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치우천왕

醉月 2010. 10. 26. 08:47

중국의 첫 번째 수도 줘루,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둔갑한 치우

글 : 崔恩亨 중국 옌볜대학 조선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  

 

⊙ 줘루는 黃帝 등 5帝가 도읍했던 중국의 첫 수도
⊙ 염제ㆍ황제와 함께 치우까지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섬기는 ‘중화삼조당’ 건립
⊙ 황허 문명보다 앞서는 요허문명 발견되면서 동이족의 역사까지 중국사로 포함시켜

崔恩亨
⊙ 1949년생.
⊙ 조선대 법학과 졸업. 中옌볜대 대학원 석사(동북아 및 고대 조선), 현재 옌볜대 박사과정.
⊙ 연합뉴스 기자, 同 광주전남취재본부장 역임. 現 중국 옌볜대 조선역사연구소 객원연구원.
⊙ 논문 : <고죽국 연구> <신패수고> 등.

중화삼조당 본전 벽에 걸려 있는 치우와 치우족 그림. 들고 있는 도끼가 마제석기(磨製石器)로 추정돼 청동기 또는 철기를 사용했다는 <사기> 등의 기록과 상치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필자는 최근 국내 사학계 인사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중국 줘루(탁록)를 찾아 나섰다.
 
  줘루는 <사기>(史記) 등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4600년 전 한족(漢族)인 황제(黃帝)가 동이족(東夷族)인 치우(蚩尤)와 결전을 벌여 승리한 뒤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황제와 치우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청동제나 철제무기를 가지고 안개를 일으키는 치우가 우세했으나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를 발명해 안개를 피해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동이족의 후예인 우리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사기>의 줘루에 대한 기록을 좀 더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을 다스리던 염제(炎帝·神農氏)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여 백성이 시달릴 때 헌원(軒轅·황제의 이름)이 일어나 창과 방패 쓰는 법을 익혀 이를 평정한 뒤 반취안들판(阪泉之野)에서 염제와 3번 싸워 결국 승리해 중원(中原)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치우가 헌원의 명에 따르지 않자 헌원은 염제와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줘루들판(鹿之野)에서 치우와 싸웠다. 이 싸움에서 헌원은 치우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은 헌원을 높여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했으니 이로써 헌원은 황제가 됐다. 천하에 순응하지 않은 자는 황제가 정복했으며 산을 뚫어 길을 통하게 하니 일찍이 그렇게 편하게 살던 적이 없었다.
 
  황제는 줘루에 처음으로 도성을 쌓아 천하를 다스렸다. 황제는 지남거를 발명했으며 신하인 창힐(蒼)에게 글을 만들도록 하고 천문역법, 잠사방직, 도량형기 등도 그의 치세 기간 발명했다.>
 
  위 기록을 정리하면 중국은 한족인 염제와 동이족인 치우가 분할통치하고 있었는데 뒤에 일어난 황제가 염제를 제압한 뒤 다시 치우를 무찌르고 천하통일을 이루면서 문명을 열었다는 것이다. 또 “황제는 유목문명(遊牧文明)을, 염제는 농경문명(農耕文明)을, 치우는 어업문명(漁業文明)을 대표한다”고 되어 있다. 이 같은 기록에 따라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염제와 황제로 생각하고 있다. 수천 년간 ‘염황의 자손’이라고 자칭해 온 것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줘루는 황제가 천하를 평정한 뒤 첫 도읍을 정한 곳이다. 중화민족의 뿌리가 되는 곳이어서 중국인들은 ‘중화제일고도’(中華第一古都)라 부르고 있다. 중국이 최근 이곳에 ‘중화삼조당’과 ‘중화합부단’(中華合符壇) 등 대규모 기념물을 조성했다. 중국인이 평소 자신들의 조상으로 꼽아 온 염제와 황제 외에 치우까지 합한 3인을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보고 이들을 모신 뒤 삼조당이라고 이름 지은 건물을 만든 것이다. 이는 종전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가 염제와 함께 이민족인 동이족 수장(首長)을 물리치고 중원을 차지했다는 기록을 스스로 부인하고 동이족인 치우도 자신들의 조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줘루에서 천하를 다스린 5帝
 

중화합부단 입구.‘옛 문명이 줘루에서 시작됐다’는 대형 글자가 눈에 닿는다.


  중화민족은 자신들의 시조인 염제와 황제 이후 전욱(頊), 제곡(), 요(堯), 순(舜) 순으로 제위를 물려받았으며 황제를 포함한 이들 5명을 ‘5제(五帝)’라고 부른다. 황제 이후 줘루에서 천하를 다스린 이들 5제에 대해서 <사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욱은 황제의 손자로 침착하여 지략에 뛰어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정성을 다해 신령에 제사를 지냈다.
 
