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착각의 비극입니다. 자살은 착각의 범죄입니다.
허망한 착각이 '피할수 없는 동기'로 둔갑됩니다. 죽음에 대한 착각은 삶에 대한 착각의 연장에 다름 아닙니다.
첫째, 죽음이 끝이다라는 착각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도피처는 없고 혹독한 책임만 있을 뿐 입니다.
죽음은 <영혼>이 죽은 것이 아니라 <육체>가 죽은 것입니다. 육체는 물질세계에서 잠시 타는 자동차와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의 주인인 영혼이 운전자 입니다. ‘자살이 끝’이라는 착각은 자동차가 폐기되었으니 운전자가 없어졌다는 착각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자살의 대가는 육체의 운전사인 영혼이 고스란히 짊어지게 됩니다. 영혼의 불멸 무한성과 육체의 유한성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성공>이라는 착각
인생의 컨셉은 ‘성공’이 아니고 ‘실패’입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영혼의 성숙입니다. 생을 마감하며 남는 것은 오직 영혼뿐입니다. 인생이란 육체적 삶을 통해 얼마나 성숙한 영혼을 수확해 가느냐하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실패는 영혼을 성숙시키기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인생에서 성공은 오히려 일시적인 예외일 뿐입니다. 요즘 세대들이 한번의 실패로 치명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헐벗었던 과거보다 풍요로운 요즘에 자살이 더 많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자살의 동기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행복간의 변수를 어떠한 지식보다 먼저 아는 지혜를 밝혔으면 합니다.
셋째, 자살의 이유가 절대적이라는 착각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저마다 절대적 이유를 내세웁니다. 본인만이 절대적이라는 이유, 스스로 죽어야만 하는 절대적상황이 있을까요. 절박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1억의 빚이 자살의 이유라면 1억 이상 채무자는 모두 죽어야하고, 명예훼손이 이유라면 더 큰 망신을 당한 사람은 모두 죽어야하고, 실연이 이유라면 첫사랑에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더 큰 부자, 더 존경받는 명예, 더 성숙한 사랑을 이룬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천하를 얼려버릴 것 같은 엄동설한도 때가되면 풀리는 것처럼, 상황은 계절처럼 언제나 끊임없이 변합니다. 비록 굶어 죽고, 질병과 사고를 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이미 주어진 생명의 시한이 다된 천명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에게만 닥친 절대적 상황이라고 여겨질 때, 정신과 마음이 상대적으로 나약해진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변명은 아닌지 깊게 성찰해봐야 합니다.
넷째, 상대방에 대한 보복이라는 착각
‘자살은 영혼의 타살’이라고 앞서 말했습니다. 현상적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自殺) 같지만 정신이 심약해져서 육체를 침해받는 것이거나 자신이 저지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보복성 자살만해도 스스로가 자살 동기의 원인임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거스르고 주위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한 죄를 추가로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음 생에 더 큰 난관을 예약하고 만 셈입니다. 시간차가 있을 뿐, 보복성 자살의 최후는 상대방이 아니라 본인의 영혼을 겨냥하게 되어있습니다.
다섯째, 선택의 자유라는 착각
자살은 자신을 죽이는 <타살>입니다. 자살 이후에 영혼과 육체의 모든 자유가 박탈되는 엄청난 대가를 치릅니다. ‘자유’를 위해서 선택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어처구니없이 엄청난 ‘구속’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스스로의 영혼을 느껴야
영혼은 육체가 죽어 있으나 살아있으나 늘 존재합니다. 현상계는 유한하지만 영계는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이런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없어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을까요. 그러면서 이미 우리는 널리 믿고 있습니다. 직접 가보지 않고도 PC 모니터로 세상을 인정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속눈썹처럼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편견이 안타깝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제’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生命)을 한자로 풀이하면 ‘살라고 명령받은 것’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生)과 사(死)는 자연(自然)이기에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행위는 큰 죄악입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온전하게 천도도 안 됩니다.
자살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구명시식의 한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재 자살이 아님에도 영혼이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떠도는 경남 김해 청년 영가의 경우입니다. 그 청년은 사망 당시 손에 농약병이 있었고 입 언저리에 농약이 묻어있어 농약 먹고 자살한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명시식으로 알아낸 사인은 고혈압에 의한 혈관파열이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기관과 청년의 아버지가 자살로 단정해버렸습니다. 실재 자살이 아님에도 단지 남에 의해 자살로 비춰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천도가 되지 못하고 구천에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재 자살의 대가는 얼마나 더 혹독하겠습니까.
자살은 영혼의 타살
현상계의 자살(自殺)은 ‘자살(自殺)’이 아닙니다. 큰 눈으로 봤을 때, 엄연히 영혼의 타살(他殺)입니다.
대부분 빙의된 영혼에 의해 타살되는 자살자 영가들의 공통점은 심성이 착하고, 정신적으로 약하다는 것입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했던 사람이 자살할 때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거나 목을 맨다거나 동맥을 끊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방법을 씁니다. "그럴 애가 아닌데." 자살자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입니다. 이는 곧 누군가 그렇게 죽으라고 시켰다는 얘기입니다.
과보(果報)에 의한 빙의의 경우도 있습니다. 의문의 사고로 죽은 K씨의 구명시식에서 K씨 영가는 ‘남편에게 청부 살해당했다’고 분노했습니다. 이미 K씨 영가의 남편은 죄책감으로 뒤이어 자살을 한 상태였습니다.
"현상계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죽였지만, 영계로 봤을 때 아내도 남편을 죽인 겁니다. 두 사람이 서로 죽인 셈이니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지만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화해를 하세요."
새벽 무렵에야 부부영가는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자살자 뒤에 다른 영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자살자 영가를 천도할 때마다 꼭 누군가 따라왔습니다. 알고 보니 자살자 영가를 죽게 한 영가들이었습니다. 마치 물귀신 영가를 천도할 때, 같은 지점에서 죽은 모든 물귀신 영가를 천도해야 하듯, 자살자 영가도 영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영가와 같이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자 영가를 천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본인의 심약한 정신 탓
만약 자살의 충동을 겪고 있다면 자신의 정신부터 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습한 피부에 피부병이 생기듯, 약한 정신은 죽음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집이라고 합니다. 사회에서도 집이 없으면 셋방으로, 노숙자로 전전하며 살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집’을 지킬 힘이 없으면 영혼의 노숙자로 전락하게 되어 무한정 구천을 떠돌아야 합니다.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났다면 적어도 자기 생명의 집을 지킬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다른 생명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살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구명시식의 한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재 자살이 아님에도 영혼이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떠도는 경남 김해 청년 영가의 경우입니다. 그 청년은 사망 당시 손에 농약병이 있었고 입 언저리에 농약이 묻어있어 농약 먹고 자살한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명시식으로 알아낸 사인은 고혈압에 의한 혈관파열이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기관과 청년의 아버지가 자살로 단정해버렸습니다. 실재 자살이 아님에도 단지 남에 의해 자살로 비춰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천도가 되지 못하고 구천에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재 자살의 대가는 얼마나 더 혹독하겠습니까.
자살은 영혼의 타살
현상계의 자살(自殺)은 ‘자살(自殺)’이 아닙니다. 큰 눈으로 봤을 때, 엄연히 영혼의 타살(他殺)입니다.
대부분 빙의된 영혼에 의해 타살되는 자살자 영가들의 공통점은 심성이 착하고, 정신적으로 약하다는 것입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이지 못했던 사람이 자살할 때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거나 목을 맨다거나 동맥을 끊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방법을 씁니다. "그럴 애가 아닌데." 자살자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입니다. 이는 곧 누군가 그렇게 죽으라고 시켰다는 얘기입니다.
과보(果報)에 의한 빙의의 경우도 있습니다. 의문의 사고로 죽은 K씨의 구명시식에서 K씨 영가는 ‘남편에게 청부 살해당했다’고 분노했습니다. 이미 K씨 영가의 남편은 죄책감으로 뒤이어 자살을 한 상태였습니다.
"현상계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죽였지만, 영계로 봤을 때 아내도 남편을 죽인 겁니다. 두 사람이 서로 죽인 셈이니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지만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화해를 하세요."
