조 달마조사는 수마를 이겨내기 위해 눈꺼풀을 싹둑 베어내 버렸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참인 보문은 새벽별처럼 형용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정진 보름째. 보문이 해우소(화장실)에 가던 중이었다.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 돌에 정강이를 찧어 “아야”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픈 그 놈’의 근본 당체가 홀연히 드러났다. 견성(見性·성품을 봄)인가, 현성(現性·성품이 나타남)인가. 그 때부터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설신을 신고 밤낮으로 오대산을 뛰어다니던 보문은 한암의 시험을 여지 없이 통과하고 본래 성품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 누더기 한벌 발우 하나
고아·걸인 돌보며 ‘지행합일’
한암·만공과 당대 ‘3대 명승’
세속에 흔적 안남겨 전설로

그는 상좌(제자)를 두지 않기로 했다. 그의 유일한 상좌인 희섭 스님은 한암이 받아들여 보문의 상좌로 만들었다. 희섭의 제자가 해인사 강주를 지낸 무관 스님(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과 중진 선승들의 중심 인물인 무여 스님(봉화 축서사 주지) 등이다. 보문은 열반 뒤 자신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말고, 비나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을 상좌로부터 다짐받았다.

현대 한국 불교계를 이끈 성철, 청담, 향곡, 혜암, 법전, 성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한국 불교를 살려보자고 모여 정진한 ‘봉암사 결사’에서 법거량과 투표를 거쳐 선방 죽비를 잡는 입승으로 뽑힌 이가 보문이었다. 보문이 생전에 한암, 만공과 함께 ‘3대 명승’으로 불리고, 훗날 종정을 지낸 설석우 선사는 “언행이 일치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했음에도 세속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설이 된 것은 그가 불과 50살에 열반해버린 탓도 있지만, 세속에 드러나기를 털 끝 만큼도 원치 않은 때문이었다.

보문 선사에 대한 무관 스님의 증언이다. 보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큰며느리와 동시에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천으로 배를 칭칭 동여맨 채 임신 사실을 감춘 어머니는 보리밭에서 보문을 낳은 채 그대로 버려두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큰며느리가 3일 만에 보문을 보리밭에서 찾아내 자기 친정집으로 보내 키우게 했다.

보문은 청년이 돼 집으로 돌아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가출했다. 부산 항 하역장에서 십장으로 일하던 보문은 한국인들의 노임을 착취해 자기 배만 불리던 업자에게 찾아가 단도를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고 도망쳤다. 그는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던 차 마지막으로 금강산 구경이나 하고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불법을 만나고, 스승 한암을 찾아 오대산에서 견성한 것이다. 그는 1년 반 뒤 오대산을 떠나 세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가는 곳마다 똥지게를 마다하지 않고 일했고, 평생 누더기 한 벌과 바리떼 하나로 살아갔으며, 한국전쟁 때는 고아들을 돌보고, 늘 탁발을 해 한 바리떼는 뒤따르는 걸인들에게 나눠주고 한 바리떼는 절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보문은 폐병이 들어 갈비뼈가 썩자 마취를 하지 않은 채 수술을 받았다. 칼로 맨살을 개복하고 갈비뼈 세 개를 도려냈다. 그는 세 번째 갈비뼈를 도려낼 때 ‘으음’하고 신음 소리를 한 차례 냈을 뿐이라고 한다.

‘아야’하는 아픔과 ‘으음’하는 신음은 어느 당체의 발설인가. ‘이뭐꼬’ 화두를 들고 밤을 지샌 수행 학림 참여자들 앞에 어둠이 사라졌다. 밝아지니 문수의 당체가 천지에 드러난다. 오대산이다.

 

용화선원 전강선사

스승 전강 선사를 생전과 다름 없이 용화선원의 조실로 모시고 있는 송담 선사가 스승의 진영 앞에서 ‘부처님 오신 날’ 법회에서 설법 중이다.

남의 등불 부러워말고 내 등불 켜라

인천시 남구 주안동 기린산 용화선원. 이곳은 공장지대다. 예전엔 주위가 염전이었다. 어찌 산 좋고 물 좋은 명당들을 두고 이 곳에 참선도량이 자리했을까. ‘마음 밖 경치’를 구할 것 없다.

1961년 용화선원을 창건한 이가 전강선사(1898~1975)다.

전강은 전남 곡성 입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어머니가 일곱 살 그와 젖먹이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떴다. 계모가 들어왔다. 계모로부터 방치된 여동생은 걸음마도 떼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겐 늘 밥보다 가까운 게 매였다. 전강이 어린 시절 살기 위해 익힌 것은 좀도둑질이었다. 허기를 면하러 콩과 쌀을 훔쳐 먹었다. 그리고 들켜서 죽도록 얻어 맞기 일쑤였다.

14살 때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자 계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까지 두고 개가해 버렸다. 이 때부터 어린 이복동생을 업고 밥을 빌어먹으려 이모와 고모집을 찾아 나선 전강은 늘 밥 한 술 얻어먹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런 박대가 너무 서러워 물에 빠져 죽으려고도 하고, 어머니 무덤에 가서 ‘데려가 달라’고 밤새 울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전강은 계모가 개가한 집을 찾아내 문 밖에서 이복동생을 눈물로 떼어 들여보내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 이 때부터 그는 주린 배를 채우려 사냥꾼 조수와 유기공방의 풀무꾼, 행상 등 온갖 일을 했다.

그러다 한 승려를 만나 절에 들어간 그는 제대로 도를 닦기 위해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 행자시절 그는 인물도 뛰어나고 글도 잘하던 두 살 위 봉룡사미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해인사에 휴양하러온 예쁜 신여성을 보고 상사병이 든 봉룡사미가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외로운 처지에서 육친처럼 의지했던 봉룡사미가 다비식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모습을 보던 전강은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하나 같이 이렇게 떠나가는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이 때 노승의 게송이 전강의 가슴을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도를 닦는 사람은 머리털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말아라/쑥대 속의 무덤은 소년의 무덤임을 알라.”

얼마 뒤 그는 꿈 속에서 지옥에 빠져 고통 받았다. 너무 놀라 신음하다 깨어난 그는 생사를 넘어서는 일이 너무도 다급해졌다. 소년이라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3살에 참선수행 해탈…10년뒤 보광서원 죌 추대
정진…또 정진…게으름엔 ‘불방망이’ 내리쳐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해야만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은사 스님에게 참선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은사 스님은 그에게 경전 공부부터 차근차근히 하라며 꾸중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강은 평생 책만 보다 언제 생사를 넘겠느냐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그는 ‘무’(無)자 화두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급증이 화근이었다. 병약한 몸으로 화두에 신경을 곤두세우자 머리에 열기가 오르고, 피가 입과 코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상기병이었다. 그러나 직지사에서, 예산 보덕사에서도 그의 화두 정진은 멈추지 않았다. 핏기 없는 몸으로 죽음을 인 채 구름처럼 떠돌던 그의 발길은 어느 새 고향 곡성을 향하고 있었다. 한 밤에 태안사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계곡 물소리를 듣는 순간 ‘생사의 구름’이 찰나에 씻겨 가버렸다. 온몸의 전율 속에서 전강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바지춤을 내린 전강은 법당 앞에서 시원스레 오줌을 누었다. 막 바지춤을 올리려는데 한 스님이 대노해 다가와 호통을 쳤다.

“천지에 부처의 진신(몸)이 아닌 곳이 없는데, 그럼 어디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냐!”

불과 23살에 견성한 사자가 드디어 포효를 시작했다. 백수들은 사자의 포효만 듣고도 뇌가 파열된다든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혜월, 용성, 한암, 만공, 보월 등 당대의 6대 선지식들이 모두 그의 견성을 인가했다.

1960년 전강을 찾아 출가한 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64)을 찾았다. 남한노동당 지도자 박헌영의 아들인 그를 전강은 법제자 송담 선사(76)의 상좌로 맺어주었다.

전강은 법을 거량함에 털끝 만한 틈을 보이지 않았다. 불과 33살의 나이에 천하제일사찰 통도사 보광서원의 조실로 추대됐던 전강은 법에선 은사도 제자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원경의 스승 송담은 전강이 광주의 한 시장에서 가게를 하며 키운 제자다. 온갖 뒷바라지를 해온 송담이 10년 간 묵언(일체 말하지 않음)정진을 끝내고도 끝내 (깨침의) 한소식을 전하지 못하자 전강은 자식보다 아끼던 그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다음날 송담은 사자의 포효를 시작했다.

용화선원에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운문 선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한 부처에 대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잡아 개에게 먹여 천하를 태평케 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의 등불을 우러러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등불을 켜라던 부처의 가르침대로 이렇게 진실한 연등을 밝힌 이가 또 있을까.

용화선원의 송담은 스승의 육신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조실 자리를 거부하고 스승 전강의 법신을 여전히 조실로 모신 채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송담에게 전강은 여전히 ‘스님’이다. 스님은 스승님의 줄임말. 최후의 의지처인 백척간두에서조차 밀어버리고, 분별 망상을 용서 없이 물어뜯어버리는 그 스승의 은혜를 어찌 글로 담을 것인가.

 

오대산 탄허선사

탄허선사가 브이자를 그린 손을 든채 강의를 하고 있다.

천하의 지식인이여 물어보라

강원도 오대산에 접어들면 물은 물대로 좋고, 산은 산대로 좋다. 월정사 주차장 계곡 위 금강교를 지나 오른쪽 산기슭으로 가면 만나는 호젓한 외딴집이 방산굴이다. 탄허 선사(1913~1983)가 머물던 자리다.

30일 월정사에선 ‘제1회 탄허대종사 선서함양 전국 휘호대회’가 열렸다. 탄허의 선필을 이으려는 5백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탄허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사서삼경을 중단 없이 모두 외울 만큼 천재였다. 그는 유학의 꽃인 주역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책을 살 돈이 없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홍규는 김구의 독립운동 자금책이었으나 집엔 돈 한 푼이 없었다. 탄허의 환속한 제자이자 속가 사위인 서우담씨(66·교림출판사 대표)가 장모(탄허의 출가 전 부인)로부터 들은 얘기다. 아내가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탄허는 글방에 박혀 집에 오지 않았다. 마침내 아내가 문틈으로 엿보는데, 탄허는 미쳐 있었다. 한손엔 주역을 들고 한손으로 연신 무릎을 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탄허는 그 때 주역을 500번 탐독했다고 한다.

일체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발심한 탄허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던 한암과 3년 간 서신을 주고받던 끝에 21살 때 오대산에 이른다. 아내와 1남1녀를 두고 온 탄허는 도의 요체를 깨닫고 귀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대산 문수보살은 다시 보기 어려울 법기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탄허는 입산 뒤 3년간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별보궁에서 기도하며 참선 정진했다. 근기가 남달랐던 탄허는 철저한 정진 끝에 유학과 도학에 이어 불법을 단박에 꿰뚫었다.