  제곡은 황제의 증손자이자 전욱의 조카로 토지의 산물을 아껴 사용하였고, 백성을 정성으로 가르쳐서 이롭게 이끌었으며, 해와 달의 운행을 헤아려서 역법(曆法)을 만들어 영송하였고, 귀신을 공손히 섬겼다. 그의 모습은 매우 온화했고, 고상했으며, 행동은 천시(天時)에 맞았으며, 의복은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대지에 물을 대주는 것처럼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은덕을 천하에 두루 미쳤으므로, 모두 그에게 복종하였다.
 
  요는 제곡의 아들로 인자하고 지혜로워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가 우러러보았다. 그는 거드름 피우거나 오만하지 않았으며, 황색의 모자를 쓰고 검은색의 옷을 입고 흰 말이 끄는 붉은 마차를 탔다. 큰 덕(德)을 밝히어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였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백관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였고, 백관이 공명정대하니 모든 제후국이 화합하였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가 덕이 없음을 알고, 덕이 많은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뒤 제위를 물려주었다.
 
  순은 계절과 한 달의 날짜를 바로잡았고 하루의 시각을 바르게 정했고,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오례를 제정하였다. 또한 12주(기, 연, 청, 서, 형, 양, 상, 양, 웅, 방, 유, 관)를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물길을 잘 통하게 개수하였다.>
 
  중국인들이 가장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요순시대(堯舜時代)’는 요와 순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를 말하며 줘루 수도시대의 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줘루는 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우(禹)가 기원전 2000년경 하(夏)나라를 세우면서 수도를 양디(陽翟·현 河南성 禹州시)로 옮길 때까지 중국의 수도로 기록돼 있다.
 
  줘루로 가기 위해 인천에서 중국국제항공 비행기를 타고 오후 3시경 베이징(北京) 서우두 공항에 도착했다. 삼조당이 있는 곳은 베이징 동북쪽에 있는 허베이(河北)성 장자커우(張家口)시 줘루(鹿)현 판산(礬山)진 판산분지(礬山盆地)다.
 
  줘루현 인민정부의 소개 글에 따르면 “줘루현이라는 지명은 중국 한(漢)나라 때 처음 생긴 것으로 줘루산(山)의 이름을 따 붙여졌으며 현 줘루현 판산진 부근을 관할했다”고 돼 있다. 원래 이 산에는 대나무가 많았고 사슴이 살아 ‘주루(竹鹿)’라고 했으나 상(商)나라 말과 주(周)나라 초 사이 한랭기(寒冷期) 때 대나무들이 모두 죽어 발음이 비슷한 줘루가 됐다고 한다.
 
  이 소개 글에 따라 우선 줘루현까지 가보기로 하고 공항에서 베이징 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그러나 베이징 역에서 내려 알아본 결과 줘루로 가는 열차는 없는데다 버스도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장자커우시는 큰 도시인 만큼 대부분 알고 있었으나 줘루현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몰랐다. 막막했다.
 
 
  줘루로 가는 길
 
  날이 어두워져 어쩔 수 없이 근처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아침 역 앞에서 베이징시 지도를 2위안(약 380원)에 산 후 베이징 서쪽에 있는 리쩌(麗澤)버스터미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그러나 매표원으로부터 “이 터미널에는 줘루현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는 퉁명스런 답변만 들었다.
 
  어렵게 한 버스안내원으로부터 “줘루로 가는 버스는 (베이징) 남쪽에 있는 융딩먼(永定門)버스터미널에서 하루 3차례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둘러 시내버스(927호선)를 타고 융딩먼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베이징에는 버스터미널이 서부에 3곳, 남부에 3곳이 있는데 서북쪽에 위치한 줘루로 가는 버스가 서부가 아닌 남부 터미널에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이 터미널은 모두 베이징에서 지난(濟南) 등 남쪽 방면으로 가는 버스만 있는데 유독 줘루만 이곳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다. 줘루와 같은 방면인 장자커우행(行) 버스는 당연히 서부 류리차오(六里橋)터미널(리쩌터미널 부근)에 있었다. 중국의 버스터미널 운영방식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치우와 동이족은 미개 종족으로 묘사
 
  줘루행 버스를 오후 1시에 탔다. 줘루로 가는 버스는 오후 1시와 3시, 4시 3차례뿐이어서 가장 빠른 것을 탄 셈이다. 오전에 줘루 주민들이 베이징에 와 볼일을 보고 오후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베이징에서 아침에 줘루로 갔다가 일을 보고 베이징으로 돌아오기는 불가능한 시간표여서 이 역시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줘루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오전 7시, 8시30분, 오후 2시 등 3편이었다.
 