새벽 무렵에야 부부영가는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자살자 뒤에 다른 영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자살자 영가를 천도할 때마다 꼭 누군가 따라왔습니다. 알고 보니 자살자 영가를 죽게 한 영가들이었습니다. 마치 물귀신 영가를 천도할 때, 같은 지점에서 죽은 모든 물귀신 영가를 천도해야 하듯, 자살자 영가도 영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영가와 같이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자 영가를 천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본인의 심약한 정신 탓
만약 자살의 충동을 겪고 있다면 자신의 정신부터 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습한 피부에 피부병이 생기듯, 약한 정신은 죽음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집이라고 합니다. 사회에서도 집이 없으면 셋방으로, 노숙자로 전전하며 살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집’을 지킬 힘이 없으면 영혼의 노숙자로 전락하게 되어 무한정 구천을 떠돌아야 합니다.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났다면 적어도 자기 생명의 집을 지킬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다른 생명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최후에 한 생각이 최초에 한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잘 죽어야 다음 세상에 잘 태어나듯 그의 아버지는 몰핀 진통제를 통해 당장 암의 고통은 면했으나 면하기 어려운 또 다른 고통 속에 운명한 것입니다. 그 후 태어난 T씨의 자폐증 아들은 그러한 업과 인자를 고스란히 받게 된 것입니다 |
<자폐증>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병입니다. 현대의학도 원인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한 질병입니다. 대부분 자폐증을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치료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년전 피치 못해 기업체 임원인 T씨가 아들을 구명시식하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의사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진단하는 의사와는 다르게 오직 영적인 시각에서 상담하고 도움을 줄 뿐입니다. 영적 진단이 잘 맞는 이는 병이 잘 낫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구명시식을 해보니 아들이 자폐아가 된 시원(始原)을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T씨 아버지는 10년 전 암으로 별세했습니다. 대개 암환자는 고통 속에 죽어갑니다. 그래서 자식 된 도리로 고통을 면하게 하려고 진통제, 즉 모르핀 주사를 계속 놓게 되는데, 고통은 면할지 모르지만 환자는 결국 중증의 마약중독으로 죽고 마는 것입니다. 최후에 한 생각이 최초에 한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잘 죽어야 다음 세상에 잘 태어나듯 그의 아버지는 당장 암의 고통은 면했으나 또 다른 고통 속에 운명한 것입니다. 그 후 태어난 T씨의 자폐증 아들은 그러한 업과 인자를 고스란히 받게 된 것입니다.
모태 원인: 밀가루 음식을 탐닉케 하는 마약성분 <글루텐>
이러한 영적 이유 외에 자폐증 아이의 모체도 영향이 큽니다. 현대인은 오렌지 주스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식물은 화학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학 처리된 식품들이 장에 오래 있으면 부패하게 되고, 그 부패된 성분은 마약 성분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런 모태에서 생겨난 아이는 자연 그러한 인자와 업을 지니고 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내용을 이미 졸저인<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1999)>중 ‘최후에 한 생각이 최초에 한 생각’편에서도 서술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음식물의 마약 성분’중 일부가 과학적으로 규명 발표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의학적으로 예지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6년 2월 14일자 인터넷 신문기사(아시아경제www.akn.co.kr.)에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에 밀가루 음식을 탐닉케 하는 <글루텐>이라는 물질이 체내에서 마약성분을 생성시킨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다음은 기사를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글루텐이란 보리, 밀 등의 곡류에 존재하는 불용성 단백질로서 소화과정에서 일종의 마약성분을 생성시켜 밀가루 음식을 탐닉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글루텐을 섭취했을 때 장 점막의 투과성을 증가시켜 장 내에 있던 유해 물질이 배설되지 않고 혈액 속에 유입되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만 글루텐으로 인해 면역 체계가 교란되는 질병인 지방변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2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결국 자폐아 치료는 정신의학적 뿐 아니라 영척 치료와 음식물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해야 근본원인 치료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구명시식을 해보니 아들이 자폐아가 된 시원(始原)을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T씨 아버지는 10년 전 암으로 별세했습니다. 대개 암환자는 고통 속에 죽어갑니다. 그래서 자식 된 도리로 고통을 면하게 하려고 진통제, 즉 모르핀 주사를 계속 놓게 되는데, 고통은 면할지 모르지만 환자는 결국 중증의 마약중독으로 죽고 마는 것입니다. 최후에 한 생각이 최초에 한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잘 죽어야 다음 세상에 잘 태어나듯 그의 아버지는 당장 암의 고통은 면했으나 또 다른 고통 속에 운명한 것입니다. 그 후 태어난 T씨의 자폐증 아들은 그러한 업과 인자를 고스란히 받게 된 것입니다.
모태 원인: 밀가루 음식을 탐닉케 하는 마약성분 <글루텐>
이러한 영적 이유 외에 자폐증 아이의 모체도 영향이 큽니다. 현대인은 오렌지 주스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식물은 화학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학 처리된 식품들이 장에 오래 있으면 부패하게 되고, 그 부패된 성분은 마약 성분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런 모태에서 생겨난 아이는 자연 그러한 인자와 업을 지니고 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내용을 이미 졸저인<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1999)>중 ‘최후에 한 생각이 최초에 한 생각’편에서도 서술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음식물의 마약 성분’중 일부가 과학적으로 규명 발표되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의학적으로 예지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6년 2월 14일자 인터넷 신문기사(아시아경제www.akn.co.kr.)에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에 밀가루 음식을 탐닉케 하는 <글루텐>이라는 물질이 체내에서 마약성분을 생성시킨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다음은 기사를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글루텐이란 보리, 밀 등의 곡류에 존재하는 불용성 단백질로서 소화과정에서 일종의 마약성분을 생성시켜 밀가루 음식을 탐닉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글루텐을 섭취했을 때 장 점막의 투과성을 증가시켜 장 내에 있던 유해 물질이 배설되지 않고 혈액 속에 유입되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만 글루텐으로 인해 면역 체계가 교란되는 질병인 지방변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2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결국 자폐아 치료는 정신의학적 뿐 아니라 영척 치료와 음식물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해야 근본원인 치료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예언자가 자기 예언(豫言)이 틀리길 바라는 까닭
<예언이 이성을 지배하는 사회> 또는 <사이비종교의 미신>으로 혐오하는 풍토는 모두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이 공짜로 준 ‘양심’이 무뎌져서 생기는 현상
명의(名醫)는 환자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임종이 언제인지 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 영혼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계 의문을 불멸의 영혼세계로 구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부 현실 해석의 부산물이 예언일 뿐입니다.
예언을 정보사회의‘미래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 영혼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계 의문을 불멸의 영혼세계로 구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부 현실 해석의 부산물이 예언일 뿐입니다.
예언을 정보사회의‘미래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예언자가 자기 예언이 틀리길 바랄까요, 맞길 바랄까요.
우문일지 모르지만 이 선택은 예언자 양심의 갈림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상반된 길을 갔던 두 예언자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가서 그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딴 곳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난 <요나>는 풍랑을 잠재우기위한 선원들에게 재물로 뽑혀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하나님이 명령하신 타락의 땅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여기서 타락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의 가혹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사람들은 혹세무민이라고 비난이 거셌을 것이지만, 그는 그러한 예언이 쉽게 실현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신이 자신을 통해 인간들에게 준 예언이지만 자신은 바로 그 멸망의 예언이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나의 예언은 결국 타락의 땅을 구원의 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다른 경우는 근래 있었던 일본의 유명한 점술가 이야기입니다. 실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공부도 할 만큼 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고 순식간에 그녀 주위에 정치인, 기업인들이 몰렸습니다. 다들 그녀가 신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명성과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하와이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성 예언자는 바로 그녀의 둘도 없는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언을 개인적 이해로 충족하는데 오남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운운할 때는 <요나>의 예언자로서 갖는 슬픈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자신이 내린 예언이 수많은 인명이 죽어야하기에 틀리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신의 선물입니다. 신이 왜 인간인 예언자를 통해 예지를 던지는지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명의(名醫)는 환자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임종이 언제인지 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천리(天理)입니다.
예언은 영혼공부의 부산물
‘기적’은 존재할 까요? ‘불가사의’는 무엇일까요?
기적이란 일반적 상식이나 흔히 말하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사태가 생기는 것을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정작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을 기적과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비록 현생이라는 단위 시한에 국한해서 보면 기적과 불가사의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볼 때 해석이 안 되는 ‘기적’이나 ‘불가사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신의 나라에는 어떤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신의 나라에는 시간이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세계, 즉 시간이 없는 불멸의 세계가 영혼의 세계입니다. 육계(현상계)에서 시간이 공간적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에서, 단지 앞서 발현될 현상을 현시점에서 미리 언급하는 것이 ‘예언’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눈곱만한 배추씨를 보면서 가을에 푸른 잎이 손바닥 만하게 필 것이라고 예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추를 처음 본 사람이 당장의 그 조그만 씨앗과 배추를 보고 비교해 본다면 ‘기적’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 영혼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계 의문을 불멸의 영혼세계로 구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부 현실 해석의 부산물이 예언일 뿐입니다.
저의 예언이 세상에 드러나는 경로
일반인도 예지능력이 있습니다. 큰 예지 능력은 절대자의 에너지 또는 우리 육계에 영향을 미치는 영혼의 세계와 정확히 생명의 파장이 맞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런 이유로 초능력을 가진 영능력자의 예언이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운명 예지에 관한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금기사항이 있는데(천명(天命), 숙명(宿命), 운명(運命)이 서로 다른 의미임), 그 하나는 국가와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하는 것입니다. 국운을 발설하는 것은 천기를 누설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극형 감이었으며, 개인의 그것도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발설치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왜 인간에게 전생이나 앞날을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는지도 깊이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앞일을 알고 싶어 하는 인지상정과 하늘의 뜻이 타협하여 비결(秘訣)형식으로 세상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령,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처럼 부산(釜山)을 팔금산(八金山)으로 해자한다거나 ‘구설수’ 등의 중도적 표현으로 천기누설의 부작용을 최소화하 하기도합니다.
