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頓漸論爭의 社會學方法論的 含意

醉月 2012. 11. 29. 08:34

頓漸論爭의 社會學方法論的 含意
Sudden-Gradual Debate and Sociologicial Methodology
金載範 (Kim Jae-bum)


Ⅰ. 머리말
Ⅱ. 돈점논쟁의 전개와 주요 쟁점
     1. 돈점논쟁의 연원과 배경
     2. 돈오점수론과 돈오돈수론의 쟁점과 문제점
     3. 쟁점의 재구성ː인식의 3차원과 悟修頓漸
Ⅲ. 사회학방법론의 주요 쟁점
     1. 존재론적 쟁점
     2. 인식론적 쟁점
     3. 가치론적 쟁점
Ⅳ. 돈점논쟁의 사회학적 함의
     1. 선불교의 세계인식과 존재론적 함의ː현존재적 실재론
     2. 悟의 인식론적 함의ː성찰적 사회학을 위한 사회학자의 자기성찰
     3. 修의 가치론적 함의ː平常心是道의 구현으로서의 일상생활의 사회학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이 논문의 목적은 禪佛敎에서 깨달음(인식 자체)과 수행(실천)의 입장과 관련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頓漸論爭의 내용을 사회학방법론의 주요 쟁점과 연결지어 검토해 봄으로써, 돈점논쟁이 현대의 사회학방법론에 시사하는 바를 밝히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폐해와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대두되면서, 그 바탕이 되는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논의는, 역시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학에서는 '현실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의 위기 논의로 이어져 사회학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현실 인식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시각과 방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생태주의, 일상생활의 사회학 등도 기존의 서구 근대 학문의 인식론과 방법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나름대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대안의 모색 움직임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동양사상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현실 학문으로서 사회학이 기존의 한계와 위기를 극복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적 삶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원리와 관점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여기서 사회학의 새로운 인식원리와 관점, 방법론을 모색하면서 선불교의 돈점논쟁을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선사상이 일체의 상대적 지식이나 경전에 그 권위를 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생활 속에서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방법을 통하여 생생한 인간의 현실적 삶을 깨우쳐 주는 새로운 인식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종의 가르침은 당시의 경전 해석을 위주로 했던 중국불교에 대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 인식원리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한편, 방법론은 일반적으로 각 학문과 이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세계관과 사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각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현실 인식원리와 방법, 이론과 실천의 문제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학방법론 논쟁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쟁점을 포괄하고 있다. 존재론적 쟁점은 사회적 현실로서의 세계의 본질과 존재 근거, 존재 양식 등의 문제와 관련되고, 인식론적 쟁점은 인간 지식[앎]의 근거와 한계 문제, 가치론적 쟁점은 학문의 목표와 가치, 실천 문제와 관련된다.

 

따라서, 깨달음[悟]과 닦음[修]의 입장에 대한 논쟁인 돈점논쟁은, 삶과 현실에 대한 참된 인식과 올바른 실천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사회 세계의 존재 해명과 인간 인식의 한계, 실천의 문제를 쟁점으로 하는 사회학방법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돈점논쟁을 통해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이라는 대상에 중점을 두느라고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사회학자의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하며, 성찰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의 실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사회학방법론의 주요 쟁점과 그 문제점은 무엇이며, 돈점논쟁이 사회학방법론에 어떤 새로운 시각을 보여 주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킨다. 이를 위해서 우선, 돈점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간 우리 학계에서 벌어진 돈점논쟁을 검토한다. 그리고 여기서 검토한 돈점론의 내용이 어떻게 사회학방법론의 주요 쟁점과 연결되는지를 논의한 다음, 방법론의 주요 쟁점에 돈점논쟁이 시사하는 함의를 밝혀 보고자 한다.

Ⅱ. 돈점논쟁의 전개와 주요 쟁점
1. 돈점논쟁의 연원과 배경
돈점논쟁의 기원과 역사적 전개 및 배경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선행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고 보이므로, 여기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본 논문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만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불교의 修證論으로 일컬어지는 頓漸論爭의 뿌리는 원시불교의 四諦說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龍樹(N g rjuna, 150∼250년경)의 二諦說에서도 일단의 견해가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티베트의 쌈예사원에서는 인도의 까말라실라(Kamala la, 740∼795)와 중국의 摩訶衍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慧能과 神秀의 禪脈과 관련된 南頓北漸論爭이 荷澤神會(670∼762)와 淸凉澄觀(738∼839), 圭峰宗密(780∼841)의 돈점설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돈점논쟁이 대두되고, 이러한 돈점논쟁의 역사를 상세히 검토하게 된 것은 退翁性徹 (1912∼1993)이 {禪門正路}(1981)에서 頓悟漸修를 禪門의 異端 邪見이며 雜說이라고 비판하고, 頓悟頓修만이 선문의 정로라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禪門正路}가 출판된 지 거의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즉,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주최로 송광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와 1993년 해인사에서 열린 백련불교학술대회에서 돈점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졌고, 일반에도 크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전개된 이후의 논의를 일일이 詳論할 여유가 없으므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와 성철선사의 돈오돈수의 핵심이 되는 견해를 중심으로 그 동안 우리 학계에서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을 살펴보고, 본 논문 전개에 필요한 견해들을 검토한 다음, 나름대로 쟁점을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쟁점과 문제점을 살피는 것은 기존 논의의 쟁점들을 재론하여 정리하기보다는 지금까지의 논쟁 자체가 가진 방법론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2. 돈오점수론과 돈오돈수론의 쟁점과 문제점
悟修의 頓漸說은 澄觀과 宗密의 9대 돈점, 7대 돈점 등 으로 나누어지나, 그간의 논쟁은 결국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와 성철선사의 돈오돈수 양설로 쟁점이 모아진다. 쟁점이 되는 것은 悟와 修의 문제지만, 핵심은 돈오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의 내용과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의 내용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보조국사는 {수심결}에서 돈오점수의 頓悟와 悟後漸修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는 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므로, 자기의 성품이 참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한 알음알이가 참부처인 줄 몰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기에 끝없이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이 가리키는 길에 들어서, 한 생각을 돌이켜 자기의 근본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 자리에는 원래 번뇌가 없고 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 구족하여 여러 부처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한다. 점수라는 것은 비록 근본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끝없는 옛부터 익힌 습기를 갑자기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하여 닦되 차츰 익혀서 功이 이루어져 聖胎를 길러 오래오래 지나서야 성인이 되므로 점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뒤에 오래오래 밝히고 살펴서 망념이 일어나거든 도무지 따르지 말라. 덜고 또 덜어서 더할 것이 없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究竟이니, 천하의 善知識이 깨달은 뒤에 牧牛行을 한 것이 이것이다. 비록 나중에 닦는다고는 하나 망념이 본래 空하고 심성이 본래 맑은 줄을 먼저 이미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되 끊는 것이 없고, 선을 닦되 닦는 것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만행을 고루 닦는다 하여도 오직 無念으로 宗을 삼는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성철스님의 {禪門正路}에 나오는 돈오돈수에 대한 내용을 보자.
禪門正傳의 頓悟는 妄想이 滅盡한 究竟無生을 內容으로 한 圓證의 頓悟이다. (75)
等覺이 金剛心으로써 最微細念인 第八賴耶를 斷盡하고 妙覺에 頓入함을 見性 또는 成佛이라 하나니, 이것이 頓悟이다. (78)
靈山正脈이며 曹溪直傳인 見性은 그 내용이 根本無明인 第八梨耶의 微細妄想이 永滅한 無心 無生 無念 等의 究竟佛地에 있음이 명확하다. 이는 妄滅證眞하여 病差藥除하고 敎觀을 咸息하여 現證圓通한 圓證頓證의 證悟이니, 이것이 佛祖正傳의 見性이며 頓悟이다. (86)
見性은 現證圓通한 究竟覺이므로 十信初位를 내용으로 하는 解悟인 頓悟는 見性이 아니다. (155)
悟後保任은 圓證 以後의 無爲無事하며 無心無念한 常寂常照의 大解脫深境이므로 絶學無爲閑道人의 任運自在한 이 無心大定에는 習氣는 紅爐點雪이다. 그러므로 오직 自性을 圓證하여 保任無心할 뿐 習氣는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103)
達磨直傳인 六祖의 正法은 有頓無漸이다. 漸門은 迷界에서만 있을 뿐이요 悟境은 아니므로, 六祖는 오직 敦悟頓修의 圓證인 見性만을 宣說하였다. 그러므로 敦悟頓修를 내용으로 하는 圓證만이 六祖正傳이니 頓修圓證이 아니면 悟가 아니다. (165∼166)

