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족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漢末 시인 비운의 여성, 채염의 삶을 담은 비분시(悲憤詩)
봉건시대 여자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으며 그런 삶은 종종 문학작품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1850~1893)이 1883년에 쓴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은 선량한 한 여자가 걸어가는 환멸의 일생을 염세주의적 필치로 그려낸 작품으로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귀족의 외동딸 잔느는 청순하고 꿈 많은 처녀였다. 그녀는 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내고 결혼을 하였지만, 남편의 바람기로 결혼 생활에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잔느는 외아들 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마저도 방탕아가 되어 집을 나간다. 잔느는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삶의 비애와 환멸을 느낀다.
중국에는 잔느보다 더한 비통을 겪은 실존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채염(蔡琰), 즉 채문희(蔡文姬)이다. 그녀의 비통한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비분시(悲憤詩)’이다. 채염에 관한 내용은 ‘후한서(後漢書) 동사처전(董祀妻傳)’에 실려 있고, ‘삼국연의(三國演義)’ 제71회에도 실려 있다.
한말 대학자 채옹의 딸
채염은 건안(建安) 시기 유명한 여자 시인이었다. ‘건안’이란 한나라 헌제 유협의 연호로서 196년에서 220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아울러 ‘삼조’, 즉 조조(曹操)·조비(曹丕)·조식(曹植)의 주위에 한 무리의 문인들이 모여 창작 활동을 함으로써 건안 연간과 위 초기의 문단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중국문학사에서는 이 시기의 문학을 ‘건안문학’이라고 부른다.
- 채염(나고 죽은 해를 알 수 없음·약 177~?)의 자는 문희(文姬)이고 진류어(陳
·오늘날의 허난성 기현杞縣 남쪽)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자인 채옹(蔡邕)의 딸이었다. 채옹은 한(漢)말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으로서 서예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조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3년상을 치를 정도로 훌륭한 인격자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영리하게 처신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은 동탁(董卓)이 인심을 무마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덕망이 높은 채옹을 파격적인 대우로 자신의 휘하에 불러들인다. 그랬던 동탁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채옹은 동탁이 그간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호의와 그의 인간됨을 기리면서 탄식하고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 행동으로 채옹은 왕윤(王允)을 비롯한 반대파에게 ‘동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라는 죄목을 얻어 죽임을 당했다.
세 번 결혼한 박복한 삶
문희는 어려서부터 문학과 음률을 좋아하였다. 채옹이 거문고 연습을 하다가 줄이 끊어지면 소리만 듣고도 몇 번째 줄이 끊어졌는지를 맞혔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성의 몸으로 반고(班固)와 함께 ‘한서(漢書)’를 공동 집필한 반소(班昭)를 우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한서’의 뒤를 잇는 작업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16살에 하동(河東·산시성 동부지방)의 세족(世族)인 위중도(衛仲道)와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부부의 금실이 좋았지만 남편 위중도는 1년도 안되어 각혈을 하며 죽었다. 시댁에서 남편의 죽음을 문희의 책임으로 돌리자 문희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생활하였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앞서 언급하였듯이 아버지도 살해되었다. 동탁이 죽고 군벌끼리 혼전을 벌이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를 기화로 북방의 기마민족들이 중원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흉노족이 쳐들어왔고, 23살이던 문희는 헌제 초평(初平) 3년(192년) 흉노 병사들에게 납치되어 좌현왕(左賢王)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그곳의 말과 풍습을 익히며 아들 둘을 낳고 그곳에서 12년 동안을 살았다. 그 사이에 조조가 북방의 군벌을 평정하고 천자를 옆에 낀 채 승상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어느 날 조조는 이 대학자의 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건안 12년(207년)에 사절단을 보내 흉노 측에 많은 선물을 줌으로써 그녀를 데려올 수 있었다. 그 후 조조의 배려로 문희는 동사(董祀)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동사마저도 중죄를 짓고 사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문희는 추운 겨울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조조를 찾아가 남편의 구제를 호소하였다. 조조는 대학자 채옹의 딸인 문희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려 조정 대신의 동의를 얻어 동사의 사면을 허락하였다. 조조는 그 자리에서 옛날 채옹이 소장하던 장서 4000여권의 행방을 물었고, 문희는 전란 속에서 모두 소실되었지만 자신이 400여권을 암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조조가 사람을 보내 필사를 돕겠다고 하자 문희는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다며 스스로 암기한 책들의 내용을 필사하여 조조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리곤 남은 반생 동안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고 자신의 시를 창작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최초의 5언 서사시 ‘비분시’
채문희의 대표작으로는 ‘호가십팔박(胡?十八拍)’과 ‘비분시(悲憤詩)’가 있다. ‘호가십팔박’은 거문고 장단에 맞춘 노래로서 모두 18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담고 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연민과 동정을 느끼게 한다. 그중 ‘제8박’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하늘에게 눈이 있다면, 어찌하여 내가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귀신에게 영이 있다면, 어찌하여 나를 하늘 아래 남쪽바다와 북쪽산에 있게 하는가?
내가 하늘에게 잘못이 없건만,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오랑캐와 짝지어 주는가?