저를 잘 아는 지인 중, 박용재 평론가는 저의 예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법사가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예언이다’고 한 적은 없다. 대화 도중 불쑥 나온 법사의 가깝거나 먼 미래 예측이 훗날 사실로 확인되면 ‘차길진 법사, 이번에도 00예언 적중’이라는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시스템이다. 법사는 자신이 예언조차 잊고 지낸다. 주변에서, 그 때 그런 예언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환기시켜야 ‘어, 그랬었지.’라고 인정할 경우가 한 두 차례가 아니다. 기억이 없다고 잡아 뗄 때도 많다. ‘한 번 예언이 맞았다고 모든 예언이 다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이라며 예언을 청하는 분위기 자체를 거부한다.”(미래뉴스를 먼저 읽는 남자. 2005. 박용재)
부득이하게 청탁을 감수할 때도 있지만, 지인들과 또는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언론인들과 개인적 담소를 나누던 내용 일부가 다음날 기사화 되어 적잖이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저와 저희 가족이 과보를 받는 불행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예언을 대하는 미성숙한 자세
저도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서 그치면 금기를 넘어서 까지 얼마든지 예언이란 걸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바라는 예언은 물질적 이득이나 정략적 차원에서 이용하고 해석하려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영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서투른 예언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대하는 반응은 우리사회에서 상당히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아예 ‘예언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광적으로 ‘혹세무민의 미신’ 으로 증오하는 것입니다.
자칭 당대의 최고 예언자라며 정치, 사회, 종교 등 나라의 미래를 예언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점술가들이 ‘신탁’을 빌미로 던져 놓은 말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에 언론도 부화뇌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예언에 대해서도 해당 예언자에 대한 철저한 검토나 발언의 부정적 효과, 그리고 그 예언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 없이 다룬다면 일종의 ‘직무유기’내지 ‘직무남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지켜볼 때마다 예언이 이성을 제압하는 사회풍토를 개탄하곤 합니다.
한편, 예언에 대해 비이성적인 말 트집을 잡으며 ‘사이비 종교의 미신’ 쯤으로 혐오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연예인 안티팬들의 악성 댓글을 연상케 하는 광적인 반응입니다.
두 경우는 예언을 대하는 정반대의 반응 같지만 사실 같은 원인의 다른 현상에 불과합니다. 둘 모두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이 공짜로 준 ‘양심’이 무뎌져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언을 ‘미래학’으로 승화시켜야
미국의 키신저와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은 국제적인 흐름을 짚어 미래 국가정책에 반영코자했습니다. 호킹 박사와 같은 위대한 우주천체 물리학자들은 우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들어 그 원천의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은 실제로 큰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점술가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 인간에게 보편적인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이 우리에게 공짜로 준 보물, 바로 ‘양심’이라는 기본율을 바탕으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예언’이 ‘미래학’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정보시대에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총아로 우대받고 있습니다.
전래의 ‘예언’을 사회과학의 ‘미래학’으로 승화시켜 국가와 사회의 양식으로 열매 맺히기엔 우리사회는 아직 토양이 척박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언을 대하고 믿는 사람도 처음 예언을 한 사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을 했거나 들었거나 어차피 실현되지 않은 앞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듣고 믿는 사람이 <요나>의 심정을 헤아리기는커녕 여전히 개인의 이익만 도모하고 편견이나 정략적으로 아전인수 해석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언을 사리사욕에 우선한 예언자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향후 저는 예언의 입을 봉하고 거리를 두면서 감히 <요나>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합니다.
우문일지 모르지만 이 선택은 예언자 양심의 갈림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상반된 길을 갔던 두 예언자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가서 그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딴 곳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난 <요나>는 풍랑을 잠재우기위한 선원들에게 재물로 뽑혀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하나님이 명령하신 타락의 땅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여기서 타락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의 가혹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사람들은 혹세무민이라고 비난이 거셌을 것이지만, 그는 그러한 예언이 쉽게 실현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신이 자신을 통해 인간들에게 준 예언이지만 자신은 바로 그 멸망의 예언이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나의 예언은 결국 타락의 땅을 구원의 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다른 경우는 근래 있었던 일본의 유명한 점술가 이야기입니다. 실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공부도 할 만큼 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고 순식간에 그녀 주위에 정치인, 기업인들이 몰렸습니다. 다들 그녀가 신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명성과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하와이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성 예언자는 바로 그녀의 둘도 없는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언을 개인적 이해로 충족하는데 오남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운운할 때는 <요나>의 예언자로서 갖는 슬픈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자신이 내린 예언이 수많은 인명이 죽어야하기에 틀리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심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신의 선물입니다. 신이 왜 인간인 예언자를 통해 예지를 던지는지 깊이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명의(名醫)는 환자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임종이 언제인지 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천리(天理)입니다.
예언은 영혼공부의 부산물
‘기적’은 존재할 까요? ‘불가사의’는 무엇일까요?
기적이란 일반적 상식이나 흔히 말하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사태가 생기는 것을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정작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을 기적과 같은 범주에 넣어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비록 현생이라는 단위 시한에 국한해서 보면 기적과 불가사의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볼 때 해석이 안 되는 ‘기적’이나 ‘불가사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신의 나라에는 어떤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신의 나라에는 시간이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세계, 즉 시간이 없는 불멸의 세계가 영혼의 세계입니다. 육계(현상계)에서 시간이 공간적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에서, 단지 앞서 발현될 현상을 현시점에서 미리 언급하는 것이 ‘예언’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눈곱만한 배추씨를 보면서 가을에 푸른 잎이 손바닥 만하게 필 것이라고 예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추를 처음 본 사람이 당장의 그 조그만 씨앗과 배추를 보고 비교해 본다면 ‘기적’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 영혼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계 의문을 불멸의 영혼세계로 구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부 현실 해석의 부산물이 예언일 뿐입니다.
저의 예언이 세상에 드러나는 경로
일반인도 예지능력이 있습니다. 큰 예지 능력은 절대자의 에너지 또는 우리 육계에 영향을 미치는 영혼의 세계와 정확히 생명의 파장이 맞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런 이유로 초능력을 가진 영능력자의 예언이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운명 예지에 관한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금기사항이 있는데(천명(天命), 숙명(宿命), 운명(運命)이 서로 다른 의미임), 그 하나는 국가와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하는 것입니다. 국운을 발설하는 것은 천기를 누설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극형 감이었으며, 개인의 그것도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발설치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왜 인간에게 전생이나 앞날을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는지도 깊이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앞일을 알고 싶어 하는 인지상정과 하늘의 뜻이 타협하여 비결(秘訣)형식으로 세상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령,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처럼 부산(釜山)을 팔금산(八金山)으로 해자한다거나 ‘구설수’ 등의 중도적 표현으로 천기누설의 부작용을 최소화하 하기도합니다.
저를 잘 아는 지인 중, 박용재 평론가는 저의 예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법사가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예언이다’고 한 적은 없다. 대화 도중 불쑥 나온 법사의 가깝거나 먼 미래 예측이 훗날 사실로 확인되면 ‘차길진 법사, 이번에도 00예언 적중’이라는 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시스템이다. 법사는 자신이 예언조차 잊고 지낸다. 주변에서, 그 때 그런 예언을 하지 않았는가라고 환기시켜야 ‘어, 그랬었지.’라고 인정할 경우가 한 두 차례가 아니다. 기억이 없다고 잡아 뗄 때도 많다. ‘한 번 예언이 맞았다고 모든 예언이 다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이라며 예언을 청하는 분위기 자체를 거부한다.”(미래뉴스를 먼저 읽는 남자. 2005. 박용재)
부득이하게 청탁을 감수할 때도 있지만, 지인들과 또는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언론인들과 개인적 담소를 나누던 내용 일부가 다음날 기사화 되어 적잖이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저와 저희 가족이 과보를 받는 불행을 감내해야했습니다.
예언을 대하는 미성숙한 자세
저도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서 그치면 금기를 넘어서 까지 얼마든지 예언이란 걸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바라는 예언은 물질적 이득이나 정략적 차원에서 이용하고 해석하려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영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서투른 예언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대하는 반응은 우리사회에서 상당히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아예 ‘예언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광적으로 ‘혹세무민의 미신’ 으로 증오하는 것입니다.
자칭 당대의 최고 예언자라며 정치, 사회, 종교 등 나라의 미래를 예언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점술가들이 ‘신탁’을 빌미로 던져 놓은 말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에 언론도 부화뇌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예언에 대해서도 해당 예언자에 대한 철저한 검토나 발언의 부정적 효과, 그리고 그 예언의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 없이 다룬다면 일종의 ‘직무유기’내지 ‘직무남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지켜볼 때마다 예언이 이성을 제압하는 사회풍토를 개탄하곤 합니다.
