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참는 자가 이긴다
제2부 인간경영의 지혜 정치가로 보는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바쿠후(幕府)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의 달인.
그러나 상대를 쳐야 할 때는 가혹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한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머리를 숙였고, 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굴복했으나 일본을 평정한 것은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정치와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는 지금 한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냉철한 지혜와 지독한 인내를 배워야 할 것이다.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인가. 일본에는 15세기 말부터 약 100년 동안 계속된 전국시대가 있었다. 전국에서 300명에 이르는 군웅이 할거하여 각축을 벌이던 난세가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절한 투쟁의 와중에 도태되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가까스로 천하를 노릴 자리에 도달한 무장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한 6~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한때 천하의 패권을 잡았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참고,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성취시킨 인내, 고난과 위기 속에서 배양된 지혜, 판단력·행동력·조직력이 그를 천하인(天下人)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자의 조건이었다.
승자의 조건
작년에 일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최고라고 꼽는 역사상 인물 중에서 이에야스가 세 번째로 뽑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특히 기업인, 경영자, 변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인간관계, 강력한 조직력, 그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리더십 등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처세술과도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경영의 귀재라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산하에 이에야스를 연구하는 부서를 설치했다는, 얼른 보기에는 기이한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가 방향을 잃고 경제가 난관에 처해 있으며 사회가 혼미하다.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난세를 이긴 이에야스의 삶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제1부 냉철한 현실주의자-무인으로 보는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 현(愛知縣) 지방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떠돌이 승려이던 도쿠아미(德阿彌)다. 15세기 초 도쿠아미는 마쓰다이라 마을에 들어와, 지방유지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信重)의 사위가 되어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름을 마쓰다이라 다로사에몬 치카우지(太郞左衛門親氏)로 바꾸었다. 이 치카우지의 9세 손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이에야스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
인질로 출발한 생애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방을 공략하여 영지를 넓혀갔다. 그러다 7대째인 기요야스(淸康) 대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히로타다 대에 이르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밑에 들어갔다. 히로타다는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히로타다의 가신이 돈에 매수되어 다케치요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쪽에서는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다케치요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히로타다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무사의 체면이란 표면적인 구실일 뿐, 사실은 아들의 생명을 잃는 두려움보다도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케치요는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다행히 오다 쪽은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고 연금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마가와와 인질교환을 하여 그를 석방했다. 그러나 보름 후 다케치요는 다시 이마가와의 거성인 슨푸(駿府)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 동안 다케치요는 아버지의 변사로 가문을 승계하였으나 성주 신분인 채 12년 동안 인질로 고초를 겪게 된다.
다케치요에게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9세 때다. 그때까지 그는 이마가와의 노예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어 사투를 강요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이마가와 군의 외인부대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가능한 한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중 3중으로 묶인 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었다. 그가 항상 용감하게 싸운 것은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집념을 제2의 천성으로 심어주었다. 강인·용기·검소·침착·극기·결단·신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소년기의 인질생활을 통해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이에야스는 반드시 불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다케치요가 슨푸에서 치욕스러운 인질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인종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에서 산출되는 쌀은 이마가와에서 파견한 성주 대리가 모조리 슨푸로 실어갔다. 그러므로 주군이 없는 땅에 사는 오카자키의 가신들에게 녹봉이 지급될 리 없었다. 가신들은 신분이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이들은 오카자키 성에 진주해 온 이마가와의 가신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고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이마가와가 외부와 싸움을 벌일 때마다 선봉에 나서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에는 도쿠가와 가신들을 멸절(滅絶)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신음하는 가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주군인 다케치요가 인질에서 풀려, 어엿한 영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그들은 곤궁과 비굴로부터 단번에 해방된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그때를 위해 와신상담하면서 끈기 있게 충성심을 연마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일화다.
다케치요가 13세 때 성묘를 위해 잠시 자기 영지로 돌아온 적이 있다. 고향에서는 80이 넘은 노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그를 맞았다. 어느 날 타다요시는 감시의 눈을 피해 다케치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다케치요가 들어가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돈과 식량, 무기가 가득 숨겨져 있었다.
고향의 가신들이 곤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다케치요는 깜짝 놀랐다. 이를 본 타다요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설명했다.
“주군이 성장하셨을 때를 대비하여 적의 눈을 속여 가며 비축한 것입니다. 장차 이것을 기초로 재기하여 훌륭한 영주가 되십시오. 그것만이 이 노신의 희망입니다”
감격한 다케치요는 타다요시의 손을 잡고 울었다고 한다. 곤궁 속에서도 충성으로 일관하는 미카와 무사의 심정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흔히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주군에 대해 절대적 충절을 요구하는 무사도는 훗날 에도(江戶)시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후다이’
전국시대의 무사는 거취의 자유, 주군을 택할 권리를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다케치요)의 가신들도 전국의 무사니만큼 궁핍과 굴욕을 참지 못해 새로운 주군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속하여 주군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충절을 다했다. 바로 이 점에 미카와 무사의 특이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영주들을 후시미(伏見)로 불러 주연을 베풀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등을 자랑하면서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소장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에야스는, “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카와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진귀한 서화나 골동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용무쌍한 가신이 500명 정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히데요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그런 보배를 갖고 싶소” 라며 부러워했다.
이에야스의 충용무쌍한 가신이란 미카와의 ‘후다이(譜代)’, 즉 대를 이어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가신을 말한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도 결코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러한 후다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큰 고초를 겪었다.
미카와 후다이의 결집력과 충성심은 난국을 살아오는 동안에 배양된 것이다. 어린 주군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고 도쿠가와의 영지와 가신이 독립성을 잃고, 이마가와의 지배를 받은 상황이 그들의 분발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묘를 끝내고 슨푸로 돌아온 다케치요는 이듬해 1월 관례(冠禮·결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토야스(元康)’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토야스는 슨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에는 요시모토의 속셈이 깊이 작용했다.
즉 모토야스(이에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마가와 가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대로 갔다면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1560년 운명은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 해 5월 요시모토는 숙원이던 패권 장악을 위해 수도인 교토를 향해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그 길목인 오와리(尾張)에 있는 오다 군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에야스를 불렀다.
모토야스(이에야스)에게는 당연히 위험한 선봉을 맡겼다. 모토야스가 오다의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마루네(丸根) 성채를 함락한 것은 19일 아침. 이어 그날 중으로 가까이 있는 오타카(大高) 성에 들어가 요시모토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沓掛)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기습공격을 해 요시모토를 죽였던 것이다. 불과 4000의 병력으로 1만 5000의 대군에 쾌승을 거둔 이 역사적인 전투로 27세의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그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말하자면 이 전투가 노부나가에게는 운명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에게 요시모토 군이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이러한 의견을 올렸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이 성도 위험합니다. 속히 군사를 정비하여 오카자키로 돌아가야 합니다. 패전이 확실한 이상 이런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고개를 저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이때 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사람을 보내 역시 요시모토의 패배를 알려왔다. 숙부는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이번 전투에 이에야스의 적이 되어 참가했으나 이에야스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카의 안전을 위해 속히 철수하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것도 일축했다.
“여기는 싸움터, 숙부라도 믿을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오타카 성에 달려온 것은 그의 중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보낸 부하였다. 타다요시는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했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의 조심성은 오카자키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다이주(大樹) 사에 진을 쳤다.
놀란 것은 성안에 있는 이마가와의 군사였다. 총대장이 전사한 이상 적진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속히 본거지인 슨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입성하지 않았다.
“우지사네(氏眞)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그 이유였다. 우지사네는 요시모토의 아들이다. ‘의리를 지킨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긴 생애를 통해 일관된 하나의 특징이고 처세 방법이었다.