  요금은 60위안. 오후 1시, 25인승 중대형 버스를 타고 가는 도로 주변에는 만리장성이 보였으며 유명한 만리장성의 한 관문이자 요새인 쥐융관(居庸關)을 지나 줘루현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줘루현에서 다시 판산진까지는 15인승 소형버스로 1시간30분 거리(10위안)였다. 베이징서 줘루까지는 도로로 221km(직선거리 120km)로 징장(京張)고속도로를 이용해 논스톱으로 2시간이 걸렸다. 줘루서 판산진은 60여km(직선거리 42km)였지만 2차선 도로여서 상대적으로 오래 걸렸다.
 
  줘루현은 2802㎢의 면적에 인구 33만명가량이다. 줘루현에 속한 판산진은 현 소재지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690~2303m의 고산지로 울릉도의 2배가량인 152.85㎢의 넓이에 인구 2만2000명가량이다. 판산진 소개 글에는 주민 대부분인 1만9000명이 농업에 종사한다고 되어 있다.
 
  중화삼조당은 판산진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들판에 세워져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판산진 소재지는 우리나라 면(面)소재지 정도로 작아 숙박업소도 한 곳뿐이었다. 투숙하기 전에 먼저 방을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빌려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호텔이 한 곳뿐이어서 “여기 아니면 잘 곳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배짱이다. 30위안으로 값은 저렴했다. 하지만 방 한 칸에 3명이 공동 숙박한데다 샤워시설과 화장실은 있었지만 세면도구나 화장지가 없어 불편했다.
 
  판산진 주변은 비옥한 황토가 4~10m 이상 두껍게 쌓여 농사짓기에 적당해서인지 산 중턱까지 계단식 밭이 조성돼 있었다. 황토로 토성(土城)을 쌓기에도 좋아 일찍부터 축성(築城)기술이 발달해 역사상 최초로 동이족과 한족의 격전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30여 분 걸어 10시쯤 중화삼조당에 도착했다. 중화삼조당 정문에는 ‘중화삼조성지(中華三祖聖地) - 황제성문화여유구(黃帝城文化旅遊區)’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 양쪽 담에는 ‘줘루에서 문명이 열렸다(千古文明開鹿)’는 문구 아래 줘루와 황제를 소개하는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 관광버스나 전세차량을 이용하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는데, 그리 많지는 않았다.
 
 
  中華三祖堂
 

중국 줘루에 최근 세워진 중화삼조당 본전.


  삼조당은 1994년8월에 착공해 1997년 10월 준공됐으며 6만7000㎡의 부지에 삼조당(三祖堂·大殿)과 제단(祭壇) 등이 세워져 있다. 대전은 당(唐)나라 때 건립된 포광쓰(佛光寺) 본전을 본떠 지었는데, 정면 7칸, 측면 3칸, 780㎡ 규모로 되어 있다. 안에 높이 5.5m의 황제, 염제, 치우의 대형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황제의 소상은 ‘기개와 도량이 크고 당당하다()’, 오른쪽의 염제상은 ‘지혜가 뛰어나고 풍류의 도가 있다(睿智儒雅)’, 왼쪽의 치우상은 ‘용감하고 사나워 싸움을 잘했다(勇武彪悍)’고 표현돼 있다.
 
  또 대전 안벽에는 황제와 염제, 치우를 설명하는 대형 그림과 ‘부산합부’(釜山合符)라는 제목의 그림 등 4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치우는 동물 가죽 옷에 오른손엔 도끼를 들고 있고 좌우의 치우부족 역시 같은 복장에 도끼와 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황제와 염제 및 그의 종족들은 의복을 입고 청동제 또는 철제로 보이는 창을 사용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본전 벽에 걸려 있는 황제와 황제부족 그림. 황제는 넓은 후광(後光)과 당당하고 기품 있는 의복과 태도를 갖춘 인물로 용(龍)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이들 그림에 대해 일부 국내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치우와 동이족을 미개 종족으로 표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치우와 동이족이 돌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당시 치우의 동이족이 황제의 한족에 비해 청동기나 철기 문화가 앞서 있었다는 사서(史書)의 기록과는 다르다는 지적이다.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치우는 형제가 81명이었는데 동으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으며 모래를 먹고 창과 칼, 쇠뇌 같은 무기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를 덮었다”고 되어 있다. 치우부족이 청동기나 철기 문화를 가진 종족으로 염제나 황제부족보다 선진 문명족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한데도, 삼조당에 그려진 벽화에서는 이를 반대로 표현했다.
 
 
  요허문명과 치우
 

1971년 중국 치펑에서 출토된 C자형 옥저룡.


