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국불교신문>
왕조(王祖)가 아니면서도 김시습만큼 일생의 흔적을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후학들의 노고와 왕명으로 편찬된 ‘매월당집(梅月堂集)’ 23권 11책의 자료는 방대하다. 하지만 유가의 입장에서만 선별된 것이다. 불가, 도가 등 아직도 채록되지 않은 설화가 방방곡곡에 서려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생애를 되새김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월당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어조는 여전히 그를 범접하기 어렵다는 토로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수집된 사료(史料)의 양(量)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를 ‘천재 자유인(自由人)’으로 기인 취급한다거나, 각자의 유불선(儒佛仙) 편견을 뒷받침하는 교리(敎理)에 연을 대려는 종파적 시도를 할수록 더욱 근접하기 어렵다. 글자에 매달려 마음을 읽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한편으론 의심되기도 한다.
매월당은 펼쳐보지 말고 모아서 보아야 한다. 매월당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괘(卦)는 ‘시중(時中)’이다. 그는 중년에 쓴 논문 <상변설(常變說)>에서 ‘시대의 상도(常道)를 지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시중(時中)’이라고 밝힌바 있다. ‘시중(時中)’이란 정해진 도(道)가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시기에 맞춰 적절한 도리를 지킨다는 뜻이다. 절에 가면 승려요, 관청에 가면 관리요, 산에 가면 선인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유가(儒家)에서는 유성(儒聖)들의 논리에, 불가(佛家)에서는 수행 율법에 묶이고, 도가에서는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는 깨닫는 수행(修行)이 아니라 떠먹여 가르쳐주는 교(敎)-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가 되었다는 핀잔이다. 매월당은 배운자들이 유불선(儒彿仙) 논리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하고 오히려 제 눈을 가려 장님이 되었다고 분개하고 있다. 권력자들이 성현의 말을 체면치레하는 노리개로 전락시키고, 실상 행동에서는 서로 자기취향을 앞세워 상대방을 험담하는 궤변으로 일삼으며 명리와 권력에 아첨하는 꼴이 눈에 시었다.
유불선(儒佛仙)에는 모두 사람인(人) 변이 붙어있다. 유불선(儒佛仙)은 우주의 본래 형상이 아니라 사람의 필요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시대적 유행이라 생각하고, 정치나 학문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잘 꾸리기위해서 유불선(儒佛仙)을 거침없이 적절이 끌어다 써야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논조와 종파에 얽매여 자신의 기득권과 명리를 사수하려는 시도에 매월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남효온의 <귀신론(鬼神論)>과 함께 매월당의 <신귀설(神鬼說)>은 유불선(儒佛仙)의 상호보완을 꾀하고자하는 시도였고, 마침내 논리의 한계를 넘어 이승과 저승을 잇는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정점을 찾을 수 있다.
매월당의 논조와 가장 근사치를 굳이 꼽자면 서구의 철학자 칸트의 ‘비판 철학’을 들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보이지 않는 세계)의 맹목적인 숭배를, 실천이성 비판에서는 눈에 보이는 경험론의 맹목성을 각각 비판하고 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양자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야 자신의 경험적 주관을 바탕으로 전체의 신과 조화, 발전시킬 수 있다고 칸트는 강변하고 있다. 매월당은 사람이 천지(天地)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지의 산물이 사람이기 때문에 군신귀천(君臣貴賤)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의지판단을 바탕으로 천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에 늘 마음졸여야한다고 생각했다.
매월당의 초년은 시중을 체득하기위한 방황길이었고, 말년은 자기가 뱉은 말 값을 치르기 위한 유랑길이었다.
매월당이 생육신(生六臣)으로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유문(儒門)에서 최고로 꼽는 절의의 화신으로 추앙되었지만 유가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법을 설하고 간행하길 멈추질 않았지만 환속을 반복하고 법호 를 간직하지 않고 절 밖에 묻혔다. 도가(道家)에도 남달라 선(禪)과 양생술로 산천을 벗 삼았지만 세상을 끊고 은둔하지 않았다. 이런 육필(肉筆)의 사실에서 매월당은 중용(中庸)추가 기울 때마다 중심을 잡기위해 온몸으로 부지런히 이길 저 길 ‘시중(時中)’을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중(時中)’은 매월당 당대에만 유용한 맹목적 저항의지가 아니기에 더 매력적이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퍼 써야하는 무궁한 에너지 자원이다. 구도자(求道者)들이 구태여 험난한 길을 마다하고 구도를 떠나는 유일한 동기이자, 도달해야할 구도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화성(火星)을 넘나드는 21세기에 조선 초기 매월당이 기거하던 사회를 민속촌처럼 그대로 재현하거나 복화술(複話術)로 그의 입을 따라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소설 ‘시중(時中)’에서는 인간이 시중하지 못하며 겪는 좌충우돌을 매월당이란 시대의 배우를 무대에 올려, 요즘 세태와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자 한다. 매월당의 삼세(三世)를 넘나들면서, 시대를 유행하는 껍질은 버리고 변하지 않는 ‘시중(時中)’ 알맹이를 줍고자한다.
조용히 되돌아보다(회광반조,回光返照)
1. 월하(月下)의 홍매(紅梅)
매월당 김시습傳 |
1493년(성종24년, 매월당의 나이 59세) 이른 봄, 충청도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無量寺).
매월당은 작년에 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원도를 나와 계룡산으로 향했다. 동학사에 들러 사육신들을 참배사하고 무량사로 향했다. 지난해 무량사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에 발문을 써 줄 연이 닿았다. 그런데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고 비지땀이 속절없이 흐르더니 갑자기 몸져눕고 말았다.
매월당이 여느 때처럼 절간에 들렀더라면 앵무새처럼 경만 되뇌는 스님들에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당혹한 선문답을 내리쳤을 것이다. 이제 기력이 쇠해서일까. 무량사에서는 묵언(墨言)을 하기로 했다. 소리가 없는 붓을 들었다.
<병들어 무량사에 누워(無量寺臥病)>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 춘삼월
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네.
문밖을 향해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다른 스님들이 들고 일어설까 두렵구나.
버선을 벋었다. 마디마다 옹이 박힌 발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주인 잘못만나 고생이 많구나. 이제 더 이상 먼 길은 없을 것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은 어떤 몰골인지 마주보고 싶어졌다.
‘청년은 어디 가고 중늙은이가 들어앉아 있는가.’
거울을 당기고 얼른 붓을 들어 거울속의 얼굴을 그렸다. 5척 단신에, 눈은 독기를 품은 배암처럼 작으면서 가로로 날카롭고, 코는 준두가 큰 주먹코에, 작은 입술을 일자로 앙다물고 있다. 볼은 바람에 패여 움푹하고 눈썹이며 수염, 머리털이 늙은 멧돼지 털처럼 억세게 뻗쳐 있었다.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겨우 반 백년을 넘게 가꾸어온 몰골이란 말인가.’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매월당이 태어난 날 성균관 유생들이 공자가 오는 꿈을 꾸었던 일, 5살 때 궁궐에 불려가 세종 앞에서 시문을 지어 ‘5세’로 불린 일, 약관에 왕도정치의 꿈을 품고 유학에 정진했던 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생무상에 신음하던 일, 세조의 왕위찬탈에 책을 불사르고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 가에 매장하고 통곡하던 일, 동학사에 사육신을 초혼하고 세조 불경언해 사업을 도우며 신경전을 벌이던 일, 승려로 떠돌며 도반들과 환담하고 <중편조동오위> 찬을 쓰던 일, 남효원과 열띤 ‘귀신론’ 공방을 벌이고 경주 남산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하던 일......
이제 해는 저물어 갈 길은 먼데, 이제 수심 가득한 창자 묻을 곳을 물색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보름을 넘긴 달이 오층 석탑위에 걸려있었다. 매월당(梅月堂)은 이불을 장옷처럼 쓰고 선방(禪房)의 방문을 슬며시 밀었다.
‘매화는 달빛 아래서 훔쳐봐야 진수지.’
요 며칠 퍼부은 비로 마당에 핀 매화꽃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조바심이 난 터였다. 매월당은 발작처럼 잔기침을 해댔다. 어제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산사의 밤기운은 여전히 엄동설한의 위세였다.
‘허허, 산사의 미녀(美女)는 역시 홍매(紅梅)뿐이로다.’
매월당은 손으로 기침을 막으며 아예 문을 열어젖혔다. 댓돌의 신을 신고 마당에 섰다. 현기증이 돌아 한번 휘청했지만 이를 물고 허리를 곧게 폈다. 월하 오층탑과 홍매, 그리고 매월당.
‘이래야 한 폭의 그림이 되지.’
뽀얀 달을 올려다보니 또 주책없게 눈이 시렸다. 평생 풍상을 벗 삼아 언제 어디서 묻혀도 무난하리라고 각오를 했지만, 막상 마지막 매월(梅月)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스치니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짐승들도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다.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사람의 고향은 귀천을 막론하고 아녀자 다리 밑의 동굴이라고 야료하던 객기가 지금 본인은 정녕 수긍할 수 있는지 넌지시 되물어 보았다.
‘말빚이 크구나.’
월하 홍매를 가슴에 새기고 선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으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맴돌던 기운이었다. 혹시 저승사자가 왔는가 반갑게 맞이할 요량으로 방문을 열었다.
“누구시오?”
한 사내가 달빛에 얼굴을 보였다. 매월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낯익은 얼굴인데 딱히 누군지 떠오르질 않았다.
“공부하는 사람인데 매월당 대선사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찾았습니다.”
“대선사라니, 당치도 않소. 이제 이 늙은이는 꽁지 빠진 메추라기와 다를 바 없소.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시오. 바람이 차니 들어오시오.”
평소 매월당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수락산 시절, 한 유생(儒生)이 문하생으로 받아주길 애걸하였다. 가끔 유생이 손님으로 들면 공맹자를 논하고, 승려가 찾아오면 화엄경을 논하고 큰 절을 받기는 했으나, 다 같이 인생길 도반인 처지에 문하생을 받아 훈장질하는 성미는 아니었다. 하도 고집을 부리기에 매월당은 유생이 싸가지고 온 책 보따리는 한 번도 풀지 못하게 하고 한 계절 내내 땡볕에서 밭일을 시켰다. 매월당이 똥지게를 넘겨주자 유생은 줄행랑을 쳤다. 저만치 개울에 빠져가며 도망치는 유생의 뒤통수에 한마디 갈겼다.
“네놈이 앉아서 입으로 하는 글만 알았지, 몸으로 하는 글은 여전히 캄캄한 맹인이로구나!”
매월당이 등잔을 당기며 말했다.
“오늘밤은 홍매의 알몸을 보아서, 긴긴밤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찌 진정시킬까 은근히 걱정했는데, 하늘에서 친히 말벗까지 챙겨주시니 웬 횡재인고. 처사님은 무엇이 궁금해서 야심한 밤을 타셨소.”
“대선사님...”
매월당이 말을 막으며, 다시 ‘췌세옹’을 권했다.
“췌세옹께서는 어떤 까닭에 그리 많은 문장을 지으셨습니까.”
2. 시중삼세(時中三世)
“글이라, 문장(文章)이라....껄껄껄.”
매월당은 억센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요즘 선비들에게 문장은 벼슬이요. 출세를 위해 글을 읽고 출세를 위해 문장을 짓지요. 허나 본래 문장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요. 즉,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을 입신이라 하오. 마음이라는 놈은 본래 보이지도 않고 오고 가는 길도 따로 없으니 스스로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알기 어렵소. 그때그때 심경을 기록하여 나중에 시간을 두고 확인하면 눈 위의 발자국처럼 마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소. 그 흔적을 방향 삼아 자기 몸이 갈 길을 정하는 게요. 또한 성현들의 문장과 비교하여 과부족을 가늠하여 등불 삼아 정진하는 게지요. 양명이란 입신한 깊이만큼 자연히 널리 퍼지는 게요. 꽃이 피면 저절로 향기가 나고 향기가 나면 벌, 나비가 스스로 찾아오지 않소. 그런데 점차 입신은 없고 양명만 너도나도 잡으려하니 참으로 딱한 세태지요. 남의 문장만 구관조처럼 외워서 자기 마음의 깊이 인양 착각하는 게지요.”
“문장의 깊이로 치자면 근세 들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시잖습니까. 그런데도 왜 양명을 마다하셨는지요.”
“허허, 늙은이에게 작정을 하셨구먼. 그럼 내 변명을 좀 하리다. 나에게 문장은 낡은 짚신이요. 신다가 닳으면 버리고 새 놈으로 바꿔 신소. 짚신만 보고 짚신을 신은 사람을 평한다면, 거울을 보면서 어제 거울 속의 사람은 어데 갔느냐고 거울에게 떼쓰는 바와 다를 바 없소. ‘봄’이라고 쓴 문장을 가을에 펴도 역시 ‘봄’이지 않소.”
중년의 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월당은 한 구석에서 물그릇을 찾아 마른입을 축였다.
“가을에도 여전히 봄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문장’에 본래 그 내용이 없기 때문이요. 대웅전의 비로자나불을 본적이 있지요. 한 손으로 반대 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지 않소. 감싸 쥔 검지가 보이지 않아도 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뭐 그런 거요. 도(道)란 아무 형상도 없소. 안 보이는 검지가 도라면 감싸 쥔 손이 문장이요. 보이지 않는 도를 알리기 위해서 잠시 보이게 감싼 것이 문장이요. 김정승 문패를 떼어다가 오첨지 문간에 붙인다고 김정승이 오첨지가 되진 않지요. 보이지 않는 도를 보지 못하고 보이는 문장만 쫒는 형국은 문패만 따르는 한심한 작태와 다를 바 없지 않겠소. 이런 인물을 일러 보이는 맹인이라 부르오. 문장이란 이렇게 허상일 뿐인데 어찌 헤진 짚신 같은 문장을 팔아 벼슬을 살 수 있겠소. 처음엔 나도 남들처럼 양명의 수단으로 발을 들어놓으려 한 적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따르는 자들과 도저히 마음을 틀수 없더이다. 메마른 산천에서라도 마음 통하는 도반들과 어울려 흥을 즐기는 안주로 문장이 오르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었다오.”
매월당은 몇 번 잔기침을 했다.
“내 문장은 여러 경로를 거쳤소. 소싯적에는 성현들의 문장을 흉내 내기도 했고, 양명을 숭상하기도 했고, 수양대군 이후 팔도를 유랑하며 토해 낸 울분의 찌꺼기이기도 했고, 점차 문장이란 놈이 내 혼과 대화하는 서찰이 되었소. 고독할 때 유일한 벗이오.”
매월당이 그제야 생각난 듯 한구석에서 한지 뭉치를 꺼냈다. 얼마 전 그린 자화상을 펼쳤다.
“요것이 가장 최근 내 문장인데, 이 초상이 정말 한평생 쓰고 새긴 내 삶의 최종 문장이요. 그 옆에 글이 초상에 대한 나의 술회 이구요.”
술회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하(李賀:당나라의 천재시인)를 깔아 볼 만큼 해동(海東)에서 최고라고들 하지만 과찬의 명성이요. 부질없는 명예가 어찌 내게 해당되리오.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하는 말은 당돌하기 짝이 없으니, 마땅히 너를 구덩이 속에 내버릴지어다.’
좌중은 한 바탕 호탕한 웃음이 휩쓸었다. 호롱불이 가물가물 흔들렸다.
“초상(肖像)에 대한 감상은 겉치레가 아니오. 초년의 생각이 중년에 뒤집히고, 말년에 보니 또 중반의 생각이 터부니 없더이다. 그래서 한때 묵언(黙言)을 고집한 적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전생의 업보를 알고부터는 이내 포기했소. 쓸데없는 일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알고 하는 순간부터 쓸데없는 일이 아니지 않소. 시중(時中)에는 전후좌우 부귀빈천이 없이 오직 정성만 있으니까......”
처사는 어렵다는 듯 가는 숨을 내뱉었다. 그런 처사의 마음을 헤아린 듯 매월당이 설명을 붙였다.
“시대의 상도(常道)를 지켜 시대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시중(時中)이오. 논에 가면 농부가 되고 산중에 가면 사냥꾼이 되듯이, 한 가지 말에 매어있지 않고 그때그때 시기에 맞추는 도리요. 유불선(儒彿仙)의 모든 도리가 여기에 담겨 있소. 유문(儒門)에 중용(中庸)이 있지만 분명 시중(時中)과는 다르오.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모두 통해야 비로소 진중한 시중이 될 수 있소. 이것은 우물의 깊이에 따라 우물의 중심이 달라지는 바와 같소. 중용은 유문에서 하는 습관대로 현세만 치우쳐져 있소. 그래서 충(忠)이란 이름으로 시류에 거리낌 없이 권좌에 야합해도 부끄럼을 모르는 것이오. 나도 이점에서 많이 갈팡질팡했소. 드러난 것을 아무리 합산하여 중용을 구해보아야 소용이 없었소. 그래서 불문(佛門)에서는 일찍부터 삼세의 인과응보를 가르쳐온 것 아니겠소. 그런데 지금의 불문 또한 시중하지 못하고 있소. 경(經)만 암송한다고 되는 게 아니요. 선(禪)을 통해 진정으로 자기 혼이 삼세를 꿰뚫어야만하오. 헌데 사서삼경과 다를 바 없는 공안(公案)에만 골몰하거나 호흡 양생술(養生術)로만 일관하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이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에서 황공무지한 망발이지만, 불경에는 부처님이 없소. 부처님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라 했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진정한 자신만의 경이오. 불경은 경을 엮었던 사람들의 각자 소견일 뿐이오. 구관조처럼 밤낮 염불해봐야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오. 스스로 삼세를 오가지 못하니 승려들이 사실상 산속에서 백성으로부터 현실 도피하는 구실로 윤회(輪廻)를 오남용하고 있소. 그런 면에서 불문은 슬그머니 선문(仙門)에 귀의하는 꼴이 되었소. 게다가 중생들로부터 시주 받는 호구지책을 당연시하고 있소. 백성들에게 빌어먹는 과보가 무엇인지 왜 공안으로 삼지 않는 거요. 승려가 무슨 벼슬이란 말인가. 불자들에게 떳떳해야 진정으로 승려로서 첫발임을 알아야하오. 시중은 개인으로선 자기 인생, 국가로선 깊은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되면, 변하는 본성과 시시각각 변하는 오행을 구별하지 못하고, 마침내 눈앞의 명리만 쫓게 될 뿐이오.”
매월당은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 공연히 옆에 있던 붓과 벼루를 정리해서 윗목에 밀어두었다. 매월당은 마치 잠시 동안 한 생을 모두 되돌아보는 듯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먼 곳을 응시했다.
“사육신을 참배할 때 만해도 내 울분은 남의 탓에서 왔소. 하지만 내 인과를 따져 본 후부터는 남을 욕해도 내 탓이 되더이다.....참 그동안 우둔했소. 문패를 쫒아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르오.”
“전생을 보셨습니까? 어느 분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긴 장마철 장대비는 피할 수 있어도 업보는 바늘 끝만큼도 오차가 없더이다. 나는 영안(靈眼)을 뜨지 못해 보지는 못했소. 다만 내 지난날 서필(書筆)과 육필(肉筆)로 더듬다가 알게 되었소. 졸저 ‘금오신화’로 남의 넋을 기리는 과정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깊은 회한을 느꼈지요. 내 문장은 평소 내 처지를 읊고 돌아보는 거울이었는데, 결국 남겨진 문장은 후세의 나를 볼아 보기위한 거울이 되더이다. 처사님에게는 ‘누구’보다는 ‘어떤 과보’인지가 더 귀감이 될게요.”
매월당은 양해를 구하고 비스듬히 눕는다. 무량사위에 빛나는 초롱초롱한 월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천장을 응시한다.
제2화 오세동자(五世童子)
1. 공자가 환생한 꿈
세종 17년(을묘년. 1435년) 한양 성균관 북쪽의 반궁리(泮宮理). 본래 반궁(泮宮)이란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된 국립 학교를 말하는데, 조선에서 이를 따와서 유교학부를 중심으로 하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반궁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자네도 꿈을 꾸었다고?”
“그럼 자네도? 우리만 그런 게 아니네. 조금 전 오다보니 양서방도 내 얘기를 듣더니만 자기 마누라도 그 꿈을 꾸었다는 게야. 참으로 신기한 일일세.”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균관에서 유생들도 무리지어 같은 꿈 이야기 때문에 독경소리가 멈추었다.
“허어, 공자님이 틀림없어. 공자님께서 드디어 해동에 환생하신 게야. 간밤에 부채를 든 귀인이 서책을 끼고 내려오는 꿈을 꾼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한 유생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알아냈네, 알아냈어. 어제 해산한 집을 알아냈어.”
“그게 뉘 댁인가? 어서 말해보게.”
“알았네, 알았어. 회초리라도 칠 기세구만. 북쪽 앵두나무골 김일성(金日省)댁이라네. 어제 깊은 밤에 아들을 보았다는구먼. 머슴의 말로는 대문 앞 금줄에서도 꽃향기가나더라고 전하더라구.”
당시 풍습은 출산을 외가에서 했다. 반궁리는 김시습의 외가였다. 이웃에 살던 최치운(崔致雲)이 자진해서 작명(作名)하여 김일성에게 선사했다. 최치운은 집현전 학자로 조정에 들어가 야인 정벌에 공을 세우고 공조와 이조의 참판과 좌승지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분명 큰 학문을 이루고 나라의 재목이 될 걸세. 내 ‘시습(時習)’이라 지어왔네. 논어(論語)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걸세.”
“김시습이라.....참 좋은 이름입니다. 그럼 이 아이를 김시습이라 부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시습은 한 돌이 되기도 전에 글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에 있던 책을 유심히 보더니 그 의미를 아는 냥 아직 옹알이도 마치지 않은 입으로 알아들기 힘든 시를 혼자 웅얼거렸다. 이를 기특히 여긴 외할아버지는 말을 가르치기도 전에 <천자문>을 먼저 가르쳤다. 아직 혀가 여물지 않아 발음은 제대로 하지 못해도 뜻은 알았다.