오카자키의 장병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성을 비우고 슬그머니 도주하고 말았다. 그제야 이에야스는 입성했다.
“버린 성이니 주울 수밖에”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요시모토의 죽음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요시모토 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까지 공격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에야스의 신의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실은 미카와에 있는 오다의 영지를 빼앗아 마쓰다이라의 영지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오와리 수비에 급급하여 미카와에 점점이 구축한 작은 성에는 관심이 적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더욱 공격하기 쉬웠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슨푸의 내정을 정탐했다. 그 결과 우지사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야스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래 신중한 이에야스였으나 이때처럼 신중했던 적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가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것,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많은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우지사네보다 노부나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의리도 존중하지만, 그의 의는 인정을 우선하는 감상적인 의리가 아니라 실리를 동반한 신의였다.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전대로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1563년 봄에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上鄕)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때서야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해 이에야스 부인의 아버지(장인)에게 자결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복수전을 펼 구실이 생긴 것이다.
도발과 회유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단교를 선언하고, 이름마저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이름은 요시모토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에야스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563년 가을에 발발한 광신적인 불교 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에야스가 그들의 총본산인 조쿠(上宮) 사에 대해 과다한 식량을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잇코슈 신도들은 영주 못지 않은 조직과 군비를 갖고 있었다. 또 구원을 믿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단을 수호하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잇코슈의 폭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폭동은 통상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연일 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 탓에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쪽의 병력 소모가 많았다. 이에야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호족과 이마가와 쪽의 내응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야스도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하는 긴박한 사태에 몰리기도 했다 한번은 폭도의 총탄을 맞은 것도 모르고 난전(戰)을 벌이다가 오카자기 성에 돌아와 갑옷을 벗었을 때 탄환 두 알이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더욱 괴롭힌 것은 가신들 중에도 잇코슈 교도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가신들은 이런 혈투 중에도 이에야스에게만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야스를 만나면 도주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하치야 한노조(蜂屋半之丞)도 이에야스를 보고 도주했는데, 그러다 그를 추격해오는 것이 일반군사인 것을 알고 돌아서서 찔러 죽였다. 쓰치야 시게하루(土屋重治)도 폭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야스가 고전하는 것을 보자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을 돕겠다며 그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렇게 이에야스에 대한 가신들의 충절은 신앙보다 강했다.
처절하기 짝이 없던 잇코슈의 폭동도 이듬해 2월, 6개월 만에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는 몰수되지 않았고, 사찰과 승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폭동 주모자를 처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에야스가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당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폭동 진압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지킨 것이 있다면 첫째 조항 정도였다. 자기에게 칼을 겨눈 가신이지만 관대하게 회유했다.
반란 세력을 해체시킨 후 이에야스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갑자기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와 신도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이에 종단측이 약속위반이라고 항의했으나 이에야스는 “전에 들판이던 곳을 원상 회복시켰을 뿐”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조쿠 사에 대해 쌀을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이에야스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라고 한다. 첫째 목적은 잇코슈와 그 신도의 일소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통해 영내에 잠재하는 반대 세력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과연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이마가와 쪽과 내통하던 토호와 반대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유일한 패전
이에야스는 그들을 소탕하고 동부 미카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거점인 요시다(吉田)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카와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미카와 통일은 대대로 품어온 염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도발과 회유 양면작전으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고, 성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당한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다. 그는 1568년 도토우미(遠江)로 진공을 개시하여 그해 겨울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이듬해 5월에는 가케가와(掛川)를 공략해 우지사네를 이즈(伊豆)로 몰아냈다. 그리고 1570년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를 떠나 히쿠마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쓰(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대립하게 된 것을 기화로, 아시카가를 옹립하여 반(反) 노부나가 전선을 형성한 후 그 선두에 서서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스루가(駿河)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 1572년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신겐은 4만 3000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하여 후다마타(二) 성과 요시노 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다.
이때 하마마쓰에는 노부나가의 원병 3000이 도착해 있었으나 이들을 합해도 이에야스는 군은 8000에 불과했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성에 들어가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군으로 온 오다의 장수들도, ‘겐신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겐신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것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원래는 적보다 몇 배나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진형이다.
겐신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22일 오후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우익의 원군(이에야스를 지원하러 온 노부나가의 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본 신겐은 제2선, 제3선의 병력을 중앙과 측면에서 투입했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시작된다.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것이다.
결과는 이에야스 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 군은 1200의 사상자를 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했다. 이 패배는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게 했다. 패주해 오는 아군을 맞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추격하던 적은 무슨 계략이 있는 줄 알고, 부근에 불만 지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대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소총대를 조직해 신겐의 진지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패배한 채 군사를 거두면 적은 기세가 올라 또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반드시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도 집요한 이에야스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새로운 책략과 전법
겐신은 평소 ‘병법의 극치는 5부(分)의 승리를 최상으로 하고 7부를 중(中)으로 하며 10부를 최하’로 한다. 5부는 탄력을 낳고 7부는 게으름을 낳으며 10부는 오만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가 하마마쓰 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생각때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은 목전에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천명이었으나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에게는 그 이상의 낭보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대결했다. 이 싸움은 우선 쌍방 포섭작전으로 시작됐다.
신겐이 죽은 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전법을 본떠 계속 스루가를 공격했다. 그러는 한편 그 가신들을 포섭하여 내응을 얻어, 다케다 군의 중요 거점인 나가시노(長篠) 성을 함락했다.
이에 맞서 가쓰요리도 이에야스의 진영 깊숙이 첩자를 들여보냈다.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요시로(大賀彌四郞)를 매수하여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築山) 부인과 밀통하게 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응하도록 했다. 쓰키야마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있을 때 혼인한 요시모토의 조카딸로, 그녀는 삼촌을 죽인 노부나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미연에 발각되어 요시로는 극형을 당했다.
가쓰요리가 1만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카와에 침입한 것은 1575년 4월이었다. 그는 요시로의 처형을 알고 이를 갈며 500의 병력밖에 없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 8000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일축했다. 마카타가하라 전투 때의 이에야스처럼 주력끼리 맞붙어 대번에 적을 섬멸하려고 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 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와 오다의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법을 개발해 놓았었다. 즉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2중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하며, 보병에 대해서는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눈앞에까지 몰려온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000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하여 도주하는 가쓰요리 군은 연합군의 기마대가 유린했다. 그 결과 가쓰요리 군은 신겐 이래의 용장을 거의 잃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 등장한 방책과 총포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법은 노부나가가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앞서 뼈아픈 패전을 경험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강력히 헌책하여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똑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야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나가시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총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놀라운 결단과 인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2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쌍방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런 요소가 없어지면 이 동맹은 무의미해진다.
나가시노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술을 일변시킨 노부나가의 명성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패자(覇者)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도 나날이 관록을 더해 ‘천하 제일의 명장’이라는 평판까지 듣게 되었다.
천하의 주인은 두 사람일 수 없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충성도를 시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에게 출가시킨 자기 딸 도쿠히메(德姬)가 보낸 서신을 이용했다. 즉 ‘쓰키야마 부인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 노부야스에게 소실을 들이게 했다. 마님 자신은 다케다 쪽의 첩자와 정을 통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부야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또 노부야스는 황음(荒淫)을 일삼고 내가 데려온 시녀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등등….
노부나가는 이런 죄상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모자의 처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에게 씐 혐의만큼은 결코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싸움터를 누비며 무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해온 아들 노부야스를 냉철히 평가하고 앞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부나가가 들이댄 문제는 노부야스의 기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컨대 노부나가를 택하느냐 노부야스를 택하느냐의 문제다. 다른 방법을 택할 여지는 없었다.