이후 참선에만 몰입하는 탄허에게 스승 한암은 중국 당나라 위앙종의 시조인 위산·앙산 선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승 위산이 앙산에게 경을 보게 했다. 그러자 앙산은 ‘수좌들에게 일체 경을 못 보게 하면서 왜 제게 경을 보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다른 수좌들은 자기 일도 못한다. 그런 처지에 어찌 남의 일까지 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 탄허선사가 머물던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

20대에 유학·도학·불법 깨쳐
함석헌·양주동 등에 장자 강의
9시 잠들어 한밤에 일어나 집필
6만 3천장 화엄경 원고 탈고

 

스승의 권유에 따라 탄허는 20대에 자신보다 14살 연상으로 훗날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선사와 탄옹 선사에게 화엄경을 설하기 시작했다. 해방 뒤 서울 남산 한국대학교에선 함석헌이, 상원사에선 양주동이 탄허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 자칭 국보로 거칠 것이 없던 양주동은 탄허보다 10년 연상으로 오대산에 와서 탄허에게 절을 받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 장자 강의가 끝난 뒤엔 오체투지로 탄허에게 절을 했다. 동국대로 돌아온 양주동은 강의 시간에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수도권에서 가장 불자들이 많이 모이는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 능인선원의 지광 스님과 한국 불교 교학을 이끄는 각성·통광·무비·혜거 스님이 모두 탄허로부터 배웠다.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방산굴에서 탄허를 모신 혜거 스님은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서 빈 틈이라곤 없었던 스승의 삶을 전했다. 탄허는 밤 9시면 잠을 잤고, 첫잠이 깨면 11시건 12시건 어김 없이 일어났다. 잠시 신선법으로 몸을 푼 뒤 원고를 썼다. 혜거 스님은 스승이 한 번도 ‘바쁘다’며 사람을 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스승은 늘 하루 할 일을 새벽에 모두 마쳤기에 아침 이후생활은 덤이었다. 1960년엔 비구-대처승간 분쟁이 극심했다. 월정사에서 다음날이면 대처승들에게 쫓겨나게 돼 있어 서울에서 청담·숭산 선사가 대거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 이들은 탄허의 방에 모여 다음날 절을 지킬 일을 숙의했다. 자신이 조실인 절이 다음날 풍비박산이 될지 모르는데도 탄허는 9시가 되자 그 자리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모두 쓰러져 잠든 시간 첫잠이 깨자 일어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한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6만3천장의 화엄경 합본 원고는 이렇게 10년 간 그의 손끝에서 기적처럼 탄생해 세계 불교계를 경악케 했다. ‘한 나라와도 바꾸지 않을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스승 탄허의 유지를 이어 혜거는 서울 강남 자곡동에 땅 4천 평을 마련해 10년 간 두문불출하고 공부만 할 이들을 모아 공부 결사에 나선다니 탄허가 일으킨 파문이 다시 어떻게 커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탄허는 다른 고승들처럼 법상에 앉지 않고 백묵을 들고 칠판 앞에 서서 “천하의 지식인이여 와서 물으라”고 했다. 그리고 “묻지 않으면, 모두 안 것으로 알고 내가 물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수강생의 머리가 쭈뼛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역과 정역을 근거로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에서 미국 패배, 그리고 자신의 열반날까지 정확히 예언했던 탄허는 앞으로 한반도가 지구의 중심 국가가 될 것임을 예견했다.

방산굴 앞으로 다시 금강교다. 무엇이 과거-현재-미래의 다리를 잇는 금강 같은 지혜던가. 선과 교가 다한 곳에 탄허(呑虛·허공을 삼킴)가 웃음 짓고 있다.

 

망월사 춘성선사

경기도 의정부 호원동의 큰길을 벗어나면 도봉산 망월사까지 찻길은 아예 없다. 온전히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산길이다. 한 낮의 해는 뜨겁다. 한 잔 감로수와 시원한 빗줄기가 어찌 그립지 않을까.

이 산을 호령했던 ‘도봉산 호랑이’ 춘성 선사(1891~1977)는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태어나 13살에 출가했다. 19살 때였다. 스승을 찾아 설악산 백담사에 가자 때마침 긴 가뭄 끝에 폭우가 내렸다. 그런데도 스승은 골방에서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춘성은 스승을 향해 “이 좋은 날에 방안에 쳐 박혀 무얼 하느냐”고 힐난하고 옷을 몽땅 벗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선지식은 물론 일본총독부조차 어쩌지 못했던 스승 만해에게 그랬을 정도로 춘성에겐 넘지 않아야 할 선이란 없었다. 서슬 퍼런 시절 강화도 보문사로 그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씨에게 “입 한 번 맞추자”고 했던 그였다.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
이불 없이 방석덮고 정진
거침없는 욕지거리·파계
육영수씨에게 “입 맞추자”

 

전북 완주 수봉산 요덕사 법당에 춘성의 영정을 모셔두고 정진하는 선승 대선 스님(65)도 그 욕지거리로 춘성과 연을 맺었다. 1960년 어느 날 밤 망월사로 찾아가자 춘성은 “개 좆 같은 놈”이라며 그를 맞았다. 대선 스님은 그날부터 망월사에서 꼬박 10년 간 춘성 아래서 수행했다. 대선 스님이 빗길 5백여 리를 달린 정성에 40년 간 묻어둔 얘기 보따리를 푼다.

망월사엔 이불이 없었다. 춘성은 “이불이란 ‘부처와 이별’(離佛)하게 하는 것”이라며 이불을 몽땅 불태우고 잘 때 방석으로 배만 덥고 잠깐 눈을 붙인 뒤 일어나 다시 정진하도록 했다. 춘성은 밤 9시부터 1시간 가량 누워있었을 뿐 그 외엔 눕는 법이 없었다. 춘성은 자기 방이 아예 없었다.

젊은 시절 서울 대각사에서 당대의 선지식이던 용성 선사의 문하에서 10년 간 정진하기도 했던 춘성은 50살이 되어 뒤늦게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 선사를 만나 크게 발심했다. 그는 수행에서도 한계가 없었다. 수마(잠)를 이기기 위해서 한 겨울에 물항아리 속에 들어갔다. 한겨울에 찬방에서 눕지도 먹지도 않은 채 14일간 정진하기도 했다. 이 때 몸이 굳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놓아준 금침을 맞고 기사회생했다고 한다.

이렇듯 처절한 정진으로 화두(말 머리) 이전 소식을 일거에 중득한 춘성에겐 잘 꾸민 말도, 승복조차도 한낱 겉치장에 불과했다. 춘성은 절에서도 승복을 입지 않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입은 옷과 갈아 입을 옷 하나뿐이었던 춘성에게 신자들이 당시로선 고가인 양복을 해주곤 했다. 그러면 춘성은 그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중절모를 쓴 채 서울 시내에 나가 지인에게 맥주 한 잔 얻어먹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을 붙어있지 않았다. 당시만도 헐벗은 걸인들이 즐비하던 때였다. 그는 그들에게 새양복을 벗어주고 팬티차림으로 공중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한 밤에 절로 돌아오곤 했다.

그 때 망월사를 찾은 선승들이 보는 것은 파계요, 듣는 것은 욕뿐이었다. 그들은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세끼 공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승속을 망론하고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예전에 비해 10배 이상 넓어진 망월사에는 지금 12명만이 하안거(여름집중수행)에 들어가 참선 정진중이지만, 앉을 곳조차 변변치 않았던 당시엔 40~50명의 선승들이 들끓었다. 춘성이 열반한지 30년이 다 됐으니 망월사엔 그와 인연 있는 스님이 없다. 하지만 그가 열반하자 몽땅 말라죽어버렸다는 망월사 주위 소나무는 다시 생기를 뿜고 있다. 솔바람에 더위를 식힌 것에 자족하고 하산하려는데, 뜻하지 않게도 ‘춘성의 인연’이 앞에 나타난다. 망월사에 일하러온 석공 정인훈(61)씨였다. 그는 60년대 초 16살부터 3년간 이곳에서 일하며 춘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 정인훈씨가 1960년대 법당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지만 춘성 선사의 포효로 기운이 성성했던 망월사


천중선원을 가리키고 있다. 춘성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춘성의 영향 탓인지 정씨에게도 욕은 욕이 아닌 모양이다.

그가 법당을 지을 때 쓸 참나무를 포대능선 위에서 베었다. 산림법 위반으로 춘성을 파출소로 끌고 간 경찰이 먼저 인적사항을 물었다. “주소가 어디요?” “어머니 보지요.” “뭐라고요! 본적이 어디요?” “아버지 좆물이요.”

어처구니 없어하던 경찰은 그를 내보냈다. 춘성의 욕법문에 견문이 툭 터진 한 노보살(절에선 여성불자를 보살로 일컬음)이 시집 갈 때가 됐는데도 소견머리가 좁아 터진 손녀딸을 일부러 춘성에게 보냈다. 처녀가 방에 들어와 앉자 춘성은 “네 작은 그것에 어찌 내 큰 것이 들어가겠느냐”고 했다. 이 말을 지레짐작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처녀는 방을 뛰쳐나와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러자 노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며 혀를 찼다고 한다.

무더위에 하산하는 일보다 더욱 답답한 것은 적당한 거짓과 위선이 당연한 듯 덮어써온 가면이다. 방문객을 위한 춘성의 자비인가. 포대능선 위에서 한 줄기 솔바람이 진검마냥 가슴을 시원스레 뚫는다. “야!, 개좆같은 놈아!”

 

속리산 금오선사

‘정진하다 죽어도 좋다’
용맹정진 풍토 불 당겨

충북 보은 속리산의 품이 넓은 때문일까. 법주사의 33미터 청동대불조차 위압적이지 않다.

법주사는 금오선사(1896~1968)가 열반한 곳이자 ‘금오문중’의 본산이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는 전생으로부터 인연때문인지 불과 16살에 도를 구하겠다며 금강산으로 떠났다. 걸어서 석달 열흘만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마하연. 제자되기를 청하는 금오에게 도암 선사는 “한 달 안에 땔나무 백단을 한다면 제자를 삼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다 온 소년 금오는 죽을 힘을 다해 나무를 했지만 한달이 다 돼도 예순아홉단밖에 나무를 하지 못했다. 그는 기왕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일흔단을 채워놓겠다며 한 밤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새벽녘에야 구조됐다. 몸을 추스린 뒤 하직인사를 온 금오에게 도암은 오히려 “어디를 가겠다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꾀많은 여우보다 미련한 곰이 되겠다는 어린 금오의 정성을 선사의 혜안이 어찌 놓칠 것인가.

‘미련한 곰’ 같은 수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스승으로부터 ‘이 뭣고’ 화두를 받아 산하를 떠돌며 수행정진하기 10여년. 철벽처럼 그를 가로막던 화두도 타협을 모르는 그의 미련함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개안을 체험한 금오는 충남 예산 보덕사로 향했다. 만공의 수제자 보월 선사가 불과 30대에 조실로서 천하의 납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보월은 단박에 그가 허상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보월은 불과 40살에 홀연히 몸을 벗어버렸다. 금오가 다시 유랑길에 오르자 만공이 그를 불렀다. 만공은 애제자 보월을 대신해 금오에게 전법게를 내려 그가 보월의 법제자(깨달음을 이은 제자)임을 인가했다.