두 살 되던 봄, 외할아버지는 화소함전성미청(花笑檻前聲未廳: 난간 앞에 핀 꽂이 활짝 웃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이라는 구절을 불러주고 김시습에게 물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김시습은 병풍에 그려져 있는 꽃을 가리키며 아직 구루지 않는 혀를 움직여 ‘아아’하고 설명했다.
세 살 되던 어느 날은 유모인 개화(開花)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장면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읊었다.
‘비도 아니 오는데 어데서 나는 천둥소리인가
누런색 구름 가루가 되어 사방에 흩어지네.’
김시습은 다섯 살 되던 해, 이웃에 사는 이름 높은 학자 이계전(李季甸)에게 <중용(中庸)>과<대학(大學)>을 배운다.
김시습의 천재성은 소문은 꼬리를 물고 장안에 퍼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신동 소문을 확인하고자 하루는 허조(許稠)라는 정승이 몸소 집을 찾았다. 허정승은 아직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코흘리개를 김시습에게 넌지시 물었다.
“니가 글을 잘 짓는다는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이 늙은이를 위해 ‘늙을 노(老)’자를 넣어서 시한구절 들려줄 수 있겠느냐?”
어린 김시습은 즉석에서 주저 없이 제비 새끼 같이 입을 벌리며 앙증스럽게 시를 지었다.
“늙은 나무에서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네.”
허정승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연 소문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도다.”
소문은 드디어 세종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세종은 도승지에게 전지를 내려 승정원에 불러 과연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당시 관례로는 임금이 백성을 직접 친견할 일이 없었기에 승정원에 일을 맡긴 것이다.
승지는 아장아장 걸어오는 김시습을 번쩍 들어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
“네 이름을 넣어서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김시습은 곧바로 시구를 불렀다.
“올 때는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이었습니다.”
승지는 다시 산수화 족자를 가리켰다. 김시습은 지체 없이 읊조렸다.
“작은 정자 같은 배 집에는 누가 사는가.”
승지는 세종이 직접 낸 <삼각산(三角山)>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삼각산 높은 봉우리가 하늘로 푸르게 솟아
그곳에 오르면 북두성 견우성도 손으로 딸만하다네.
저 산악은 구름과 비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만세토록 안녕케 하리.
승지는 글을 한번 써보라고 시켰다. 고양이 같이 작은 조막손으로 용이 날 듯 한 글씨를 써내려갔다. 승지는 즉시 세종을 알현하고 시험했던 사실을 아뢰었다. 세종은 몇 번이고 무릎을 치면서 직접 알현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렸다.
“내가 뒤에 크게 쓰고자하니 집에 돌려보내 그 아이의 재주가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지극 정성으로 키우도록 하라.”
세종은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대신들은 재미삼아 어린 김시습에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가져가야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어린 김시습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50필을 풀어 끝과 끝을 묶은 다음 허리에 춤에 묶어서 질질 끌고 대궐을 나갔다. 조정의 대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신동이 틀림없다며 감탄했다.
어린 김시습이 돌아가고 세종은 기특한 마음으로 김시습이 지었다는 <삼각산>시구를 살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본 세종은 한 편으론 근심이 들었다. 겉으론 나라의 번영을 빌고 있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정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삼각산 높은 봉우리에서 대궐을 내려다보는 자신감이 숨어있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2화 관동(館洞)이야기(1)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성균관 앞 쪽으로 ‘관동(館洞)’이란 마을이 있었다. 관을 수발하기위해 만든 공동 마을 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말기에 안유(安裕)가 국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유생(儒生)들이 수학에 전념하도록 수발할 노비 100명을 이주시켜 형성된 마을이었다.
반촌 개울가. 몇 마리 소가 매어있고 한쪽 우리에는 돼지가 갇혀있다. 구석에서 장정 서넛이 막걸리 사발을 돌리고 있고 한쪽에선 여러 길이의 칼을 숫돌에 갈고 있다. 건장한 사내가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입가를 쓱 닦았다. 끝이 뾰족한 두자 길이의 쇠망치를 집어 들고 누런 황소 곁으로 팔자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황소는 큰 눈을 희번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용을 써서, 장정 서너 명이 달려들어 고삐를 말뚝에 묶는데 애를 먹었었다.
“소는 영물(靈物)이라 자기 죽을 때를 알죠. 저 봐요, 눈물을 흘리잖아요.”
소 말뚝에서 떨어진 곳에 덕쇠가 갓 11살이 된 시습에게 손을 놀려가며 설명했다. 덕쇠는 지금 소 망치를 들고 있는 장쇠의 아들로서 시습보다 한두 살 더 위지만 신분이 낮아 말을 높였다.
“쿵, 풀썩.”
장쇠가 망치를 소머리에 번개같이 내리치자 산만한 덩치의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머리를 처박는 황소. 까맣고 초롱초롱하던 소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앞발에 경련이 일었다. 장쇠는 소망치를 천천히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소의 정수리를 둔탁하게 내리쳤다. 마치 호랑이라도 때려잡은 냥, 장쇠는 턱에 힘을 주고 망치를 어깨에 걸머지고 의기양양하게 막걸리 통으로 향했다.
“우리 아부지 소망치 솜씨가 세상에서 제일이요. 단 한방이면 된다니까요. 저번 추석 때 소가 밀려서 다른 장정이 소머리를 친 적이 있는데, 빗맞는 바람에 황소란 놈이 쓰러지질 않고 성이 나서 미쳐 날뛰고 해코지해서 성안에 난리가 났지 뭡니까. 궁궐에서 궁수(弓手)가 다 나왔다니까요. 호랑이 잡는 화살을 쏴서 겨우 잡았어요. 망치질 했던 그 장정은 곤장을 맞았고요, 고기가 상하고 소가죽에 구멍 나서 소 주인은 손해가 막심했죠.”
덕쇠는 연신 제 아버지 자랑과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신이 나서 떠벌였고, 시습은 한 장면,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장쇠가 이번엔 한 뼘 길이의 시퍼런 칼을 손에 잡고 넘어진 소 쪽으로 다가 갔다. 한 사람이 양동이를 들고 뒤따랐다. 장정 네 명이 늘어진 황소 다리 하나씩을 잡고 배가 하늘로 향하도록 뒤집었다. 장쇠가 칼을 소 목 쪽으로 가져간다십더니 소머리가 쇠똥 떨어지듯 이분되어 나뒹굴었다. 장정이 얼른 잘린 목에 양동이를 받치자 붉은 선지가 콸콸 쏟아졌다. 소의 우둔에 막대를 끼어 소 엉치 쪽을 높이 고였다.
“지금 받는 게 소선지요. 도련님은 저놈을 배추 넣고 끊인 선지국 먹어봤소? 못 먹어 봤구먼요.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다 고이네.”
“왜 소 엉덩이를 쳐들지? 선지 양동이에는 왜 소금을 뿌리는 거야?”
“엉덩이를 올려야 선지가 잘 쏟아지지요. 선지가 탐나서가 아니라 피를 잘 빼야 고기 맛이 좋아요. 그리고 소금을 선지에 뿌리면 선지가 빨리 굳지 않고 간이 베서 음식하기 좋아져요. 금세 상하지도 않고요.”
사내가 선지 양동이에 물을 몇 바가지 붓고 손으로 휘휘 저었다. 장쇠는 능숙한 솜씨로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겼다. 장쇠는 조심스럽게 소의 배에 칼을 넣었다. 아래로 칼이 움직이자 내장이 쏟아졌다. 시습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아낙네들이 쏟아진 내장을 주워 담았다. 소 염통은 여전히 펄떡거리고 천엽(소의 위)는 살아서 꿈틀댔다. 이 광경에 시습은 의문이 들었다.
‘소는 죽었는데 내장과 고기는 아직도 살아있구나. 도대체 무엇이 죽었단 말인가?’
어느 틈엔가 아낙네들이 모여 벗겨진 소가죽 펴서 안쪽에 칼질을 하고 있었다. 덕쇠는 시습의 눈길이 소가죽을 향하자 눈치 빠르게 해설했다.
“소가죽에 조금씩 살점이 붙어있지요. 그놈을 ‘수구레 살’이라고 하는데 아낙들이 그걸 떼어내려고 달려든 거예요.”
장쇠가 가죽 핏대에 시퍼런 칼날을 썩썩 밀더니 뒤 머리카락에 칼을 대고 몇 번 쓸어내렸다. 칼의 날이 섰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끌리지 않고 끊어지면 날이 제대로 선 것이었다. 장쇠의 손놀림에 집채만 한 소가 순식간에 네 다리, 몸통으로 조각나 소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척추에서 갈비를 떼어내고 등심을 내리는 장면에서 시습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등뼈에 고기 한 점 붙지 않고 마치 물과 기름이 분리되듯 떨어져 나왔다. 마치 조각을 하듯 하얀 등뼈가 드러났다. 장쇠의 뼈 새기는 솜씨는 장안의 최고였다. 심지어 그가 칼질을 하면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사람의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덕쇠가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시습은 소의 억센 힘줄을 끊고 단단한 뼈를 발라내는 한 뼘의 작은 칼에 매료되었다. 헐레벌떡 돌아온 덕쇠가 무언가 내밀었다. 소의 간(肝)이었다.
“이게 겹간이요. 간도 여러 조각으로 나눠 있는데 손바닥만한 요 겹간만 찰간이라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고 나머지는 퍼석해서 삶아 먹어야합니다. 이건 임금님도 못 먹는 귀한 겁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먹으면 눈이 번쩍 뜨인 데요. 우리 아부지는 소 이자(비장)를 자주 먹지요. 술 먹고 덜 깨고 속이 미식거린 다음날 이자를 한점 베어 먹으면 술이 확 깨고 정신이 맑아진데요.”
덕쇠는 잘게 썬 간 조각을 왕소금에 찍어 시습의 입에 내밀었다. 시습이 움칫 물러섰다. 덕쇠가 따라하라는 듯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거리더니 꿀꺽 삼켰다.
“아, 맛이 고소하다! 도련님도 드셔요. 육회(肉膾)를 먹는다고 생각해면 되요. 사내가 이런 것도 한 점 못하면 사내라 할 수 없지요.”
2화 관동(館洞)이야기(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덕쇠가 부추기자 시습도 지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고 입에 넣었다.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보기에는 피가 흘러 흉흉했지만 약간 비릴 뿐 생각보다 고약하진 않았다. 시습은 소의 오장육부를 유심히 살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사람의 장기(臟器)인 간, 심장, 비장, 폐, 신장, 담낭, 소장, 대장, 위, 방광에 배속시켜 외운 적은 있지만 직접 보긴 처음이었다. 덕쇠는 아랑곳 않고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저도 요새 아부지에게 칼질을 배우고 있지요. 칼 가는 것부터 배우는데 요놈 쇠에도 여러 성질이 있어서 구분하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시습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덕쇠가 시습의 갈구하는 눈빛을 보고 두 손을 저었다.
“설마...안 되는 구만요. 도련님이 조르고 졸라서 제가 도살간에 남몰래 데려왔는데, 이제 칼까정 탐내면 큰일 납니다. 여기 도련님이 온 걸 식구들이나 학동(學童)들이 안다면 무지하게 경을 칠 거예요. 제가 데려왔다는 것이 들통 나면 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거구만요. 도련님은 붓을 잡고 저는 칼을 잡는 게 도리이지요. 절대 안 됩니다.”
35세의 이웃 이계전에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운 시습의 나이가 5살. 이계전은 어린 서거정도 가르치고 있었는데 서거정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항의 매부였다. 그래서 이계전, 최항, 서거정은 당대 최대의 학맥이자 혈연이었다. 김시습은 본의 아니게 당대 최고 학맥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이계전 문하생인 김시습이 간 길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김시습은 당시 시문에 뛰어난 조수(趙須)라는 스승에게도 시문(詩文)을 배우게 되는데, 조수는 뛰어난 문학가면서 성격이 호탕했다. 안평대군이 그에게 <이태백집>을 주자,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이 속에 <이태백집>이 전부 들어 있다’면서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책을 보지 않고 외워서 가르칠 정도여서 세종 20년(1438년)에 최만리, 김빈, 이영서와 함께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예(司藝)직을 맡고 있던 조수는 성균관 근처에 기거하면서 김시습을 공부시켰고, 시습의 총명함에 경탄하여 왕궁 초청에 다리를 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보통 자(字)는 관례(冠禮)라는 성인식을 치를 때 덕망 높은 어른이 지어주는 것인데 조수는 시습이 성인식도 치르기도 전에 서둘러 ‘열경(悅卿)’이라는 자를 내리고 학문에 더욱 힘쓰도록 격려문을 지어주었다. ‘열(悅)’은 ‘불역열호(不亦說乎)’의 ‘열(悅)’자이고 ‘경(卿)’은 임금이 내린 신하의 ‘경(卿)’자 였으니, 장차 임금에게 기쁨이 되는 신하가 되란 의미였다.
11살이 된 시습은 성균관 유생들이 읽는 모든 서책을 이미 섭렵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습은 어린이였다. 남들보다 호기심이 왕성하여 방에 갇혀 글 읽기보다 동네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해서 글을 읽다가 몰래 담을 넘기가 일쑤였다. 장난도 극심했다. ‘살구벌레’란 애칭이 붙을 정도로 복숭아를 좋아했던 시습. 마을 과수원에서 복숭아가 익기시작하면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한 번은 길 가운데 함정을 파서 사람을 빠뜨리는 장난을 치다가 그만 말이 빠져 낙마사고가 발생하여 고역을 치른 적도 있었다. 우연히 장터 푸줏간에서 통돼지가 업혀 들어가서 칼로 뼈에서 고기를 도려내는 장면을 보고 덕쇠를 알게 되어 이렇게 도축장에까지 숨어들게 된 것이다.
“도리(道理)? 도리라...붓으로 소를 잡지는 못하지 않느냐.”
“에이, 도련님도, 어깃장은. 이런걸 뭐 하러 보고 배울라 그라십니까? 천하의 신동 오세동자가 글을 읽어서 나라님께 공을 세우면 되고, 저는 이렇게 소, 돼지 잡는 살생을 해야 하는 일이 제 천직인데요.”
“네가 살생을 해서 천한 신분이라면, 전쟁터에 사람 베고 궁궐에서 칼 찬 장수는 뭐라더냐? 살생한 고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 양반들은 또 무엇이더냐? 신분에 귀천이 있지, 일에 무슨 귀천이 있느냐?”
“도련님도 참으로 황소고집이요. 뭔 말씀인지는 내가 잘 은 못 알아듣겠지만 우리 아부지가 절대로 승낙하지 않을 겝니다.”
도살장에서 왕초는 소 망치잡이다. 우선 소와의 기(氣)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로 담이 커야하고, 정수리를 단번에 내리칠 수 있는 힘과 정교함이 겸비되어야한다. 힘은 장사에다 망치, 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니 비록 신분이 높다고 해도 감히 그에게 시비 붙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왕초의 이권은 막강했다. 그의 칼질에 따라 고기 양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당장 소가죽을 벗기는 칼질만 조금 무디게 조작해도 수구레 살 두어 근이 더 나왔다. 밉보인 가축의 주인은 남들보다 적은 고기를 가져가야했다. 그 외에도 소가죽, 선지, 내장 등의 소 부산물을 팔아서 막대한 이윤과 배급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낮은 신분에 비해 지나친 재력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아직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게 누구여? 아니, 오세동자님 아니십니까요? 이런 곳에 무얼 볼게 있다고 다 납십니까요?”
장쇠는 마을 경조사 고기를 대주기 때문에 마을 구석구석 모르는 일이 없었다.
“여기 온 거 모친께서 아신다면 종아리가 남아나지가 않으실 텐데요. 어, 한 입 하셨나보네? 허허, 참. 탁배기를 곁들여야 제 맛인데 한잔 올릴 깝쇼?”
시습은 얼른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장쇠는 껄껄 웃으며 줄에 묵은 천엽(소의 위)을 어깨에 걸치고 어딘가로 향했다.
“아부지, 어디 가셔요?”
“고기 대주러 윗마을 간다.”
장쇠는 기생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상것이 감히 사대부들이 드나드는 기방 문턱을 엿볼 수는 없었지만 고기를 대준다는 명분으로 내 집 드나들듯 했다. 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쩨쩨한 사대부들 보다는 훨씬 많은 화대를 기생들에게 뿌리고 다녔고 입만 살아있는 유생들과 달랐기에 튼실한 허벅지와 떡 벌어진 어깨의 장쇠는 기생들에게 특별히 인기였다.
수구레 살을 떼어낸 소가죽이 켜켜이 쌓이고 굵은 소금이 뿌려졌다. 절여진 소가죽은 어느 정도 마르는 데로 가죽신과 장신구를 만드는 갖바치에게 넘겨질 것이다.
2화 관동(館洞)이야기(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시습은 정식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소과에 합격해서 진사나 생원이 된 뒤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는 게 보통이지만, 한편으론 특례입학이 있었다. 소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곡물을 바치거나 고관의 자제는 따로 특별전형을 치러 입학했다. 정규입학자와 특례입학자는 모두 기숙사에서 수학했으며 양자 간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팽팽했다(나중엔 갈수록 특례 입학자의 비율이 많아지는 폐단이 발생했다). 성균관에 일정 기간 기숙하면 향시를 비롯해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시습은 특례입학이었다. 오세 때 임금의 전지가 특례입학증이 된 셈이다.
성균관에서 시습은 김반의 문하생이었다. 주로 <논어>,<맹자>,<시경>,<서경>,<춘추>를 배웠다. 한편으로 이웃에 사는 윤상에게 <주역>과 <예기>를 사사를 받았다. 윤상은 정몽주 문하인 조용의 아래서 수학하여 정몽주 학통을 그대로 잇고 있었으며, 성균관에 오랫동안 교육에 종사하여 조선조 성리학 진작에 큰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에 특명으로 성균관 박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오늘도 오세가 안 보이는 구나.”
김반이 훈교에 앞서 좌중을 둘러본 뒤 후학들에게 물었다. 박생원이 답했다.
“아직 고뿔이 심하여, 외가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벌써 며칠째 누워있는 걸 보니 중병이 틀림없도다. 관리인에게 일러 문안을 보내야겠구나.”
성균관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이 원칙이었지만 집이 멀지 않은 시습은 윤상에게 사사 받는 구실로 집안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아직 어리기도 하거니와 천식기가 있어 환절기에 자주 앓는 사정을 고려한 조치였다. 스승이 문하생의 병문안을 보내는 전례는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시습은 임금의 은총을 받은 몸이라 특별 관리되고 있었다.
“그럴 수고까지 없을 줄 아옵니다. 제가 어제 들렀사온데 많이 좋아져서 아마도 내일이면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고태필 유생의 말에 괘념치 않고 김반이 말했다.
“내가 의원을 보내야겠구나.”
고생원의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관동리의 대장간. 책을 엉덩이에 깔고 턱을 고이고 대장장이 천서방의 일거수일투족에 넋이 나가있는 시습. 천서방이 억센 팔뚝으로 아궁이에 풀무질을 해대자 검은 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가니속의 검은 철가루가 얼음 녹듯 맑은 은색의 쇳물이 되었다. 거푸집에 부어지고 어른 한 뼘 길이의 단도 모양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천서방이 종지에 담긴 왕소금을 손끝에 발라 입에 털어놓고 물 한 사발을 들이켰다.
“소금은 왜 드시오?”
“불앞에서 땀을 바가지로 흘렸으니 보충해야지유.”
“땀은 물이 아니고 소금이오?”
“참나, 땀을 한번 찍어 먹어보쇼. 맛이 짜지요. 하긴 양반님네는 땀 흘릴 일이 없으니께....”
시습이 손을 뻗어 소금을 입에 털어 넣고는 이내 진저리를 치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천서방이 히죽 웃고는 이내 찬물에 담금질을 했다. 붉은 쇠가 ‘치익’소리를 내며 꺼져 들어갔다.
“오세 도령께선 학교에 안가도 훈장님께 혼나지 않으신가유?”
“응, 훈장님이 며칠째 고뿔이 들으셔서 누워계셔. 다들 자습기간이야. 그런데 왜 쇠를 두드리다가 물에 담그고 다시 빼서 두드리고 반복을 하지.”
“이래야 쇠가 단단해져유.”
“쇠도 단단하기가 다른가? 다 같은 쇠가 아니고?”
“그러믄요. 철가루에 동(銅)이니 잡석을 얼마 비율로 섞느냐, 담금질을 몇 번을 하느냐에 따라 단단하기가 하늘과 땅차이지유. 호미 같은 농기구야 대충 모양만 구부리면 되지만 칼은 날을 세워야하기 때문에 보통 정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니께유. 지금 이놈은 장쇠네가 쓸 소 잡는 칼인데, 뼈를 발라야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수십 번 더 별러야 하구먼유.”
“그런 칼은 얼마면 되지?”
“칼을 사시게요? 뭐하러유. 글을 읽으셔야지 칼로 소 잡을 일 있는감유.”
천서방은 더 이상 대꾸 없이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망치질을 해댔다. ‘땡, 땡’ 날카로운 쇳소리에 시습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서서히 하얗게 날이 서가는 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이놈! 학당엔 가지도 않고 몇 일째 어딜 쏘다녔느냐.”
그날 저녁 안방. 시습의 외조부가 노발대발했다. 안방에 시습이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머리를 숙이고 움츠리며 서있다. ‘쇅, 쇅’ 몇 차례 회초리가 허공을 갈랐지만 시습은 입을 꽉 다물고 버텼다.