  ‘부산합부’ 그림은 황제가 줘루 싸움에서 이긴 뒤 인근 부산이라는 산에서 제(諸)부족과 종족의 대(大)연맹을 만들어 이후 중화민족의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합부는 중화민족의 융합과 단결·화해·통일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렇다면 중국이 오랫동안 황제와 염제에게 패한 미개한 이민족(異民族)으로 치부해 왔던 치우를 새삼 자신들의 조상 가운데 하나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요허(遼河)문명 때문이다.
 
  수십년 전부터 발굴되어 온 요허문명 유적은 황허(黃河)문명보다 앞선데다, 이 문명은 동이족의 것임이 밝혀졌다. 특히 1971년 요허문명 발굴지 중 하나인 네이멍구(內蒙古) 치펑(赤峰)시 웡니우터치(翁牛特旗) 산싱타라춘(三星他拉村)의 유적에서는 6000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21cm, 직경 2.3~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출토됐다.
 
  중국학자들은 이 용을 동양에 등장한 최초의 용으로 보고 ‘중화제일용(中華第一龍)’이라 부르고 있다. 치펑시는 이로 인해 일약 ‘중화옥룡의 고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같이 동이족 문명인 요허문명이 4000여 년 전의 것인 황허문명보다 앞서는 것이 밝혀지고 용의 형상도 이곳에서 가장 오랜 것이 출토됨에 따라 평소 ‘용의 자손’으로 자처해 온 중화민족의 자부심에 큰 손상을 입게 됐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나일), 인더스와 함께 세계 4대문명의 하나로 꼽혀 온 황허문명이 빛을 잃게 됐을 뿐 아니라, ‘용의 자손’이라는 자긍심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중국인들은 그간 자신들과 구별했던 동이족을 중화민족의 하나로 편입시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치우는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 등 우리나라 문헌에도 나온다.
 
  <규원사화>에는 치우씨(蚩尤氏)가 환웅(桓雄)의 부하로 환웅과 단군(檀君)에 협력하였던 부족 및 부족장으로 설명된다. 치우씨는 환웅의 명령에 따라 집을 만들고 병기를 제작했으며 중국 신농(염제) 말기에는 중국 본토에서 천왕이 되었으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고조선의 서남쪽인 남국에 봉(封)하여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제후들과 함께 중국 본토로 진출, 여러 나라를 세워 그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치우와 황제의 전쟁
 

붉은 악마 응원기에 묘사된 치우.


  <규원사화>는 조선 숙종 때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단군실사>(檀君實史)라고도 한다. 상고(上古)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치우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줘루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학계에서 이 책에 대한 진위(저작 연대 인정)여부가 논란 중이고, 중국에서는 대부분 학자들이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치우가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으로 나온다. 이 책은 중국의 사서 내용과는 반대로 치우가 헌원에게 승리했다고 적혀 있다.
 
  <치우가 신시국(고조선 이전 배달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치우가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황제)이 듣고 공격해 왔다. 1차 전쟁에서 치우는 헌원과 줘루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후아이다이(淮岱)와 지옌(冀)의 모든 땅은 신시의 영토가 됐다. 치우는 이후에도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며,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났지만 많은 유민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다.>
 
  <환단고기>는 4권의 고서(古書)를 엮는 형식으로 1979년에 출간됐다. 한(韓)민족 또는 동이족이 오랜 역사와 넓은 영토를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학자는 위서로 보고 있다.
 
  치우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트레이드마크 도안으로 쓰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중화합부단’의 조선족 상징 돌기둥
 

합부단 내 조선족 상징 돌기둥(맨 오른쪽). 맨 위에 장구 모형이 올려져 있다.


  중화삼조당 정문에서 도로를 건너 맞은편에는 4000만 위안을 들여 2006년 4월 착공해 2008년 8월 준공한 중화합부단(中華合符壇)이 있다.
 
  합부는 앞서 언급한 대로 융합·통일·연맹 등의 뜻으로, 중국에서는 ‘합부문화’를 “황제·염제·치우 등 대표적 중화민족이 장기적 발전, 진보된 사상이념으로 민족대단결과 대통일의 기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합부단은 약 34만㎡의 넓이로 그 안에 중화민족과 55개 소수(少數)민족을 상징하는 대형 돌기둥 56개를 원형으로 건립해 놓았는데, 각 돌기둥에는 그 민족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과 형상들이 양각되어 있다.
 
  중앙에는 한족(漢族)과 토족(土族)의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조선족의 기둥은 한족 기둥에서 왼쪽으로 22번째에 있다. 한족을 설명하는 글에는 “우리나라 주체민족으로 세계 제1대족(大族)이다. 주로 중국에 살고 있으나 세계에 퍼져 있으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용(龍)과 봉(鳳)을 토템사상으로 하고 있으며 양쯔(揚子)강과 황허(黃河)강은 민족의 요람이다. 4대 발명으로 세계에 공헌했다”는 등으로 기재돼 있다.
 