한편, 예언에 대해 비이성적인 말 트집을 잡으며 ‘사이비 종교의 미신’ 쯤으로 혐오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연예인 안티팬들의 악성 댓글을 연상케 하는 광적인 반응입니다.
두 경우는 예언을 대하는 정반대의 반응 같지만 사실 같은 원인의 다른 현상에 불과합니다. 둘 모두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이 공짜로 준 ‘양심’이 무뎌져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언을 ‘미래학’으로 승화시켜야
미국의 키신저와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은 국제적인 흐름을 짚어 미래 국가정책에 반영코자했습니다. 호킹 박사와 같은 위대한 우주천체 물리학자들은 우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들어 그 원천의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은 실제로 큰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점술가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 인간에게 보편적인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이 우리에게 공짜로 준 보물, 바로 ‘양심’이라는 기본율을 바탕으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예언’이 ‘미래학’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정보시대에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총아로 우대받고 있습니다.
전래의 ‘예언’을 사회과학의 ‘미래학’으로 승화시켜 국가와 사회의 양식으로 열매 맺히기엔 우리사회는 아직 토양이 척박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언을 대하고 믿는 사람도 처음 예언을 한 사람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언을 했거나 들었거나 어차피 실현되지 않은 앞일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듣고 믿는 사람이 <요나>의 심정을 헤아리기는커녕 여전히 개인의 이익만 도모하고 편견이나 정략적으로 아전인수 해석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언을 사리사욕에 우선한 예언자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향후 저는 예언의 입을 봉하고 거리를 두면서 감히 <요나>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합니다.
- 종교는 믿음, 영혼은 실체. 구명시식은 ‘영혼 성숙’의 한 여정.
- 누구나 달을 올려다보며 자기 소원을 믿는 것처럼 구명시식의 참뜻 또한 모든 종교에서도 둥글게 같은 거리에..
이런 질문을 자주 듣곤 합니다.
‘법사님, 저는 종교가 다른데 구명시식을 해도 되나요?’
구명시식(救命施食)이 불가(佛家)의 구병시식(救病施食)에서 유래되었고, 저를 법사(法師)로 부르기 때문에 특정 종교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은 대개 ‘종교’와 ‘영혼의 존재’를 혼동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개관적 '실체'이고 종교는 각 개인들의 ‘믿음’입니다. 각자의 믿음으로 구명시식에 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태인 영가 구명시식을 한 예를 들겠습니다. 돌아가신 남편이 유태인 할머니가족을 떠나질 않아 천도하는 자리였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거액의 보험료를 타려는 사고를 위장한 자살이었기 때문에 천도되기 힘든 사례였습니다. 그 외에도 구명시식 신청자들과 만난 영가들의 국적은 스패니쉬, 일본인, 인디언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아니라 종교도 달라서 기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영혼과 종교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 지구상에 인간이 없어도 종교가 있을까요?
- 왜 지금도 수많은 종교들이 지고 피며, 한 종교 내에도 무수한 종파가 번성할까요?
- 같은 이름의 종교임에도 과거와 현재의 교리가 왜 같지 않을까요?
- 개종(改宗)을 한 사람은 모두 이전 종교로부터 천벌을 받을까요?
종교는 믿음, 영혼은 실체
남녀노소, 어느 인종, 어느 종교인을 막론하고 하늘에 뜬 둥근 달을 봅니다. 그러나 누구는 토끼를, 누구는 늑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달을 해석하는 방식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수 있습니다. 달은 하나인데 달을 향한 해석과 믿음은 다양합니다. 이처럼 달과 같은 영혼이 실존이라면 종교는 각 개인의 믿음입니다.
실존을 바라보는 각 개인의 해석과 믿음은 다양합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의 남쪽과 서울에 있는 사람의 남쪽은 다릅니다. 서울사람의 남쪽은 부산사람의 북쪽이 될 것입니다. 종교의 차이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종교를 따르는 개인 간 믿음의 스펙트럼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일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1인 1종교’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믿음이고, 믿음이 종교라고 할 것입니다. 종교는 바꿀 수 없는 어머니가 아니라 애인이라고도 비유 합니다.
믿음의 특징은 실존을 실존하지 않는 다는 믿음조차 허용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더라도, 그 믿음처럼 영혼의 실존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믿어도 하늘이 있는 것처럼, 믿음이 착각인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명시식은 ‘영혼 성숙’의 여정
구명시식은 ‘영혼 성숙’의 한 여정입니다. 과거(조상들의 생애)를 조사해서 그 자손들의 행,불행에 인과법칙이 엄밀하게 작용되는 것을 알아내고, 현실과 영계(靈界) 사이의 교신을 통해 영혼 구제에 힘쓸 때 인과법칙까지도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영혼 성숙의 여정인 구명시식은 예식의 방식은 달리할망정 특정 종교의 독점적 의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둥근달을 바라볼 수 있듯이 각자 믿음의 방식으로 자기 영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중개자로서 영혼의 존재를 확신시켜주고 스스로 영혼 성숙을 도모하는 계기와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달을 올려다보며 자기 소원을 믿는 것처럼 구명시식의 참뜻 또한 모든 종교에서 둥글게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법사님, 저는 종교가 다른데 구명시식을 해도 되나요?’
구명시식(救命施食)이 불가(佛家)의 구병시식(救病施食)에서 유래되었고, 저를 법사(法師)로 부르기 때문에 특정 종교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은 대개 ‘종교’와 ‘영혼의 존재’를 혼동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영혼은 개관적 '실체'이고 종교는 각 개인들의 ‘믿음’입니다. 각자의 믿음으로 구명시식에 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태인 영가 구명시식을 한 예를 들겠습니다. 돌아가신 남편이 유태인 할머니가족을 떠나질 않아 천도하는 자리였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거액의 보험료를 타려는 사고를 위장한 자살이었기 때문에 천도되기 힘든 사례였습니다. 그 외에도 구명시식 신청자들과 만난 영가들의 국적은 스패니쉬, 일본인, 인디언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언어만 다를 뿐 아니라 종교도 달라서 기도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영혼과 종교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 지구상에 인간이 없어도 종교가 있을까요?
- 왜 지금도 수많은 종교들이 지고 피며, 한 종교 내에도 무수한 종파가 번성할까요?
- 같은 이름의 종교임에도 과거와 현재의 교리가 왜 같지 않을까요?
- 개종(改宗)을 한 사람은 모두 이전 종교로부터 천벌을 받을까요?
종교는 믿음, 영혼은 실체
남녀노소, 어느 인종, 어느 종교인을 막론하고 하늘에 뜬 둥근 달을 봅니다. 그러나 누구는 토끼를, 누구는 늑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달을 해석하는 방식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수 있습니다. 달은 하나인데 달을 향한 해석과 믿음은 다양합니다. 이처럼 달과 같은 영혼이 실존이라면 종교는 각 개인의 믿음입니다.
실존을 바라보는 각 개인의 해석과 믿음은 다양합니다. 부산에 있는 사람의 남쪽과 서울에 있는 사람의 남쪽은 다릅니다. 서울사람의 남쪽은 부산사람의 북쪽이 될 것입니다. 종교의 차이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종교를 따르는 개인 간 믿음의 스펙트럼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일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1인 1종교’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믿음이고, 믿음이 종교라고 할 것입니다. 종교는 바꿀 수 없는 어머니가 아니라 애인이라고도 비유 합니다.
믿음의 특징은 실존을 실존하지 않는 다는 믿음조차 허용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더라도, 그 믿음처럼 영혼의 실존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믿어도 하늘이 있는 것처럼, 믿음이 착각인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명시식은 ‘영혼 성숙’의 여정
구명시식은 ‘영혼 성숙’의 한 여정입니다. 과거(조상들의 생애)를 조사해서 그 자손들의 행,불행에 인과법칙이 엄밀하게 작용되는 것을 알아내고, 현실과 영계(靈界) 사이의 교신을 통해 영혼 구제에 힘쓸 때 인과법칙까지도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영혼 성숙의 여정인 구명시식은 예식의 방식은 달리할망정 특정 종교의 독점적 의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나 둥근달을 바라볼 수 있듯이 각자 믿음의 방식으로 자기 영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중개자로서 영혼의 존재를 확신시켜주고 스스로 영혼 성숙을 도모하는 계기와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달을 올려다보며 자기 소원을 믿는 것처럼 구명시식의 참뜻 또한 모든 종교에서 둥글게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신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신전을 이고 다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사람을 해쳐서 교도소에 가는 벌을 주는 것은 하늘도, 높은 곳의 신도 아닙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자기 안의 신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종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란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있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란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있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神)은 놀랄 만큼 가까운 곳에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기 능력이라고 교만하다가도, 좋지 못한 일이 닥쳤을 때는 남 탓을 하기 쉽습니다.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길가의 이름모를 꽃을 보며 생명을 다해 피는 꽃에 눈을 맞출 수 도 있고, 판사와 사회와 가정환경과 부모 탓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갈림길이 내일의 오늘을 결정합니다. 비록 지금은 사형을 면할 수 없을지라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한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사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자업자득은 신의 조화입니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 있을까요.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하늘이 맞닿은 신전일까요? 아니면 사찰이나 예배당일까요?
