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마음이 바로 부처 마음이지”-
동국대 교수 채용 사건 등 불문의 갈등으로 세상이 이리 시끄러우니 요즘 부처님 면목이 말이 아니다. 광주광역시 상무동 치평산 자락 향림사 조실 천운 상원(天雲 尙遠·76)스님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부처가 되어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수행자가 삿된 마음과 행동을 보이니까 손가락질받는 것은 당연하지. 승려는 항상 긴장상태에서 살고, 수행에 전념해야 돼. 이번 사태를 다시 한번 수행자 본분사를 챙기는 계기로 삼아야 돼.”
향림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다. 스님은 대흥사의 조실을 겸하고 있다. 불교계에서 스님은 ‘호남불교의 얼굴’ ‘아이들의 부처님’으로 불린다. 수행, 포교와 함께 사회복지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향림사 입구 5층 건물에는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향림출판사, 향림유치원, 향림사신용협동조합이 있다.
스님은 16살 때 가출이 출가로 이어졌다. 그는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해방이 되었을 때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부정하고 한학을 고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서울로 도망쳐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떠났다. 30리 길을 걸어 정읍에 도착했을 때 힘들고 배고파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비구니스님이 내장사에 가보라고 했다. 밤이 이슥해서야 내장사에 도착했다. 설움이 복받쳐 엉엉 울었다.
천운스님은 내장사의 첫 새벽을 잊지 못한다. 새벽 3시, 도량석으로 울려퍼지던 ‘화엄경 약찬게’. 청아하면서도 절절한 염불소리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당대의 학승인 박한영 스님(1870~1948)을 만났다. 팔순의 노스님은 소년의 사연을 듣고 절에서 글을 배우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는 한영스님의 시자로 절집 생활을 시작했다. 노스님의 공양상을 챙기는 일, 측간에 모시고 가는 일,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시봉을 하면서 아침저녁 예불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한영스님은 그를 친손자처럼 아끼고 귀여워했다. 스님은 천천히 연잎차를 마시며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내장사 생활 1년 만에 한영스님이 입적했다. 그후 월정사로 옮겨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았다. 지암스님은 조계종단을 세우는 데 앞장섰지만 한편으로는 친일 의혹이 따라다니고 있다.
“당시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여. 지암스님은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친일을 위장해 비밀리에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는 등 많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자료가 굉장히 많아요.”
스님은 지암스님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평전을 내기도 했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논산훈련소에서 통신교육을 받고 통신병이 됐다. 그는 불교계 원로스님들 가운데서 ‘처음’의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군승 제도가 생기기 전 군에서 법회를 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당시 정훈교육에서 개신교와 가톨릭만 종교 집회가 있었다. 그는 가톨릭 미사에 참석해 모두가 ‘아멘’을 외칠 때 합장을 하고 ‘사바하’하고 소리쳤다. 잠깐 소동이 빚어졌다. 그 일로 사령관 면담을 하게 됐다. 그후 정훈교육에서 그가 불교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지암스님이 입적한 뒤 조계산 토굴, 도갑사·대흥사·선운사 선원 등에서 10여년간 참선을 했다. 특히 고창 선운사 도솔암은 그의 주도로 처음 선방을 열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3~4년 묵언정진을 해냈다. ‘묵언패’를 목에 건 것도 당시 스님이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다.
“묵언을 깊이 하면 일념을 찾게 돼. 마침내 일념도 없어지는 무념(無念)의 세계에 들어가지. 일념이 무념으로 돌아가면 공부가 이뤄진 거여.”
스님이 향림사를 세운 것은 1967년. 그는 스스로 깨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불법을 널리 펴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야 한국 불교의 미래를 밝힐 수 있겠다는 뜻도 함께 품었다. 스님은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향림사를 열었다.
스님이 이곳에서 ‘알고 가는 길’이라는 포교지를 만들어 나누어준 것도 당시로는 드문 경우였다. 찬불가 보급, 어린이·중고생 법회, 수련회를 만든 것도 호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향림사 소문이 퍼지면서 제자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키운 제자가 70여명. 언젠가 성철스님이 말했다. “이놈아. 네가 중 공장장이라며. 네 수행은 언제 하려고.”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그때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처 키우는 일”이라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기대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 하나하나가 부처이고 화두야. 어린 마음이 바로 부처 마음이거든.”
스님은 힘닿는 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줄 뿐 특별히 강요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유난히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있으면 행동이 달라질 때까지 스님 방에서 재운다고 한다. 40년 동안 이렇게 스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150여명. 이제는 대부분 어엿한 사회인으로 제 몫을 하고 있다. 20여명 정도는 출가수행자가 되었다. 이들은 ‘향출회’라는 모임을 갖고 자주 향림사를 찾는다. 지금도 향림사에는 고아 6명, 장애인 20명, 노인 27명이 생활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20~30명이 되던 아이들이 이제는 많이 줄었다.