“성균관에서 의원이 네놈 고뿔 차도를 살피러왔다기에 내가 정신이 아득해져서 실신하는 줄 알았다, 이놈아! 너는 성은을 입고 학당에 들어간 몸인데, 어이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소처럼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단 말이냐. 냉큼 어디서 무얼 하고 돌아다녔는지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중식쯤에 의원이 닥쳤을 때 외조부는 얼른 상황을 눈치 챘다. 의원에게 학당에 돌아가 잘 말해달라고 사정하며 엽전 몇 닢을 쥐어준 터였다. 이내 회초리 몇 개가 부러져 나갔다. 문밖에선 어머니가 초조하게 애를 끓이고 있었다. 시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시습은 집에 오지 못하고 다른 유생들처럼 성균관 내에서만 기숙을 해야 했다. 당장 이듬해부터 대과에 응시하라는 부친의 엄명도 떨어졌다.
학당 내에서도 시습은 유별난 행동을 일삼았다. 대과를 보기위해 학생들은 정해진 과목에만 매달려 씨름을 했지만 시습은 역사서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혹은 야사도 마다않고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공자와 맹자의 주자 해석에만 매달리는 유생들과는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2화 관동(館洞)이야기(4)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어느덧 15세를 앞둔 김시습. 호기심 많고 자유분방한 시습에게 지난 십여 년 동안의 성균관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이들이 ‘오세신동’이라 부르며 기대를 걸었고 그 장단에 맞추어 재롱을 부렸지만, 본질적으로 어린아이에게 학문은 족쇄였다. 각종 예절과 원칙과 시비(是非)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성균관을 드나들 때 한 서생이 어린 시습을 노려보며 ‘학당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드나들면서 어찌 유가의 도를 배우겠느냐’며 시습의 언행과 특혜를 빈정거린 적도 있었다. 시습은 그때 자신도 한 낱 속물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매년 봄, 북악산 동쪽으로 나들이를 나간다. 그해 봄은 가뭄이 더 극성이었다. 유생들은 마음이 들떠 외출을 나갔다. 자리를 잡고 군데군데 둘러않은 유생들 사이에서 탁주잔이 돌아갔다. 빈대떡 지지는 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흥이 오르자 모인 학생들은 공맹을 들먹였다.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그런데 하나를 더 해야 할 것 같소. 봄꽃과 노니는 즐거움 말이요.”
다들 한바탕 웃으며 잔을 권했다. 취기는 춘삼월의 파릇한 산야처럼 피어 올라있었다. 멀리 논밭에서는 봄 농사에 한창인 농민들이 괭이질을 하며 밭고랑을 치고 있었고, 그 옆으로 한 탁발승이 논둑을 타고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한 유생이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저 스님은 어찌 봄인데도 밭도 갈지 않고 저렇게 유유히 비켜갈 수 있단 말이오. 겨울엔 베도 짜지 않았으면서 장삼을 입고 있지 않소. 군주도 백성을 위해 밤낮을 정사에 힘쓰는데 누구는 한가하게 상전노릇을 하고 있으니.”
“고려 왕조가 쇠퇴한 이유가 아니겠소. 저들은 인륜도 없고 군자의 도리도 없어서 부모와 연을 끊고 군주도 나라도 업신여기지 않소.”
한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에 반전이 일었다.
“너무 가혹한 평이외다. 저들도 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기는 우리 유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소. 마음을 닦는 수련은 우리가 더 귀감을 삼을만하오.”
“그렇소. 불가의 방외적(方外的)인 삶은 유가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유사하오. 선도(禪道) 높은 고승들은 국정에 조언을 하며 정사를 돕고 있소. 사대부들 주변엔 늘 시승(詩僧)들이 벗이 되고 있지 않소. 외침이 있으면 호국을 위해 저들도 장삼에 피를 묻히지 않소이까.”
“모르는 소리요. 겉보기엔 유불이 같은 학자의 길을 걷는 것 같아도 뿌리가 아예 다르지요. 석가모니가 우리의 조상이 아닐진대 선조를 모시는 유가와 어찌 유사할 수 있단 말이오. 수천 년 전의 불경이나 베끼고, 그걸 산속에서 외고 또 외니 시대에 뒤지고 백성들의 산업생활은 외면하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 평생을 백성들의 공양만 받는 폐해가 이미 고려 말에 심판을 받지 않았소. 부국강병은커녕 나라가 기울지 않았소. 금불상에 염불만 한다고 쌀이 나옵니까, 옷이 나옵니까.”
“맹자님이 말씀하시길 ‘유교와 다른 이단 사상을 유포한 양주와 묵적과 같은 무리를 배척할 만한 말을 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성인의 무리’라고 하였소. 주자께선 ‘불씨의 해악이 양주와 묵적보다 심하다’하였소. 조선의 건국도 바로 탁상염불을 배척하고 현실에 충실한 유학이념을 세우는 것이오.”
“말이 나온 김에 이번기회에 유학 내에서도 선을 그어야합니다. 천지의 이치를 배우는 성리(性理)와 시문을 다루는 문장(文章)이 격을 달리해야한다고 생각하오. 성리는 천지의 이치를 다루고 인간의 치도를 펴는 심오한 학문이지만 문장은 단지 풍류에 치중하여 불가와 같이 방외적인 삶을 동경하며 부추기고 있소.”
불가와 유학은 조선 건국부터 일치감치 등을 돌린 터였다. 게다가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도학파(道學派)와 시가와 문장을 중시하던 사장파(詞章派)도 이때부터 갈리기 시작했다. 도학파는 원칙과 법제를 중요시한 관료 지향적이었다. 시화(詩畵)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첫째 품성은 아니며 풍류 때나 요긴한 부수적인 것이라고 하대하는 경향이 짙었다.
“직계 조상을 말하지만 단군 이래 조선족인 내 나라 역사를 도외시하긴 유불이 마찬가지요, 백성을 말하지만 해탈자나 군자 모두 보리 고개에 울고 있는 백성들의 원성을 초월했으니 방외자이긴 마찬가지지요, 수천 년 전 경전이나 수백 년 전 경전이나 책장만 넘기는 일을 따라 하긴 매 한 가지이지요.”
좌중은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일제히 한 사람에게 눈길이 모아졌다. 남들보다 나이도 적고 덩치도 단신인 김시습이었다. 그는 날이 선 말을 이었다.
“중화의 성리를 암기하고 당송(唐宋) 8대가(大家)의 시문을 숭상하고 이들의 문체까지 따라하려 애쓰니 또한 두 방면(도학파와 사장파) 모두 경쟁적으로 사대적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방외 야사와 역사서를 탐독했던 시습으로서는 당송이전의 유구한 조선족의 역사와 중화를 압도 했던 찬란한 문화가 잊히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어허, 오세도령은 말이 지나치시오. 우리는 학당 교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학동들이오. 어느 길이 더 군주와 백성을 위하는 길인지 배우고자하는 학동들의 열기에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소.”
“군주와 백성이 아니라 자신의 벼슬을 위한 길이겠지요.”
좌중은 허를 찔린 듯 아무 말 없었다.
성균관 생활을 할수록 시습은 바늘방석이었다. 벼슬하지 않는 학문은 곧 무능 취급받는 세태였다. 초반부터 유명세 때문에 주위는 늘 높은 벼슬을 기대했다. 학문은 좋아했지만 벼슬은 내키지 않았던 시습. 유생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천연덕스럽게 읊조리지만 오직 출세에 매달렸다. 시습은 벼슬보다 차라리 학자나 훈장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시대엔 학자나 훈장도 벼슬의 일종일 뿐이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도가와 불가를 흡수하지 못하고 배척하면서 유가는 빗나가기 시작했다. 도가와 불가를 배척했던 이유인 틀에 박힌 경전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화함에 있었는데, 유가가 다시 또 그 전철을 따르려는데 시습은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명나라를 아예 황국으로 떠받드는 국풍에도 적잖이 속이 뒤틀렸다.
제3화 설잠(雪岑)
3화 세 번을 묻다(1)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15세가 되던 해, 시습은 성균관을 떠났다. 성균관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모친상 때문에 떠날 줄은 몰랐다. 모친은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시습의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별세하고 만 것이다. 지척에서 부고를 접하게 된 시습은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강릉에는 외가의 농장과 선산이 있었다. 이곳에서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시습은 초막을 손질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태백준령의 산마루에 백설이 장엄하고 동해의 해풍은 부드러웠다. 밤이 되니 머리위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아, 이토록 크고 많은 별이 매일 머리위에 있었다니.” 시습은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던 관동리 생활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시습은 도가(道家), 불가(佛家)와 달리 유가(儒家)는 현실에 충실한 장점이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모친상을 당하고 나서는 회의를 품게 되었다. 성균관에 쌓인 몇 수레의 서적도 인생의 허무함에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서적의 용도가 의심되었다. 그는 유학 전반에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한 겨울을 난 시습은 시묘살이로 부쩍 쇠약해져있었다. 살구꽃이 지고 어스름한 그믐밤, 시습이 초막의 문을 단속하려는데 저쪽 숲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희끗한 그림자가 어렸다. 몸이 허해 헛것을 본 것이려니 하면서도 두려움을 물리치려 소리쳤다.
“뉘시오. 이 밤에 누가 찾아오셨소.”
잠시 망설이던 그림자가 초막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시습은 얼른 허리춤의 칼을 손으로 더듬었다.
“오세 도련님. 지구먼요.”
시습은 사내의 음성에 귀신은 아니구나 싶어 안도하면서 횃불을 댕겼다.
“아니, 넌 덕쇠 아니냐? 관동의 덕쇠!”
“예 맞습니다요. 도련님, 목소리 좀 낮추세요.”
몰골을 뜯어보니 심상치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며 다 헤진 저고리, 사람을 경계하며 휑하게 들어간 눈두덩을 보니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얼른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저희는 관군에 쫒기고 있구먼요. 아버지는 죽었구요, 지 말고도 어머님과 두 동생이 저 숲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요.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저희 식구 피신할 곳 좀 마련해 주십시오. 어머님이 먼 길로 병이 드셨는데 탕재는 고사하고 밤이슬 피할 곳이 시급하구먼요.”
“어찌 이리되었느냐. 일단 들어오너라.”
달포 전, 관동리 근처 장터. 소 망치잡이 장쇠는 헛간 구석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장쇠가 기생 향월이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야유, 서방님도. 급하기도 하셔라. 방앗간도 아니고 행인이 빈번한 장터에서 옷은 다 벗겨서 뭐하시게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몸짓은 치마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돌아서 잘록한 허리를 뽐냈다. 헛간 틈으로 스며든 햇살에 향월이의 아랫도리 윤곽이 그대로 들어났다. 속 고쟁이도 입고 있지 않았다. 장쇠는 발정 난 수캐처럼 향월이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뽀얀 먼지가 일었다. 향월은 단내 나는 신음소리를 막고자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따라붙은 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장쇠는 기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양반들의 허세에 찬 입담을 상대하던 기녀들에겐 저돌적인 장쇠는 일종의 별미였다. 화대까지 양반들 보다 후했기에 고기를 대주러 오는 날이면 기녀들은 ‘고기 맛은 사내 살맛이 최고’라며 서로 장쇠를 차지하기위해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상것을 상대하는 기방이라고 소문이 돌면 사대부들의 발길이 끊기기 때문이다. 풍류와 남녀상열지사에도 위아래가 있었다. 그래서 도둑 정사를 위해서 장쇠는 이렇게 기방을 벗어나 보리밭, 방앗간, 헛간을 전전해야 했다. 장쇠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사대부들이 애지중지하는 기녀들이 자기 허리 아래 깔려서 신음을 토하는 소릴 들으면 왠지 우쭐해졌다. 그래서 굳이 사대부들이 드나드는, 그것도 총애를 받는 기녀들만 꼬여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향월이의 단골은 이웃 고을 수령이었다.
향월에게 마음을 빼앗긴 수령이 향월이를 관기로 들어앉히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지만 향월은 뛰어난 미모에 젊고 인기가 높았으므로 관청 수절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관기는 퇴물이나 가는 곳이라며 매번 수령의 청을 거절했다. 그럴수록 수령은 더 애가 탔다. 관청에서 잔치가 벌어지던 어느 날, 수령은 향월이를 시기하던 한 관기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나리, 저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사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저자거리에 사또를 비웃는 소문이 횡횡하더이다.”
“어허, 무슨 말인고!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아뢰라.”
“제 입에 담기 민망하옵니다만.....한 고을의 사또가 상것하고 동서지간이라고 사람들이 놀려댑니다.”
향월이와 장쇠와의 관계를 귀띔했다. 발끈한 사또는 진위를 알기위해 향월이에게 미행을 붙였던 것이다.
뒤를 밟았던 자가 지금까지 본 것을 보고하고 엽전 몇 닢을 받아 굽실거리며 물러갔다. 헛간의 정사를 전해들은 사또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사또는 벼루를 집어던졌다. 벼루가 먹물을 튀기며 산산조각 났다.
‘내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매일 구걸하다시피 한 자신은 따돌리고 천하의 상것과 배를 맞추다니. 내 이 장쇠놈을 요절을 내고 말리라.’
그렇다고 군자가 남녀상열지사에 드러내놓고 얼굴 붉힐 수는 없었다. 사또는 향월이가 장쇠 때문에 자기를 멀리한 거라고 여기고, 장쇠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는 장쇠와 도축과 관련해 이권에 얽힌 민원인을 조작해 기어코 곤장 틀에 장쇠를 엎어놓고 말았다. 사또는 곤장 50대면 장쇠가 초죽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건장한 장쇠가 매질을 꿋꿋이 견뎌내자 사또는 그 자리에서 죄목을 추가하여 아랫도리의 피와 살이 곤죽이 되도록 내리쳤다. 장쇠는 피를 너무 흘려 이튿날 옥사하고 말았다.
덕쇠는 관군으로부터 피투성이가 되어 가마니에 말린 아버지의 시신을 전해 받았다. 덕쇠는 시신을 땅에 묻으며 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놈의 벼슬아치들. 두고 봐라.”
사또가 흥청거리며 기방을 나서는 야밤, 덕쇠는 사또를 미행하다가 기어코 등에 칼을 꽂고 말았다. 사또의 일행이 칼을 빼들고 가로막자 그들마저 찔렀다. 이때 덕쇠도 덤벼드는 일행에 왼 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덕쇠는 관군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대관령을 넘은 것이었다.
3화 세 번을 묻다(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김시습 시묘 초막에 밤늦도록 호롱불이 가물거렸다. 덕쇠와 모친, 두 어린 동생이 좁은 초막 거적 바닥에 짐 보따리처럼 너부러져 있다. 노구의 덕쇠 모친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남편을 잃고 상심한데다가 여독이 겹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덕쇠도 왼 팔깨 부상이 심상치 않았다.
덕쇠 모친은 며칠 못가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습은 덕쇠와 함께 태백 준령 이름 모를 골짜기에 시신을 묻었다. 얼마 후 덕쇠도 팔 하나를 절단해야했다.
덕쇠는 어머니 묘소 옆에 잘라낸 팔을 묻으며 ‘덕쇠는 죽었다’고 말했다. 시습은 ‘우수거사(右手居士)’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우수거사는 동생들을 이끌고 약초 캐는 화전민 촌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습은 한 번 더 상을 치러야했다. 시습을 애지중지하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채 3년도 안 되는 동안 세구의 시신을 손수 묻어야하다니. 그러나 시습이 직접 묻어야할 시신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이때까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2. 도에는 이름이 없다[道本無名]
1452년 여름. 시습은 모친상을 마치고 상경했다. 의지할 곳 없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니 망막했다.
열다섯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자랐지만
할머니도 곧 땅으로 돌아가시니
살아가는 일이 홀연히 쓸쓸해지는 구나.
인간의 생사를 푸는데 기성 학문에 갈증을 느꼈다. 게다가 시묘살이 병을 얻었으니 심신의 치유가 시급했다.
시습은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에 초여름 대나무가 하늘로 힘차게 뻗어있었다. 안개 낀 대숲 사이로 송광사(松廣寺)가 산수화처럼 신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습이 송광사를 찾은 것은 ‘준상인(俊上人)’이라 불리는 불가 선문(禪門)의 고승(高僧)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준상인은 호남의 은둔지에서 서 너 해 동안 석장을 머물다가 도력(道力)이 경지에 이르자 팔도를 두루 유람하였다. 그의 명성이 알려져 흠모하는 이가 많았다.
준상인이 한양에 당도하자 이름난 재상과 사대부들이 앞 다투어 교화를 청했다. 조선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이 한창 독이 올랐던 때라 궁궐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다. 일부 관료들은 아직도 여전한 불가의 위세를 확인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 준상인에 송광사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시습은 발길을 재촉했다.
시습은 윗암자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준상인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과연 용모와 풍채에 도골(道骨)이 뚜렷했다. 시습은 매일 윗암자를 드나들며 선도의 오묘한 이치에 흠뻑 빠졌다.
시습이 준상인에게 물었다.
“사람에게 왜 번뇌가 일어나는지요?”
“번뇌가 고통이며 불필요한 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번뇌도 필요한 것입니까?”
“저 활짝 핀 꽃을 보아라. 꽃만 보이느냐?”
시습은 어리둥절했다.
“열흘 뒤에도 저 꽃이 꽃이더냐?”
“그때는 이미 다 지고 없겠죠.”
“오늘의 꽃은 어제는 땅 속에 씨앗이고, 내일은 낙엽이다. 꽃은 낙엽의 번뇌니라.”
시습은 골똘히 생각했다.
‘여름이 있으니 겨울이 있듯이, 태어났으니 죽는 것이다. 죽지 않은 것이 삶이요, 살지 않은 것이 죽음이다.’
“번뇌가 있으니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까?”
“번뇌를 내 눈앞에 가져와 보거라. 내 손으로 한번 만져나 보자.”
“.......”
“번뇌는 인과(因果)의 그림자니라.”
시습은 명상에 들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이 붙여진 모든 것은, 자기가 생각하여 규정한 모든 것은 단지 일개의 시각(視覺)에 불과하다. 그 시각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그 무엇(眞如)’이 가려진다. 진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분석하지 말고, 논리로 습득하지 말고 오직 직관(直觀)해야 한다. 그래야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다....발가락도 다리이요, 발바닥도 다리요, 발등도 다리다. 세상에 도(道)가 있다면 절 안에도 있고 절 밖에도 있을 것이요, 궁궐에도 있고 저자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시습은 번뇌를 피하려 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현재의 과보가 어디에서 왔건 모두 자신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파도와 맞서 싸우려는 사람처럼 우둔한 자는 없다. 인생은 어차피 번뇌의 파도다. 배를 향해하듯 번뇌를 요령 있게 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항해사는 바로 나 자신이다. 비록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시습은 도가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황정경(皇庭經)>,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을 깊이 탐독한다. 하지만 경서에만 치우친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아니었다. <손자(孫子)>와 <오자(吳子)>같은 병법서를 익혔고, 검술도 연마했다.
도덕정치만 표방하다가 외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강한 군대가 요청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시습이 송광사에 머무르는 동안 임금이 바뀌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몸이 허약했다.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성균관 동창 안신(安信)이 시습에게 기별을 보내 상경을 채근하였다. 조만간 식년시(式年試:정기적인 과거시험)가 있고, 새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증광문과가 베풀어질 것이며, 또한 소과생원시도 증광시가 있을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심신을 추스른 시습은 다시 한양 길에 올랐다.
종일 짚신 신고 발길 가는 대로 따르니
한 산봉우리를 넘으며 또 한 산이 푸르도다.
마음은 생각이 일지 않으니[心非有想] 어찌 눈앞의 형상에 휘둘리며
도는 본래 이름이 없으니[道本無名] 어찌 이를 빌려 이루랴.
밤이슬 마르기 전에 산새들 지저귀고
봄바람 끝없는 속에 들꽃이 환하더니
지팡이 짚고 돌아가니 일천 개의 산봉우리가 고요하며
푸른 벼랑에선 저녁 안개 어지러이 일어나네.
3화 청한자(淸寒子)라 부르라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시습이 한양에 올라왔던 말에 성균관 학동이었던 안신, 지달하, 정유의, 장강, 정사주 등이 자리를 마련했다. 뭔가를 시습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가?”
“문방사우(文房四友)일세.”
“자네도 이제 과거를 봐야할 것 아닌가. 이제 삼천리를 유랑하는 ‘거자(擧子)’는 거두고 나라의 기둥이 될 때가 온 게지.”
“암, 실력을 보여주라고. 동방의 공자가 시험관들의 코를 한번 납작하게 만들어주라고.”
모두 한바탕 웃으며 누군가 자져온 귀한 약주를 나눠마셨다. 그러나 시습은 시큰둥했다.
“이보게들. 내가 한 가지 묻겠네. 공자와 맹자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공부했었는가? 과거급제하기위해 글을 읽었다던가?”
“.........”
“내가 송광사에서 한양길을 타고 오며 내내 고심해보았네. 이제 나를 ‘청한(淸寒)’이라 불러주게.”
‘청한’이란 맑다 못해 차다는 뜻이다. 조정에 들지 않고 야인으로 청빈한 생활을 하겠다는 것. 자신은 자유 분망하고 덕행이 없어 입신하면 역사에 남을 탐관오리가 될 거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창들이 한소리씩 해댔다.
“또 고집을 부리는구먼.”
“벼슬길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버티나. 과거 응시가 속물들이나 하는 일이란 뜻인가?”
“성현들의 귀한 학문을 읽혀 한낮 음풍농월에 안주로 삼는다면 곡간의 쥐와 같은 도적과 다를 바 없네.”
“정 그렇다면 동방공자가 아니라 청한자(淸寒子)로 불러주겠네.”
그러나 시습을 과거장으로 끌고 간 것은 이러한 대의명분이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전진충이라는 자가 시습에게 과거장에 진풍경이 많이 연출된다고 하니 한번 구경이나 가보자는 소리에 따라나섰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시습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일찍이 남들로부터 신동소릴 듣고 자랐는데 과거에 낙방했다는 소문이 돌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시험과 인생학문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지만 한편으론 인재들이 모여 한판 자웅을 겨루는 시험장에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동창 중 몇 몇이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기 싫어하는 시습은 서책을 싸들고 삼각산 중흥사(中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청한자는 겸손의 겉치레가 아니었다. 평생을 처자(處子)로 살아가야하는 시습의 앞날을 예언하고 있었다.
