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위빠사나 禪과 精神健康

醉月 2013. 1. 17. 02:00
姜 健 基

 

Ⅰ. 머리말
印度의 寓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끼 한 마리가 도토리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게 되었다. 잠이 막 들었는데 도토리 하나가 머리 위에 ‘딱’하고 떨어졌다. 잠결에 놀란 토끼는 `야` 무슨 변이 난 모양이다’하고는 뛰기 始作했다. 이를 본 다른 토끼들도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함께 뛰기 始作했다. 그 山에 사는 노루, 사슴, 돼지 등 다른 짐승들도 ‘큰일이 났구나’하고는 덩달아 뛰었다. 일단 뛰기 始作하자 짐승들은 서로 競爭이 되어 앞서가기 위해 疾走하였다. 그것은 아주 危險千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낭떠러지라도 만나게 되면 줄줄이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사자는 드디어 威嚴을 갖추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너희들 어디를 향해 이렇게 달리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사자는 "그러면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리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역시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寓話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덩달아 뛰고 있는 저 토끼를 爲始한 짐승들의 모습은 現代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科學과 技術이 高度로 發達된 世界에 살고 있다.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 3의 물결, 즉 情報通信革命의 시대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그러한 結果로 지구는 하나의 마을로 縮小되고 있으며, 컴퓨터를 爲始한 情報通信의 利器는 나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삶도 熾熱한 경쟁속에서 점점 더 분주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치열한 경쟁속에서 奔走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챙겨볼 여유가 없다. 마치 어디를 향하는지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남이 뛰니까 덩달아 뛰는 저 토끼를 爲始한 寓話 속의 짐승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이 과연 잘 사는 삶일까 하는 質問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지금 마음의 平安을 얻고 調和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質問에 누구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答을 할 수 없는 데에 現代의 苦悶은 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잃고 人間과 人間, 人間과 自然 및 다른 生命들과의 調和로운 關係를 잃고 있다. 그래서 高度의 緊張과 不安, 憂鬱症, 無力感 등 이른바‘世紀의 病’이 蔓延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現代人의 精神健康은 赤信號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存在의 實相에 눈떠서 不安, 恐怖 등 一切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安心立命 離苦得樂〕모든 生命을 이롭게 하려는 가름침인 佛敎는 이러한 現代人의 문제를 外面할 수 없다. 佛敎는 참 나의 完全한 實現을 통해 同體慈悲의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을 理想으로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위빠사나(Vipassana) 禪이 精神健康과 어떤 關聯이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위빠사나 禪의 位置와 內容, 그리고 그 特性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위빠사나 禪이 精神健康과 어떤 關聯이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더욱 平安하고 健康한 삶이 과연 어떤 것인지도 摸索될 수 있을 것이다.

Ⅱ. 위빠사나 禪
1. 위빠사나 禪의 位置
大乘에서 禪은 中國에서 發達된 것으로서 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傳統을 가리킨다. 西洋에서 Zen으로 알려진 禪이 바로 이것이다. 특히 韓國에서 通行하는 看話禪도 이 傳統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傳統은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千年도 훨씬 지난 時期에 發達된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 당시에 實踐된 禪法은 어떤 것일까 하는 疑問이 提起된다.

 

解脫에 이르는 實踐으로 붓다가 가장 强調하였던 것은 八正道, 즉 여덟가지 바른 實踐이다.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의 實踐은 初轉法輪때부터 매우 强調되었다. 이 가운데 禪定法에 該當되는 것은 正定과 正念 두 가지다. 正定은 마음을 한 곳에 모두어 三昧을 이루는 修行으로서, 止觀으로 나눌 境遇 止(Samatha)에 該當된다. 그리고 正念은 마음을 밝게 가져 事物을 있는 그대로 觀察하는 것으로 觀(Vipassana)에 해당된다. 위빠사나가 바로 그것이다. 이 修行은 三十七助道品(Bodhipakkhiyadahamma)의 四念處(Satipatthana)와 五根〔念根〕, 五力〔念力〕에도 包含되어 있다.

 

위빠사나 禪은 붓다가 解脫에 이르는‘唯一한 길(ekayanamagga)’이라고까지 强調하였고 오늘날까지 南方佛敎에 잘 傳承되어 왔으며, 近來에는 서구에도 널리 알려진 修行法이다. 이 수행법은 大小乘 經典에 널리 說해지고 있으나,『長部』「大念處經(Mahasatipatthana Sutta)」과 『中部』「念處經(Satipatthana Sutta)에 자세히 說해져 있다. 여기서는「念處經」에 입각하여 위빠사나 禪의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2. 위빠사나 禪의 內容

위빠사나 禪은 무엇이며 어떤 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目標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念處經」序頭에 이렇게 설하고 있다.
比丘들이여, 여기 衆生〔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苦惱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진리(眞理)의 길에 들게 하며 涅槃을 證得하게 하는 唯一한 길이 있으니, 그것이 곧 四念처法이다.