내가 귀신에게 잘못이 없건만, 귀신은 어찌하여 나를 오랑캐 땅에서 죽게 하는가?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호가십팔박을 후세 문인이 지은 위작으로 여긴다. 이 밖에도 그녀에겐 2수의 ‘비분시’가 있는데, 하나는 소체(騷體·굴원의 작품 ‘이소’ 등 초사처럼 어조사 혜(兮)자를 네 번째나 마지막에 넣는 남방시 형식)이고 또 하나는 5언체이다. 여기서도 소체의 ‘비분시’는 다른 이의 위작일 가능성이 짙고, 5언체의 ‘비분시’만이 그녀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비분시’는 108구 540자의 장편으로서, 중국문학사상 문인이 지은 최초의 5언 서사시이다. 이는 악부시(樂府詩)인 ‘공작은 동남쪽으로 날아가고(孔雀東南飛)’와 함께 건안 시기 장편서사시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시 속에서 문희는 동한(후한) 말 전란 속에서 자신이 겪었던 비극적인 삶과 불우했던 처지를 서술하였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 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후한 말의 어지러운 상황과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상황을 기록한 부분이다. “한말의 조정은 권위를 잃었고, 동탁은 하늘의 이치를 어지럽혔다.” “동탁의 무리는 들에서 사냥하고 성읍을 포위하여, 가는 곳마다 파괴를 일삼았다. 살육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으니, 시체가 서로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말 옆에는 남자의 머리를 달고, 말 뒤에는 부녀자를 태웠다.” 삼국지(三國志) 동탁전(董卓傳)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결코 과장이 아닌 실제 모습이었다. 결국 흉노족에게 포로가 되어 수만의 동포들과 함께 낯선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간혹 채찍과 몽둥이로 맞으면 독과 같은 아픔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아침이면 울면서 일어나 걷고, 밤이면 슬픈 신음소리를 내며 앉았다. 죽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었다.” 결국 시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재난을 만나게 하는가”라며 하늘을 원망한다.
두 번째 부분은 이역만리에 끌려가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는 어려움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기쁨, 그간의 삶을 접고 아이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골육의 정 등을 담았다. 작가의 고통과 비애가 가장 잘 표현된 부분이기도 하다. “변방의 황폐함은 중원의 화려함과 달라, 사람의 풍속에는 의리가 없었다. 사는 곳은 서리와 눈이 많았고, 차가운 북풍은 봄과 여름에도 불었다.” 중국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문희가 억류되어 생활했던 곳이 서하(西河) 미직(美稷·지금의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이크자오멍伊克昭盟 일대)이라고 한다. 머나먼 이역에서 그녀는 매일 밤 고향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게 되자 이번엔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들이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울먹이니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하였다. 함께 붙잡혀 왔다가 돌아갈 수 있게 된 문희를 보며 부러워하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비분시’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 바로 이 장면이다.
나는 이제 풀려나지만, 응당 다시 아이들을 버려야 하는구나.
가족의 끈은 사람의 마음으로 얽혀 있는데, 헤어짐을 생각하니 다시 만날 날 기약없다.
삶과 죽음 영원히 멀어지기에, 참을 수 없어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가 내게 안겨 묻기를, “어머니는 어디로 가려 하나요?
사람들이 어머니가 가야 한다 말하는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요?
엄마는 어질고 상냥했는데, 이제와 왜 다시 자애롭지 못하나요?
나는 아직 어른도 아닌데, 어찌 다시 생각해보시지 않는 건가요?”
이를 보는 내 오장육부가 무너지며, 정신이 아득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통곡하며 손으로 어루만지니, 당연히 다시 회의가 들었다.
산시성 란티엔현에 기념관
그러나 문희는 자식들을 버리고 중원으로 돌아간다. 이 대목은 이해가 안 되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더 그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녀는 중화주의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세 번째 부분은 중원으로 돌아와 새로운 각오를 다져보지만 이미 온갖 마음의 상처를 입은 문희의 고달픈 삶을 기록하였다. 중원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왔건만 가족은 아무도 없고, 친척들도 찾을 수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다, 혼과 정신이 갑자기 날아가버려, 문득 내 목숨이 다한 듯이 느껴졌다. 이웃들이 마음씨가 좋아 다시금 굳세게 살아보라 하지만, 비록 산다한들 어디에 의지할 건가? 새로운 사람에게 내 목숨 맡겼으니, 마음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리라. 이리저리 떠돌다 비천하게 되었으니, 항상 버림받을까 두렵구나! 이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 근심을 품고 삶을 마칠 뿐이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전란 속에서 한 여성 지식인이 겪은 고통과 시대의 아픔을 잘 그려내었다. 이는 ‘삼조’ 등이 작품에서 반영한 시대 상황과 완전히 일치한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궈모뤄(郭沫若)는 1959년, 그녀의 일생을 소재로 대형 역사극 ‘채문희’를 창작하였다. 그 극본 속에서 궈모뤄는 그녀의 작품을 붓이 아닌 생명 그 자체로 써낸 것이라 평하였다. 궈모뤄의 지적처럼 ‘비분시’는 시인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사실성이 뛰어나고 진솔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던 쟈오쥐인(焦菊隱)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1978년에 이 작품이 베이징에서 다시 공연되자 인파가 몰려 광장의 남쪽 벽이 무너질 정도였다고 한다. 2002년에는 베이징 인민예술극원의 창립 50주년을 맞아 쉬판(徐帆), 량관화(梁冠華) 등 실력파 배우들을 기용하여 ‘채문희’를 다시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채문희의 묘소는 산시성(陝西省) 동남쪽 란티엔(藍田)현에 있다. 1991년에는 채문희기념관을 건립하여 채문희에 관한 서적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처럼 채문희는 드라마와 같은 비극적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아픔은 온전히 문학작품으로 남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현재의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안온한 삶이 주는 행복에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30 (0) | 2010.11.13 |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8 (0) | 2010.11.07 |
큰스님의 삶과 수행⑦ (0) | 2010.10.27 |
치우천왕 (0) | 2010.10.26 |
염화실의 향기_16_ 봉국사 주지 월서스님 (0) | 201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