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영기로 본 산하기행

醉月 2010. 9. 22. 14:45

강화도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지난 9월 28일 여명(黎明)이 틀 무렵, 강화로 향하는 2차선 도로엔 차가 많았다. 강화로 가는 길, 태풍처럼 거칠었던 반만년 민족의 역사가 서해의 작은 섬에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단군왕검과 참성단, 39년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의 탄생, 삼별초의 한과 조선말 병인·신미양요와 운양호사건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가 감당하기 힘든 질곡의 역사를 어떻게 홀로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영기(靈氣)로 본 산하기행(山河紀行)’의 시작을 고조선 대제국의 성역인 강화도로 결정했다.

강화에 도착하자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을 중심으로 강력한 양기(陽氣)가 파형을 이루며 섬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기운이 내 몸을 통과하는 순간 발끝부터 또다른 기운이 치고 올라왔다. 섬뜩한 상극(相剋)의 기운이었다.

강화 주변의 바다는 세계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으로, 동양철학의 견지로 보면 달의 영향으로 음(陰)의 기운이 충만한 지역이다. 즉 강화 앞바다의 음기와 마니산의 양기가 충돌해 상극의 기운을 생성하고 있다. 상극의 기운은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기운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면 크게 생(生)하지만, 반대로 역풍을 만나면 처참히 멸(滅)하는 극생극멸(極生極滅),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다.

극생(極生)의 대표적 역사는 단군왕검이 이룩한 고조선이다. 백두산이나 한라산, 혹은 계룡산이나 지리산 등 한반도에 수많은 신령한 장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작은 섬 강화의 마니산에서 왕조의 번창과 민족역사의 중흥을 위한 제천의식을 올렸을까. 제정일치 시대였던 고조선의 단군은 왕이자 제사장으로 고도의 영능력자였다. 즉 땅의 기운을 누구보다 잘 읽는 단군이 해지는 서쪽 땅의 머리인 강화도 마니산을 제천의식을 올리기에 가장 좋은 터로 파악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강화는 섬이 아니라 김포반도와 연결된 육지였으며,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한반도 지형의 특색을 고려하면 서쪽에 높은 산이 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니산은 달의 기운이 충만한 서해바다를 향해 높게 솟아오른 형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한다.

강화엔 극멸(極滅)의 역사도 존재한다. 고려시대부터 천혜의 요새라는 이점을 안고 왕의 몽진(蒙塵)장소로 명성을 떨쳤던 강화는 조선 말 서양의 문호개방압력으로 인해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고종 8년 신미양요는 강화의 비극이었다.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결과 미국 측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조선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여명이라는, 학살 수준의 완패를 당한 것이다. 그 후 강화도는 대표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 등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명멸(明滅)하는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양기의 시작점, 마니산이었다. 가을 정취가 한껏 묻어나는 마니산은 해발 467m로, 기암괴석이 정상을 향해 치솟아 있는 모양이 하늘을 향한 관문 같은 느낌을 주며, 서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승려 기화(己和)가 자신의 당호(堂號)를 따서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 이름을 붙인 절경이 펼쳐지고 있다. 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  철책으로 사방을 두른 참성단은 성스러운 제단의 모습이 아니었다.

참성단까진 이름도 천사(千四), 개수도 1004개인 ‘1004 계단’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오르고 있노라니 왜 마니산을 두고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 했는지 실감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 하늘에 한층 가까워진 기분인 데다 가을녘 마니산의 절경이 혼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참성단은 거친 돌을 다듬어 쌓은 제단으로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인 정방형이다. 이는 상고시대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참성단의 축조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이 ‘참성단시’에 “이 단이 하늘이 만든 것은 아닌데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어라”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고 보여진다.

누가 쌓았건 참성단이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참성단에서 북으로는 백두산 천지까지, 남으로는 한라산 백록담까지에 이르는 거리가 똑같다. 그야말로 ‘한반도의 배꼽’인 것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기운뿐 아니라 전 국토의 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영산(靈山)인 만큼 하늘과 땅에 제사 드리는 성지로서는 으뜸가는 곳이다.

‘참성단’의 말뜻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한자 뜻으로 풀이해 ‘구덩이(塹)를 파고 별(星)을 바라보는 단(壇)’ 정도로 해석, 천문대 역할을 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참성단을 글자 그대로 ‘참으로 성스러운 단’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두나 구결처럼 순수 우리 말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후대에 그 한자의 뜻이 더해진 게 아닐까.

그러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참성단은 현재 불행히도 일반인에 개방이 안되고 있다. 휴전선의 ‘마음의 철책’도 걷히고 있는 이 시점에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을 둘러싼 흉측한 철책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곳곳에 ‘올라가지 마시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과 함께 군부대에서나 사용함 직한 철책으로 사방을 두른 참성단은 더 이상 성스러운 제단의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사적을 보호하고자 하려는 당국의 입장은 이해한다. 단군 동상의 목이 잘리는 사건이 생기는 이 땅에, 단군성지인 참성단 역시 훼손 대상이 될지 모른다.

여기에 무속인들의 지나친 기도도 한몫했을 것이다. 얼마 전 모 종교단체의 교주가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고 제를 올리는 등 참성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에게 기 받는 장소로 알려졌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다수 지각있는 국민의 수준을 무시하면서 굳이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을 이런 조악한 방법으로 보호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든다.

예로부터 참성단에서 올려지는 제천의식은 곧 하늘님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민족의 자존을 확인하는 행사였다. 국왕이 제주가 됨으로써 그 권위를 인정받고, 함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온 백성의 뜻이 하나로 모일 수 있었다. 참성단은 심지어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정립되었던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나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 불길함을 해소하기 위한 해괴제를 지내기도 하여 종교성지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전국체전의 성화 점화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전통을 잇고 있는 명실공히 민족의 성역이 되고 있다.

신화나 전설은 영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워지거나 왜곡될지언정 신화나 전설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 영원히 존재한다. 민족의 신화가 살아 숨쉬는 참성단이 과거의 모습을 되찾길 바라면서 강화의 또 다른 영기(靈氣)를 찾아 발길을 돌렸다.

 

▲  고려산 오련지

하늘은 찬연하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개성의 송악산도 볼 수 있다”는 등산객의 말에 귀가 솔깃하다. 여기는 강화도 고려산. 해발 436m로 강화 6대산의 하나이며 마니산과 함께 단연 강화의 명산으로 손꼽힌다. 고려산은 봄이면 분홍빛으로 물드는 약 20여만평의 진달래 군락지가, 가을이면 능선을 따라 은빛 억새가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 절경을 자랑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워낙 군사보호시설이 많아 민간인의 출입이 쉽지 않았고 접근도로 또한 용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만도 벌써 네다섯 개의 군부대가 눈에 띈다. 별로 높지 않은 고려산에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는 까닭은 지리적 조건과 함께 고려산만이 갖고 있는 호전적이며 패기 넘치는 기운도 한몫한다. 북에서부터 뻗어내려온 용처럼 단단한 마식령산맥의 정맥(正脈)이 강화만에서 침강(沈降)했다가 융기(隆起)하여 혈(穴)을 이룬 산이 고려산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남아(男兒)의 진취적인 기운은 민족의 영웅도 탄생시켰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치마대 능선과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닦으며 천하의 패권을 거머쥘 용장(勇將)의 꿈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상극(相剋)의 기운 탓 극생극멸의 삶

백련사부터 정상까지는 약 30분. 그러나 산 정상에는 레이더 기지가 있어 오를 수 없었다. 대신 바로 밑 공터에서 정상에 오른 기분으로 멀리 개성 땅을 바라봤다. 날씨가 더 맑았으면 송악산과 연백, 예성강까지 한눈에 들어왔겠지만 불행히 구름 너머로 그 위치만 짐작할 뿐이다. 북으로는 개성, 동으로는 강화대교와 김포, 남으로는 마니산과 서해바다, 서로는 석모도까지 천하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순간 이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각기 다른 꿈을 꾸었을 세 명의 위인이 뇌리를 스쳤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고려 무신정권의 일인자 최우(崔瑀), 그리고 비운의 왕 고려 고종이다.

강화 특유의 상극(相剋)의 기운 탓인지 그들의 삶도 극생극멸(極生極滅)이 뚜렷했다. 고려산에서 태어난 연개소문은 당(唐)을 대파한 천하맹장으로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지만 권력을 자기 가문에 집중시키는 바람에 그가 죽은 뒤 고구려도 멸망일로를 걷게 된다. 고려의 최씨 무인정권 역시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다. 아버지 최충헌(崔忠獻)의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수도를 강화로 옮겨 항몽(抗蒙)을 펼치며 아들 최항(崔沆), 손자 최의까지 권력이 이어진다. 하지만 최의가 살해되자 무인정권 60년도 막을 내리고 이듬해 원(元)과 화친함으로써 고려는 굴욕적인 원의 섭정기로 접어들고 만다. 46년 재위 기간 동안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고려 고종은 아이러니하게도 원과 화친을 시도하자마자 생을 마감한다.

산자락을 내려가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능 하나가 보인다.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긴 하지만 어쩐지 쓸쓸하고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 능의 주인이 바로 고종이다. 왕이었으되 제대로 왕 노릇을 하지 못했고 가장 화려한 거처를 두고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신세나 다름없었던 고종. 그의 능 앞에 서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기운이 가슴 한구석을 저민다.

▲  고려궁지 뒤로 보이는 송악산.