 

이처럼 붓다는 四念처法을 1)衆生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2)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3)苦惱와 슬픔을 없애고 4)바른 眞理의 길, 즉 八正道에 들게 하며 5)마침내는 涅槃을 얻게 하는 唯一한 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注目을 하게 된다. 첫째, 위빠사나 禪은 바른 眞理의 길에 들어서 涅槃을 얻는 길일뿐만 아니라 衆生들의 마음의 病을 治癒할 수 있는 길임을 具體的으로 明示하고 있는 점이다. 즉, 貪瞋痴 三毒으로 더러워진 衆生의 몸과 마음을 淸淨하게 할 수 있고 不安과 恐怖, 슬픔과 苦惱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中國에서 發達된 禪이 오직 깨침 그 自體에만 焦點이 맞추어진 것과 比較해 볼 때 위빠사나 禪, 初期佛敎의 가르침이 얼마나 仔詳하고 親切한 것인가를 잘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런 衆生들의 마음의 病을 治癒하고 마침내 聖스러운 길에 들어 涅槃을 證得하는‘唯一한 길(ekayanamagga)’이 바로 四念處法, 즉 위빠사나 禪이라는 事實이다. 이처럼 붓다는 이 修行法의 優秀性을 强調하였다. 經의 끝에서는 또 누구든지 이 修行을 7年 내지 7日 동안만이라도 法대로 닦으면 阿羅漢果를 證得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禪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몸, 느낌, 마음, 生角의 對象, 즉 身·受·心·法을 觀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를 觀한다고 해서 이것을 四念處法이라고 한다. 우리는 순간 순간 어떤 對象을 만나 그에 대해 生角을 일으키고 反應을 나타내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對象 그 自體에 精神이 팔려 나 自身에 대해서는 별로 關心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밖의 것에 대해서는 잘 아는 듯 하지만 自身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한다. 나의 참 모습에 눈뜨기 위해서는 실제 순간 순간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作用하고 있는지를 觀察하는 것이 위빠사나 禪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禪을 西洋에서는 Insight Medit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으로 自身을 觀하는 冥想이기 때문이다.

몸〔身〕에 대한 觀察에는 1)呼吸에 대한 觀察 2)몸의 움직임에 대한 觀察 3)몸을 構成하는 四大와 32部分에 대한 觀察 4)그리고 共同墓地에 버려진 屍體가 변해 가는 이른바 九想觀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呼吸과 몸의 움직임에 대한 觀은 중요하므로 경전의 내용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자. 먼저 呼吸에 대한 관찰이다.
 
比丘가 숲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 하고 앉아 오로지 한 生角으로 呼吸을 調節하되, 길게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짧다는 것을 알아라

 

그리고 몸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이다.
이 몸을 觀察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때에는 앉고 누워있는 狀態를 바로 보아라
다음으로, 느낌〔受〕에 대한 觀察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세 가지 느낌을 그대로 觀하는 것이다. 즉, ‘즐거움을 느낄 때는 즐거운 줄 알과,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러한 줄 아는’것이다.

 

마음〔心〕에 대한 觀察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生角들을 하나 하나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으로 經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떤 것이 마음을 觀察하는 法인가? 마음에 貪心이 일어나면 `이것이 貪心이구나`라고 알고, 貪心을 버리면 버린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解脫한 마음, 解脫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의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觀하라

 

끝으로 生角의 對象인 法에 대한 觀察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포함한다.

1) 다섯 가지 障碍(貪, 瞋, 昏沈, 悼擧, 疑)
2) 五蘊 (色, 受, 想, 行, 識)
3) 六根(眼, 耳, 鼻, 舌, 身, 意)
4) 七覺支(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平等)
5) 四聖諦(苦, 集, 滅, 道)

 

이상의 네 가지(身受心法)가 위빠사나 禪에서 말하고 있는 觀의 대상이다. 그러면 그 對象을 `어떻게` 觀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저 보라`〔bare attention, bare observation〕는 것이다. 이 修行의 核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그 對象을 槪念化하거나 主觀的인 平價와 生角, 偏見, 先入觀을 가지고 대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事物을 있는 그대로〔as it is〕보지를 못한다. `그저 보라`는 것은 事物을 事物대로 純一한 마음으로 보라는 것이다. 붓다는 Bahiya라는 사람에게 “볼 때는 보여지는 것만 있게 하고, 들을 때는 들려지는 것만 있게 하며, 생각할때는 단지 생각만 있게 하며, 알 때는 아는 것만 있게 하라”고 하였다.