  조선족을 상징하는 돌기둥은 상단에 장구 모형이 올려져 있으며 설명하는 글에는 “조국(중국)의 동북(東北)에 살며 농사를 주로 짓고 벼를 심으며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흰색을 숭상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칭한다” 등으로 되어 있다.
 
  합부단의 주요 시설은 준공돼 공개되고 있지만 아직 일부 토목, 조경(造景)공사는 진행 중이었으며 현재 대규모 식목(植木) 등이 진행되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황제상
 

황제성에 세워진 황제상.


  삼조당 정문 서쪽으로 200여m 가량 가면 황제천(黃帝泉)이 있다.
 
  반취안(阪泉)으로도 불리는 이 샘은 황제가 사용했다는 샘으로 직경 31m 가량의 장방형 천연냉천(天然冷泉)이다. 지하 1700m, 3000m, 5000m에서 하루 4600~4800톤의 물이 솟으며 겨울에도 마르거나 얼지 않고 12.3~13.4℃의 수온을 유지하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이 샘은 물이 맑았으며 울타리가 쳐 있고 주변 조경도 비교적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황제천을 나와 서북쪽으로 500여m 가면 헌원호(軒轅湖)가 있다. 황제의 이름을 딴 이 호수는 면적 6만5000㎡에 평균 수심 5m 정도로 푸른색이 도는 비교적 깨끗한 호수다. 호수 주변에는 백양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헌원호 둑길을 따라 2km 정도 돌아 호 서쪽으로 가면 구릉 기슭에 닿는데 위로 올라가면 황제성(黃帝城)이 있었다는 들판이 펼쳐진다. 지금은 모두 포도밭으로 변했지만 5000년 전에는 왕궁과 중국을 통치하던 각종 기관이 있었던 성내(城內)였다는 곳이다.
 
  황제성은 각 500m의 정방형 토성으로 성의 규모는 아래쪽 너비 10m, 위쪽 너비 2.5m에 높이 3~5m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는 대부분 유실되고 남, 북, 서쪽 일부에 형태가 남아 있는 상태다.
 
  성내로 추정되는 포도밭 들판 중앙에는 흙으로 빚은 대형 황제상이 세워져 있었다. 황제상은 넓은 들판에 덩그렇게 서 있는데다 사후 관리가 안돼 기단 시멘트가 갈라지고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마침 불어온 황토 바람 때문인지 부옇게 변한데다 찾는 사람도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황제상 기단에는 1998년 7월 설립했다는 것과 “중국의 자녀들은 시조를 잊지 말라(中國幼兒 不忘始祖)”는 문구가 쓰여 있다.
 
  황제성터에서 나와 다시 3km 정도 떨어진 판산진으로 되돌아가 치우채(蚩尤寨)와 치우천(蚩尤泉) 등을 찾았다.
 

중화삼조당 본전에 모셔진 대형 치우,황제,염제상(좌로부터).


  치우채는 치우의 옛 성채가 있던 곳으로 판산진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구릉에 있었다. 치우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치우천이 있었는데 샘 둘레 8m, 수심 2m로 당시 치우 병사들과 말이 먹었다고 한다.
 
  치우천 아래로 흐르는 물에 동네 사람들이 빨래 등을 하고 있었다. 옆에는 수고 30m 가량의 치우송(蚩尤松)이 있는데 천 년 이상 된 데다 잎이 곧게 뻗어 있어 용감한 치우를 상징한다고 전해 오고 있다.
 
  이 밖에 판산진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황제가 지남거(指南車)를 매어 놓았었다는 곳이 있다. ‘정거대(定車臺)’라고 쓴 비석이 있는 곳인데 농로(農路)와 인가 담벼락 사이에 있는데다 아무런 설명이나 보호장치가 없어 일반인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황제와 치우가 싸울 때 처음에 황제의 부대가 몇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치우의 적수가 되지 못해 잇달아 패배했다. 특히 치우는 비를 뿌리고 안개를 피우는 신기한 능력이 있어 황제의 부대는 전쟁터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황제는 신하인 풍후(風后)에게 안갯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지남거를 만들도록 했다. 이 수레는 맨 앞에 쇠로 만든 작은 선인(仙人)이 늘 남쪽을 향해 손을 내밀도록 설계되었다. 바로 이 지남거 덕분에 황제의 군대는 치우가 만든 안개 장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전세(戰勢)를 역전(逆轉)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고민할 때
 
