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 지천지혜(智天智慧) 대종사
1969년부터 밀양 대법사서 주석하며 ‘사명대사’ 뜻 이어“오직 마음을 보세요, 깨달음이 거기 있습니다” 70여 년 수행정진 …
경남 밀양을 찾았다. 말 그대로 ‘태양의 기운이 가득한’(密陽) 곳이어서인지 햇살을 피할 곳이 없었다. 밀양역에 내려 대법사(大法寺)를 물으니 “큰스님 찾아오셨습니까?”라며 택시 기사가 반갑게 맞아줬다. 30여 분을 달려 영취산 자락에 접어들자 어느새 대법사에 닿았다. 최근 중창(重創)을 마무리해 절이 깔끔하고 아담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존귀
대법사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 지천지혜(智天智慧) 대종사가 주석하고 있다. 지혜 스님은 30여 년 제방선원을 다니다가 1969년부터 대법사에서 주석했다. 평생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스님을 친견한다는 설렘과 긴장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지혜 스님은 보광전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방에 계셨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취산 자락을 보며 참선 중이던 스님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했다.
“할 말이 없는데 왜 굳이 찾아왔소?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이 다 집착일 뿐입니다. 말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말하는 것은) 허공의 일일 뿐입니다.”
스님은 완고했다. 그렇지만 후학과 불자들에게 큰스님들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계시던 스님은 당신을 찾아온 객(客)들이 안쓰러웠는지, 그럼 몇 마디만 하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 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합니다.
“1937년에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만 먹고 범어사로 갔습니다. 처음부터 스님이 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절 구석에 방을 하나 얻어 마치지 못한 한학(漢學)을 더 공부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마음먹었던 것과는 다르게 대중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한학뿐 아니라 불교 공부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3개월 만에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 행자를 마치고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1938년 3월에 사미계를 받고 그해 8월부터 1941년까지 범어사 강원에서 영명 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치문’ ‘서장’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화엄경’ ‘법화경’ 등을 배웠습니다.”
▼ 동산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말이 필요 없는, 근현대 불교의 큰 어른입니다. 수행도 철저하셨고 언제나 후학을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조계종단의 기틀을 잡은 정화(淨化) 불사도 이끄셨습니다. 제가 강원을 마치고 6년 정도 모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특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고 공부하면 살고 살기 위해 공부하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그 말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책이었습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중에 동산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지 않은 스님이 없을 정도다. 원로회의 의장 종산 스님은 “그냥 봐도 환희심이 나는 분이다. 동산 스님은 그대로가 법상(法像)이다”며 “동산 스님을 모신 3년간 조석예불 빠지는 것을 못 봤다. 대중공사(大衆共事)를 하면 종정까지 지낸 스님이 궂은일을 자청해 하셨다”고 회고했다.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은 “동산 큰스님은 모든 예불에 절대 빠지지 않으셨고, 신도들을 위한 축원(祝願)을 직접 하셨다”며 “대중 생활에도 철저해서 공양을 해도 늘 대중과 함께 하셨다”고 전했다.
불자로서 은혜를 갚는 4가지 본분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깨달음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참선 정진을 할 때 가장 빨리 이룰 수 있습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존귀합니다. 깨달음의 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깨치지 못하면 범부(凡夫)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깨치지 못하면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이뭣고?’ 화두를 했습니다. 동산 스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화두를 해석하면 여러 가지 의미일 수 있습니다만, 동산 스님은 ‘누구 없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의심을 이뭣고에 담을 수 있겠습니다만 동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누구 없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무엇이냐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 단양 원통암에서 정진 중에 경계를 체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절 인연이 되면 도를 이룰 수 있다며 일념으로 수행정진할 것을 강조한 은사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만공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전국 선방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10년 작정을 하고 충북 단양 원통암에 갔습니다. 전쟁 직후여서 경찰들이 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공비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보리쌀 1말과 좁쌀 3되, 쌀 3되를 가지고 원통암에 들어갔습니다. 물을 하루에 3되씩 먹으면서 생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죽을 쑤어서 먹고 칡뿌리나 도토리, 솔잎, 뽕잎을 따 먹고 지냈는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7년 2개월 18일쯤 지났을 때 봄바람 소리가 한가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귀에서 진통이 왔습니다. ‘됐다. 그만하면 됐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환희심이 잊히지 않습니다.”