修行의 實際에 있어서는 자연스런 호흡의 들〔入〕고 남〔出〕을 관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이나, 느낌, 몸의 움직임 등을 하나하나 밝게 보는 訓練이 주가 된다.

 

3. 위빠사나 禪의 特性

위빠사나 禪은 比較的 單純한 訓練임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을 淸淨하게 하고 걱정과 두려움, 苦惱와 슬픔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마침내 진리의 길에 들어 涅槃을 證得하게 하는 唯一한 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結果를 얻을 수 있을까? 위빠사나 禪의 特性과 함께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위빠사나 禪은 徹底한 自己理解, 自己實現의 修行法이다. 우리는 恒常 보여지는 것, 들려지는 것 등 바깥 對象을 향해 줄달음치면서 살고 있다. 따라서 "나"의 실다운 모습을 모른다. 그 結果는 "나다"하는 착각이며 貪瞋痴 三毒의 삶이다. 涅槃은 나의 참 모습이 다름 아닌 無常이요 無我라는 것에 分明히 눈뜨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三毒의 불길이 꺼진 狀態를 가리킨다.

 

위빠사나 禪은 나의 實相에 눈뜨기 위해 지금, 여기에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呼吸이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나`의 實相은 槪念이나 思惟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실제적인 `봄`을 통하여 `아하!`하고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몸도 마음도 있는 그대로 觀하면 間斷없는 生滅의 흐름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無常이요 無我라는 事實에 눈뜨는 것이 다름아닌 열반의 證得이다. 이처럼 위빠사나 禪은 徹底한 自己理解요 그를 통한 自己實現이다. `나`의 참 모습에 눈떠서 완전히 自己實現을 이룬 삶은 사물을 사물대로 볼 수 있고 宇宙와 모든 생명에 열려 있는 삶이며 참다운 慈悲를 나눌 수 있는 삶이다.

 

둘째, 위빠사나 禪은 自己分析的이다. 各自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觀함으로써, 自己의 생각이나 性向, 習性, 性格을 스스로 볼 수 있고 그것들로부터 自由로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을 淸淨히 하고 걱정, 두려움, 苦惱와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貪瞋痴 三毒을 爲始한 煩惱妄想들은 나의 實相을 모르는 無明의 業識으로부터 表出되는 어두운 기운들이다. 그것들을 밝게 보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들에 사로잡히어 自由를 잃게 되고 사물을 00해서 보게 된다. 그런데 사물을 밝게 비추는 觀이 있게 되면 어둠이 사라지듯 煩惱妄想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은 이를 `覺破`라 하였다. 즉, 妄念이나 生角이 일어남을 보면〔覺〕그것들이 없어진다.

 

〔破〕는 것이다. 慾心이나 미운 마음, 不安한 마음, 슬픈 마음 등 일어나는 쪽쪽 비추어 볼 수 있으면, 그것들에 물들지 않고 따라서 對象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음 역시 淸淨해 질 수밖에 없다. 자꾸 내려놓기 때문이다. 마음이 淸淨해지면 우리의 말과 行動도 淸淨해지고 그것이 다름 아닌 몸의 청정이다.

 

끝으로 위빠사나 禪은 自律的이며 創造的인 삶을 指向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다`하는 착각으로 그 對象을 만나면서 좋다, 싫다를 나누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貪着하고 싫은 것에 대해서는 미워하고 또 각기 그에 따라 行動을 한다. 그러한 行動의 結果는 潛在意識속에 影響力으로 남아 있다가 對象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잘못 사는 이른바 統轉緣起의 모습이다. 이 과정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생략)

 

이런 統轉緣起의 삶은 `나다` 하는 착각, 貪瞋痴 三毒으로 물든 自己中心的 삶이요 對象에 執着하고 이끌리어 盲目的으로 反應하는 삶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明徹한 觀을 통해 統轉緣起의 사슬을 끊을 수 있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對象으로부터 自由로운 主體的이고 自律的인 삶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對象에 대해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 觀이 미치지 못하면 그 생각으로 汚染된 좋지 않은 말과 行動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순간 미워하는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을 때는 다르다. 그 생각 自體가 필요치 않을 境遇 내려놓으면 행동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고, 또 필요하면 행동으로 나타내더라도 `對象에 먹힌` 狀態가 아니라 조용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淸淨해질 수 있고 自律的이며 創造的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統轉緣起로의 전환이다.