 

그리고 성철스님은 거듭하여 頓悟漸修思想에서 돈오는 解悟인데, 이는 곧 알음알이인 知解라고 한다. 지해는 깨침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며, 선문 최대의 금기이고, 따라서 돈오점수를 따르는 것은 知解宗徒이며, 지해종도가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선문의 異端 邪見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의 돈오는 解悟가 아닌 證悟요, 제8아뢰야식의 微細妄念마저 끊어진 究竟覺이라는 것이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돈오에 대한 입장과 돈오 후의 修에 관한 것이다.

 

보조국사는 頓悟를 解悟라고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볼 때 보조국사가 말하는 돈오는 見性(見自本性)이며,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다만, 자기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습기로 인하여 구경인 聖人에 이르기 위해서는 해오인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또 닦아야[漸修]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해오는 견성이 아니고, 증오라야 구경각인 견성이며, 해오에 의지해서는 증오인 구경각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증오인 돈오로써 견성하면 곧 돈수이므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어 이어진 돈점논쟁에서 드러나는 입장은, 흔히 돈오점수나 돈오돈수의 어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입장과, 양자의 입장을 수용하여 회통하려는 제3의 입장으로 나뉜다.

 

먼저, 성철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과연 돈오점수가 禪門의 異端이고 邪說인가?"를 되물으며, 문헌 인용과 해석의 문제, 돈오와 해오, 견성의 개념, 돈점논쟁의 역사적 뿌리 등을 고증하고 논증하면서 성철스님의 주장을 비판한다. 이들은 주로 돈오에 관해서는 성철스님의 문헌 인용과 해석에 관한 학술적 형식을 문제삼고, 修에 관해서는 자비행·보살행·보현행 등 중생 구제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성철스님을 비판한다.

 

이에 비해 성철스님의 견해를 지지하고 따르는 측에서는 보조측을 비판하기보다는 주로 성철스님의 견해를 선양하는 데 치중하여 왔다. 비교적 최근에 윤원철은 보조측 학자들의 논의를 비판하고 나왔다. "성철이 학자인가?"를 물으며, 윤원철은 세속 학문의 형식성과 보편적 효용성이라는 실용적인 잣대로 성철의 주장을 문제삼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이라고 하며, 성철의 주장은 '근본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선불교 전통에 충실하려는 것이 그의 근본 문제의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철이 학자가 아니어서 문헌 인용과 학술적 형식의 미숙함을 문제삼을 것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만약 내용의 전달 자체나 인식에 문제가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학술적 논증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인식 자체는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논쟁이 제대로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성철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책임은 더더구나 면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거의가 {禪門正路}의 내용을 무반성적으로 옹호하며, {禪門正路}의 주장을 전제로 보조의 저술이나 그 외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양자의 입장을 수용하고 회통시키려는 제3의 입장을 하나의 공통된 입장으로 파악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있다. 悟와 修, 頓과 漸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양자를 수용하고 회통하는 데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근기론과 경지론, 이론과 실천, 깨달음과 자비행,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를 悟修와 頓漸의 문제에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그 초점과 견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성배는 體用의 논리와 근기론과 경지론을 적극 도입하여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장하며, 법성은 이론과 실천의 철저한 자기 실현이라는 입장에서 연기론에 의하여 깨달음에 관한 개념을 정리하고, 修의 문제는 현실 역사 속에서의 사회적 실천행으로 파악한다. 이동준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차이는 보조·성철 두 스님이 각각의 시대 현실에서 당면하고 있던 문제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근기론을 비판하고, 돈오점수의 점수만이 보살행이 아니라 돈오돈수에서도 오후보림, 圓修 등의 표현으로 보살행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의 입장에서 양자를 수용하려는 이러한 견해들에도, 위에서 윤원철이 지적한 학문의 형식성과 보편적 효용성이라는 잣대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윤원철의 지적은 주로 성철을 비판하는 보조사상연구원측을 겨냥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돈점논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지적을 비켜 가기는 힘들 것 같다. '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불교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깨달음의 문제를 텍스트나 학술적 형식, 개념의 문제로 논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해 돈점논쟁은 희론도 깨달음의 대결도 아니며, 텍스트 비평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김호성이 이미 언급하고 있듯이, 학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참선을 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무엇이 頓悟이고 무엇이 漸修이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해 봤자, 그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못할 것'이라는 松潭禪師의 지적을 모두 겸허하게 경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학술적 논리체계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저술하고 발표해야 하는 학자로서, '言語道斷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宗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不立文字'라고 하는 것도 이미 문자와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문자와 말에 개념적으로 얽매이거나 제한되지 말라는 뜻이다. 마음을 똑바로 가리키기만 한다면, 가리키는 것(손가락)이 마음이 아니라 '지시하는 말'임을 안다면, 어떤 말(누가 어떤 손가락으로 가리키든)로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른바 '말없는 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간의 돈점논쟁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윤원철이 성철을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 전통에 충실하려는 근본 문제의식'을 문제삼지 않고, 문헌 해석이나 세속의 윤리적인 기준의 자비행, 보살행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데 있는 것 같다. 누구는 마구니인데, 당신은 깨달았느냐? 하는 감정적인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승려, 학자 할 것 없이 아무도 禪門의 전통에 걸맞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禪門의 전통에 합당한 문제 제기인가? 이는 성철이 보조를 지해종도라고 할 때, 성철에게 바로 물었어야 했다. "스님께서는 보조가 지해한 것을 어느 곳에서 보십니까?" 하고.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 보조의 문헌을 뒤적인다면, 불립문자라는 禪家의 뜻과는 십만 팔천리 어긋날 것이다. 자기 자신의 見處에서 나오는 自明한 活句로 답해야 할 것이다. 이단 사설이니, 마구니니 하는 말에 대해서도 똑같은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깨달았느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다.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조사와 선사들이 깨닫지 못한 채 어떤 이론이나 언설로도 깨달음을 얘기하는 것은 구두선이며, 마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학자들은 이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철을 지지하는 쪽도 {선문정로}의 내용을 무조건 옹호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성철과 그 내용을 신비화,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 그것은 성철에게도 禪門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正法을 비방하는 우를 범하지 않되,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殺佛殺祖의 禪旨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쟁점의 재구성ː인식의 3차원과 悟修頓漸
돈오점수이든 돈오돈수이든 학문적 형식성과 세속적 효용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선 그 원래의 의도와 그러한 주장이 무엇을 지시하려는 것인지, 즉 가장 핵심이 되는 깨달음과 현실에서 그러한 깨달음이 어떻게 드러나고 수행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돈점의 문제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깨달음 자체와 현실에서의 깨달음의 드러남으로써의 실천, 時空間과 因果의 상대적 제약으로 表象化된 사회적 현실을 일단 구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돈점도 없고, 인과도 없고, 有無도 떠나며, 본래 구족되어 있다는 法·마음 혹은 성품을 체득한 깨달음의 인식과, 둔하고 예리함이 있고, 시공간의 제약과 인과에 매여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현실의 인간 인식을 같은 차원에서 평면적으로 연결하여 돈점을 논하는 데서 문제가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인식의 차원을 존재 차원, 현존재적 차원, 표상적 차원의 3차원으로 나누어서 논의하고자 한다.