 

▲ 사자가 등불을 들고 서 있는 국보5호 석사자상이 법주사 청동대불 앞에 서 있다. 금오선사는 불법의 사자(왕)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참선뿐이라고 경책했다.

‘이뭣고’ 화두 붙잡고
‘미련한 곰’ 처럼 수행
정신 흐트러진 제자엔
번개불 귀싸대기 일침

 

법주사에서 문장대를 향해 다시 10리길. 세속의 마음을 벗으라는 듯 세심정(洗心亭)이란 휴게소가 기다리고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먹는 열무국수 한 그릇이 별미다. 금오와 그 제자들은 국수를 좋아했다. 태백산 동암에서 정진할 때 금오와 그 제자들은 산 300평을 개간해 밀을 심어 직접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 때 금오를 시봉했던 월남 스님은 국수도인이었다. 월남은 60년대 금오가 말년에 문을 연 법주사 총지선원의 초대 선원장을 했는데, 스승의 불같은 성정을 닮았다. 월남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어 상대는 초주검이 될 지경이었는데, 그때 월남을 제지할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누군가가 월남에게 달려가 “스님, 지금 국수를 삶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으면, 월남은 바로 몇 초 전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선 “국수! 국수는 내가 삶아야지”라면서 국수를 삶으려 부엌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세심정을 지나 ‘이뭣고 다리’를 건너니 복천암이다. 30년 간 이곳에서 정진해 수좌(선승)계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월성 스님이 맞는다.

세속인들과 거의 만나지 않은 산사람이기에, 산골 처녀와 같은 수줍음이 흐른다. 그러나 그 수줍음이 어찌 금오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칼 같은 기개를 감출 수 있을까. 월성 스님은 50년 전인 1955년 출가해 지리산 화엄사와 거창 연수사 등에서 스승을 시봉했다.

스승 금오는 견성 뒤에도 탁마를 쉬지 않았다. 서울에서 걸인들 틈에서 사는 만행을 하는가하면 전주에선 밭가에 움막을 지어놓은 채 탁발을 하며 살았다. 또 경허의 맏제자인 수월선사를 만주까지 찾아가 1년 간 모시며 정진했다.

금오는 달마대사를 닮았다. 힘이 장사인데다 목소리가 우렁차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불렸다.

금오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7~8명의 대중이 모이자 ‘정진하다 죽어도 좋다’는 서약을 각자가 쓰게 한 뒤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용맹정진이란 일체 자지 않은 채 하는 수행이다. 금오는 조는 납자들을 물푸레나무로 후려쳤다. 납자들 모두 구렁이가 몸을 감은 듯 온몸에 멍이 들었다. 금오가 있는 곳은 늘 그처럼 처절한 수행이 뒤따랐다. 결제(겨울과 여름에 90일씩 하는 집중 수행)기간이든 아니든 어디나 선방이 되었다. 지금 주요 선방에서 7일 또는 21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는 풍토도 금오가 불을 지른 것이었다.

동진(여성과 관계하기 전) 출가해 세속의 정이나 계산속을 모르던 금오의 언행은 순진무구하기 그지 없었다. 오직 화두만을 일심으로 참구하라던 스승 앞에서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분별망상을 내세우면 번갯불처럼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원망스러워 밤봇짐을 싸 다른 절에서 결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며칠이 못 가 그 스승이 너무도 그리워져 결제가 끝나기 무섭게 스승에게 돌아가곤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월성 스님은 “이 공부는 자존심과 인사치레를 내세워선 십만팔천리 멀어진다”며 “이번 생은 안 낳은 셈 치고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는 보은이다. 제자들은 무엇으로 스승에 보은하는가. 속리(俗離·세속의 잡념을 벗어나고)산에서 ‘이뭣고 다리’를 다시 건너니, 법주(法住·깨달음의 진리에 거함)사가 있다.

 

나주 다보사 우화

천진한 도인…“모기도 잡지 마라”

전남 나주 금성산에 이르니 하늘 샘에 구멍이 난 듯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과 땅과 계곡이 비로 인하여 함께 춤춘다. 우화(雨華)도인(1903~1976)의 환영식인가.

우화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수박을 들고 경내에 들어섰다. “아따 무겁게 뭔 이런 것을 사오시요. 글씨.”

적막한 경내에서 주지 일륜 스님(63)이 맞는다. 우화도인을 평생 시봉했고, 스승의 열반 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수행하다 다시 스승의 자취를 쫓아 돌아온 그다. 마치 수줍음을 타는 여성 같은 표정이나 꾸밀 줄 모르는 진솔함은 스승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의 스승 우화는 한국의 선객들이 선사나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도인이라고 칭하기를 즐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다보사 선방에서 한철을 보낸 선객들은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같은 우화의 ‘천진’을 평생 잊지 못해 했고, 선원의 사랑방 격인 지대방에선 그의 일화가 늘 화제의 일미였다.

우화는 전남 담양의 성도(成道)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과 셋이서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늘 우화를 못난이라며 미워했다. 그래서 소학교를 글씨도 깨우치기도 전인 3학년에 그만두어야 했다.

우화는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4살에 집을 나왔다. 발길 닿은 곳이 경남 함양 영각사였다. 그는 밥을 얻어먹으며 행자 노릇을 시작했다. 우화는 고달픈 행자생활 중에도 틈만 나면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못나고, 부모 복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 달라”고. 어느 날 꿈에 한 노승으로부터 “참선을 하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그는 참선 길에 나섰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배짱마저 없는 그의 삶은 수행처에서도 고달프기만 했다. 토굴에서 수행하다 병이 든 채 누더기를 입고 통도사를 찾아갔지만 걸인 취급을 받고 쫓겨났다. 변변한 은사도, 내놓을 문중도 없는 그는 선방에서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 선사를 찾아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에서도 3번이나 방부(안거에 살겠다고 신청)를 거절당했다. 많은 식량을 탁발해 가서야 정혜사 선방에 들어간 우화는 한 번 온 공부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만공은 석 달간 한 철 안거를 마친 뒤 선방 납자들이 쓴 게송(깨달음의 시) 가운데 우화와 성철 선사의 것, 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화가 부산 내원사에 이르자 경허-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 선사가 그의 견처(깨달음)를 단박에 알아보고 법제자로 삼았다. 법(깨달음 또는 진리)을 전하고 받는 것 또한 꿈 속의 일이던가. 일륜 스님이 내보인 운봉의 친필 인가장엔 ’전법게’(법을 전함)가 아닌 ‘전몽게’(꿈을 전함)라고 쓰여 있었다.

 

소학교 3년 중퇴 뒤 14살 때 출가
평생 짚신신고 짚방석에서 좌선
새벽 2시 일어난 뒤 눕는 일 없어
고양이에게도 “화두 잘 챙기거라”

 

그 뒤 우화는 불교세가 미약해 ‘앉아서 굶어죽기 딱 좋은’ 나주에서 다보사를 30여년이나 지켰다. 아예 돈을 쓸 줄도 몰랐던 우화는 꼬깃꼬깃한 돈을 한장씩 두장씩 모았지만, 승려들이 “여비 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꾸어달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빌려간 것은 후생에서라도 부처님과 대중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철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우화는 절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죽비를 치고 참선을 시작했고, 공양시간이 되면 발우를 폈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았다. 우화는 잘 때도 반드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른쪽으로 누웠고, 요를 방석 크기의 4분의 1로 개어 위쪽만을 덮었다. 황소바람이 노승의 몸에 몰아치는 것이 안타까워 제자 일륜이 방에 들어가 요를 펴서 온몸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와 문틈으로 방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얼른 요를 다시 4분의1로 접어 위쪽만 덮었다. 안락함을 멀리함으로서 경책을 삼은 것이다. 그는 새벽 2시에 일어나면 온종일 다시 눕는 일이 없었다. 또 평생 천방석을 두고 짚방석을 깔고 좌선을 하고, 짚신만을 신었다. 여름이면 모기약을 뿌리지도, 모기를 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름철 그의 모시옷은 우화의 피를 포식해 배가 터져 죽은 모기들의 피로 시뻘겠다.

이처럼 미물에게도 그는 평등하게 대했다. 이곳에서 키우던 고양이에게도 늘 “화두를 잘 챙기라”고 일렀는데, 고양이는 이를 알아듣는 듯 좌선 중인 우화의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이 고양이도 발정기가 되면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한번은 비구니 스님이 절에 오자 그에게 “고양이를 붙잡고 있으라”고 한 뒤, 초를 아기 고추처럼 만들어 암고양이의 ‘그것’에 넣어 문질렀다. 비구니 스님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지만 우화는 오히려 “왜 그렇게 놀란다요?”하고 의아해 했다.

발정이 나 발광하기 직전인 고양이에겐 그런 자비를 베풀면서도 우화는 정작 ‘여성’을 몰랐다. 짓궂은 도반들이 “정말 여자 맛을 한 번도 못 봤소?”하면 “여자를 어떻게 맛본다요?”하고 물었다. 또 짓궂은 비구니 스님들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그의 손을 잡으면 “어찌 비구니가 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며 마치 성폭행당하기 직전의 여성처럼 놀라서 고함을 치곤 했다.

“때도 한참 넘었는디, 공양도 대접을 못하고 어쩔거나.”

공양주 보살 한 명 없이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안빈한 수행자 일륜 스님은 안타까워하지만 우화의 ‘천진’이 허기를 때워준다. 우화는 세속 음식은 일체 입에 대지 않아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일주문을 부여잡고 “아이고, 배 고파 나 죽겄다”고 했다. 우화의 천진 법어인가. 일주문을 돌아 나서니 드디어 배가 꿈 깬 소식을 들려준다. “꼬르륵, 꼬르륵”

 

망월사 인곡선사

시원한 도봉산 바위 능선을 병풍삼은 망월사 누각 옆에 오래된 새집이 있다.

늘 수행자의 자세 되세기던 ‘돌탑 수좌’

30살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대우받거나 내세우는 법 없어
제자들한테 “머리 만져보라”…주변에 약속한 날 속세 떠나

 

서울은 찜통 속이다. 화탕 지옥에 한 줄기 솔바람인가. 도봉산 쪽이다. 이보다 시원할 순 없다. 바위능선들을 병풍 삼은 망월사의 한 누각 옆에 오래 된 새집이 있다. 천중선원을 지켜보는 자리다. 새는 선원을 돌며, 명예도, 살심도 한바탕 벗어버린 납자(선승이 스스로 ‘납루한 자’로 낮춰 부르는 말)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1923년. 청년 납자가 망월사로 용성 선사를 찾아왔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젊은 납자는 대답 대신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

도인은 미물이 먼저 알아보고, 선지식은 상대가 입술을 떼기 전에 이미 눈빛과 걸음걸이만으로도 견처(깨달음)를 알아본다고 했다. 용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인곡(1895~1961)이 스승으로부터 견성을 인가받는 순간이었다.

