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壇經의 北宗批判

醉月 2012. 11. 11. 08:05

壇經의 北宗批判

("The Platform S tra" & its Critical View on the Northern Ch'an Sect.) 金榮郁 (Kim, Young Wook)


차례

 

1. 서론
2. 先定發慧의 批判
3. 坐禪의 批判
   1) 비판의 과제
   2) {維摩經}의 宴坐비판에 대한 諸見解
   3) {壇經}의 坐禪義
4. 결론

 

 

1. 서론
{단경}의 선법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주요한 사상들은 북종의 선법에 대한 비판의 입장이 불가결한 배경이 되고 있다.
이 비판은 주로 坐禪과 入定의 방편을 중시하는 靜態的 선법에 대한 것이다.
{단경}에서 북종은 그 대표자로서
神秀를 거론하지만 사실은 종래의 선법 전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하여 남종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선법을 표면화하려는 의도로 제시되는 것이다.

 

{단경}이 표방하는 頓悟見性의 사상에도 이러한 비판이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단경}의 북종비판은 定慧義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定慧義는 頓悟見性의 본질적인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비판은 올바른 定慧義의 실현 즉, 頓悟見性과 연관된다.
{단경}을 통해 본 慧能의 정혜사상은 定慧의 雙修·一體不二·等持로 요약된다.
定과 慧 양자의 불가분성 및 평등성에
기반을 둠에도 불구하고, 定보다 慧의 作用(慧用)에 중점을 두는 것이 {단경}의 사상적 특징이다.
좌선비판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 慧用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좌선비판은
주로 入定의 폐단에 집중되어 있다.
북종 신수의 대표적 선법이라 할 수 있는 心不起, 看心看淨 등이 入定에 편중되어
慧用을 상실한 좌선법으로 제시되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북종비판의 선봉장인 神會의 비판취지도
이와 같다. 그가 북종의 선법으로 요약한 '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의 4구는 모두 定慧雙修에 근거하여 좌선 중심의 入定의 폐단을 비판한 것이다.

 

{단경}의 비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定慧의 선후관계에 입각한 先定發慧나 先慧發定의 선법에 대한 것이다.
특히 定을 우선으로 수행한 이후에 慧를 발휘하는 先定發慧의 방법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된다.
북종신수의 從定發慧의 방편이 이 비판의 주된 대상이다.
이 사상은 여타의 선법과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갖으면서 {단경}의 비판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入定에 치우친 坐禪에 대한 비판이다.

先定發慧와 坐禪의 비판이
지향하는 목적은 동일하다.
모두 구체적인 사물경계와 단절된
入定과 坐禪으로부터 벗어나 그것과 적극적으로 교섭되는 慧用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事에 卽하여 본질을 현시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雜錄}에서 제시된 達磨禪으로부터의 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 글은 {단경}의 사상적 실마리를
이 두 가지 비판을 통하여 그 타당성과 한계를 중심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다.
북종비판을 개시한 神會나 {단경}은
坐禪을 비판하는 전거로 {維摩經}의 宴坐批判을 들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事의 경계에 응접해 가는 것을 중시하는 {단경}의 관점에 매우 적절한 내용으로 수용된다. 따라서, {단경}의 좌선비판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宴坐批判에 대한 諸家의 견해도 참고하기로 한다.

 

2. 先定發慧의 批判
定慧雙修의 선법은 달마에서부터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혜능 계열의 禪脈에서 제기되는 定慧思想은 入定의 폐단과 先定發慧의 비판을 통하여 慧用 중심으로 선법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다르다. 즉, 修定에 치우선 선법을 定慧一體에 근거하여 타파하고 慧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던 배경에서 이 선법은 전면에 드러난다. 이것은 {단경}의 근본사상인 見性의 핵심적인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나의 이 法門은 定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무엇보다 어리석게 定慧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定慧는 一體요 不二다. 定은 慧의 體이며, 慧는 定의 用이다. 慧가 발휘되고 있을 때 定은 慧 속에 있고, 定에 들어 있을 때 慧는 定 속에 있다. 선지식이여, 이 의미는 定慧가 동등하다는 것이다. 道를 배우는 사람은 作意하여 定에 든 다음에 慧가 발휘된다거나[先定發慧] 慧가 먼저 있고서 定을 발한다거나[先慧發定] 하여 定慧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 견해를 조작하지 않는 것이니 慧와 定이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과 입이 모두 善하면 내외가 한 가지가 되어 定慧가 동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 깨달아 수행할 것이며, 말싸움에 휘말리지 말라. 만약 先後의 문제로 다투면 승부가 끊이지 않아서 法과 我의 집착을 생하게 되고, 四相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상에서 定慧의 관계는 一體不二, 體用相卽, 無先後의 同等性 등으로 요약되고, 그것이 先定發慧와 先慧發定의 방법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坐禪 중심의 入定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단경}의 관점에서 보면 先定發慧가 주된 비판대상이 된다. 이 비판에 준하여 보면 당시의 선법이 定慧에 근거한다 해도 그 내적 맥락을 보면 定을 우선으로 하는 '先定發慧'의 방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즉, 慧의 발휘(發慧)가 定을 선결 조건으로 한다는 것[先定]이 비판의 대상이다. {단경}에서 주장하는 漸修와 頓悟의 차이도 이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先定은 東山法門 이래의 전총인 看心, 攝心, 守心 등의 다양한 漸修法을 요구한다. {단경}에서 견성이란 定慧一體의 체험이다. 이것은 깨달음이란 先定을 조건으로 하지 않으며, 定慧의 無先後·一體로서 定慧가 동시에 구비되는 頓悟見性을 가리킨다.

 

{단경}에서 창안한 혜능과 신수의 유명한 傳法偈도 단지 남종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한정해서 보아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偈는 南北 兩宗의 선법을 남종의 입장에서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신수의 '時時勤拂拭'은 妄念을 제거하는 漸修와 先定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妄念의 '不起'를 지향하는 坐禪修行의 요점을 가리킨다. 즉, 그 부분적 효용은 인정하면서도 아직 定慧가 완비된 온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로 본 것이다. 따라서, {단경}은 이 心偈를 五祖의 입을 통하여 비판한다.

 

宗密도 妄念은 본래 空이고, 心性은 본래 청정하다는 점에 근거하여 신수의 이 게는 깨달음과 수행 양면에서 모두 불완전한 것으로 비판한다.

이에 대하여 혜능의 偈는 온전한 깨달음으로서 見性의 경지를 드러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에 神秀의 '莫使有塵埃'에 대하여 '何處有塵埃'라는 頓의 방식으로 대조시킨 것이다.

 

'佛性常淸淨'이나 '本來無一物'은 心性은 본래 청정하고, 妄念의 본래성도 空이기 때문에 時時로 修行할 대상이 없다는 것으로 {涅槃經}의 佛性論과 {般若經}의 空觀에 입각한 頓悟의 방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수도 {大乘無生方便門}에서 {단경}과 같이 佛性論과 般若空觀을 근거로 '無一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傳法偈의 비교에 의한 평가가 치우쳐 있는 듯이 보인다.
佛은 무엇인가? 佛心은 淸淨하여 有·無를 떠난다[離有離無]. 身·心에 대한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不起], 항상 眞心을 지킨다. 眞如란 무엇인가? 心이 不起하면 心眞如요, 色이 不起하면 色眞如다. 心眞如이므로 心解脫이요, 色眞如이므로 色解脫이며, 心·色을 모두 떠나면 곧 無一物의 경계가 열리니 이것이 大菩提樹다.