한편, 성균관 유생들이 출세 길을 모색하는데 분주한 동안 조정에서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세종 말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알력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어린 단종이 임금이 되자 더욱 세를 넓혔다.
지난날 꿈에서 보았던 ‘포원’의 풍광과 같은 곳을 발견했다며 안평대군이 그곳에 무계정사를 열고 큰 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문정 원년 혜빈 양씨가 밀계(密啓)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계정사는 곁가지의 용이 일어날 땅이라며 안평대군의 아들 의춘군이 장차 왕이 될 자리를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김종서 일파가 안평대군과 유대를 맺고 있었고 문신들은 벌써부터 안평대군에게 자신을 ‘신하’라고 칭했다고 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안평대군이 민심에 아랑곳 않고 창덕궁의 인정전을 보수하는 대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이 흉흉한 때, 이틈을 노린 수양대군이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 아들을 강화도에 안치하였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거사가 어린 어린 군주 단종을 보위하고 국난을 바로잡기위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습도 이 사건에 대해 벼슬을 얻으려고 권세 있는 집을 드나드는 무리들에게 충절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본보기라고 생각했다. 시습의 스승이었던 이계전이 계유정난에 가담했기에 그의 성품으로 보아 반드시 타당한 정황을 따랐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계전은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하여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라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양대군은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단종을 윽박질러 왕위를 승계 받아 세조가 되었다(1455).
경복궁 사정전. 세조가 정난의 공신들과 후손들을 대대적으로 불러 놓고 큰 잔치를 벌였다. 그날 창덕궁에서 상왕이 된 단종을 불러놓고 왕위 승계식을 마친 후였다.
“목숨을 걸고 짐의 뜻을 따라준 여러 공신들에게 다시 한번 그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오. 오늘 맘껏 취하고 맘껏 드시오.”
세조가 친히 공신들에게 돌아다니며 일일이 술잔을 채워주었다. 세조는 이미 술이 과하여 뒤뚱거리며 내관들의 부축을 받았다. 세조가 이계전에게 술을 따랐다. 하지만 취기에 손이 어긋나 술병을 떨어드리고 말았다.
“전하, 오늘은 너무 과했사오니 침소로 드시고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후일? 네놈이 감히 짐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냐? 후일을 도모한다고?”
세조는 비틀거리며 이계전의 상투를 휘어잡았다. 흥겨웠던 연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놈을 틀에 묵어 곤장을 쳐라.”
왕명에 이계전이 뒤뜰로 끌려 나갔다. 이계전은 기가 막혔다. 많은 공신들과 후손들 앞에서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망신을 당하다니. 목숨 건 모반에 가담해서 살아남았건만 연회자리에서 죽는구나 생각하니 한 숨이 나왔다.
신숙주가 세조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이대감이 무뢰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오나, 오늘 자리가 성왕의 덕을 기리는 자리인 만큼 아량을 베푸시옵소서.”
“허허허. 내가 취해 보였느냐. 이계전은 나의 거사들 적극 도운 공신이기는 하나, 나의 집권을 극구 반대했던 이개의 숙부이기도 하다. 행여 불순한 의도를 품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오늘 참석자들에게도 널리 엄포를 놓기 위함이었다. 이제 이계전도 다른 생각은 못하겠지.”
3화 청한자(淸寒子)라 부르라(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곤장을 맞은 이계전이 연회장 앞으로 끌려나왔다. 남루한 꼴의 이계전. 좌중은 잠시 술렁였다. 다들 감히 입은 벙긋하는 자는 없었지만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흉흉한 꼴을 보게 되다니’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혹시나 잔칫상에 이계전의 목이나 떨어진다면....세조의 다음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세조가 좌중에 선포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장(魔障)이 끼는 법. 짐의 액땜을 대신할 충신을 찾고 있었소. 이계전은 앞으로 들라.”
손수 이계전의 포박을 풀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너를 이 자리에서 좌익공신의 높은 등급에 두려 하노라.”
세조의 급반전에 이계전을 비롯해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세조는 자신에게 충성한 자에겐 부귀를, 불손한 자는 제아무리 측근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처단할 것이라는 경고를 이참에 분명히 한 것이다.
이 무렵 시습은 중흥사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벼슬보다도 과거장에서의 망신을 만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겁지겁 탁발 나갔던 젊은 승이 당도했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시습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양 소식 아시오?”
“한양소식? 뜬금없이 무슨 소식 말이오?”
젊은 승이 시습의 애를 태우듯 몇 번 재촉을 받고 서야 헛기침을 하고 시습의 귀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에게 농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진정 헛소문은 아닌 게지요?”
수양대군이 기어코 단종을 쫒아내고 만 것이다. 시습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따져 묻자, 젊은 승이 찔끔하며 심문 당하듯 공손해졌다. 한 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시습. 갑자기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젊은 승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마침 공양간 보살이 부엌에서 나오다가 이 모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시습은 방문을 내려오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않았다. 스승을 모시고 군자로서의 덕을 함양하고 도덕적 실천을 존중함이 유가사상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대쪽 같던 스승 이계전마저 수양대군을 말리지 못하고 굽실거리며 벼슬살이를 하다니.
세조의 왕위 찬탈은 인의왕도(仁義王道) 가치관을 통째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제 조선 왕조는 힘과 모략이 창궐하는 패도(覇道)의 세상이 된 것이다. 시습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벌써 사흘째 식음을 전폐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저렇게 통곡만 하고 있다우.”
머리에 수건을 두른 공양주 할매가 걱정의 눈빛으로 모여있는 중흥사 승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 앞에 시습은 무릎을 꿇었다. 과거장을 기웃거리고 장원을 하겠다며 서책을 외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시습은 문을 열어젖혔다. 책을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서책이 수북이 쌓였다. 등잔의 기름을 붓고 불을 놓았다. 주위에서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습은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려 춤추듯 마당을 빙빙 돌았다. 스님들이 달려 나왔다.
“저런, 드디어 실성을.....”
땅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시습. 그리고 해우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 동안 기척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던 승들은 얼른 해우소 문을 열었다. 시습이 변을 뒤집어쓴 얼굴만 똥통에서 내밀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절간 사람들은 저마다 시습이 미쳤다며 안타까워했다. 시습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시습의 친구인 송간도 단종이 영월로 쫓겨 간 뒤에는 세상 인연을 끊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저자거리를 돌아다녔다.
4. 단종을 복위시켜라(1)
시습은 삼각산을 나와 홀연히 동북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철원 사곡촌(沙谷村)으로 초막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초막동에는 조상치와 박계손 일가가 모여 살고 있었다.
조상치는 목은 길재의 문하생으로 단종 때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그를 예조참판으로 임명했으나 사작하고 은거한 인물이다. 박계손은 한때 병조판서까지 지냈지만 세조가 즉위하자 부친을 비롯한 일가가 초박동으로 들어와 백이․ 숙제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고쳐 숙손(叔孫)이라 부르며 은거하고 있었다.
시습은 초막동을 찾아 서로를 위로하며 통분함을 삭였다. 이곳을 나가지 말자며 서로를 위안하고 흙을 일구었다. 하지만 시국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느 날 한성에서 은밀한 손님이 찾아왔다. 성삼문이었다. 김시습, 조상치, 박계손, 성삼문이 호롱불에 둘러앉았다.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이 최근 궁궐의 소식을 전했다.
“공신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세조의 찬탈을 옳다고 여기는 이가 없소. 하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소. 세조의 위세에 눌려, 공신들도 감히 직언을 피할 정도요.”
“단종께선 안위하신지요. 어린 나이에 얼마나 심려가 크셨겠소.”
침묵이 감돌았다. 성삼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심상치 않습니다.”“낌새라니요?”
“얼마 전 수양대군에 반대하던 함경도 절제사 이징옥의 거사를 잘 아시지요. 수양대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세조도 신하들이 자신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지금도 늘 상왕(단종)의 주위에 이 삼중으로 감시자를 배치하고 매일 동향을 보고 받고 있소. 눈에 가시로 여기는 듯 하오.”
“어허, 세조는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그렇게 많은 피를 보았으면서도 아직도 칼을 놓지 않고 있다니.”
시습이 충혈 된 눈으로 말했다.
“모두 조선왕조 건국의 업보요.”
제3화 단종을 복위시켜라(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발문=김질은 모의가 발각된 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궁궐에 있던 정창손에게 달려갔다.
모두 시습을 응시했다.
“태조가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 이미 많은 목숨을 제물로 삼지 않았소. 후대 왕조가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게요. 피의 역사가 반복될까 심히 우려되오.”
“충절을 맹세한 신하의 도리로서 왕도의 정치를 보필하지 못한 신하가 길게 살 생각을 어찌 하겠소. 도리를 모르는 인간 백정 같은 자들에게는 성현의 도리는 씨도 먹히지 않소. 칼에는 칼로 맞서는 수밖에요.”
성삼문의 비장함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좌중을 과격해진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박계손이 찬찬히 논했다.
“패도를 일삼은 세조와 똑 같이 패도로 제압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소. 패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그때 상왕(단종)께서 다시 복귀하시면 되지만, 만약 섣부른 일을 벌이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세조는 그 일을 핑계 삼아 상왕의 목숨을 노릴 것이오. 보다 신중해야할 것이오.”
성삼문이 작심한 듯 급진 의견을 냈다.
“백이.숙제의 충절은 역사에 남았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소. 세조는 장차 더 많은 피를 부를 것이요. 차라리 가장 피를 적게 보기 위해선 세조의 피만 보면 끝입니다. 여전히 민심은 상왕의 복귀에 있으니, 세조만 꺾는 다면 대세는 신속히 정리될 것이오.”
시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속세를 등지기로 한 마당에, 기염을 토하는 성삼문이 앞에 있다고 하나 큰 동요가 없었다. 일을 치르려면 빨리 날카롭게 신속하게 최소한으로 감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 해 6월, 창덕궁에서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가 성대하게 벌어질 예정이었다. 세조로서는 이징옥의 반란 사건도 있고 해서, 명나라의 심중을 잡아야했다. 모든 신하들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대내외 적으로 과시가 절실했다. 그래서 지방의 모든 문무백관들까지 모두 불러올렸다.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집현전 학사들과 무인 성승, 유응부, 김질 그리고 단종의 외숙 권사신은 이때를 노렸다. 명나라 사신 눈앞에서 왕도의 이름으로 패도 세조를 처단한다면, 그 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을 것이라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수일 전부터 대궐은 연회 준비로 음식, 자재를 나르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거사에 직접 나설 자는 칼을 차고 왕을 모시는 별운검(別運劍)이었던 박쟁, 성승(성삼문의 부친), 유응부였다.
세 명은 북적이는 연회 준비를 틈타 은밀히 모였다. 성승이 입을 열었다.
“이것을 칼에 바르시오.”
다들 성승이 전해주는 호리병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극약이오. 피만 나도록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을 수 있는 맹독약이요. 제조상궁을 통해 간신히 구한 것이외다.”
“상궁은 믿을 만 한 자겠지요? 만약 한 마디라도 센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소.”
덩치가 큰 박쟁이 마른 침을 삼키며 채근하자,
“뭐가 그리 걱정이오. 의의는 하늘이 돕는 법. 천우신조만 있을 뿐이요.”며 유응부가 담담하게 위로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광연전 연회자리.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무희들과 악사들이 동원되었다. 세조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공신들을 빠짐없이 배석하라는 명을 내렸다. 게다가 공신들이 가신들까지 대신들의 옷을 입혀 지방 관리로 둔갑시키라는 명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광연전의 자리가 비좁아 모두 들어설 수가 없었다. 사신들의 보필자가 이 광경을 보고 사신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사신들은 ‘자신들을 위한 연회이니만큼 주위에는 임금과 무희들만 들게 하라’고 오만하게 세조에게 호통을 쳤다.
세조를 비롯해 대신들이 긴급히 회의를 열었다. 세조가 난감한 표정으로 방도를 구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이렇게 자리가 좁을 줄이야....”
신숙주가 아뢰었다.
“전하. 자리를 간소하게 한다 하여도 전하의 위용은 사신들에게 이미 충분히 인지시켰나이다. 사신들의 간청대로 연회장 주변은 간소히 하고 신하들은 대문 밖에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는 수 없이 세자의 자리가 거두어졌고, 무신들도 대문 밖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때 별운검도 입석이 취소되고 말았다.
모의자들은 망연자실했다. 하늘이 돕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래도 다행히 거사가 발각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이란 자는 별운검의 입석이 취소된 전말을 전해 듣지 못한 터였다. 김질은 모의가 발각된 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궁궐에 있던 정창손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호랑이에게라도 쫒기는 듯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지 않은가?”
“저....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김질은 모의 전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뭐라고!”
정창손은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깊은 시름을 토했다. 정창손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발각 난 것이라면 혈족으로서 역적의 화를 면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의금부가 조용한 것으로 보아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비대장에게 달려갔다.
연회는 신속히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의금부의 발길이 바빠졌다. 이미 가담 주동자들 대부분이 입궐한 상태였기에 급할 것은 없었다. 단지 식솔들을 연행하기위한 기병대가 소리 없이 출동하기 위해 분주할 따름이었다.
단종을 복위시켜라(3)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사신이 궐 밖 숙소로 돌아간 후, 궁궐에서는 비명소리와 살타는 냄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의금부가 모의에 가담한 자들을 취조하느라고 밤새 횃불을 밝혔다.
관련자들을 대라며 달궈진 인두가 허벅지와 등짝에 문질러졌다. 성삼문은 꿋꿋하게 기상을 드러냈다.
“수양은 평소에 주공(周公)의 태도를 잘도 인용하더니만, 그 주공도 과연 이런 짓을 했더란 말이냐? 왕도를 외치며 안평대군을 죽이던 자가,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여 왕도를 짓밟았으니, 나는 반역이 아니라 정역을 하고자 함이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내가 저승사자로 심판하러 내려왔느니라.”
하룻밤을 넘기기도 전에 여러 구의 시체가 실려 나갔다. 눈앞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는 장면을 본 수감자들. 고문에도 단숨에 죽지 않는 자신들의 모진 목숨을 원망했다.
죄인들의 목은 잘라서 저자거리에 내걸고 몸체는 토막을 내서 소금에 절여 팔도에 나누어 보내는 효수경중(梟首警衆) 형벌이 내려졌다. 반역이었기에 당사자들뿐 아니라 식솔을 비롯한 삼족(三族)이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사약을 받았고,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어야했다. 성삼문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초연하게 시를 읊었다.
울리는 저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네.
머리를 돌이키니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구나.
황천에는 쉬어가는 객점도 하나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갈거나.
이개도 죽으면서 “사직이 온전할 때 삶도 중요하지만, 사직이 위태할 때는 죽음도 또한 영예로운 법”이라고 일갈했다.
시습은 이때 계룡산의 동학사에 있었다. 사육신들이 항절(抗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시습.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한성으로 달려갔다. 다행이 고초를 당한 그 누구도 연옥 같은 고초 속에서도 시습의 이름은 대지 않았다.
장마철 한성의 하늘색은 회색 핏빛이었다. 을씨년스러워서 대낮 인에도 인적이 없었다. 까마귀 떼가 빙빙 주변을 돌고 있었기에 멀리서도 형장이 어딘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사방은 으슥했다. 부랴부랴 달려온 시습이 멀리서보니 몸체 없이 머리만 꽂힌 긴 장대가 보였다. 그 아래 허옇게 뼈가 드러난 토막 난 사지들이 것인지도 모르게 어지럽게 너부러져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괜한 동정조차 모반의 연루자로 의심받아 의금부에서 취조를 받아야하는 살벌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밭두렁 사이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한 동안 움직임이 없다가 다시 약간 움직였다.
‘멧돼지인가?’ 시습은 긴장해 돌을 집어서 던졌다.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더 큰 돌을 집어 던졌다. 시커먼 물체에 정확히 맞았다.
“악!”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시습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관가에서 시신 수습자와 참배자들을 잡아들인다더니 이 놈이 그 매복조 아닌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꽉 쥐고 잠시 망설였다. 도망갈 것인가, 피를 볼 것인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독이 올라있던 시습은 칼을 빼고 밭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순간 밭두렁에서 누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살려주십시오, 나리!”
평복 차림의 웬 사내가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닌가. 사내 옆에는 지게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사육신을 추모해 몰래 시신을 수습왔다가 멀리서 시습의 그림자가 보이자 밭두렁에 숨어들었던 것. 사내는 궁궐의 문지기였다. 사육신의 절개를 흠모하던 중,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없자 관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목숨을 걸고 오게 된 것이다. 사내는 시습이 관군이 아닌 사실을 알고 깊은 숨을 내쉬고 안심했다.
두 사람은 목만 덩그러니 매달린 장대 아래 엎드려 통곡했다. 이것이 충절의 말로란 말인가. 잠시 멈추었던 장맛비가 다시 서럽게 퍼부었다.
시습은 사내와 함께 시신의 상투에 매놓은 ‘죄인 이름표’를 떼어 내어 주머니에 넣고, 자루에 사육신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담았다. 지게에 자루를 지고 나루터로 향했다. 사내는 주도면밀하게 나룻배까지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장마 비로 불어난 한강은 누런 흙탕물로 소용돌이 쳤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강 건너로 노를 저었다. 나룻배가 물살에 떠밀려 무작정 건넌 곳이 노량진이었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지게를 내려 근처 기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장마철이라 땅이 물러서 쉽게 구덩이를 팔 수 있었다.
“이보게, 나야 홀홀 단신이라 화가 미쳐도 그만이지만, 자네는 먼저 자리를 피하게. 뒤처리는 내가 하겠네.”
사내는 뒷일을 부탁하고 다시 나룻배 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로 이름조차도 묻지 않았다. 그래야 혹시나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더라도 서로 안전했기 때문이다. 시습은 돌을 주워 묘표를 하고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구나. 나는 어떤 과보가 있기에 내 동료들의 머리를 손수 수습해야하는가.....’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사건으로 70여명의 연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인 금성대군도 연루가 발각되어 경상도 순흥으로 귀향을 떠나야 했다. 세조는 즉시 집현전을 폐쇄하였다. 집현전은 세종 때 만들어진 유신들의 중심기관이었는데, 세조에 대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세조는 새로운 신료들을 발탁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했다.
한편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다. 시습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통곡하였다. 그러나 먹구름 덮인 하늘은 여전히 개일 줄 몰랐다.
단종을 복위시켜라(4)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어디서 들었는지 강원에 산골에 백성들이 길가에 줄지어 늘어서 곡소리로 상왕(단종)의 유배 행렬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왕(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는 행렬을 이끄는 수장이 된 금부도사 왕방연은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조는 노산군(단종)을 절대로 말이나 가마를 타게 하지 말라고 왕방연에게 어명을 내렸었다. 단종이 발이 부르트고 피가 흘렀어도 감히 누가 나서지 못했다. 한양을 벗어나 보는 눈이 뜸해지자 왕방연은 잠시 쉬는 틈을 타 자신의 말에 단종을 앉히려 했다. 그런데 군졸 한명이 슬며시 다가와 귀띔을 하는 게 아닌가.
“나리, 우리 일행 중에 도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자가 있습니다. 어명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는 자이옵니다.”
왕방연은 말문이 막혀 ‘어허’를 연발할 뿐이었다.
굽이굽이 돌아 돌아 태백준령은 험악했다. 단종은 고개를 하나 넘을 때 마다 한양 쪽을 돌아보며 눈물을 지었다. 청령포에 다다랐다. 시퍼런 강물 너머에 외로운 섬은 오직 나룻배로만 건널 수 있었다. 단종은 나루에서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왕방연은 멀리 멀어져가는 단종 일행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석양이 진 냇가에 주저앉아 한 동안 멍하니 강 건너를 응시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한탄했지만 운명은 얄궂었다.
단종은 매일 같이 언덕에 올라 한양을 보며 삼배로 날을 시작했다. ‘내 나이 이제 17세이니 언젠가는 분명 돌아갈 날이 있으리라’ 스스로 위로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쪽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 청하나 밤 깊을수록 잠은 오지 않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울음 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지는 달이 비추이고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떨어진 꽃 붉었구나.
하늘은 귀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고.
한편, 유배지에서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한양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세가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았다. 한양을 제외한 지방의 토호들은 여전히 과거 왕실의 권위가 통했다.
한양 궁궐. 세조가 급해 행장을 추스르고 장군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전하, 오늘 순흥에서 올라온 관노에 말에 의하면 금성대군이 대대적인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괘씸한....저번 역모 때도 짐의 아우라서 목숨은 살려주었건만, 이제는 아예 칼을 빼들다니..... 여봐라! 순흥 일대를 포위하고 한 놈도 남김없이 그 고을 역적들을 모두 베어라.”
다음 날, 순흥 사십 리 안에 백성들은 영문도 모르고 참살을 당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고랑 져 흘러내렸다. 금성대군도 돌우물에 갇혀 죽고 말았다.
세조 2년 9월 궁궐. 노산군을 당장 서인으로 강봉하라는 어명을 내린 세조가 그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꿈에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나타났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의 어머니였다. 권씨는 세종 13년에 열 살로서 대궐에 들어와 세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 세자빈은 따로 있었으나 그 후에 세자빈이 덕이 없어 그 자리를 쫓겨나게 되자 권씨가 세자빈이 되었다. 권씨는 딸을 낳았고 세종 24년 아들을 낳았으니 단종이었다. 그러나 권씨는 그 다음날에 산고로 죽고 말았으니 그때 나이 스물 네 살이었다. 현덕왕후는 안산에 묻히었고 그 무덤을 소릉(昭陵)이라고 일컬었다.