전남 영광군 법성에서 태어난 인곡은 14살에 백양사로 출가했다. 그는 불연이 깊었다. 어머니의 동생, 즉 외삼촌이 백양사의 중흥조인 만암선사였다. 그는 선과 교에 모두 출중했던 만암의 회상에서 강원을 마친 뒤 참선 길에 나섰다. 팔공산 동화사에서, 예산 보덕사의 보월 선사 회상에서 정진한 데 이어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월, 혜월, 한암 선사와 법거량을 벌였다. 인곡은 한 번 자리에 앉으면 돌탑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정진했기에, ‘돌탑 수좌’로 불렸다.

용성의 깨달음을 잇는 법제자가 된 인곡은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연 용성을 따라 갔다. 그곳에서 ‘젊은 도인’의 탄생 소문을 들은 대중들이 인곡의 법문을 듣기 위해 그를 법상에 모셨다. 대중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젊은 도인의 입에서 어떤 법문이 터져 나올 지 주시할 뿐이었다. 1분, 2분, 3분….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인곡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주장자를 짚은 채 돌탑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인곡의 부동심으로 법당은 고요 속에 잠겼다. 이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인곡은 마침내 그대로 일어나 법상에서 내려왔다.

 

대중들 법문 청하자 “…” 침묵의 설법

이 자리에 있던 용성은 “이것이 참설법이며,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진리이며, 이것이 역대조사의 안목이니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 그리고 법계의 모든 영들이 안신입명하는 곳이다”고 찬탄했다.

인곡은 불과 30살에 호남제일선원인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이 됐다. 앳된 젊은 승려가 산중 최고 어른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인곡은 대우받으려 한다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절 살림이 가난해 양식이 부족한데도 운문선원엔 그를 찾아 20여명의 선객이 몰려들었다. 그는 선객들이 참선하는 틈을 타 백양사에서 몸소 양식을 져 나르고, 나무를 하곤 했다.

조그만 몸집에 말 수가 없고, 늘 겸손했던 인곡은 계율이 청정하기 이를데 없었던 만암의 영향인지 ‘어른’으로 존중받으면서도, 늘 수행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국 불교에 찬불가를 보급시킨 주역인 북한산 운문사의 운문스님(77)은 솔향 가득한 해인사 뒷방에서 “늘 머리를 만져보라”던 스승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삭발한 머리를 만지면서 늘 수행자임을 잊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곡은 솔잎을 먹으면 피가 맑아져 혼침이 오지 않아 정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평생 솔잎 생식을 했기에 그의 방은 늘 솔향이 가득했다고 한다. 인곡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선사는 그런 스승의 영정을 방에 걸어두고 ‘스승을 넘어서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도인을 날짐승은 알아보았을까. 스님들이 공양 중 음식을 조금씩 모아 산짐승들에게 나눠주는 헌식 시간이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늘 인곡을 에워싸고 그의 어깨에 내려 앉곤 했다. 옛 <고승전> 책 속에서나 전해내려오던 현장을 본 승려들과 신자들은 놀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정릉 보림사 조실 묵산 스님(83)은 인곡이 열반하기 전 3년 간 해인사에서 시봉하며 ‘용무생사’(·생사없는 도리를 씀)의 장면을 보았다. 열반 전 12일 동안 단식을 한 인곡이 음력 7월 14일 “이제 속세를 떠나겠다”고 하자, 상좌 포공 스님이 “내일이면 선원 하안거가 해제하고, 우란분절(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해 재를 지내는 불교명절)로 좋은 날이니 내일 가시면 안 되느냐”고 했다. 인곡은 “좋고 나쁜 날이 따로 있느냐”고 했지만, 포공은 “큰스님의 경계는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들이야 그렇지 않다”며 다시 간청했다. 혀를 차던 인곡은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이 말이 온 가야산에 전해지자 주지 스님은 “노장이 아파서 정신 없이 하는 소린데, 이런 얘기를 소문내서 만일 내일 돌아가시지 않으면 무슨 망신이냐”며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인곡은 다음날 오전 8시 “이제 가노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란분절(8월19일)이 멀지않았다. 무엇이 화탕지옥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천도인가. 망월사 선방 위로 한 마리 새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노닌다

 

가야산 지월선사

자신을 낮추며 가야산 산지기 ‘산감’ 자처

 

해인사 행자반장 현산 행자가 “지월 선사가 쓴 이 글씨가 행자들의 행동 규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밤새 성난 폭풍우가 훑고 지나간 때문일까. 산색이 맑다. 특히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가야산 나무들의 기상이 높다.

해인사의 한가한 뒷방에서 극락전 한주 도견 스님(80)이 맞는다. 가야산 나무들을 키우고 지켜냈던 ‘산감’ 지월 선사(1911~73)의 맏상좌(첫제자)다. 일찌기 명예욕을 벗은 그의 스승은 방장이나 조실이 아니라 사찰에서 산을 지키고 가꾸는 직책인 산감을 자처했다. 산승이었다.

도견 스님은 19살 때, 오대산 동관음암으로 출가했다. 스승은 그에게 무엇 하나 시키는 법이 없었다. 밥도 반찬도 스승이 몸소 만들어 제자에게 바쳤고, 제자가 목욕하러 들어가면 벗어놓은 옷까지 빨아 놓았다. 7개월 뒤 동관음암을 찾았던 스승의 도반이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꾸중할 때까지 도견은 중들이 사는 게 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극락전 건너편엔 해인사 행자실이 있다. 갓출가한 이들이 매웁디 매운 절 시집살이를 감내하며 중물을 들이는 첫 관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려를 배출하는 해인사 행자실의 ‘군기’는 방장이나 주지도 어쩌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다. 특수부대의 3년 훈련은 견뎌도 해인사 행자생활 반년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치외법권 지역에 유일한 ‘법’이 있다. 하심()이라고 지월이 쓴 글씨다. 불상도 아닌 족자 앞에 향불이 피워져 있다. 행자실에선 ‘하심’이 가‘부처’다. 행자들은 불상 대신 이 족자 앞에서 계를 받는다.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때문이다. 훈련병처럼 눈빛이 살아있는 행자실 반장 현산 행자는 “처음 이 절에 들어오는 행자들은 누구나 지월 큰스님의 하심을 먼저 배운다”고 말했다.

지월은 말년에 해인사에서 20여 년을 보냈다. 수좌(선승)인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 스님은 승가에 한없이 실망하다가도 지월을 떠올리면 “출가하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단다. 지월은 상대가 늙거나 어리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합장한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고 한다. 상대가 고개를 들고 다시 숙이고 3~4번을 반복할 동안에도 지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괴팍한 행실 유명하다 겸허와 자비 대명사
해인사 행자실 ‘법’…뺨때린 사람 손잡고 “얼마나 아프냐” 위로

 

뺨 때리자 “손 얼마나 아프냐’ 위로

지월은 해인사를 찾는 객스님의 바랑을 들어주며 출가 본사와 은사 스님을 물었다. 그리고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도량에서 오셨습니다.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스승을 두셨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공부뿐입니다”라고 했다. 귀찮은 마음에 거드름을 피우며 법명을 묻던 객스님은 그가 가야산에서 성철 선사가 유일하게 ‘존대’해 마지 않던 지월인 것을 알고는 자지러지게 놀라곤 했다. 누구에게나 ‘보살’이라고 불렀던 그의 겸허와 자비는 범인의 경계가 아니었다. 한 손님이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지월의 뺨을 때리자 지월은 얼른 그의 손을 쥐고 “얼마나 아프냐”고 했고, 말과 표정과 행동이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진실하기만 했던 천진한 그 모습을 본 그 손님이 눈물을 흘리며 대참회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승려들도 초심이 흔들리고, 독신 출가자의 고독한 삶에 크게 방황하기도 한다.

 “고래등 같은 지붕 아래서, 거울 같은 장판 위에서, 백옥 같은 쌀밥을 먹으며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우리가 공부 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지월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승려들은 느리지만 온 가슴의 정성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선 가슴이 뭉클해져 현실에 대한 불만을 놓고 다시 수행 정진할 마음을 내었다.

지월이 처음부터 그런 ‘보살’은 아니었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5살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지암 이종욱 스님에게 출가한 그는 이름난 괴각(괴팍한 승려)이었다. 키가 작았지만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성정이 불같았던 그는 얼마나 싸움질을 했던지 삭발한 머리통이 상처투성이였다.

 금강산 마하연과 덕숭산 정혜사 만공 선사 회상에서 공부할 때도 그는 대중들에게 쌍욕을 해댔다. 지월은 계율에 철저했던 오대산의 한암 가풍과 달리 자유로웠던 만공을 치받기 일쑤였다. 어느 날 지월은 사람들이 생불로 떠받들던 만공의 행실을 공개적으로 힐난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3일 뒤 한 승려가 산 위에서 서쪽을 향해 합장을 한 망부석을 발견했다. 지월이었다. 산문을 박차고 나간 뒤 그 자리에서 그대로 3일 동안 삼매에 들어 전혀 다른 경계를 체험한 것이다. ‘휴휴경휴휴 만해상파정( ·한 생각을 놓고 또 놓아버리니 온 바다의 파도가 고요하도다)’ 지월은 만공에 대한 분별과 시비마저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보살의 세계를 열었다. 전북 완주 수봉산 요덕사 선승 대선 스님(65)은 수덕사 방장 벽초 선사가 “진승(진짜중)? 지월 스님이 진승이지”라고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만공의 제자인 벽초는 누구라도 큰스님입네, 도인입네 하는 꼴을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벽초 앞에선 큰스님 행세를 할 수 없었다. 그런 벽초가 자신이 유일하게 부처님처럼 존경하는 만공을 힐난한 지월을 ‘진승’으로 꼽았으니, 어찌 범인의 경계로 헤아릴 수 있을까.

 ‘달(깨달음)’을 말하는 설법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작 달로 안내하는 나침반과 손가락은 없다고 한탄한다. 이제 어디에서 ‘달을 가리키는’(지월·) 나침반을 찾을 것인가. 해인사 뒷방 한주의 얼굴은 맑고, 행자들의 숙인 고개는 깊고, 가야산의 나무는 높고 푸르다.

 

보림사 백봉거사

매주 토요일 밤 철야로 정진하고, 1년에 두차례씩 1주일간 일체 눕지않는 용맹정진을 하며 백봉의 선풍을 잇고 있는 서울 정릉 보림선원의 재가 선객들.

삭발 출가 않고도 “일체가 허공” 깨달아

서울 정릉 청수장의 미로를 오르며 보림사를 찾는다. ‘나를 깨닫자’. 가파른 언덕 위에 쓰인 한마디가 미망을 그치게 하는 보루다. 아담하지만 청정하다. 보림선방에 들어서니 적막하되 깨어 있다. 20여명의 재가 선객들이 토요 철야정진중이다. 허공을 떠받친 허리가 곧다. 그들의 앞과 뒤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한 노인이 서 있다. 백봉 김기추 거사(1908~85)의 사진이다.

백봉은 출가 승려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 20년을 하루 같이 정진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

백봉은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일제가 만든 일본인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고, 그보다 먼저 생긴 부산상고를 제2상업학교라고 지칭하는 데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했다. 20살 때엔 부산청년동맹 초대 총무와 3대 위원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다 1년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다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본 관헌에 체포돼 사형수 감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약소국 민족으로서 속박된 삶의 연속이었다.