 

즉, 신수 역시 심성이 청정함과 有·無 양변을 떠나는 空義에 근거하여 無一物의 결과를 도출한다. 그러나 여기에 도달하는 과정이 {단경}과 다르다. 신수는 실천적 지표로서 '離'와 '不起' 그리고 '守眞心'의 방법을 통하여 이 경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경}에서 '時時勤拂'이라 표현하는 것과 동일시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단경}에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이 心不起 등의 先定을 염두에 둔 수행이다. {단경}은 '本來' 無一物의 空에 근거하여 방편의 매개가 없이 定慧一體를 구현하는 頓悟의 맥락인 것이다. 반면에 신수의 선법은 先定發慧의 방법으로서 不起, 守心 등은 入定과 관련된 수행을 우선한다. {단경}의 頓悟 선법은 定慧에 있어서 先後 관계를 논할 수 없다는 無先後·等의 입장이다.

 

{傳燈錄}에 나오는 혜능과 신회의 문답에도 定慧等·雙修를 기본으로 하고 정혜의 선후를 구분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이것을 지시하고 있다.
문 : 定이 먼저 있고 慧가 후에 있다거나, 慧가 먼저 있고 定이 후에 있다고 하는데, 定과 慧의 선후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바른 것입니까?
답 : 항상 청정심을 일으키는 것은 定 가운데 있으면서 慧가 있음이며, 경계 속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無心]은 慧 가운데 있으면서 定이 있음이다. 定慧는 동등하여 앞서는 것이 없으니 동등하게 함께 닦으면[雙修] 자연히 마음이 바르게 된다.
항상 경계 속에서 응용·발휘되면서도 그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정혜일체의 온전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신회는 이러한 기본적 논조에 의하여 先定發慧의 방법을 비판한다.

 

즉, 신회는 {南陽和尙問答雜徵義}에서 修定이 우선적 조건으로 되는 先須의 사항이라거나, 入定 이후에 定으로 인하여 慧를 발휘하는[因定發慧, 因內外照] 좌선 중심의 선법을 비판한다. 이 맥락의 修定은 見性의 길이 아니라 妄心이라 하고, 역시 {維摩經}의 宴坐비판을 전거로 들고 있다.
凝心入定, 起心外照의 비판도 이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다. 신회의 定慧사상은 修定 중심의 좌선비판을 통하여 이루어진 점에서 {단경}의 그것과 발상이 같은 것이다. 그 근거는 定慧一體, 定慧雙修이며, 상용의 비판은 慧用 중심의 선법을 전개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神秀의 定慧사상의 요점은 從定發慧이며, 從定보다 發慧가 중심이 된다.
心이 不動함이 定이요, 智요, 理다. 耳根이 不動함은 色, 事, 慧다. 이 不動은 定으로부터 慧를 발하는(從定發慧) 방편이며, 慧門을 여는 것이다. 心不動은 定의 뜻에 해당되고. 耳根으로 대표되는 六根의 감각기관이 不動한 것은 구체적인 事에 접하는 慧에 해당된다. 여기서 신수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心의 不動을 통하여 六根의 不動이라는 慧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즉, 六根이 事에 접하면서도 染著되지 않는 것이 不動의 뜻이다.

 

定慧는 世間에서 발휘되지만 世間에 물들지 않는다……. 見聞覺知가 自在로이 작용하면서 대상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이 점으로 보면 그의 定慧사상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慧用을 발휘하는 發慧에 주안점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不動의 방편은 비단 慧를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正定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수의 방편문은 지혜의 작용을 핵심적 의미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방편을 얻음으로써 正定은 慧의 작용과 분리되지 않는 일체가 되며, 圓寂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국은 定慧一體로써 위대한 깨달음[大涅槃]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단경}에도 圓寂이란 慧用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體用이 함께 갖추어져 如如한 상태를 말한다. 즉, '定에 들어 있을 때 慧는 定 속에 있다'는 {단경}의 定이 뜻하는 것은 圓寂과 통한다. 모든 상황에 응용되어도 집착과 걸림이 없는 慧用의 발휘는 圓寂의 定과 일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고 空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을 應用하는 데 걸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動·靜이나 凡·聖 등 (二相)에 집착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能·所가 모두 끊어져 性과 相이 如如하면 定하지 않을 때가 없다.
마음이 二相의 경계에서 집착없이 응용되면서도 항상 定을 유지하는 것이 圓寂의 바른 뜻이며, 空性의 실현을 가리킨다. 대상경계에서 慧의 발휘를 강조하는 定慧사상은 혜능과 신수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수의 '從定發慧'와 {단경}에서 비판하는 '先定發慧' 중 '從定'과 '先定'이 일치하는 의미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경}의 先定發慧는 그 비판에 미루어 보면 定에 들었을 때, 즉 先定의 상태에서는 慧가 없어서 定과 慧를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수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수는 定에 들었을 때 慧가 없고, 定에서 빠져나와[出定] 비로소 見聞覺知의 慧를 발휘하는 二乘人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수의 '從定'은 慧에 앞서서 별개로 성립되는 의미를 가진 '先定'과 다르다.
신수는 從定發慧와 더불어 從慧發定을 말한다. 전자는 마음 안으로부터 밖의 경계로 향하는 것이며, 후자는 밖의 경계로부터 마음 안으로 향하는 방법상의 차이에 불과하며 각각 寂照, 照寂이 相卽되는 법문인 것이다. 寂과 照는 각각 照의 寂, 寂의 照라는 상보적 관계로서 定慧一體의 의미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신수의 定慧사상은 {단경}과 마찬가지로 定慧 무선후의 동등성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경}에서 先定發慧, 先慧發定으로 비판하는 것과 신수의 從定發慧, 從慧發定을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다.

 

남북 양종의 선사상을 통일한 것으로 평가되는 {頓悟要門}의 定慧義 중에는 신수의 從定發慧, 從慧發定과 일치하는 사상이 나온다.
문 : 定慧等學이란 무엇입니까?
답 : 定은 體요, 慧는 用이다. 定으로부터 慧를 일으키고[從定起慧], 慧로부터 定으로 되돌아 간다[從慧歸定]. 마치 물과 물결이 一體인 것과 같으니 前도 없고 後도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定慧等學이라 한다.
그 근거는 定慧等·一體·無前後의 {단경}을 따르고 있지만 북종 신수의 定慧사상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즉, 신수의 從定發慧와 대응되는 從定起慧, 從慧發定에 대응되는 從慧歸定의 사상이 모두 定慧 양자의 한편에 우선 권을 줄 수 없는 평등성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경}의 이 비판은 신수에 관한 한 온당하지 못하다 할 수 있다.

 

胡適은 남북 양종의 차이를 "북종은 定으로 말미암아 慧를 발하는 것[由定發慧]에 중점을 두고, 남종은 慧로써 定을 통일시키는 것[以慧攝定]에 중점을 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신수의 從定發慧와 {단경}의 慧用 사상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양자가 모두 이전의 선법에 비하여 慧를 중시하는 점에서 사상적 연계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경}에서 신수의 定慧사상을 先定發慧라고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종의 종지라 할 수 있는 頓敎에 따르기 때문이다. {단경}에는 신수가 사람들의 입에 혜능의 頓敎法이 오르는 것을 듣고 제자 志誠을 시켜 혜능의 견해를 살피고 오라는 기사가 나온다. {단경}에서는 戒定慧의 三學이 自性의 의미로 귀일된다는 점을 북종 신수와 구별되는 혜능의 선법으로 내세운다. 이 自性三學이 頓悟와 漸修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혜능대사가 지성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너의 禪師[신수]는 오직 戒定慧의 가르침만 전한다는데, 그 戒定慧의 가르침이 어떠한지 나에게 말해봐라." 지성이 답했다. "신수화상이 말하는 戒定慧는 다음과 같습니다. 諸惡莫作을 戒라 하고, 諸善奉行을 慧라 하며, 自淨其意를 定이라 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戒定慧라 하는 것이 그분이 설하는 것입니다. 화상의 소견은 어떠한지 듣고 싶습니다." 혜능화상이 답했다. "이 설은 불가사의하니 나의 소견과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깨달음에 더디고 빠름이 다른 것이다." 志誠이 혜능의 戒定慧에 대한 소견을 설하여 주기를 청했다. "心地에 의심이 없음이 自性戒요, 心地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自性定이요, 心地에 어리석음이 없음은 自性慧다. 너의 戒定慧는 小根諸人에게 권하는 것이며, 나의 戒定慧는 上人에게 권하는 것이다. 自性을 깨달으면 戒定慧도 세우지 않는다." "대사께서 세우지 않는다[不立]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自性이 無非·無亂·無癡하여 念念이 般若로 관조하고 法相을 떠나 있으니 무엇을 세우겠는가. 自性이 頓修되어 있어서 漸次로 닦을 것이 없음이 세우지 않는 이유다."

