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29

醉月 2010. 10. 8. 08:30

영화는 간데없고 고즈넉한 기둥만이…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29〉 문명의 모임터,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유적 들머리. 주두 윗부분에 동물 장식을 놓은 웅장한 규모의 기둥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기념비적인 열주 양식은 고대 페르시아 건축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란 동북단의 시아파 성지 마슈하드를 이륙한 항공기는 야음을 타고 서남 방향으로 황막한 카비르 사막과 이란 고원을 넘었다. 1시간 반 만인 밤 9시10분 고도 시라즈에 착륙했다. 시라즈는 자그로스 산맥 기슭의 해발 1468m의 높은 곳에 자리잡아 제법 시원한 느낌이다. 이튿날 아침 도심에서 이스파한행 간선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75㎞ 떨어진 페르세폴리스로 향했다. 5리는 실히 될 먼 곳부터 높다란 석주가 우람한 공장 굴뚝처럼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차장, 매표소, 매점, 앞뜰은 명소답게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25년 전 찾았을 때 구질구질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페르세폴리스는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으로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기원전 569~331)의 왕도였다. 이란인들은 ‘타크테 잠시드’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로 ‘타크테’는 ‘옥좌’란 뜻이고, ‘잠시드’는 이란 전설 속 왕의 이름이니 ‘잠시드왕의 옥좌’란 의미가 된다. 건국 초부터 ‘왕중왕’(샤한샤)으로 자처한 통치자들은 행정 중심지인 수도와 종교·외교 행사지로서의 왕도를 따로 두었다. 3대인 다리우스 1세도 수도는 수사로 정했으나 왕도는 페르세폴리스로 잡았다.

 

B.C. 518년부터 60년간 지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왕도
알렉산더군이 불질러 잿더미로

 

 ‘만국의 문’ 부근에 있는 돌로 만든 목우상. 구슬띠 장식을 두른 말 조각상은 오늘날 이란에서 페르시아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도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에 짓기 시작했다. 5대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기원전 469년께) 거의 완성되었으니, 약 60년 동안 지은 셈이다. 나지막한 라흐마트(‘자비’란 뜻)산을 등지고, 대지를 돋우어 만든 높이 12m의 인공 테라스 위에 터를 잡았다. 총면적은 약 12만 8천㎡(460×280m)에 달한다. 정면에 수림 우거진 마르브 다슈 평야가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지에 터를 닦아 계단식 건물을 짓는 것은 바빌로니아식 건축법이다. 일세를 풍미한 이 거대하고 화려한 왕도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동정군이 불을 질러 하룻밤 사이 잿더미로 변했다. 영존(永存)을 꿈꾸던 철옹성은 18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유적은 무상한 역사 속에 2260년 동안 숨죽이고 파묻혔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대 동방연구소팀이 6년간 발굴하면서 비로소 옛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다. 비록 일그러지고 빛바랜 재현이지만, 세인을 그 영화의 어제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그 어제와의 만남은 입구 왼쪽에서 111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데서 시작한다. 통상 돌 한 덩어리로 한 계단씩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한 덩어리를 쪼아 다섯 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계단 높이는 말을 타고도 불편함 없이 오르도록 10㎝ 정도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면 4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다르바제 멜라)이 나타난다. 지금은 높이 10m 가량의 원주 몇 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문 양쪽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牧牛像)과 사람 얼굴에 날개 돋친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 인면수신상이 나타난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이다. 짐승의 한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곧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그 길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이악스레 노려보고 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아파다나 궁전이나 백주지(百柱址)에 이른다. 아파다나 궁전은 다리우스 1세 때 짓기 시작해 아들 대에 완공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장이나 노루즈(신년) 때 제사장으로 쓰였다. 레바논 삼나무로 지은 천장을 받치던 높이 20m의 72개 기둥 가운데 남은 13개만 봐도 웅장했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넓은 공간을 석조 기둥으로 떠받치는 공법은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다. 그래서인지 기둥 초석에 수련(睡蓮)으로 보이는 이집트 연꽃무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는데, 북쪽과 동쪽에 독특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조공자 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가 생생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23개국 조공자(사신)들의 옷차림이나 헌상물은 각양각색이다. 아르메니아는 말, 레바논은 금가락지, 바빌로니아는 소, 인도는 향수병, 에티오피아는 상아를 헌상했다. 이렇듯 각국 문명은 앞다투어 여기로 모여들고 있었다.