‘어쩌면 모자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자를 구해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굳은 결속은 보장받을 수 없다. 노부나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틀림없이 동맹자로서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이반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야스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고뇌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또 생각했다.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노부나가와 우리의 동맹은 가문의 존망을 좌우한다. 그러니 나는 노부나가를 택하고 노부야스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비정한 길을 선택했다. 결국 쓰키야마 부인을 1579년 8월29일에 처형하고, 며칠 후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을 명했다.
이에야스의 처자 살해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해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피나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에야스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 이에야스는 대망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581년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다카텐신(高天神) 성을 공략하여 엔슈(遠州) 일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그 이듬해 3만 5000의 대군을 거느리고 새로 동맹을 맺은 사가미(相模)의 호조(北條) 군 3만과 함께 다케다의 영지로 진입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군단도 호전적인 가쓰요리의 거듭된 출격으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납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아는 이에야스는 진격에 앞서 밀사를 보내 회유와 포섭을 시도했다. 그 결과 구노(久能), 에지리(江尻), 다나카(田中), 스루가 등 요새지의 성을 아무 저항도 없이 점령하고 본거지인 가이(甲斐)에 육박하게 되었다. 가쓰요리는 도주를 거듭하다, 이듬해 3월 자기를 따르던 33명의 가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를 그의 영지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 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향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한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堺)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의 모리(毛利)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가마쓰(長松)로 출동한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6월2일 새벽, 교토의 혼노(本能)사에서 노부나가가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공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휴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다. 당장 복수전에 나설 수도 없다. 잇따라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폭도로 변한 실직 무사와 토착민들이 혼란을 틈타 마구 살육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빼앗긴 선수
이에야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키로 했다. 미카와로 가는 최단 코스인 이가(伊賀)를 지나 사건 이틀 후에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여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열흘 뒤인 14일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가장 먼저 미쓰히데를 주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에야스는 서둘렀다. 그는 오케하자마의 전투를 상기했다. 요시모토 급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노부나가의 죽음은 요시모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한발 늦었다. 6월 19일 그가 오와리의 나루미(鳴海)에 이르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도착했다. “다카마쓰에서 모리 일족과 대치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질풍처럼 군사를 되돌려 6월13일 미쓰히데 군을 야마자키(山崎)에서 섬멸하고 이미 교토 방면을 제압했다”고 사자는 통보했다.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상경해 있지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쓰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변고가 일어난 날 하필이면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군사가 동원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그의 영지인 가이를 호조가 넘보자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信濃)를 병합하여 5개 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다이묘로 성장했다. 여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4000이나 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이에야스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쓰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오와리의 기요스(淸州)로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를 비롯한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등 중신과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삼남인 노부타카(信孝) 등이 출석했으나,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기는 했으나 가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좌장격인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어린 아들 노부히데(信秀)를 천거하여 출석자의 의견을 물었다. 장손을 후계자로 옹립해야 도리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주장이 채택돼 노부히데가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회의에 앞서 쓰네오키 등을 회유해 자기 편에 가담케 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적
후계자 결정에서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오다 정권의 계승자란 지위를 확보한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시즈케다케(賤岳)에서 카쓰이에를 죽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는 가쓰이에와 호응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패하여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어서 12월에는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다이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카쓰이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카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정3품 참의(參議)’라는 위계를 그에게 내리도록 했다. 히데요시보다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인 이에야스에게는 이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한 치의 땅만도 못한 그 따위 벼슬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이번에는 노부카쓰 주변에 모략의 손을 뻗었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그 소문을 믿고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이에야스 정도 되는 인물이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의식하고 노부카쓰를 도발했듯이,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시를 적으로 보고 암암리에 노부카쓰를 부추겨 싸움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에야스는 그 전부터 첩자를 잠입시켜 히데요시측의 정보를 자세히 탐지하는 한편, 평소 왕래가 잦은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밀약을 맺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이에야스의 궐기에 호응하여 동부와 남부에서 오사카를 견제하고 협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1584년 3월7일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공의 유아 노부카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군사’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하마마쓰 성을 출발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이를 공공연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출병을 명하고, 11일에 고노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까지 진출했다.
전투는 그달 중순 히데요시 쪽의 이케다 쓰네오키가 오와리의 이누야마(犬山) 성을 점령함으로써 불이 당겨졌다. 그때 이세(伊勢)로 향하려던 이에야스는 방침을 바꾸어 나고야 북방의 평야에 혹처럼 돌출해 있는 고마키(小牧) 산에 포진했다. 그리고 적의 전진기지인 하구로(羽黑)를 급습하여 적을 쫓아냈다.
히데요시는 하구로의 패보에 접하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누야마 성으로 달려와 고마키에 대항하기 위해 각처에 요새를 구축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히데요시 군의 10만에 대해 이에야스 군은 1만 8000에 불과했으나 지리상의 이점이 있었다. 또 주변 백성이 게릴라가 되어 첩보원 노릇을 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양군은 반 달 동안이나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전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인지라 상대의 전술을 다 알고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장수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교착상대를 타개해, 공을 세우려고 초조해 하는 자가 있었다. 쓰네오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에야스를 고마키에 못박아두고, 그 사이에 미카와를 공격한다. 배후를 찔린 이에야스가 당황하여 철수하면 남아 있는 노부카쓰를 공격해 오와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히데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집요하게 주장하고, 더구나 그의 조카인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마저 자기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겠다고 나섰다.
히데요시는 할 수 없이 신속한 요격행동을 취하라는 단서를 붙여 이를 허가했다.
4월6일 밤 쓰네오키를 선봉으로 한 1만6000의 요격대가 어둠을 뚫고 진격했다. 이들은 아무 충돌 없이 9일 새벽 후지시마(藤島) 부근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이에야스의 이와자키(岩崎) 성이 있었다. 성병(城兵)은 300도 안 되는 소수였으나 그들은 용감히 대군에 도전했다.
쓰네오키는 이런 작은 산성 따위는 처음부터 묵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유탄이 그의 말에 명중하여 쓰러졌다. 쓰네오키는 분개하여 이성을 잃었다. 그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말고 신속히 행동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잊고 전군에 이와사키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선봉이 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대, 제3대, 제4대는 전진이 차단되어 각각 후방에 주둔, 전황을 살피게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 군은 사방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유격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직접 1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4500의 미즈노 타다시게 군과 함께 추격에 나섰다.
9일 새벽 미즈노 군은 노부요시의 군사가 나가쿠테(長久手) 부근에 주둔한 것을 알고 이를 급습했다.
쓰네오키가 겨우 이와자키 성을 함락하고 잠시 방심하고 있을 때 이에야스 군이 돌입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쓰네오키가 군사를 돌려 나가쿠테 분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한때는 공세를 취했던 유격대도 이에야스의 본진이 측면으로 공격해 오자 대번에 무너지고 쓰네오키는 전사했다.
히데요시에게 패보가 전해진 것은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그는 서둘러 군사를 급파했으나, 이에야스 군은 이미 철수하고 난 다음이었다.
수면하의 싸움
나가쿠테의 패전 후 히데요시는 더욱 신중해져 5월에 접어들자 드디어 전군을 미노로 철수시켰다.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전면공격을 피한 것은 과연 히데요시다운 노련함이었다. 그는 기후, 오가키(大垣) 등으로 전진하면서 노부카쓰의 성을 연쇄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나가쿠테의 패전을 설욕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이에야스를 유인하기 위한 도발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오와리에서 나오지 않고 자중했다. 히데요시의 유도작전에 말려들까봐 경계했던 것이다.