사실 신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신전을 이고 다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사람을 해쳐서 교도소에 가는 벌을 주는 것은 하늘도, 높은 곳의 신도 아닙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자기 안의 신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신을 감동시키십시오. 자신의 신이 감동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자업자득입니다.
(저는 신을 맹종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을 존경합니다.)
종교는 ‘삶의 과정’
사기꾼이 경찰에 잡히면 자기는 사기꾼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당장 나가기만하면 해결된다고 하나같이 큰소리칩니다. 사기꾼은 제일먼저 자기 양심을 완전하게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이비 종교 교주도 제일먼저 자기 자신을 세뇌시킵니다. 첫 신도가 자기 자신인 셈입니다. 이리하여 자신의 말을 신탁으로 절대화시켜 다른 이들의 양심을 마비시키게 됩니다.
제가 누누이 말해온 바지만 종교는 바꿀 수 없는 어머니가 아니라 애인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삶 그자체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인간을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가 있음으로 해서 사람의 마음이 편하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종교가 취미를 넘어 직업이 되면 자칫 신도들을 훈련시키고 조직화하게 되며, 손을 벌리게 됩니다. 절대화된 도덕 잣대를 들이대고 죄책감을 자극하므로 써, 자기안의 신을 멀리하고 자기 양심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위대한 종교
부처님은 임종하시며 일생을 통해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었습니다. ‘오직 스스로 등불을 밝히고, 그 진리를 등불 삼아 나아가라'. 철학자 칸트는 푸른 대지위에 별처럼 빛나는 양심에 귀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난해한 교리를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라고 한 것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신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펄떡 펄떡 살아 숨쉬는 신의 목소리 ‘양심’과 대면하십시오. 위대한 종교란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있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업자득은 신의 조화입니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 있을까요. 어디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하늘이 맞닿은 신전일까요? 아니면 사찰이나 예배당일까요?
사실 신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신전을 이고 다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사람을 해쳐서 교도소에 가는 벌을 주는 것은 하늘도, 높은 곳의 신도 아닙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자기 안의 신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신을 감동시키십시오. 자신의 신이 감동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자업자득입니다.
(저는 신을 맹종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을 존경합니다.)
종교는 ‘삶의 과정’
사기꾼이 경찰에 잡히면 자기는 사기꾼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당장 나가기만하면 해결된다고 하나같이 큰소리칩니다. 사기꾼은 제일먼저 자기 양심을 완전하게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이비 종교 교주도 제일먼저 자기 자신을 세뇌시킵니다. 첫 신도가 자기 자신인 셈입니다. 이리하여 자신의 말을 신탁으로 절대화시켜 다른 이들의 양심을 마비시키게 됩니다.
제가 누누이 말해온 바지만 종교는 바꿀 수 없는 어머니가 아니라 애인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삶 그자체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죽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인간을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가 있음으로 해서 사람의 마음이 편하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종교가 취미를 넘어 직업이 되면 자칫 신도들을 훈련시키고 조직화하게 되며, 손을 벌리게 됩니다. 절대화된 도덕 잣대를 들이대고 죄책감을 자극하므로 써, 자기안의 신을 멀리하고 자기 양심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위대한 종교
부처님은 임종하시며 일생을 통해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었습니다. ‘오직 스스로 등불을 밝히고, 그 진리를 등불 삼아 나아가라'. 철학자 칸트는 푸른 대지위에 별처럼 빛나는 양심에 귀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난해한 교리를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라고 한 것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신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펄떡 펄떡 살아 숨쉬는 신의 목소리 ‘양심’과 대면하십시오. 위대한 종교란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있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선행의 잿밥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
우리 자신이 영혼이기때문에 선행하고 사랑하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완성
왜 선행을 해야 하나? 선행의 대가는 있는 것인가?
‘잘살기 위해 선(善)해야 한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엔 이렇게 답하면 돌 맞을 분위기입니다. 대가가 즉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 도덕과 윤리는 골동품 취급당하기 일쑤입니다. 초고속 물질만능주의 세태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악한 사람이 부자이고, 법 없이도 살 만한 선량한 사람이 오히려 가난한 사례가 더러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선의(善意)와 정의(正義)에 대해 의심하실 것입니다. 당장을 보면 선행 무용론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시간 단위를 더 늘려 잡은 인과를 보면 예외 되지 않습니다.
복(福)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카르마와 현생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전자는 전생에 선덕을 쌓았으나 현생에서 부자가 되고나서 악한 마음으로 변심한 것이고, 후자는 전생에 악하게 살다가 죽음에 가까워 마음을 선하게 고쳐먹었지만 쌓아 놓은 선덕이 없어 현생에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제의 선인이 오늘의 악인이 되고, 오늘의 악인이 내일의 선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선행 대가의 계산에만 초점을 고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신이 선행에 대해 대가를 주는지, 선(善)의 대가가 삶의 궁극적 목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아래 두 가지 이야기는 사랑의 대가에 대한 엇갈린 시각을 잘 드러냅니다.
우스개 한토막입니다.
막 결혼한 신부에게 절친한 친구가 다가갔습니다. 잘생긴 젊은 남자친구는 어디 두고 머리숱도 변변치 않은 중년남성과 결혼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돈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런, 남편이 돈이 많은 것이지 네가 많은 게 아니잖아. 그러려면 돈이 좀 적더라도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을 골랐어야지!”
참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구명시식도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결혼해서인지 생전의 남편은 무뚝뚝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남편이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먼저 잔 적이 없었고, 항상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위에서는 남편에게 잘 해줘봤자 고마운 줄 모른다며 그만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거라며 죽는 그 날까지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내가 떠나자 빈 자리는 너무도 컸습니다. 남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후회했습니다. 영가가 된 아내는 '미안하다'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남편을 사랑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여보, 괜찮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아니고는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니까 남편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편을 위로했습니다. 빛이 대지를 밝힐 때 차별이 없이 구석구석 밝히듯, 사랑도 빛처럼 조건 없이 단순하며 자명합니다. 사랑은 전생의 흔적이요, 서원입니다. 전생의 소원을 이루고 떠난 아내영가의 뒷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선과 사랑은 지고지순(至高至順) 순진무구(純眞無垢)를 궁극으로 하고 있다는데서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육신은 짧은 시간만 유한하고 영혼은 무한합니다. 살아생전의 권력, 부, 명예는 죽어서 영혼에 한 푼도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하기만 합니다. 삶의 과정을 통한 마음가짐만 불생불멸로 고스란히 유전됩니다.(더 큰 성숙을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구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가는 짐일 뿐이라고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영혼의 성숙>에 둔다면 기타의 조건이나 대가는 매우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영혼이기때문에 선행하고 사랑하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됩니다.
‘잘살기 위해 선(善)해야 한다.’
어찌된 일인지 요즘엔 이렇게 답하면 돌 맞을 분위기입니다. 대가가 즉시 눈에 보이는 물질적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 도덕과 윤리는 골동품 취급당하기 일쑤입니다. 초고속 물질만능주의 세태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악한 사람이 부자이고, 법 없이도 살 만한 선량한 사람이 오히려 가난한 사례가 더러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선의(善意)와 정의(正義)에 대해 의심하실 것입니다. 당장을 보면 선행 무용론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시간 단위를 더 늘려 잡은 인과를 보면 예외 되지 않습니다.
복(福)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카르마와 현생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전자는 전생에 선덕을 쌓았으나 현생에서 부자가 되고나서 악한 마음으로 변심한 것이고, 후자는 전생에 악하게 살다가 죽음에 가까워 마음을 선하게 고쳐먹었지만 쌓아 놓은 선덕이 없어 현생에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제의 선인이 오늘의 악인이 되고, 오늘의 악인이 내일의 선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선행 대가의 계산에만 초점을 고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 신이 선행에 대해 대가를 주는지, 선(善)의 대가가 삶의 궁극적 목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아래 두 가지 이야기는 사랑의 대가에 대한 엇갈린 시각을 잘 드러냅니다.
우스개 한토막입니다.
막 결혼한 신부에게 절친한 친구가 다가갔습니다. 잘생긴 젊은 남자친구는 어디 두고 머리숱도 변변치 않은 중년남성과 결혼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돈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런, 남편이 돈이 많은 것이지 네가 많은 게 아니잖아. 그러려면 돈이 좀 적더라도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을 골랐어야지!”