1950년부터 고향에서 부산남중·고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하던 백봉에게 ‘자유의 날’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백봉이 한 지인과 함께 청주 심우사를 찾았다. 백봉은 주지 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백봉은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자 일념으로 집중했다.

 

항일운동·교육사업 하다 청주 심우사서 득도 경지
“말법 시대의 등불” 칭송…“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다”
드센 거사 선풍의 발원지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백봉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은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 순간 백봉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백봉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이었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백봉은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은 금강경 한 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보림사 백종거사

<유마경>에선 붓다가 제자들에게 유마거사를 병문안토록 하자 사리불과 목건련, 가섭 등 10대 제자와 미륵보살까지도 유마거사의 법력을 감당해 낼 수 없다며 유마거사를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백봉을 가리켜 욕설법문으로 유명한 춘성선사는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거사”라고 불렀고, 탄허선사는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을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84)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노구를 불사르고 있다.

70년대 초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 선사는 백봉에게 “삭발출가해서 조계종 본산 조실을 맡아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봉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절대성 자리를 깨치는 종교가 특히 기복과 상대성 시비 놀음에 빠져 있음을 간파했다. 중국에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운 양무제의 공덕에 대해 “없다”고 잘라 말해버린 달마대사처럼 백봉은 상대 세계에 현혹된 알음알이를 부수는 벼락이었다.

백봉은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누구냐,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놈이 누구냐”며 “빛깔도 소리도 없는 바로 그 자리, 허공이 본바탕이고, 법신”이라며 천기누설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조 마지막 한의학자인 무위당 이원세를 비롯한 서운·춘당 선생과 연화당·일심행 보살 등이 각곳에서 백봉의 뜻을 이었고, 국민대 김문환 총장, 전창렬 변호사, 인천지검 김진태 차장검사, 한국과학기술원 감직상 연구원 등도 백봉 문하생이었다. 또 백봉을 직접 모셨던 보림회 총무 전청봉씨와 ‘우리는 선우’ 이사장인 성태용 건국대 교수와 외국인노동자쉼터인 ‘사명당의집’ 대표 김광하씨, 불교집필가 장순용씨 등이 거사선풍을 드날리고 있다.

허공을 걷어잡는 보림선방을 나서니 다시 허공이다. 산문 밖 역시 허공이다. 일체가 허공이라는데 거리의 온갖 풍경은 대체 무엇인가. 한 선객이 준 테이프에서 들리는 너털웃음 섞인 백봉의 목소리가 그림자에 현혹되는 버릇을 다시 통쾌하게 날린다. “우주가 한바탕 웃음 아닌가. 하하하”

 

남장사 혜봉선사

남장사 관음보전 옆에 핀 무궁화. 남장사엔 혜봉선사가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궁화가 경내 곳곳에 피어 있다.

법당에 태극기 그려두고 민족해방 발원

관운 좋던 대한제국 관리 망국 현실 맞아 출가 구도
“일본 망한다” 희망 전파…해방뒤 왕정복고에 반대

경북 상주 노음산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니 남장사다. 아담하고 정결한 절 입구에서부터 길손을 맞이하는 꽃이 눈에 띈다. 무궁화다. 일주문 안 곳곳에도 무궁화가 웃고 있다.

을사보호조약(1905년) 직후 남장사에 온 조선의 관리가 있었다. 고종을 보필하던 정4품인 궁내부 주서 이종국이었다. 18살에 진사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간 준재로 우의정의 딸을 규수로 맞아들였으니, 평탄한 나라였다면 그만한 복록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망국의 다리를 건넌 기막힌 현실에 동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그는 나라와 자신의 길이 다한 곳에서 불도를 열었다. 그가 혜봉 선사(1874~1956)다.

혜봉은 이런 속세의 신분을 감춘 채 치열한 구도에 나섰다. 이미 사서삼경과 같은 유학에 통달했던 혜봉은 불경의 요지를 꿰뚫었다. 이어 본격적인 참선에 들어갔다. 직시사에선 곡기를 끊고 솔잎 가루로 연명하는 ‘벽곡’을 감행했다. 이 때 궐내에서 그의 인품을 우러르던 상궁과 나인들이 직지사로 시봉하러 찾아오자 그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혜봉은 멀리 함경도 안변 석왕사를 거쳐 경허 선사의 맏상좌인 수월 선사를 찾아 법거량을 벌였다. 이 때 글을 모르는 수월은 선객들에게 <선문촬요>를 강의하도록 혜봉에게 청했다고 한다. 혜봉이 통도사에 머물 때는 한 유생이 찾아왔다. 전 세계에 선불교를 알린 숭산 선사의 스승 고봉 선사였다. 양반으로서 안하무인이었던 고봉은 통도사에 들어서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여보게, 거 누가 내 머리카락 좀 깎아주게나!”라고 반말지거리를 늘어놓았다. 그 때 승려들이 고봉을 데리고 간 곳이 혜봉의 처소였다. 혜봉 앞에서 고봉은 순한 양이 되어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문에 들었다.

 

법당에 태극기 그려두고 민족해방 발원-남장사 혜봉 선사

 

혜봉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거쳐 남장사 관음전 조실로서 선·교를 넘나들며 납자들의 뮐을 깨웠다. 동국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국 불교학의 태두 뇌허 김동화 박사(1902~80)도 그가 길러낸 제자다.

그러나 조선의 지사로서 늑대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동포와 민족의 모습을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남장사 보광전의 철불상인 비로자나불(보물 990호)은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들면 스스로 땀을 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은 이 철불 위 천장에 태극기를 그려두고 민족의 해방을 발원하고 또 발원했다. 그의 애국 정신을 본뜬 제자들은 한결 같이 3·1만세 등 독립운동에 나서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당했다. 그런 제자들의 전력 때문에 일본 순사들은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혜봉이 “제발 가문의 대만 이어 달라”는 간청을 거절치 못하고 떨어뜨린 일점 혈육이 1955년부터 최근까지 조계종 비구니회 회장으로서 비구니들의 어머니 역할을 해온 광우 스님(79)이다. 14살 때 남장사로 출가했던 광우는 혜봉이 늘 끼고 있던 서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이 손수 글을 써서 만든 서첩으로 한쪽엔 불경이, 반대쪽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광우는 순사들이 들이닥치면 큰스님이 고초를 겪을 것이 우려돼 난중일기 부분을 뜯어내 버렸다가 나중에 혜봉에게 들켜 큰 꾸중을 들었다.

또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총독 미나미가 개최한 31본산주지회의에서 호통을 치고 나온 만공선사에 대해 ‘할의 소감’이란 글로 칭송했고, 그의 방엔 ‘견리사의 견위수명’( ·눈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쳐라)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을 걸어두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힘이 영구할 것 같아 많은 이가 매국으로 일신의 안녕을 도모할 때도 혜봉은 남장사를 찾아온 지사와 일본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끝이 다 와 간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은 뒤엔 옛 궁의 동료들이 조선왕조 복고에 앞장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석양이 노음산을 넘는다. 아침에 피었던 무궁화도 다시 지기 시작한다. 무상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조국의 현실을 절망할 때 희망을 노래하고, 다시 옛 왕조의 전설에 집착할 때 단호히 허망함을 직시한 혜봉이 심은 무궁화가 말 없는 법문을 하지 않는가. 태양은 아침잰 다시 떠오르고, 무궁화도 다시 피어난다고.

 

불국사 정영 선사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뒤로 푸른 노송들이 서 있다.

흙·물·불·바람으로
흩어진 ‘무소유은자’

“스님, 출가자는 절대로 술 마시면 안 됩니까?”

“…”

“스님, 출가자는 절대 연애도 해서는 안 됩니까?”

18살에 출가한 효림 스님(실천불교승가회 의장)이 정영 선사(1925~95)에게 물었다. 이제 막 세상사에 눈을 떴지만, 자신의 몸엔 이미 승복이 걸쳐져 있었다. 마침내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을 은사나 다름 없는 사형(같은 은사에게 출가한 선배)에게 물은 것이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영이 말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세속 친구들처럼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던 효림이 그토록 원하는 답이었지만, 청정하기 그지 없이 살아온 사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깡패가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선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중이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

“어떻게 마시는 것이 중답게 마시는 것입니까?”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이 중이 술을 마시고, 중이 연애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칭찬 받을 행동만 해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서 박수받기 위해 한 것이라면 수행에 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라도 수행을 돕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회주로 있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효림은 “정영 스님의 답은 조사 어록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늘 이렇게 살아 있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영은 세상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선사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35년 가운데 20여년을 경북 문경 김용사 금선대와 상주 남장사 중궁암 등 깊은 산에서 홀로 정진했다. 선방에서 살 때도 조용하기 그지 없는 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월남한 뒤 대학을 다니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북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남쪽에 혼자 남게 됐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다녔다. 전공은 수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상공부 특채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재직했으나 자유당 정권 시절 공무원들의 부패상에 절망해 사표를 내고 중·고교의 교사가 됐다. 그러다 용성 선사의 제자로 서울 대각사에서 ‘각(깨달음) 운동’을 펼치던 소천 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에겐 오직 수행 뿐이었다. 신자도 두지 않았다. 금선대에서 지낼 때 산에서 길을 잃어 죽을 뻔하다가 목숨을 건진 한 보살이 유일한 신자였다고 한다. 말 없이 조용한 그의 미소를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평화를 느꼈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그는 어떤 직위도 갖지 않았다. 한 때 태백산 각화사 주지를 맡았으나 수행 잘하는 제자를 그르칠까 우려한 은사가 당장 그만두라고 하자 그날로 주지직을 던지고 숨어버렸다.

 

세상에 ‘절대 안돼’ 란 없다
손가락질 받더라도 수행정신 잃지말라 강조
입적 전날 링거뽑고 돌아와 옷·물건 나눠주고 ‘공수거’

 

지금까지 보아온 스님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스님으로 정영 선사를 꼽으면 회고하는 효림 스님.

 

아집에서 해탈하는 것이 불교지만 승려는 승복에 갇히고, 선승은 ‘화두선’에 갇히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정영은 토굴에서 “혼자 살다보니 내가 중인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에겐 벽이 없었다.

참선을 하던 효림이 사회활동에 나선 것을 마뜩해하지 않았지만, “진실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뜨는 법”이라며 눈 뜬 시민사회운동을 하도록 경책했다.

