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은 여름날 우거진 녹음”
영축산에서 60년 머물며 계율과 화합 강조 … 주지 정우 스님과 함께 총림 안정 이끌어
유철주 불교 전문 자유기고가 jayu@buddhism.or.kr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오른쪽)과 나란히 선 원명 스님.
양산시 영축산에 자리한 통도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부른다. 한국불교의 으뜸이자 가장 큰 절이라는 것이다. 통도사가 최근 들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바로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지종(圓明智宗) 대종사와 주지 정우 스님이 부임해 다양한 불사(佛事)와 포교로 불자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 방장실에서 만난 원명 스님은 “정우 스님이 일을 잘 챙겨 통도사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며 주지 스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우 스님은 “방장 스님이 대중을 보듬어주시고 솔선수범해 정진하시니 절에 활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원명 스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원명 스님은 1960년대 초반 군에 입대했을 때와 1973년 영월 법흥사에서 100일 기도했을 때를 제외하곤 60년간 통도사에만 머물렀다. 스님은 “영축산만큼 좋은 수행처가 세상 어디에 있느냐”며 “오늘 아침 통도사에 우거진 녹음을 보니 이렇게 좋은 도량은 없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고 했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은 오랫동안 한곳에 주석하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조주 스님은 80세 때부터 40년간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에 머물며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선의 황금기를 열었던 마조 선사도 개원사(開元寺)에서 30년을 머물며 수많은 선지식을 길러냈다. 원명 스님의 머묾과 조주, 마조 스님의 그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장소지만 그 안에서 해제와 결제를 거듭했고, 매 순간 머무름과 떠남을 반복했으리라.
▼ 원명 스님은 어떤 인연으로 영축산에 오셨습니까?
“집안 어른 중에 출가해 스님이 된 분이 계셨습니다. 화산 스님이라는 분인데, 그 스님께서 출가를 권하셨습니다. 화산 스님은 우리가 영원히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면 절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른의 말씀이니 당연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산 스님은 통도사에 이름난 도인이 있으니 찾아가보라고 하셨죠. 그래서 극락암에 계시던 경봉(鏡峰)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음력 3월 15일, 몸의 피난처보다 마음의 피안(彼岸)을 찾기 위해 그렇게 스님은 통도사로 향했다. 경봉 스님이 원명 스님을 친견한 날은 출가한 지 60년하고도 딱 하루가 더 지난 날이었다. 원명 스님은 경봉 스님을 모시면서 허물어져가던 비로암(毘盧庵)을 중창해 많은 불자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 평생 모신 경봉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스님은 17세에 출가하셨습니다. 평생을 선(禪)만 하신 분입니다. 일흔이 넘어서는 극락암에서 매달 첫째 일요일에 법회를 열었습니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전국에서 1000명이 넘는 신도가 왔습니다. 일생을 정진과 교화에만 전념하셨습니다.”
경봉 스님은 한국 현대불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선사(大禪師)다. 강원(講院) 졸업 후 스님은 경을 읽다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참선 공부를 시작해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러던 중 1927년 11월 20일 새벽 통도사 극락암에서 방 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스님은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 교화에 나섰다. 통도사 주지 등을 거쳐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돼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했다.
대선사 경봉 스님 모시며 대중 교화 앞장
경봉 스님의 선기(禪氣)를 느낄 수 있는 일화는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우소(解憂所)와 관련된 것이다. 요즘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해우소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경봉 스님이다. 사연은 이렇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경봉 스님이 나무토막에 글씨를 써서 시자 스님에게 내밀며 “이것을 변소에 갖다 걸어라”라고 했다. 나무토막에는 각각 휴급소(休急所)와 해우소(解憂所)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스님은 휴급소는 소변보는 곳에, 해우소는 대변보는 곳에 걸라고 했다. 극락암을 찾는 사람들은 글씨를 보고 무슨 의미인지 의아했다. 이에 경봉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
“극락암 변소에 갔다가 휴급소, 해우소라는 팻말을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들 한소리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화급한 일은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을 바쁘다고 합니다. 내가 소변보는 곳에 휴급소라고 쓴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을 그곳에서 쉬어 가라는 뜻입니다. 해우소는 배 속에 들어 있는 쓸데없는 것을 다 버려 근심을 풀라는 의미입니다.”