참사랑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구명시식도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결혼해서인지 생전의 남편은 무뚝뚝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남편이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먼저 잔 적이 없었고, 항상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위에서는 남편에게 잘 해줘봤자 고마운 줄 모른다며 그만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거라며 죽는 그 날까지 남편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내가 떠나자 빈 자리는 너무도 컸습니다. 남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후회했습니다. 영가가 된 아내는 '미안하다'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남편을 사랑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여보, 괜찮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아니고는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니까 남편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식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며 남편을 위로했습니다. 빛이 대지를 밝힐 때 차별이 없이 구석구석 밝히듯, 사랑도 빛처럼 조건 없이 단순하며 자명합니다. 사랑은 전생의 흔적이요, 서원입니다. 전생의 소원을 이루고 떠난 아내영가의 뒷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선과 사랑은 지고지순(至高至順) 순진무구(純眞無垢)를 궁극으로 하고 있다는데서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육신은 짧은 시간만 유한하고 영혼은 무한합니다. 살아생전의 권력, 부, 명예는 죽어서 영혼에 한 푼도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하기만 합니다. 삶의 과정을 통한 마음가짐만 불생불멸로 고스란히 유전됩니다.(더 큰 성숙을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구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대가는 짐일 뿐이라고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영혼의 성숙>에 둔다면 기타의 조건이나 대가는 매우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영혼이기때문에 선행하고 사랑하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됩니다.
선한 마음을 먹는 순간 자신의 영혼이 더욱 성숙해져서 완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구두를 닦는 자식에게 용돈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용돈은 봉사와 근로하는 마음자세를 유도하기 위한 미끼와 같습니다. (선행과 사랑의)'대가'의 의미를 삶의 궁극적 목적에 두지 못하고 미끼인 잿밥에 둘 때, 상대방에 집착하고 반복하는 ‘각성되지 못한 사랑’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선행 그 자체로 스스로 완성되기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생각은 착각인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른바 배웠다는 사회 선도 층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시원도 알고보면 물이 아래가 아니라 거꾸로 흐르려 해서, 즉 대가인 잿밥을 바라면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숭고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마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서운한 마음을 먹기 쉽습니다. 행복감(쾌락), 부, 명예, 권력이 높고 클수록 선과 사랑을 크게 베풀었다는 '결과론적 주객전도'의 세태가 만연합니다. 그러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고 또 주고, 빈곳에 주고 그리고 준 것조차 잊습니다. 소리 없이 드넓은 바다는 물이 제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늘의 달은 딸 수는 없지만 마음의 물이 맑으면 그 속에 담을 수 있습니다. 대자연과 같은 큰 사랑은 청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사랑을 줍니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선행은 따로 목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구두를 닦는 자식에게 용돈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용돈은 봉사와 근로하는 마음자세를 유도하기 위한 미끼와 같습니다. (선행과 사랑의)'대가'의 의미를 삶의 궁극적 목적에 두지 못하고 미끼인 잿밥에 둘 때, 상대방에 집착하고 반복하는 ‘각성되지 못한 사랑’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선행 그 자체로 스스로 완성되기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생각은 착각인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른바 배웠다는 사회 선도 층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시원도 알고보면 물이 아래가 아니라 거꾸로 흐르려 해서, 즉 대가인 잿밥을 바라면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숭고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마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서운한 마음을 먹기 쉽습니다. 행복감(쾌락), 부, 명예, 권력이 높고 클수록 선과 사랑을 크게 베풀었다는 '결과론적 주객전도'의 세태가 만연합니다. 그러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고 또 주고, 빈곳에 주고 그리고 준 것조차 잊습니다. 소리 없이 드넓은 바다는 물이 제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늘의 달은 딸 수는 없지만 마음의 물이 맑으면 그 속에 담을 수 있습니다. 대자연과 같은 큰 사랑은 청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사랑을 줍니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선행은 따로 목적이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직업중의 하나가 성직(聖職)자입니다. 훌륭한 성직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교리에 능통하고 염불과 설교에 능란한 사람일까요? 기적과 신비를 많이 행한 사람일까요? 성직자의 기본 마음자세를 생각해봅니다.
1. 한 평이면 되요
일제 강점기, 무명(無名)씨라는 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나무를 해서 밥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산림법은 엄한지라 벌목은 엄단됐습니다. 일본 순사가 스님을 잡아가러 왔습니다. 순사는 스님에게 산림훼손죄로 당장 감옥에 가야한다고 호통 쳤습니다.
1. 한 평이면 되요
일제 강점기, 무명(無名)씨라는 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나무를 해서 밥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산림법은 엄한지라 벌목은 엄단됐습니다. 일본 순사가 스님을 잡아가러 왔습니다. 순사는 스님에게 산림훼손죄로 당장 감옥에 가야한다고 호통 쳤습니다.
스님은 순사에게 물었습니다.
“거기서는 밥을 주나요?”
“옷도요?”
순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은 들떠서,
“저기, 한 평이면 되는데 방도 내주실 수 있나요? 참선을 해야 하거든요.”
순사는 독방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먹고살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게다가 독채까지 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순사는 물끄러미 스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동안 혼자 나무해서 밥해먹느라 공부는 고사하고 겨울에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순사나리, 내 냉큼 행장을 꾸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구려.”
순사는 고개를 저으며 스님이 다시 나오기 전에 멀리 줄행랑 쳤습니다.
2. 사실, 나도 모르네
제가 예전에 미국의 법당에 있을 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거사 한 분이 찾아와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는 허리의 통증으로 한국의 장안에 용하다는 의사들을 18년 동안이나 찾아다녔습니다. 류머티즘으로 시작해서 가는 곳마다 병원(病源)이 달랐고, 나중에는 심지어 요양원에 가서 기도하라는 말을 듣고 7개월간 멍하니 있다가 돌아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은 병도 못 고치고 몸만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LA근교의 한 전문 의료원에서 피검사 한번으로 원인을 알아내어 간단히 완치되었습니다. 과거에 환자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곳에 기생하는 ‘셴셴모기’에 물린 것이 악성 류머티즘으로 발전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왜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이것저것 안다고 해서 오히려 사람의 몸을 망쳐 놓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데 있어서, 종교와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정신적인 영역은 신체를 다루는 의학보다 오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자신 있게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종교의 세계, 영혼의 세계로 상대방을 끌고 가서 인생을 망치게 할 확률이 높은 분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더라도(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잘 모름) 자신의 추측과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종교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직장을 잃는 예가 늘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한판 장사를 벌려 한탕 벌려고 신도를 모으기에 여념이 없고, 신도들은 신앙 동기를 상식과 양심에 두지 못하고 광신을 신심으로 떠받드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습니다. 성직자는 <나는 이런 것은 모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달라이라마의 예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달라이라마를 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인생이 무엇인지 이번엔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절치부심한 터였습니다. 달라이라마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인생은 무상이고......”
달라이라마는 각종 종교와 철학 속의 언어로 현란하게 언급하였고, 그는 그 말을 영혼에 새기려고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설명이 끝난 후, 달라이라마는 조용히 그를 손으로 부르더니 귓속말을 했습니다.
“미안하네. 사실, 나도 아직까지 인생이 뭔지 잘 모르네. 사람들은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주워들었던 것을 들려준 것 뿐이네. 자네가 알아내서 나중에라도 내게 알려주게나.”
3. 먼저 주고, 준 것조차 잊게
앞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선행과 사랑에는 따로 목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영혼이기에 선생과 사랑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위(僞)’자를 풀어보면 사람 인(人)과 위할 위(爲)를 합친 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를 위하지 않은 것은 위선이라는 것 입니다. 햇살은 아무 조건 없이 고루 세상을 비춥니다.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성직자는 대가에 연연하지 말고 먼저 주고, 빈곳에 주고, 또 주고, 준 것조차 잊어버리는 큰사랑을 향해 흘러야할 것입니다.
4. 따로 없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순간)은 언제인가요?
성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교리는 경이나 학교에서 따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해답에서 나올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간의 앞뒤는 따로 없고, 오직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
생활의 선지자가 성직자(聖職者)
법률, 철학, 윤리, 율법, 종교는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선명하게 판별하는 법을 제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의 삶에서도(특히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 흑백을 구분 짓는 절대적인 잣대가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정법(正法)이 따로 있을까요? 저는 어떤 형식일망정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정법(正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하찮은 개소리도 정법이지만, 위선자의 고매한 연설은 사법이라고들 합니다.
성직자는 한 끼 먹고 살수만 있다면 족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성직자는 남을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행복을 설하기 앞서 스스로 먼저 행복해야합니다. 그리고 법을 연설하기에 앞서 ‘지금’을 먼저 소중히 살고 있어야합니다. 꽃이 피면 향기는 자연스럽게 나는 것입니다. 종교 자체는 없고 삶의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따지자면 성인(聖人)은 있어도 성직(聖職)은 따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활의 선지자가 성직자일 따름입니다.
전생(前生)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의문
“거기서는 밥을 주나요?”
“옷도요?”
순사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은 들떠서,
“저기, 한 평이면 되는데 방도 내주실 수 있나요? 참선을 해야 하거든요.”
순사는 독방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먹고살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게다가 독채까지 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순사는 물끄러미 스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동안 혼자 나무해서 밥해먹느라 공부는 고사하고 겨울에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순사나리, 내 냉큼 행장을 꾸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구려.”
순사는 고개를 저으며 스님이 다시 나오기 전에 멀리 줄행랑 쳤습니다.