최씨 권력의 흔적, 초라한 궁터로 남아

고려산을 뒤로 하고 1232년부터 1270년의 개경 환도(還都) 전까지 항몽기 고려정권의 중심이었던 고려 궁지로 향했다.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을 당시 최우는 계속되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개경으로부터 온갖 물자를 들여오고 수천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궁궐을 지었다. 강화 고려궁의 뒷산인 북산을 개경처럼 ‘송악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궐의 배치도 개경과 똑같이 했다. 그렇게 하여 또 하나의 개경이 되어버린 강화도를 사람들은 ‘강도(江都)’라 하였다. 자신의 사저를 궁궐만큼 호화스럽게 꾸며놓은 최우는 강도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했다. 때때로 삼별초를 내륙으로 보내 몽골군의 정세를 염탐하거나 기습공격을 감행하기도 하는 등 대몽 항쟁도 계속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고려 궁지는 초라했다. 몽골과의 화친이 성립된 뒤 몽골은 ‘삼별초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고려 궁궐을 태워버렸으며 남아있던 몇 개의 건물마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이 자리에 세워졌던 조선의 이궁마저 병인양요 때 전소됐다. 현재 몇 채의 건물이 복원되었기는 하나 옛 강도의 모습을 엿보기에는 역부족이다.

과연 백성을 내버려둔 채 조정만 강화도로 피란한 것은 진정 나라를 위한 천도였을까, 아니면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술책이었을까.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인 것만은 확실하다. 일단 육지로부터의 물길은 짧으나 간조(干潮) 차이가 크고, 해안가가 대부분 절벽이라 배를 대고 내릴 곳이 없다. 해안선 굴곡이 심해서 물살이 세므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겨울이면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하류에서 흘러 들어온 얼음조각과, 썰물 때 언 바닷물이 밀물 때 밀려들어 유빙(流氷)으로 가득한 바다에서는 배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해전에 약한 몽골이었기에 강화도는 더더욱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민족의 시원(始原)을 향한 본능?

여기에 나는 좀 다른 해석을 내려보고 싶다. 지난 호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강화도는 한반도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중심이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태동케 한 시원지다. 모든 사람에게는 위기에 처했을 때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만신창이로 짓밟혔을 때 사람들이 강화도를 떠올린 것도 그러한 본능의 발현이었다.

또한 개경을 가로지르는 예성강이 강화만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점에서 강화도는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전진기지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특히 명장 연개소문을 낳은 고려산 등, 강한 군인의 기상이 감도는 요새가 곳곳에 있어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고려군의 사기를 드높여 세계 제일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몽골 대군과 대등한 전투를 펼칠 수 있도록 기를 북돋웠을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강도는 당시 실제적인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몽골에 기어이 항전하겠다는 정신의 구심점 역할까지도 톡톡히 해냈던 것임에 틀림없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화려했을 고려궁궐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휑한 궁터만 남아 권력의 무상함을 전하고 있다. 고려궁지를 걷고 있노라니 바람결에 최우 영가와 고종 영가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최우 영가는 “내가 고려다. 내가 살아있는 한 고려는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고종 영가는 “강화도는 감옥이었다. 나는 강화에서 단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서해를 보니 바다 위로 해가 지고 있다. 찬란했던 태양이 마지막 빛을 화려하게 뿜어내고 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낙조의 순간이 꼭 강화도를 닮아있었다.

 

▲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모신 사당인 '부근당'

‘강화’ 하면 생각나는 두 명의 왕이 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燕山君)과 25대 왕 철종(哲宗)이다. 같은 왕이었지만 둘의 운명은 천지차이였다. 연산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와 죽었으며, 떠꺼머리 농사꾼이었던 철종은 졸지에 택군(擇君)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도대체 강화의 무엇이, 왕을 만들기도, 또 왕을 죽이기도 하는 걸까. 그 우문(愚問)을 풀기 위해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철종이 잠시 머물렀던 잠저소가 있는 교동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교동도 월선리 선착장에 내리자 왕족 영가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남 해남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政爭)에서 밀려난 선비들은 멀리 보내면 그만이었지만 왕족은 달랐다. 한양과 가까운 곳에 격리시켜 그들의 동태를 항상 면밀히 살펴야만 했고, 그러기에 교동도는 최적의 유배지였던 셈이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부터 조선시대 안평대군(安平大君), 임해군(臨海君), 능창대군(綾昌大君) 등 11명의 왕족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며 특히 연산군은 유배온 지 두 달 만에 죽어 이곳에 가묘를 썼고, 그의 아들과 부인도 이곳에서 명을 다했다.

“연산군 유배지는 말이 많습니다. ‘연산군 적거지’ 표지석이 있는 읍내리와 신곡동 신골, 그리고 고구리 영산골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인데요.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동행한 지인은 내 얼굴만 바라봤다. 영능력으로 후보지 1순위를 정해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가만히 연산군 영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지체없이 읍내리로 향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 성곽의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교동읍성을 지나 연산군 유배지에 도착하자 가슴이 턱 막혔다. 늙은 오동나무가 드리운 옛 우물터 한편에 ‘연산군 적거지’라는 초라한 표지석과 함께 녹슨 안내판이 서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모신 사당인 ‘부근당’이 보였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왕의 유배지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이곳은 연산군이 유배온 지 두 달 만에 죽은 곳입니다. 가묘는 다른 곳에 썼을 겁니다.” 영가의 부름이 없었다면 사당인지도 몰랐을 창고처럼 생긴 부근당의 노란 문을 열며 내가 말했다. 1평 남짓의, 한 사람이 절하기도 부족한 공간. 그곳에 연산군과 폐비 신씨를 그린 무속화가 걸려 있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밑에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초상도 함께 했다. 마을 사람들은 연산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놓고 1년에 한 번 굿을 올리고 있었다.

향을 사르자 연산군 영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정말 나쁜 왕이었다면 나를 폐위시킨 그들이 명나라에 거짓을 고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두 여자(폐비 윤씨와 인수대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밖에 없소.”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명(明)이 인정하지 않으면 조선의 왕이 될 수 없었던 바, 뚜렷한 폐위 사유를 찾을 수 없었던 공신들은 ‘연산군이 자의로 진성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를 안 연산군은 분통함에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 영가의 성토는 계속됐다. 그는 재위 12년 동안 신권(臣權)이 도전할 수 없는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싸웠지만 번번이 신료들과 대립해, 언젠가 그들이 자신을 쫓아내리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알려진 것처럼 색만 밝히는 패륜왕도 아니었다며 자신의 후궁은 오직 한 명뿐이었고, 애첩이자 요부로 알려진 장녹수(張綠水)도 빈도, 귀인도 아닌 겨우 정3품 소용(昭容)에 불과한 후궁으로, 그녀보다 왕비인 신씨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었다고 고백했다.

영가의 안내로 연산군의 가묘가 있던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당시 현청이 있었다는 고구리 영산골이었다. 가묘가 있던 곳의 지기(地氣)는 현재 연산군묘가 있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터와는 대조적이었다. 1991년 4월, 방학동 연산군묘는 수령 800년 된 은행나무로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 환경운동가들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고사 위기를 맞은 은행나무를 지키기 위해 단식농성까지 불사했다. 당시를 회상하던 연산군 영가는 자신은 은행나무보다 못한 존재였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죽음에 관한 비밀도 밝혔다. “나는 역질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한 것이오.”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이 진성대군에게 자의적으로 왕위를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明)에 알려질까봐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었다.

영가는 현재의 연산군묘보다 가묘가 있던 교동도 영산골을 더 좋아했다. 연산군묘는 부인 신씨가 상부에 적극 상언해 교동도에서 한양 근방이던 당시 경기도 양주로 이장했지만 불행히 그 터가 좋지 않았다. 영가도 이를 알고 있었는지 영산골에 그대로 묻혀 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 유배지로 알려졌던 신곡동 신골로 향했다.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로 불렸다는 이곳은 연산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황과 그의 부인이 최후를 맞은 비극의 장소였다. 폐세자 황은 유배지를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이를 지켜본 부인은 충격으로 목을 매 자결했다. 현재 그곳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들의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  청종의 생가인 용흥군

철종과 연산군의 운명은 묘하게 교차했다. 그 시작점은 바로 교동도의 철종 잠저소다. 정조(正祖)대왕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범(元範·철종)은 조부 은언군이 천주교 신자로 죽고, 큰형인 원경이 민진용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자 부친 진계군을 따라 강화도로 숨어든다. 13세 때, 그는 진계군과 함께 3개월 동안 교동도에서 피신생활을 했는데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 연산군 적거지가 철종 잠저소와 일치하거나, 혹은 아주 근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염사로 본 결과, 두 장소는 거의 일치했다. 둘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것이다. 한 장소에서 어떤 왕은 죽고, 어떤 소년은 무사히 살아남아 훗날 왕이 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었다. 철종은 안동 김씨에 의해 택군되어 정인(情人) 영순과 헤어져 한양으로 떠나지만 재위 14년 만인 33세에 후사없이 요절한다. 이는 연산군이 재위 12년 만에 물러나 31세에 요절한 것과 거의 같은 나이다. 또한 철종은 자신을 왕으로 올린 순원왕후가 사망하자마자 세도정치에서 탈피해 왕권을 확립하려다 안동 김씨 세력에 부딪혀 좌절한 뒤 주색에 빠진다. 연산군 역시 왕권확립에 실패한 뒤 신료들에게 흠집이 될 만한 행동들을 저지르고 만다.

보전은 잘 되어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철종의 잠저, 강화읍 용흥궁에서 만난 철종 영가는 자신은 한양으로 유배를 떠난 것이었다며 자유와 사랑, 행복을 앗아간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을 원망했다. 그래서였을까. 철종이 죽자마자 풍양 조씨와 대원군이 득세를 하며 안동 김씨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엇갈린 운명이었던 연산군과 철종. 그러나 그들은 선후만 다를 뿐 결국 같은 그릇의 운명을 타고난 풍운아였다.