 

혜능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戒定慧 삼학은 心地·自性의 뜻에 귀일된다. 그 때문에 삼학은 自性戒, 自性定, 自性慧로 표현된다. 둘째, 삼학은 자성에 대한 깨달음인 견성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셋째, 따라서 견성에서 자성의 수행은 완료된 것[頓修]이므로 삼학은 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견성 이외에 삼학과 같은 수행은 점차의 단계적 수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戒定慧는 각각 자성의 無非·無亂·無癡를 가리킨다. 이 세 가지 自性의 상태는 見性의 결과로 주어지는 의미다. 見性은 그 의미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삼학을 별도로 정립하여 수행하지 않는다. 삼학의 지침이 견성 하나의 수행에 해소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頓悟의 의미다. 이에 비하여 신수의 삼학은 諸惡不作 등 구체적인 수행의 조목으로 깨달음이 느린 漸修의 방법이다. 그러나 혜능의 삼학에서 無非·無亂·無癡는 수행의 조목이 아니라 수행의 완성에서 드러나는 결과적 의미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북종 신수의 삼학은 그 자체가 깨달음[悟]에 이르기 위한 실제적인 修行의 점차적 단계요 수단이지만[漸修] 혜능의 삼학은 견성이라는 결과에 대한 해석적 의미 이상은 없는 것이다. 頓悟 見性의 맥락에서 삼학은 自性을 완성시키는 원인으로서의 수행이 아니라 완성된 自性에 이차적으로 부가된 세 가지 의미다. 즉, 戒定慧가 독립적 가치를 갖지 않고, 自性戒, 自性定, 自性慧라는 自性의 뜻으로 귀착되어 버린다.따라서, 自性이 이 결과를 구현하기 위하여 삼학의 수행을 별도로 세우지 않고, 見性이라는 한 가지 방법에 悟와 修를 동시에 완성시키는 것[頓悟頓修]이다. 이것이 自性頓修 및 三學의 不立에 내포된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頓悟見性의 宗旨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인 한에서는 인정되지만 신수가 주장하는 三學觀의 본질이 {단경}에서 표현하는 것과 일치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수는 戒에 대하여 '諸惡莫作'이 아니라 佛性을 戒의 근거로 하여 心不起가 곧 持戒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菩薩戒는 마음을 지키는 戒[持心戒]요, 佛性으로 戒를 삼는다. 본성에서 心이 언 듯이 일어나면 佛性을 어기는 것이며, 菩薩戒를 깨뜨리는 것이다. 佛性을 지켜서 心이 不起하면 佛性을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 菩薩戒를 지키는 것이다.

 

즉, 불성에 따르는 것이 戒의 참된 뜻이며 그것은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불성을 지키는 心不起 내지 守心을 말한다. 頓悟見性의 뜻으로 戒를 푸는 {단경}과 心不起로 연결시키는 신수의 사고에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自性과 佛性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대전제로 한다는 점과 그들 선법의 궁극적 의미인 見性과 心不起에 귀착시킨다는 점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4조 도신의 三學觀에서 自性三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一切의 戒門·定門·慧門과 神通變化는 모두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니 그대의 心을 떠나지 않는다.
즉, [諸佛心第一]을 근본으로 하는 4조 도신이 三學을 心(自性)에 귀착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破相論}을 통해 본 神秀의 三學觀은 {단경}에서 '諸惡莫作' 등으로 평한 내용과 흡사하다. 이것이 신수의 북종이 보통 주장했던 三學의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佛性을 戒로 하는 戒로 하는 心不起, 守心의 持戒와 {破相論}의 三學은 修定 또는 漸修의 先定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頓悟見性의 관점에서 先定發慧로 비판된 것이다.

 

{단경}의 先定發慧의 비판은 신수를 그 대상으로 할 경우 신수의 사상 전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漸修的 측면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先定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데 연유한다. 看心 등의 修定에 치중하는 선법이 그것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특히, 心不起를 해탈로 삼는 북종의 방법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다. 또한, 자성과 불성을 근거로 하는 유사점에 비추어 볼 때 북종비판의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혜능이 자신의 定慧思想을 북종과 구별하여 先定發慧를 비판하는 근거는 頓悟見性에 의한 것이다. 頓悟見性은 그 자체에 自性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수행의 의미까지 구비하고 있다. 여타의 것을 매개의 수단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自性을 근거로 한 悟와 修라는 구조에서 頓悟頓]修의 개념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定慧를 기본적 의의로 하는 自性論이 {단경}의 頓悟見性의 선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단경}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 보조국사 知訥이다.
온갖 방법이 定慧에 비교될 만한 것이 없으니 그 강요를 말하자면 自性에는 體와 用의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전에 말한 바의 空寂·虛知가 그것이다. 定은 體요, 慧는 用이다. 體에 卽한 用이므로 慧는 定을 떠나지 않고, 用에 卽한 體이므로 定은 慧를 떠나지 않는다. 定이 곧 慧이므로 (空)寂하면서 항상 知를 갖추고 있고, 慧가 곧 定이므로 知의 작용이 있으면서도 항상 (空)寂한 것이다.
즉, 그는 定慧를 자성상의 體·用 또는 寂·知라는 두 가지 의미로 파악한다. 따라서, 정혜의 일체·相卽을 '寂而常知', '知而常寂'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라 혜능이 지적한 自性定, 自性慧의 깨달음을 寂·知의 자유로운 운용[任運]이라 하고 이러한 전체구조를 頓의 방법으로 결론짓고 있다.

 

曹溪 혜능이 말했듯이 心地가 無亂함은 自性定요, 心地가 無癡함은 自性慧다. 만약 이와 같이 깨달으면 寂과 知를 任運하고 遮와 炤가 둘이 아니게 되는 것이니[無二], 이것이 곧 頓門이다.

 

달마의 卽事에서 동산법문의 任運으로 이어지는 초기선종의 慧用사상을 자성의 定慧를 깨닫는 頓悟로 이해하는 것이다. 任運은 자성상의 定慧變修, 頓悟와 분리할 수 없는 無二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修心訣}은 頓悟漸修를 기본적 입장으로 하지만 定慧義에 따라 頓悟와 漸修의 뜻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自性定慧와 隨相定慧를 제시한다. 自性定慧는 寂과 知를 任運하는 頓門으로 분류하고, 隨相定慧는 攝心과 觀空 등의 방법을 통하여 入定(入無爲)하는 것으로 근기가 떨어지는 자[劣機]들이 행하는 漸門으로 분류한다.

