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포도주 이름난 ‘페르시아의 요람’
시라즈의 이슬람 성소인 이맘 알리 이븐 함자 묘당의 정면. 9세기 건축물이다.
예로부터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얼굴’로 알려져 왔다. 중국 옛 문헌에는 ‘파사(波斯)’로 기록된 ‘페르시아’는 원래 이란 남부 지역을 일컫는 ‘파르스’에서 유래한 말인데, 파르스의 심장부가 곧 시라즈와 그 주변 지역이었다. 오늘날도 파르스는 이란 28개 주 가운데 인구 400여만명의 큰 주로서, 그 주도 역시 시라즈다. 요컨대 시라즈는 페르시아를 잉태하고 키운 요람인 셈이다. 사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중엽 파르스에서 출범한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2500여년 동안 이란의 대명사였다. 숱한 왕조가 바뀌어도 이곳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늘 ‘페르시아’란 전통 개념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다 팔레비 왕조 때인 1935년 국호를 ‘이란’으로 바꿨다. 페르시아인 대부분이 기원전 2천년께 남러시아에서 이란 고원으로 흘러들어온 인도-유럽계 아리안의 후예들이므로, 그들 이름을 따서 ‘이란’을 택했던 것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2500년 ‘터줏대감’
‘조화와 포용’ 미덕 다민족 혼성도시 변모
페르시아의 요람답게 시라즈는 오랫동안 나라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다. 아리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 이란 서북부 함단에 첫 국가 메디나 왕국을 세웠지만, 기원전 6세기 중엽 남부 파르스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에 멸망당한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50~333년)는 인더스 강에서 이집트까지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첫 세계적 통일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왕도를 초기에는 시라즈 북동 130㎞ 지점의 파사르가데(‘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에 두었다가, 30여년 뒤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뒤이어 출현한 파르티아(안식국: 기원전 248~기원후 225년)는 헬레니즘의 온상으로 페르시아적 순수성을 얼마간 희석시켰다. 그러나 뒤이어 파르스에서 일어난 사산조(기원후 226~651년)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조의 계승자로 자부하면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를 국교 삼아 역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려는 페르시아 주의를 표방했다.
이후 아랍-이슬람군의 정복으로 나라는 망하고 이슬람화한다. 이란인에게 7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말엽까지 약 800년 동안은 아랍족, 몽골족, 튀르크(터키)족 등의 지배를 받은 수난기다. 고유의 파할레비 문자 대신 아랍 문자가 쓰이고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는 이슬람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고유의 얼과 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티무르 제국 쇠퇴기에 튀르크 부족 연합 체제인 백양조(白羊朝)를 무너뜨리고 이스파한을 도읍 삼아 건국한 사파비 왕조(1501~1732)는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하고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아프가니인들의 내침을 계기로 다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카림 한은 시라즈에 잔드 왕조(1750~1794)를 세워 국난을 타개한다. 잔드 왕조는 800년 만에 일어선 순수 페르시아계 왕조로, 시라즈에는 이 시대 유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라즈는 역사의 고비마다 수호신처럼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지켜오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전승과 영광스런 유산을 남겼다. 일정상 오래 머물 수 없어 두 대시인의 영묘를 돌아본 뒤 잠깐 시내 관광에 나섰다. 시 중심을 이루는 슈하다(순교자) 광장에 이르니, 낮이라 비교적 한산하다. 광장 동쪽에 시라즈의 상징이라는 카림 한 고성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네 모퉁이에 원탑이 세워진 이 사각형 성채는 원래 잔드조 건국자 카림 한의 거성이었으나, 후대에 감옥으로 쓰인 적도 있다고 한다. 성채 바로 곁에 파르스 박물관이 있었다. 잔드 시대에 영빈관으로 지었으나, 카림 한의 유언에 따라 그의 관을 안치한 묘당이 되었다. 그러나 잔드조를 멸망시킨 북부 투르크멘계 출신의 카자르조(1780~1924) 창건자 아가 무함마드는 후환이 염려되어 관을 테헤란으로 옮겨버렸다. 지금은 관 자리에 카림 한이 차고 다니던 도검 한 자루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광장 서쪽에는 비교적 현대적인 이맘 후세인 광장(일명 세타드 광장)이 있고, 남쪽에 옛 시가지의 저잣거리가 쭉 늘어서 있다.