 

▲  강화도의 흙빛 바다. 세개의 강이 합쳐지는데다 간만의 차가 커서 흙빛을 띠고 있다.

강화도를 처음 찾은 사람은 바다빛깔에 실망한다. 단군 할아버님의 신화가 서려있고 비록 섬이긴 해도 물산(物産)이 넉넉한 유서깊은 고장인지라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도 찾고 싶은 관광지로 꼽힌다. 게다가 섬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상상하며 찾게 마련이지만 막상 강화대교에 올라 처음 대하는 바다색은 흙빛이다.

강화도의 흙빛 바다는 간만의 차가 큰 탓에 개펄이 가라앉을 새가 없고 또한 이곳이 세 개의 강이 합치는 지점이기 때문에 자연히 물굽이가 센 이유도 한몫한다. 남쪽으로 흐르던 임진강과 북류하던 한강이 김포 북부를 휘감아 돌아온 두 강의 물은 북에서 남쪽으로 흘러들어온 예성강과 만나 삼합수(三合水)를 이루게 된다.

세 개의 큰 강이 합치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강화도말고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세 줄기 강이 한곳에 모이고 거기에 해수(海水)가 들이닥치니 물굽이인들 유순하겠으며 그 속인들 맑겠는가. 어마어마한 용틀임과 함께 물속 땅거죽을 엄청난 에너지로 긁어대기를 멈추지 아니하리라.

뛰어난 영적 능력의 소유자였던 단군(檀君)은 바로 이런 강화도의 엄청난 지기(地氣)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이야말로 국기(國基)를 세우고 백성과 더불어 수만 년을 살아도 될 땅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 아들(부루·夫婁, 부소·夫蘇, 부우·夫虞)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三朗城)의 전설을 낳게 했다. 나라의 첫째 조건은 역시 튼튼한 국방에 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우리나라 국방의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랑성 안에는 정족창(鼎足倉)과 진해창(鎭海倉)과 같은 군창(軍倉)뿐 아니라 조선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藏史閣) 등을 둬 유사시에 국가적 보루로서 몫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꼽았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강화도는 분단 이후 남북대치 상황에서 최전방인 동시에 수도 서울을 지키는 최후의 요새가 되는 지역이 아닌가.

발원지가 각기 다른 세 줄기 강물과 바닷물이 한곳에 모여 분출하는 흙빛 기운을 몸으로 감지하며 강화도가 이 나라 역사 속에서 차지한 비중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또다른 에너지의 보고(寶庫)임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흙빛은 무엇인가. 온갖 기운을 흡입하고 혼돈과 생명의 태동을 상징한다. 단군성조가 이 땅에서 하늘에 고하고 당신의 자손이 뿌리내려 살도록 한 예지의 힘이 바로 이것임을 믿게 된다.

흔히 우리 민족을 단일민족 혹은 백의민족이라 일컫는다. 한 핏줄로 이루어진 순수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민족의 혈통이 하나라는 의미는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신빙성이나 가치를 갖지 못한다. 과연 우리 민족의 혈통은 단일했는가는 새로운 차원에서 운위될 부분이다.

우리 민족의 근간을 동이족(東夷族)이 중심이 된 복합민족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견해라는 생각이다. 이는 강화도가 민족의 시원지(始原地)가 된 연유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를 테면 청동검을 사용하고 축성술에 능했던 한씨 조선족, 항해술과 관개농법을 익힌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일본)의 근간이 된 오족, 활과 마술에 능했던 스키타이족(신라인)이 혼합되어 한반도를 차지하고 살게 된 것이 우리 민족의 본래 모습이다.

세계화 시대의 요충지… 되살아나는 영적 기운

한씨 조선의 마지막 왕이 바로 단군으로 지칭되는 준왕(準王)이다. 영통한 인물이었던 그가 강화에 정착해서 고조선을 세워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었으며 조양이라는 곳에서 막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관점에서 단군의 발원지가 평양이라며 엄청난 토목공사로 단군릉을 만든 북한의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강화의 영적 기운을 알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마저도 체제수호의 도구로 삼는 작태라 할 것이다. 통일이 되면 무너질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형 비류(沸流)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彌鄒忽) 즉 강화도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가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동생이 뿌리를 내린 미추홀을 떠나 웅진(公州) 부근에서 현지인과 더불어 또 하나의 백제를 일궈 명맥을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강화도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또한 강화도와 인연이 있음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倭)가 오족이었다는 설에서 비롯된다. 항해술을 익힌 그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일으키고 바다를 건너 왜를 이룬 것이다. 그 예로 백제의 무령왕(武寧王)은 나이 마흔에 비로소 왕에 오른다. 그런데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백제와 왜가 같은 문화, 특히 언어가 같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실 그 시대의 조상은 일본과 같은 말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만약 삼국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지금의 언어는 일본과 비슷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이 백제와 맥을 같이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설에 대한 진위 여부는 별개의 사안이다. 다만 영적 고찰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기운을 강화도는 간직하고 있고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강화는 한반도의 머리였다. 따라서 백두산은 다리에 해당한다. 우리는 잠시 그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강화도는 영기(靈氣)가 서린 머리로서의 몫을 이미 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은 강화도의 지맥이 맺힌 곳이다. 그곳에 세계 각국의 항공기가 드나드는 거대한 비행장이 놓여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람의 머리와 기술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올림픽국제공항의 거대한 십자주차장보다 훨씬 큰 규모의 비행장인 인천공항은 지금보다 세 배는 더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제 여객선뿐 아니라 자가용 비행기를 탄 세계인이 언제든 우리나라를 찾아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중·일 중심지임과 동시에 국제적인 경제자유특구로서 세계적 외교·경제·문화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통일은 자연현상과도 같이 따라오는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이미 새로 놓인 대교를 통해 개성과 해주, 평양을 거쳐 대륙까지 뻗을 탄탄대로가 놓일 날이 곧 올 것이다. 강화도의 흙빛 바다 속에서 이미 새로운 한반도의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룡산

 

▲  신도안 내 주초석

‘佛宗佛朴’의 비밀을 찾아서

1974년경부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2국립묘지(대전 현충원) 건립지와 함께 은밀히 새로운 수도 이전지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일찍이 명당으로 꼽혀왔던 신도안(新都內·신도내)을 중심으로 한 계룡산(鷄龍山) 일대였다. 그 무렵 나는 초능력자로 알려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청해왔다. 옛 사람이 쓴 글자를 감정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소문이 최고권부에까지 알려져 신도안을 포함한 계룡산 일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서각자(書刻字)와 그곳이 과연 명당인지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신도안의 옛 궁궐터 어딘가에 써있다는 글자와 계룡산 오송대 계곡 너럭바위 글자, 그리고 연천봉 정상 바위에 있는 오래된 글자 등 모두 세 군데의 글자였다.

지금도 나는 계룡산을 찾을 적마다 늘 가슴이 설렌다. 지금은 서울에서 불과 두세 시간, 한 달이면 적어도 한두 번씩 가게 되는 산이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계룡산이 예로부터 풍수가들이 알아주는 신령스러운 명산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열한 살 되던 해(1957년) 봄이었다. 당시 진해 경찰서장에서 공주 경찰서장으로 전근가는 부친을 따라 대전역까지 마중나온 경무주임과 함께 지프를 타고 공주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1년3개월 머물렀던 공주는 결국 비극적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이다. 부친을 따라 계룡산 일대의 많은 사찰과 명소를 찾아다니는 등 아름다운 추억도 많지만, 공주는 부친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초 계룡산 계곡에는 암용추와 숫용추라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생김새가 각각 남녀의 생식기 형상을 하고 있어 계룡산의 심벌로 꼽히고 있었다. 그 중 숫용추 계곡 훼손사건이 생겨 공주 일대가 떠들썩했다. 그 무렵 계곡 인근에서는 길을 닦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워낙 험한 지역이어서 공사업체에서는 폭약을 터뜨려 길을 내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숫용추 웅덩이까지 메워버리는 등 계곡을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아신 부친은 현장을 다녀오신 후 매우 침울하시고 걱정에 잠기셨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8월 9일 부친은 비명에 가셨다. 부친의 장례는 공주 사람들의 애도 속에 5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훼손되었던 숫용추가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어 주민들이 기뻐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유년기에 있었던 부친의 죽음과 일련의 사건은 그후 필자의 인생역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상서로운 기운

해독 부탁을 받은 글자의 소재지를 찾아 먼저 신도안을 찾았다. 그곳 수양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글자의 소재지를 수소문했다. 이튿날 드디어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스승으로 알려진 무학대사가 썼다는 ‘佛宗佛朴’ 네 글자가 새겨진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신도안을 천도지로 정하고 10개월 동안 궁궐터를 닦는 과정에서 누군가 새겨놓은 글자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혹세무민하기 위해 일부러 새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글자의 내용은 해석하기 애매했다. 불교와 박(朴)씨 성(姓)에 대한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아전인수 격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도안은 일찍이 천도지로 꼽혀온 천하명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이 터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의 심정과 연결해보면 그 글자의 뜻이 묘해진다. 공교롭게도 박씨 성과 관련해 신도안을 처음 천도지로 택하고자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 무학대사였고 그의 속성(俗姓)이 박씨였다는 것. 또 이곳에 종단건물을 지은 신흥종교의 교주도 박씨였으며,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같은 성씨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구에 대한 해석이 더욱 괴이쩍었다.