▼ 경봉 스님이 강조하신 가르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경봉 스님은 수좌 스님들에게 ‘이번 생에는 세상에 안 나왔다 생각하고 공부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수좌 스님들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극락에 가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는데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스님은 경봉 스님을 30년 가까이 모셨지만 야단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묵묵히 수좌들을 뒷바라지는 하는 제자가 경봉 스님은 더없이 고맙고 대견했을 터다.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원산 스님은 “어른을 모시는 데 뭔가 특별함이 있는 분이 바로 원명 스님”이라며 “스님은 어른들 생각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안 하는 사람이었다”고 귀띔했다.
▼ 영축총림의 가풍은 무엇인가요?
“가풍이 따로 있습니까? 모든 대중이 계(戒)를 잘 지키고 서로 화합하며 공부하는 것이 가풍입니다.”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다. 스님은 방장 취임 초기부터 줄곧 화합을 강조했다. 덧붙여 스님은 통도사 일주문 양쪽 돌기둥에 새겨진 글을 소개했다. ‘方袍圓頂常要淸規 異性同居必須和睦(방포원정상요청규 이성동거필수화목)’. 삭발염의한 수행자들은 항상 청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서로 성격이 다른 대중이 모여 사는 데는 반드시 화합하고 우애롭게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 총림 운영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총림에 있는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 율원(律院) 등이 조화를 이뤄 발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가 넘쳐도 좋지 않고, 부족해도 옳지 않습니다. 함께 잘 어우러져야지요.”
대중이 풀과 나무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 까닭에 내키는 대로 어지럽게 자라지 못하도록 서로 붙들어주는 공간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원명 스님의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방장에 추대되신 뒤 ‘섣달의 부채같이 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심(下心)하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12월에는 부채가 필요 없습니다. 대중이 알아서 공부를 잘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를 버리고 대중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었고 지금도 그 다짐을 지키려 합니다.”
▼ 방장이 되신 뒤 변화가 많을 것 같습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매일 대중과 새벽 예불을 하고 공양도 함께 합니다. 매일 오전 사시 예불 시간에는 적멸보궁에서 108배를 합니다. 그냥 해오던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비로암에 머물 때는 잠자리에 들기 전 늘 내 손으로 걸레를 빨아 방을 닦았는데 방장이 되니 못하게 합니다, 허허.”
예불과 공양 지키며 철저하게 수행
스님을 30년 가까이 모셔온 통도사 비로암 감원(주지) 현덕 스님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시다”며 “예전부터 예불과 공양, 울력 등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현덕 스님은 이어 “방장이 되신 뒤에도 생활을 지나치게 철저히 해 대중이 더 열심히 정진하려 노력할 정도”라고 밝혔다. 원산 스님도 “스님의 생활이 부처님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며 “생활이 워낙 철저하다 보니 몸도 건강하고 사고도 정확하다”고 말했다.
▼ 통도사에도 여러 선지식이 계셨습니다. 인연을 듣고 싶습니다.
“통도사에는 수많은 선지식이 계셨습니다. 특히 근현대 들어서는 통도사 출신의 성해 스님, 구하 스님, 경봉 스님, 벽안 스님, 월하 스님 등이 한국불교를 이끌었습니다. 저는 특히 은사 스님과 전임 방장이셨던 월하 스님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월하 스님은 50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주석하면서 납자(衲子)들을 지도했습니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를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했습니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를 맞았고, 자신의 빨래는 직접 챙기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킨 분입니다. 월하 스님이 방장을 하실 때 제가 주지를 했는데, 스님은 늘 저를 믿고 모든 일을 맡기셨습니다.”