 

수많은 궁전 터와 독수리상
벽에 돋을새김한 조공행렬도…
화려한 문화 되살아나는듯

 

 페르시아 제왕들의 암굴묘 유적인 ‘낙쉐로스탐’. 낭떠러지에 굴을 뚫어 제왕 4명의 무덤자리를 놓은 특이한 얼개다.

동물투쟁도는 동서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미술사가들은 그 원형을 이 궁전의 것에서 찾는다. 뱀이 거북을 감은 우리네 현무도의 발상원(發想源)도 관련지을 수 있을 성싶다. 아파다나 궁전에 나타난 목우와 사자, 투쟁도의 상징성에 관해서는 학계 견해가 엇갈린다. 목우는 겨울을, 사자는 여름을 대표하는 동물로 그들의 투쟁은 계절의 이동을 표현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은 우리 사신도에 등장하는 동쪽의 청룡을 봄, 서쪽의 백호를 가을, 남쪽의 주작을 여름, 북쪽의 현무를 겨울로 배정하는 동양사상과 상통한다. 그밖에 사자는 왕을, 목우는 적을 상징하므로 사자가 목우를 덮치는 것은 왕의 절대적 통치를 시사한다는 일설도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스키타이족 조공자들이 쓴 고깔형 모자다. 우리 조상들이 써오던 절풍모(折風帽)와 신통하게도 닮은꼴이다.

유지에서 가장 큰 공간은 사방 70m의 터에 100개 기둥 흔적이 남은 백주지(‘백주의 방’)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착공해 아들 대에 완성한 공간으로 알현장이나 회의장으로 추정된다. 서쪽에 있는, 왕이 단검으로 짐승을 찌르는 ‘악마와 왕의 투쟁상’은 왕이 악을 제압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쪽 ‘옥좌의 왕상’은 28개 속주 신민들이 옥좌를 받든 모습인데, 왕 머리 위에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태양’이 그려져 신과 왕, 신민 간의 상하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별전으로는 ‘겨울궁전’이란 뜻을 지닌 다리우스 1세의 대리석 궁전 타차라(일명 ‘거울의 집’)와 ‘거주를 위한 궁전’이란 뜻으로 합성궁(合成宮)이라고도 하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 하디쉬가 있다. 그 남쪽에는 하렘(왕비의 거실)이 있다.

 