두 번째로 오성계곡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黃牛萬國活南朝鮮 文明開花三千里 領導 朴瞻濟’ ‘黃牛如正熙將守 道術運通九萬里’라는 글자를 찾아나섰다. 당시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산길을 따라 약 400m를 올라 나무다리를 건너 돌층계를 지나는 등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 너럭바위 여기저기에 잡다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그 중 박첨제라는 사람이 썼다는 서른네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며 언제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판독해보니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인 황소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운수가 오래가리라는 것과 영도자 박씨가 뜻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눈에도 오래된 글자는 아니었다. 조잡하게 쓴 글자인 데다 내용도 다분히 의도적인 글귀였다.

마지막으로 연천봉 석각(石刻)을 찾아 힘겨운 등반을 해야 했다. 연천봉 정상 바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方百馬角 口惑禾生’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글을 참자(讒字)라고 한다. 풀이하자면 ‘방(方)’은 ‘4(넷)’를 뜻하는 것으로, ‘방백(方百)’은 ‘사백(400)’이라는 숫자가 된다. 옛날에는 말 ‘마(馬)’자와 소 ‘우(牛)’자를 같이 쓰면서 ‘8(팔)’을 의미했고, 짐승의 뿔(각·角)은 두 개인지라 ‘각(角)’자는 ‘2(둘)’를 뜻했다. 따라서 ‘마각(馬角)’은 ‘82’를 일컫는다. ‘구혹(口惑)’은 나라 ‘국(國)’자, ‘화생(禾生)’은 ‘옮긴다’는 뜻의 ‘이(移)’자가 된다. 따라서 모두 합해보면 ‘482년 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옮겨간다면 망한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조선이 망하고 새 시대가 계룡산에서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인 것이다. 조선은 이보다 37년을 더 지탱했으나 얼추 예언이 맞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굳이 첨언하자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백성의 소망을 상징하는 글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도안에 ‘충효사(忠孝寺)라는 절 밖에 모신 부처님(石佛)의 얼굴이 흰색으로 변하면 정도령(鄭道令)이 와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었다. 즉 ‘계룡산 돌이 희게 변할 때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었다. 이 역시 연천봉 정상 바위에 쓰여진 글씨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언서로 알려진 정감록의 예언과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장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용을 꿰뚫어 안다고 해도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인 것이다. 시간이 가면 바위도 마모돼 속살을 드러내듯이 비밀은 자루 속의 송곳처럼 솟아나게 마련이다.

내가 다녀가고 이듬해인 1978년에 신도안 지역을 재정비하기 위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년 뒤 ‘최고지도자의 유고(有故)’라는 비극적 사건과 정권교체의 와중에서 이곳은 잠시 잊혀졌다. 그 후 이곳에 있던 잡다한 종교단체의 시설물이 철거된 것이 1983년 6월 20일경부터였고, 신도안에 계룡대 골프장이 건설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대전 현충원은 1979년에 착공해서 당초 예정대로 1985년에 마무리되었다.

계룡산은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을 품고 있다. 상서로운 기운이 신도안을 감싸고 있고, 그 터전에 옛 사람이 전해온 구세성인(救世聖人)의 궁궐을 짓기 위한 삼군의 건장한 건아들이 열심히 지신밟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살기 좋은 세상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백성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서.

 

▲  신원사 중악단

‘계룡산(鷄龍山)’ 하면 단박에 ‘도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직접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코믹한 뉘앙스를 주는 산이다. ‘계룡산에서 몇 십 년을 수도한 뒤 하산한 도인’이라는 얼치기들이 잊을 만하면 사건·사고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탓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왜 하필 선무당이 계룡산을 들먹이는가?

그렇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계룡산은 어느덧 영산(靈山)으로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계룡산(845.1m)은 영적인 기운의 대표와도 같은 산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묘하게도 태극의 형상을 이루는 중심에 계룡산이 서 있다. 계룡산 전체를 휘감고 도는 영기의 정점에는 신도안(新都內)이 있다. 신도안에 이르면 계룡산 이름의 유래가 드러난다. ‘닭벼슬을 쓴 용’(鷄龍)의 형상.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머리봉(혹은 부리봉)은 닭부리 모양에 다름아니다.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왕사인 무학(無學)대사가 ‘금닭이 알을 품었다’(金鷄抱卵), ‘용이 날아올라 하늘로 솟구친다’(飛龍昇天)고 했던 모습 그대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  신원사 중악단 내부

필자는 매월 16일 대전 유성(儒城)으로 내려간다. 국내외에서 찾아온 소중한 인연들과 좋은 얘기를 주고받는 모임이 유성의 후암정사에 마련되는 날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계룡산에 들곤 한다. 이성계 일행과 자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30년 전 당시 권부(權府)의 의뢰로 계룡산 일대의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처음 대면한 이래 그 어느 영가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존재가 태조다.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招魂)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무학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아왔던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의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대사도 한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리산 산신령도 여성인데, 계룡산 할머니의 딸이다. 딸이지만 어머니보다 몸집은 훨씬 크다. 지리산이 계룡산보다 훨씬 장대하듯이.

▲  계룡산 정도령 바위

유성의 법당에는 할머니의 자리(목상)가 있다. 가끔씩 산을 내려와 쉬다가고는 한다. 할머니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특히 외국인을 몹시 싫어한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위로는 중국 대륙, 아래로는 동남아로 뻗어나가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탐을 낸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 역시 계룡산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겼고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었다. 경성(京城·현재의 서울) 남산에 이미 신궁이 있었건만 수도가 아닌 지역에 제2의 신궁을 건설하는 파격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다. 계룡산의 상서로운 기운이 일제 패망을 재촉했다.

계룡산은 미국도 배척했다.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의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유행하는 CF 노래의 가사를 빌려 계룡산의 심경을 전한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  계룡산 옥녀봉과 유성법당.

계룡산(鷄龍山·845.1m)은 여신(女神)이 관장하는 산이다. 그래서 계룡산의 주산(主山)도 옥녀봉, 즉 여성이다. 할머니 산신령이 옥녀봉에 앉은 채 왼쪽에 장군봉(將軍峰), 오른쪽으로 문필봉(文筆峰)을 거느리고 있다. 각각 무신(武臣), 문신(文臣)이다.

‘할머니’는 푸근한 호칭이다. 계룡산 할머니 신령도 인간세계의 할머니와 마찬가지다. 공포심이나 경외감을 자극해 인간 위에 군림하려드는 법이 없다. 치사랑은 바라지 않는다. 내리사랑에 만족할 따름이다.

사람이 죽은 게 신이라 이승에서의 품격과 습관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초혼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애를 먹는다. 사어(死語)와 고어(古語) 투성이라 이해하려면 진땀을 흘려야 한다.

계룡산 할머니의 인간시절 정체에 관해서는 모른다.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그런 것 알아서 뭣하게”라며 공(公)과 사(私)에 선을 분명히 긋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 산신(山神)은 요즘 인간보다 귀신을 돌보느라 더 바쁘다.

“꼭 20년 전(계룡산 아래 유성에) 국립현충원이 생긴 이후 산 사람 챙길 여유가 없어졌지. 나라 지키다 젊어서 죽은 혼들이 하도 많아서….” 호국 영령들은 탐욕스럽지 않아 한층 더 정이 간다는 것이다.

좌청룡(左靑龍)처럼 할머니를 보좌하는 무신은 신임이다. 270여년간 할머니를 모시던 장군봉의 전임 무골은 수년 전 천계로 축출됐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할머니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아, 그놈이 멀쩡한 사람을 스물다섯인가 죽였지 뭔가. 옥녀봉 아래 골프장이 들어설 때쯤 근처 마을 남자들을 죄다 없애버렸어. 좋은 땅 욕심이 많은 장군이었지. 제 명당이 파헤쳐지는 걸 보고 엉뚱한 데다 화풀이를 한 거야.” 문제의 골프장 마을에서 오랜 세월 구전돼온 화두와도 같은 암시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  유성법당 여산신님.

‘산에 불 들어오면 도망쳐라.’ 이 말에 숨은 뜻은 ‘골프장 공사가 시작되면 마을을 떠나라’는 예고였던 것이다. 비명횡사한 이들은 결국 장군신(將軍神)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마을에 눌러 앉은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소름이 돋았다.

계룡산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구, 오묘한 빛 등으로 인간을 시험하기도 한다. 연천봉(連天峰)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을 파자하면 ‘사백팔십이 국이(四百八十二 國移)’, 즉 ‘조선왕조의 명운은 482년’이라는 힌트다. (方=네모=四, 馬=牛=八十, 角=뿔=2개=二, 口+或=國, 禾+生=移)

갑사에서 금잔디 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에 터를 잡은 신흥암에는 ‘천진보탑’이라는 바위기둥이 있다. 이 탑의 꼭대기에서 영롱한 빛이 나온다. 물론 아무나 볼 수 있는 빛은 아니다. 신흥암은 불상 대신 천진보탑을 모시고 있다. 영기(靈氣)가 발달한 불가(佛家)의 스님들이 빛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계룡산에서 언뜻 소울음 비슷한 소리를 듣거나 호랑이 기운을 느꼈다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다고 자부해도 좋다. 왜구의 노략질로 폐허가 됐던 갑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큰 몫을 하고 죽은 소가 이따금씩 할머니의 자가용 노릇을 하고 있다. 갑사 공우탑(功牛塔)의 주인공인 바로 그 소다. 풍운아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몸소 마곡사를 찾았다가 김시습이 자신을 피해 절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 세조(世祖)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타고 내려온 소의 새끼다.