  줘루와 삼조당 등을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첫째, 각종 유적이 좀 더 깨끗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길이나 문화재를 소개하는 안내 표시판을 설치해 보다 쉽게 유적지에 접촉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문 가이드를 동행하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 유적지를 찾는 것은 큰 고초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 유적지들이 사실(史實)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종 기록에 동이족은 중국 산둥(山東)반도와 동북쪽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줘루에서 황제와 치우가 전투를 벌였다는 유적지는 이 같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황제와 치우가 전투를 벌였다는 줘루 들판은 현재 합부단이 있는 자리이고 치우가 주둔하던 치우채는 합부단 동남쪽에 있고 황제가 있던 황제천은 서북쪽에 있다. 중국 중원에서 출병한 황제의 군대가 치우가 주둔하던 곳을 지나 북쪽에 주둔했다는 말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도다. 남쪽에서 군량을 조달받아야 하는 황제의 군대가 치우의 군대보다 북쪽에 주둔했다는 것은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지 의문이다. 지형상으로 보면 황제가 있었다는 곳에 치우가, 치우가 있었다는 곳에 황제가 있어야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중화삼조당과 줘루를 둘러보면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염황의 후예’를 자처해 온 중국인들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역사 인식을 깨고 우리 민족의 선조인 동이족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져 온 치우까지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시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기야 고구려와 발해, 심지어 고조선의 역사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치우를 ‘중화민족 3조(祖)’의 하나로 모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중국인들 옆에서 어떻게 한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지켜내면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朴 政 學 ● 1947년 울산 출생
- 부산고, 육군사관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연세대 행정학 석사, 강원대 대학원에서 한국 고대사 전공
- 현 사단법인 한배달 회장, 치우학회 회장
- 현 강원대 강사, 강원고고학연구회 회장

중국이나 중화만이 중심이어서도 안 되며, 한민족만이 중심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각국이 보유한 역사기록과 전설, 신화, 민속 자료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너와 나를 버리고 양쪽의 공동 조상, ‘우리’의 조상인 치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 염·황·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2002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치우의 모습으로 분장한 응원단.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3년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참조).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전쟁 못지않은 탁록대전

 

치우 시기에 이르러 동이연맹(고을사회로 볼 때)을 다스리던 염제(왕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염제가 있음)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연맹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일어났다. 그러나 어리석은 염제 유망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한다(이에 앞서 염제는 황제와의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황염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족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였다.

같은 동이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여성들에게 쫓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했다가 또 패하곤 했다. 여기서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 ‘여성들이 황제를 좋아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시는 모권사회였으므로 각 부락의 실질 지도자가 여성이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치우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무기인 금속무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안개를 일으키고 비와 바람을 부르는 등의 도술을 행했다고 하니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자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진다. 이 대전은 기마족이 내려와 농경족과 섞인 동이족 가운데서,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기마족 문화의 치우와 모계사회 지향의 농경문화의 황제 간의 충돌이었다. 한신대 김상일 교수는 동쪽의 정신문화와 서쪽의 물질문화의 충돌이라고 설명한다.

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무덤이 산동반도 서남쪽에 있으며 군신으로 추앙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탁록에서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동·서 문명의 특성이 구분되어 뚜렷하게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두 문화집단(모권·물질 대 부권·정신)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순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치우에 집착하는 중국

이렇듯 의미가 깊은 치우천왕의 역사지만, 그의 활동영역이 대부분 현재의 중국 땅인 데다 국내 문헌사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국내 학계는 치우 연구를 소홀히했고, 아예 중국 고대의 신화인물로 치부하고 있다. 반면 중국측은 몇 년 전부터 “치우는 묘족의 선조일 뿐 아니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화민족 역사의 3대 인문시조(人文始祖)”라고 주장하고 치우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적 존재로 보았고, 하우(夏禹)부터 실존 역사로 취급했다. 황제의 자손인 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면서 스스로를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 외에 염제의 후손인 동이족과치우의 후손인 묘만족은 오랑캐라며 야만족 취급을 했다.