현덕왕후가 세조를 엄하게 문책했다.
“네 죄를 알겠는가?”
“……”
세조는 형수의 꾸지람에 몸을 펴지도 일어서지 못하고 벌벌 떨 따름이었다.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이려고 하니 나는 네 자식을 죽이겠노라.”
매서운 눈초리에 세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깼다.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그때 한 궁녀가 급히 뛰어와 울먹이며 아뢰었다.
“전하 동궁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허!”
세조는 멍하니 망연자실해서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세조가 낮에 잠시 졸다가 꿈에 현덕왕후를 보고 또다시 심한 가위에 눌려 몹시 고생하였다.
“고이얀 일이다.”
세조는 현덕왕후를 보복할 생각으로 소릉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소릉에서는 여인의 곡성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허, 어인 일일까?”
“괴변일세.”
마을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하여 서로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곡성은 더욱 크게 들렸다.
“흐, 으으흐 흐, 내 집을 허물려고 하니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이렇게 푸념하며 흐느껴 우는 곡성은 밤이 새도록 들려왔다. 그런 지 며칠 되지 않아 세조가 보낸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소릉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능을 파헤치고 관을 끌어내고자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무거울 수가 있는가?”
“예삿일이 아니야.”
무리들이 의논 끝에 정중히 제를 지내고 다시 관을 끌어내니 이번에는 순순히 나왔다. 이 관을 사나흘이나 그냥 버려두었다가 물가로 옮겨가 아무렇게나 흙을 덮어 버렸다. 그 후로 파헤쳐진 능의 나무나 석재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아무리 갠 날이라도 천둥이 치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곤 하였다. 사람만이 아니고 어쩌다 소나 말이 능 경내에 들어가 석재를 밟아도 천둥이 울리고 비가 쏟아졌다
단종을 복위시켜라(5)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세조 2년 10월. 왕방연이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을 다시 찾았다. 물에 젖은 솜과 같이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간간히 손끝이 떨렸다. 큰비라도 내려 나루가 휩쓸려가길 부처님께 소망하고 소망했지만 허사였다.
대청위에서 단종은 사약을 가지고 온 왕방연에게 소리쳤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어야 된단 말인가!”
왕방연은 몸 둘 곳을 몰라 감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뜰아래 엎드렸다. 아무리 왕명이라지만 죄도 없는 어린 상왕에게 극약을 들이미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대청위에 앉아있는 단종에게 비호같이 뛰어들었다. 사내는 왕방연과 함께 온 한 공생이었다. 세조의 어명을 받아 왕방연을 감시해오던 자였다. 사내 손에는 활 끈이 쥐어져있었다. 재빠르게 활 끈을 단종의 목에 휘감아서 창틈으로 잡아당겼다. 손 쓸 새도 없이 단종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숨이 끊어졌다. 단종은 17세의 한 많은 짧은 생을 그렇게 마감하게 되었다.
공생이 숨이 끊긴 단종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일곱 개의 구명에서 피가 쏟아져 죽고 말았다. 상왕을 모시던 궁녀들도 모두 청령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왕방연 일행은 ‘절대로 단종의 시체를 거두거나 참배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어명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순흥의 참사를 잘 알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행여 화가 미칠까봐 단종의 옥체를 강물 속에 던지고 말았다. 일대에 갑자기 안개가 몰려와 해를 가리며 사방이 어두워져서 대낮인데도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삼일간이나 이런 암흑천지가 지속되자 영월일대 백성들은 생업에도 나가지 못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공포에 떨었다.
한편, 한성부윤을 지냈던 추익한이란 자는 그날도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에게 바치려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평소 단종을 흠모하여 처소에 들러 산머루를 따다가 올리고 자주 문안을 하며 말벗이 되곤 하였다.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단종은 곤룡포에 익선관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추익한이 물었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태백산으로 가네. 그 곳에 머물러야겠네.”
그리곤 홀연히 사라졌다. 추익한은 눈을 비비며 불길한 예감에 급히 단종의 처소에 당도했다. 하지만 단종은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태백산 신령이 된 단종을 따르겠다며 계사폭포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었음을 알고 인근 백성들은 매년 정성스럽게 제를 올렸다.
금성대군이 하직 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습은 얼른 행장을 꾸렸다. 틀림없이 상왕에게도 해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니 몸이 달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피신을 권유하기 위해서 급히 조랑말을 하나 빌렸다.
그러나 충주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비보를 들어야 했다. 시습은 그 자리에서 날이 새도록 곡을 하였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권세가 탐이 난다고 한들 혈족을 무참히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시습은 틀림없이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뛰다시피 영월에 당도했다.
큰물이 지나간 동강은 흔적도 없었다. 청령포에 당도한 시습은 망연자실하여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상왕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개에게 뼈다귀를 주지 마라
개들은 떼거지로 모여 어지러이 다투어서는
자기 무리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주인과도 어그러지리라.
주(周)왕실 높인다며 정벌을 일삼고
한실(漢室)을 안정시킨다면서 어린 황제를 죽이다니
명분을 엄하게 해서
근왕하여 예 갖춤만 못하구나.
시습이 애달프게 흐느끼고 핏빛 낙조가 뉘엿뉘엿 찬바람에 사라져갔다. 한참 전부터 멀리서 시습을 바라보던 한 사내가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 사내는 호장(戶長)을 지낸 엄흥도(嚴興道)라는 자였다.
“내가 계속 지켜보았소만, 노산군에 대한 흠모의 정이 남다르더이다. 지금 시국이 어지러워 이런 모습이 알려지면 그 누구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소.”
시습은 버럭 화를 내며 핏발서린 눈으로 호통을 쳤다.
“당신은 관아의 끄나풀인가. 어서 고하라. 관아에 고해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언제부터 온 백성이 주군의 개가 되어 사냥감을 찾고 있더란 말인가.”
엄홍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시습의 소매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서북쪽의 한 산지였다. 새벽이슬이 축축했다. 땀에 젖은 시습은 더욱 한기가 심했다. 엄홍도가 주위를 살피더니 낙엽더미를 향해 크게 삼배했다. 낙엽을 손으로 긁어내자 돌무더기가 드러났다. 그 돌무더기 아래 단종의 시신이 묻혀있었다.
단종이 죽은 그날 밤, 엄홍도는 개울을 뒤져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물가에 잠겨있는 목에 활줄이 감긴 단종의 옥체를 발견하고는 소리 없이 곡을 했다. 활줄부터 풀고 준비한 수의를 갖추고 이곳에 묻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여잡고 통곡을 했다. 시습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시절이 이러하여 감히 마음대로 곡을 하지도 못하지만, 열흘 가는 꽃은 없소. 틀림없이 다시 복위될 것이니, 그때를 위해 잘 지켜주기 바랍니다.”
시습은 정중히 예를 갖춰 절을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하늘아래 슬픔이 미치지 않는 곳이 게 어디란 말인가.’
태백준령의 하늘은 속절없이 맑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새털구름은 유유히 흘러갔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건만, 하늘은 왜 이리 높고 쾌청하단 말인가.’
정처 없이 발길을 향했다. 산마루에 오르면 쉬고, 계곡이 이르면 물을 시고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흘러갔다. 유일한 벗이 있다며 허리춤에 꿰찬 술병이었다.
찰랑찰랑 잘도 나를 따르는 구나
혈족인들 이렇게 따르겠느냐
하물며 검둥개도 해가지면 제갈 길을 가는데
어이하여 너만은 나그네의 허리춤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초혼각에서(1)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세조 4년 봄. 계룡산 동학사에 전국 각지의 추모객들이 모였다. 단종의 죽음 1년 만에 세조가 동학사에 상왕(단종)과 사육신의 넋을 기리는 초혼각을 이곳 동학사에 짓게 하여 추모를 허용한 것이다. 시습을 비롯해 단종의 피살당시 의관과 궤장을 지니고 산골에 숨어살던 엄홍도, 승려인 명선·월잠·운파, 지사 조려, 전 부제학 조상치, 전 참판 이축, 전 정랑 정지산, 전 동지중추부사 송간 등이 상복을 입고 있었다.
제단에 과일과 어물이 오르고 술이 부어졌다. 어디선가 두견새 한 마리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날아들었다. 마치 상왕이 다시 살아 돌아온 듯 참석자들은 붉어진 눈시울로 두견새에 머리를 조아렸다. 다들 단종의 넋이 깃든 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시습이 제문을 낭독하였다.
물은 맑고 산은 높아 휘영청 달도 중천에 올랐도다.
자유로이 넘나드시는 임금님 영혼이 당도하셨네.
지난날 큰 은혜를 감명 깊이 되새기며
석철을 모방하여 왕의 의관과 궤장을 가져다 사당에 모시나니
회계산에서 우임금에게 올리던 제사 의식을 따랐나이다.
산과일과 개울의 물고기를 올려
이미 지난 가을에 곡하고 지금에야 글 올리어 초혼하오니
예식은 갖추지 못하였으나 의리는 여기 그대로이나이다.
부디 흠향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의 첫 번째 추모가 아니었다. 세조의 어명이 있기 전해 가을에 시습은 한 번의 추모제를 지낸바 있었다. 정국의 서슬이 시퍼런 때라 감히 참배객은 없었다. 돌단을 몇 개 얹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어명이 있고 나서야 이렇게 상왕의 어의와 궤장까지 모셔 조문객들을 모시고 번듯하게 제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제사가 끝나고 둘러앉았다. 시습은 머리를 눈썹 길이로 깎고 시주 승복을 입고 있었다. 조상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열경(시습)의 수고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소. 누가 감히 폭군에게 충언하여 참배할 수 있도록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단 말이오.”
이축이 곡으로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거들었다.
“그렇소이다. 상왕의 어의와 충신의 유골을 오늘에 모실 수 있다니.....생전에 면전에서 뵙는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시습이 겸연쩍어하며 효령대군에게 공을 돌렸다. 효령대군은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임금의 형이었다.
“효령대군이야 말로 오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분입니다.”
수개월 전, 한양에서 시습과 효령대군의 만남은 극적이었다.
참극이 벌어진 직후 김시습이 정처 없이 넋을 잃고 있다가, 불현듯 북방으로 발길을 잡았다. 북방에는 조선의 창건에 불만이 많은 호족 세력이 많았다. 태조가 인재를 등용하면서 북방사람들의 등용을 차별하였기 때문이다. 시습은 그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사서오경의 왕도는 현실에서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힘에는 힘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일대 결전을 벌일 각오였다.
하지만 평양 호족들도 세조의 패도 앞에 주춤거렸다. 시습은 한양의 뜻있는 자들과 연결 짓겠노라며 자청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사대문에 들어서다가 그만 포졸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한양 저자거리에는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다. 사육신의 시신이 없어지고 단종의 시신마저 찾을 수 없자 밤에는 목 없는 시신들이 돌아다니며 세조에 충성하는 권문세가들을 잡다간다거나 원귀들이 꿈에 나타나 조정의 자손들을 위협한다는 이야기가 넘쳐났다. 현덕왕후의 악몽을 꾸고 동궁을 잃었던 세조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를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풍속 중에는 도성 안의 길거리나 냇가에서 만장을 세우고 떡과 과일을 베풀어 승려를 데려와 죽은 혼을 소리쳐 부르는 초혼례가 성행하였다. 항절한 신하들과 단종을 연호하는 곡소리가 저자거리에 가득하자 세조는 이를 금하라는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포졸이 승려복장을 한 시습의 짐을 뒤지다가 제문이 나오자 포박을 했던 것이다. 시습을 알아보지 못한 포졸은 그 제문이 단지 초혼례에 쓰는 것으로 알고 관아로 이송하기 위해 김시습을 포박을 하여 끌고 가던 참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시습이 하늘을 보며 한탄할 때 마침 관청 앞에서 나오던 효령대군과 마주쳤다. 효령대군은 일찌감치 출가하여 승려의 몸이었으나 대궐을 넘나들며 불법을 전파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효령대군은 한눈에 시습을 알아보았다. “내가 있는 사찰의 승려일세.” 라며 포졸을 윽박질러 포박을 풀게 했다.
효령대군과 시습이 주막집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시습은 목숨을 살려준 효령대군에게 여러 번 감사의 말을 올렸다. 하지만 효령대군도 왕족인지라 시습은 거사에 대한 말을 아꼈다. 그러나 효령대군은 핏발이 서있는 시습의 눈을 읽고는 전말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옛날에 세 왕자가 있었네. 세 왕자는 모두 총명하여 누가 왕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지. 그러나 왕실의 법도는 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었네. 첫째 왕자는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지.”
그런데 첫째 왕자는 셋째가 아무래도 왕이 되어야 이 나라가 요순태평 시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책봉된 세자를 물릴 순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꾀를 한 가지 냈다.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보고 개처럼 짖더니 달려들어 허벅지를 물고 만 것이다. 이후부터는 이사람 저 사람을 보고 실없이 웃거나 침을 흘리고 다녀 미친 사람 행세를 하였다가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증세가 점점 심해지더니 이번에는 궁궐 신하의 첩을 데려다 범하기까지 하였다. 총명하던 첫째 왕자가 이 지경에 이르자 세자 책봉을 폐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이 들끓었다.
둘째 왕자는 은근히 왕위를 기대하며 더욱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였다. 야심한 어느 날 둘째 왕자가 글을 읽고 있는데 그 미친 세자가 들이닥쳤다.
“형님이 이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껄껄껄...아우님께서 여전히 서책에 묻혀 사시는 구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신가?”
“예?”
속마음을 들킨 둘째가 머뭇거리자,
“우리 세 형제들 중에서 그래도 셋째가 제일 낫지 않은가?”
미친 세자는 이 말만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둘째는 잠시 멍하니 사라져가는 형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날이 새도록 깊이 생각하다가 훤히 동창인 훤할 무렵에야, 무릎을 탁 쳤다. 얼마 후, 둘째 왕자는 홀연히 산속으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효령대군은 열심히 듣는 시습에게 곡차를 채워주고는 사발의 깍두기 하나를 손으로 집어 질근질근 씹었다. 손가락의 쪽 빨더니 잔을 비우는 시습에게 말을 이었다.
“그 첫째가 양녕대군이시고, 셋째가 충녕(세종)이지. 물론 그 속물이었던 둘째가 나일세.”
“옛? 그것이 진실입니까. 양녕대군께서는 정말 광인이 아니고 광인 행세를 하셨단 말씀입니까?”
5.초혼각에서(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효령대군은 시습의 질문에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흐르는 물을 보게나. 어디 같은 물이 고인 적이 있던가. 두 번 다시 같은 곳을 지나지 않지 않은가. 그래서 늘 비어있다고 할 수 있지. 왕좌도 흐르는 물처럼 늘 비어있는 것일세. 누군가가 채우게 되어있지. 그러니 누가 왕이 되는가 보다,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할세......결국 빼앗은 자나 막으려 하는 자나 모두 왕좌에 목숨 걸기엔 매 한가지 욕심이 아니겠는가.”
이후 효령대군은 세조에게 찾아가 원한의 과보를 씻을 조치를 충고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세조는 불경에 관심을 보이더니 불경간행을 약속했다. 단종의 초혼각도 원혼을 달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일련의 조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시습은 초혼각에 모인 참배객들에게 이러한 효령대군의 말을 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간이 불만을 터뜨렸다.
“인간백정이 변한들 얼마나 변하겠소. 이 초혼각도 백성들이 도성 안에서 초혼례를 지내자 민란을 걱정해서 부랴부랴 조성했다는 소문이 있소.”
“허나 열경의 말도 일리가 있소.”
이렇게 강경과 온건 의견이 오갔으나 딱히 결론은 나지 않고 날이 새고 말았다.
국밥을 한 그릇씩 하고 행장을 꾸려 각자 왔던 곳으로 향했다. 조상치가 시습의 손을 잡았다.
“어디로 가실게요?”
“하늘만이 알겠지요.”
조상치는 시습에게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노자를 건네주고 석별의 시를 주었다.
새 울고 꽃 지고 봄이 저무는 이때
무한한 충정을 풀잎에 적어보네.
이별에 임하여 손 마주 잡고 할말 잊었구나.
구름 따라 물 따라 동으로 서로 흘러가야 하기에.
시습은 헤어지는 조문객들에게 다음 말로 이별을 대신했다.
“저를 앞으로 설잠(雪岑)이라 불러주시오.”
설잠은 시습의 법호였다. 설잠이란 설산(雪山) 즉, 히말라야 산을 뜻하며, <열반경>에서 석가모니께서 과거 세상에 보살의 도를 수행하던 곳을 말한다. 시습이 보살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4화 청광(淸狂)시대
1. 구름 흐르는 대로(1)
눈썹 길이 삭발에 먹삼장을 걸치고 유생처럼 턱수염을 기른 기괴한 모습을 한 시습은 한양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 목적도 두지 않겠노라. 뱁새가 완두콩밭을 맴돌고, 박넝쿨이 나무에 의지해 매달리듯 명리에 근심하고 생업에 급급하다면 어찌 세상을 자유자재로 막힘없이 놀아볼 것인가.’
승려들이 종종 만행을 통하여 도력을 키우는 풍습이 있었긴 하지만 시습은 수행한다는 목적조차 두지 않겠다고 발길을 띠었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호탕한 유람, 깨끗한 놀이라고 일컬었다.
오백년 도읍지 송도(지금의 개성)에 다다라 옛 성터를 돌아보며 불국토였던 고려의 흥망이 어제 일처럼 피어올랐다. 사찰을 전전하며 고승들과 환담하고 민담, 이몽가 같은 명사들을 만사 토론을 하며 단군신화와 기자의 전설이 배어있는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구한 조선상고사의 맥을 끊었다는 것을 개탄하고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에 깊이 공감했다.
시습이 대동강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 포구에 이르자 물을 건널 배를 찾게 되었다. 이미 해가 져서 간신히 눈앞만 구분할 정도로 땅거미가 져 있었다. 마침 저 멀리서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낡고 작은 나룻배가 다가왔다. 시습이 사공에게 부탁을 했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건너 나루까지 건네주지 않겠소?”
사공은 말없이 눈을 끔뻑였다. 자세히 보니 사공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남루한 차림의 어부였다. 게다가 배 안에는 아낙과 아이 둘이 타고 있었는데, 그물에 작은 가마솥이며 잡다한 가재도구가 잔뜩 실려 있는 게 아닌가. 사공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스님, 죄송하오나 이배는 사람을 나르는 나룻배가 아니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저기 매어 있는 배의 주인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란 말이요. 날이 어두워서 그런 것 같은데, 내가 오가는 뱃삯까지 해서 두 배를 쳐 줄 테니 그러지 말고 건네주구려.”
어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누추한 배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요?”
시습은 문제없다며 재촉을 했다. 어부는 아낙과 아이들을 내리지도 않고 시습을 배에 태웠다. 시습은 속으로 엽전의 위력이 참으로 대단한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이 연놈들은 제 식솔입니다요. 스님께서는 나룻배로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이배는 저희들의 집입니다요.”
이어지는 어부의 말에 시습은 움찔했다.
“작년에 관가에서 어세(漁稅)를 종용했었습죠. 그러나 하루 잡아 하루 살아가는 어부가 꼬박꼬박 무거운 세금을 낼 수가 있어야지요. 하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외딴섬으로 들어갔는데 금년에 마을 아전이 알고 찾아와서는 그동안 밀린 세금까지 모두 내지 않으면 배를 가져간다고 음름장을 놓지 않겠습니까요. 당장 배가 없으면 입에 풀칠을 할 수 없고 해서, 초가집과 일구던 텃밭을 모두 팔아 세금을 내고 우리 식구는 이렇게 배위에서 물풀 사이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일행은 어부의 처자식들이었던 것이다. 시습은 얼굴이 화끈거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부 일가가 저녁 끼니를 끓이기 위해 나루에 내리던 참이었는데 시습을 태우느라 때를 놓친 터라, 나루에 내린 시습은 두둑이 뱃삯을 주고 근처 주막에 같이 가서 요기 권했다. 주막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며칠을 굶은 듯 게 눈 감추듯 곡기를 채웠다. 늙은 어부의 아내는 어느 틈엔가 뱃삯으로 탁주 한 병을 대령하여 지아비에게 건넸다. 늙은 어부는 거나하게 취하여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며 식솔들을 태운 낡은 배를 저어 어두운 강물 저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1. 구름 흐르는 대로(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날이 밝자 대동강변은 적막했던 지난밤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포구에선 작은 고깃배들이 그물을 싣고, 멀리 명나라와 마포나루로 떠나는 황포돛배들이 힘찬 기동을 하였다. 먹이를 물어 나르는 일개미처럼 장정들이 부지런히 등짐을 부렸다. 그런데 한쪽에서 웬 여인이 퀭한 눈으로 초점 없이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게 아니가. 여인 옆에 놓인 좌판에 수수엿이 몇 덩어리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서 엿장수인 듯 했다.
정처 없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에겐 언제 끼니를 만날지 모르고, 행여 산중에서 굶주림에 탈진이라도 한다면 생사가 위태롭기 때문에 수수엿은 가장 요긴한 비상식량이었다. 마침 엿을 구하려는 참이었기에 시습은 여인에게 말을 붙였다.
“이것 파는 것이요. 주인은 어디 가셨소.”
시습은 여자가 몸소 엿을 파는 일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엿을 지키는 여인으로 생각했다. 여인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머리를 매만지고 엿판을 가다듬었다. 시습은 여인이 직접 엿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여,
“낭군께서 고기라도 잡으러 가셨수? 그렇게 먼 곳만 응시하고 있으니 말이오.”
여인은 엿을 건네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서방이 고기 잡는 어부라면 내 이런 고생은 안하지요. 태풍이 불어 용왕님이 데려가지만 않는 다면 언제든 돌아오기나 하지요. 언제 올지 모르는 서방이 서방이냔 말이오......내가 눈에 뭐에 씌었었지요. 그런 인간을 믿고 애를 낳고 말았으니.......”