2. 사실, 나도 모르네
제가 예전에 미국의 법당에 있을 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거사 한 분이 찾아와 울분을 토했습니다. 그는 허리의 통증으로 한국의 장안에 용하다는 의사들을 18년 동안이나 찾아다녔습니다. 류머티즘으로 시작해서 가는 곳마다 병원(病源)이 달랐고, 나중에는 심지어 요양원에 가서 기도하라는 말을 듣고 7개월간 멍하니 있다가 돌아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은 병도 못 고치고 몸만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LA근교의 한 전문 의료원에서 피검사 한번으로 원인을 알아내어 간단히 완치되었습니다. 과거에 환자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그곳에 기생하는 ‘셴셴모기’에 물린 것이 악성 류머티즘으로 발전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왜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이것저것 안다고 해서 오히려 사람의 몸을 망쳐 놓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데 있어서, 종교와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정신적인 영역은 신체를 다루는 의학보다 오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자신 있게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종교의 세계, 영혼의 세계로 상대방을 끌고 가서 인생을 망치게 할 확률이 높은 분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더라도(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잘 모름) 자신의 추측과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종교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가정이 파탄 나고, 직장을 잃는 예가 늘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한판 장사를 벌려 한탕 벌려고 신도를 모으기에 여념이 없고, 신도들은 신앙 동기를 상식과 양심에 두지 못하고 광신을 신심으로 떠받드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습니다. 성직자는 <나는 이런 것은 모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달라이라마의 예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달라이라마를 친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인생이 무엇인지 이번엔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절치부심한 터였습니다. 달라이라마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인생은 무상이고......”
달라이라마는 각종 종교와 철학 속의 언어로 현란하게 언급하였고, 그는 그 말을 영혼에 새기려고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설명이 끝난 후, 달라이라마는 조용히 그를 손으로 부르더니 귓속말을 했습니다.
“미안하네. 사실, 나도 아직까지 인생이 뭔지 잘 모르네. 사람들은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주워들었던 것을 들려준 것 뿐이네. 자네가 알아내서 나중에라도 내게 알려주게나.”
3. 먼저 주고, 준 것조차 잊게
앞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선행과 사랑에는 따로 목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영혼이기에 선생과 사랑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거짓 ‘위(僞)’자를 풀어보면 사람 인(人)과 위할 위(爲)를 합친 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위하여 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를 위하지 않은 것은 위선이라는 것 입니다. 햇살은 아무 조건 없이 고루 세상을 비춥니다.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성직자는 대가에 연연하지 말고 먼저 주고, 빈곳에 주고, 또 주고, 준 것조차 잊어버리는 큰사랑을 향해 흘러야할 것입니다.
4. 따로 없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순간)은 언제인가요?
성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교리는 경이나 학교에서 따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해답에서 나올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간의 앞뒤는 따로 없고, 오직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
생활의 선지자가 성직자(聖職者)
법률, 철학, 윤리, 율법, 종교는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선명하게 판별하는 법을 제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의 삶에서도(특히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 흑백을 구분 짓는 절대적인 잣대가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정법(正法)이 따로 있을까요? 저는 어떤 형식일망정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정법(正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하찮은 개소리도 정법이지만, 위선자의 고매한 연설은 사법이라고들 합니다.
성직자는 한 끼 먹고 살수만 있다면 족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성직자는 남을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행복을 설하기 앞서 스스로 먼저 행복해야합니다. 그리고 법을 연설하기에 앞서 ‘지금’을 먼저 소중히 살고 있어야합니다. 꽃이 피면 향기는 자연스럽게 나는 것입니다. 종교 자체는 없고 삶의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따지자면 성인(聖人)은 있어도 성직(聖職)은 따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활의 선지자가 성직자일 따름입니다.
‘전생(前生)’을 태어나기 전의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칼럼을 보시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여러분은 전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 바로 직전이 전생이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이 전생이며, 매시매분이 전생입니다. 그래서 하루가 한생이라고 합니다. 이미 어제 저녁에 자면서 죽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환생을 맛보고 있습니다. 전생인 어제 과음한 업으로 현생인 오늘 속이 쓰린 대가를 치루는 윤회의 법칙을 겪고 있습니다.
현생을 잘 살려면 <전생>을 잘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현생을 잘 살려면 <현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윤회의 원리는 뫼비우스 띠의 법칙과 같습니다. 영원히 무한 번을 돌아도 같은 띠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틀, ‘윤회의 틀’안에는 과거․현재․미래뿐 아니라 전생․현생․내세까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생의 고민은 현생의 고민이며, 현생의 고민은 내세의 고민이 된다. 바꿔서 말하면 전생에 좋은 일은 현생에서도 좋은 일로 다시 나타나며 미래에도 반드시 좋은 일로 다시금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원리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생을 잘 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길래....’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이렇게 전생을 탓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환생을 믿지 않는 것도 난감하지만, 모든 악재를 전생 탓으로만 돌리는 것 역시 안 될 말입니다. 어제 온 비로 꽃이 피고, 오늘 온 비로는 꽃이 지지만 냉정하게 보면 어차피 꽃은 피고 지는 것이기에, ‘비’ 때문에 꽃이 피고 졌다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길래...’하고 전생 탓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결코 단순히 ‘전생’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업(業)은 인류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샐 수 없을 정도로 겹겹이 쌓여온 것들입니다. 인과(因果)에도 자신이 저지른 업보에 의한 ‘의식적 인과’, 분명 의도하지 않은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무의식적 인과’, 그리고 ‘필연적인과’도 있습니다. 그만큼 전생 역시 수없이 많고 그 인과의 경로도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칼럼을 보시는 지금 이 순간, 이미 여러분은 전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 바로 직전이 전생이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이 전생이며, 매시매분이 전생입니다. 그래서 하루가 한생이라고 합니다. 이미 어제 저녁에 자면서 죽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환생을 맛보고 있습니다. 전생인 어제 과음한 업으로 현생인 오늘 속이 쓰린 대가를 치루는 윤회의 법칙을 겪고 있습니다.
현생을 잘 살려면 <전생>을 잘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현생을 잘 살려면 <현생>을 잘 살아야 합니다.
윤회의 원리는 뫼비우스 띠의 법칙과 같습니다. 영원히 무한 번을 돌아도 같은 띠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틀, ‘윤회의 틀’안에는 과거․현재․미래뿐 아니라 전생․현생․내세까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생의 고민은 현생의 고민이며, 현생의 고민은 내세의 고민이 된다. 바꿔서 말하면 전생에 좋은 일은 현생에서도 좋은 일로 다시 나타나며 미래에도 반드시 좋은 일로 다시금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의 원리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생을 잘 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길래....’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이렇게 전생을 탓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환생을 믿지 않는 것도 난감하지만, 모든 악재를 전생 탓으로만 돌리는 것 역시 안 될 말입니다. 어제 온 비로 꽃이 피고, 오늘 온 비로는 꽃이 지지만 냉정하게 보면 어차피 꽃은 피고 지는 것이기에, ‘비’ 때문에 꽃이 피고 졌다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길래...’하고 전생 탓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결코 단순히 ‘전생’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업(業)은 인류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샐 수 없을 정도로 겹겹이 쌓여온 것들입니다. 인과(因果)에도 자신이 저지른 업보에 의한 ‘의식적 인과’, 분명 의도하지 않은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무의식적 인과’, 그리고 ‘필연적인과’도 있습니다. 그만큼 전생 역시 수없이 많고 그 인과의 경로도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전생 때문에 ‘죄’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을 ‘비’처럼 야속한 ‘원인’으로 만들지 말고, 순수한 삶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은 왜 환생하고 윤회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은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하는 물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영적 성숙>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환생과 윤회를 하면서 <영적 진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할 평등이 있지만 이 작은 ‘차이’의 미덕은 각 개인의 형태와 양상에 차별화, 즉 업을 지어 개인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업을 현생에서 풀 수 있는 기회를 신이 마련해주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인간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생은 스스로 보아야합니다. 많은 이들이 전생을 보기 위해 유체이탈을 시도하시는데 유체이탈을 하려거든 어떠한 논리나 논조에 빠지지 말고 단순해지길 권합니다. 노력과 명상을 통해 유체이탈을 하는 것은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전생은 삶의 이유이며, 전생의 카르마는 현생의 숙제입니다. 전생을 너무 알 필요도 없지만 이를 지나치게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전생은 다름 아닌 현생이며 동시에 내세인 것입니다. 현생의 기회를 남 탓을 하고 전생 탓 하며 원망(怨望)할 일은 아닙니다. 차이가 주는 업을 인정하고, 거슬러 올라가 조상이 지은 업도 내 업이라 생각하고 해원(解怨)하려 노력하는 마음으로 현생에 임하면 됩니다.
