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염화실의 향기_16_ 봉국사 주지 월서스님

醉月 2010. 10. 11. 08:52

-“삶은 무상… 욕심·화·집착 줄여야”-

오랜 세월 맡았던 종단의 소임을 내려놓고 봉국사에서 붓글씨를 쓰고 삼각산 포행을 하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월서스님은 “삶의 무상성을 깨달아 마음을 바꿔 욕심과 화와 집착을 줄이는 지혜를 내는 것이 생활 속의 불교수행” 이라고 말했다. <봉국사/이상훈 기자>


1953년 겨울, 경남 함양 땅지리산 자락. 빨치산 소탕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7살 소년은 고향땅을 지키기 위해 전투경찰에 입대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지옥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마음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쳤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나면 골짜기마다 적과 전우의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에서 나는 역한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1년 만에 공비에게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 때문에 악몽으로 진저리치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날 실상사 약수암을 찾게 됐다. 그곳에서 우연히 금오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지리산에서 겪은 일들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이야기했다. 스님이 말했다.

“우주의 섭리에서 보면 나고 죽는 것 또한 풀잎 위의 이슬처럼 허망한 것이네. 망상의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얻고 싶으면 출가를 생각해보게.”

그는 몇 달 뒤 금오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화엄사를 찾았다. 그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힘이 들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내놔봐라.”

긴 침묵이 흘렀다.

“한 마음이 깨끗하면 많은 마음이 깨끗하고, 온 세상이 깨끗한 법이야.”

금오스님은 ‘원각경’의 ‘보안장’을 인용했다. 이런 대화법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가 2조인 혜가스님을 제자로 삼을 때의 ‘안심(安心)법문’을 닮았다. 혜가가 달마를 찾아갔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네 마음을 여기 꺼내보아라. 그러면 평화롭게 해주겠다.” “아무리 찾아도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훗날 혜가는 풍질(나병)에 걸린 채 자신을 찾은 3조 승찬에게 비슷한 법문을 전한다.

금오스님은 “깨끗한 유리창에는 만상이 모두 깨끗하게 보이고, 더러운 유리창에는 모든 사물이 더럽게 보이는 것이다. 선악미추(善惡美醜)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 하나에서 만들어진다”는 법문을 들려주면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탄성스님이 삭발을 해줬다. 당시 화엄사에는 탄성, 월주, 월타 스님 등이 금오스님을 은사로 수행 중이었다. ‘호랑이’로 통하는 금오스님은 몽둥이질을 해대며 제자들을 다그쳤다. 혹독한 행자생활을 한 뒤 1956년 9월 사미계를 받았다. 월서(月서·71) 스님이다.

그는 힘이 장사여서 스승을 시봉하던 시절 별명이 ‘제무시’(미 군용트럭 G.M.C)였다. 그런 그도 스승의 가혹한 꾸중과 매질은 견디기 어려웠다. 금오스님을 모시고 마을로 탁발을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젊은 시절 구도행각으로 걸인생활을 했던 스님답게 제자들을 고행과 걸식으로 몰아붙였다. 스승을 모시고 절터를 찾아 지리산을 헤매고 온 어느날 밤 그는 절을 떠날 작정을 하고 몰래 밖으로 나왔다. 금오스님이 이런 낌새를 즉시 알아채고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월서야, 월서야!”

그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행자가 할 일은 오직 참선해서 본분사 깨치는 일밖에 없다”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젊었을 때는 오직 공부에 매진했다.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과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 ‘이뭐꼬’를 화두로 결제에 들었다. 힘든 울력을 하면서도 오직 화두에만 집중했다. 은사스님과 사형인 탄성스님, 월산스님 등이 공부를 이끌어줬다. 동화사에서 보름 동안 불면불와(不眠不臥)의 용맹정진에 들었을 때는 월산스님이 무모한 수행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구들장을 파헤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뜻을 꺾지 않았다.

금오스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돌림자가 월(月)자여서 ‘월자문중’으로 불리며 한때 불교계 최대 문중을 형성했다. 대처승을 몰아내고 청정 비구승단을 지켜내기 위한 정화(淨化) 때도 그들이 맨 앞자리를 지켰다. 그중에서도 월서스님은 정화 당시 ‘호법신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불국사 주지, 조계사 주지, 총무원 총무부장, 재무부장 등 종단의 주요 소임과 중앙종회 의원을 6차례 맡았다.