여인은 이렇게 시습에게 넋두리를 시작했다.
그 여인은 양반집 규수는 아니었지만 큰 고깃배를 갖고 있는 넉넉한 집 처녀였고 얼굴도 미인이라 주변 총각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처녀는 그 중에서도 입담 좋고 키가 큰 젊은 상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여러 군데서 중신이 들어왔지만 모두 물리치자 부모는 따로 총각이 있다는 눈치를 채고 말았다. 그러나 상인총각의 평판이 좋지가 않았다. 처녀의 부모는 반대를 했으나 이미 처녀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처녀의 부모는 가슴을 치며 별로 탐탁지 않은 사위를 맞고 말았다.
배를 타고 오가는 상인이라 집을 비우는 날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여인의 친정아버지 탄 고깃배가 풍랑으로 행방이 묘연해지고 친정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런데 서방이란 자는 상주자리도 제대로 지키질 않더니 집에 오는 날이 점점 뜸해지고 수개월 만에 한번 들르는 객이 되고 말았다. 서방이 마포나루에 딴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여인은 포구에서 엿을 팔며 이제나 저제나 서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시습은 좌판의 엿을 웃돈까지 얹어 몽땅 사서는 핑 도는 눈물을 감추려고 총총히 발길을 돌렸다.
시습은 평양을 지나 묘향산의 웅장한 산맥에 감탄하였다. 시습은 희천이란 곳에서 전국토가 모두 아전들의 횡포로 신음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고을에는 논밭은 적어도 마을 곳곳에 뽕나무가 자라 누에를 쳤고, 고을 백성들이 서로 간에 소송을 하는 일이 없이 화목했으며, 관청 뜰에는 곤장소리대신 새들이 한가롭게 지저귀는 모습이었으니 시습은 이곳이야 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탄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습은 광대하고 힘찬 백두대간의 돌아보고 다시 평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평양에서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김수온일행을 만났다. 시습은 김수온을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당대 유명한 승려 신미대사의 아우였다. 그는 세종 때 급제하여 유학을 통달해서 사서오경의 구결(한문 구절 끈에 다는 토)를 정한 바가 있으며, 역사와 시문에도 뛰어났다. 불교를 좋아해서 세종 때 불경의 국역 간행사업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습이 남루한 승려 행색으로 자기를 아는 체 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였다.
“열경(시습)은 어찌 유학을 버리고 이단에 빠진 것은 무슨 마음인가?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이단에서 찾을 것이 아닐세. 유학이 명백하게 불교와 다르다는 뜻을 알려면 ‘논어’와 ‘맹자’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봐야지!”
시습은 옆 사람이 듣지 않도록 다가가 귓속말처럼 넌지시 답했다.
“유가와 불가가 입은 옷은 비록 다르지만 마음을 기른 다는 점에서 매 한가지이지요. 자기 마음을 기르는 방법을 다른 데서 찾을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일상의 일마다 자유자재로 막힌 데가 없어야하는 것이지, 이미 돌아가신 성현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한 경전을 뒤적일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낡은 경전에 본인의 마음이라도 한줄 적혀있단 말입니까?”
얼굴이 벌게진 김수온을 뒤로하고 시습은 밥값이라며 시한수를 남기고 관동으로 향했다.
세인은 눈 흐리고 또 마음까지 뒤숭숭해서
관직 물러나면 진리를 찾아 나서겠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건 당장을 속이는 헛된 잔꾀라 끝내 실천이 없나니
구레나룻 희어지면 늙음이 육신을 침범하는 법.
시습은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을 보고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세월은 절의를 탓하지 않고, 백성들은 관료의 절개를 끼니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절에 무딘 실용적 관료들이 결국 민생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세상에서 자신의 위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송도에서 겨울을 난 시습은 금강산에 와 있었다. 관서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 동안거를 마친 시습이었지만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충절이란 무엇인가’란 화두가 겨우내 장작이 되었지만 관동 유람길 나설 때 까지도 딱히 마음이 후련하지 않았다.
오대산을 지나 대관령을 넘게 되었다. 산딸기와 찔레 순을 꺾어 먹으며 부르튼 발을 차가운 발을 흐르는 물에 담갔다. 도중에 사찰이나 화전민들을 만나지 못하고 바위 틈에서 밤이슬을 맞은 터라 아직도 온몸에 한기가 남아있었다. 그래도 강릉에 가면 아는 얼굴이 있다는 희망으로 가재라도 잡아먹을 요량으로 개울의 큰 돌을 들쳐보았다.
문득 투명한 개울물에 웬 중년의 고된 몰골이 비춰지고 있었다. 밤송이처럼 삐죽한 머리털에 턱수염이 칡넝쿨처럼 산만했고 희끗희끗 새치가 눈발을 뿌리고 있었다. 시습은 돌을 집어 물에 집어 던졌다. 물보라가 가라 않으려 할 때마다 몇 번이고 손에 잡히는 데로 돌을 던져 괴성을 질렀지만 물거울은 깨지지 않고 그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었다.
물에서 나온 시습이 지쳐 가쁜 숨을 몰아치며 하늘을 보고 벌러덩 뒤로 누워버렸다. 여전히 하늘은 청명했다. 바람 따라 흐르는 한줄기 구름이 자기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왠지 뒷덜미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시습은 깜작 놀라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시커먼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1. 구름 흐르는 대로(3)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비천한 나도 극락을 갈 자리가 있습니까? 극락에도 상놈이 양반을 떠받들어야 합니까?
황소만한 수컷 멧돼지가 삐죽 솟은 어금니를 벼리며 앞발을 굴렀다. 시습은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빼들었다. 산짐승에겐 절대 눈싸움에서부터 밀리면 안 되기에 피하지 않고 오히려 멧돼지 눈을 노려보았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던 시습 머리를 처박고 달려오는 놈을 비켜 몸을 날렸다. 간신히 한 뼘 차이로 스쳤다. 시습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런 산중에서 산짐승에게 당해 이름 없이 세상을 뜨는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멧돼지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꼬리를 치켜세우며 앞발을 굴렀다.
“내 운수가 대통하여 오늘은 네놈으로 포식을 하겠구나. 하늘이 몸보신하라고 내린 놈이렷다. 오너라, 이놈아!”
멧돼지가 육중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습이 옆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살짝 허벅지를 치인 것이다. 다리를 움켜잡은 시습이 미쳐 정신을 가다듬지 못할 때 멧돼지가 다시 덤벼들었다.
시습이 칼자루를 꽉 쥐고 마지막 결전을 각오할 순간 갑자기 멧돼지가 ‘꿰엑-’소리를 지르며 요동을 쳤다. 어느 순간엔가 멧돼지 몸통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연이어 화살이 날아들어 머리를 처박은 돼지 몸통을 관통하자 멧돼지는 비틀거리며 붉은 피를 흘리고 사지를 하늘로 향하고 쓰러졌다.
숲 속에서 활 쏜 주인들이 나타났나. 장정이 여럿인데 산짐승 가죽을 두르고 수염이 덥수룩하며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했다. 뒤쪽의 한명이 시습에게 외쳤다.
“나를 몰라보겠소.”
‘이 산중에 나를 아는 자가 있는가?’
시습이 자세히 보니 그는 팔 한쪽이 없는 사내였다. 그랬다. 그는 관동리 시절 덕쇠였다. 부친을 잃고 모친상중에 찾아와 모친과 자기의 팔을 묻었던 외팔이 덕쇠.
“웬 중늙은이가 산짐승에게 설법을 하는 가 했더니, 바로 오세동자, 아니 오세대사가 아니시겠소.”
벌써 십 수 년이 흐르지 않았던가. 덕쇠는 계곡이 울리도록 껄껄 화통하게 웃어 젖혔다.
시습은 덕쇠의 산중 오두막에 머물렀다. 한바탕 벌어진 멧돼지 잔치에 산중은 시끌했다. 산중 오두막은 산적의 소굴이었고 덕쇠는 근방에서 유명한 외팔이 산적두령이 되어있었다. 덕쇠는 술잔을 기울이며 그동안의 지난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동생들은 저자 거리를 전전하다 그만 질병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덕쇠도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당했으나 모진 목숨이라 눈을 뜨면 살아있는 자신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고 술회했다. 다행히 도살간일을 해본 터라 장터에서 일을 도우며 입에 풀칠을 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전들이 널름대는 꼴을 보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에 그만 한 놈을 흠씬 두들겨 패는 바람에 산중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미록 비천한 나도 산중에서 세금을 받아먹고 사는 산상아전 짓을 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나도 극락을 갈 자리가 있습니까? 극락에도 상놈이 양반을 떠받들어야 합니까?”
“허허, 나도 극락을 본 적이 없네. 내 눈앞에 보이는 여기가 극락 아니겠는가?”
밤이 깊어 하늘에 주먹만 한 별이 초롱초롱 했다. 보통은 좌담에서 시습은 유심히 듣고 있나가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일갈을 쏘곤 했지만, 왠지 여기서는 시습이 넋두리하였다. 혼자 있을 때 붓을 놀리며하던 답답한 가슴을 쥐어짜던 넋두리를.
“이상하구만. 여기서는 나보고 왜 벼슬을 하지 않느냐, 유가를 버렸느냐, 충절의 마음은 어디가고 일개의 파계승으로 떠도는냐 그런 질의가 없으니 이상하네. 그런 걸 묻는 벼슬아치들에겐 독한 소리를 쏘아 붙였지만 정작 그걸 묻는 이가 없으니 정작 내가 할 일이 없으니 말일세. 그동안 명리를 비꼬고 말꼬리를 파고드는 재미로 산건 아닌지 모르겠어. 갑자기 자네는 만나니 옛날의 관동리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네. 그동안 왜 이리 변했는가 지난날이 거울에 비추듯 하는 구만.”
덕쇠가 비장하게 제안을 했다.
“내가 스님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기서 저와 대관령을 다스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승려가 수도할 곳이 어디 정해져 있습디까?”
다음날, 시습은 오두막 주변의 땅을 일구었다. 돌을 골라내며 지난 밤의 꿈을 돌이켜 보았다.
뒤에는 높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흡사 궁궐과 같은 높은 성문인 듯 했다. 시습은 이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빠른 발걸음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린지 숨이 턱턱 막혀왔다. 딱히 갈 곳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곳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며 한 발이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동동걸음을 쳤다.
시습은 이런 꿈을 어릴 적부터 자주 꾸었다. 어떨 땐 대갓집 문을 박차고, 어떨 땐 멀리 일주문을 등지고 산기슭을 뛰다시피 도망가는 등 그 흐릿한 배경은 자주 바뀌어도 도망치듯 달려 나오는 그 답답하고 냉소에 찬 심정은 늘 같았다.
사육신과 단종의 참사 몇 달 전후에는 머리가 없고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는 군졸들이 나타나는 꿈이 잦았다. 이 흉몽 시기를 제외하고는 횟수가 줄기는 했어도 도피하는 꿈이 꾸준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달아나는 꿈을 꾼 뒤에는 반드시 머물던 곳을 자의건 타의건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시습은 꿈을 꾼 뒤에는 의례히 떠날 채비를 하였다.
다음날, 시습은 그 위에 무언가를 뿌렸다. 덕쇠가 다가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고 있는 게 뭐요?”
콩이었다. 덕쇠는 오래 머물며 법문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차였기에 아무 말 없이 콩을 심는 시습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씨를 뿌렸으니 거둘 때 까지는 있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이튿날, 시습은 행장을 꾸렸다. 덕쇠는 허를 찔린 듯 투덜거렸다.
“아니 천년만년 살 것처럼 밭까지 일구더니 하루아침에 떠나려는 변덕이 무엇이요? 누가 무례하게라도 굴었습니까? 누가 감히 오세대사에게 결례를 저질렀단 말이냐!”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는 덕쇠를 붙잡고 시습은 조용히 말했다.
“밭을 간 것은 내 밥값을 하려고 소일을 한 것뿐이네. 그리고 산중 아전들도 길러서 수확하는 법도 좀 배워야하지 않겠나. 그게 내 법문일세.”
시습은 덕쇠의 권유를 뿌리치고 산 아래로 향했다. 도저히 시습의 고집을 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덕쇠는 시습의 빠른 발을 쫒아와 산에서 채취한 꿀 동이를 건네고 작별을 했다. 두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만 잡고 있었다.
때마침 이별을 기리는 듯 산새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드렸다. 시습은 불여귀(두견새) 외에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산새소리에 새 이름을 물어보았다. 위수추리, 역막파공, 비비새라고 했다. 시습은 새이름을 한자로 음을 옮겨 멀리 우는 산새들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누구를 위해 명리를 쫓아가느냐?(위수추리:爲誰趨利)
역시나 공을 파악하지 못하였구나(역막파공:亦莫把空)
이제 돌아감만 못하리니(불여귀:不如歸)
이 아니 슬프고 슬프지 않더냐.(비비:悲悲)
2.들고 남은 없으나 오고 감은 있다(1)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불자의 진정한 주군이 누구란 말이오? 석가여래의 대자 대비한 원력은 본래부터 들고 남이 없는 것이오.
세조 9년, 시습이 금오산에 칩거하기 전 책을 구하려 한양의 서점에 들렀다. 누군가 다가와 시습을 아는 채 했다. 돌아보니 효령대군이었다.
“우리 인연은 보통이 아니구먼. 마침 일꾼을 찾고 있었는데 석가세존께서 안성맞춤인 인물을 천거하시는구먼.”
“무슨 일입니까?”
효령 대군은 조카인 세조의 권력을 승인하여 왕실로부터 국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효령대군은 왕실을 중심으로 밀교 성격의 불교를 신앙하는 일에 앞장섰다. 유학을 바탕으로 한 사대부들은 여전히 세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조 또한 유생의 견제를 위해 정책적으로 불교를 적극 장려했다. 세조는 효령대군에게, “석가모니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정도가 비단 하늘과 땅의 차이 정도가 아니다.”라며 공공연히 ‘호불(護佛)군주’임을 자처하였다.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간행 사업과 각종 사찰 중수, 각종 법회를 열어 불사를 일으키고 승려들에게 도첩을 발행하였다.
효령대군은 시습에게 세조의 언해사업을 설명하며 참여할 것을 권했다. 시습은 잠시 망설였다. 비록 벼슬은 아니지만 혈육의 피를 흘려가며 명리를 찬탈한 세조 아래서 일을 하라니.
효령대군이 머뭇거리는 시습을 채근했다.
“열경은, 아니 설잠이라고 하였던가. 설잠은 아직도 임금의 신하이신가? 불자도 임금을 섬기는가? 작살로 잡든, 그물로 잡든 고기만 잡으면 되는 것이지.”
신세를 졌던 시습은 집요한 권유에 마지못한 척 더 이상 뿌리치지 않았다.
“제가 대군께 진 빚도 있을 갚는 셈치고, 그동안 해 놓은 언해만 검토하고 돌아설 테니 그땐 재차 권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사람 참 메마를세.”
지방을 돌아다녀보니 변변한 책이 없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시습이 다시 발을 들이기도 싫은 궁궐 근처에 온 것도 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중에 하나가 많은 책을 발간이라고 평소 주장이었다. 게다가 시습은 세조가 불가의 도를 깨닫고 참회를 하여 동학사 초혼각을 지었기에 신료들의 임금이 아니라 백성의 임금이 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시습은 언해 작업에 참여한 승려들과 내불당에서 기거하며 <법화경>언해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불당에 하루는 송이버섯, 다음날은 포도, 이렇게 차례로 율무, 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시습은 음식을 가져온 궁궐 시중에게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이는 주상께서 보내온 것입니다. 새 철음식을 드시기 전에 반드시 문소전에 먼저 드리고 다음에 이곳에 올리고 나서야 음식을 드십니다.”
시습은 비록 폭군이지만 세조의 효성에 고개를 끄덕이고 효령대군의 말대로 세조가 임금으로서 나라를 위해 애를 쓴다는 말을 곧이듣게 되었다.
며칠을 꼬박 세우고 그동안의 언해를 점검한 시습은 여러 승려들과 108배를 하고 있었다. 절하던 시습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다말고 상단에 안치된 순금불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끝까지 절을 마친 승려들이 여전히 불상을 쳐다보고 있는 시습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설잠께서는 배례를 하다말고 무엇을 그렇게 응시하고 계시오?”
“저 불상이 금불상이오?”
“그렇소. 금박을 입혀서 성왕께서 친히 모신 금불상입니다.”
“어허, 정녕 그렇다면 임금은 불도(佛道)와 통치를 혼동하고 계시군.”
다들 시습을 쏘아보았다. 시습은 누가 듣거나 말거나 걱정스럽게 의문을 품었다.
“저 불상을 금으로 입히기 위해 백성들이 사금을 채취하느라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며, 불상을 주조하느라 깊은 구덩이에서 목숨을 걸고 철광을 캐고, 장작을 때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이오. 이걸 누구의 공이라고 하겠는가? 과연 석가모니가 이러길 바랐겠는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 승려가 나서 시습에게 따지듯 물었다.
“공맹의 도를 논한다는 사대부들이 출세만 매달려 불도를 멀리하고 승려를 물외인 취급하는 이런 세태에 주군께서 불단을 높이 알리는 불사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망발의 언사요? 그런 마음이라면 진작부터 이일에 끼시질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요?”
시습은 당치 않다는 듯 말을 받았다.
“불자의 진정한 주군이 누구란 말이오? 석가여래의 대자 대비한 원력은 본래부터 들고 남이 없는 것이오. 석가여래가 인도의 왕궁에 내려와서 열반에 든 것은 노파가 우는 아이에게 누런 낙엽을 돈이라 하여 울음을 그치게 한 것과 다를 바 없소. 석가여래가 단지 오고 감을 남긴 것은 마치 의원이 약 처방전을 남겨준 것과 같소. 불사와 불전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처방대로 약재를 구하려 하지 않고 처방전 쓴 종이를 그대로 약탕기에 넣어 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나는 임금의 땅에 와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공(空)의 자리에 있는 것이외다.”
부처는 본래 생멸(生滅)이 없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 항상 어디에나 있으니 바로 지금이 열반의 즉처(卽處)임을 강변했다.
시습은 그길로 경주 금오산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그러나 이듬해 효령대군이 경주부에 명하여 시습의 상경을 종용했다.
“성상께서 옛 흥복사를 새로 중수하여 원각사라 명명하고 스님들에게 낙성회에 모이도록 소집했는데, 내가 선사를 성상께 추천했더니 성상께서도 경사스러운 모임에 반드시 참석을 명하셨소. 그러니 선사께서는 산중이나 계곡에서 먹고 마시던 마음을 풀고서 참석하시오.”
시습은 효령대군에게 마지막 빚을 갚는 다며 승려가 아닌 한 백성의 자격임을 강조하고 승복을 벗고 원각사로 향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참에 아예 시습을 궁궐에 눌러 앉힐 셈이었다. 정식 벼슬은 어려웠어도 나라에서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정식 도첩을 내려 일을 시키려 했다. 새로 생긴 도첩이 없으면 승려는 사대문 안에 들어올 수 없었기에 서책을 수시로 구해야 했던 시습에게는 가장 필요한 증서였다. 시습은 효령대군으로부터 도첩을 전해 받는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분명히 했다.
“저는 글을 지어 이미 성왕의 업적을 경축하였습니다. 이제 제 할 일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불법에 높이가 없을 진대, 군주에 의해 주도되는 대대적인 불사는 기존의 권력 구조만 고착화시키고 불교를 백성들의 삶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소인인 바라본 고려 흥망의 전말이외다. 도첩만 해도 승려가 왕명으로 승려가 되고 안 되는 것은 통제하지 않습니까? 불도가 어디 궁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집현전을 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인재들을 임시로 포박하려한답니까?”
도첩은 처음에는 승려들에게 각종 군역과 세금의 혜택을 주기위한 증서였지만 세조 사후에는 유학이 강성해짐에 따라 승려의 자격을 제한하고 나중에는 아예 도첩을 중단하여 불교의 맥을 끊는데 악용되게 된다.
2.들고 남은 없으나 오고 감은 있다(2)
글: 김영수 그림: 혜선 www.hooam.com |
인분냄새가 진동하는 시습을 본 군졸은 설마 그가 시습일까 하며 알아보지 못하고 코를 막으며 멀리 가버리라고 침을 내뱉었다.
성대한 낙성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절문 밖에는 군졸 무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습을 대궐로 데려 오라는 세조의 명을 받드는 자들이었다. 시습은 이번에 잡히면 도저히 궁궐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도망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뒷문과 쪽문까지도 군졸 그림자가 어른대고 있었다. 남루한 나그네 복장을 한 시습은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공양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빈대떡 부치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지나가던 나그네인데, 배가 고파서 그러니 빈대떡이나 한 접시 불사하시구랴.” 위아래를 훑어보던 공양간 사람들은 웬 걸인이 구걸을 한다 싶어 거칠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썩 물러가시오. 지금 이 음식은 고관신료들이 아직 손도되지 않은 것이오.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디서 개시도 전에 걸인이 먼저 손을 대려 한단 말이오.”
“내 손은 대지도 않고 입으로만 먹을 테니 그 손으로 집어내 내 입으로 좀 넣어 주시구랴.”
“이런 미친놈이 다 있는가. 가만히 있으면 국수라도 말아주려 했더니, 정신이 나간 놈일세 그려.”
시습은 공양간 사람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둥근 빈대떡 한쪽을 쭉 띠어 입에 넣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시습이 전을 손에 한줌 집어 달아나자, 공양주 보살들은 아궁이에 불붙은 장작을 세워들고는 시습은 쫒아갔다. 도망가던 시습은 황급히 숨어든 곳은 뒷간이었다. 시습은 그만 그곳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그를 끌어내서는 미친 거렁뱅이라며 뒷문 밖으로 내던졌다. 인분냄새가 진동하는 시습을 본 군졸은 설마 그가 시습일까 하며 알아보지 못하고 코를 막으며 멀리 가버리라고 침을 내뱉었다.