그후 전장은 이세 방면으로 옮겨졌다. 소규모의 충돌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드디어 방침을 변경하고 이에야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노부카쓰를 회유하여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분개하여 노부카쓰의 경솔함을 나무랐으나 이미 강화를 맺은 다음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잃고 말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부카쓰와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이에야스와 화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영지로 돌아가자 집요할 정도로 여러 가지 술책을 강구하여 이에야스와 접촉을 시도하며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친(親) 이에야스 세력을 각개 격파하는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585년에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엣추(越中)의 사사 나리마사(佐佐成政)의 항복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후다이 중에서도 최고 원로인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數正)마저 끌어들였다.
카즈마사의 배신은 이에야스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내부분열의 조짐이 보이더니 결국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운 타다시게와 마쓰모토의 성주가 이탈했다.
이에야스는 가신의 결속 강화와 영내 통치의 개선을 통감하고, 즉시 카즈마사가 수비하던 오카자키 성으로 들어가 임전 체제를 폈다. 병력의 동요를 진정시킨 뒤 오와리와 접경 지역에 있는 미카와의 여러 성에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재배치하고 군법까지 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면하의 대치에 먼저 손을 든 것은 히데요시였다. 그는 동부지방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규슈 평정이라는 대사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에 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야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규슈를 평정하는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에 양쪽의 조정 사절로 노부카쓰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그를 통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에야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강화에 응했다. 1586년 정월의 일이었다.
강화의 조건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완고하게 자기 자세를 견지했다. 화의에는 응했으나 상경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초조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화의를 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오다의 판도를 상속하여 중앙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라는 존재와 그 향배를 무시한 채로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사업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44세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로 늙은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효자로 알려져 있던만큼,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라 해도 좋았다.
이렇게 되자 이에야스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간파쿠(關白)란 최고의 벼슬에 오른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애걸하다시피 하게 만든 것은 이에야스의 무게를 천하에 알리는 것이 된다.
이에야스는 1586년 10월26일, 6만의 군사로 대형을 편성하고 당당히 서쪽으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그를 맞이한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직접 마중 나가 이에야스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가 벗어놓은 신을 가지런히 놓는 등 신경을 썼다.
이튿날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여러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종의 예를 올렸다.
이에야스는 지난 3년간에 걸친 히데요시와의 대결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우선은 한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볼 때 고마키 나가쿠테의 싸움은, 전투 그 하나만 보면 이에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총력전이다. 무력 외에도 정치, 외교, 경제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국적인 ‘전쟁’에서는 오히려 통렬하게 일격을 당했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의 수호’라는 명분을 잃게 된 것이다. 고립작전 때문에 내부 붕괴의 조짐을 맞았다. 또한 임전체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영민들은 세납과 부역이 가중되어 농촌경제가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형세 판단에 밝은 이에야스가 이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신겐이나 노부나가 등 무력 일변도인 지도자와는 다른, 군사와 외교를 융합한 노련한 책략가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이에야스의 특징은 인내라고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이 재빠른 행동력이다.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돌아간 그는 재빨리 지금까지의 거성이던 하마마쓰 성을 나와 12월에 스루가로 옮겼다. 이것은 교토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겠다는 의미로, 히데요시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상경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으면 의혹을 살 우려가 있다.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하고 이듬해 3월 규슈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나서, 불과 5개월 반 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개선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상경해 히데요시의 개선을 축하했다.
규슈 평정 뒤에는 당연히 동쪽으로 시선이 간다. 하코네(箱根) 너머는 아직 히데요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처녀지다. 그중에서도 간토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우지나오(氏直) 부자가 가장 강적이었다. 그들은 1582년에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우지나오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이 두 강호의 유대에 쐐기를 박지 않을 리 없었다.
사돈과의 전쟁을 자청한 이에야스
호조에게 창을 겨누면 이에야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것은 히데요시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시험이었고 이에야스도 각오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지난해 준공한 오사카의 저택으로 천황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여러 다이묘에게 간파쿠(히데요시)의 명령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물론 이에야스도 참석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호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사자를 보냈지만 호조는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를 증강시켰다. 이것은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히데요시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야스가 호조에게 번의(飜意)를 촉구하는 사자와 서신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말로만 번의를 촉구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로부터 ‘화평을 위장하고 실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려고 획책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런 의혹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곧바로 상경해 호조 토벌군의 선봉을 자청했다. 스스로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여 10만의 대군과 300척의 배를 이끌고 호조의 거성이 있는 오다와라(小田原)로 향했다.
오다와라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0년 7월이었다. 성을 지키는 호조 군은 3만 5000, 이를 포위한 히데요시 군은 무려 30만. 그야말로 들판을 덮고 골짜기를 메운 대접전이었다.
호조 측은 적은 대군이므로 지구전으로 나가면 식량공급이 어려워 자멸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육로와 해로를 충분히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히데요시의 완벽한 수송작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보급의 어려움은 자신에게 있었다. 히데요시는 주위의 작은 성채를 모두 파괴하여, 본성(本城)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말려 죽이기’ 작전을 폈다.
화공이나 수공 등 무리한 전법은 동원하지 않고 적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대규모의 포위작전에 겁을 먹은 호조 군은 갑자기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내응하는 자가 속출해 전투가 시작된 지 4개월 만에 성을 열고 항복했다.
전후의 논공행상이 이루어졌다. 이때 이에야스에게 주어진 것은 호조의 옛 영지인 간토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5개 지방, 특히 그의 발상지인 미카와는 안타깝게도 환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어느 쪽이 이익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미개간 황무지보다는 옛 영지가 훨씬 좋다. 특히 가이(甲斐)에는 금광이 많아 이번 군사비도 그곳에서 나온 금으로 충당했다.
무장에서 정치가로
간토로 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상경 희망은 거의 단절된다. 즉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신들의 불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으니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의 특징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다. 이봉(移封)이 결정된 것은 7월13일,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8월1일 에도(江戶) 입성을 끝마쳤다. 여기에는 히데요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신속히 간토로 직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후다이 가신들은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등 구신을 등용했다.
이에야스가 가장 고심한 것은 간토 전역에 할거하는 소영주와 토호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호조와 다케다의 은덕을 입은 자들로 동화시키기가 용이치 않았다.
이에야스는 가이를 점령했을 때처럼 무리한 압박을 극력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가신으로 포섭해 나갔다.
그는 또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혀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호조의 연고지인 간토에 옮겨 가게 함으로써, 토호의 반란을 유발시켜 이에야스의 몰락을 기대했다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에야스는 직할령 설정, 가신의 배치, 토지조사 등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호조의 가신이던 토호에 대해 종래 신분을 인정해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대한 굴복을 이익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간토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력자의 죽음
규슈, 간토,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다이묘들의 신뢰를 잃었다. 천하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시대가 이미 ‘무인의 계절’에서 ‘정치의 계절’로 변했다고 판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재정과 민정에 밝은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것이 반사적으로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반감은 단순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의 독립성을 빼앗아 중앙정부의 전제화를 시도하려는 문관파에 대해, 중앙정부에는 복종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무장파의 반목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반감을 품었던 무장파 장수들과 접촉하며 공공연히 그들을 옹호했다. 무장파들은 조선 출병에 비판적인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당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륙침략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해진 히데요시가 1598년 8월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5대 원로에게 맡기고 드디어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5대 원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5명의 행정관이 서정을 집행하고, 그 중간에 3명의 주로(中老)가 양자간의 조종을 맡았다.