그러나 소임이 끝나면 곧장 걸망을 둘러메고 선방을 찾았다. 1990년 중앙종회 의장을 지낸 뒤에도 해인사, 봉암사, 공림사 등의 선원에서 다시 ‘이뭐꼬’ 화두를 참구했다. 특히 50이 넘은 나이로 해인사 성철스님 밑으로 가 방부를 들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94년 종단개혁 후 초심 호계위원장에 이어 임기 4년인 호계원장을 두 차례 맡았다. 호계원은 종단의 질서를 바로잡고 계율을 확립하는 종단의 사법기구로 세속의 ‘대법원’에 해당한다. 호계원장은 스님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를 최종 결정하는 소임이다. 그는 올 1월 호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사실상 종단 소임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지난 4월에는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월서스님은 현재 서울 정릉 삼각산 자락 봉국사 염화실에 주석하고 있다. 봉국사는 조선 태조 4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약사사.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의 원찰이기도 했다. 도심 한가운데 고찰인 봉국사는 고즈넉하고 적요했다. 염화실 앞에는 고목 느티나무가 늦여름 찌는 더위에도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봉국사 주지인 스님의 방은 집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스님이 직접 쓴 글씨의 병풍으로 장식된 방 한가운데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다. 스님은 마침 붓글씨를 쓰던 참이었다.

竹密不防流水過(죽밀불방류수과·대나무가 아무리 빽빽하다 해도 물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山高豈碍白雲飛(산고기애백운비·산이 아무리 높아도 흰구름 나르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말이다. 스님은 오랜 종단 봉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봉국사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흐르는 물, 흰 구름 같은 ‘운수납자’로 돌아와 있었다.

“남의 허물을 단죄하는 자리는 속세에서도 어려운데 승가에서 오죽하겠습니까. 청정성과 공심(공공성)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12년 동안이나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어놓았으니, 이제는 나 자신의 회향을 준비해야지요.”

스님은 “종단 사태를 맞아 사형 사제를 징계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면서 “징계를 받았던 스님들을 모두 사면한 뒤 소임을 떠나 더욱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조계종단은 올해 초 멸빈자(승적 박탈)를 포함해 모든 징계자들을 사면했다.

“원로의원이 특별히 할 일이 있겠습니까. 평생의 경험을 통해 후학들에게 안정과 화합의 길을 제시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하면서 슬슬 짐을 꾸려야지요.”

스님은 자주 ‘회향’을 말했다. 스님은 “도를 이루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며 “수행자는 병통에 걸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말을 삼가는 등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계율이란 한번 파하면 눈덩이처럼 커져 나중에는 감당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일반 신도들도 계율 어기는 것을 지옥가는 것처럼 무서워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육신은 그냥 한 벌의 옷일 뿐입니다. 탐심이란 한 번 입고 버릴 옷에 치장을 하는 허망한 짓이지요. 저는 50살이 지나면서부터 삶의 무상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인식에서 본래면목의 ‘한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스님은 “삶의 무상성을 생각하면 욕심 덜 내고, 덜 섭섭해 하고, 덜 화내고, 덜 집착하게 돼 어리석음이 줄어든다”며 “도인처럼 탐(욕심), 진(성냄), 치(어리석음) 삼독심을 완전히 끊기는 어렵지만 생활 속에서 그것을 참고 줄이는 지혜로운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정말로 삶의 무상성을 사무치게 깨닫는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다생을 통해 익혀진 못된 버릇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이 수행이지요. 이것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적인 삶입니다. 이 가르침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면 헐떡거리는 번뇌나 허망한 시비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어요.”

스님은 중국 당나라 말기 서암 사언(瑞巖 師彦) 스님의 일화를 들려줬다. 이 스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자신을 향해 혼자서 말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주인공아!” “예.” “정신을 똑바로 차리거라(醒醒着)!” “예.” “그리고 남에게 속지 마라(莫受人瞞)!” “예, 예.”

스님은 정치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요즘 정치인들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 지덕치세(知德治世), 제세안민(濟世安民)’의 기본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민주화 이후에만 세 명의 대통령이 있었지만 모두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기본과 원칙의 됨됨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나라 정치는 ‘마강법약’(魔强法弱)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승심이 부족하고 삼독심이 너무 커요. 불교의 법망경에 사자신중충(獅子身中蟲)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자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 몸 속의 벌레에 의해 죽는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봉사, 희생, 헌신하겠다는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법랍 51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월서스님은 어느날 마음 고요한 가운데 금생의 옷(육신)을 훌훌 벗어버리고 싶다고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정진을 할 때나, 삼각산 포행을 할 때나, 붓글씨를 쓸 때나 이제 마음의 파도는 다 잦아들었다. 스님은 휘호로 즐겨 쓰는 게송 한 구절을 들려줬다.

心如碧海能容物(심여벽해능용물·마음은 푸른 바다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고)
人似靑蓮不染塵(인사청련불염진·인품은 연꽃처럼 티끌에도 더렵혀지지 않는다)

▲ 월서스님은?

193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1956년 구례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59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분황사·불국사·조계사 주지,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재무부장을 지냈다. 1974년부터 여섯차례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하고, 1990년 중앙종회의장, 1995년부터 초심 호계원장과 재심호계원장을 맡았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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