젊은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행만 해 그의 폐엔 동전만한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고, 몸은 대꼬챙이처럼 바짝 말랐었다. 경주 불국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정영은 병원에 입원했으나 아무도 몰래 주사바늘을 뽑아버리고 절에 돌아왔다. 스님들이 “왜 벌써 오셨느냐”고 묻자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정영은 입적했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그의 방엔 아무런 물건도 없었다. 몇 개의 옷과 물건까지도 미리 다른 수행자들에게 모두 나눠준 뒤였다. 책상엔 절에서 준 차비 등을 모아 5백만 원이 든 통장을 “화장비로 쓰라”는 메모와 함께 남겨두었다. 빈 몽뚱이로 인해 사중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다운 처사였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온데다 전국의 도로가 체증을 빚는 설날 전날에 떠나 장례식에 누구도 오기 어려웠다. 그의 제사도 절 집안이 가장 바쁜 설 전날이기에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효림이 방에서 혼자 지낼 뿐이다. 그의 몸은 인근 화장터에서 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그의 돈은 학승들이 보는 책을 사는데 보시됐다. 그는 상좌(제자) 한 명 두지 않았다. 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의 뜻에 따라 그를 기리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효림이 소중히 간직했던 사진조차 1998년 수해 때 보광사 안 설래당과 함께 쓸려가 사라져 버렸다.

최근 스님들이 골프연습장을 짓고, 고급차를 굴리는 등 사치스런 생활로 빈축을 사고 있는 불국사는 일체 무소유의 은자가 빈몽뚱이마저 벗어버린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 경내엔 노송이 많다. 산소와 그늘과 솔방울과 솔향까지 아낌 없이 주고 빈몸으로 서서도 늘 푸른 것은 어인 일일까.

 

‘떠돌이’ 혜수선사

마지막 여행길도 구름 가듯 떠났다

 

산문을 폐쇄하고 선승들이 정진하는 경북 문경 희왕산 봉암사 경내로 한 선승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땅 위 봉암용곡엔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희왕산을 넘어온 구름들이 흐른다. 사시사철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봉암사 납승의 발걸음 또한 날래다. 머무르지 않은 떠돌이 괴각승 혜수의 그림자가 아닌가.

이 인근 문경 농암에서 1940년(추정)에 태어난 혜수는 16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이곳 봉암사 희랑대 토굴 등에서 잠시 정진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80년대 초 불과 40여 살로 입적했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는 늘 선방에서 안거(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하는 집중 참선 수행)가 끝나면 바랑 하나 메고 곧장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틀도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양말이 흘러내릴 정도로 황새처럼 가는 다리로 날 듯이 산을 탔다. 1년이면 그렇게 전국의 산과 절을 세바퀴씩 돌 정도였다.

그와 몇 차례 결제를 함께 했고, 이곳 희랑대 토굴에서 정진하던 그를 지켜본 실천불교승가회 의장 효림 스님(53)은 혜수를 ‘이 시대 마지막 괴각승’으로 기억한다. ‘괴각’이란 ‘엉덩이에 뿔난 소 처럼 괴팍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상원사에선 주지가 절 돈을 착복한 채 대중에게 소홀히 하자 똥을 담아 불전에 올려놓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외곬수였다. 장부가 문을 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였기에 하루는 함께 만행하던 도반들이 동화사에 앞질러가서 천왕문을 잠가버렸다. 그러나 천왕문 옆은 툭 터져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혜수가 들어오지 않자 도반들은 화가 나서 돌아갔는다가보다며 그냥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서 천왕문에 나와 보니 혜수는 그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도반들이 사죄했지만 그는 “밤새 서서 참선을 했다”며 태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혜수는 평소 하던 대로였다. 매일 장좌불와(눕지 않음)한 그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실 있게 절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동해 삼화사 주지 원명 스님과 경북 상주 남장사 관도 스님이 입을 맞춘 듯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도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엉덩이 뿔난 소’ 괴각승
온나라 산·절 떠돌며 눕지도 않고 매일밤 참선
“앉은채 떠날수 있나” 말에 그자리서 찻잔 든채 입적

 

원명은 혜수와 한겨울에 상원사에서 북대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오대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원명은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눈에 빠져 눈밭을 걸을 수 없는 털신을 신고 있던 혜수는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원명은 농구화를 신고도 발이 시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혜수는 맨발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곤 북대에 도착해선 얼음물에 발을 담가 얼음을 빼냈다. 원명은 “육체의 고통정도는 아예 초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초인적인 수행력의 결과였다. 혜수가 해인사 강원에 다닐 때였다. 동안거 중 음력 12월 8일 성도절(붓다가 깨달은 날)이 되면 대중들 가운데 희망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용맹정진(전혀 눕지 않는 좌선)을 했다. 선원에선 괴팍한 혜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용맹정진 시작 날부터 혜수는 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들이 처소로 돌아와 보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스님들이 코를 틀어막고 탁자 밑을 보자 혜수가 그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굳어진 채로 펴지지도 않아 병원에 가서야 펼 수 있었다. 일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똥오줌도 그대로 누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육체를 조복 받았다.

혜수는 시력이 나빠 글씨를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역대 조사들이 안경 쓴 일이 없다”며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혜수는 대웅전에 있는 화엄 탱화 속 신중의 눈에 바늘을 꽂으며 “진정 이 신중에게 영험이 있다면 이렇게 해를 끼쳤으니 내 눈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영험을 실험했다고 한다. 두려움 많은 세인에겐 기도 안 찰 실험이다. 선승인 관도 스님은 “틀에 박힌 격식을 거부하고, 몽둥이로도 과감히 실험을 하는 그런 선승을 남의 눈치나 살피는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혜수는 80년대 초 선방 결제 뒤 남장사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날 사자평을 넘으며 젊은 선승들에게 혜수는 “선사라면 선사답게 좌탈입망(앉은 채로 입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양 표충사에 도착해 객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선승이 “그럼 스님은 좌탈입망할 수 있습니까”하며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혜수는 찻잔을 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이 가듯, 옷을 벗듯 혜수는 그렇게 허물을 벗어버렸다. 사망을 확인하는 경찰도 ‘앉아 있는 주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의 독침을 맞으면 즉사한다는 소문도 있는 때여서 병원으로 옮겨 해부까지 했으나 독침을 맞거나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그가 방장이나 조실이었다면 달마나 육조 같은 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전해진 좌탈입망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세상이 요란할 일이었지만, 떠돌이의 법구는 조용히 불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탑도 세워주는 이 없었고, 상좌(제자) 하나 없으니 그를 기리는 제사도 없다.

희왕산의 나무가 소리 없이 물들고 있다. 옷을 벗으려나 보다. 혜수가 간 것도 가을이었다.

 

도봉산 무문관 제선 선사

제선 선사가 6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좌선 정진했던 도봉산 무문관.

사방 막힌 방안에서 천하를 깨닫다

천축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를 말한다. 도봉산역에서 1시간 가량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가파른 길을 따라 도봉산에 오른다. ‘천축’으로 가는 길이다. 인수봉 못지않은 미륵봉 기암 아래 천축사가 숨어있다. 천축사 안쪽 외진 곳엔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이 있다. 무문관이다. 무문관이란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엔 출입문까지 봉쇄한 방이다.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수행자가 견성(깨달음)해 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천지를 활보할 대자유를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들어간 감옥인 셈이다.

2001년과 2002년 겨울 기자는 이곳에서 이 무문관의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무문관에선 1차로 1966~71년에, 2차로 72~77년에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뜬 정진이 있었다. 2차 때 유일하게 6년 정진을 마친 원공은 그 뒤에도 이곳 무문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십여 년을 차 한 번 타지 않고 걸어만 다녔던 원공은 남들이 준 여비를 꼬박 모은 돈 1천여만 원씩을 두 차례나 통일을 위한 기금으로 써달며 기자를 통해 <한겨레>에 전했다. 그러나 원공 자신은 끼니 때가 되자 라면을 스프 없이 끓여 소금만으로 간을 해 아무런 반찬 없이 들고 있었다. 3년 전 홀연히 이곳을 떠난 원공의 소식조차 모른다는 이 절 소임자의 전언에 더욱 허허로워진 가슴팍을 무문관의 전설이 스치고 지난다.

1,2차에 걸쳐 무문관엔 내노라 하는 스님 100여명이 거쳐 갔다. 그러나 1차 때 6년 결사는 단 2명만이 마쳤다. 한 명은 지난해 2월 95살로 입적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6년 결사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려 당시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가슴에 전설로만 남았다.

그가 무문관 선승들 사이에서 ‘가장 철두철미하게 수행했던 수행자’로 알려졌던 제선 선사다. 제선의 화신인가. 무문관 앞에 큰 바위가 산처럼 앉아있다.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의 한 방에 수행자가 벽에 한 낙서. 바른 인연을 심어 자신의 근본 성품을 깨달아 생사를 기필코 타파하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느껴진다.

 

어린 아들 갑자기 죽은 뒤 홀대한 개 ‘인과응보’ 깨우침
밥구멍 빼고 꽉 막힌 무문관 6년 정진 뒤 자취 감춰

제선의 전설을 찾아 다시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향했다. 천축사 무문관을 지었던 정영 스님(83)이 다시 무문관을 세운 곳이다. 정영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 선사에게 제선과 같은 해 한 날에 출가했다. 제선이란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고 해서 주어졌다고 한다. 만공 선사로 부터 법(깨달음)인가를 받은 포산은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 삼아 몰려들었다. 정영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선이 “특출했다”고 회고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당차기 그지 없던 제선은 한 번 좌정하고 앉으면 움직이지 않은 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또한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해냈다. 훗날 성철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백련암의 축대는 제선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의 친척집에 묵으며 유학생활을 했던 제선은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똑똑해 그는 식민조국을 독립시킬 제목으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뒤 갑자기 쓰러지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제선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다. 폐인이 될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제선은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을 만났다. 제선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까닭을 모르고선 살 수가 없다”고 말하자 스님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제선은 그 날부터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 뜨고 염불하는가하면 어느 샌가 밭두렁에 가꾸로 처박혀 코를 골고 있었다. 스님은 그 때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42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잠이 사라져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화가난 제선이 불상의 목을 떼버리겠다며 가던 중 소매가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찰라 아들이 다가왔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하면 아들은 도망갔다. 그는 겨우 쫒아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아이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충견이 떠올랐다. 일본 친척집에 머물 때 개가 갑자기 병이 들자 친척아저씨는 그에게 개를 교외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를 애타게 좋아했던 개는 자전거에 매달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개를 떼어내고 도망치다시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는 일주일 만에 집을 찾아 왔다. 그리곤 전과 다르게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선은 인과응보를 깊이 깨달았다.

무문관 6년 정진을 마친 제선은 마중 온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간 뒤 혼자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끝이었다. 누군가는 평상복을 입고 서울의 한 판자촌에 숨어 수행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해의 외딴 섬에 산다고도 했다. 정영은 “소문을 쫒아 남해의 섬에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고 했다.

문 없는 문을, 자취 없는 자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3년 정진을 앞두고 공사 중인 대자암 무문관 방에 들어가 보니 가을 창공이 하나 가득 아닌가.

 

계룡산 도인 석봉선사

무서운 얼굴 불같은 성격 일거에 버리고 40년 묵언

 

석봉 선사가 머물렀던 계룡산 산중 암자 신흥암 뒤로 천진보탑 바위가 보인다. 석봉이 계룡산을 떠나는 날 산짐승들이 밤새 울부짖어 계룡산이 발칵 뒤짚혔다고 한다.