 

1) 存在 次元

서양철학에서도 '존재(Sein, Being)'라는 용어를 학자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 사용하는 '存在'라는 용어는 단순히 '없음'의 반대말이 아닌 有無를 떠나 일반적으로 '참으로 있음'인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때의 실체 개념은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實相無相으로서의 實相'을 말한다. 즉, 佛法, 佛性, 本性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존재한다[自存]는 뜻인 如來(Tath gata), 야훼(Jahweh) 등도 어원적으로 같은 의미로, 존재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원의 인식은 형상이나 개념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시공간에도 제약되지 않고, 因果도 원래 없는 本無 因果의 차원이다. 엄밀히 말해서 인식이란 말도 붙일 수 없다. 따라서 이 차원에는 頓과 漸도 원래 없다.

 

2) 現存在的 次元

'現存在(Dasein)'는 존재의 드러남, 顯現하는 존재, 즉 현현하는 실체로서 '現實'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설(E. Husserl, 1859∼1938)의 '指向性(Intentionalit t), 禪家의 '最初 一念子', 요한복음의 '太初'는 여기에 해당되는 말로 이해된다. 이 차원은 항상 '지금 여기(now & here)'로 표현되는 동시성의 인식 차원으로 因=果인 卽時 因果, 同時 因果의 차원이다. 즉, 매순간 변하지만,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因果의 연속이 아니라 찰나마다 변하여 드러나는 極으로서의 불연속적 연속이라는 의미에서의 因果의 同時性이다. 지향성으로 인해, 즉 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바로 거기서 동시에 생긴 상으로서의 세계가 현존재적 세계이다. 이러한 동시성의 현존재적 차원에서 보면, 悟修는 항상 지금 여기에서 단박 깨닫고 닦는 것이 깨닫고 닦는 그 순간에 매순간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할 수 있다.

 

3) 表象的 次元

'表象(Vorstellung)'은 의식 내용이 대상화된 것이다. 물질적 대상뿐만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규정된 인식 틀로서의 관념적 대상도 포함된다. 이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되며,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고, 시공간의 제약과 인과의 구속을 받는 인과적 차원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는 차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적·사회적 현실, 생활세계는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차원에서 인식되는 현실은 항상 대상화되고, 물상화된 현실이다. 실제의 사회생활, 일상인들의 사회생활은 대개 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4) 3차원의 관계

그런데 존재 차원에서 보면, 결국 존재가 현현하여 드러나는 것이 현존재이고, 현존재는 존재를 여의지 않으며, 존재 또한 현존재를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이 파도를 여의지 않고 파도가 물을 여의지 않음과 같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존재자(Seiende)를 대상화하지 않고 존재가 드러나는 것인 줄 알면, 즉 一切唯心造임을 깨달으면, 표상 또한 존재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일체의 표상을 보되 표상으로 보지 않으면, 즉 일체 相이 虛妄하니 相을 相이 아니라고 보면 如來를 보는, 존재 차원의 인식으로 회향될 수 있는 것이다. '平常心是道'라는 표현은 이러한 차원에서 일상의 표상을 보는 데서 나오는 말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 현존재, 표상의 3차원이 구분되어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인식의 3차원과 頓·漸·悟·修의 재조명

그러면 이제 이 인식의 3차원에 의거해서 悟修와 頓漸의 문제를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돈점도 없고 유무도 떠나는 法과, 원래 번뇌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성품과, 第八梨耶의 微細妄想이 永滅한 無心 無生 無念 等의 究竟佛地의 깨달음 자체는 존재 차원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견성, 깨달음 자체를 지칭하는 존재 차원은 '本來無一物'로, 거기에는 깨달아야 할 것도 닦아야 할 것도 없으므로 돈점이 없다.

 

이러한 존재 차원을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로서 인간이 깨닫는 순간과, 그러한 깨달음에 근거해서 삶이 드러나고 펼쳐져 실천되며, 그러한 삶이 표현되는 것을 동시 인과적으로 보면 현존재적 차원이다. 물론 존재 차원의 인식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표상을 보되 그것을 인과적이 아니라 동시 인과로 인식하면, 표상적 차원에서 현존재적 차원으로 인식이 전환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解悟든 證悟든 깨달음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동시성으로 체득되고 현현되는 頓悟이다. 마찬가지로, 頓悟頓修는 實相無相으로서의 實相을 매순간 동시적으로 깨닫고 닦는 것을 지칭하는 現存在的 言表라고 할 수 있다. 돈오점수의 점수도 인과적 연속이 아니라 동시 인과의 불연속적 연속으로서의 漸으로 본다면, 현존재적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즉, 漸修가 깨달음에 의한 닦음이며, 닦되 닦는 것이 없는 참된 닦음[眞修]이라면, 그것은 현존재적 닦음이다.

 