이처럼 5명의 원로가 정치의 최고 결정기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 등이 추진하려던 중앙정부의 전제정치 체제 확립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합의제라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이에야스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그는 최대의 영지와 최강의 군사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그의 기량과 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에야스와 5대 원로라는 관계가 생겼다. 물론 5대 원로라고는 해도 이에야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이에뿐이고 그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 따라서 합의 정치의 내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미쓰나리의 대립관계였다.
겨우 유지되고 있던 균형상태는 1599년 3월에 이르러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던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이른바 7인방이 미쓰나리를 죽이려 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놀랍게도 후시미(伏見)로 도망하여 적대시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도시이에가 죽고 그 배후의 실력자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중앙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利長)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영지로 내려갔다.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또는 이에야스의 정권장악을 암암리에 승인하고 중앙에서 멀어지기 위해… 등등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후시미 성을 둘째 아들 히데야스(秀康)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후시미와 오사카 두 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조선 출병을 면하여 경제력도 소모시키지 않고 착실히 영지 경영에 진력하여 실력을 축적한 그는 중앙무대를 지키며 천하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4대 원로와 미쓰나리가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뒤 이에야스는 거의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미쓰나리 편이면서도 자기와 은밀히 뜻을 통하고 있던 행정관인 나가모리를 이용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정보 제공을 의뢰받은 그는 충성을 나타내려고 도시나가가 모반의 기색을 보인다고 밀고했다. 결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가 계속 정보를 재촉하는 바람에 확증도 없이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서는 정보의 확실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시나가 일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그의 막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금되었다. 이어서 도시나가와, 그의 편을 들었다는 다다오키에 대해 토벌군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깜짝 놀란 다다오키는 곧 상경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전혀 반의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한편 도시나가에 대해서도 극구 변명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오키의 성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출병할 수는 없어, 양쪽이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두 사람 모두 싸우지도 않고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결과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발화점을 찾았다. 그러나 도시나가 사건으로 모두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출병할 구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좋은 구실이 생겼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이즈(會津)에 옮겨진 5대 원로의 하나인 가게카쓰의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새 영지 정비를 이유로 돌아갔던 그는 서둘러 성채를 수축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가 하면 병력을 증강시켜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이것을 안 이에야스는 사자를 보내 그의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게카쓰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며 일전불사의 태도를 보였다. 이에야스는 그 강경한 태도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는 아이즈 토벌을 결심하고 6월16일에 오사카를 떠나 후시미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8일에는 61세의 노장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불과 2000의 군사를 주어 성을 지키게 하고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 천천히 행군하던 그는 7월2일 에도에 도착해 20일이나 성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이즈로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오사카에 있었다. 아이즈 토벌이 목적이라면 항상 과감 신속하게 행동하는 이에야스가 이처럼 느긋하게 작전을 전개할 리 없다.
미쓰나리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미쓰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의 규합에 성공하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수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출동한 것을 기회로 데루모토를 오사카에 입성케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후시미성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토타다에게 소수의 병력으로 후시미 성을 수비케 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석(捨石)’ 작전이었다. 모토타다의 희생으로 그는 비로소 미쓰나리를 토벌하는 대의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토벌의 결심을 밝히고 에도를 출발했다. 동시에 동북 지방에 있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도 서진(西進)을 명했다.
패권의 향방
이에야스의 본대가 오가키(大桓) 성 서북쪽의 아카사카(赤坂)에 포진한 것은 9월14일 아침이었다. 그때 이미 오가키 성에는 미쓰나리를 위시하여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포진하고 있고, 아카사키 서남쪽 구리하라(栗原)에는 조소카베 치카모리,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나가쓰카 마사이에(長束政家), 다시 그 서쪽의 난구(南宮) 산에는 기쓰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지키고 있었다.
즉 도쿠가와 군은 동서로부터 협공을 받는 셈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동군은 10만, 미쓰나리의 서군은 8만 5000. 그러나 여기에 오사카에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가 참전하면 피아의 병력은 역전된다. 데루모토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성을 공격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보급로가 끊기면 혼성부대이기 때문에 내부 붕괴가 일어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적을 성에서 끌어내 야전을 벌이는 단기전(短期戰)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전군에 서진을 명했다. 오가키 성을 묵살하고 직접 오사카 성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사방에 첩자를 보내 적측에 오사카 진격 정보를 흘렸다.
적은 여기에 말려들었다. 미쓰나리는 성을 나와 나카센도(中山道)와 호쿠리쿠(北陸) 가도의 분기점인 세키가하라(關原)에 진입했다. 동군의 전진을 막으려는 작전이었다.
양군의 전투는 9월15일 아침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동군의 선봉 다다요시, 마사노리 등이 돌격을 개시하고, 서군의 선봉 히데이에가 공격해 나왔다. 이어서 우익과 좌익이 가세한 가운데 약 10일에 걸쳐 난투가 벌어졌다.
오전 11시경에 미쓰나리의 진지에서 봉화가 올랐다. 마쓰오(松尾) 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난구 산의 히로이에, 히데모토 등에게 미리 약속했던 대로 돌격을 명하는 신호였다. 히데아키가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히로이에 등이 배후를 찌르면 서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양쪽 모두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오경에 이번에는 이에야스 진영에서 마쓰오 산을 향해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약속대로 속히 내응하라는 독촉의 사격이었다. 히데아키는 그때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에 겁을 먹고 산에서 내려와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의 배신은 전황의 추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서군의 완패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미쓰나리는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서군의 장수들도 목이 잘리거나 자살했다. 이 전투는 8만 5000의 서군 중에서 무려 5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배신자를 내고 끝을 맺었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
그러나 이에야스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아직 오사카에 남아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에 대한 처리였다. 여기서 그는 ‘승리는 5부를 최선으로 하고 10부를 최악으로 한다’는 신겐의 병법을 상기했다. 동군에 내응한 모리의 친척 히로이에와 나가마사 등을 오사카에 보내 데루모토를 설득하게 했다. 데루모토 역시 싸움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영지의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오사카에서 순순히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야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사카 성에 개선한 것은 9월27일,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아카사카로 군사를 이동시켰을 때 그는 자신만만하게, “이제 야전에 있어서 나를 능가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호언했다고 한다.
확실히 그는 미카타가하라에서 신겐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본 후 그의 전법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여, 신겐이 죽은 후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 전술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야전보다도 평화시의 통치와 지배에서 더 뛰어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구상하는 도쿠가와 정권 영구화 전략은 ‘농민들을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농민으로 하여금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양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납으로 바치게 하여 재물이 남지 않도록, 그러나 부족하지도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라는 의미다. 이것은 농민뿐 아니라 공경과 다이묘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한 정책이었다.
이에야스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히데요시가 배치했던 다이묘들의 영지에 대한 철저한 개혁이었다.
첫째 대상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수격이던 데루모토였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입성 때 그에게 영지의 현상유지를 약속했었지만, 그가 미쓰나리 등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20만 석의 영지 중에서 83만 석을 삭감했다.
원래는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할복을 명해야 할 것이지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고 8개 영지 중에서 두 곳을 준 것이다.
이에야스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데루모토가 살 수 없게, 그러나 죽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데루모토에 버금가는 강자였던 가게카쓰에 대한 처분도 가혹하여 120만 석 중에서 고메자와(米澤)의 30만 석을 제외하고 아이즈 지방의 90만 석을 전부 몰수했다. 그리고 5대 원로 중 하나로 서군의 부원수격인 히데이에는 57만 석을 모두 몰수당했다.