▼ 수많은 선지식과 함께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선지식을 모신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1944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는데, 만공 스님 눈에서 밝은 빛이 났습니다. 도인의 풍모 자체였습니다. 또 저의 사형(師兄)인 성철 스님도 참 열심히 정진하셨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저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혜 스님은 범어사 금어선원에서의 정진을 비롯해 해인사 백련암, 표충사, 각화사 태백선원, 고운사 고금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46안거를 성만했다. 숫자 이상의 의미 그 자체다.
▼ 대법사를 중창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법사는 원래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표충사(表忠祠)라 불렸습니다. 표충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을 대법사로 바꾸고 불사를 했지요. 처음 왔을 때는 허물어져가던 전각 5~6채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학이 남쪽으로 날아와 앉은 터에 절을 지은 곳이기도 합니다. 오자마자 불사를 시작해서 현재 대웅전과 보광전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수행처로 삼은 것은 사명대사의 뜻을 잇고 불자들에게 삶의 바른 도리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법사 마당에는 사명대사가 심었다고 알려진 수령 400년이 넘는 모과나무가 서 있다. 또 마당 한가운데 모셔진 탑에도 4면에 사명대사의 진영을 새겨 넣었다. 지혜 스님은 사명대사의 후예로서 자긍심이 대단했다.
▼ 출가자의 본분은 무엇인가요?
“출가인의 본분은 수행 정진에 있습니다. 불법은 곧 마음이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대도(大道)의 문은 어디에도 열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크게 정진해야 합니다.”
스님은 “대각(大覺)이 보명(普明)하니 산색(山色)은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다.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眞理)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 스님들은 수행정진(修行精進)이 진리(眞理)의 근본(根本)이요,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고 묘법(妙法)은 무생(無生)이며 연화(蓮花)는 무영(無榮)이다. 무상으로 체(體)를 삼고 무생에 안주해 무염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리(無上菩提)요 무애해탈(無碍解脫)이며, 무한생명의 자체구현(自體具現)이다”고 설했다. 스님은 또 “일심(一心)이 상청정(常淸淨)하면 처처(處處)에 연화개(蓮花開)다. 승려는 수행정진 대성불(修行精進 大成佛)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일체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벗고 산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요 해탈이며, 만 생명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 그럼 불자의 본분은 무엇인가요?
“불자는 4가지 은혜를 갚는 것을 본분으로 해야 합니다. 조상과 조국, 사회, 불도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불자들은 우선 생명을 심어준 조상을 위하는 마음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또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인연을 소중히 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진리를 깨우쳐주는 불도를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소중히 여긴다면 조상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국민이 됐으니 나라에 충성하고 불도와 인연을 맺었으니 진심으로 부처님의 법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가정이 평안하고 사회가 평화롭고 국민은 행복할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경제인은 경제인으로서, 교육자는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행할 때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한 스님은 “허상을 좇지 말고 사회 속에 주어진 인연의 본래 모습을 득하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지혜 스님은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를 해야지 ‘정치꾼’이 돼서는 안 된다”며 “국민이 국가에 대한 충(忠)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정치인은 바르게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밝고 넓게 보면 마음도 성장
▼ 평소 ‘하심(下心)’을 많이 강조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하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화합하려면 하심해야 합니다. 하심은 마음을 크게 비우는 것입니다. 선방에 앉아서 30년, 40년 공부했다고 해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평생 공부가 헛수고입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데 무슨 공부를 하며, 부처는 또 어떻게 보겠습니까? 부처님 법의 근본은 발심하고 원력을 세워서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범어사 주지 정여 스님은 “지혜 큰스님은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나서도 하심으로 항상 범어문중을 살펴주시는 자비로운 어른”이라며 “수행자들은 늘 화두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고 귀띔했다.
▼ 공부를 하다 어려움에 부딪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반드시 고비가 있습니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아요. 저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니 담을 수 있는 양도 다르겠지요. 그렇다고 그릇 크기가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까. 그릇의 크기는 다름 아닌 마음의 크기입니다. 마음을 크게 하려면 마음자리를 봐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물을 밝고 넓게 보면 마음도 커집니다. 밝고 넓은 것이 바로 태어날 때의 본모양이요, 마음자리입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진한다면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스님의 말씀에는 아직도 힘이 있었다. 결코 사구(死句)가 아닌 살아 숨 쉬는 활구(活句)였다.