 

지눌의 自性定慧門은 혜능의 自性定, 自性慧의 사상이 갖는 頓悟의 맥락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눌이 隨相定慧를 劣機가 행하는 漸門이라 한 것은 혜능이 자성의 근거를 떠나서 다양한 수행의 조목을 펼치는 방법을 小根諸人에게 권하는 것이라 한 것과 같다. 이 隨相定慧에서 攝心, 觀空 등의 入定을 중심으로 하는 방법이 혜능의 先定發慧의 비판에서 定을 우선으로 하는 先定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修心訣}에서는 이 방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頓漸을 조화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상에서 {단경}의 先定發慧 비판은 自性定, 自性慧를 근거로 하는 頓悟의 관점이라는 사실이 보인다. 또한, 이 비판 자체는 북종 신수의 정혜사상에 전적으로 합당한 것은 아니며, 신수의 선법에 빈번하게 출현하는 心不起, 看心 등에 대한 공격을 통하여 頓悟와 慧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心不起는 神會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神會는 북종의 맥락에서 쓰이는 것을 부정하고 定慧一體의 입장에서 慧用을 강조하는 점으로 자신의 禪法을 특징지우는 것이다. {단경}에서는 心不起보다 '起念'의 뜻에 초점을 둔다. 이 점은 神會와 반대되는 입장은 아니지만 慧用을 적극적으로 사상의 핵심으로 수용함으로써 {단경}의 새로운 면모를 개진시키는 효과를 초래한다.

流布本 {단경}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여 臥輪의 '心不起'에 대한 혜능의 '心數起'의 게를 창안해 냈다.
어떤 승이 와륜선사의 게를 들어 말했다. "와륜은 기량이 있어 능히 온갖 생각을 다 끊었네. 경계를 대하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心不起] 깨달음이 나날이 자라네." 혜능이 그것을 듣고, 이 게는 心地를 밝히지 못했으니 이것에 의하여 행하면 繫 을 덧붙이게 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하여 게 하나를 제시했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 온갖 생각을 끊지 못했네.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자주 일어나니[心數起] 깨달음이 어찌 자라랴."

 

즉, 경계를 대하고 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心不起를 가지고는 부족하며, 적극적으로 경계 속에서 心을 활용해 나가는 心數起가 깨달음의 완성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心不起는 自性 자체에 한정된 修定의 방법이며 漸修로 인식된다. 비록 그것이 경계와 교섭되는 전단계가 된다하더라도 先定發慧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혜능의 心數起는 그러한 단계적 수행에 의하지 않고 자성의 본질이 곧바로 경계에 발휘되는 頓悟의 방식인 것이다.

'不起心'에 대하여 '起心'이란 용어를 직접 사용함으로써 用을 부각시키는 사상이 {宗鏡錄} 40권에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은 入定 상태에서의 '不起心'에 고착되는 禪法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如來는 비록 열반에 들더라도 중생의 機緣에 따라 應身·化身의 두가지 몸을 나타내어 그들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니 이것이 '다시 마음을 일으킴[更起心]'의 뜻이다. 따라서 중생이 없어지지 않으면 應·化의 用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무여열반에 들더라도 공덕의 선한 근본은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二乘이 減定에 들어 '다시 마음을 일으킴'이 없는 탓으로 자비를 거의 발휘하지 못하여 중생을 교화하지 않는데 반해 佛은 무여열반에 들더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更起心]' 분이시다.

 

'更起心'은 心體에 근거한 心用을 말하며, 起心의 用을 가지고 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마음을 일으킴'의 다시[更]는 妄念의 발생이 아니며, 열반과 定 또는 法身에 근거를 둔 '起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보조어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心不起 등의 修定을 위주로 한 선뻐이 비판되는 근본적 이유는 경계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이 없기 때문이다. {단경}의 頓悟禪法은 단지 자성의 으미로서 定慧의 평등성을 깨닫는 것 뿐만이 아니고, 대상경계 속에서 그것을 활용하는 慧用에도 많은 관심을 두는 사상이다. 先定發慧의 비판은 이 頓悟와 慧用의 선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3. 坐禪의 批判
1) 비판의 과제
{단경}이 좌선의 비판을 통하여 제시하는 견해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단경}의 慧用사상은 이것을 토대로 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좌선의 비판은 不起, 不動의 선법에 대한 것이 주축이며, 주로 북종 신수의 중심선법인 心不起와 看心法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단경}에서도 心念의 不起와 見本性, 不動 등을 기초로 하여 좌선을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心不起와 不動에 관한 양자의 맥락이 어떻게 다른지 규명해야 한다. {단경}의 관점에서 볼 때 북종의 心不起는 慧가 없는 定이며, 좌선하여 心의 작용을 단절시키고 空心을 고수하는 無記空의 폐단을 초래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이 비판은 선종사적인 전환의 계기가 되는 {단경}의 독특한 禪法으로 정착된 것일 뿐만 아니라 경전에 대한 새롭고 본질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특히 {유마경}의 영향은 크다. 좌선에 대한 {단경}의 기본적 입장은 {유마경}의 좌선비판을 전거로 하는 것이다. {단경}과 {신회어록}에서는 모두 舍利弗의 좌선에 대하여 維摩詰이 질책하는 {유마경}의 내용을 인증하는 것으로써 좌선비판의 근거로 삼는다.
만약 좌선하고 不動의 상태로 있는 것이 옳다면, 維摩詰이 舍利弗의 숲 속 宴坐를 질책한 것은 합당하지 않은 처사였을 것이다. 선지식이여, 또한 다음과 같이 좌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마음과 청정함을 看하고[看心看淨], 마음이 움직이지도 일어나지도 않아서[不動不起], 이것으로 공을 삼는다. 어리석은 이는 깨닫지 못하고, 이 말에 집착하여 그릇된 견해를 이룬다.

 

{단경}의 이 구절은 看心看淨의 좌선법에 대한 비판이 주제가 된다. 이것이 북종선법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경}의 비판은 定體에 경도된 入定·修定 중심의 좌선법을 탈피하여 慧用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의도를 가진 것이다. {단경}의 定慧思想과 先定發慧의 비판, 그리고 坐禪의 비판은 구조적으로 연관된 것이다.

앉는다[坐]는 형식적 틀로부터 벗어나 禪定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단경}의 입장이다.
薛簡이 물었다. 京城의 禪德들이 모두 말하기를 "道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坐禪을 통하여 定을 익혀야 한다. 禪定에 의하지 않고 解脫을 얻은 자는 아직 없었다고 하나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大師께서 설하는 法은 무엇입니까?" 大師가 답했다. "道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지 어찌 앉음[坐]에 있겠는가! …… 無生無滅이 如來淨禪이요, 諸法이 空寂한 것은 如來淸淨禪이요, 諸法이 空寂한 것은 如來淸淨坐다. 究竟에서는 證함도 없거늘 하물며 坐가 있겠는가!"

 

우선 좌선의 習定을 비판대상으로 제기한다. 좌선의 不動性에 집착하여 心體의 정적인 관조를 위주로 하는 종래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하여 '無生無滅', '諸法空寂'이라는 般若空觀의 궁극적인 입장에서 좌선의 뜻을 풀이한다. 이 사고방식은 禪의 본래적 경지가 다양한 경계 속에 참여하여 慧用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定體의 不動을 잃지 않는 데 있다는 定慧의 一體不而사상이 배경이 된다. 즉, 定에 들었을 때 慧가 없는 좌선법은 無記空으로 타락하게 된다.

 

내가 空을 설하는 것을 듣고 바로 空에 집착하지 말라. 무엇보다 空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비우는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며 앉아 있는 것[空心靜坐]은 無記空에 집착하는 것이다.
空心靜坐가 비판되는 이유는 空에 집착하여 卽事의 慧用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慧用이 결여된 無記空이며 거짓 禪定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결국 心不起에 대한 집착과 같은 것으로 대상경계와 絶緣을 통하여 空心을 유지하는 것이다. 修定의 좌선에 집착하여 마음을 단순히 비우기만 하고 사고와 분별을 단절시키는 空心의 병은 {단경}이 빈번하게 내세우는 좌선비판의 항목이다.