5명의 행정관 중에서 나가마사는 동군편이었으므로 처분과 관계가 없었다. 마에다 겐이(前田玄以)는 거사에 참가하지 않아 무사했다. 그러나 그 밖에 미쓰나리, 마사이에의 영지는 모두 회수되고, 나가모리는 내통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20만 석을 빼앗긴 뒤 부자가 유폐됐다.
이렇게 해서 서군에 속했던 87명의 다이묘가 영지를 몰수당했는데 그 총계가 640만 석에 달했다. 당시 전국의 다이묘가 소유했던 영지는 모두 1800만 석이었다고 한다. 3분의 1 이상의 영지가 강제로 회수당한 것이 된다.
도요토미 가문만은 전투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가 끝난 시점에 그 영지는 200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줄었다. 도요토미 가문에서는 영지에 직접 대관(代官)을 보내 통치하는 경우가 적었다. 각지의 다이묘에게 맡겨 지배와 세납의 징수를 대행시킨 것이다. 때문에 그 영지를 맡아보고 있던 다이묘들이 제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봉되자 그 토지와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끊어져 직접 지배하던 65만 석만 남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가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는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후다이 가신들의 배치였다. 그들을 본거지인 간토와 종래 정치의 중심지인 교토 오사카를 연결하는 지역 등 요충지에 폭넓게 배치하여, 2중 3중의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이묘의 대량생산이 불가피했다. 이에야스는 39명이던 후다이 다이묘를 일약 63명으로 증원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로 발탁된 사람은 180명이었는데 그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그중 26명이 간토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미쓰나리의 거성이던 사와야마에는 소위 4천왕(天王)의 한 사람인 이이 나오마사(伊井直政)를, 이세에도 역시 4천왕의 하나인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을 보내 도요토미 세력의 준동을 막게 했다.
또 오와리에는 4남인 다다요시, 에치젠(越前)에는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미토(水戶)에는 5남인 다케다 노부요시를 배치하여 도사마(外樣) 다이묘,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등용된 도요토미 계열의 다이묘를 위협했다.
이에야스는 동군을 도와 공을 세운 도사마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과감히 배려했다. 5대 원로 중에서 유일하게 동군에 가담한 도시나가는 83만 석에서 119만 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58만 석에서 60만 석,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는 18만 석에서 60만 석,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는 24만 석에서 57만 석 등 대폭적인 가자(加資)가 이루어졌다.
절묘한 가신의 배치
신상필벌을 분명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전쟁 이래 도요토미 가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그들에 대해, 이를 보충하고도 남는 보너스를 주었던 것이다. 도사마 다이묘들이 이에야스에게 더욱 신뢰를 보냈을 것은 당연하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의식하고 일부러 이런 선심을 썼던 것이다. 천하 제패를 목전에 둔 이에야스의 회유정책이 한층 더 노련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사마 다이묘들의 새 영지는 모두 주코쿠와 시코쿠 등 동북지방에 국한되고 요충지에는 한 사람도 배치하지 않았다.
후다이 다이묘들은 비록 녹봉은 적었으나 막료에 포함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도사마 다이묘는 녹봉은 많았지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종가를 중앙정부로 하고 그 밑에 일족-후다이 다이묘-도사마 다이묘 등 지방 정치기관을 가진 강력한 중앙 집권적 권력구조를 구축해 나갔다.
다음으로 직할지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야스가 직할지로 삼은 것은 금은이 산출되는 가이·사도(佐渡)·이즈(伊豆)와 건설자재의 보고인 신슈(信州)를 비롯하여 교토·후시미·사카이·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만, 전국 각지의 군사적 거점, 정치 경제적 중심지, 교통상의 요지 등으로 약 250만 석에 이르렀다. 특히 금은 산지의 직접 재배는 이에야스의 오랜 염원이었는데, 그것이 실현됨으로써 1602년 이후 금은의 생산량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때의 다이묘가 전국시대의 다이묘와 크게 다른 점은 중앙정권에 의해 그 영지가 이동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는 설사 멸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영지가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때의 다이묘는 전국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영지와의 결합이 약했다. 다시 말하면 중앙정권의 힘이 전국의 토지와 백성에게 침투한 것이 된다.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수많은 다이묘의 영지를 몰수하고 이를 재분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중앙정권의 군사 통수권을 장악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중앙정권에서 주권자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그때까지 이에야스도 비록 그 영지는 압도적으로 넓었지만 다른 다이묘와 동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다이묘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앙정권의 주권자로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바쿠후를 개설한 그는 에도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를 확장하고 새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이 공사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성보다는 영지의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그의 실리적인 정신에 따라 연기되고 그후 10여 년 동안은 축성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에도 성 축성은 1604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배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0척의 배가 완성되고, 이 배가 100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두 개씩 실어 이즈로 운반했다.
목재도 간토를 비롯하여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의 산지에서 벌채했다. 성벽에 바를 석회는 에도 서쪽의 오소키(小曾木)와 나리키(成木) 등 두 마을에 명하여 석회암을 태워 만들게 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606년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설계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담당하고 여기에 이에야스가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2년 후 드디어 일본에서 최고라고 평가되는 덴슈가쿠(天守閣)를 위시한 본성과 제2, 제3의 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은 1657년 정월의 큰 화재로 거의 불타고, 덴슈가쿠는 끝내 재건되지 못했다.
이 미증유의 대공사는 모두 다이묘, 그 중에서도 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가자된 70명에 달하는 도사마 다이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다이묘는 자기 영지에서 1000석당 1명의 비율로 농민을 징발하여 에도에 데려왔다. 그로 인해 다이묘들은 만성적이고 과중한 부역을 할당받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영지의 재정이 핍박하여 사카이나 교토의 상인들로부터 빚을 지는 자도 속출했다.
‘죽지 않게, 그러나 살 수 없도록’이란 이에야스의 정책이 이처럼 과도한 부담의 강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에도 성 공사와 함께 슨푸와 나고야 성의 축성도 병행하여 다이묘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나고야 성 공사 때의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공을 인정받아 무려 30만 석이나 가자된 마사노리가 거듭되는 부담에 비명을 지르며, “이러다가는 재정이 파탄나겠다. 에도 성이라면 몰라도 하찮은 나고야 성에까지 우리를 동원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그것을 듣고 같은 도사마 다이묘인 기요마사가 말했다. “부역이 싫거든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가 대답을 않고 있자 기요마사는 웃으면서, “그렇다면 아무 불평도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어서 공사를 끝내고 쉬도록 하세”라고 말하며 인부들에게 갔다고 한다.
오고쇼(大御所)와 쇼군
아무리 부역이 고통스러워도 기요마사나 마사노리 같은, 히데요시가 키운 맹장들조차도 감히 반항할 수 없던 저간의 사정을 여실히 말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세이이다이쇼군 직을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재직한 기간은 겨우 2년 4개월이었다. 히데요시라면 어마어마한 지위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실리, 즉 그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1선에서 물러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조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측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히데요리 주변, 특히 생모인 요도(淀) 부인 일파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한 직후 손녀인 센히메(千姬)를 히데요리에 출가시킨 것이 그 근거였다. 그들은 이것이 차기 쇼군의 자리를 히데요리에게 물려주기 위한 사전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도사마 다이묘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쇼군이 교체되었으니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히데요리에게는 더 이상 정권이 돌아올 희망이 없다. 정권은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이 이어받을 것이다.’
히데타다의 쇼군 승계는 이런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요도 부인은 분노했으나 히데타다의 제2대 쇼군 취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방 다이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 교체 후 1607년에 이에야스는 슨푸로 옮겨 ‘오고쇼(大御所)’라 불리게 되었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타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리모컨으로 정치를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정치적인 실권자인 오고쇼와 중앙정권의 법적 주권자인 쇼군에 의한 이원정치(二元政治)가 행해지게 되었다.