그러나 삶의 일상에서 그렇게 드러나고 표현되는 동시성을 놓치고 형상화·대상화하여 인과적으로 이해하면, 표상적 차원이 된다. 즉, 漸의 의미를 지식과 앎의 상대적 축적으로 이해하거나, 닦음[修]을 닦아야 할 대상이 있고, 또 그것을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표상적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기 전의 점수는 표상적 차원이지만, 깨달음에 의거해서 닦는 悟後의 漸修는 현존재적 차원이다. 돈오돈수의 頓修도 닦아 마친다고 해석한다면, 닦아 마쳐야 할 경지를 목표로서 대상화하는 것이 되어 역시 표상적 차원이 된다. 깨달음은 원래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을 단박 깨닫는 것이지, 닦아 없앰으로써 닦음을 마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루어진 돈점논쟁을 이러한 기준에서 평가해 보면,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드러난다. 本無因果의 깨달음의 존재 차원과 그것이 현실의 삶에서 同時 因果로 活연하게 드러나는 현존재적 차원을 표상적 차원의 인식에서 논의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형식의 논리체계를 갖추었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口頭禪이며, 戱論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 차원을 지시하는 현존재적 차원의 언술인 悟修의 문제를 표상적 차원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로, 혹은 역사적·사회적 실천이나 세속 윤리의 기준에 비추어 자비행, 보살행으로 보는 것은 모두 차원의 혼동으로, 출발부터 잘못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차원을 달리하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논의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생산적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돈점논쟁이 보다 더 생산적인 논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차원을 문제삼는 것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논쟁의 초점을 재구성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인식의 차원이 다른 경우에는 논쟁의 초점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조, 성철 두 스님 모두 각각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얘기했지만, 그들의 저술과 언급을 볼 때 그것은 표상적 차원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비록 그들의 인간적 생애는 시대적·사회적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이루어졌고 당시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려고 한 것은 표상적 차원의 알음알이나 역사적·사회적 실천이나 세속 윤리의 실천이 아니었다. 당대의 상황을 비판하더라도 그것은 표상적 차원의 상대적인 사회적 실천 윤리나 역사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올바른 깨달음과 올바른 수행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과적 지식이나 사회적 실천과 세속 윤리는 항상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것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시공과 인과에 구속되지 않는 本無 因果의 究竟覺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상대적인 지식이나 실천을 얘기했다면, 禪門의 祖師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대적인 앎과 실천, 윤리에 끄달리지 않도록 돈오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던 것이다. 깨달음은 물론 실천도 깨달음에 의해 닦되 닦는 것이 없는 眞修와 圓修의 行을 나투는 것이 되어야 함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세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이 전혀 없었는가? 오히려 세속의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근본 무명을 깨닫지 못한 것임을 일러줌으로써 근원적인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達磨血脈論}에서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齋戒를 하거나 계를 지켜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다. 깨닫지 못한 이의 표상적 차원의 인식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사회적 실천은 성품을 바로 보는 존재 차원의 인식에서 보면 오히려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일 뿐이며, 나아가 형식적 이론이나 계율을 도그마화하여 남에게 강요하면 폭력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이것이 집단적 광신이나 맹신이 되면, 구제는커녕 모두를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러한 예를 무수히 보아 왔다. 그러므로 인식 차원이 근원적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어떠한 명분의 사회적 실천이나 윤리적 행위도 깨달음과 참된 보살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대상화된 표상에 의한 자기 소외의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와 현대 사회과학의 위기의 근원, 기존의 사회학방법론 논쟁의 한계도 같은 맥락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의 방법론적 쟁점은, 바로 그 학문의 성격 자체를 좌우해 주는 인식론적인 것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방법론의 핵심은 학문의 성립 근거와 전제가 되는 인식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며, 존재론적 쟁점과 가치론적 쟁점도 결국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방법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같은 차원의 다른 패러다임으로 代替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Ⅲ. 사회학방법론의 주요 쟁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학방법론의 핵심 쟁점은 존재론적 쟁점과 인식론적 쟁점, 그리고 가치론적 쟁점으로 요약된다. 지금까지의 사회학방법론 논쟁에서는 지배적인 조류가 사회학의 성립 초부터 가졌던 자연과학적 전통과 인문학적 전통 가운데, 지나치게 자연과학적 전통의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경도됨으로써, 근래로 올수록 본래 의미의 인문학적 전통의 학문론으로서의 방법론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사회학이 출발할 때 독립 분과 학문으로서 과학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학이 자연과학에 준하는 과학임을 입증하려는 초기 사회학자들의 노력이 사회학을 독립 분과 학문으로 성립시키고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현대의 사회학이 직면한 위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학적 인식론 자체가 근대의 자연과학적 인식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학 역시 근대성의 위기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학방법론의 세 가지 쟁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존재론적 쟁점
학문의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는 방법론상의 존재론적 쟁점은, 사회학에서는 결국 그 대상이 되고 주제가 되는 사회와 사회현상의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논의가 된다. 존재론적 쟁점에서 대표적인 것은, 사회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사회실재론과 사회유명론의 대립이다.

 

사회실재론에서는 사회는 개인의 외부에 독자적 실재로 존재하면서, 개인에게 외적 구속력을 행사한다고 본다. 그리고 사회유명론에서는 사회는 개인을 떠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한다.

사회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E. Durkheim(1858∼1917)은 사회학은 사회현상인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데, '사회적 사실이란 고정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개인에 대하여 외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행위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학방법의 첫째 규칙으로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간주하라.'고 했다.

 

한편, G. Simmel(1858∼1918)은 사회는 단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의 총합에 대한 명칭일 뿐이라고 하여 사회유명론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명료하게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 개별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환경, 그리고 활동들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 전체에 있어서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짐멜을 포함하여 사회유명론적 입장이 사회학의 문제들을 모두 개인에게 환원시켜 심리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외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개인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상호 관계망을 통해 형성되고 재형성된다고 보며, 사회학은 바로 그러한 과정과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의 차이가 인식론적 문제와 연결되면서 사회학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론적 논쟁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의 문제를 비롯하여, 주체와 객체, 개인과 사회, 행위와 구조, 미시와 거시의 문제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모두 존재론적 쟁점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양자의 대립적 견해를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연결,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결론은 아직 없는 상태이다.

실증주의적 입장에서는 여전히 사회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며, 상징적 상호작용론과 현상학적 방법론 등은 사회유명론적 입장에 가깝다. 특히, 최근의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회학에서는 유명론적 입장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입장의 대립을 초래한 근원은 바로 서구 근대 과학의 인식론이 가지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다소 편차는 있지만 기존 사회학의 인식론은 서구 근대 과학의 인식론 일반이 가지는 인간 / 자연, 주체 / 객체라는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실재론적 입장이 두드러진 실증주의적 입장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더욱 뚜렷하다.

사회유명론에서는 개별화된 개인에 중점을 두어 따로 외부에 법칙을 가진 객체화된 사회를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나 사회에 대한 객체적 인식은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유명론에서도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나누어지며, 또 상호작용 과정과 사회관계를 대상화함으로써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개별화된 개인의 주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주의적인 한계를 보인다.

 

2. 인식론적 쟁점
인식론적 쟁점은 지식의 근거와 관련된 것으로, 학문의 성립 근거와 성격을 규정 짓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론적 쟁점은 사회학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하는 것으로, 방법론의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존재론적 쟁점이 사회학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면, 인식론적 쟁점은 사회학의 학문적 성격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즉, 어떻게 획득된 지식을 사회학적 지식이라고 하며, 그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존재론적 입장과 인식론적 입장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사회학에서 인식론적 쟁점의 차이는 실증주의적 방법과 해석적 방법으로 포괄될 수 있는 반실증주의적 방법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실증주의적 방법은 사회실재론적 입장을, 해석적 방법은 사회유명론적 입장을 취한다. 전자는 경험과 관찰을, 후자는 감정 이입과 추체험을 통한 이해를 사회학적 지식의 획득 방법과 근거로 삼는다. 이렇게 지식의 획득 방법과 근거에 관한 입장 차이에서 출발하는 인식론적 쟁점은, 지식의 보편성과 상대성의 문제로 나아간다.