 

{단경}은 慧用이 없이 본체의 관조를 일삼는 좌선의 禪의 본령이 아니며, 병폐라는 점을 지적한다. 종보본 {단경}에는 신수의 제자 지성과 혜능의 문답을 통하여 북종의 좌선법을 비판하고 있다.
문 : 너의 스승(신수)은 어떻게 대중을 가르치는가?
답 : 항상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조하고[住心觀靜], 눕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있을 것을 가르치며 대중을 깨우칩니다. 혜능이 말했다. '住心觀靜은 병이며, 禪이 아니다. 오랫동안 앉아 몸을 구속하는 것이 근본적인 도리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 내용은 신회가 북종에 대하여 住心看淨이라 비판하는 것과 연관된다. {단경}에서 이러한 禪風에 반기를 든 것은 定體보다 慧用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선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까닭이다. 돈황본 {단경}에는 이 문답이 보이지 않으며, 종보본에 추가된 것으로 역시 북종비판과 더불어 慧用의 의미가 강화되는 추세를 반영한다.

 

{단경}의 좌선비판은 명백하게 북종의 看心, 看淨 등 看의 방법에 대한 비판을 기조로 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선지식이여, 이 법문 가운데 坐禪이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음[不著心]이며, 마음의 청정함에도 집착하지 않고[不著淨], 마음의 움직임도 말하지 않는 것[不言動]이다. 마음을 보는 것[看心]에 대하여 말하자면, 마음이란 원래 망령된 것이고, 망령된 것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므로 볼 대상이 없는 것[無所看]이다. 마음의 청정함을 보는 것[看淨]에 대하여 말하자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지만 망념 때문에 진여의 성품이 가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망념을 떠나면 본성은 청정한 것인데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일어나 청정함을 보는 것[心起看淨]이니 도리어 淨과 妄이 생겨난다. (본래 청정하므로) 妄]이 있을 곳이 없다. 그러므로 看하는 자의 看하는 행위는 妄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淨은 形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淨의 相을 세워 이것을 공부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짓는 자는 자신의 본성을 막아 도리어 淨에 속박[淨續] 당한다. 不動에 대하여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過患이 그 본성에서는 不動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자신의 몸은 不動하지만 입을 열면 사람들의 시비를 말하니 (不動의) 道에 위배된다. 看心看淨의 선법은 도리어 道를 방해하는 인연인 것이다.

 

看心, 看淨, 動에 대하여 不著淨, 不言動을 좌선의 뜻으로 제시한다. 첫째, 看의 대상으로서 所看의 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고 대상화 되지 않는 것을 대상화하는 방식은 일종의 착각이다. 따라서 心을 看하는 것은 心이라는 대상을 조작해낸 집착의 결과다. 不著心은 이러한 집착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본래 형상이 없는 청정한 心에 대하여 청정한 相을 조작해서 그것을 보는 행위[心起看淨]가 妄이다. 즉, 看은 망상을 일으켜 淸淨相을 억지로 만드는 起心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起心하여 看하면 곧 청정상에 속박되는 것이다. 즉, 淨을 看하는 것은 淨과 妄의 二相을 산출하는 것으로 淨에 대한 집착이 되고 결국은 속박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不著淨으로 그 속박을 푼다. 말하자면 看心看淨의 좌선법은 著心著淨으로 귀결된다. 셋째, 좌선 상태에서 몸은 不動의 坐를 지킬지라도 是非 등의 경계에 마음이 動하는 것에 대하여 不言動이 치유법이 된다.

 

이상은 북종의 좌선법이 起心의 조작에 의한 看心看淨이라 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신수는 {大乘無生方便門}에서 起心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起心하여 思議하면 속박이며, 解脫할 수 없다. 起心하여 思議하지 않으면 속박을 떠나니 곧 해탈할 수 있다. 心에 思가 없으면 心如요, 智다. 입에 議가 없으면 色如요, 慧다. 이것을 不可思議智慧解脫法門이라 한다.
{단경}과 비교하면, 思는 心起看淨하여 相을 조작하는 것과 상응하며, 議는 是非 등의 경계에 집착하여 말하는 것과 상응한다. 起心을 속박의 원인으로 보는 취지는 같다. 思가 相에 대한 집착을 말하고, 起心으로 발생한다고 보는 점도 동일하다.
起心하여 思議하면 往來의 相이 있고, 起心하여 思議하지 않으면 往來의 相이 없다.

 

往來의 二相이 없다는 것은 속박이 없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단경}에서 淸淨한 心의 본질을 깨닫는 방법은 善惡 등의 일체의 二相을 思量하지 않는 것이라 한 주장과 같은 종류의 사상이다. 신수는 起心을 부정하고 心不起로 돌아가는 근거를 {단경}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경}과 북종의 차이점은 있다. 定에 대하여 {단경}은
밖으로 相에 집착하면 안으로 心이 어지러워진다. 밖으로 相을 떠나면 心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本性은 그 자체로 淨하고 定한 것이다. 다만 경계를 보고[見] 경계를 사량[量]하기 때문에 어지러워진다. 만약 여러 경계를 보고도 心이 어지러워지지 않으면 이것이 참된 定이다. 라고 한다. 즉, 참된 定은 다만 思하지 않아서 相에 대한 집착을 떠난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경계와 교섭관계를 말하며, 북종과 분기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二相과 연결되는 思에 대신하여 경계와 교섭을 전제로 한 見이 참된 定의 방버으로 출현한다. {단경}의 見은 신수의 不見, 不起, 看과 대조된다. 신수의 不見은 不起, 離念, 看心과 동일한 선법으로 般若空의 修定的 실천의 특징을 보여준다. 반면에 見은 경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마음을 쓰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見이란 見性의 見이며, 북종의 看과 구별된다. 그 차이는 見은 動的인 상황을 중시하고, 看은 靜的인 관조에 주력하는 데 있다.

 

思量은 用心하는 데 맞지 않으니 見性한 사람은 言下에 바로 볼[見] 것이다. 이와 같은 자라면, 칼을 휘두르며 전장에 나가더라도 또한 볼[見] 수 있다.
다급하게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깨닫는 것이 見性人의 自在한 用心이다. 남종선의 특징으로 내세우는 見性은 구체적인 경계의 動的 상황에 응용되는 것을 중시한다. 見無念을 주장하는 신회의 30년 공부가 오로지 '見' 一字에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見은 북종의 看과 의미를 달리하는 남종의 개성적 선법을 함축하는 것이다. {단경}의 心念不起는 결국 慧用을 강조하는 見性 및 無念으로 해석되고, 신회의 선법에서 心不起는 無念을 말한다. 신회가 독창적으로 제기하는 '知'도 見으로 이해되며, 見은 定慧等學에 있어서 慧를 의미한다.
般若의 無知는 모든 事에 통하는 知[無事不知]다. 無不知이므로 見이라 말할 수 있다. …… 定이란 體의 不可得을 말한다. 慧란 不可得의 體를 능히 見하는 것이다. 湛然히 常寂하고, 恒沙의 用이 있으므로 定慧等學이라 말한다.
요약하면, 見은 般若知의 慧用이다. 見이 入定 중심의 看과 구별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회는 북종의 看法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法身의 體性을 힘들여 看하지 말라. 看은 心에 집착함[住心]이니 곧 作意다. 作意는 다시 妄想의 덩어리가 된다. …… 善惡을 不思하면 無念이다. 無念, 無思가 涅槃이다.

 

住心看淨의 비판은 그것이 思念의 조작인 作意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思念을 벗어나는 無思, 無念을 열반으로 제시한다.

좌선비판은 自性佛을 깨닫는 이외의 여하한 방편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단경}의 돈오견성 사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 입장은 혜능 이후의 남종선에 이르러서도 지속된다. 懷讓이 그의 제자 馬祖 道一이 좌선에 열중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목은 {단경}에 보이는 혜능의 그것과 상충되지 않는다.