1997년 4월 호남성 이안링(炎陵縣)현에 있는 염제 신농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높은 산 위에 ‘염황지자손(炎黃之子孫)’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국인들이 황제의 자손(子孫)일 뿐 아니라 염제의 자손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유적유물의 발굴작업이 진행될수록 황하문명을 비롯해 선진(先秦) 문명의 주인공이 그동안 오랑캐라 비하하던 동이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자를 비롯해 우수하다고 알려진 많은 중국문화가 한족의 문화가 아니라는 연구도 속속 나옴에 따라 황제의 자손인 것만 강조해서는 더 이상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치우 연구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치우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는 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 내에서는 동이족의 시조 염제(炎帝 神農)를 자기들의 시조에 포함시키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목적의 ‘동화정책’에 따라 한 민족이 두 조상을 갖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필자는 ‘한배달’ 치우학회 회원들과 함께 동이족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산동반도와 탁록지역을 찾았다. 베이징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에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되어 1995년에 세운 귀근원(歸根苑)이라는 사원이 있고, 그 가운데 ‘삼조당(三祖堂)’에 염제·황제·치우제 세 사람의 좌상을 안치하고 참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치우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치우를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야만족으로 취급하고, 염제와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이 치우의 정벌이라 자랑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치우를 황제·염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스스로 ‘염·황·치(炎·黃·蚩)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셋이 된 이상 황제의 자손이라는 화하족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화하족(황제의 후손)과 동이족(염제의 후손) 및 묘족(치우의 후손)을 합쳐 ‘중화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이로써 중국은 동이의 역사, 묘족의 역사를 모두 ‘중화족’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염·황·치’ 삼조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93년 10월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런창허(任昌和) 회장이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이어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가 열리고, 1995년에 귀근원을 만들면서 삼조문화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으며, 후속 연구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치우 끌어안기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2001년 산동반도의 치우무덤을 찾았을 때 주민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했으나, 2002년 봄 명지대학 진태하 교수 일행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는 산동성의 치우 무덤을 복원 중이었다. 또 호남성에 치우의 동상을 세우고 1993년부터 ‘간추절(켋秋節)’ 행사를 개시하여 묘족의 독특한 문화전통을 살리면서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세계 치우학술대회를 열어 치우에 대한 연구범위를 세계로 확대하고 있다. 이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북유럽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학자 왕대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1980년대까지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에 대항했다 해서 미워하던 치우를 공동조상으로 받들면서 세계적인 공인을 얻으려 하고 있다.

 

치우 무덤과 유적복원 활발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치우학술대회에서 중국측으로는 유일하게 치우에 대해 발표한 짜오위다(趙育大)씨는 “치우의 문화가 한족의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치우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라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측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중화민족은 황염동맹을 핵심으로 한다” “치우는 묘족의 시조”라고만 하고 동이의 수장이었음은 간과했다. 또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인 의미를 띄는 인문시조”라고 하여 당시 동서문명충돌론이 아니라 중화문화라고 하는 문화집단만을 강조했다. 한편 “치우가 탁록에서 죽었으므로 그 무덤도 당연히 탁록에 있어야 한다”면서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등 치우라는 걸출한 인물을 인정하면서도 중화문화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서만 보려고 해 ‘동서 문화충돌론’을 주장한 한신대 김상일 교수와 상당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교수는 “두 문화집단이 있어 충돌이 생기는 것이므로 중화문화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중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필자가 “공동시조로서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해 앞으로 연구 교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학술대회를 통해 옌볜대학 교수들에게 ‘치우는 우리 조상’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연구를 시작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과연 조선족에게 그런 연구를 허락할지 미지수다.

이렇게 중국이 치우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하게 소수민족을 끌어안는 동화정책의 일환이며, 한반도의 남북통일시 생길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문화유적의 관광자원화를 통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실리적 목적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을 포함하는 동이·묘족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하나의 중국사로 끌어가려는 논리로서, 패권주의인 중화사상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삶 깊숙이 자리잡은 치우의 흔적

이처럼 중국이 일방적으로 치우 연구를 진행하면서 모든 치우의 후예들을 ‘중국인화’하는 것을 경계하려면 국내에서도 치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다. 즉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어느 지역에 그 흔적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느냐, 또 그 유산을 누가 더 현대화하느냐에 따라 치우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또는 둘 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동짓날에는 붉은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하며,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같은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준다.

 

상고사 연구는 어디로

사실 한국 상고사 연구자들은 정사로 인정할 만한 단군 이전의 민족사 기술이 거의 없어 발을 구른다. 단군도 신화적 인물로밖에는 취급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이전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의 출처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책 자체는 위서로 의심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한민족,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1만년 전후 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마감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작은 부락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부락사회 또는 마을사회(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주장) 시대라 한다. 그러다 약 6000년을 전후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전쟁이 일어나고 자기 보호를 위해 서로 연맹을 시도한 부락연맹사회 또는 고을사회(윤내현)가 형성된다. 그 후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4500년 전후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기록이 있는 것은 바로 국가사회부터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창세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전해졌다.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집 치미와 막새기와에 새기는 도깨비의 모습은 바로 치우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고조선이라는 국가 이전에 마을이나 고을사회 단계가 있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신화나 전설이 구전이나 무가(巫歌) 형태, 또는 야사로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는 단군 이전 시대를 역사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아예 역사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그 속에 포함된 치우의 역사도 당연히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 역사책에 ‘치우가 동이족이며, 구려의 임금’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만약 그 때를 우리의 고을사회 역사로 해석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이를 보완한다면 훌륭한 단군 이전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주지역에 있던 요·금·원·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중국 고대사에서 동이로 분류되던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도 있으나 우리는 말갈, 여진, 만주족이라며 오랑캐로 몰았고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대신 중국은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로 흡수했다”는 논리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 또한 처음에는 ‘진’이었으나 당나라가 멋대로 ‘발해국왕’에 봉하자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고, 지금도 우리가 스스로 부른 이름 ‘진’보다는 ‘발해’라고 부르고 있으니, 중국은 이를 근거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지도를 보면 난하 동쪽, 청천강 이북까지만 고조선 영역으로 표시하고, 그 남쪽을 삼한이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많은 국내 학자들이 한민족의 형성을 신라통일이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로 보고 있다. 바로 ‘광명일보’의 주장처럼 ‘고씨 고려(고구려)와 왕씨 고려는 다르므로 고구려는 중국, 고려는 삼한의 후예인 한민족’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 국내 학자들은 한반도 밖의 한민족 청동기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영토로 거론하기도 하는 산동반도와 만주 요녕성의 경우 기원전 25세기까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 유역의 기원전 30세기 청동기 유물이나, 양수리에서 출토된 기원전 24세기 청동기 시대 유물들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의 형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우리의 청동기 시기가 기원전 10세기 설에 묶여 있으니, 그 이전 인물인 치우는 물론 단군조차 역사적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국 학자가 “한자는 한(漢)족의 언어체계와 맞지 않으므로 한족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다”라고 주장해도 동이족의 핵심이라는 우리는 한자가 우리 겨레의 글자일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린다.