원명 스님이 월하 스님을 극진한 존경으로 모셨듯이 월하 스님 또한 원명 스님을 매우 아꼈다. 원명 스님이 환갑 때 통도사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자 월하 스님은 글을 하나 써줬다. ‘山影入門押不出 月光鋪地掃不塵(산영입문압불출 월광포지소부진)’. 산 그림자가 문에 들어왔는데 아무리 내보내려 해도 나가지 않고, 하늘에 밝은 달빛이 우주를 덮었는데 티끌인들 쓸어내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글을 본 많은 사람은 문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는 이가 바로 평생 영축산문을 벗어나지 않은 원명 스님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한다면 가깝게는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생사(生死)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지혜롭고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공부해 마음자리를 챙기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처음’의 마음이면 이루지 못할 것 없어”
원명 스님은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선원에서 먼저 공부를 하고, 공부가 어느 정도 이뤄지면 현장에서 포교를 하라고 당부한다. 현덕 스님은 “기도든 참선이든 공부할 때는 목숨 걸고 하라고 항상 강조하신다”고 전했다.
▼ 어떤 화두(話頭)로 공부를 하셨나요?
“은사 스님이 주신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화두는 대략 1700개가 있다. 그중 스님들이 가장 많이 참구하는 화두가 바로 ‘무자(無字)’다. 무자 화두는 고불(古佛)로 칭송받던 중국 당나라 때 조주 스님이 내린 것이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없다(無)”고 했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왜 ‘무’라고 했을까? 스님은 궁금했다. 바로 여기서 조주 스님이 왜 ‘무(無)’라고 말했는지를 뚫어내는 것이 무자 화두다. 원명 스님도 무자 화두를 들고 평생을 정진해온 것이다.
▼ 여러 선지식과 함께 공부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스님이 많을 것 같습니다.
“경봉 스님 문하에는 수많은 스님이 있었습니다.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을 역임하신 원담 스님, 해인사 일타 스님, 원로의장 종산 스님, 원로의원 성수 스님 등과 극락암에서 공부했습니다. 모두 치열하게 공부하신 분입니다.”
최근까지 한국불교를 이끌었고, 현재 많은 스님에게 가르침을 주는 훌륭한 스님들이 경봉 스님을 모시고 원명 스님과 함께 공부했다. 종산 스님, 성수 스님과는 수십 년 전에 만나 공부했고 지금도 자주 만나는 도반(道伴)이 됐으니 어려운 시절 함께 공부한 인연이 보통은 아닌 듯하다.
▼ 스님께서 가슴에 새기는 부처님 말씀은 무엇인가요?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늘 생각합니다. 우리 스님들과 불자들에게는 특히 초심(初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든 ‘처음’의 마음으로 한다면 이루지 못할 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자꾸 혼탁해지는 이유도 첫출발의 마음을 내팽개치고 삿된 이익만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오대산 한암 스님이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월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고 한 말씀도 자주 생각한다고 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엿보인다.
▼ 스님과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원력(願力)과 신심(信心)이 중요합니다. 공부를 반드시 마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좌도 우도 보지 말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모든 역대 조사와 선사는 그렇게 공부해서 견성(見性)을 이뤘습니다.”
스님은 말을 이었다.
“부디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마세요. 불법(佛法)은 온 천하에 두루 있습니다. 봄이 되면 온 세상에 꽃이 만발한 것과 같습니다.”
원명 스님의 말씀은 짧고 간결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말씀을 끝낸 스님이 일행에게 글씨를 내려줬다. ‘世界一花(세계일화)’다. 세계가 한 송이 꽃이라는 말씀이다. 어린 시절 수십 대중과 하나가 됐고 지금은 수백 대중을 하나로 묶어 조화를 이루는 영축총림 방장 원명 스님의 모습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스님은 글씨를 건네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보궁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참배하니 뒤따르는 스님과 신도들도 절로 신심이 나는 듯했다. 이렇게 영축총림은 사부대중이 하나가 돼 ‘종가’의 위용을 되찾고 있었다.
자장율사가 귀국하며 모셔와 … 불보종찰 명성
이와 함께 진신사리를 모시는 사찰은 5군데다. 통도사를 비롯해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태백 정암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5대 적멸보궁에는 사시사철 불자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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