 

실증주의적 입장은 경험(실험)과 관찰을 통해 획득되고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지식을 과학적 지식이라고 하며, 그러한 지식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으로 일반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없거나 검증하기 어려운 지식은 과학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스스로 보편성과 일반화의 여지를 깎아 버린다. 이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되고 양화된 '자료'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료'를 현실로 보게 되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즉, 실제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검증될 수 없거나 양화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인간의 사회적 삶의 많은 부분이 사회학의 고려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보편적인 합리성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출발했던 실증주의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전제적인 인과관계로 가정한 변인들에 설명을 귀속시키는 사회학적 환원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된다. 문제는 여전히 지배적 주류가 실증주의적 경향성을 가지고 사회학의 과학성을 주장하며,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합리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이러한 한계를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석적 방법론에서는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외현적 지식보다는 인간의 내적인 과정에 주목한다. 이들은 직관, 감정 이입, 추체험의 방법을 통해 행위자들의 행위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현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해석적 방법에서의 사회학적 지식의 근거는 관찰자에 의해 주관적으로 의미가 부여되고 구성된 이해와 해석이라는 점에서 상대주의의 한계에 부딪친다.

한편, 맑시스트 사회학과 비판이론 진영에서는 유물론적 인식론의 입장을 취한다. 즉, 이들에게 사회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과학적 지식은 유

 

물론적으로 규정된 지식이다. 강조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지식은 물질적 토대인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 상부 구조로 파악한다. 이들의 인식론은 이러한 점에서 반영론적 경향을 가지며, 계급의식과 역사의식, 실천의 강조 등에서는 목적론적 경향도 보인다. 그리고 총체성을 강조하지만 그 총체성도 기본적으로 토대에 의해 규정된 총체성이다. 즉, 이들의 총체성은 동양사상에서처럼 우주, 자연, 인간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는 일원론적 총체성이 아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물질 / 정신, 자연 / 인간, 토대 / 상부 구조라는 변증법적 정 / 반 관계의 대립, 모순에 의해 파악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전제된 총체성이다.

 

이러한 사회학적 인식론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그럴듯한 대안의 제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기존 사회학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근본적 검토와 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현재 서구 사회학은 다양한 조류에도 불구하고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적 사고가 안고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학은 인식론적으로는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간에 기본적으로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베이컨이 자연을 대상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인식의 목적으로 삼고, 데카르트가 인식의 주체로서의 '나'를 연장 실체로서의 물체와 구별한 이후,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이 서구 학문의 공통적인 인식 틀이 되었던 것이다.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과 상대성의 문제도 결국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서구 근대의 지배적인 '합리적 인식' 방법의 배경이 되면서 더욱 불거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서구 사회학에서도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여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이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거기에 토대를 둔 거대 담론인 일반 이론의 해체를 주장하며 '사회학 이론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들이 해체주의 사고의 원천으로 즐겨 인용하는 니체나 하이데거의 핵심을 벗어난다. 즉, 니체의 근원적 니힐리즘을 통한 일체 가치의 전환과 영원회귀사상, 하이데거의 존재 해명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간과한 채, 해체와 차이, 다양성만을 주장함으로써 '해체하고 있는 자'의 근원적 자기 반성과 성찰은 상실된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유명론적 경향의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귀결되며, 여전히 합리주의적 사고의 한계인 표상적 인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오늘날 사회학의 정체성 위기라는 문제는 단순한 세부적인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 사고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적 사고가 가지는 인식론과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 사회학의 인식론적 틀이 되는 합리주의의 표상적 차원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채 대안을 모색한다면, 대안의 모색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인식론적 틀이나 인식론적 전제가 바로 한계가 되기 때문에, 위기의 극복과 대안의 모색은 기존의 인식론적 전제를 검토하고, 인식론적 전제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인식론을 바탕으로 사회학이 거듭나 새로운 사회학의 정체성을 확립할 때,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서구의 근대적 사고와는 다른 인식 차원을 보여 주는 선불교의 깨달음의 인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3. 가치론적 쟁점
가치론의 문제는 존재론과 인식론과 결부되어 학문의 목표와 실천, 실용성문제로 연결된다. 가치론적 쟁점은 인간의 이해관계가 관련된 사회현상을 사회학이 어떻게 접근하고 현실적 실천의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의 문제로, 인간 사회가 규범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도덕이나 윤리, 규범에 대한 당위적 주장은 사회학의 근본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실증주의적인 가치 중립의 입장을 취하든, 맑스주의나 비판이론에서처럼 적극적 가치 판단과 이론과 실천의 융합을 꾀하든, 현실적인 사회학적 연구 활동이 그 출발점인 대상 선정에서부터 이러한 가치 판단과 관련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학문적 연구 활동의 시작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의 사회적 삶 자체가 윤리와 도덕, 가치의 문제, 나아가 인간이 발 딛고 사는 토대인 사회적 환경의 문제와 따로 분리될 수 없다는 엄연한 실존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을 '현실 과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회학이 사회의 현실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지칭한다면, 여기서는 무엇이 '과학'이냐 하는 문제보다 무엇이 '현실'이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된다.

 

인식론적 쟁점에서 실증주의적 방법이 과학적 지식의 근거를 실증적으로 검증된 지식에 둘 때, 이것이 지식의 신뢰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면, 무엇이 현실이냐의 문제는 사회학이 다루는 지식이 과연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냐 하는 지식의 타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신뢰성이 외형적이고 양적인 측면과 더 관련된 것인 데 비해, 타당성은 내용과 질적인 측면에 더 관련된다는 점에서, 무엇이 현실적이냐의 문제에서는 신뢰성보다 타당성의 확보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원래의 목표에 맞게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학의 정체성 위기의 문제는 형식논리적인 사회학의 '과학성'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사회적 삶에 어떻게, 얼마나 다가가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론적 쟁점이 되는 사회학의 목표와 유용성, 실천의 문제는 단순히 가치 판단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할 것인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와 결부되는 총체적인 학문관의 문제가 된다.

 

사회학의 목표와 함께 가치론적 쟁점이 되는 것은 사회학의 유용성과 실천의 문제이다. 실증주의와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는 주류 사회학은 대체로 존재(sein)와 당위(sollen), 즉 사실과 가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이들은 사회학의 목표와 유용성, 그리고 실천을 사실의 규명으로 제한한다. 즉, 사회학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구분하여, 사회학적 실천에서는 학자는 가치 중립이어야 하며 사실의 규명만을 사회학자의 실천이라고 보고, 사회적 현실에서의 실천은 학자로서의 실천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실천이라고 본다.

이에 비해 맑스주의와 비판이론에서는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며, 적극적 가치 판단을 통해 사회학에서도 당파성을 견지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가치 중립이 사실은 기득권자들의 현상 유지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Ⅳ. 돈점논쟁의 사회학적 함의
앞에서 나누어 살펴본 사회학방법론의 세 가지 주요 쟁점은 논의의 편의상 그 초점을 다르게 맞추어 본 것이지, 실제로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존재론적 쟁점은 사회의 실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인식론적 쟁점은 학문적 지식의 전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가치론적 쟁점은 학문의 목표와 실천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 쟁점들이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점에서, 결국 사회학방법론의 쟁점은 넓은 의미의 인식과 구체적 현실에서의 실천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회학방법론의 쟁점이 궁극적 인식의 문제인 깨달음과, 참된 실천의 문제와 관련되는 닦음에 관한 견해를 다루는 돈점논쟁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돈점논쟁에서 쟁점이 되었던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를 사회학 방법론의 쟁점과 연결지어 사회학적 함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쟁점에 대해 돈점논쟁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문제가 가지는 시사점을 인식의 3차원을 기준으로 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1. 선불교의 세계 인식과 존재론적 함의ː현존재적 실재론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인식에서 볼 때, 사회의 실재 여부를 문제삼는 존재론적 쟁점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 깨달음은 형상이 아닌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므로 사회학방법론의 존재론적 쟁점에서 문제삼는 대상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사회학에서의 존재론적 쟁점은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서, 사실상 인식론적인 관점의 문제로 전환된다고 보면,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에 대한 시사점은 불교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언급을 보자.