충남 아산 영인산 자락으로 한 노승을 찾아 나섰다. 세상에 드러내기를 전혀 원치 않는 그를 어렵사리 만나는 감회에 젖어 산길을 오르니 막다른 곳이다. 토굴 같은 집이 외로이 서 있다. 노승이 산에서 주워 까놓은 것을 보이는 쥐밤들이 널린 방에 한 노승이 앉아있다. 혜철 스님(81)이다. 80대 노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허리가 꼿꼿하다. 이것이 수행자의 힘인가. 강하되, 위협적이지 않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을 덮는다. 그러나 그는 불을 켤 생각조차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한 발을 옮길 수 없는 칠흑 같은 밤 중에도 계룡산 숲 속을 뛰어다녔다는 그다. 어둠 속에서 호랑이 불빛 처럼 빛나는 혜철의 안광이 이 세상에 단 한차례도 드러난 적이 없던 그의 스승 석봉 선사(1890~1971)의 삶을 토해낸다.

석봉은 무섭게 생긴 인물이었다. 머리는 까지고 입술은 튀어나오고 눈빛은 상대의 심장을 찌르듯해 마치 사천왕 같았다. 전남 곡성 겸면에서 태어난 석봉은 7살 때 몸이 아파 7살에 곡성 관음사에 맡겨져 기도를 시작했고, 그것이 출가길이 되었다. 불경을 익히기 위해 지리산 화엄사로 옮겨간 석봉은 구례중학교를 다니면서 사천왕 같은 얼굴 값을 하기 시작했다. 유도 3단이던 그는 우리 밖을 나온 산짐승처럼 구례시내를 주먹으로 휩쓸고 다녔다. 보다 못한 구례군수가 화엄사 주지에게 그를 산문 밖에 내보지 말도록 편지를 쓰자 석봉은 “네가 군수면 군수지, 왜 남의 발까지 묶으려고 하느냐”며 군청을 뒤짚어놓았다.

 

강렬한 눈빛 ‘사천왕’ 인상…유도 3단 길거리 주먹질도
‘화’ 놓기로 결심하고 정진 “참는 장사 당할 자 없다”

그가 38살에 참선을 하겠다며 만행에 나섰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1년 간 참선 정진한 그는 금강산에서 마가목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선방으로 도반과 함께 갔다. 그런데 하루 밤 자고나니 지팡이가 없었다. 화가 난 석봉은 “오늘 밤 안으로 지팡이를 가져다놓지 않으면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 하룻밤을 자고 나자 지팡이는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상원사 선방에선 그의 도반의 방부(살기를 요청)는 받아주면서 그의 방부는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참선길이 막히게 된 그는 ‘왜 방부를 받아주지않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함께 온 도반이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느냐”며 “스님이 화를 내면 꼭 사천왕 같아서 다른 스님들이 무서워 함께 살기를 꺼린다”고 말해주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남에게 ‘위협’이라는 얘기였다.

석봉은 그 순간 금강산에서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한 스님이 마하연 돈도암에서 있는데, 마당에 있던 뱀이 부엌으로 들어가 타고 남은 재를 묻혀 자기 몸으로 마당에 글을 썼다. 자신은 원래 홍도 스님이었는데, 아파서 누워 있다가 바람에 문이 ‘확’ 닫히는 바람에 발이 끼었다고 단 한 번 화를 낸 과보로 이렇게 뱀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얼굴 불같은 성격 일거에 버리고 40년 묵언-계룡산 도인 석봉선사

 

그 길로 석봉은 상원사 조실 한암 선사 앞에 가 3배를 올렸다.

“진심(화)을 놓겠습니다. 방부를 받아주십시오.” “진정 진심을 놓을 수 있겠는가?” “저는 한다면 합니다.”

그 순간 사천왕 처럼 무섭던 석봉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변한 그의 모습이 믿기지 않던 선객들이 처음엔 시험 삼아 욕을 해도 빙그레 웃을 뿐이었고, 나중엔 발로 차도 웃을 뿐이었다. 그 뒤 열반할 때까지 40여년 간 그는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말 외엔 입을 여는 법도 없었다. 사실상 40여년의 묵언이었다.

혜철이 9년 간 모시고 산 계룡산 신흥암에서도 석봉의 말 없는 정진은 한결같았다. 신흥암은 천연바위 속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있어 가끔씩 방광한다는 천진보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신흥암에서 방광하는 것은 천진보탑만이 아니었다. 전기불도 없던 시절 신흥암에서 기도하던 불자들은 칠흑 같은 밤 석봉의 방에서 방광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말 없던 석봉이 남긴 유일한 문답이 있다. 그는 “누가 가장 센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왕이나 천하장사나 호랑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참는 장사를 당할 자가 없다”며 “인욕(참음)이 제일 강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석봉의 ‘5가지 제일’ 법문이다. 그는 이어 “무엇이 가장 이로운 것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지위를 답했다. 그러나 그는 “무병이 이롭다”고 했다. 또 그는 이어 “제일 부자는 지족(자족함을 앎)한 사람”이며, “제일 친한 사람은 부모, 형제나 자신의 잘못을 부추기는 이가 아니라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주는 친구”이고, “제일 즐거움은 도를 깨쳐 알고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봉은 3일 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앉은 채 열반했다. 충남 보령 선림사에서 보관중인 그의 좌탈열반 사진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석봉의 도반인 도봉산 욕쟁이 선사 춘성은 석봉의 앉은 법구 앞에서 좌선을 하고 나서는 “일체 집착을 벗어나 나로서도 대답할 수 없는 법을 설하고 있다”며 3배를 올렸다. 석봉의 법구를 다비하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려 사리가 한말도 넘게 쏟아진 것이다. 사리는 그의 뜻에 따라 산에 뿌려졌고, 어떤 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혜철의 방에서도 긴 침묵이 흐른다. 어떻게 화가 그런 과보를 받는지, 왜 많은 중생을 두고 홀로 산에 사는 지 질문도 사라져 버렸다. 계룡산 아래서 사 간 감을 함께 나누는 사이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가을 바람이 답할 뿐이다. 가을 바람에 감은 이렇게 익었고, 온 산하가 붉게 물들고 있지 않은가.

 

금강산 철우선사

철우 선사가 호미로 밭매고 손수 빨래하며 조용히 지내던 구미 금강사

주름진 선승도 머리 조아린 ‘소년 조실’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 선승들이 찾아왔다. 경남 통영 용화사 도솔암 선방의 선객들이었다. 경허 선사의 법제자로 천진도인인 혜월 선사를 조실로 모시러 온 것이다. 그런데 혜월은 그 조실청장(조실 요청서)를 한 젊은 수좌 앞에 놓고는 3배를 올리라고 했다. 도솔암 선승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새파란 젊은 중이 아닌가. 그가 불과 27살에 선을 상징하는 조실로 추대돼 ‘소년 조실’로 불렸던 철우 선사(1895~1979)였다.

경북 구미역에서 금오산 쪽으로 내려가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금강사다. 역에서 10분 거리다. 철우가 말년 20여년을 지내다 열반한 곳이다. 그를 시봉한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59)이 맞는다. 스승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무신경인 그가 수차례 간청 끝에 입을 뗐다.

 

주름진 선승도 머리 조아린 ‘소년 기질’ 금강산 철우 선사

 

철우는 경남 밀양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7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마음 둘 곳이 없던 어린 철우는 그 해 밀양 표충사로 출가했다. ‘도를 통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철우는 불과 15살에 참선 길에 나섰다. 해인사 선방에서 한 철을 보내고 팔공산 현풍 유가사 도성암에 있을 때 함경도에서 참선하러 온 한 수좌의 입방이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 한 입이라도 덜겠다며 솔잎가루 생식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10년간 생식과 함께 묵언(말을 하지 않음)을 하니, 그는 묵언수좌 또는 생식수좌로 불렸다.

13살 고아된 뒤 출가… 15살 참선 길 나서
10년간 솔잎생식·묵언… 일제 고문 수행으로 견뎌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자리를 옮긴 철우는 삐죽삐죽한 철사를 얽은 모자를 만들어 쓰고, 이를 줄로 시렁과 연결했다. 잠을 쫓기 위해 졸면 이마가 철사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는 이런 고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다 홀연히 안목이 트이니 불과 18살이었다. 선방을 다니는 도중 그는 동굴에서 연명하며 정진하기도 했다. 어느 해 한겨울 금오산을 지나던 철우는 마애석불 옆 용샘굴에서 1주일 동안 머물렀다. 밖에 눈이 하얗게 쌓인 날 그가 추위를 잊은 채 선정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등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그의 등에 기대 앉은 호랑이의 꼬리가 무릎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인기척을 하니 호랑이는 살짝 일어서 자리를 떴다고 한다.

호랑이도 알아본 도인을 일제는 알아보지 못했다. 철우가 경남 양산 미타암에 머물 때 부산·경남의 독립투사들이 3·1만세운동 이후 독립궐기문을 지어와 학식이 뛰어난 철우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이로 인해 독립지사들이 굴비처럼 엮여 일본경찰에 잡혀갔고, 마침내 궐기문 최후 작성자가 ‘미타암 벙어리 스님’이라는 게 드러나고 말았다. 철우는 그 일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꾸로 묶여져 코와 입에 고추가룻물이 부어졌고, 손톱과 발톱엔 못이 박혔다. 그러나 철우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묵언 중이었기 때문이다. 철우의 엄지발톱과 엄지손톱을 그 뒤 못 박힌 상처 때문에 늘 두개로 갈라져 자랐다고 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다시 수행 길에 오른 철우는 묘향산 금선대에서 홀로 솔잎으로 연명하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억겁의 꿈에서 깨어났다. 당시 국내 최대사찰인 묘향산 보현사엔 경허의 맏제자로 평생 머슴처럼 숨어 일하며 헌신하다 간 수월이 조실로 있었다. 철우의 견성을 한눈에 알아본 수월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납자를 제접하라”고 명했다. 철우가 일주문을 나설 때도 수월은 일주문 옆 감자밭에서 호미로 밭을 매고 있었다. 드디어 묵언을 끝내고 포효를 시작한 철우가 “남쪽에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할까요?” 하고 물으니, 수월은 “호미를 들고 두 팔을 벌린 채 휙 돌고 춤을 추며 ‘여시여시’(如是如是·이렇게 이렇게)하라”고 했다. 그러니 철우가 밭으로 들어가 수월의 호미를 건네 받아 춤을 추며 ‘여시여시’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러자 수월은 “(깨달음을)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며 철우를 보냈다.

철우가 남하해 경허의 두 번째 제자인 혜월을 찾아가자 혜월은 단박에 그의 견성을 인가하고, 법제자로 삼았다. 철우는 이 때부터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대구 동화사 금당, 파계사 성전암, 금강산 마하연,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등에서 ‘소년조실’로 사자후를 토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 수월과 혜월처럼 직접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손수 자신의 빨래를 하며 살았다. 말년엔 더욱 조용한 삶이었다. 그러니 뉘라서 그의 금강체를 바로 볼 수 있었을까.