또 깊은 산속의 호랑이 눈빛과도 같은 ‘스기’를 감지하는 순간이라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려니 짐작하면 옳다. 연천봉 중턱 오누이탑의 건립 모티브를 제공한 그 호랑이다. 목에 걸린 비녀를 빼준 스님에게 처녀를 물어다준 호랑이다. 물론 호랑이의 호의와 무관하게 스님과 처녀는 평생 의남매로 지내며 불도를 닦았다. 좀 멍청하지만 사기(邪氣)는 전무한 호랑이인 만큼 겁먹을 필요는 없다.

계룡산에는 할머니 산신 일행만 있는 게 아니다. 온갖 잡귀잡신들로 우글거린다. 1983년 국가 차원의 정화사업으로 신도안 등지에 뿌리내린 귀신들의 보금자리 620여곳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뿐, 이들 귀신은 슬그머니 국사봉(國師峰) 쪽으로 자리를 옮겨 눌러앉은 상태다.

신이 아니라 귀신이 절대다수다. 국사봉에서 산기도를 올리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체험담은 착각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기도에 몰입, 뇌파를 한껏 끌어올려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귀신이 머릿속으로 쏙 들어온다. 기도자와 귀신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찰나를 노리는 것이다. 스스로 신의 대리인이 됐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동자신(童子神)이 들었다는 사람 가운데는 “데리고 있는 동자신이 시원찮아 계룡산으로 가서 새 동자로 바꿔왔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신이 아니라 잡귀를 떠받들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正易)에 천착,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이치를 깨친 반인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金一夫·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계룡산은 이처럼 선비와 학자를 사랑한다. 계룡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전 유성(儒城)을 우리말로 풀면 ‘선비재’다.

계룡산은 ‘정도령’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후천개벽의 세상은 아직도 요원할까. 할머니가 웃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영안(靈眼)깨나 있다면서 청맹과니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구나.”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대덕 연구단지, 계룡대, 정부 대전청사가 보였다. 동시에 국가의 미래가 오버랩 됐다. 어느새 개벽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북한산

 

▲  북한산 사모바위

‘○○!/ 이 길을 지나며 당신을 추억합니다/ 언제나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편히 잠드소서/ 2005. 5. 19 ○○’.

먼저 간 그녀를 그리는 한 남자의 축원이다. 북한산(北漢山·836m)의 옛 절터 아래 개울가 작은 돌에 적혀 있다. 근처에서 서늘하면서도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는 이유다.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중흥사지를 지날 때 유심히 살펴봄 직하다.

그는 북한산 산신이 그녀의 영혼을 보살피리라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북한산 신령은 경황이 없다. 대신 중흥사(重興寺)의 호국승 혼령들이 그녀의 영가를 위무하고 있다. 조선 숙종(肅宗) 때의 중흥사 부설 북한산성 총섭(摠攝) 소속 스님들이다. 군복무하듯 중흥사를 본부 삼아 북한산성을 지키던 승려 겸 병사였다.

당시 승병 한 분이 “우리는 이런 일에 워낙 이골이 난 중들이라…”면서 중흥사의 비밀을 귀띔했다. ‘(북한)산성을 지키는 것은 대외적 명분이었을 뿐 북한산을 차지하려고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희생당한 삼국시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진짜 임무였다’는 요지다. 국가에 위난이 닥치면 불경을 접고 창을 드는 무술승, 소림사 권법승쯤으로 속단하고 대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품으로 깃든 영가를 스님들에게 맡길 만큼 북한산신은 지쳐 있다. 서울 외곽순환도로 공사가 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에게는 개발이지만, 산신 처지에서는 봉변이다. 깊은 산중을 포기한 채 산신이 산 아래로 내려와 여염집에 주저앉는 기현상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의 모습은 해당 산신의 외모를 빼닮는다. 화강암 준령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어우러진 북한산의 신은 사람으로 치면 얼짱, 몸짱이다. 머리와 수염은 새하얀데 핑크빛 얼굴은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기만 하다.

북한산은 큰 산이다. 서울 도봉구,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까지 안고 있다. 나이는 1억5000만살이나 된다. 백운대 병풍암, 동장대, 대동문, 보현봉, 형제봉, 구준봉, 북악산, 인왕산, 무악재, 안산(연세대 뒷산)까지가 북한산신의 관할구역이다. 바위 봉우리 사이의 효자리, 북한산성, 구천, 우이동, 정릉, 구기, 평창 계곡 역시 북한산의 이름 아래 청량함을 더 하고 있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누구나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라는 말을 떠올린다. 앉아서 1000리, 서면 1만리를 보는 도인의 경지에 들었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도봉산, 수락산, 북악산, 불암산, 아차산, 청계산, 남산, 남한산, 관악산, 소요산, 운악산, 명지산, 화악산, 축령산, 화야산, 용문산, 감악산, 그리고 한강과 강화도, 영종도가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탄성이 절로 난다.

북한산은 서울을 수호하는 산이다. 산신도 이 점을 아주 자랑스러워 한다. “삼국시대부터 서울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쌈박질을 해대더니, 이제는 서울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은 수도를 옮길 때가 아니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북한산, 즉 서울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가며 일진일퇴했다. 힘을 키워 북진하던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서기 137년 북한산에 성을 구축했다. 만주대륙으로 뻗어가던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도 북한산만큼은 놓치기 싫었다. 북진과는 별개로 남진해 백제의 북한산성을 함락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할 정도로 애착이 컸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북한산 주인은 신라다. 24대 진흥왕(眞興王)은 몸소 북한산을 찾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도장 찍듯 기념한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다. 즉위 16년째인 서기 555년 북한산 순행 직후 세운 비석이다. 국보 3호라 오리지널은 중앙박물관에 모셔뒀다. 북한산에 있는 비는 모조품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말고도 경남 창녕과 함경남도 황초령, 마운령 등 4군데서 발견됐다. 창녕은 신라의 마당이나 다름없고, 함남은 대륙을 겨냥한 신라의 웅비욕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중간지점의 북한산 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서울을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뜻이다. 1500년 전 신라는 벌써 북한산의 영기(靈氣)를 간파하고 있었다.

고려 시절 북한산은 잠시 인간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덕이다. 물론 안식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가 북한산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부터다. 각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두 왕은 북한산으로 피신했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인조의 군대는 청나라 침략군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 봉림대군(鳳林大君), 3남 인평대군(麟平大君),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 그리고 ‘삼학사(三學士)’로 유명한 홍익한(洪翼漢·사헌부 장령), 윤집(尹集·홍문관 교리), 오달제(吳達濟·홍문관 부교리)가 청나라의 볼모 신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청으로 끌려가던 김상헌은 벽제에서 북한산을 향해 이렇게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북한산이 삼각산(三角山)과 동의어임을 입증하는 시조다.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옛 국망봉, 799.5m) 등 북한산의 암봉 셋은 안정적으로 정립(鼎立)해 있다. 통일로를 따라 구파발로 진입할 때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산, 동부간선도로에서 의정부 쪽으로 가면서 보는 북한산은 삼각산이라는 이름 그대로다.

나무의 기세가 충만해 번영과 희망을 낳아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을 수 없는 효종은 북한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청으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바로 효종이다. 절치부심 끝에 유비무환의 적격지로 북한산을 지목했다. 1659년 북한산에 안가(安家)를 차렸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패닉 룸’의 철옹성을 북한산에서 찾았다.

당시 효종의 지시로 북한산성 요새를 처음 기획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혼백은 요즘도 날이 좋으면 북한산에 들른다.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전쟁발발시 왕의 피란처)로 북한산을 택했는데, 효종대왕 당대에는 계획만 하다 말았고 숙종 임금으로 내려가서야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 회고한다. 바로 북한산성이다. 숙종 때 귀양살이를 한 한이 풀리지 않은 듯 우암은 효종을 ‘대왕’, 숙종을 ‘임금’으로 칭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산 속으로 옮긴 한양’이었다. 문 14개, 연못 26개, 우물이 99개나 됐다. 문수봉 남장대, 노적봉 북장대, 대동문 동장대 등 전투 지휘본부격인 장대(將臺)도 3곳을 가동했다. 대동문, 대남문, 대서문 등 산성의 대문 명칭은 유사시 임시수도가 북한산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양의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의 앞뒤 글자만 바꿨을 따름이다. ‘하늘이 내린 안전한 산’이라는 믿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은 이토록 의미심장한 산이다. 돌산이지만 나무(木)의 기세가 충만한 북한산의 땅기운은 번영과 희망을 낳는다. 그렇다고 북한산 자락에 거주하면 누구나 발복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게는 도리어 해를 입힌다. 특히 평창동이 정치와 상극(相剋)이다. 북한산에서 뻗은 암반을 깎아낸 터에 지은 집에 사는 정치인은 엄청난 수맥의 파괴력과 바위의 살기 탓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산의 돌들이 날아가 꽂히는 형세가 적용되는 곳이 평창동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정치인에게서 온화한 마음이 나올 수 없다. 정계에서 대성코자 한다면 한남동이 바람직하다. 한강이 팽이처럼 돌면서 순행, 기가 운집되는 동네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최적의 산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이 버티고 있기에 서울은 천혜의 요충지가 됐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이 일찌감치 역사로 기록한 교훈이다.