Ⅲ. 精神健康과 위빠사나 禪
지금까지 우리는 위빠사나 禪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제 위빠사나 禪이 精神健康과 어떻게 關聯될 수 있을지를 살펴볼 順序이다. 그러나 精神健康이란 말은 간단히 正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精神的으로 가장 健康한 狀態가 어떤 狀態인지를 構成해 볼 수 있다.

 

Erich Fromm은 精神的으로 健康한 狀態를 `平安한 狀態〔wellbeing〕`라 부르고 있거니와 우리는 다음과 같은 內容을 精神健康의 條件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 精神病이나 神經症 등 精神障碍의 不在

 2)마음이 지나친 貪着이나 미움, 不安, 恐怖로부터 벗어나 걸림이 없는 狀態

3)安心이 되어 事物을 事物대로 보고 自然과 이웃 등 모든 存在와 平和로운 共存을 이룰 수 있는 狀態.

이렇게 보면 精神的으로 完全한 健康狀態는 위빠사나 禪이 理想으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이 淸淨하고 不安이나 恐怖, 苦惱,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涅槃에 이르는 것이 위빠사나 禪이 指向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禪과 精神健康을 함께 논할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具體的으로 精神健康의 中心領域이라 할 수 있는 精神分析과 위빠사나 禪의 類似點과 差異点을 살펴봄으로써 위빠사나 禪의 精神健康的 側面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類似點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目標의 類似性이다. 無意識을 意識化하는〔to make unconscious conscious〕것을 基本으로 하는 精神分析은 말할 것도 없이 精神的 疾患의 治療를 目標로 한다. 즉, 問題되었던 症狀을 除去함으로써 사회에 잘 適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精神分析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完全한 人格의 實現을 목표로 한다. 에릭 프롬은 前者를 消極的 目標, 後者를 積極的 목표라 칭하고 積極的 目標를 平安한 狀態〔wellbeing〕라 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無意識을 意識的인 것으로 되게 한다는 것은 開放的으로 되고 反應的으로 되어 아무 것도 所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存在하는 것을 意味한다. 이 意識에 의한 無意識의 全體的 回復이라는 이 目標는 確實히 一般的인 精神分析學의 目標보다는 훨씬 根本的인 것이다........그것은 病의 除去라는 消極的 目的이 아니라 평안한 狀態의 回復이라는 積極的인 目標를 가리키는 것이며, 平安한 狀態란 全體的인 統一과 이 世界에 대한 直接的인 純粹한 把握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으로 充分하다.
그가 말하는 積極的인 目標 즉, `平安한 狀態`는 完全한 人格, 自己의 實現이며, 一切의 執着으로부터 벗어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고 調和롭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精神分析이 가장 健康한 삶인 `平安한 狀態`라는 積極的인 目標를 指向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빠사나 禪이 目標로 하는 涅槃의 證得과 통할 수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나의 實相에 눈 뜬 삶이 完全한 人格, 完全한 自己實現의 삶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빠사나 禪이 涅槃의 證得이라는 究極的 目標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없애고, 걱정과 두려움, 苦惱와 슬픔 등 마음의 병도 함께 治癒할 수 있다는 점도 注目할 만하다. 이런 마음의 병들이 精神疾患의 要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方法의 類似性이다. 精神分析의 境遇 精神的 障碍는 抑壓된 無意識的 慾望이나 苦痛스런 記憶, 葛藤 등으로 인해 事物이나 現象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歪曲해서 봄으로서 나타난다고 본다. 따라서 精神分析의 原理는 問題를 일으키는 抑壓된 無意識的 經驗을 意識世界로 떠올려 洞察하도록 하는데 있다. 洞察이 될때 自己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던 慾望, 苦痛. 葛藤, 不安, 恐怖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마침내 事物을 事物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프로이드는 `無意識을 意識化한다〔to make unconscious conscious〕`고 한 것이다.

 

無意識을 意識化하는 原理는 觀의 原理와 類似하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가지가지의 생각, 妄想들은 潛在된 無明業識으로부터 表出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밝게 觀察하지 못할때 이를 통해 事物과 對象을 보게 되고 따라서는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게 된다. 위빠사나 禪의 觀은 그 일어나는 생각들을 낱낱이 환히 비추어 보는 것이다. 밝게 보면 그 밝음 앞에서 無明의 어두운 기운은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물도 사물대로 보게 된다. 이를 知訥은 覺破라 했고, `생각이 일어나면 곧 그것을 보라, 보면 곧 없어진다`라고 했다. 이 覺破의 原理는 精神分析의 洞察과 類似한 구조라 하겠다.