 

"삼계가 혼돈하여 일어났으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마음을 관하는 이 법이 일체를 다스린다."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겨난다."
一切唯心造라면, 사회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러한 언급에 비춰 볼 때, 불교는 사회실재론적 입장인가, 아니면 유명론적 입장인가? 김호성은 불교는 기본적으로 유명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서구 중세철학의 실재론과 유명론을 잘못 이해했거나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실재론은 '보편은 실재성을 가지고 개별적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는 주장이고, 그에 대립되는 유명론은 '보편은 단순히 이름일 뿐이고, 다만 개별자만이 실재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불교의 三法印에 나타나듯이 諸行無常이고, 諸法無我이며, 一切皆空이라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인식은 서구 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론도, 유명론도 아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공, 또 {금강경}의 '凡所有相皆是虛妄'이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바깥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론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諸法無我에서는 개별자의 실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를 유명론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마음, 불성, 본래 성품, 본래 면목, 깨달음 등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그것은 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재론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형상은 아니지만, 다만 이름일 뿐인 것은 아니다. 有無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태어나기 이전이나 이 육신이 흩어져도 頭頭物物이 다 가졌다고 하는 그 불성은 不生不滅하며, 항상 언제 어디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達磨血脈論}에서도 '본심이 항상 현전'한다고 하며, 또 경전을 인용하여 '있는 것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

 

{禪門正路}에서 인용하는 여러 經論에서도 깨달음의 常寂常照와 寂照의 現前함, 菩提의 實相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보편의 실재를 분명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실재론과 유명론의 문제도 어느 차원의 인식에서 논의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입장이 드러날 것 같다. 보편을 형상의 문제로 실재와 유명을 따진다면, 그것은 표상적 차원이다. 그러나 형상이 아닌 깨달음에서 말하는 現前과 實相, 實在의 문제는 존재 차원의 인식을 근거로 하는 실재이다. 따라서 불교의 존재론적 입장을 두고 실재론이냐 유명론이냐를 따지는 것도 세 차원을 같은 평면에서 보면 차원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된다. 굳이 말하자면, 불교의 존재론적 입장은 현존재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재적 실재론, 즉 현존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주객이 분리되어 상대적으로 대상화됨으로써 외재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매순간 동시성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고정된 형상이 아닌 諸行無常으로서의 실재를 말한다. 부처나 깨달음도 도달해야 할 저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에 개별자와 함께 현전하며 있는 것이다. 다만, 표상적 인식으로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면 현존재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세계 인식은 사회학의 존재론적 쟁점에 어떤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주는가? 인식의 세 차원에 비춰 볼 때, 사회학방법론의 존재론적 쟁점은 사회실재론이든 사회유명론이든 사회를 어떤 식으로든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표상적 차원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다. 사회실재론과 사회유명론의 대립은, 엄밀히 말해서 '사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혹은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철학적 존재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로 전이된 문제이다. 따라서 사회를 실재적으로든 유명적으로든 이미 대상적으로 전제하고 '그러한 사회가 개인의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이나 개인들의 집합 또는 상호작용 과정이나 관계의 망으로 볼 것이냐?' 하는 논쟁이다.

 

앞의 두 질문에서와 같이 그 본질과 존재 해명을 근원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회학자들은 그것은 철학적 존재론의 문제이지 사회학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접어둔 채, 사회학을 미리 한계 짓는 것이 이미 출발에서부터 사회학이 오늘날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즉, 표상적 차원에서 사회를 대상적으로 규정하여 전제하는 것이 사회학의 존재론적 한계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현상학이나 해석학을 원용하여 현존재적 차원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현실을 사실상 다시 관찰의 대상으로 物化하거나 주관적 상대주의로 흘러 표상적 차원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근원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리 전제한 사회 개념에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점에서 근원적 인식의 전환을 통해 현실의 일체를 긍정하는 선불교의 현존재적 실재론의 세계 인식은 사회학의 존재론적 쟁점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주체와 객체, 즉 개인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고 일원적으로 동시에 파악하며, 현실적 인간의 문제를 전체로서 인식하려는 관점이 그것이다. '영원한 진리를 현실적인 것에 입각하여 생각'하는 선불교의 세계관은 한계에 다다른 사회학의 사회관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세계관이나 사회관의 변화가 아닌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표상적 차원의 근대적 사고를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학의 전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悟의 인식론적 함의ː성찰적 사회학을 위한 사회학자의 자기 성찰
인식이란 어떠한 형태든지 인간의 인식 작용과 행위를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식의 근거는 바로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사회와 사회현상을 어떤 식으로 전제하든 인식론적으로 지식의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학적 인식론은 사회학을 성립시키는 과학적 지식의 근거를 문제삼으면서,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에 대한 근원적 성찰은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회과학에 원용하여 실증적으로 검증된 지식만을 사회학적 지식으로 하려는 실증주의에서는, 합리적 인간 일반을 추상적으로 전제한 채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 획득에 중점을 두어 주체의 구성적 측면에 대한 성찰은 당연히 간과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칸트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해적 방법론과 상징적 상호작용론, 현상학적 방법론 등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증주의를 비판하며 객체에 대한 객관적 인식보다 주체의 대상 구성과 상황 정의,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내용을 사회학적 지식으로 했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사회학적 지식의 근거와 중점을 객체에 대한 지식에서 주체의 능동적 창조적인 이해와 해석으로 옮기긴 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문제 제기나 주체의 자기 성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주체의 구성을 강조하며 주체와 객체, 자아와 사회를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려는 반이원론적인 지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상적 인간관에 머무름으로써 주객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한 채 표상적 차원의 상대주의적 인식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맑스의 노동하는 인간, 베버의 문화인, 미드의 상징 해석자 등 사회학의 지배적인 인간관에서의 인간은 객체와 자연과 분리된 인간이며, 객체와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으로서 베이컨, 데카르트 이후의 서구의 근대적·합리적 인간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회학적 인식론의 한계는 인간 자신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결여된 추상적 인간관 일반을 가정하고, 사회학이 '과학'임을 강조하여 사회학적 지식의 근거를 스스로 한계 짓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회학의 위기의 근원이 되는 사회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찰적 사회학, 사회학의 사회학, 지식 사회학 등에서 사회학의 자기 성찰을 얘기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학적 연구 성과로 나오는 진술과 이론이 시대적·사회적 제약을 가진다는 상대적인 의미의 성찰일 뿐이다. 거기에는 사회학을 하는 바로 그 현장에서의 학자 개개인의 구체적 자각과 반성이라는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즉,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과 사회학자 자신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이 점에서 트리그(Roger Trigg)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마음속에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지 않고는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욕구와 이해관계에 관한 대부분의 기본적인 개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없이는 인간 사회를 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면하지 않고는 한 사람의 사회과학자가 될 수 없다. … 우리는 사회과학의 실천이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서의 인간의 역할에 관한 철학적 가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 사회과학의 철학은 경험적 연구들이 꺼리는 선택적 행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회과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다.