“나이 들어서 예전처럼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어. 아이들은 감정으로 키우기보다 이치로 키워야 하는데 젊은 스님들에게 맡기면 그게 잘 안돼.”
스님은 제자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과거 스님들은 상좌가 대학에 가고 현대식 교육을 받으면 환속하기 쉽다면서 뜻을 꺾곤 했다. 그러나 스님은 제자들이 원하면 중앙승가대, 동국대는 물론이고 외국유학도 보내줬다.
천운스님의 법문은 쉬우면서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법문”을 들려줬다.
“화를 내지 말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험담을 하지 않으면 그게 수행이여. 그저 나의 몸과 마음에 밴 악습이나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남의 단점도 스승 삼고, 남의 장점도 가르침 삼으면 마음속에 들끓던 불화와 불안이 사라지는 거여.”
그는 세상만사가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했다. 삼라만상은 스스로가 주인일 뿐 ‘내 것’ ‘네 것’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의 결론은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시간적으로 전부가 무상하고 공간적으로는 전부가 허무하지. 그것이 ‘만유(萬有)’ ‘만법(萬法)’이야. 모든 것이 공유물인 것이지. 그것이 공동체와 화합을 위해 쓰이면 바람직하지만, 내가 갖게 되면 착취가 되는 이치야. 따라서 희생과 봉사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살면 전부를 얻을 수 있지.”
-말은 쉽지만 행하기가 어찌 쉽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가르침 속에 사는 부처님 제자들이 왜 그렇게 싸웁니까.
“무유정법, 무소유, 자비심, 보살심이 부족한 탓이여. 그렇지만 산중에는 인욕 하나를 붙잡고 목숨 걸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런 수행자들이 이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거지.”
-가짜학위, 권력동원, 파벌싸움, 이권다툼 등 불교계 문제가 복잡합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생활이 양명(陽明)해야 돼. 모두가 내 행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행실에 의문을 갖게 되고, 마침내 이상한 소문이 나는 법이야. 지금 내가 불교학교인 정광학원 이사장인데, 거기도 처음에 교사를 정당하게 뽑지 않아서 학교가 엉망이었어. 교사를 바르게 뽑으니까 이제는 정광학원 학생들까지 실력이 좋아졌어.”
-불교에서도, 정치에서도 ‘개혁’을 말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개혁이란 하루 아침에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지. 기성세대의 경험, 젊은이들의 머리, 기득권층의 양보 이 세가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성공한다는 것을 경전과 역사가 말하고 있는 거여.
스님은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칠불통게(七佛通偈)’를 말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게 곧 불교다.
▲ 천운스님은
1932년 전북 고창에서 났다. 46년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정읍 내장사에서 출가했다. 47년 월정사에서 지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60년 선운사 도솔암 대교과를 마쳤다.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등을 지냈다. 2001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현재 대흥사 조실, 광주 향림사 조실,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원장, 광주 우산종합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다.
‘알고가는 길’ ‘끝없는 행원’ ‘청정행이 깨달음의 길’ 등의 책을 펴냈다.
제자 보선스님이 본 천운스님
“큰스님은 평생 교육과 복지포교에 애쓴 분입니다. 절에서도 고아들을 따뜻하게 키우시지만, 정광학원을 오늘의 명문학교로 만든 데도 스님의 공이 컸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스님들이 찾아오면 다른 인연 따지지 않고 흔쾌히 뒷바라지 해주십니다. 절에서 일하는 종무원 자녀들에게도 교육비를 마련해 주십니다. 한마디로 이 시대의 자비보살이지요.”
제자 보선스님(해남 대흥사 회주)은 영암 도갑사에서 처음 천운스님을 만났다. 벌써 그의 법랍도 40년을 훨씬 넘겼다. 대흥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등을 지냈음에도 백담사 무금선원 3평짜리 독방에서 오로지 참선에만 매진하는 등 남다른 수행력을 지녔다. 지난 4월에는 스승의 뜻에 따라 지암불교문화재단이 주최한 ‘지암 이종욱의 독립운동과 조선불교 조계종’ 학술회의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는 “대흥사는 서산대사 의발이 보존된 사찰로 13대 강사와 13대 종사를 배출한 종원(宗元) 사찰”이라며 “한동안 침체했던 대흥사가 14대 종사인 은사스님에 이르러 다시 한번 승풍을 드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보선스님은 “노장님은 출가한 이래 조석예불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다”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는다”고 전한다. 6시15분에 아침공양, 그리고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면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친절히 상담을 해준다. 점심공양 후에는 광주불교대학, 사무실, 복지관, 정광학원, 향림원 등을 돌아본다.
“수행자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에게 늘 계행을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십니다. 음주, 도박, 흡연 등을 하면 그날로 인연을 끊으실 분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거나 포교를 하거나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면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고 도와주십니다.”
보선스님은 “지금도 어린이, 청소년법회를 돌보고 군법당을 돌며 법문을 하고 장애인복지관·노인복지관을 이끄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으신다”면서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 포교와 불교 복지사업의 큰 방향을 만들어내신 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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