철우가 열반에 들어 다비를 위해 그의 법구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서자 마른 하늘에 오색 광명이 떴고, 영결식 때와 다비식장에서 법구에 불을 붙일 때 다시 이처럼 희유한 현상이 반복됐다.

한 때는 소년조실이었고, 한 때는 노승이었던 철우는 이제 어디로 갔는가. 그의 오색광명을 기려 금강사에 제자들이 세운 ‘적조(寂照)탑’을 뒤로 하고 돌아서니, 철우가 열반 전 한 불자의 죽음에 즈음해 읊은 만사가 다시 노소와 생사의 꿈을 깨운다. “색신을 바꾸어서 법신으로 돌아가니/한 줄기 신묘한 광명이 오래오래 빛나는구나.”

 

남장사 혼해선사

경북 상주 노음산 남장사. 혼해가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젊은 선승들에게 불성에 대한 의심의 불길을 지핀 곳이다.

세속서도 어김없는 ‘참’ 승려

6·25 전쟁 중이었다. 대찰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때였다. 경남 함양읍의 조그만 사찰엔 일흔이 넘은 노승이 피난 와 있었다. 이 절엔 전라도에서 피난온 20대 여인이 공양주(부엌살림을 맡은 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전라도 갑부의 딸로 해방 전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미모의 여인이었다. 좌익엘리트로 동경제대를 나와 소학교 교감을 하던 그의 남편이 전쟁 중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시어머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숨어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여인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노승은 법회 때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이임을 이실직고했다.

그 노승이 바로 금강산 장안사의 대강백(강사)이자 해방 전 해인사 조실을 지내고 훗날 우리나라 선의 본가가 된 해인총림의 초석을 놓은 혼해 선사였다. 청정 독신승이 드물던 시대에 청정하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고승이 남편 있는 여자에게 아이를 배게 했으니 “망령 난 중”으로 손가락질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흔 넘긴 청정 독신승 한 여인과 마음 맞아…
마을 내려와 2남1녀 두고도 예불·좌선 당당한 정진

 

여인 품속서도 어김없었던 진흙 속 연꽃-남장사 혼해 선사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혼해는 16살에 삼척 천은사로 출가해 금강산에서 경을 본 뒤 경북 문경 대승사, 선산 도리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내원암 등의 선방에서 정진한 선객이었다. 혼해는 젊은 시절부터 김천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출세간을 넘나들었다. 시장통의 번잡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 때 혼해는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도 화두심을 놓지 않아 김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물을 한 겨울에 알몸으로 얼음을 깨고 오고가도 춥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노승은 세속에 살면서도 해인사 조실 시절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규율이 엄한 대찰에 머물다 아무도 간섭하는 이 없는 속가에 나오면 곡차(술)를 들고, 곰방대에 담배를 무는 게 예삿일이었지만, 혼해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2남1녀의 자식을 두고도 그는 새벽부터 예불을 하고, 경을 읽고, 좌선을 했다. 함양에서 그를 시봉한 김명호 거사(86)와 해인사 한주 송월 스님(80) 등이 그를 지켜본 산증인들이다.

혼해는 이념다툼과 전쟁의 와중에 기구한 운명이 된 여인이 사형 당하거나 평생 옥살이로 삶을 마감할 옛남편의 고난에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쌀 30가마를 들여 그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혼해의 노력으로 여인의 남편이 마침내 석방되자 혼해는 그 여인을 옛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가 나 사상범 일제 재검거령이 내려져 남편은 다시 감옥에 끌려들어갔고, 여인은 다시 함양에 왔다.

혼해의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를 아는 대찰에선 그를 다시 스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상주 남장사에 머물 때 윗반에선 태백산 각화사 서암의 전 선원장 고우 스님이, 아랫반에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장 대원 스님과 구미 금강사 주지 정우 스님 등이 배웠다.

당대의 대강백이던 고봉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고우는 어느 날 혼해를 보고 짧다란 키에도 뭔지 모르게 당당하던 모습에 이끌려 야반도주해 남장사로 갔다. 고우가 방청소와 빨래까지 수발을 들며 가까이 지켜본 혼해는 오랜 세속 생활을 한 뒤였지만 절집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승려들보다 더 어김 없는 승려였다. 특히 그의 강설은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다른 강사들과는 전혀 달랐다. <금강경>을 배울 때 고우가 “부처님께서 공양 때가 되어 사위성에서 걸식을 하시고, 정사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고 첫 대목을 읽으면, “이 행동만으로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해 마쳤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혼해는 끊임 없는 물음으로 학인의 의문을 내면으로 돌렸다. 강사보다는 선사적 면모였다. 대원 스님도 그 시절 좌선을 하던 중 급작스런 혼해의 물음에 “하늘땅이 무너지는” 체험을 했음을 밝혔다.

“인간이란 좀 더 나은 위치에 서면 우월감에 젖어 뽐내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속가에 처자식까지 둬 손가락질 받는 처지였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노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고우는 “그런데도 그가 처자식을 뒀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해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같았으면 그런 분별심은 놓고 그 분을 모시고 공부를 제대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흙 속의 연꽃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혼해의 강설이 맴돌던 상주 남장사 일주문 밖 노음산을 지나 속세인 상주 시내로 접어드나 노음산의 그 하늘 그대로 아닌가.

 

일우 선사

일우 선사의 유일한 상좌 정원 스님이 25년째 은거 중인 천안 태화산 평심사에서 스승을 회고하고 있다.

세상 모르게 설파한 불법… 무게가 삼천근

<깨달음의 자리> 마지막 편 점을 찍으러 충남 천안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승가에서 ‘엉덩이에 뿔난 소’처럼 괴팍스런 스님을 불러 괴각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괴각 정원 스님(53)을 만나러, 그것도 불청객으로 가는 때문이다.

정원은 충남 천안 광덕면 매당리 태화산에 25년째 홀로 은거하며, 선종의 결정판인 <벽암록>과 불법의 ‘현묘한 도리’를 밝힌 글을 모은 <현구집>, <태화당 수세록>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그가 쓴 책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입소문만이 선객들 사이에 나도는 은둔의 수행자다.

그 정원은 일우 선사(1918~1989)에게 출가한 유일한 상좌다. 일우는 선승들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방장이나 조실은 커녕 주지 살이 한 번 한 적이 없고, 절 한 칸, 책 한 권, 법문 한 자 남긴 게 없다. 오직 그를 만났던 이들에게 소리 없이 불법의 인을 심어놓았을 뿐이다. 고교 시절 일우를 만나 발심하게 된 씨앗들이 바로 일년 내내 산문을 철폐하고 정진하는 조계종 특별종립선원 봉암사 선원장 정광 스님(63), 20여 년째 지리산 고지 상무주암에서 홀로 정진 중인 현기 스님(63), 그리고 정원 스님 등이다.

 

절 한칸·책 한권 안남긴 채… 조용히 입으로만 불법 설파
석달간 한숨 안자고 책 독파… 열반 땐 “할말 없다” 입 ‘꾹’

 

상무주암의 현기 스님은 일우에 대해 묻자 “그 분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평생 남 모르게 살다 가신 분이니, 그렇게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학식이었다고 할만함에도 열반 때 열반송을 묻는 이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입을 다문 일우였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정원도 그와 인연이 있는 선승을 통해 연락을 취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소식만을 전해주었다. 그렇지만 뜻이 있으니 길을 갈 밖에. 태화산의 한 골짜기로 접어들어 끝까지 오르니, 세속과는 다른 별천지다. 두레박처럼 둘러싼 산 가운데 아담한 대웅전과 서재와 잔디언덕과 연못이 한 폭의 그림이다. 평심사다.

“난 우리 스님(일우)하곤 달라. 말 귀도 못 알아듣는 놈들한테 말은 해서 뭐해” 그의 첫마디였다. 그를 종종 찾던 한 여신자가 “남편 사업이 부도나게 생겼는데, 어쩌면 좋으냐”는 물음에 “망할 것은 빨리 망해야지!”라고 했다는 정원에게 어찌 세간의 대접을 원할 것인가.

그의 불 같은 성정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정원이 일우를 만난 것은 18살 때였다. 불법을 알게 된 그가 도를 찾으러 노심초사하자 먼 친척이 일우를 찾아가 볼 것을 권했다. 일우는 부산 구포에서 다 쓰러져가는 초가의 방 한 칸에 머물고 있었다.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일우는 속리산 법주사 지산 스님에게 출가해 옛 고승들의 선어록을 파고 들었다. 일우는 않아만 있는 것(좌선)을 병신 짓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석 달 간 아예 한 숨도 자지 않고 책을 볼만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진력과 집중력을 지녔다.

일찍이 공부에 힘을 얻은 일우는 그 뒤부터는 산승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속인도 아니었다. 그는 젊은 비구니와 살림을 차려 그처럼 세간의 초가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돈을 줘도 쓸 줄 모를 만큼 불법 외엔 세속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비구니에서 환속한 보살이 그 집에서 하숙을 쳐서 살림을 도맡았다. 일우는 세속에 나오기 전 절에 살면서도 출가 승려가 시줏밥을 얻어먹기 위해선 해야 할 기본적인 염불조차 못해 탁발 나가 밥도 얻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머리도, 수염도, 손톱도 깍지않아, 답답한 보살과 제자들이 깎곤 했다. 그는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씻지 않으면 때가 끼어 답답해서 어찌 사느냐”고 물으면 일우는 “먼지는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있던 제자도 도망갈 법한 그런 일우에 대해 정원은 한 번도 (스승으로서) 의심해 본적이 없고, 그를 보고서야 이 세상에도 ‘현묘한 도가 실재함’을 직감했다고 하니, 숙연이 아닐 수 없다.

일우의 목소리는 호랑이가 포효하듯 우렁차 100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부 선승들만이 그를 알아보고, 통도사, 송광사 등 대찰로 그를 초청해 법을 들었고, 그의 초가를 찾아 법을 물었다. 당시 그와 당대에 알려진 고승들의 법문을 번갈아 들은 선승들은 양쪽을 유치원생과 대학원생 차이 정도로 비교하곤 했다.

그는 누군가 불법을 들으러 오면 하루고 이틀이고, 아예 잠도 자지 않고 법을 설했다. 그러면서도 불법을 벗어난 사담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원이 사는 이 곳에 일우가 열반 전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비둘기호를 타고 10시간 동안 온 일우는 밤 새 한 잠도 안 자고 정원에게 법을 설한 뒤 아침에 공양(식사)을 들고 다시 역을 향해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한 번 말문이 터지니 오줌 쌀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가 쥐어준 무려 4천여 쪽에 이르는 저서 석 질을 짊어지고, 다음에 또 만날 기약까지 하고 산문을 나서니 산문을 오를 때 ‘무거웠던 마음’은 어디로 간 것인가. 천근 같던 마음들도 일우의 몸에 붙은 한갓 먼지였던가.

'수련단체&요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念處經에 나타난 수행법   (0) 2012.11.20
太乙金華宗旨  (0) 2012.11.16
壇經의 北宗批判   (0) 2012.11.11
業處(kamma h na) 修行에 대한 연구  (0) 2012.11.03
쿤달리니 요가(Kundalini Yoga)  (0) 201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