 

사회학에서 문제삼는 모든 사회현상, 즉 사회적 행위, 사회적 상호작용, 사회관계, 사회구조, 사회제도 모두가 인간의 일이고, 거시적 접근이든 미시적 참여 관찰이든 어떤 자료를 검증하든 인간과 사회를 보는 연구자의 자기 시각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사회학이 세계 내 존재인 역사적 현존재로서 사회학 하는 자의 자기 반성, 즉 "사회학 하는 놈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결여된다면, 그 출발부터 잘못일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을 모르고서 인간의 삶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현장인 사회를 어찌 알 수 있으며, 자신을 모르고 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학문에서 인식의 객관성은 인식하는 자가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입장을 자각함으로써 얻어진다. 왜냐하면, 자각이 없으면 의미 있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며, 나아가 사물의 眞相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반성이 결여되면 活  智로써 생생한 현실 인식을 놓치고 언제나 추상화되고 대상화된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표상적 차원에 머물고 만다.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의 인식원리는 인간 개개인의 자기 성찰과 깨달음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주관적인 상대성에 머물지 않고 自他不二와 一卽全의 보편성의 깨달음임을 분명히 한다. 동양사상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格物致知, 知天命, 得道, 깨달음 등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표상적 차원의 알음알이나 分別智, 小知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인식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 지식의 획득은 단순히 목표로서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體得되고 體現되어 실천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점에서 선불교는 다른 어떤 사상보다 훨씬 더 근본적(radical)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어느 경우든지, 자기 깨달음을 준거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관하는 것으로 시종한다. 깨달음은 어떤 절대적 존재나 외부의 힘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반성을 통한 자각과 자기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돈오의 인식원리와 태도는 사회라는 바깥의 대상을 주로 문제삼아 온 사회학에 근원적 반성과 성찰을 하게 한다. 돈오의 깨달음은 인간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획득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또한 그것이 상대적인 주관적 알음알이가 아닌 궁극적이고 참된 깨달음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인식의 보편성과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점은 현재 사회학이 직면하고 있는 상대주의와 환원론, 불가지론적 경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사회학뿐만 아니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근대 학문 일반이 사실상 학문의 진리를 상대적 진리로 격하시켜 버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구 철학의 해석학에서 모더니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도된 아르키메데스의 기점의 포기는 해체주의에서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해체주의는 이데올로기화, 물상화된 근대적 이성과 그 산물을 해체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한 번 더 자기 부정을 통해 참다운 깨달음으로 회향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상대화시키고, 차이와 타자만을 부각시켜 근원적인 자기 성찰이라는 부분을 망각해 버렸다.

 

해체주의는 근대 철학이 문제삼았던 인식론과 존재론, 가치론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분에 의한 접근 자체를 거부한 채 문화·네러티

브·신화 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인식론과 가치론,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다. 동일자, 주체의 해체를 선언하며 타자를 부각하고 차이를 중시하는 이들의 입장은, 동일시에서 오는 주관적 편견과 거대 담론의 이데올로기적·제국주의적·폭력적 측면을 폭로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체를 해체하고 이론의 종말을 주장하며, 정작 그렇게 주장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은 거의 전적으로 결여됨으로써 그들의 주장과 담론은 상대화되고 파편화되어 지식의 극단적 상대주의로 흐른다. 이것은 고대의 소피스트가 자기 중심적인 주관적 상대주의였다면, 타자 중심의 상대주의로서 역시 소피스트적인 자기 주장일 뿐이다.

중국 선종이 돈오를 주창하면서 敎家의 상대적 지식이나 念佛, 誦經, 持戒, 布施 등에 대한 모든 이론과 실천의 행위가 견성하지 못한 것일 때는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한 것이 기존의 인식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저한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듯이, 頓悟思想은 오늘날의 사회학(나아가 학문 전반)에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 동안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인간 자신의 내부로 돌리게 함으로써, 또 표상적 차원의 인식을 현존재적 인식으로, 근본적으로는 존재 차원으로 회향시켜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하도록 하는 바로 이 점이, 사회학에 주는 큰 시사점인 것이다. 즉, 돈오의 원리는 올바른 안목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올바른 연구가 나올 수 없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학이 참으로 성찰적 사회학이 되기 위해서는, 서구 합리주의의 한계와 존재 피구속성이라는 상대주의나 불가지론, 환원론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미리 전제한 추상적 인간관을 지양하는 보다 철저한 인간 본성에 대한 穿鑿과, 사회학자 개개인의 省察과 自覺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성찰과 자각 없이는 연구 활동 자체가 자기가 소외된 활동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돈오사상은 경계하는 것이다.

 

3. 修의 가치론적 함의ː平常心是道의 具現으로서의 일상생활의 사회학
깨달음이 알음알이의 체계화인 理論이 아니듯이, 돈점논쟁에서 悟와 修의 문제는 단순히 표상적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이론과 실천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의 세 차원을 포괄하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인식이 앞에서 본 것처럼 세 차원으로 나누어지듯이, 실천의 문제도 인식의 세 차원과 연결지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修를 세속적 기준이나 표상적 차원에서 역사적·사회적 실천의 자비행이나 보살행으로 이해하면, 돈오 이후의 修를 논의하는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修가 아니다. 적어도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 하는 돈점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修는, 깨닫기 이전의 깨달음을 위한 修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돈오 이후의 깨달음에 의한 깨달음의 닦음이다. 닦음 없는 닦음으로서의 眞修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론적 쟁점이 되는 가치 판단과 실천의 문제는 일체의 분별과 가치 판단에 대한 부정과 해체이면서, 동시에 일체의 절대 긍정인 가치 자유의 실천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가치 판단, 분별심이 없기에 있는 그대로가 모두 道임을 자각함으로써, 구할 것도 분별할 것도 가치 판단할 것도 없고, 닦아야 할 것도 원래 없어, 그야말로 대자유 대해탈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돈오 후의 修요, 실천이다. 이것은 세속적·표상적 차원의 역사적 실천이나 사회적·윤리적 실천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세속에 무관하게 고통받는 중생에게 무관심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되 세속적 가치관에 끄달리지 않는 자세로, 오직 깨어서 일체의 세속적 삶 속에서 佛性이 現前하고 있음을 보며, '入廛垂手' 하여 술집과 어물전에서도 敎化함으로써 成佛하게 하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돈점논쟁에서 말하는 修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 사회학의 가치론적 쟁점은 너무나 표상적 차원의 세속적 가치 판단에만 이끌려서 과학적 엄밀성이나 실용성, 당파성 문제 등을 논의해 왔다. 그 결과 현실 학문이라는 사회학은, 한편으로는 현실보다 과학적 형식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현실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제하고, 소위 과학의 틀에 맞는 것만 다루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실용성과 당파성을 강조함으로써 사회학을 도구적인 학문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러한 상황이 인식론적 한계와 결합되면서 가치론적으로도 도대체 '"사회학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문제 제기로서 사회학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하는 것이다.