 

너는 坐禪을 익히는 것인가 坐佛을 익히는 것인가. 坐禪을 익히는 것이라면, 禪은 坐나 臥가 아니다. 坐佛을 익히는 것이라면, 佛은 정해진 相이 아니다. 無住法에서 取捨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坐佛을 한다면 곧 殺佛이니, 坐라는 相에 집착하면, 근본적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다.
좌선이란 坐라는 相에 집착하는 取捨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회양과 마조의 이 機緣은 {馬祖語錄}에 修道와 坐禪에 의하지 않는 것을 如來淸淨禪이라 규정한 대목과 일관된 연관성을 갖는다. 좌선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馬祖로 하여금 大機大用의 선법으로 유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좌선비판은 남종선의 慧用思想 형성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看心看淨의 북종선을 慧用이 결여된 좌선과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2) 維摩經의 宴坐비판에 대한 諸見解
이 절은 {단경}과 신회의 남종이 전거로 삼고 있는 {유마경}의 문구에 대하여 羅什·僧肇·道生의 {注維摩詰經}, 慧遠의 {維摩義記}, 천태 지의의 {維摩經略疎}, 吉藏의 {維摩經義疎}, 窺基의 {說無垢稱經疎} 등의 해석을 검토하여 좌선비판의 실상을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維摩經}의 이 대목은 維摩詰이 舍利弗의 宴坐에 대하여 질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반듯이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宴坐가 아니다. 참된 宴坐란 다음과 같다. ① 三界에 있어서 身意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연좌다. ② 滅定에서 일어나지 않으면서 諸威儀를 나타내는 것이 연좌다. ③ 道法을 버리지 않고 凡夫事를 나타내는 것이 연좌다. ④ 心이 內·外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연좌다. ⑤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 不動하면서 三十七品을 행하는 것이 연좌다. ⑥ 煩惱를 끊지 않고 涅槃에 드는 것이 연좌다. 만약 이와 같은 坐라면, 부처님도 印可하실 것이다.

 

"반듯이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宴坐가 아니다"는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좌의 본질에 대한 여섯 가지의 정의가 내려지고 있다. 宴坐 자체의 개념에 대하여 도생은 한가롭게 거처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주로 '宴' 字에 대한 풀이라고 생각된다. 규기는 宴을 '신심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함[安寂]'으로 푼다. 따라서, 宴坐란 '몸과 마음에 산란함이 없이 편안하게 앉아 있음' 정도로 이해된다. 宴坐는 이와 같이 단지 身心의 安寂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의 출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단경}은 이 비판의 구절에 대하여 '한결같이 앉아서 不動을 유지하고 있는 것[常坐不動]'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維摩詰이 舍利弗을 질책하는 이유로 본다.

 

常坐不動이 옳다고 말한다면, 舍利弗의연좌가 유마힐의 질책을 받은 것과 같은 실정에 빠지는 것이다.
선정이란 常坐不動의 실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것은 도생의 주석과 일치한다.
반드시 이것(이렇게 앉아 있음)이 아니라는 것은 이것이 그릇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일 따름이다. 이것이 그릇되다고 말하지 않음은 실로 이것도 定을 구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함은 이 방법만으로는 병이 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이 아닌 것을 병으로 만드니 질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즉, 常坐不動하는 것이 定을 구하는 수단인 한에서는 전적으로 그릇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생은 좌선을 定의 수행에 한정시킬 때 병폐가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혜원과 천태 지의의 주석도 이것이 究竟이 아니라고 보는 점에서 도생의 견해와 동일하다. 이는 길장이 定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고 한 말과 같다. 定慧의 완비가 禪定의 온전한 의미가 된다고 보면, 사리불의 常坐不動한 연좌는 慧가 없이 定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즉, 좌선이 병이 되는 것은 慧의 결핍에서 발생한다. {단경}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활용될 수 없는 禪定에 대한 비판으로 인증하는 것이다.

 

이 비판을 조목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풀이한 연좌에 대한 여섯 가지 정의는 모두 定·體와 慧·用의 일체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좌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不於三界現身意'다. 羅什에 따르면, 三界에 身意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삼계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 숨는 것이고, 禪定의 극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聲聞은 마음을 거두어 감출 수는 있지만 몸은 그렇지 못하여 삼계를 보면 사물에 얽매임을 받게 된다고 한다. 길장도 二乘의 禪定과 菩薩의 坐法을 구별하고, 聲聞은 마음은 滅定에 이르지만 몸은 그렇지 못하여 하나는 숨고 하나는 숨지 못하기 때문에 질책을 받는 것이라 보는 점에서 羅什과 다를 바 없다. 길장은 여기에 定慧의 개념을 도입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寂滅에 들어가 삼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妙定, 妙慧로 해석한다.

 

菩薩은 法身으로써 身을 삼아서 비록 身이 삼계에 처해도 삼계에 얽메이지 않는다. 또한, 妙慧로써 心을 삼아서 비록 心이 사물에 접해도 항상 寂滅하다. 이것이 곧 몸과 마음이 모두 숨는 것이요, 妙定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二乘들의 定과 다르다.
즉, 身心이 모두 숨어서 삼계에 드러나지도 얽매이지도 않는 것이 妙定이다. 이 내용은 대체러 定·體에 중심을 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참된 定은 몸과 마음이 모든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로서 慧·用의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妙定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 연좌에 대한 정의는 二乘이 慧用이 없음에 대한 비판을 배경에 두고, 定體와 慧用의 相卽性에 입각하여 전개된다.

연좌에 대한 두 번째의 정의 '不起滅定而現諸威儀'에 대하여 羅什은 滅定의 경지에 들어도 무한한 변화의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어 衆生의 경계에 응해 나갈 수 있을 때 연좌가 완성된다고 한다. 승조는 멸정에 들어 枯木같이 不動하여 운용 능력이 없는 것은 小乘의 방식이라 하고, 動的인 세계에 응해 가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거동에 있어서 본래의 威儀를 잃지 않는 것이 대승의 實相定이라 한다. {종경록} 33권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소승의 戒定慧를 평하면서 그 定은 枯木과 같아서 威儀의 妙用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慧는 偏空으로 中道를 잃은 것으로 말한다. 枯木 등의 용어와 그 대의로 볼 때 승조의 주석을 따르고 있다. 다만 이것을 定慧와 중도사상의 범주에 의하여 재해석한 것이다.

 

그 요지는 모두 慧用이 없는 定에 대한 비판이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고 해석된다. {維摩經略疎}와 {維摩義記}에도 소승이 入定하여 四威儀의 用이 없음을 지적하고, 참된 定은 體用의 완비로 구분한다. '不起滅定而現'에서 不起는 慧에 相卽된 定을 나타낸다. 즉, 定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이 그 자체에 慧用이 卽해 있다는 뜻이다. 신수가 出定 이후의 慧를 비판한 의도와 같다. {단경}에서 先定發慧의 '先定'도 慧와 분리된 定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은 것이다. 따라서, 出定 및 先定의 비판은 {유마경}의 不起滅定과 동일한 지반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한결같이 定에 들었을 때 慧가 없는 이승의 방식이 비판대상이다. 이승은 寂과 用을 양분하여 用을 그치고 寂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적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작용을 펼치는 '卽寂起用'이 연좌의 참된 의미인 것이다.

 

참된 멸정은 行住坐臥의 威儀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단경}에서 一行三昧의 直心을 말하는 맥락도 {유마경}의 본의와 같다. 즉, 모든 곳에서 行住坐臥 그 어떤 威儀를 막론하고 항상 直心을 발휘하는 것이 一行三昧라는 것이다.