이처럼 우리 사학계가 만주를 포기하는 동안 국민들은 의분에 젖어 백두산 관광길에 올라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등 대책 없이 중국측을 자극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가 한국의 국무총리에게 항의서신을 보내는 등의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도, 알고 보면 한국 고대사에 대한 논리적,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치우에 대한 연구는 재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겨레얼 바로찾기 운동단체인 사단법인 한배달은 1999년부터 중국의 치우연구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그 해 12월말 치우학회를 설립해 국내외의 치우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한국과 중국(옌볜대학)에서 각각 치우학술대회를 열고, 치우자료집과 학회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경기대 법정대 고준환 교수가 ‘치우천황’이라는 책을, 소설가 이우혁이 ‘치우천왕기’라는 소설을 발표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우리 스스로 포기한 역사

 

중국 ‘중화삼조당’에 모신 치우상.

2001년 옌볜대학에서 열린 제2회 치우학술대회(주제 ‘고대동아시아 종족과 한민족’)에서 확인한 바는 옌볜대학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족들에게 고구려 이전 역사연구가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동이족, 묘만족, 화하족을 합쳐 ‘중화족’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고 선후를 이은 관계인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도 고구려족, 발해족 등 나라마다 민족의 이름을 붙여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소수민족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소수민족을 더욱 작은 단위로 나누어 자체연대나 단결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동북공정’이 계획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2003년 봄 동북아 경제포럼이 열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지역은 본래 아시아인들이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백인들이 주인이다. 1860년대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극동함대를 앞세워 백인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대신 아시아인(특히 고려인들)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관은 1860년 이전의 역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150년 만에 인구의 구성과 역사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역시 200여 년 만에 원주민인 인디언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렇게 지역의 역사와 종족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만주지역과 산동반도 지역은 수천 년 전에도 중국 땅이었고, 한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버리면 우리 고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쓰거나, 그 이전의 역사는 빼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치 미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에서 원주민들의 역사가 지워진 것과 같다. 반대로 과거 거주했던 종족(원주민)의 시각에서 쓰면 미국은 인디언의 역사,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주도권 싸움 대신 공동연구를

현실적으로 보면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이 조화돼야 완전해진다. 양국의 공통 조상인 치우 문화라는 공통점이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쉽고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치우의 역사가 종족간 다툼의 빌미가 아니라 협력과 화합의 근거가 돼야 한다. 치우의 종족적인 계보로 따지면 중국의 만주-산동반도-남서지역, 한반도,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까지 동이와 묘족의 거주영역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치우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상호 교류를 통해 문화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만주지역은 배달나라 시대를 빼더라도 고조선-고구려-진(발해)까지 약 3300년 동안 한민족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러니 여기서 ‘지배층은 고구려족,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3300여 년 동안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민족이 다를 수 있겠는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은 한민족 내지 배달민족(중국에서는 동이족)의 지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와 일본의 조상이기도 하고 중국 동이족이나 묘족의 조상이기도 한 치우천왕. 각자가 자기 민족의 선조로 기록하고 있고, 양쪽이 다 옳다면 결론은 이렇다. 당시 동아시아에 큰 문화집단이 있었고, 그 지도자가 치우와 황제였으며, 그들 간에 충돌이 있어 각자의 문화 독창성이 더 강화되거나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김상일 교수는 이를 동서문화의 충돌로 보았다. 종족의 이동과 문화의 이동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추적하여 동아시아의 상고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