지리적으로 남쪽 페르시아만과 북쪽 내륙 각지를 이어주는 요로에 있는 시라즈는 행정·군사·교역의 거점 구실을 해왔다. 땅도 기름져 농사와 목축업이 흥했다. 오늘날 시라즈는 대체로 7세기 우마이야조 아랍제국 시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부와이흐 왕조 때인 10세기에 궁전과 병원, 도서관 등을 짓고 시가를 정비했으며, 11세기 처음 둘레 19㎞에 12개 성문이 달린 성벽을 쌓았다. 14세기 중엽 일칸국(일한국) 시대에는 성벽을 개축하고 도성을 17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시라즈는 ‘천은(天恩)을 입은 고도’라고들 한다. 10세기 이래 열 차례나 지진(19세기 두 차례 대지진)이 일어났고, 몽골과 티무르의 내침을 받았으나 큰 손상을 받지 않았다. 894년 지은, 가장 오래된 자미아 마스지드(사파비조 때 개축)와 잔드조의 대표적 사원인 와킬 마스지드(1773)를 비롯한 사원들과 이맘 알리 이븐 함자 묘당, 1615년에 지은 마드라사 한(신학교) 등의 유적들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란 사람들이 자랑하는 조화와 포용의 미덕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해서 옛날부터 유대인들이 차별 없이 거주해 왔으며, 아랍-이슬람 정복 뒤에는 아랍인들이 몰려와 이른바 ‘함세족’(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족)이란 새 종족이 생겨났다. 16세기 이후엔 아르메니아인들도 옮겨와 터전을 마련했다. 1937년 이란식으로 지어진 성 시몬 교회는 최초의 페르시아어 성경 번역본이 보관된 명소로 꼽힌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인구 120만명을 헤아리는 시라즈는 지금도 다민족 혼성도시다. 절반을 약간 넘는 아리안계 페르시아인과 튀르크족, 셈족, 기란-마잔다란족, 쿠르드족, 투르크멘족, 집시족 같은 다양한 인종이 이웃하며 산다.
시라즈는 장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어디를 가나 향긋한 장미가 대지를 수놓는다. 가장 이름난 곳이 에람 정공원(바게 에람)이라고 한다. 여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시가 서북쪽의 공원을 찾았다. ‘에람’은 페르시아어로 ‘낙원’이란 뜻이다. 정문에 들어서니 오른편에 울긋불긋한 장미원이 펼쳐진다. 이곳 장미는 5~6월이 한창이라 한물가긴 했지만, 여전히 색깔이 산뜻하고 녹진한 향기를 풍긴다. 19세기 에람 궁전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인데, 장미 말고도 갖가지 꽃과 희귀 식물이 어우러져 하나의 수목원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정문 바른쪽 언덕 위의 시라즈 대학 임업학과 학생들의 실습장도 겸하고 있다. 특히 길 양쪽에 도열하듯 늘어선 20~30m 높이의 삼나무는 인상적이다.
3대 절화(折花: 가지째 꺾는 꽃)의 하나인 장미는 동서양에서 인기 만점의 꽃이다. 오늘날 원예종으로 길러 감상하는 아름다운 장미꽃들은 동서교류의 산물이다. 원래 동양과 서양에서 야생하던 원종이 19세기 이후 서로 만나 교접함으로써 비로소 오늘날 600~700종에 이르는 개량 장미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 교류의 징검다리가 이 시라즈 장미다.