 

목표와 실천적 지향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억압적 구조를 변혁하는 것이든,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든, 소외된 삶의 극복이든, 아니면 순수하게 지적 호기심이나 자료의 분석과 설명에 그치는 것이든, 이러한 입장의 다양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부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밝혀 내고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의 시도는 바로 그렇게 직면하는 현실로서 사회학자 자신의 일상적 삶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학의 가치론적 쟁점은 학문적 목표와 이론에 앞서 이미 그 목표와 이론의 전제가 되는 사회학자의 일상에 대한 구체적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돈점논쟁에서 悟와 修의 문제를 단순히 이론과 실천의 문제로 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돈점논쟁이 사회학의 가치론적 쟁점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론과 실천, 실용성의 문제에 앞서, 일상적 삶에 대한 총체적 인식(깨달음)과 그것의 실천으로써 참된 닦음에 대한 논쟁이 지금까지 표상적 차원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던 사회학에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기를 바로 보는 데서 시작하여 일상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平常心是道를 活  하게 구현해 가는 것이 선가의 깨달음과 닦음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에서 돈오가 해오냐 증오냐 하는 논란이 있지만, 일단 점수든 돈수든 돈오 이전의 닦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돈점논쟁에서 말하는 닦음은 이론의 적용이나 개선, 변증법적 시행착오를 통한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 십우도에서 말하는 '返本還源' 다음의 '入廛垂手'로서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과 닦음은 현실 학문임을 자칭하면서도 현실을 표상화하고 대상화함으로써 오히려 일상의 생생한 삶과 유리되어 왔던 사회학에 근본적인 반성을 하게 하며, 실천의 문제도 학자 개개인의 일상에서의 성찰적 자세에서 비롯됨을 인식시켜 준다. 그러면서도 시장바닥과 같은 일상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떠나 실천이 따로 이루어지는 곳이 없음을 분명히 해준다.

禪은 일상적인 잡다한 세계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철저히 드러내는 데서 인간성의 진실을 발휘했다. 선문답은 영원한 진리를 현실적인 것에 입각하여 생각하려는 것이며, 일상의 세계를 항상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실제로 인간의 문제는 부분이 언제나 전체이다.' 사회학의 실천은 바로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사회학 하는' 실천이 될 때, 참으로 '현실 학문'이라는 이름에 값할 것이다.

Ⅴ. 맺음말
방법론은 학문과 이론의 전제가 되는 관점, 시각, 태도와 자세 등을 문제삼는 것이다. 즉, 학문과 이론의 전제 자체를 문제삼는다. 그러므로 방법론은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끊임없는 성찰과 반성을 하게 함으로써 논의를 명료하게 하며, 그것을 통하여 학문 인식의 폭을 넓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법론은 존재의 문제, 인식의 근거와 한계의 문제, 학문의 목표와 가치, 실천의 문제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을 통해 학문이 학문이게끔 하는 것이 방법론이다. 구체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문제를 다룰 때의 전제가 되는 관점과 태도를 문제삼음으로써 문제에 대한 접근과 관찰을 무엇 때문에, 왜, 어떻게 하는지를 반조하게 하여, 학문 활동 자체가 바깥의 대상에 얽매여 소외된 활동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학방법론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전제가 되는 태도, 자세, 관점을 낳는 '인식 자체'를 자장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 방법론은 대상으로서 사회현상을 연구·분석하는 도구적·수단적 방법에 대한 논의가 아닌 것이다. 방법론은 사회학이 현상은 연구하기 전의 전제와 가정을 문제삼는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사회학 함에 임해야 하고 현상에 다가가야 하는지의 방법에 관한 논의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보았듯이, 사회학방법론의 주류는 표상적 차원에서의 사회 인식과 지식의 근거와 한계, 목표와 실천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사회학적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미리 전제한다. 상대적이고 점차적인 지식의 축적, 역사적·사회적 실천을 문제삼아 왔다. 나름대로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논쟁일 뿐이며, 또 목표에 대해서도 통일된 견해가 없다. 대체로 가치와 사실을 엄격히 구분하고, 주로 사회적 사실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치중해 왔던 사회학은, 현상에 대한 설명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학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역사와 철학의 샛길'에서 실천적 지향과 목표를 뚜렷이 가지고 출발했던 사회학이 오늘날에 와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돈점논쟁은 사회학이 지금까지 간과했던 자기 성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그 원인을 찾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고는 사회학 하는 활동 자체가 자기 소외된 활동임을 반성하게 해준다. 인간과 삶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재고하도록 해준다.

위의 방법론의 쟁점을 검토하면서 보았듯이, 지금까지의 사회학은 표상적 차원의 인식에서 사회를 대상화하고, 대상에 대한 지식을 과학적 형식으로 한계 짓거나 대상화하였다. 또 인간의 삶을 다루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사회학 하는 학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은 없이, 전제로 가정한 목표와 실천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학문의 전제가 곧 학문의 한계이다. 전제를 하기 전에 먼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방법론은 사회현상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사회학 하는 전제로서 자기 인식, 자기 성찰을 하는 자세와 방법을 문제삼음으로써 시각이 고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베버(Max Weber)는 "자료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관점이 크게 바뀌어 새로운 관점으로 지금까지 전수해 온 과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해 왔던 논리적 형식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과학이 원래 지녔던 업무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이 일어날 때, 방법론적 논쟁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을 열고, 쿤 (Thomas Kuhn)이 말하는 것과 같은 기존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근원적 자기 성찰이 없는 표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때는 여전히 인간과 자신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사회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대상화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이 열리고 패러다임이 변화하더라도 인간과 그렇게 관점을 열고 변화시키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또 하나의 상대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큰 의미는 없을 뿐더러, 이전의 문제를 해소하기보다는 또 새로운 문제를 파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점논쟁은 바로 지금까지 사회학이 간과했던 자기 성찰,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상대적 지식이나 표상적 인식으로는 안 된다는 선불교의 혁명적 성격은, 지금까지 거의 표상적 차원에 머물렀던 사회학의 인식 차원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문제삼는다고 그 인식에서 근원적인 성찰이 빠진다면, 올바로 문제삼을 수가 없다.

사회학은 지금까지 철학을 원용하고 인용하면서 오히려 원래 철학이 가졌던 뜻도 잘 살리지 못하고, 구체적인 사회 현실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물화된 상대적 설명으로만 그치고 궁극적인 인식, 앎, 진리 등에 스스로 등을 돌림으로써 학문 활동 자체가 소외된 노동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현존재적 지향성이 뚜렷한 현상학을 원용하면서도 사회학에서는 그것을 표상적 차원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 근원적인 이유는 자기 성찰의 부재와 미리 전제한 사회 개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표상적 차원의 근대적 사고를 전제와 가정으로 성립한 사회학은, 전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자신의 인식은 표상적 차원에 있으면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모두 수용하고 회통시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의 차원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 존재 차원으로 회향할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사회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근대 사상의 대안으로 동양사상과 그 개념을 원용하더라도, 표상적 차원의 실용적 접근이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눈, 인식 자체가 표상에서 존재로,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돈점논쟁이 사회학방법론의 쟁점에 던져 주는 시사점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바로 보는 데서 다른 사람과 사회를 바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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