2元 정치 체제
이에 따라 도사마 다이묘는 에도의 히데타다와 슨푸의 이에야스로부터 2중으로 체크당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보이려 했다. 다이묘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도로 올라와 처자와 중신들을 인질로 바쳤다. 토목공사의 적극적 참여도 바로 그 엄중한 체크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면서 미카와 시대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중요한 일을 했던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康政), 이이 나오마사, 혼다 다다카쓰 등 이른바 이에야스의 4천왕은 정치의 중추에서 물러가고, 그 대신 오카자키 시대 이래 후다이의 노신으로서 고난을 같이한 오쿠보 다다치카(忠隣)가 노신의 필두가 되었다. 사카이 다다쓰구와 성은 같으나 역시 오래 전부터 중신이던 사카이 다다요(忠世)와 그의 숙부 다다토시(忠利)도 각각 노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함께 히데타다의 유년시절부터 후견인이던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 안도 시게노부(安藤重信), 아오야마 다다나리(靑山忠成) 등도 노신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다쓰구나 다다치카에 비하면 훨씬 나중에 등용된 다이묘다.
이와 같이 이에야스 시대의 막료 상층부가 교체되고 일찍부터 히데타다 측근에 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2대 쇼군의 막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 이에야스는 가장 신임하는 수완가 마사노부를 가담시켰다. 마사노부는 리모트 컨트롤로서 쇼군을 조정하며 이원정치의 요체가 되었던 것이다.
쇼군 휘하의 인적 구성이 이상과 같은데 비해 슨푸는 어떠했을까.
우선 미카와 이래의 원로는 한 사람도 없었고 가장 핵심 인물은 혼다 마사노부의 아들 마사스미이고 그 밑에 나루세 마사나리(成瀨正成), 안도 나오쓰구(安藤直次), 다케코시 마사노부(竹腰正信) 등이 있었다. 그들은 후에 요시나오(義直), 요리노부(賴宣) 등 이에야스의 아들 밑에서 중신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마음대로 통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의 영지에도 자신의 지시가 반영되도록 자기가 키운 정치가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에야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즉 승려로는 덴카이(天海), 유학자로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재무관료로는 오쿠보 나가야스(長安), 그리고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郞次郞)와 영국인인 윌리엄 애덤스 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슨푸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의 측근 그룹으로 활약했다.
이에야스는 경험을 통해 이원정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1591년에 간파구 직을 조카인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로 실권을 쥐고 이원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1595년 히데쓰구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자결을 명령받아 그와 처첩·자식 등 30여 명이 무참히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야스가 쇼군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히데요시의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카와 바쿠후의 성립 등 대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건의 기억이 이에야스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 없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으면서도 굳이 이원정치를 감행한 것은 절대로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와 히데쓰구는 숙질간이므로, 나중에 히데요시에게서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다는 것이 히데쓰구의 파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친아들이므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원만할 수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이에야스는 맏아들인 노부히데를 자결시키는 통한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에야스가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한 데는 친아들이란 점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 3남인 히데타다, 4남인 다다요시 세 사람이었다. 중신들과 상의한 결과 다다요시는 후보에서 제외되고 남은 두 사람 중에서 택하기로 했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은, 그는 무용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강하므로 쇼군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데타다를 지지하는 쪽은, ‘지금은 무(武)로써 천하를 위압하기보다는 문(文)을 장려하고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히데타다 공은 효심이 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히데야스의 결단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그가 후시미 성에서 승마를 하고 있을 때 항상 그를 수행하던 말구종이 따라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이것을 본 히데야스는 불끈 성을 내고, 하천한 자가 무엄한 짓을 한다며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은 그 일을 예시하면서 히데야스 공이야말로 용기와 결단성이 있는 재목이라고 추천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만일 히데타다였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중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에야스가 다시 말했다.
“히데타다라면 아마 그를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두 마디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처럼 두 아들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결국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과격하고 기민한 성격은 이에야스가 행하려는 이원정치에는 방해가 된다. 히데야스는 결코 이에야스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할 인물이 아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의견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10년 전에 있었던 히데쓰구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이에야스가 히데쓰구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바쿠후(幕府)의 고자세
지배와 통치의 요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앞서 미카와 시대에 이에야스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잇코슈의 거점을 소탕한 것도 결국은 신도들이 그의 통제에 불복하고 외적과 결탁하여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바쿠후를 개설함에 있어 모든 세력, 즉 다이묘, 사찰과 신사, 조정, 공경 등의 행동에 법적인 제한을 가하고 이를 탄압했다.
이에야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조정에 대한 간섭이었다. 당시 조정은 비록 실권은 없이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나 국민에게 작용하는 그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러므로 바쿠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정에 대한 간섭이 불가피했다.
그 첫 시도가 1611년에 공포한 3개조의 법령이다. 이것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인정치의 전통을 계승한 정권이란 점을 조정으로 하여금 인정케 하는 아주 우회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613년에 이르러 새로 5개조에 이르는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를 마련하여 본격적인 간섭을 강화했다.
즉 조정에 출사하는 자로서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유형에 처한다, 주야의 근무를 게을리 하거나 공연히 거리를 배회하고 도박을 하는 등 행실이 나쁜 자는 유형에 처하며, 바쿠후가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져 이러한 금령(禁令)이 나온 것이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구실로 조정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다.
이어서 1615년에는 ‘궁전 및 공가제법도’를 공표하여 천황과 조정의 생활 전반에 대해 법적인 규제를 가했다. 우선 제1조에 천황은 모든 일에 앞서 학문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천황의 행동을 법령으로 규제했다. 그리고 섭정이나 대신은 적임자에 한하여 임명하며 이 적임자는 노년이 되어도 사임시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그 적임자를 바쿠후가 판단한다는 함축성이 개입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후 고관의 임명에는 바쿠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쿠후는 조정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일일이 규제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그 조문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간섭하였다. 천황과 조정의 자유의사를 극도로 속박함으로써 바쿠후의 권한을 강화해 나갔다.
다이묘에 관한 법령으로는 1611년 바쿠후가 다이묘들에게 내린 ‘무가(武家) 제법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바쿠후와 다이묘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영지·군역·공납에 대해서는 거의 규정하지 않고, 대부분이 다이묘와 그 가신들의 질서 파괴 행동을 엄단하는 금지 조항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도를 어기는 자는 영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신 중에 반역자나 살인자로 지목된 자가 있으면 추방해야 한다. 성을 보수할 때는 반드시 신고하고 신축은 엄히 금지한다. 이웃 영지에서 도당을 결성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야 한다. 사사로이 혼인하는 것을 금지한다 등이다.