시습은 줄행랑치듯 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낙성회가 끝날 무렵에야 상황을 파악한 군졸들은 뒤늦게 시습을 찾아 나섰다. 세조는 노발대발하여 시습이 환도하라는 어명을 전국에 내렸다. 시습은 세조의 어명을 피해 금오산으로 향하지 않고 한양 동쪽의 수락산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시습은 산에만 틀어 앉아 있지 않았다. 저자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하루는 당대 실력가인 서거정이 황급히 궁궐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낡은 대나무 삿갓을 쓰고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저자거리에서 거렁뱅이들과 걸식을 하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자가 정승의 앞길을 막아서다니. 서거정을 호위하는 무리들은 실성한 놈이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강아지 쫒듯 시습을 내몰려 했다. 시습은 아랑곳 않고 머리를 쳐들고 서거정을 향해 호통을 쳤다.
“강중(서거정의 자)은 편안한가.”
길가에 물러나있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걸인의 뒤탈을 걱정했다.
“웬놈이냐!”
갈 길 바쁜 수레에 올라탄 서거정이 역정을 냈다. 하지만 곧 그가 시습인 것을 알아챘다.
“열경(시습의 호)이로구만. 산속에 숨어있지 않고 저자 거리를 활보한다고 하더니 여기서 만나는구먼. 아무렴, 세상 바닥이 모두 자기 집인데 쥐새끼처럼 숨어 지낼 열경이 아니지.”
육모방망이 세례를 퍼부으려던 일행을 물리친 서거정이 기가 막힌다는 듯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조선 팔도에 나를 이렇게 평대할 사람은 세상에 자네뿐이 없을 걸세.”
감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대 위세가의 수레를 막은 무례한 자를 엄벌해야한다는 건의가 잇달았지만 서거정은 무시했다.
언젠가 강변 정자에 한명회의 시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가 걸려있는데, ‘부(扶)’자를 ‘망(亡)’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젊어서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고 조롱한 것이 시습이었다.
또 어느 날은 신숙주가 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여 상다리가 휘도록 술을 대접하고 기녀들까지 불러 흥겹게 기분을 풀게 했다. 신숙주와 시습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신숙주가 세조의 왕위 찬탈과 국정을 돕는 것을 보고 소원해진 사이였었다. 다음날 제정신을 차린 시습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못 올 곳에 왔다는 양, 침을 뱉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사실을 익히 전해 들어 잘 알고 있던 서거정은 빙그레 웃으며 외쳤다.
“그만두시오. 미친놈과 무얼 시비를 가리겠다는 것인가. 지금 이 사람을 체벌한다면 백대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이 더럽히게 될 것이다.”
저자거리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남루한 시습을 바라보았다. 시습은 비켜가는 수레를 바라보며 다시 큰 소리로 나무랐다.
“어허, 저놈을 멈추게 하여라.”
앞을 가로막는 시습을 피해 수레는 도망가듯 멀어져갔다. 시습은 홀로 빈부귀천 신분고저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시습은 낮에는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시며 장터를 휘저었다. 저자거리 아이들과 뛰어놀다가 만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부덕한 수령이 있는 관청 앞에서 백성들이 불쌍하다며 짚신을 벗어 땅에 두드리며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벼이삭이 막 익는 어느 가을에는 기껏 농사지은 논에 들어가 술병을 옆에 차고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의 벼를 다 베어 쓰러뜨려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저자거리엔 시습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미쳤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시습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에서 더 이상 자신을 추적하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즉흥적인 직관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명리를 멀리하며 세상을 걸림 없이 사는 청광(淸狂) 놀이야 말로 진정한 활선(活禪)이라고 생각했다.
시습은 거처에 텃밭을 일구어 조와 수수, 토란을 심어 가꾸었다. 주렁주렁 열매가 열려 잡새들이 탐을 낼 무렵, 시습은 경주로 줄행랑치듯 홀연히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시습은 늘 있던 그 자리에서 백년을 살 것처럼 일을 벌였다.
제5화 각성(覺性)
1. 소 꽁무니에 꼴을 주다
“설법은 하지 않고 소 한 마리를 끌어오게 하더니 꼴다발을 소 꽁무니에 매놓으라는 게 아니겠소. 그리고는 뒤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성종 13년. 시습의 나이 48세.
그동안 임금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강산도 여러 번 변했다. 그러나 궁궐은 여전히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정국은 왕비 윤씨의 폐비사건이 매듭지어진 직후였다. 폐비 윤씨 사건이란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된 공혜왕후 윤씨는 세자 연산군을 낳지만 투기가 심해 독살하려는 혐의를 받았고, 성종의 선처로 사면되었지만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면서 친정으로 쫓겨 가서 근신하다가 모후 인수대비 세력의 모함으로 결국 사약을 받고 만 사건이었다.
윤씨의 죽음으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윤씨를 옹호하는 세력과 처단하려는 세력이 파벌을 이루어 세조까지 거슬러 과거사를 파헤쳐가며 반목과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는 이제 더 이상 이성이 아닌 파벌이 되었다. 궁궐에서 피비린내 나는 파벌싸움의 일촉즉발을 직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시습은 작년에 다시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으며 환속을 하였다. 그동안 외인들의 조문은 열심히 지었지만 정작 조부와 선친은 소홀히 했다며 제사를 지내고, 뒤늦게 안(安)씨를 아내로 맞아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의 결말을 지켜본 시습은 다시 한 번 답답한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이날 경기도 봉선사에 동지들을 만나기로 약조하였던 것이다. 봉선사에서는 남효온, 승려 계인, 유생이면서 종실 사람인 이식, 이정은 등이 시습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남효온은 단종의 친모인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가 훈구파들의 심한 반발을 사고는 세상을 등지고, 뜻이 맞는 여러 유생들과 죽립칠현을 결성하여 벼슬하지 않고 세상을 유랑하면서 스스로 죽림거사를 자처하는 절의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세조 집권이후, 재야학파 중에는 벼슬을 하며 중앙 무대에 참여한 사람들이 늘었는데 이를 사림파라 불렀다. 그 수장은 김종직이었다. 시습은 손아래인 남효온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었다. 시습은 외형상으로는 벼슬을 하지 않아 절의파라 분류할 수 있었지만 시습은 그런 파벌에 개의치 않았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서울 동쪽의 수락산에서 기거하면서 궁궐 인맥들과 교류하며 꾸준히 국가 시책에 조언하였으니 그 행보를 딱히 가를 수 없었다.
시습을 기다리던 남효온이 좌중에 푸념을 했다.
“아무리 해도 동봉(시습의 호)의 행적은 예측할 수가 없소. 어느 날 문득 상투를 틀더니 혼방을 차리질 않나, 다시 사서삼경을 읊조리기에 과거를 볼 듯 하더니만 벼슬도 없이 궁궐 밖에서 감놔라 배놔라 벼슬아치들에게 간언을 일삼지 않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소. 그러려면 차라리 직접 벼슬을 하거나 할 일이지.”
승려 계인이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잠(시습의 법명)은 석가여래나 공자의 말도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이 가는 길을 따르잖소. 탈속과 환속마저 자유롭게 넘나드는 방외인(方外人) 중의 방외인 아니겠습니까? 수락산에 가면 ‘동봉’이고 먹장삼을 입으면 ‘설잠’이고 저자거리에서는 ‘청한’이라 하니, 매번 머무르는 곳마다 다른 사람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소이까. 오늘은 또 어떤 이름을 부르라고 할 지 기대가 되는 바이오.”
이정은이 거들었다.
“아전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던 천하의 기괴한 송사(訟事) 건을 들어보셨습니까?”
계인과 남효온이 모르겠다는 눈치를 살피고서는,
“아직 소식이 안간 모양이시구려. 동봉의 그런 천하의 요절복통 송사를.”
이식은 이미 자초지장을 다 아는 양, 배를 움켜잡는 시늉을 하며 잔뜩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맞장구쳤다.
때는 추수철이었다. 시습이 한 아전을 관아에 신고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본래 시습이 소유하고 일구던 전답이었는데 유랑을 하면서 돌보지 않자, 권력 있는 대감집의 한 아전이 슬그머니 제 땅인 양 가로채서 봄에 씨를 뿌린 것이다. 하지만 시습은 즉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두고만 보다가 정작 추수철이 되어서 아전이 수확을 하려 하자 추수한 농산물을 도적질해갔다고 관아에 신고를 한 것이다.
고을 수령이 심판하는 자리에서 아전은 억울하다는 듯 변론을 했다.
“전답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자는 그 전답의 주인이라고 할 만한 전답의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곳에 계속해서 살지도 않았습니다. 이 작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봄철에 제가 씨를 뿌리자 아무 말도 없다가 가을 수확물을 보고서야 탐이 나자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벼슬도 없는 자가 그런 전답을 소유하고 있을 리 없습니다.”
아전은 은근히 자신의 배경을 자랑하며 평소 안면이 있던 고을 수령에게 신속한 판결을 종용했다. 시습이 옹골차게 받아쳤다.
“아전에게 언제 나라에서 전답을 내린 적이 있소이까? 일도 하지 않은 아전이 그리 많은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땅도적질이 아니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오. 내 고향이 그곳이고 대대로 일구었다는 것을 증언할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소. 이보다 더 확실한 문서가 어디 있겠소이까. 내가 본래 주인이니 아전께서 먼저 그 전답의 문서를 보여주시구랴.”
평소 벼슬이 낮거나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던 아전은 남루한 시습이 증인을 대가며 조목조목 따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습은 더욱 날을 세워 몰아붙였다.
“누가 봄에 씨를 뿌리기에 소작을 준 셈치고 나눠 먹을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던 것이요. 그런데 소작을 준 은혜도 몰라보고 이제 와서는 소작료도 내지 않고 모두 거두어 가려하였고, 심지어 땅마저 자신의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소.”
졸지에 소작인으로 몰린 아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증인을 대고 따지자 수령은 아전의 편을 들지 못하고 시습의 손을 들어주었다.
승소문서를 들고 관아를 나오던 시습은 하늘을 크게 한번 둘러보더니 허허 웃었다. 그러더니 승소문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오물이라도 만진 듯 개울에 처박아 버리고 손을 씻었다.
봉선사의 남효온 일행은 이정은이 전해준 이야기에 눈물이 나도록 실컷 웃었다.
“설잠은 고을 수령도 심판하셨구랴.”
승려 계인이 가까스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생각난 듯 시습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이번에 내가 설잠 기담을 한 자락 들려 들이리다. 한번은 여러 비구들이 설잠을 고승대덕으로 추대하여 ‘금빗으로 때를 벗겨주십시오’하고 청하였소. 가만히 지켜보던 설잠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가 갑자기 법회를 열라고 하였소. 그리고는 설법은 하지 않고 소 한 마리를 끌어오게 하더니 꼴다발을 소 꽁무니에 매놓라는 게 아니겠소. 그리고는 뒤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일행은 다들 궁금증에 조바심을 내었다.
“설잠 왈, ‘너희들이 불법을 듣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식이니라’ 일갈하고 법회를 마쳤소. 청중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얼굴만 보고 어리둥절해 했지요. 다들 돌아가서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나서야 대법회나 글로 선지식을 얻어가려는 작태를 ‘소 꽁무니에 꼴 주는 격’이라고 알게 되었다오.”
2.금오신화(金鰲新話)
"왜 벼슬을 한번 잡으면 물러날 줄 모르고, 적재적소에 흔쾌히 갈음하지를 못하는지..."
시습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환담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이식이 나서 시습이 금오산에게 지은 기묘한 이야기를 들추었다.
“설잠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방외문학의 절정일게요. 마음은 불(佛)이요, 행동은 유(儒)요, 수련은 선(仙)이라고 말한 평소 지론도 예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소.”
남효온이 눈을 반짝이며 턱을 바짝 잡아당겼다.
“내가 동봉과 이 때문에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지 않았겠소. 과연 귀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요.”
“그래서 어떻게 결론이 났소?”
“동봉이나 나나 결국 비슷한 이야기요. 귀신은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이 귀신 아닌 게 없는데, 산사람의 기가 허하면 삿된 것이 밀고 들어와 헛것이 나타나게 되는 게지요.”
남효온은 시습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선승(禪僧)이 한밤중에 해우소에 가기 위해 마루를 내려서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물컹한 것이 밟히며 ‘찍’하는 소리가 났다. 선승은 평소 대낮에 금두꺼비가 댓돌 밑에 엎드려 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신이 아마도 그 금두꺼비를 밟아 죽이는 살생을 저질렀다고 생각이 들었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에 어슴푸레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두꺼비가 등장하였다. 두꺼비는 염라국에 소송장을 내서 자기를 죽인 선승을 토로하였다. 소머리를 한 저승사자가 선승을 끌어내 형틀에 묵고 시뻘건 쇠가 달구어진 꼬챙이를 들어 보이며 단근질을 할 찰라 선승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진땀을 닦으며 이제 연옥에 갈 날만 남았구나 한숨 쉬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죽은 금두꺼비의 장사라도 지내 넋이라도 위로해 주고자 댓돌 밑을 살펴보니, 두꺼비는 오간데 없고 오이 하나가 부서져 있었다. 선승이 밟았던 것은 금두꺼비가 아니라 오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동봉께서도 귀신을 인정하지 않으신 게지요. 일리 있는 무당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가 백성을 현혹하여 패물을 우려내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지요.”
남효온이 열변을 토하는 도중에 시습이 당도했다. 일행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일행은 서로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
“지금 우리가 금오신화 얘기를 하던 참인데, 설잠, 금오신화는 진실인가?”
승려 계인이 물었다. 시습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입을 열었다.
“그 행간은 내가 메웠을지 모르나 내가 듣고 적은 것만은 분명하외다. 이름 모를 선인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신통한 무녀를 통해 들은 것도 있고, 휑한 달밤에 문득 적은 것도 있고...하지만 내 꿈속을 그린 것이 많다네. 어찌나 생생하던지 꿈을 깬 것인지 꿈속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때 얼른 적어두었지. 더 신기한 일은 꿈을 꾼 그날 그러한 일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야. 나온 인물과 벌어진 일에 조금 차이가 있을지라도 마음 상태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마니 낸들 어느 쪽이 현실이고 꿈인지 생경할 수뿐이....내 언젠가 여인에게 봉변을 당하리라고 아침에 예견을 한 일이 있지 않는가. 자네도 그 자리에 있어 알다시피 정말로 저녁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는가. 자네는 내가 앞일까지 예견하는 선견지명을 터득했다고 했지만 사실 새벽녘 꿈에 미리 나타난 일이었네. 금오신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읽는 자들이 판단하시게.”
수염을 쓰다듬은 시습은 전을 하나 냉큼 집어먹고 우물우물하며 읊조리듯 말했다.
“문학을 옳고 그름으로 재려하는 것은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나. 장자(莊子)의 외물편(外物篇)에는 도언이 아니라 요망한 것으로 소설(小說)을 규정하여, 도를 근본으로 하는 군자는 그런 것을 쓰거나 읽어서는 안 된다고 야단을 치고 있지. 유생들 또한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인간 생활에 해독을 끼치며 풍속을 저해하는 것으로 비난하구만. 그러나 마음 없는 글은 절름발이가 아니겠나? 과거시험에 출제 항이 아니니까 쓸모가 없는 것으로 치는 게지.”
“동봉께서 일찍이 저와 귀신논쟁에서 귀신은 허망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승이 밟은 오이 이야기 생각나지 않습니까?”
남효온이 묻자 시습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랬지. 죽림거사(남효온)와 논쟁이후 죽 생각해 보았는데 귀신이야기는 생각을 벗어나는 불필요한 것 같네. 공자도 귀신의 이치는 워낙 깊어서 알지 못했다고 한 것처럼, 나도 어떤 방도인지 잘 모르는 바이네. 다만 홀로 산중에서 야밤을 지내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혼귀에 넋이 빼앗기지 않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겠소. 그러니 귀신을 만나도 모두 오이로 봐야하는 심정이란 말이지. 다시 말해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 그 마음이 걸려 있으니 그걸 읽어야 한단 것이지.”
다들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알아차린 시습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경주 금오산에서 머리에 열이 오르고 눈이 토끼처럼 핏발이서고 아파서 자리에 누운 적이 있었는데, 한 분이 의원을 불렀다네. 마침 마을 만신 일을 보는 무녀가 지나다가 들렸지. 무녀와 의원이 같은 자리에서 진단을 하게 되었지. 의원은 진맥을 하고 눈이 충혈된 것을 보더니 간(肝) 목(木)이 상해서 발병되었다고 했고, 무녀는 죽은 혼령들이 내 주위를 돌아서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렇다며 굿을 권했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수일 전부터 시문(詩文)을 짓느라 골몰을 해서 그런 것이라고. 탕약도 내리지 않고 굿도 하지 않고 며칠을 쉬었더니 씻은 듯 나아졌네. 귀신도 이런 것이 아닌가 하네. 아전의 횡포로 굶주리고, 성질 못된 지아비 만나 가슴이 무너지고, 총각이 상사병으로 야위어 가는데 공맹의 경이나 석가의 염불을 왼다고 백성들의 병이 낫겠는가. 자기 마음의 병을 누가 가장 잘 알겠는가. 경만 경이 아니라 우리네 삶 자체가 경이 아니겠는가. 도리가 어디 어려운 높은 곳에 숨어있단 말인가? 바로 지금을 기록하면 모두 경이 된다고 생각하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이식이 화제를 돌렸다.
“귀신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도무지 모르겠소. 있기는 있는데 모른 척 해야 하는 것인지, 없는 헛것이란 것인지.... 자, 그런 이야기 말고 궁궐 소식 좀 전해주시오, 그래도 동봉께서 그 쪽에 교분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시습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때 왕실이 불교를 주도하면 안 되고 유학의 도로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이제는 낭패를 보게 되었네 그려. 벼슬이나 자리만 지키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니 나라를 위한 벼슬이 아니라 가문을 위한 벼슬이 된지 이미 오래네. 벼슬하는 종씨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불법(佛法)이 세습이 되지 않은 것처럼 공맹의 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왜 벼슬을 한번 잡으면 물러날 줄 모르고, 적재적소에 흔쾌히 갈음하지를 못하는지.....”
시습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쓴 입맛을 행구기 위해 곡차를 단숨에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내 김대감(김종직)을 만나 명분 싸움은 그만하고 밀물과 썰물처럼 진퇴를 가벼이 하라고 수차례 종용하였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구먼. 사람들이 어디 대나무만 닮아가려하는가? 죽림거사도 소릉 상소 건도 있으니 절대로 까마귀 노는 곳에 얼씬도 말게나. 바람 부는 뜻이 과연 나무를 꺾자는 것이겠는가, 만물이 유연하라고 부는 것이겠는가?”
시습은 과거의 사육신 비극이 겹쳐지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시습은 혼자 읊조리듯 말했다.
“이번 생은 내 팔자가 대단한 역마살인가보네. 도저히 피 냄새나는 한양에 머물 수가 없구만. 또 꿈을 꾸었어...어딘가 달아나는 꿈을....”
이정은이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해 수선을 떨며 시습에게 곡차를 따랐다. 남효온이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 무엇인가를 적은 한지 한 장을 조용히 펼쳐 놓았다.
3.천부경(天符經) 앞에서
그러나 정작 시습은 홍두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웅’하는 쇠 종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이게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이요? 무슨 산술같기도 하고...”
첫머리에 ‘천부경(天符經)’이라고 쓰여 있었다. 남효온이 설명을 붙였다.
“묘향산에서 탁본한 것을 웬 노인이 보여주어서 제가 어렵게 필사한 것입니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인께서 이름 모를 산중 선인으로부터 수천 년 전 교훈을 전해 듣고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노인 말이 이 경은 비록 짧지만 공맹의 경보다 더 심오한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이것을 진실로 해득하는 자야말로 하늘의 뜻을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동봉께서 해설을 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시습은 언제부턴가 공맹위주의 유학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과거 시험에 4서6경만 취급하다 보니 명나라의 속국처럼 중화를 받드는 자가 많아졌고 국방마저 의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도 심심치 않게 돌았던 백두산 주신족의 역사서들은 방외서로 몰려 산골 이름 없는 학자들이 간신히 명맥을 있고 있었다. 관동을 유람할 때 한 노인으로부터 대륙의 주인이 중화가 아니라 본래 주신족이었다는 말을 듣고 시습은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이후 한번은 단군사를 비롯해 그 계통의 서적들을 엮어볼 심산이었다. 기껏 조정은 당쟁을 일삼고 왕실은 골육상쟁이나 일삼는 이유가 싸움닭을 작은 우리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구려의 기상을 고려가 제대로 있지 못하여 침몰하였고, 조선도 주신족을 잇지 못하고 사대주의가 횡횡한다고 개탄한 적이 있었다.
신라이후 간간히 몇 몇 왕조에서 대륙을 향해 바짝 마른 대망을 살리고자 했으나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중화와 조정이 동의하지 않는 사병양성은 곧바로 역모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했기에 우선 일부 세력들은 사라져가는 고대 역사서와 문헌을 모으는 움직임이 있었다.
천부경이란 말에 시습은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소싯적에 물외 경전을 탐독하면서 비슷한 내용을 한번 본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도무지 해독이 되지 않아 그냥 있고 지내던 터였다. 천부경은 소학만 띠어도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지어져 있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 넷이 되고...흡사 태극 음양오행 같기도 하고...”
“하나가 싸여 열이 되고 다시 삼이 된다는 것은 도무지 모르겠소이다.”