이하의 연좌에 대한 정의는 그 요체가 이상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좌에 대한 세 번째 정의는 '不捨道法而現凡夫事'다. {유마경}의 이 말은 {반야경}에서 '佛法과 더불어 하지 않고, 凡人法을 버리지도 않는다'는 사유방식과 일치한다. 도법과 범부사를 不二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유마경}의 내용과 불법과 범인법이 不二라고 보는 {반야경}의 그것은 다르지 않다. 승조는 소승이 '和光'의 用에 능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生死, 美惡, 道俗의 평등성에 기초하여 범부사를 행한다고 해서 도법에서 떠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구체적인 事를 실천하면서 도법을 버리지 않는 유마거사의 在家를 그 증거로 제시한다. 이것은 {유마경}의 주제 중 하나인 不二法과도 통한다. 신회는 凝心入定이 慧가 없음을 비판하는 전거로 이 문구를 인용하고, 定慧雙修의 의미로 해석한다.

 

혜원은 道法과 凡夫事, 번뇌와 열반 등 二相의 空性에 입각하여 성문의 방식과 보살의 방식을 구별한다.
聲聞은 道를에 있으면 凡夫事를 버리지만 보살은 항상 드러낸다. 어떤 이유로 그런가. 聲聞人은 法空을 터득하지 못해서 번뇌 등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끊고 난 이후 聖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聖은 얻었으나 드러내지 못한다. 보살은 空의 도리를 궁구했으므로 번뇌 등의 존재를 幻으로 알고, 그것에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중생을 받아들여 교화해 간다. 그런 까닭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空性이기 때문에 끊는 것, 두려움, 버리는 것 등에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二相이 空한 평등성이어서 범부사 속에서 도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번뇌를 끊고 聖으로 들어가면 聖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은 聖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장이 번뇌의 세계 이외에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연좌에 대한 네 번째 정의는 '心不住內不在外'다. 羅什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마음 밖의 대상으로부터 생각을 거두어 들이는 攝心이 內에 住함이며, 마음 밖의 대상에 생각이 흩어지는 馳想은 定이 없는 慧로 모두 병폐가 된다. 승조는 내외의 존재가 모두 虛幻이라는 평등성에 입각하여 無住著하지 않는 것이다. 攝心은 慧가 없는 定, 馳想은 定이 없는 慧로 모두 병폐가 된다. 승조는 내외의 존재가 모두 虛幻이라는 평등성에 입각하여 無住著를 말한다. 길장은 이것을 내외의 空性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승은 入定에 치우쳐 慧用을 망각한 無記空에 빠져 있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연좌에 대한 다섯 번째 정의는 '於諸見不動而行三十七品'이다. 여기서 諸見은 妄見 또는 邪見이다. 승조는 망견을 망견으로 생각하는 자는 諸見을 버리는 것으로 道品을 닦는 것으로 삼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버리는 행위는 諸見에 대하여 不動하지 못하고 動하는 것이다. 이 역시 소승의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제견의 성품을 바로 본다면, 마음이 움직여 버리는 행위[動捨]를 하지 않는다. 제견에 不動함은 제견의 眞性이 곧 道品이라는 不二中道를 꿰뚫어 보는 데서 시작된다. 즉, 이 不動의 뜻은 妄見을 버리는데 가까이 하지도 않으며, 도를 닦는데 멀리 하지도 않는다는 중도적 의미를 체득함으로써 완성된다. {維摩經略疎}도 이 부분에 대하여 垢·淨, 常·無常, 我·無我 등을 조절한 중도의 의미로 푼다.

 

연좌에 대한 마지막 정의는 '不斷煩惱而入涅槃'이다. 羅什과 승조의 주석은 위의 망견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번뇌와 열반의 相卽不二를 근거로 이루어진다. 즉, 羅什은 "번뇌가 곧 열반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끊은 이후에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승조는 "번뇌의 眞性이 곧 열반이어서 慧力이 강한 자는 번뇌를 꿰뚫어 보는 즉시 열반에 드는 것이지 번뇌를 끊은 후에 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마치 참된 修道가 망견을 버리지 않듯이 열반에 들기 위하여 번뇌를 끊는 것은 열반과 번뇌를 대상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二見의 분별에 의한 思念에 의하면 열반도 속박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만약 반드시 열반에 귀하게 여겨 취하려 하면 도리어 열반에 속박된다. 번뇌를 끊지 않고 바로 열반에 드는 자는 열반과 번뇌를 다르다고 보지 않는 것이니 속박이 없다.

 

열반과 번뇌를 다른 것으로 보아 二相의 집착이 생기면 번뇌가 속박이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열반도 속박이 되는 것이다. {단경}에서 '起心看淨'을 비판하여 청정한 相을 조작하는 행위는 도리어 청정성에 속박된다[淨 ]는 사상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번뇌가 열반에 있어서 장애요소가 아니라 번뇌의 경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써 佛事를 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이미 후대의 頓悟 사상의 단서가 구체적으로 보인다. 다만 宗密 같은 이는 頓漸을 조화하는 입장에서 {유마경}의 이 부분을 息妄修心宗의 漸修로 보고 긍정적인 방편으로 수용한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대로 {유마경}의 연좌비판은 이승의 禪定에서 결여된 慧用이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경} 계열의 특징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준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반 듯이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연좌가 아니다"는 것은 入定에 집착하여 慧用을 상실한 사리불의 연좌를 빗대어 二乘의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하에서 연좌를 여섯 가지로 설명한 것은 모두 이 비판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定慧에 의거한 평은 후대로 내려 올수록 더 빈번해진다. {유마경}의 연좌비판은 대개 定慧의 일체, 쌍수라는 맥락으로 해석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생각된다. 북종 신수도 {유마경}의 연좌에 대한 첫 번째 정의에 대하여 身心의 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羅什 이래의 주석을 따르면서 자신의 특징적 선법인 心不起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단경}이 常坐不動으로 요약한 {유마경}의 연조비판은 {단경}에서 말하는 좌선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검토 사항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북종비판의 선구자인 신회는 {유마경}의 이 부분을 종횡으로 활용하면서 남종의 선사상을 형성하는 방향을 잡았다.

 

3) 壇經의 坐禪義
{단경}에서 좌선은 견성이라는 궁극적 의미로 귀결되며, 定慧一體의 실현을 가리킨다. 先定發慧와 看心看淨을 둘러싼 북종비판과 {유마경}의 연좌비판은 {단경}에 있어서 慧用에 초점을 두며 좌선을 정의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말은 {단경}의 좌선관을 함축해 주는 것이다.

 

무엇을 坐禪이라 하는가? 이 法門 중 막힘도 걸림도 없는 것[無障無碍]을 말한다. 밖으로 善惡 등의 모든 경계 속에서도 마음에서 思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라 하고, 안으로 自性을 보아 不動함을 禪이라 한다.

 

心이 안팎으로 모두 無障無碍한 것으로 좌선의 근본적인 뜻을 설명한다. 밖으로는 心念의 不起, 안으로는 見性[見自性]이다. 밖의 경계 속에서 心이 응용됨에 있어서 대상적 사념으로 인한 장애가 없는 것은 慧, 心 자체 내에서 自性의 不動함은 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단경}의 이상과 같은 좌선의 의미 해석은 心의 不動性에 집착하여 좌선의 뜻을 고착시키는 방식을 뛰어넘어 心의 자유자재한 작용을 더불어 강조함으로써 좌선의 형식적 의미를 궁극적인 영역으로 확대한 것이다. 見性하여 不動하지만 不動의 고착을 풀어 무장무애하게 動的인 경계에 응용됨이 견성의 온전한 의미다. {단경}에서 常坐不動을 비판하는 것은 見性의 動的인 성격에 기인한다. 즉, {단경}은 좌선도 慧用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견성의 경지에서만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行住坐臥 등의 모든 행위양상을 禪으로 간주하는 조류는 慧用의 뜻을 내포한 坐禪義의 확대적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때와 상황에서 본심의 참구가 이루어지는 것이 옳으며, 앉는다는 좌선의 형식을 통해서만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단경}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북종의 '不起', '不動'의 선법은 慧用이 없거나 그것과 별개로 분리된 定이라는 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단경}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는 定慧一體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단경}은 북종의 一行三昧의 선법이 '不起', '不動'의 定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선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迷人은 法相에 머물고 一行三昧에 집착하여 말 그대로 마음을 좌선을 통하여 不動하게 하고, 妄念을 제거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不起心]을 一行三昧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이 法은 無情에게나 합당한 것이니 도리어 道를 막는 인연이 된다. 道는 마땅히 (구체적 상황에서) 통하고 흘러야 하거늘 도리어 (坐라는 한 양태에) 막혀서야 되겠는가.