 

셋째, 內的 洞察의 類似性이다. 위빠사나 禪과 精神分析은 다같이 人間의 問題는 外部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內部에 있다고 본다. 人間은 모든 煩惱, 苦悶, 괴로움은 自身의 內的 現實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데 起因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빠사나 禪과 精神分析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을 洞察할 것을 基本으로 하며, 그런 내적 洞察을 통해 마침내 執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빠사나 禪과 精神分析 사이에 이러한 類似點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差異点 도한 적지 않다.

 

첫째, 精神分析이 `平安한 狀態`라는 積極的 目標를 指向한다고는 하지만 그 본령은 어디까지나 精神障碍의 治癒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精神分析의 出發이 그러했고 現實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는 精神分析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精神疾患의 問題로부터 始作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반면, 위빠사나 禪의 境遇 내 存在의 實相에 눈뜨는 涅槃의 증득이 究極的인 目標이다. 그에 비해 몸과 마음을 淸淨히 하고 불안과 걱정, 苦惱와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副次的인 목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精神分析의 境遇 精神的 障碍가 克服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반면, 위빠사나 禪은 涅槃의 증득을 통해 慈悲의 삶이 실현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둘째, 無意識을 意識化하는 原理가 觀, 覺破의 그것과 類似함에도 불구하고 全體와 部分이라는 差異를 看過할 수 없다. 즉, 精神分析의 境遇 洞察의 對象은 주로 問題를 일으키는 過去의 經驗에 焦點이 맞추어져 있다. 그에 비해 위빠사나 禪의 觀은 心身의 모든 움직임에 대한 間斷없는 觀察을 必要로 하고 있다. 따라서 精神分析이 중요한 몇가지 無意識的 執着으로부터의 解放을 目標로 한다면 위빠사나 禪은 내 存在의 實相에 눈뜸으로써 一切의 모든 執着으로부터 完全한 解放을 目標로 한다.

 

셋째, 治療者 혹은 分析家와 스승의 役割에도 差異点이 보인다. 精神分析의 境遇 治療者는 對談者로 하여금 자유스럽게 聯想을 하도록 해준다음, 그 聯想에 대해 해석을 가함으로써 無意識 속에 남아있는 核心的인 動機나 感情을 對談者로 하여금 洞察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治療者 혹은 分析家의 役割은 治療에 있어서 核心的 要素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위빠사나 禪의 修行者는 自身의 문제를 스스로 發見하고 解決하는 立場에 있다. 위빠사나 禪의 스승은 修行者에게 修行의 原則과 方向을 提示해주는 補助的인 立場에 있다. 本質的으로 위빠사나 禪은 스스로 하는 能動的 修行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絶對的인 立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修行者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案內者일 따름이다. 위빠사나 禪은 修行者가 觀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一種의 自己分析의 길이다.

 

이상의 差異点들을 생각해 볼때, 위빠사나 禪에서 恒常 自身을 분석하고 觀察하는 修行法은 精神分析의 外延을 넓히고 內容을 深化시키기 위해서도 注目할 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精神分析이 症狀의 治療뿐 아니라 積極的인 目標, 즉, 平安한 狀態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局部的이고 限時的인 分析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위빠사나 禪은 붓다가 涅槃에 이르는 `唯一한 길`이라 强調하였던 修行法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禪은 涅槃의 증득뿐 아니라 三毒의 더러움으로부터 몸과 마음을 淸淨히 하고 平安이나 恐怖, 苦惱와 슬픔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明示하고 있다. 실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間斷없이 觀察하는 것을 基本으로 하는 위빠사나 禪은 煩惱나 妄想, 不安, 恐怖로부터 벗어나 사물을 사물대로 보게 하고 마침내는 내가 本來 無我라는 事實에 눈뜨게 하는 徹底한 自己 理解와 自己 實現의 길이다.

 

이러한 위빠사나 禪은 佛敎의 修行法으로써 뿐만 아니라 最上의 精神健康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最上의 精神健康이란 一切의 煩惱나 妄想, 不安으로부터 벗어난 걸림 없는 狀態요, 完全한 自己實現의 境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無意識을 意識化하는 精神分析과도 여러모로 類似點이 많다. 그것은 위빠사나 禪이 宗敎的 修行이면서도 무엇을 盲目的으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實際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순간 순간 觀察하는 經驗 科學的 性格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날처럼 物質的 外形文化의 물결속에서 나를 잃고 대상을 따라 奔走한 現代人들에게 위빠사나 禪은 나 자신에 눈뜨게 하는 知慧의 源泉일 뿐만 아니라 精神的 健康을 成就하는 길로서도 重要한 意味를 가진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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