 

▲  북한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왕사(王師)는 도선(道詵)이다. 그는 고려의 수도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국운을 800년으로 계산한 승려다. 그러면서도 도선은 북한산(北漢山, 836m)이 영 마음에 걸렸다. 개성 동남향에 저 멀리 솟아 있는 북한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도적의 깃발처럼 삼각뿔 모양이라 400년이 흐르면 고려의 운세가 북한산으로 옮겨가겠구나”라며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삼각뿔’은 물론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그래서 도선은 비방을 썼다. 북한산 기운이 개성까지 침투하는 것을 막고자 들개 형상 75개를 만들어 동남쪽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북한산의 막강한 기(氣)를 개떼가 막아낼 리는 만무했다. 800년 고려의 수명이 475년으로 줄어든 배경에는 북한산이 있다.

도선은 또 “왕(王)씨 다음에 이(李)씨가 왕이 되며 도읍은 한양에 정한다”고 고려 왕실에 귀띔한 적이 있다. 화들짝 놀란 고려 왕실은 윤관(尹瓘)을 동원했다. 여진족 정벌로 유명한 장군이다. 윤관은 백악산(현 북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었다. 오얏나무가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면 베어냈다. 오얏 리(李), 즉 이씨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왕건 곁에 도선이 있었듯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의지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당초 개성에서 계룡산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택한 게 한양이다. 한양의 영기(靈氣)를 실사(實査)하는 것은 무학의 몫이었다. 한양을 한눈에 내려다보려고 무학은 북한산, 정확히는 만경대에 올랐다. 한양의 모든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다. 이래서 만경대의 별칭인 ‘국망봉(國望峰)’이 생겨났다.

한양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백운대와 만경대를 지나 비봉에 다다른 무학에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까지 오다’라고 새겨진 돌비석이었다. 도선이 손바닥 드넓은 부처가 되고, 무학이 손오공이 된 순간이다. 도선과 교감해, 만경대 정남향으로 발길을 돌린 무학은 세 줄기 맥이 들 하나로 합쳐지는 곳을 왕궁 터로 잡았다. 고려 시절 오얏나무를 심었던 그 자리, 바로 백악산이었다.

가뜩이나 어눌한 편인 무학의 영가(靈駕)는 요즘도 석가모니 부처와 친견할 때면 아예 말문을 닫는다고 털어놓는다. “도무지 면목이 서지 않아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웠지만, 불교를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자책 탓이다. 한양을 수도로 정한 다음, 무학은 인왕산(仁王山)의 선암을 도성 안으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중이 장삼을 걸친 것처럼 생긴 바위인데 정도전(鄭道傳)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고백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속셈은 명료했다. 선암이 수도 안에 있으면 불교세상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고 바위 이전을 극구 반대한 것이다. 결국 조선은 정도전의 의지대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를 유지했다.

북한산과 주변 산을 관장하는 산신(山神)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다. 선임 산신들이 징계받는 바람에 그리 됐다. 산신들과 대화하다 보면 불경스럽지만 신들이 귀엽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이종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최홍만이 ‘야수’ 보브 샙더러 “귀엽다”고 한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북한산과 인왕산, 도봉산(道峰山)의 전대(前代) 산신령들은 그리스의 신들과 흡사하다. 좋게 말해 인간적이고, 한꺼풀만 벗기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숨기지 못한다. 서울 성북구 미아동 북한산 자락의 거북바위를 둘러싼 영계(靈界)의 진실이 좋은 보기다.

북한산신, 인왕산신, 도봉산신 트리오가 연합해 거북과 싸우는 바람에 거북바위가 생겼다. 서해 용왕의 아들인 거북이 한강을 거쳐 한양으로 상륙, 백성을 혼비백산케 한 뒤 북한산으로 기어들면서 사건은 터졌다. 이 고질라급 거대 거북은 움직일 때마다 북한산의 절경을 흩뜨렸다. 자기네 앞마당이 망가지자 분노한 산신들은 힘을 합해 거북과 충돌, 소란을 빚었다. 산신들은 “수성(守城)”이라고, 거북은 “육지 나들이일 뿐”이라 해명했으나 하늘은 양비론을 적용, 인간세상을 어지럽힌 산신들과 거북을 함께 처벌했다. 거북은 바위로, 산신들은 단풍나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새출발의 희망을 주는 약속의 산

북한산은 국립공원이다. 그런데 군데군데 옛 묘지들이 있다. 주인 없는 무덤쯤으로 여기는 등산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매우 위험한 묘도 있다. 신의 단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잡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승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에서 자유롭지 못한 혼백이다.

올 추석을 열흘 남짓 앞둔 어느 날, 선량하고 건실한 청년 하나가 이 혼령에게 당했다. 쉬는 날이면 북한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게 취미인 그가 착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게 탈이었다. 등산 때마다 눈여겨봐둔 무덤을 ‘후손에게 버림받은 산소’라고 짐작한 청년은 한가위를 핑계삼아 배낭에 낫을 넣은 채 북한산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하등 무관한 남의 묘지를 열심히 벌초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의 결과는 요절(夭折)이었다. ‘선행하면 천벌받는다’는 어불성설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허망한 죽음이다.

잡초를 뽑고 잘라내면서 낫질을 잘 못했는지 묘지의 흙이 튀었다. 흙은 청년의 오른쪽 눈으로 들어갔다. 불고 씻어냈지만 안구가 얼얼하고 뻑뻑한 느낌이 사흘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그래서 안과 치료를 받았고 증세는 호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벌초 후 꼭 10일째 되는 날 청년은 급사했다. 직접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의사는 선행 사인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다.

선녀와 나무꾼의 남녀 배역을 뒤바꾼 꼴이라고나 해야겠다. 자신의 영토(묘소)로 들어온 청년의 준수한 외모에 혹한 여혼(女魂)이 영계에서 인신매매를 자행한 셈이었다. 미남 청년을 마치 호스트처럼 제 곁에 두고 있었다. 여혼과 담판, 청년을 돌려받기는 했다. 죽기 전 상태 그대로 원상복귀는 불가능했다. 다만 전생의 가계로 환생시켰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무덤뿐 아니다. 북한산에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서슴지 않는 사기(邪氣)도 똬리를 틀고 있다. 과거 북한산에 편히 오르려고 산길을 새로 낸 권력자가 크게 화를 입은 예가 있다. 피해는 권력자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숱한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에 처해졌다. 길을 닦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버티고 선 커다란 바위를 부순 것이 화근이었다. 사악한 기운과 음기(陰氣)를 누르고 있던 바위를 걷어내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불행이 잇따랐다. 권력자는 정쟁에 휘말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고 장안에는 괴질이 창궐했다.

신과 악령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신은 너그러우나 악령에게 관용이란 기대난망이다.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악령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북한산의 매력에 젖어 몰래 야간산행을 하다가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는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토록 호오(好惡)가 분명한 북한산의 특징을 역으로 이용하는 ‘강한 인간’들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산의 한 절(寺)에 유독 공을 들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간첩 31명이 북한산을 넘어 청와대 코앞까지 왔지만 박 대통령은 무사했다. 1981년 결성된 민주산악회는 북한산을 수시로 오르내리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북한산 사찰의 카운슬링에 따라 사업계획이 좌우되는 재벌그룹도 있다. 절이 그들을 부른 게 아니다. 스스로 찾아와 필요한 것을 취할 따름이다. 숱한 정치인들이 새 출발의 희망을 안고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을 거쳐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 북한산은 새 출발의 의지들로 가득한 약속의 산이다.

  

▲  문수사 굴법당.

북한산(北漢山·836m)은 형이고, 북악산(北岳山·342m)은 아우다. 형은 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북악산 자체가 못 미더운 것은 아니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왜 동생 밑으로 파고들어 고생을 자초하는지 그저 딱할 따름이다.

북악산은 ‘청와대 뒷산’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뒷산’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지자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북악산을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삼았다.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혜안은 인왕산(仁旺山·338m)을 주산으로 지목했지만 서슬 퍼런 ‘혁명세력’의 뜻을 꺾은 철인은 자고로 없었다. 무학은 신(神)이 아니라 절반은 사람(僧)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무학의 영가(靈駕)는 지금도 안타깝다. 잠시 태평성대가 지속되는가 싶으면 어느새 폭군이 등장하고 ‘맏아들이 왕위를 세습한다’는 원칙이 지켜진 케이스는 선조(宣祖)와 정조(正祖)뿐이며, 살 만하면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조선의 불행을 원천 차단하는 비결을 알면서도 당한 회한이다. “인왕산이 주산이 되면 좌청룡 북악산, 우백호 남산을 거느린 궁궐(경복궁)은 자연스레 동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관악산이 내뿜는 불기운도 막아냈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훗날 흥선(興宣) 대원군이 광화문에 해태상이라는 방화막을 세웠을 만큼 관악산의 화기(火氣)는 드세다.

정도전의 기세는 무학대사만 누른 게 아니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계의 수장인 하륜(河崙)은 조선의 대궐터로 서대문 밖의 무악벌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서교동, 연희동, 동교동 일대다. 최규하(崔圭夏·서교동), 전두환(全斗煥·연희동), 노태우(盧泰愚·연희동), 김대중(金大中·동교동) 등 대통령 넷을 배출할 만큼 땅기운이 강력한 지역이다. ‘경복궁을 남향으로 틀거나, 무악벌에 지었더라면…’ 식의 역사 가정은 무의미하나 영계(靈界)에서는 정도전을 ‘왕따’시키고 있을 정도다.

북한산의 세력권인 북악산 앞마당의 경복궁과 청와대는 터가 몹시 불길하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다. 1398년 태조 7년 방원의 난이 서곡이다. 방원은 경복궁에서 정도전을 참살했다. “정도전이 태조(太祖)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여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살해하려 했다”는 핑계였다. 이어 세자 방석(芳碩)을 귀양 중 죽이고 방번(芳蕃)마저 없앤 뒤에야 태종 이방원은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복궁은 유흥과 탐욕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뒤 방치돼 있다가 고종(高宗) 즉위 후 대원군(大院君)의 주도로 대대적인 중건 공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국고가 바닥나고 숱한 인명이 희생되니 원성이 높아졌고 결국 대원군 퇴진의 주요 사유가 됐다.