인간은 왜 환생하고 윤회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은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하는 물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영적 성숙>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환생과 윤회를 하면서 <영적 진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할 평등이 있지만 이 작은 ‘차이’의 미덕은 각 개인의 형태와 양상에 차별화, 즉 업을 지어 개인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업을 현생에서 풀 수 있는 기회를 신이 마련해주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인간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생은 스스로 보아야합니다. 많은 이들이 전생을 보기 위해 유체이탈을 시도하시는데 유체이탈을 하려거든 어떠한 논리나 논조에 빠지지 말고 단순해지길 권합니다. 노력과 명상을 통해 유체이탈을 하는 것은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전생은 삶의 이유이며, 전생의 카르마는 현생의 숙제입니다. 전생을 너무 알 필요도 없지만 이를 지나치게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전생은 다름 아닌 현생이며 동시에 내세인 것입니다. 현생의 기회를 남 탓을 하고 전생 탓 하며 원망(怨望)할 일은 아닙니다. 차이가 주는 업을 인정하고, 거슬러 올라가 조상이 지은 업도 내 업이라 생각하고 해원(解怨)하려 노력하는 마음으로 현생에 임하면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과학의 마지막 일은 ‘영혼’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후 몇 십 년이 흐른 과학은 그 누구의 상상도 초월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우주시대, 정보시대, 유전자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영혼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봤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을 우주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발전시켜나갔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역학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절대적인 인식(객관성)과 개인적인 인식(주관성) 사이의 제한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과 눈에 보이는 세계와의 관계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과학의 인과율이 지배하는 합리성을 벗어나는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에는 무의미한 우연이 아니라 의미 있는 비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최후의 물리학인 양자물리학이 밝힌 성과는 우리의 합리적인 인식너머에 비합리적인 세계의 존재 확인입니다. 즉, 지금까지 물리적 인과율이라는 과학의 방식 자체의 파탄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현대과학의 총아 유전공학도 인체의 지놈 지도는 완성해도 ‘생명의 유전’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도 뇌와 신경 뉴런의 구조와 기능은 밝혀도 ‘인간의 정신’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초심리학 분야에서 칼 구스타프 융이 심리학의 연장선에서, 양자이론보다 한발 앞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설명하여 양자물리학이 주장하는 기존과학의 인과론 파산에 영감을 주었고, 신학에서 이를 신(神) 존재의 이론적 근거로 대용하고 있는 것이 현주소입니다.
영혼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 말든 이미 존재합니다. 인류이래로 수많은 선각자들과 영능력자들은 현상계와 영계를 넘나들어 왔습니다. 반면 최고의 지적 산물인 과학은 잰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영혼을 속 시원히 증명하지 못한 불똥이 종교의 위기를 불러오고 철학의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철학 없는 과학은 맹목이고, 과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는 말 전체가 정말로 공허하게 돼버리고만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10년 전에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휩쓸었고, 미국에서는 명상이 절정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를 동양사상의 우위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한계에 이른 기존의 서구 종교들의 공백에서 생긴 진공을 메우는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됩니다. 서양이 과학적 합리에 발목이 잡혀있다면, 동양은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오래된 윤리와 사상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한계는 실험과 증명에 의해 이성적으로 확인되고 재현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현상계 인과론의 연장 속에서는 우주의 범위를 아무리 허블 망원경의 렌즈 너머 제3의 우주로 확장하고 우주생성의 비밀 벗기기에 매달려도, 인간의 눈물을 물과 나트륨으로 분석하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는 커다란 비누방울 속에 사람이 갇혀있으면서 비누방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현상계 전체가 영계의 일부이고 단지 인식되지 못할 뿐입니다. 비누방울을 부풀린다고 해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현상계가 영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는 살아있고 하나는 죽어있는 인간 생명의 두 가지 차원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제 이 두 가지 영역을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신경과학의 한 사실을 빌려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되어있습니다. 좌뇌와 우뇌는 하는 역할이 특화되어 있어 하나는 수리와 이성, 하나는 개념, 도덕, 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좌뇌와 우뇌가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뇌가 생각할 때, 아 저 좌뇌라는 친구가 순두부같이 생겼구나라고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둘은 인간의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역할분담을 하면서도 잘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좌뇌와 우뇌처럼 실제 생명과 자연계의 두 가지 속성입니다. 태어나면 영혼이 육체에 깃들어 생명을 받고, 죽으면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 영계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다른 것 같이 보이고, 삶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손바닥의 위아래와 같이 삼라만상 현상계를 형성하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과학은 눈에 드러나는 현상계의 진리만을 살아있는 자들이 추구하기 때문에 사후세계인 영계에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구축한 최고의 지적 금자탑인 과학이 영혼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넘쳐나서 그렇다는, 이해하기 낯선 이유 때문입니다. 너무 똑똑해서, 너무 지적이고 이성적이어서 코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인다고 하면 보지 못한 것이요
들린다고 하면 듣지 못한 것이요
안다고 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니
어둠 속에서 머나먼 별이 보이고
눈감아야 세상이 보이고
그 알뜰한 자기 생각을 넘어야 자신이 보이네.
치밀한 백년을 도모하기보다 천진한 하루를 사시게.
과거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봤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을 우주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발전시켜나갔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역학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절대적인 인식(객관성)과 개인적인 인식(주관성) 사이의 제한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과 눈에 보이는 세계와의 관계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과학의 인과율이 지배하는 합리성을 벗어나는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에는 무의미한 우연이 아니라 의미 있는 비합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최후의 물리학인 양자물리학이 밝힌 성과는 우리의 합리적인 인식너머에 비합리적인 세계의 존재 확인입니다. 즉, 지금까지 물리적 인과율이라는 과학의 방식 자체의 파탄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현대과학의 총아 유전공학도 인체의 지놈 지도는 완성해도 ‘생명의 유전’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도 뇌와 신경 뉴런의 구조와 기능은 밝혀도 ‘인간의 정신’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초심리학 분야에서 칼 구스타프 융이 심리학의 연장선에서, 양자이론보다 한발 앞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설명하여 양자물리학이 주장하는 기존과학의 인과론 파산에 영감을 주었고, 신학에서 이를 신(神) 존재의 이론적 근거로 대용하고 있는 것이 현주소입니다.
영혼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 말든 이미 존재합니다. 인류이래로 수많은 선각자들과 영능력자들은 현상계와 영계를 넘나들어 왔습니다. 반면 최고의 지적 산물인 과학은 잰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영혼을 속 시원히 증명하지 못한 불똥이 종교의 위기를 불러오고 철학의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철학 없는 과학은 맹목이고, 과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는 말 전체가 정말로 공허하게 돼버리고만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10년 전에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휩쓸었고, 미국에서는 명상이 절정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를 동양사상의 우위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한계에 이른 기존의 서구 종교들의 공백에서 생긴 진공을 메우는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됩니다. 서양이 과학적 합리에 발목이 잡혀있다면, 동양은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오래된 윤리와 사상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한계는 실험과 증명에 의해 이성적으로 확인되고 재현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현상계 인과론의 연장 속에서는 우주의 범위를 아무리 허블 망원경의 렌즈 너머 제3의 우주로 확장하고 우주생성의 비밀 벗기기에 매달려도, 인간의 눈물을 물과 나트륨으로 분석하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는 커다란 비누방울 속에 사람이 갇혀있으면서 비누방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현상계 전체가 영계의 일부이고 단지 인식되지 못할 뿐입니다. 비누방울을 부풀린다고 해결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현상계가 영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는 살아있고 하나는 죽어있는 인간 생명의 두 가지 차원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제 이 두 가지 영역을 왔다 갔다 할 뿐입니다.
신경과학의 한 사실을 빌려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되어있습니다. 좌뇌와 우뇌는 하는 역할이 특화되어 있어 하나는 수리와 이성, 하나는 개념, 도덕, 윤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좌뇌와 우뇌가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뇌가 생각할 때, 아 저 좌뇌라는 친구가 순두부같이 생겼구나라고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둘은 인간의 생명현상을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역할분담을 하면서도 잘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좌뇌와 우뇌처럼 실제 생명과 자연계의 두 가지 속성입니다. 태어나면 영혼이 육체에 깃들어 생명을 받고, 죽으면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 영계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다른 것 같이 보이고, 삶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손바닥의 위아래와 같이 삼라만상 현상계를 형성하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과학은 눈에 드러나는 현상계의 진리만을 살아있는 자들이 추구하기 때문에 사후세계인 영계에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가 구축한 최고의 지적 금자탑인 과학이 영혼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넘쳐나서 그렇다는, 이해하기 낯선 이유 때문입니다. 너무 똑똑해서, 너무 지적이고 이성적이어서 코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인다고 하면 보지 못한 것이요
들린다고 하면 듣지 못한 것이요
안다고 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니
어둠 속에서 머나먼 별이 보이고
눈감아야 세상이 보이고
그 알뜰한 자기 생각을 넘어야 자신이 보이네.
치밀한 백년을 도모하기보다 천진한 하루를 사시게.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12 (0) | 2010.11.21 |
---|---|
매월당 김시습 전(傳) (0) | 2010.11.19 |
염화실의 향기_18_전북 장수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 (0) | 2010.11.14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30 (0) | 2010.11.13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8 (0) | 2010.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