사자와 목우 투쟁도. 다리우스 1세가 지은 아파다나 궁전 출입문에 새겨져 있다. 동서미술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으로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도상과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지 한가운데의 중앙궁전은 회의실로서 동남북 세 방향에 문이 하나씩 나 있어 일명 삼문궁(트리필론)이라고도 한다. 북쪽 계단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회의 모습을 새긴 생생한 부조가 남아 있다. 동문 들머리에는 속주 신민들이 다리우스 1세의 옥좌를 받든 상들이 보이며 유지의 중앙 지점 바닥에는 사방 1m쯤 되는 검은 돌이 박혀 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동남쪽 보물창고다. 알렉산더가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를 끌어 창고 보물들을 엑바타나(오늘날 함단)로 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도 부속 박물관에는 당대 문명들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각종 도자기와 장식품, 항아리, 동전, 타다 남은 천조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3시간 동안 둘러보고 서북쪽 6㎞ 떨어진 낙쉐 로스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 ‘라비 타부스’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향긋한 꽃과 싱싱한 나무가 우거지고 물고기 노니는 연못까지 갖춰 운치가 있었다. 이란어로 ‘낙쉐’는 ‘조각’이나 ‘회화’란 뜻이고 ‘로스탐’은 전설 속 영웅의 이름이다. 한마디로 암굴묘군(岩窟墓群) 유지인데, 낭떠러지 암굴에 4명의 왕이 묻혀 있다. 암벽을 향하고 왼쪽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2세의 순이다. 다리우스 1세 외의 3기 묘주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 4기의 묘형은 기본상 동일하다. 묘실 표면은 십자형이고, 상부에 피장자의 상이나 묘비, 옥좌를 멘 이른바 ‘옥좌메기’상, 아후라 마즈다의 신상 등이 그려졌고, 하부에는 기마전투도가 부조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1세 사이의 높이 7m에 이르는 대형 ‘기마전승도’에는 260년 에데사에서 사로잡힌 동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말 위의 사산조 페르시아왕 샤푸르 1세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근에도 사산조 시대 왕들의 위풍을 보여주는 낙쉐 라잡 암각유적이 있는데, 대관식 장면과 성직자의 활동상 등이 그려져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유라시아 중심부에 우뚝 선 첫 세계적 통일 제국이다. 문화적 절충주의와 포용성을 표방하면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명 요소들을 섭취하고 조화시켜 소중한 인류 공동유산을 낳았다. 이 제국의 왕도 페르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문명의 모임터’로서 그 여진은 실크로드 동방의 한반도까지 미쳤던 것이다.

글·사진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건축사 박물관 페르세폴리스
후대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

»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은 페르세폴리스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사람 얼굴과 짐승의 몸을 한 인면수신상이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촘촘히 이어진 옛 거석 기둥들의 풍경이 인상적인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서방 건축을 아우른 고대 건축사의 박물관이다. 궁전으로 올라가는 기단부에 새겨진 23개 속국의 공물 봉헌 장면 부조는 유적의 주인인 페르시아가 이집트, 그리스, 인도 문명을 융합시킨 복합적 문명국이었음을 웅변한다.

건축사적으로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산물인 헬레니즘 건축의 모태가 되었다. 페르시아 건축은 대제국답게 웅장하고 화려한 거대 열주들이 연속되는 양식의 구조물을 즐겨 사용했는데,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세운 뒤 그리스인들도 이를 받아들여 통치의 권위성을 과시하는 기념비적 양식을 만들게 된다. 아기자기한 신전 양식이 권위적인 대칭형 동물조각을 달고, 거대한 덩치를 키우게 되었고, 대형 기둥들로 채워진 홀 얼개의 시장 건축물 ‘스토아’가 유행한 것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종모양 기둥과 동물들을 그 기둥머리(주두) 위쪽에 결합시킨 페르시아 건축의 유풍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왕의 사자 석주 등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건축사가들은 페르세폴리스 건축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 그리스 양식과 애초부터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4세기께 소아시아 해안지역의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꾸준히 조공을 바치면서 유명한 이오니아식 기둥양식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1세가 세운 페르세폴리스 아케메네스 궁의 기둥 양식은 주두 윗부분의 소머리 장식을 제외하면 이오니아 식과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 이란 문화유산의 주요 상징이 된 주두의 동물머리 장식은 후대 헬레니즘의 장식조각에 차용되기도 했다. 시차를 두고 정치적 문화적 필요성에 따라 서로의 양식을 수용하는 그리스-페르시아의 실리적 건축교류를 증언하는 유적이 바로 페르세폴리스다.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군주와 문인들에게 영감과 향수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근세 유럽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영원한 왕도로서 동경의 도시가 되었듯이 중근동, 중앙아시아 지배자들은 페르세폴리스의 장대한 유적을 그리며 호연지기의 꿈을 키웠다. 16세기 영국 극작가 말로는 희곡 〈템벌레인 대왕〉에서 정복군주 티무르가 페르세폴리스 언덕을 말 타고 내달리는 야망을 안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고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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