 

즉, 좌선의 不動, 妄念, '不起'를 주안점으로 하는 一行三昧는 道가 행하여 지는데 장애요소라고 비판한다. 북종계의 一行三昧의 본질에 不動, 不起의 좌선법이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수의 一行三昧가 이러한 비판의 대상으로 적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좌선중심의 선법에 不起, 不動의 의미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북종의 一行三昧 내지 돈오사상이 그 자체로서는 남종과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心의 不起·不動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보다 중심이 되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道는 구체적 상황에서 변통되는 慧用 없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북종 신수의 선법이 不動을 고수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見聞覺知의 慧用이 중시되는 것은 사실이다. 신수는 慧의 방편이 없는 坐禪은 正定이 아니라 邪定이라 하여 見聞覺知의 用을 강조하고, 定慧사상에 근거한 佛智見을 강조한다. {단경} 전반에 깔려있는 종파적 편견은 이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경향은 慧用을 강조하면서 북종과의 차별성을 말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不起·不動의 비판은 북종계의 先定發慧의 방법에 있어서 先定의 측면에 대한 것이다. 즉, 북종의 선법은 入定 이후의 慧用으로 엄밀히 말하면 定慧一體不二의 {단경} 선법과 다르다. 이것이 {단경}에서 '先定發慧'의 비판에 해당되는 항목이다. 이것은 양자의 가치와 방법상의 차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그 선악과 우열을 논하기는 어렵다.

 

달마가 禪宗의 전설적인 대표자로서 인식되면서 {二入四行論}의 壁觀도 좌선의 의미 이상으로 재해석된다. 이것도 좌선에 남아 있는 不動性의 집착을 慧用으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보인다. {傳燈錄}의 菩提達摩 章에 {別記}란 문헌의 인용으로 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그것이다.
달마는 二祖 慧可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밖으로는 대상과의 교섭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서,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아야 道를 깨달을 수 있다." 慧可는 여러 가지로 心·性·理를 말했으나 道에 契合되지는 못했다. 달마는 단지 그의 잘못을 없애 주기만 했을 뿐 無念心體는 설하지 않았다.

 

慧可 : 저는 이미 대상들[諸緣]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달마 : 마음이 斷滅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慧可 : 斷滅된 것은 아닙니다.
달마 : 어떻게 증험할 수 있어서 斷滅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慧可 : 了了常知한 까닭입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달마 : 그것이 諸佛이 전한 心體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즉, 달마의 壁觀을 설명함에 있어서 不斷滅과 了了常知를 핵심어로 삼고 있다. 諸緣과 心 양자가 斷滅되는 관계는 心의 본질[心體]과 거리가 멀다. 대상세계 속에서 心의 자유로운 활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斷滅이란 心과 諸緣 사이에 어떠한 교섭도 없는 無記空의 폐단을 말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서, 慧用이 없는 斷滅은 내외의 실상으로서의 참된 空이 아니다. 斷滅을 극복하고 心과 諸緣 사이의 교섭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바로 了了常知한 心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대상들과 관계를 끊었다'는 말은 대상세계와 전혀 관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妄念이 사라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정도의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것은 自性 내의 본래성에서 말하는 것이며, 卽事하여 用心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雜錄}에 나타난 달마선의 면모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傳燈錄}의 이 말은 心의 본질로서 知를 거론하면서 달마의 선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二入四行論}의 壁觀이 본래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경향은 慧用에 역점을 두는 {단경} 계열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知의 사상은 神會가 강조하고 宗密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북종선법의 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定體에 대한 慧用의 의미로서 知를 거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宗密은 {都序}에서 위 {別記}의 문답을 인용하고 여러 妄念을 끊었으나 斷滅하지 않고 了了自知한 것을 自性淸淨心의 본질로 보고 있다.

{大慧普覺禪師語錄}에는 "밖으로 대상과의 교섭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말을 入道의 方便으로 이해하고, 이 방편으로 入道하는 것은 긍정하지만 방편을 고수하여 버리지 않는 것은 병이라고 평한다. 修定的 좌선의 방편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좌선에 대한 비판적 해석은 {단경}의 사상적 본질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단경}은 定慧一體의 선법을 기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종의 좌선에 대한 비판은 禪定을 좌선에 한정시키지 않고 慧用에까지 확산하여 定慧不二의 관계로 이해하는 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慧用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行住坐臥의 모든 행위방식을 선정의 영역으로 강조하는 맥락에는 이후의 남종적 특성을 고려할 때 선종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지눌은 坐習의 수행은 다른 방식에 비하여 공부하기 용이한 이유로 경론에 자주 거론되는 것이며, 결국은 行住坐臥의 四威儀가 모두 공부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지눌의 좌선관은 좌선의 방편이 방편이 아닌 그 자체의 목적으로 경직되는 북종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坐禪義를 폭넓게 적용한 {단경}의 초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4. 결론
이상에서 볼 때 {단경}은 사상적으로는 慧用을 강조하는 선법을 핵심으로 한다. 또한, 북종비판은 {단경}의 그러한 사상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북종비판의 의의는 그 정당성보다는 북종을 빗대어 주장하고 있는 慧用 지향적 선법에 있는 것이다.

 

이 비판의 성과는 {단경}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無念·無相·無住의 선법에도 암시된다. 북종에도 無念의 선법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는 {단경}의 無念과 비교할 때 상술한 바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낸다. 북종은 주로 '念不起'에 주력하는데 좌선을 통하여 妄念의 발생을 억제할 뿐 正念의 발휘와 거리가 먼 선법으로 타락할 우려가 있다고 보는 것이 남종이 북종을 비판하는 요지다. 이것을 {단경}에서는 '空心靜坐'로 비판하고 좌선이 가지는 無記空의 함정이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단경}의 無念은 '於念而不念'의 無念이다. '於念'은 念을 비우고 있는 空心이 아니라 念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주용시 한다. 모든 사고를 단절함[百物不思]에 대한 비판은 無念의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心이 萬法과 境界에 교섭되는 慧用으로써 궁극적 경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無相과 無住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선법들이 {단경}의 좌선비판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필요불가결한 배경이 된다.

 

{단경}의 自性論 내지 見性論은 이 頓悟思想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전자는 돈오의 근거로서 자성의 본질에 관한 것이며, 후자는 자성의 본질을 실현하는 실천적 내용이다. {단경}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인 戒定慧의 三學도 자성의 의미로 귀일시킬 정도로 자성의 본질을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 자성에 대한 깨달음이 견성이며, 여타의 매개적 방법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자성을 곧바로 지향하여 견성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경} 계열의 문헌에서 견성이란 대체로 돈오와 동일한 관련하에 쓰이는 말이다. 북종이 좌선 등의 방편적 수행법을 세우고 그것을 통하여 깨달음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남종은 돈오 자체에 수행법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것이 頓悟頓修가 의미하는 기본적인 맥락이다. 이 점에서 북종의 돈오설과 남종의 돈오설이 갈라진다. 頓敎는 북종의 修行觀을 비판하면서 남종의 근본을 세운다는 점에서 남종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대변하는 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의 대표적인 항목으로 先定發慧와 坐禪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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