청와대는 경복궁 내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의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19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를 세웠다. 6년 뒤 일본 총리대신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할 때까지는 청와대 터의 저주(詛呪)를 알지 못했다. 일본의 젊은 장교들이 사이토의 목을 잘라 살해한 ‘2·26 사건’이 터진 것은 사이토가 청와대 터에 관저를 올린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일제시대 조선총독들의 최후는 예외없이 비참했다.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전범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54년 병보석됐으나 다음해 사망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1급 전범 구이소 구니아키는 복역 중 옥사했다.

청와대를 버린 이들은 모두 자기 명대로 살았다. 이승만(李承晩), 윤보선(尹潽善), 그리고 와병 중인 최규하 전 대통령들이 그 보기다. 단,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만큼은 영기(靈氣)를 통해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양아들 이강석(李康石)과 그의 생부모인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박마리아 여사의 죽음은 청와대 터의 살기(殺氣) 때문이다. 이기붕의 할아버지는 조선 말 명성황후와 대원군 간의 권력투쟁에 개입했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다. 그 조부가 대를 건너뛰어 이기붕으로 환생, 또 다시 옛 궁전 터에서 만인지상일인지하(萬人之上一人之下)의 권력을 누리다 역시 전생에서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지인 하와이에서나마 천수를 다한 것의 배후에는 북한산의 보살핌이 있다. 모친이 북한산 문수암(현 문수사)에서 100일 기도 끝에 잉태한 귀한 자손이 그였던 만큼 북한산이 끝까지 ‘뒤’를 봐준 것이다. 대통령 시절 그가 문수암을 수차례 찾아 예를 갖춘 점도 북한산의 배려를 끌어내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암살 당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수감됐으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아들을 감옥에 보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청와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투명하고 당당한 처신이 필요하다.

조선의 왕은 노란 곤룡포(袞龍袍)를 입지 못했다. 오행상 동쪽은 파랑, 남쪽은 빨강, 서쪽은 하양, 북쪽은 검정, 가운데는 노랑이다. 천지의 가운데인 중국(中國)에만 허용된 컬러가 노랑이었다. 중국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동방이다. 따라서 파랑이 제색이다. 또 기와색이 파랗다고 청와대다. 무지의 소치인 동시에 사대(事大)와 모화(慕華)의 잔영이라 할 만하다.

청와대의 현 주인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노랑을 좋아해 그나마 다행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마지막 날인 11월 19일,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에서 참가국 우두머리들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두루마기 색깔로 노랑을 택했다. 넥타이까지 노란 걸로 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파랑,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잿빛을 골랐다. 2년 전에도 노 대통령은 노랑이었다. 당시 태국 APEC에서 누런 빛이 도는 태국 전통 옷을 입었다.

노 대통령의 상징 컬러와도 같은 게 노랑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일었던 ‘황색 돌풍’의 주역이 바로 노무현 후보였다. 옷 색깔은 곧 그 사람의 현재 심리와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황색은 사계절과 권력욕 등을 뜻한다. 아울러 노랑은 흙을 의미하므로 나무, 물, 돌 등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옳다.

북한산을 오르내리면서 아무런 신비체험을 못한다면 계룡산이나 지리산, 태백산으로 발길을 돌려봄 직하다. 북한산은 개인의 기복(祈福) 신앙처로 적합지 않다. 국운을 좌우하고 각계 최고권력자의 운명을 예고하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북한산의 한 사찰은 무학대사의 X파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무학이 직접 작성한 이 비밀문서는 북한산 승려에서 승려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양이 서울로 바뀌고, 서울이 격동하는 순간순간을 목격하면서도 여전히 꼭꼭 숨어있는 비결(秘訣)이다. 고려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조선의 탄생과 몰락을 예견했듯이, 조선 왕사(王師) 무학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본다.

수도와 조국의 번영을 바라는 국민으로서의 상식(常識) 이면에서, 온갖 불합리와 갈등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꿈은 새록새록 피어나게 마련이다. ‘청와대-북악산-북한산’은 한 개 라인이다. 북한산은 보고 있다. 북한산은 알고 있다.

 

팔공산

 

대구와 경북 군위(軍威)·영천(永川) 일대를 아우르는 팔공산(八公山·1193m).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매스컴을 타는 ‘스타 마운틴’이다. ‘팔공산’ 하면 자녀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팔공산 갓바위 아래서 치성하는 학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신문 지면의 사진과 방송 카메라가 연례행사처럼 스케치해온 영향이다.

덕분에 팔공산의 상징처럼 돼버린 갓바위. 정식 이름은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431호)이다. ‘갓바위’라는 속칭 그대로 평평하고 납작한 돌을 갓처럼 머리에 쓰고 있는 불상이다. 이 갓바위 부처에게 간절히 빌면 소원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갓바위 불상의 정체는 약사여래(藥師如來)다. ‘수능 족집게’라기보다는 ‘신의(神醫)’에 더 가깝다. 온갖 병을 치료하는 부처다. 약사여래상에 손을 대거나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병이 낫는 수가 있다. 갓바위에서 기도하는 학부모들은 너나 없이 웅얼웅얼 ‘나무약사여래불’을 주문처럼 왼다. 의사더러 대입합격을 청탁하는 격이다.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갓바위 부처는 ‘나무’가 아니라 ‘숲’이기 때문이다. 갓바위불은 구원불(久遠佛), 정확히는 아축불(阿佛)이다. 동방의 극락세계를 주재한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우리나라 불교의 ‘메이저 리거’였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과 더불어 한국인이 추앙하는 4대 인기 부처다. 구병(救病)과 구명(救命)에 주력하는 틈틈이 부전공, 즉 입시 쪽으로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수험생도 갓바위에서 염원만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 일정 부분 가능하다. 염(念)의 힘은 실재한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은 갓바위에도 적용된다. 기도의 성공사례가 전무하다면 갓바위가 입시 기도의 명소가 될 까닭이 없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이다. 어원을 따지자면 ‘곰뫼’, 한자로 웅산(熊山)이다. ‘곰나루’라는 뜻의 웅진(熊津)을 공주(公州)로 바꾼 자음접변의 동화과정을 거쳤다.

‘공산’ 앞에 ‘팔(八)’이 붙은 이유를 설명하는 설(說)은 여럿이다. 먼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제자 8인이 공산에서 득도한 이래 팔공산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공산으로 들어온 원효의 수도승 여덟 명 가운데 셋은 삼성암, 다섯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팔간자(八簡子)’설이 있다. 신라 왕자 출신인 심지대사(心地大師)가 팔간자를 공산 동사(棟寺)에 봉안한 것을 계기로 공산이 팔공산으로 개명됐다는 전설이다. 이 팔간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에게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8개 고을’설은 공산이 여덟 개 마을에 걸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8개 동네에 걸친 공공(公共)의 산이라서 팔공산이라는 말이다.

이상 세 가지 설 중 진위가 확인된 것은 8개 고을 설이다. 조선 초 이후 공산은 해안, 하양, 신녕, 팔거, 부계 등 5개 고을에 앉아 있었다. 여덟 고을이 아니다. 원효의 제자 8명설과 팔간자설을 증언할 당대의 고승은 아쉽게도 초혼에 응답이 없다. 이같은 영계(靈界)의 침묵을 부인(否認)으로 받아들인다.

공산은 조선 유학자들의 사대모화(事大慕華) 탓에 팔공산이 됐다고 믿는다. 중국 안휘성(安徽省)에도 팔공산이 있기 때문이다. 북조 전진(前秦)의 왕 부견(堅)과 남조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가 격전을 치른 곳이 중국의 팔공산이다.

▲  관봉석조여래좌상과 소원비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팔)공산에서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왕 견훤(甄萱) 간에 벌어진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무대가 바로 (팔)공산이다. ‘당시 고려 장군 8인이 순사(殉死)했고, 이후 공산이 팔공산이 됐다’는, 산이름의 유래를 추정하는 또 하나의 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지레짐작일 따름이다.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신숭겸(申崇謙), 김낙(金諾) 두 장군의 넋을 달랜 고려 예종(睿宗)의 영가(靈駕)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예종은 “그런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사한 장군들이) 신숭겸, 김낙 외에 전이갑, 전의갑 정도인데, 다 해야 넷뿐 아닌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927년 팔공산에서 후백제에 패한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싸우다 죽은 신숭겸 장군의 영가는 낯빛이 유난히 누렇다. 적장 견훤에 의해 목이 잘린 장군을 애도한 왕건이 황금으로 얼굴을 만들어 안장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주로 강원도 춘천의 묘소에 머물다 가끔씩 팔공산 지묘사로 나들이도 한다. 왕건이 장군의 영혼을 위무하고자 지은 절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파계사에서 500m쯤 가면 나타나는 표충단이 바로 옛 지묘사 자리다. 장군은 견훤군에 대패한 파군(破軍)재, 가까스로 몸을 피한 왕건이 숨어 있던 왕산(王山), 달빛도 처량하던 반야월(半夜月), 견훤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한숨 돌린 안심(安心) 등 팔공산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는다. 장군은 “2001년 TV 드라마 ‘태조 왕건’을 잘 봤다”고 했다. 특히 극중 장군 역을 연기한 탤런트 김형일씨가 장군 후손들의 봄제사(春享祀)에 아헌관(亞獻官)으로 참석, 두 번째 술잔을 올린 것을 아주 고마워했다.