장미와 더불어 시라즈를 낭만의 페르시아 도시로 이름나게 한 데는 포도주가 한몫을 했다. 오늘날은 이슬람 율법에 묶여 술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지만, 지난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포도주가 없었던들, 대시인 하피즈가 페르시아의 시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다. 카스피해를 낀 페르시아 지방은 포도의 원산지인데다, 시라즈는 예로부터 포도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네 시중에도 나도는, 달콤한 맛의 호주산 ‘시라즈’ 포도주는 아마도 고도 시라즈에 그 인연이 닿은 것 같다.
시라즈를 페르시아의 얼굴로, 요람으로 만들게 한 정신적 바탕에는 문학예술, 특히 시문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시라즈를 시의 도시라고도 한다. 그 앞머리에 이곳 출신 2대 시인이 있다. 그들의 시세계는 다음 회에 이야기하려 한다. 시라즈는 페르시아의 산실인 파르스의 심장으로서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시종 변함없이 그 역정을 대변하는 얼굴로, 그 힘을 보듬어 키운 요람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시아파 추종 아리안족 이란인
수니파 셈족계 아랍인과 갈등
이란인(페르시아인)은 아랍인, 튀르크인과 함께 중근동에서 실크로드의 역사를 일궈온 민족이다. 우리 눈에는 비슷한 중동 무슬림으로 비치지만 이란인과 아랍인은 민족적, 문화적으로 엄연히 다르다. 이란인은 기원전 10세기께 카스피해 북쪽에서 내려와 정착한 아리안족이지만 아랍인은 셈족 계통의 유목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란이란 이름 자체가 ‘아리안족의 땅’이란 뜻(페르시아는 서구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이란인들은 잘 쓰지 않는다)을 지닌 데서도 보이듯 이란인은 옛 페르시아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유별나다. 오랫동안 이란 고원을 번갈아 지배한 아랍·투르크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으며 종파도 아랍권 소수인 시아파다. 반면 절대다수가 주류 수니파인 아랍인들 상당수는 이란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는다. 역사적 앙금에서 생긴 민족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란인들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이슬람화를 추진하자 이란인들은 처음에는 순순히 정복자들의 시책에 협력했다. 그러나 곧 칼리파(군주)의 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정통성 논란이 일자 이란 지역은 반정부 세력의 본거지가 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4대 칼리파 알리 가문의 후예들만이 유일한 적통임을 주장하면서 뒤늦게 개종해 왕위를 차지한 아랍 우마이야 왕조의 후계 칼리파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는 곧 우마이야 왕조가 잃은 정통성을 별개의 종교 지도자(이맘)에서 찾는 시아파 교리의 태동 배경이 되어 수백년간 호라산 등 이란 지역에서는 시아파의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여기에는 신앙 해석의 문제 말고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월한 위상을 누린 이란 지역과 열등했던 아랍권의 지정학적 갈등이 어우러져 있다. 경제, 문화면에서 취약했던 아랍인들은 제국을 세운 뒤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이란에서 거둬들였고, 건축·음악·문학 분야 등에서도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셀주크 튀르크와 몽골 제국 지배를 거쳐 16세기 다시 등장한 이란인들의 사파비 왕조는 아랍 칼리파와 별개로 이맘이 통치하는 시아파 자주국가를 표방했고, 이런 체제 이념은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민족의 미묘한 갈등은 현재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 고원을 가르는 인도양 내해의 명칭을 놓고 이란은 페르시아만, 아랍 나라들은 아랍만이라고 주장(서구에서는 그냥 걸프로 부른다)하며 아옹다옹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89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엔 아랍계 중동 국가 대부분이 시아파 국가 이란의 팽창을 우려해 은밀히 이라크를 지원하기도 했다.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01 (0) | 2010.11.16 |
---|---|
염화실의 향기_18_전북 장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 (0) | 2010.11.14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8 (0) | 2010.11.07 |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11 (0) | 2010.11.06 |
큰스님의 삶과 수행⑦ (0) | 2010.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