사찰에 대해 노부나가는 무력을 행사하여 철저히 파괴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히데요시는 불당을 짓고 탑을 세우는 등 부흥시켜 가면서 한편으로는 토지조사와 무기 회수 등을 펼쳐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썼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확립한 정치권력과 사찰의 관계를 법률과 제도를 통해 굳혀 나갔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사원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발표한 것은 1665년이었으나 이에 앞서 1615년에 각 종파에 대해 개별적으로 법령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 법령을 통해 바쿠후가 강조한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승려에 대한 학문의 장려였다. 학문 수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사찰에 있지 못하게 할 것, 주지나 고위 승직자는 학덕이 높은 자에 국한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는 승려의 관심을 학문에 집중시켜 사찰의 세속적인 세력확대를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본사와 말사의 제도 확립이었다. 즉 불교의 각 종파 모두가 본사를 정하고 다른 사원은 여기에 종속된 말사로서 본사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바쿠후는 본사만 확실히 장악하면 그 종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셋째는 승직 임명에 있어서 조정의 권한을 제한한 일이다. 이러한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후에 천황이 발한 칙령을 바쿠후가 무효화하는 일이 많아 천황이 분노하여 양위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다시 14년간의 인내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히데요리였다. 도요토미 가문은 사실상 지방의 한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 앞서 히데요시에게 직속되었던 무장들은 슨푸나 에도로 올 때마다 은밀히 오사카에 들러 히데요리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에야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로 도요토미 가문과 유력한 도사마 다이묘가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실직한 무사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패전으로 실직한 무사는 전국에 걸쳐 수십 만, 대부분은 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므로 다시 난세가 오기를 바라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실직 무사를 위시하여 현상에 불만은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적인 세력과 반항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한다면, 창설기에 있는 도쿠가와 정권은 토대가 흔들려 붕괴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는 이에야스로서는 반란의 진원지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려 14년이나 기다리다가 오사카 쪽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1605년 쇼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을 때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히데요리에게, 상경하여 새로운 쇼군에게 복종하는 예를 드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사카 쪽이 거부하자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 슨푸 성 수축공사 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인근의 다이묘들과 똑같이 그에게도 부역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바쿠후의 통치권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사카 쪽에서는 크게 노하여 5대 원로의 하나인 도시나가에게 부역의 철회를 주선하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1611년 3월,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니조(二條) 성으로 불렀다. 이때도 오사카 쪽에서는 분개하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요마사, 요시나가 등이 중간에 나서 ‘거듭되는 항명은 이에야스에게 처벌의 구실을 준다’고 충고해 겨우 히데요리의 상경이 이루어졌다.
니조 성의 회견으로 히데요리를 형식적으로나마 복종시킨 이에야스는 상경한 다이묘들에게 3개 조항으로 된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여기에는 통제를 강화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후에 확대되어 앞서 말한 ‘무가 제법도’라는 법령이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폈다.
당시 오사카 성에는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가 비축되어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일컫는 오사카 성이 그 엄청난 금을 가지고 저항한다면, 이쪽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권하여 각지의 사찰을 재건·수축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라고 설득했다.
그 제의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에나 반대하던 요도 부인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타이코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를 격려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부터 착수하여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났다. 그동안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되어, 친동생인 히데타다 부인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에 도요토미 가문이 키운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요시나가, 나가마사, 요시하루, 토시나가 등 유력한 다이묘들이 병으로 쓰러졌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팔다리가 잘린 상태가 되었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군신풍락(君臣豊樂), 자손은창(子孫殷昌)’ 이라는 여덟 자와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고금의 관례이고, 종명도 글자 그대로 새겨 읽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군신풍락 자손은창은 도요토미 가문을 주군으로 삼아 자손의 번창을 즐긴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에야스는 매일같이 학자를 불러 특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간단한 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학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73세의 생애를 통해 터득한 노회함을 연기해 보였다. 그는 크게 노하여, 아니 사실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도요토미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도요토미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나날이 사태가 긴박해지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후 각지를 전전하며 갖은 고초를 겪던 오다 노부카쓰도 교토의 류안(龍安) 사로 은퇴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고문격이던 그도 오사카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어서 무장의 하나인 이시카와 사타마사(石川貞政)도 물러가고 남은 것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 강경파 무장들뿐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주전파는 전투를 결의하고 사방으로 지원을 청하는 서신과 사자를 보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는 아끼던 명검을 보냈으나 그대로 돌아왔고, 마사나리는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이에마사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구신들은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았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포위전의 1인자로 알려진 히데요시도 30만의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채 속수무책이던 적이 있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동원한 것은 총포나 활이 아니라 내응과 유인 등 모략전이었다.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
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그의 소실 아챠(阿茶) 부인에게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오고쇼님의 출전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도요토미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도요토미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이에야스도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훈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면 안 된다.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은 후세의 위작(僞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이보다 더 그의 처세법을 정확히 표현한 것도 없다.
여기 언급된 많은 사항 중에 단 하나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그 모두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지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 사람을 일본 역사상의 3대 영웅이라 부른다. 사실 일본을 통일한 고대의 전설적인 영웅을 제외하면 이 세 사람이 일본 역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독자적인 힘으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 바쿠후 말기의 유신 때에도 많은 영웅이 있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는 나라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야 겨우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마쿠라(鎌倉) 바쿠후를 연 미나모토(源)씨는 간토 실력자의 조종을 받았고, 무로마치(室町) 바쿠후의 아시카가(足利)씨도 지방의 다이묘들이 지지하지 않았다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허약한 지배자였다.
이들에 비해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는 독력으로 정권을 창출했다. 이 세 사람은 릴레이식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천하를 장악했으나, 저마다 독자적인 창립자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대책 하나만 보아도 이를 보호한 노부나가, 금교(禁敎) 정책을 쓰면서도 무역의 이익을 추구한 히데요시, 금교와 무역을 제한한 이에야스 등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부나가는 혁명적인 천재였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선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자신의 파격적인 발상만으로 난세를 헤쳐나갔다. 그에게는 군사(軍師)도 없었다.
특유의 판단으로 남이 생각지도 못한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고 이를 모두 성공시킴으로써 라이벌의 의표를 찔러 천하통일의 길을 앞당겼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인심 장악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내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발굴한 농민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는 노부나가의 부하로 종횡무진 지략과 권모술수를 발휘했다. 야전의 경험을 쌓아, 무장한 군단의 이동능력이 하루 50리에 불과하던 시절에 무려 200리나 진격하는 전격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허를 찌른 일이 종종 있었다. 그는 무장으로도 귀재지만 정치면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고마키·나카쿠테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전하고도 뛰어난 정치력으로 그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만년의 히데요시는 발전하는 국운에 발맞추어 이를 경영할 역량이 부족했다. 성격적인 결함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 침략이란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가 자신의 파멸과 정권의 몰락을 동시에 초래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무슨 일에나 신중을 기하고 판단하는 인물이었다. 야전의 제일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용맹과 결속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미카와 무사의 뒷받침이 있는데도 히데요시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에야스의 강점이 있었다. 인내가 그것이다. 인내는 굴종과는 다르다. 자기 제어 능력이고 그랜드 디자인을 지속하는 의지다.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내다보는 안목이다. 일단 기회를 포착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행동력의 밑거름이다.
‘인내’의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인물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두견새가 울지 않을 때 노부나가는 때려죽이고, 히데요시는 울도록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여기서 ‘두견새’를 ‘상황’이란 말로 바꾸어 놓으면 더 이해하기 쉽다. 즉 노부나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때 그럴 상황이 아니라도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있다. 히데요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략을 짜내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해 이에야스는 오로지 기다리면서 자연적으로 상황이 형성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쉽게 표현하면 ‘무단’의 노부나가, ‘지모’의 히데요시, ‘인내’의 이에야스가 된다.
적을 쓰러뜨리고 난세를 평정하여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마무리하는 데는 남다른 지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천재형인 무단적 인간이나 지모의 인간으로는 안정된 천하를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의 무단과 지모는 수습된 혼란을 되살아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얘기를 한다. 창업자에게는 노부나가형의 인간이 적합하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경쟁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기업의 기초가 다져졌을 때 히데요시형의 인간이 나오면 조직이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든 기업에는 노부나가형이나 히데요시형의 리더는 필요치 않다. 그들의 모험심이 조직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슬기롭게 조정하는 이에야스형의 인간이 활약할 무대가 필요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그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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