팔공산 산신(山神)의 호칭은 천왕(天王)이다. 여느 산신에 비해 격이 높다. 북쪽의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 동쪽의 주왕산(周王山)과 가지산(迦智山), 서쪽의 속리산(俗離山)과 덕유산(德裕山), 남쪽의 여항산(艅航山)과 신어산(神魚山)이 각각 팔공산을 호위하고 있는 형국만 봐도 팔공산신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이들 동서남북의 명산 중심점에 팔공산이 솟아 있다.

신라를 수호한 5대산 중의 하나

신라를 수호한 다섯 산(五岳)의 한가운데도 팔공산이다. 토함산(吐含山)이 동악, 계룡산(鷄龍山)이 서악, 지리산(智異山)이 남악, 태백산이 북악, 그리고 팔공산은 중악(中岳)으로 버티고 있었다. 일찌감치 신라가 공인한 영산(靈山)인 셈이다.

전쟁통도 아닌 현 시점의 팔공산은, 그러나 상처투성이다. ‘팔공산 산신이 노해서 지하철 방화사건, 도시가스 폭발사건 등 대구에서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 난무한다. 순환도로와 골프장으로 만신창이가 된 팔공산 신령이 인간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팔공산의 정기를 쏙 빼갔다”는 불평불만마저 나돌 지경이다.

역사 이래 팔공산은 외침을 막는 천혜의 요새로 통해왔다. 왕건과 견훤의 군사들이 팔공산에 깃들더니, 조선시대에는 의병들이 팔공산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의병과 권용수 장군의 의병부대원들이다. 광복 후 출몰한 빨치산과 1950년의 6·25전쟁도 팔공산신의 부담을 더 했다. 후퇴하던 국군과 UN군이 반격 태세로 돌아선 곳이 팔공산의 다부동(多富洞)이기 때문이다. 낙동강(洛東江)에 배수진과도 같은 방어선을 친 우리 편이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했다. 공산군은 몰살당했다. 그때 그 시산혈해(屍山血海)도 팔공산이 거뒀다. 팔공산 천왕만큼 원혼 돌보기에 바쁜 산신도 없다.

 

▲  통일약사여래대불

팔공산(八公山·1193m)은 불산(佛山)이다. 품고 있는 절과 암자만 55곳이다. 여기에 갓바위 부처 등 조각상, 바위에 새긴 불상까지 보탠다면 산 전체가 불토(佛土)다. 주봉인 비로봉을 좌우에서 옹립하고 있는 동봉과 서봉이 팔공산 자체를 삼존불(三尊佛)로 형상화한 상태이기도 하다.

불교의 융성기인 신라시대 이래 팔공산은 불교의 명산으로서 흔들림없는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신라는 경주 석굴암보다 팔공산 석굴암(국보 108호 삼존석불)을 먼저 만들 정도로 팔공산을 애지중지했다. 신라의 ‘팔공산 사랑’이 낳은 고승이 바로 원효(元曉)다.

불국사 석굴, 오도암, 삼성암 등지에서 10여년간 수도한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로 유명한 승려다. ‘오밤중에 목이 말라 들이켠 바가지 물이 나중에 알고보니 두개골에 괸 시체 썩은 물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전할 때 아주 요긴하게 원용되는 에피소드다. 원효는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사이에 당대의 천재 설총(薛聰)을 낳은 파격 승려이기도 하다. 아버지인 원효의 속성(俗姓)이 ‘설(薛)’이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의 왕자는 열다섯 살 때 출가했다. 심지(心知)왕사다. 출신 성분 덕에 팔공산 동쪽에 천성사, 북쪽에 중암암과 묘봉암, 서쪽에 파계사, 남쪽에 동화사를 세우는 파워를 과시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중암암(中巖庵)은 매우 특이한 절이다. 바위에 뚫린 구멍이 절의 출입문 구실을 하므로 ‘돌구멍 절’로 통한다.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4㎞ 가량 들어가면 나타난다. ‘정월 초하룻날 볼 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 돼서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과장이 웃음을 자아내는, 깊디 깊은 해우소(화장실)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려로 접어들어서도 팔공산은 여전히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산이었다. 팔만대장경의 초본 격인 초조(初雕) 대장경을 봉안했던 절이 부인사(符仁寺)다. 부인사에 속한 암자만 39개였다. 승려의 수는 2000명이 넘었다. 승려들끼리 거래하는 승(僧)시장이 섰을 정도다. 또 동화사(桐華寺) 주지는 고려의 대표 승려였다. 고려 전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동화사 주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  팔공산 동화사 봉서루

조선은 은해사(銀海寺)를 인종태실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삼았다.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원찰(願刹)로 보호했다. 왕실이나 귀족이 자신의 부귀공명이나 극락왕생을 빌려고 세운 절이 원찰이다. 불교를 탄압한 조선왕조지만 팔공산의 영기(靈氣)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의 팔공산에서는 지눌(知訥)이 나왔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 자정(自淨) 결의문인 권수정혜결사문(權修定慧決社文)을 팔공산에서 발표했다. 불교 조계종(曹溪宗)의 본산이 팔공산인 셈이다. 1992년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동화사 통일기원대전 현판을 직접 썼다.

이처럼 신라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팔공산은 불교와 멀어진 적이 없다. 아미타, 미륵, 밀교 등 시대별 불교신앙이 오늘날 팔공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이유다.

불교는 왜 팔공산을 편애하는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영가(靈駕)를 초혼했다. 상당히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왕은 다소 싱거우면서도 정치적인 비화를 공개했다. “내 병을 (팔)공산 약사여래가 고쳐준 게 고마워서 팔공산에 공을 들였다. 물론 공산 일대의 토호들이 워낙 드셌던 것도 공산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고 털어놓았다. 절대권력자의 개인적 인연으로 불교를 위하는 한편,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팔공산을 불국(佛國)화했다는 귀띔이다.

그렇다고 팔공산이 100% 불교천국만은 아니다. 한티 순교성지 때문이다. ‘큰 재’를 뜻하는 한티는 대구·칠곡·군위 경계의 산간벽지로, 가톨릭 신자들의 피난처였다. 신해사옥(1791), 신유사옥(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사옥(1839)을 거치며 천주교는 모진 수난을 겪었다. 와중에 가톨릭 교도는 한티로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여러 차례 병사를 풀어 한티를 습격했고 그때마다 순교자가 속출했다. 오늘날 한티성지는 천주교 신자의 피정(避靜) 순례지로 자리잡고 있다. 가톨릭 교도가 일상업무를 피해 일정기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수련하는 것이 피정이다.

팔공산은 특정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틀림없는 고승(高僧)인 원효는 동시에 유교와 도교에도 달통한 반인반신(半人半神)이었다. 고향이 경북 경산이라 요즘도 팔공산을 동네 뒷산처럼 오르내리고 있는 원효대사의 영가는 필자를 가소롭게 여긴다. 3년 전, 필자를 소재로 나온 책의 당초 타이틀은 ‘절반의 신(神)’이었다. 출판사가 설문조사까지 벌여 결정한 이름이다. 출간을 앞두고 팔공산에 올랐다가 원효대사와 조우했다. 대사가 비웃었다. ‘어디 감히…’라는 투의 업신여김이었다.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귀신들 하소연 듣느라 귀깨나 따갑겠구만.” 그래서 부랴부랴 책 제목을 ‘귀가 따가운 남자’로 바꿨던 기억이 새롭다.

팔공산의 정기(精氣)는 권력자와 저명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팔공산의 영향권에 가장 직접적으로 든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공산초등학교 졸업생이다. 고향인 대구시 동구 신용동 용진 마을은 팔공산 자락에 있다. 용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 지세다. 생가는 이 용의 머리, 머리 가운데서도 중앙에 위치한다. 아주 제대로 자리잡은 집이다. 그러나 그는 팔공산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물론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구공고 출신인 전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허가한 골프장을 내느라 팔공산의 얼굴을 밀었고, 순환도로를 닦으면서 허리를 잘라버렸다.

이 바람에 팔공산의 상서로운 기운이 대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팔공산 훼손은 대구의 물(水)을 말렸다. 물은 부귀(富貴)를 의미한다. 물이 없으면 부자도, 귀한 사람도 나오기 어렵다. 강으로 내려가는 물이 줄어들면 땅이 마른다. 이어 기(氣)는 분산되고 인재(人災)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울러 대구는 고층빌딩을 거부해야 옳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지역(盆地)인 대구는 음(陰)이다. 팔공산의 양기(陽氣)와 조화를 이루려면 5층 이상은 무리다.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대구의 생기(生氣)를 야금야금 빼앗아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구설이 끊이지 않았던 동화사 통일 약사여래불을 탓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오해는 풀어야 한다. 높이 33m에 이르는 이 대불(大佛)은 명칭 그대로 ‘통일을 부르는 부처상’이다. 불상은 13년째 남북통일을 묵언(默言)으로 외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만 해도 통일은 ‘우리의 소원’ 노래 속에서나 가능한 신기루였다. 지금 통일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국민은 없다. 염(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길거리 탁발승의 불전함에 돈을 넣을 때마다 동행자는 “한 길 사람 속도 모른다”며 핀잔을 준다. “스님 행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술이나 마시는 가짜 중에게 왜 속느냐”는 것이다. 해명은 언제나 같다. “나는 저 사람에게 술값을 준 게 아니라 부처님에게 시주한 것이다.” 팔공산 통일 약사여래불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