다들 수수께끼 풀듯 글자를 이리 지어보고 저리 지어보며 궁리를 하였으나 딱히 주의를 끌진 못했다. 그런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습의 눈이 반짝이며 마치 평소 외던 독경처럼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시작에는 그 시작점이 없어서, 삼극(三極: 天地人)으로 나누어졌다하더라도 그 근본은 닳아 없어지지 않는구나. (一始無始 一析三極無盡本)
(생성순서, 작용원리로서)하늘이 하나요, 땅이 둘이요, 인간이 셋이라 하면(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십진수의 원리처럼)하나가 쌓여지기 시작하여 열이 되면 소멸함이 없이 다시 三極(天地人)으로 되돌아간다네.(一積十鉅 無匱化三)
三極(天地人)은 각각 음양의 두 가지 성질을 띠고 있으니(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極(=음양을 띤 三極)은 6가지 성질(3극×2음양=천음, 천양, 지음, 지양, 인음, 인양)로 이루어져 氣를 생성하여 작용하는데, 이 운행을 七八九라한다. 음양으로 된 정적인 6가지 수에 하나씩을 더하면 天의 움직임 7, 地의 움직임 8, 人의 움직임 9가 되어 이 운행의 결과는 다시 10을 넘어가서 십진수처럼 처음의 삼극으로 돌아간다오.(大三合六生 七八九運)
三極(天地人)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벌려 四方(=四時)으로 배치하면 둥근 고리모양으로 순환하는 五行(=五氣)이 되는구나.(三四成環五七)
기묘하게도 하나라 할지라도 萬物에 오가며 흘러넘치도록 작용하는데, 그 쓰임새가 그 때마다 변할지라도 수레바퀴가 돌더라도 축은 돌지 않고 미동도 없는 형상처럼 그 근본에는 변함이 없도다.(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인간의 본 마음은 본래 태양의 밝음은 순리를 우러르게 되어있으니 인간은 천지와 일체이다.(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하나가 끝맺었다하더라도 끝은 없으며(끝이 아니며) 다시 하나의 시작이 되도다.(一終無終一)”
“나무아미타불!”
“역시 동봉입니다.”
“과연 해동공자가 과언이 아니었구려!”
저마다 무릎을 치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정작 시습은 홍두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웅’하는 쇠종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갑자기 십여 년 전의 해운대에 울려 퍼지던 “스님아!”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시습은 태백준령에서 덕쇠를 만난 후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이 밀려와 강릉에서 달포를 머무른 뒤, 관동을 지나 호남으로 향했다. 만경대, 소래사, 변산 선계산, 송광사에 들르고 백제의 흥망을 회고해 보았다. 병이 나면 잠시 사찰에 머물다 다시 합천의 해인사로 향했다.
나그네의 넋은 매달린 깃발과 같나니
발 닿은 곳곳이 내 집이라
내가 부러운 건 푸른 하늘의 흰 구름뿐이로다.
시습은 왜 이렇게 머물지 못하고 고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한탄하면서, 해운대의 절경에 시름을 달래고자 동백섬에 올랐다. 그곳에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수려한 경관에 탄복하여 ‘해운대(海雲臺)’라고 바위에 새긴 글자가 선명했다. 고운선생의 자인 ‘해운’을 따서 ‘해운대’로 불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시습은 아직도 성성하게 쓰여 있는 암각 필체를 더듬자, 불현듯 고운선생이 입산(入山)할 때 지은 시가 떠올랐다.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僧乎莫道靑山好)
산이 좋으면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왔느냐.(山好何事更出山)
두고 보라. 먼 훗날 나의 행적을(試看他日吾踪跡)
나는,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을게야.(一入靑山更不還)
시습이 소나무에 걸린 낙조에 넋을 잃고 마음을 진정할 무렵 다시 소나무 가지 위로 달이 올랐다. 끼니도 잊고 바위에 눌러 앉아 검은 하늘에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시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가야산 울울창창한 숲 속에 자리 잡은 해인사.
천리 먼 길 찾아와 대면하기 세 번째로다.
스님이 참선에 들어간 뒤 뜰 앞에 새들이 내려와 놀고
정원수 위에는 원숭이들 매달려달게 익은 과일을 따먹는다.
서암과 기각에는 누가 살았을까?
오동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가함께 옛일을 말하는 것 같구나.
길손은 내일 여정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는데
깊은 밤 밝은 달빛만 소나무 밑 불탑에 비치네.
4. 부처님 손바닥
내가 도무지 무엇을 안다고 나데는지 진정 부끄럽기만 하구나. 하늘아래 숨을 곳이 그 어댄가
봉선사에서 남효온이 펼친 천부경을 풀이하던 시습은 갑자기 고운선생의 ‘스님아’ 외침이 귓가에 쟁쟁했다. 시습은 ‘어허’를 연발하면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머리로 찧었다. 일행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시습은 아랑곳 않고 화살 맞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며 탄식을 토했다.
“해운대에 세 번이나 들렀으면서도 짐작조차 못했다니...내가 도무지 무엇을 안다고 나데는지 진정 부끄럽기만 하구나. 하늘아래 숨을 곳이 그 어댄가.”
시습은 방구석에 머리를 처박았다. 일행은 시습의 괴이한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때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오자 헌강왕은 그를 환대하고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헌강왕은 최치원을 대한지 반년 만에 승하하였고, 대를 이어 들어선 두 왕은 해를 넘기 못하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승계를 하고 말았다. 신라는 곪아가고 있었다. 뿌리 깊은 환부는 골품제도였다. 골품제로 말미암아 신분차별이 극심하여 요직들은 골품의 혈연들이 독식을 하였고, 그 원성이 날로 높아 유능한 인재들이 아예 중국에 귀화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게다가 오랫동안 지속된 태평성대는 귀족들을 나태하게 하고 유흥의 나날을 탐닉하게 했다.
최치원은 국풍을 바로잡고자 고유의 화랑정신을 재무장할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실로 3교(儒․佛․仙)를 포함한 것으로서, 뭇 생명들을 접촉하여 교화한다[接化群生].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집 바깥에서는 충성하는 것은 孔子의 가르침이요, 無爲의 일에 처하여 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老子의 취지요, 모든 악을 만들지 아니하고 모든 선을 봉행함은 釋迦의 교화이다.”
그러나 6두품이었던 최치원은 진골을 대신하는 수족에 불과했다. 진성여왕이 들어서자 정인(情人)이던 위홍과 염문을 뿌리며 국사를 등한히 하여 신망을 잃기 시작했으니, 궁궐 성문 대로변에 여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버젓이 붙여질 정도였다. 경주의 35개 골품 집안은 수천 명씩 노예를 거느리며 기름진 배를 두드렸으나, 나머지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거나 도적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가혹한 세금에 반발하는 자들이 늘어서 국고는 늘 비어있었고 시름에 빠진 백성들은 서서히 반란의 무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다.
894년(진성여왕 8년) 2월 최치원은 비장한 각오로 여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도 곧 당나라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판단한 최치원은 마지막으로 구국의 직언을 비장하게 준비했다. 최치원은 자신의 진퇴를 걸고 최전선에서 느낀 현황을 간신들의 입을 빌지 않고 직접 전하기 위해서였다. 최치원이 여왕 앞에 엎드려 호소하였다.
“지금 거리에는 어미젖이 말라 죽은 어린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나이다. 굶주린 백성들은 굶어 죽느니 차라리 도적과 반란의 무리에 동조하여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덕망 있는 지방 토호들마저도 왕명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저 거대한 당나라도 민심이 흔들리자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조속히 국정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참담한 말로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나라는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늘 내분에 의하여 붕괴되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마옵소서. 다음 10가지를 시급히 실행하시옵소서.
첫째, 골품을 폐지하고 모든 관직은 과거를 치러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하시옵소서.
둘째, 나라의 예법과 법률을 정비하여 왕족도 예외 없이 지킬 수 있는 대전을 만들어 발표하옵소서.”
최치원은 시무십조(時務十條)를 피토하듯 쏟아냈다. 진성여왕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잘 들었소. 내 골품들이 모인 화백회의에서 의논해 보리다.”
옆에 있던 진성여왕의 정인인 위홍이 탐탁지 않은 듯 내뱉었다.
“6두품인 그대의 진심을 이제야 속 시원히 털어놓는 구려. 결국 진골을 넘어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 아니요?”
진성여왕이 괜히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을 필요가 없다는 듯 위홍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비록 왕이지만 신라 사직은 화백에서 결정해왔소. 이번에 그대의 시무십조를 분명히 의제로 올릴 것이오.”
“소인 최치원이 다시 한 번 당부 드리옵니다. 이번 시무십조는 더 이상 화백회의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수렴해야할 문제입니다. 화백에서 어찌 화백의 해체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여왕님의 결단이 절대 필요한 사항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이 시무십조의 수렴여부를 지켜보고 반란의 결행을 정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옵소서.”
“그대의 말이 나를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대야 충분히 진골이상의 능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라의 전통인 골품을 아예 없앨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내 시중들과 논의하여 그대의 적절한 자리를 마련해 보리다. 인재등용의 다른 방도를 한번 찾아보리다.”
최치원은 앞이 캄캄했다. 골품을 없애겠다는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궁궐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최치원 앞에 핏빛 노을에 어른거렸다.
결국 최후의 시무십조는 골품들이 모인 화백회의에서 한 조항도 수렴되지 않고 철저히 묵살당하고 말았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최치원이 아예 진골을 넘본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영황은 6두품으로서 국방직 최고 자리를 수여했다. 그러나 중앙관료들의 정책과 사사건건 충돌하자 오히려 화백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하기보다 화백에서는 최치원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모함을 하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지방 하위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최치원은 그 관직마저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향했다. 살기 위해 반란군에 가담한 백성들을 향해 창칼을 겨눌 수는 없었다.
‘피를 흘리며 그가 구하려는 것이 신라가 아니라 기껏 기름진 배를 두드리고 있는 귀족이라니, 비록 나라가 바뀌어도 백성이 이보다 더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벼슬에 환멸을 느낀 최치원은 가야산에 숨어들었다.
그해 궁예가 철원을 거점으로, 견훤이 지리산 화엄사를 거점으로 거대한 반란의 여정을 시작했다. 나라는 구심점 없이 극도의 소요에 휩싸였다. 최치원은 고려를 표방한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으로부터 은밀히 가담의 청을 받았다. 최치원의 지원을 받는다면 누구든 민심을 쉽게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백성이 피를 흘리지 않길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해운대에서 입산의 시를 세상에 공표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최치원의 세를 업은 것처럼 행세하여 민심을 평정해 나갔다.
최치원은 한때 왕실의 녹을 받아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 절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 반란군도 왕실 호위군도 아닌 평인으로 영원히 세속을 등질 것을 스스로 결의하게 된 것이었다. 최치원은 동백섬에서 해운대를 바라보며 세상에 입산을 알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제6화 달빛아래 매화는 지고(1)
가끔 산중에서 지루하긴 했어도 예전처럼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봉선사의 시습은 마치 대보름날 쑥방망이 쥐불(요즘의 깡통불 돌리기에 해당함)이 쉭쉭 소리를 내며 돌아가듯 지나온 일들이 지나갔다. 궁궐을 등지고 떠나는 꿈은 우연히 아니었다. 그렇게 메어지는 애통함과 분노가 아직도 연유하여 지금도 가슴에서 삭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뒤이어 폭군을 만나 좌절을 해야 했고, 늘 유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왕의 통치와 불도를 구분하려 했으며, 그렇게 지독하게도 관운이 따르지 않은 이유며, 심지어 목이 떨어져나간 동지들을 묻어야한 일까지 전생의 과보가 아닌 게 없었다. 인간과 혼령이 교류하는 금오신화마저 지난날 고운이 지은 쌍녀분에서 만난 혼백의 여인 이야기와 상통하니....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시습은 날이 밝자 바로 문을 나섰다. 보통은 동지들과 만나면 담소를 나누느라 며칠이 가는지 몰랐지만 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밤을 지샌 시습은 비틀거리며 봉선사를 나온 것이다. 동지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면서도 빈말이라도 만류하지 않았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시습은 환속 후 두 해가 지나 안씨를 병으로 사별하고, 다시 머리를 깎고 전국 유랑을 시작했다. 가끔 산중에서 지루하긴 했어도 예전처럼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1493년(성종24년, 매월당의 나이 59세) 이른 봄, 충청도 홍주 무량사(無量寺). 마당엔 달빛 받은 붉은 매화가 만발하다. 구름에 둥근달이 가려 상현달이 되었다. 매화에 짙은 그림자가 내린다.
요사채에서 기침을 끝낸 시습이 이불을 베게 삼아 비스듬히 누워있다. 처사가 여전히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시습을 주시하고 있다. 시습이 허공을 바라보며 마른입을 움직였다.
“참으로 기묘했소. 저자거리에서 걸식하고, 승려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산짐승의 밥이 될 뻔도 한 자가 해동공자의 후생이라니.... 그동안 내 옹이 박힌 발만 불쌍하외다. 부지런히 다녔지만 결국 부처님 손바닥이었던 게지요. 지난날에 다니던 길을 다시 한 번 빙빙 돌았던 게지요. 과보의 무서움을 실감했소이다. 말과 글로 하는 유불선은 하등 소용이 없는 게지요.”
곁에 있던 처사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그러면 유불선이 모두 부질없다는 뜻입니까?”
“이 마당에 처사에게 더 숨길게 뭐가 있겠소. 처사는 세상이 유불선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오?”
시습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유불선은 없소. 지금 눈앞에 지나가는 바로 이 찰나가 과연 유불선의 어디에 속하겠소이까? 승려는 불(佛)이라 할 것이고, 유생은 유(儒)라 할 것이고, 선인은 도(道)라 할 것인데 과연 누구의 세상이란 것이오? 단지 한 면만 잠시 끌어다 쓸 뿐이요. 나를 보시오. 그동안 나의 지난 이력(전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행로를 보면 시중(時中)의 깊이가 얼마나 얕아지는지...”
늙은 시습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끌어다 앞에 놓았다. 탁발승의 갓과 먹장삼을 입고 삭발하지 않았으니 유생도 승려도 아니었다. 억센 수염에 눈썹만큼 자란 희끗한 머리 털, 약간 찌푸린 미간은 세상을 보는 그의 심상이었다.
“내 진작에 평복을 하고 머리를 자른 초상을 그린 적도 있었소만, 남은 것은 이뿐이구려.”
“옹께서는 세상을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살아도 회한이 남는지요?”
“삶이란 본래 회한만 남소. 산중도 저자거리도 없고, 귀천도 없고, 오고 감도 없는데 오직 인간이 만든 신분이 있을 뿐이오. 지금 이 순간 김시습도, 오세동자도, 청한자도, 동봉도, 설잠도, 매월당도, 열경도 없고 오직 늙은이만 있지 않소.....너무나 오래도록 비탄의 세월을 보낸 것이 끝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오. 남들은 아마 나를 초탈한 인물로 입에 오르내릴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러하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야말로 비로소 내 마음이 편했소. 이제 다리를 편하게 쉬고 싶소.”
처사는 큰 절을 한 뒤 편히 쉬시라는 말을 남기고 선방문을 열고 나갔다. 시습은 말 배웅이라도 하려고 방문을 열었으나 처사는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아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붉은 매화만이 달빛에 고고했다.
“허허, 다시 매화 속으로 들어가셨나 보구나.”
시습은 ‘철그렁’ 방문을 닫았다.
아침 무렵 무량사에서는 선승들과 일단의 중인들이 곡소리가 드높았다. 승려의 다비식은 화장에 독경소리가 보통이었으나 시습의 장례에는 염불도 화장도 없었다. 시습은 죽기 전에 승려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사찰 식으로 화장하는 다비를 하지 말고 염불도 말 것이며, 시신을 절 안이 아니라 절 밖에 묻되 관을 쓰지 말고 짐승의 시체처럼 구덩이에 흙이나 뿌려달라’고 하였다. 죽어서도 불가나 유가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자연이 되고자 함이었다. 살아생전엔 오직 삶만 있고, 죽음 뒤에는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었다. 평소 시습은 존경하던 홍유손은 시습의 부음을 받았지만 직접오지 못하는 대신 제문을 먼저 지어 보냈다.
“공의 부음을 받고 사람들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육신을 탈피했다고 전하면서 매우 놀라고 슬퍼하여 눈물을 주르르를 흘렸으나 어찌 그렇게 한다고 하여 공께 대한 정 표시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걸음에 달려가 상례에 임하려 했으나 강남에 있어 길이 멀기에 먼저 글월을 봉하며 조문먼저 보내니 평소 담아두었던 회포를 풀고자합니다.”
제6화 달빛아래 매화는 지고(2)
“나는 알지, 나는 알지. 애들처럼 손뼉 치며 한바탕 깔깔 웃노라.”
“아아! 공께서는 다섯 살 되어 삼각산 시를 지어 늙은 선비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였기에 세상이 놀라 말하길, “공자가 다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벼슬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고 불교에 의지하여 모습을 바꾸시니, 공자와 맹자의 도리에 통하고 불교의 현묘한 학설을 궁구하여 만물과 나를 무상에 혼합하고 성령을 해와 달과 가지런히 하였나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지하여 인과설과 화복설을 따져 물었으나 공께서는 그 허탄하고 망령됨을 싫어하여 술에 의지하여 빛을 가리시니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을 미쳤다고 여겼으며 공은 이를 듣고 또한 기뻐하였나이다. 또한 승려로서 탁발에 의지하지 않고 손수 땀 흘려 토란과 콩을 수확하여 손을 놀리는 무리를 질타하였으며, 공의 내면의 진실에 흠복하여 벼슬아치, 농민, 상인, 걸인, 도적 무리조차 모두 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가 되어 함께 물외에서 넘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부정하고 세간 밖으로 벗어나려 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벗어난 별도의 극락은 별도로 없음을 역설하기 위함이요, 현실의 어떠한 특정지역이나 벼슬에 있지 않음을 몸으로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공의 한 평생은 사상의 육화(肉化)요 유불선 차이의 회통(會通)을 위한 궤적이었나이다. 세상의 이치를 깊이 깨달으시고 오만하게 구시며 명산과 대천에는 오직 공의 발자취만 두루 남았으며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
만년에 추강(남효온)과 지극한 이치를 숨김없이 이야기하셨고, 월호(이정은)과 함께 방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추강이 공보다 먼저 죽자 거문고 줄을 끊게 하시니, 어찌 황천으로 쫒아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아! 공이시여. 공이 세상을 떠난 것은 저 인위적인 허위를 미워해서가 아닙니까? 마지막엔 불가의 마음도, 유가의 행실도, 도가의 수련마저도 멍에라 하여 오직 찰나에 마음 가는 데로 바람보다 더 먼저 움직이고 구름보다 앞서 가시는 시중(時中)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산중에선 깨달은 자로 저자에선 절의의 신하로 추앙받으시니 오히려 오묘하게도 기왕에 명리를 따르던 자들과는 하늘과 땅 보다 깊은 차이를 두셨습니다.
상상하건데 구천에서 유희하시고, 마음대로 시를 주고받으며 너울너울 날아다니시면서, 반드시 티끌세상을 내려다보시고 또한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계시겠지요. 평소 저자에서 함께 술 마시던 술동무들도 다시 볼 수 없음에 모두 슬퍼 울고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공께서 가심은 사사로움이 없으시지만 사람들이 슬퍼함에는 사사로움이 있기에 그저 세상의 습속을 따라서 멀리 영원하시길 천도하는 바입니다. 하늘에 계신 공의 영령이시요, 미미한 정성이나마 이제 거두어 주옵소서!”
시습은 언젠가 ‘학랑소(謔浪笑: 깔깔대며 웃다)’라는 시를 지었다. 세간의 불의 모순이 참을 수 없었지만 지금 이 현생이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속내를 적은 것이다. 한 이름 모를 승려가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시습의 유고시를 허공에 허탕하게 외쳤다.
“나는 알지, 나는 알지.
손뼉 치며 한바탕 애들처럼 깔깔 웃노라.
인간은 옛날부터 본성을 잃었나니 시냇가에 초가삼간 지어 사는 것만 못하리.
인생 백년은 기장밥 익는 시간에 불과할 분 험한 길에 버티려 애쓰느니보다 앉아서 잠시 선경에 드는 낙이 백 번 천 번 옳으리.
쓰러지다간 눕고, 길 가다간 주저앉고, 땔나무를 줍다간 참회 따면서 푸른 산 높고 푸른 시내 넘실대는 곳에서 홀로 노래하고 홀로 춤추며 근심도 즐거움도 모두 잊으리.
앙상한 뼈, 솟은 힘줄을 드러내고 농군들과 모자 끈을 늘어뜨리니 남과 나의 구별을 아 예 모르겠구나.
달빛 아래 홀로 강가를 거닐며 노래를 뽐내다가 구름 자욱한 골짜기로 들어가노라. 껄껄 껄.
나는 알지, 나는 알지.
애들처럼 손뼉 치며 한바탕 깔깔 웃노라.”
시습은 죽어서야 수렴되었다.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 생육신(生六臣)으로 받들어졌다. 시습이 죽은 후 중종 6년 이세인(李世仁) 등이 유고개행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0년 뒤 이자(李耔)가 처음으로 시습의 시문을 모았다. 가장 맹렬하게 시습의 시문을 간행한 사람은 명종 때 윤춘년이었다. ‘학음고(學音稿)’라는 문집을 내기도한 그는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비공식적으로 ‘매월당서’와 ‘금오신화’ 간행했다. 그는 시습을 비난한 한 수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제가 김시습을 성인에 가깝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가짐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라며 완강히 대항했다.
선조의 왕명으로 이산해(李山海)가 주축이 되어 매월당집을 편찬하였고,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유학의 입장에서 ‘김시습전’을 지었다. 현종 때 박세당은 은둔하면서 농경을 중시한 현실 구원의 사상을 김시습에게 찾고 농업경작과 경영에 관한 책 ‘색경(穡經)’지었다.
시습은 죽고 나서야 벼슬길에 올랐다. 정조는 시습에게 ‘청간(淸簡)’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에 추증했다.<<끝>>
그동안 소설 ‘時中’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 다음 호부터는 같은 작가의 장편소설 ‘무학대사’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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