“육신은 허망한 것입니다. 마음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요. 죽고 나면 모두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는데 집착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은 보려 하지 않고 육신에 매달립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주관과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진실은 마음에 있습니다. 물 한 방울도 담을 수 없는 그릇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윤회와 번뇌는 벗어나기 어렵고 한번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기 힘든데, 살아 있을 때 마음으로 살아야지 몸뚱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스님은 거침없는 법문을 쏟아냈다. 짧은 시간의 강렬한 메시지였다. 자리를 정리하면서 지혜 스님은 동산 스님이 써준 글귀를 소개했다. ‘천고방양(千古榜樣)’. ‘먼 후세에까지 남는 모범이 되어라’는 은사 스님의 유훈과도 같은 글귀를 보며 지혜 스님은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있었다.
지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마당으로 나오니 세상은 더 뜨거워져 있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자락을 보아도 더위가 쉽게 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혜 스님의 시원시원한 말씀에 몸과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더운 동네’ 밀양에 얼음골이 있어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듯, 지혜 스님의 할(喝)과 방(棒)이 있어 불자들은 오늘도 영취산 자락 대법사를 찾는다.
늘 대중과 함께하며 성철 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 길러
스님은 출가 인연부터 남달랐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스님은 용성 스님에게 “인간의 병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 결국 스님은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범어사에서 사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후 동산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마천 백운암 등 전국 선원에서 정진하고 김천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3년 용맹정진 결사를 마치기도 했다. 다시 범어사로 돌아온 1934년 8월 범어사 금어선원의 동쪽 대나무밭을 거닐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았다. 당시 깨달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화래화거기다년(畵來畵去幾多年) 필두낙처활묘아(筆頭落處活猫兒)로다 진일창전만면수(盡日窓前滿面睡) 야래의구촉노서(夜來依舊捉老鼠)’로다. 즉 ‘그리고 또 그린 것이 몇 해이던가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네’였다. 의사의 꿈을 버리고 진리를 궁구해 출세간의 장부로서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건지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헤맨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 후 스님은 성철 스님을 비롯해 광덕 스님, 지유 스님, 능가 스님, 정관 스님, 무진장 스님 등을 제자로 받아 한국 불교의 기둥으로 키워냈다. 또 청담 스님, 효봉 스님, 금오 스님 등과 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스님은 찾아오는 납자(衲子)들은 기꺼이 받아주었다. 동산 스님이 범어사 청풍당에서 정진할 때 찾아오는 수행자가 많아 절 살림을 관리해야 하는 원주 스님의 불만이 컸다. 그러나 스님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게 불가의 도리이거늘, 감히 어찌 수행하겠다고 찾아오는 수행자를 내치란 말이냐?”고 원주를 꾸짖기도 했다.
늘 대중과 함께하고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했던 동산 스님은 1965년 ‘원래미증전(元來未曾轉)이니 개유제이신(豈有第二身)이요 삼만육천조(三萬六千朝)에 반복지저한(反覆只這漢)이로다’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으니 어찌 다시 두 번째의 몸이 있겠는가. 100년 3만6000일 매일 반복하는 것, 다만 이놈뿐일세’였다. 스님은 열반하는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중과 함께 새벽 예불을 드리고, 금어선원에서 정진하고, 도량 청소도 빠지지 않았다. 점심 공양을 한 뒤 약간 피로한 기색을 보이더니 제자 몇 명을 불러놓고 종단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방일하지 말고 부디 정진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경남 밀양을 찾았다. 말 그대로 ‘태양의 기운이 가득한’(密陽) 곳이어서인지 햇살을 피할 곳이 없었다. 밀양역에 내려 대법사(大法寺)를 물으니 “큰스님 찾아오셨습니까?”라며 택시 기사가 반갑게 맞아줬다. 30여 분을 달려 영취산 자락에 접어들자 어느새 대법사에 닿았다. 최근 중창(重創)을 마무리해 절이 깔끔하고 아담했다.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존귀
대법사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 지천지혜(智天智慧) 대종사가 주석하고 있다. 지혜 스님은 30여 년 제방선원을 다니다가 1969년부터 대법사에서 주석했다. 평생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스님을 친견한다는 설렘과 긴장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지혜 스님은 보광전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방에 계셨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취산 자락을 보며 참선 중이던 스님에게 무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했다.
“할 말이 없는데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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