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염화실의 향기_15_송광사 회주 법흥스님

醉月 2010. 6. 6. 20:03

-“소유 않고 베풀면 온 세상이 내 것이야”-

법흥스님은 “비가 온다고 원래 해가 없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자성은 항상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 이라며 “항상 일월(日月)같고 청풍명월 같은 광명정대한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 고 말했다. <문수사(부산)/이상훈 기자>

효봉스님(1888~1966)은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 선풍을 크게 떨친 일세의 대선사였다. 그의 법을 이은 수상좌 구산스님 등 제자들도 하나둘 떠나가고, 수필집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과 법흥스님만 생존해 있다. 환속한 제자 중엔 시인 고은(일초)씨와 전 동국대교수 박완일(일관)씨가 있다.

법흥(法興·77)스님은 현재 송광사를 지키고 있는 효봉스님의 유일한 상좌다. 송광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스님은 송광사 화엄전 방우산방(放牛山房)에 주석하고 있다. 그러나 스님을 만난 곳은 웅장한 녹음 속의 대가람 송광사가 아니라 부산 남구 용당동 문수사. 스님의 상좌인 지원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는 도심사찰이다. 스님 생일(음력 6월29일)을 맞아 신도들이 생일상을 마련한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출가한 중이 생일은 무슨…. 깨쳐서 부처되는 그날이 진짜 생일이지.”

법흥스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시인 조지훈 선생이 은사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스님은 불심 깊은 부모님을 따라 어려서부터 자주 절을 찾았다. 속명은 윤주흥. 아이들이 이름 때문에 “중아, 중아” 하고 놀린 것도 불교와의 숙연이었다고 믿는다. 대학시절에는 학교 근처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8배를 했을 정도로 신심이 남달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원 입학 준비를 위해 부모님이 다니던 문경 대승사를 찾았다. 마침 산내 암자인 묘적암에서 일타스님이 홀로 정진하고 있었다. 훗날 조계종단의 대표적인 율사(律士)로 명성을 떨친 일타스님은 열다섯살에 출가해 이미 단지(斷指)까지 했을 정도로 수행력이 특출했다.

그는 일타스님의 권유에 따라 하루에 3500배씩 사흘 동안 1만배를 올린 뒤 출가를 결심했다. 일타스님이 정성스레 머리를 깎아줬다. 묘적암에서 일타스님과 단둘이 석달을 지냈다. 그는 일타스님의 소개장을 들고 대구 동화사로 효봉스님을 찾아갔다. 효봉스님은 몇가지 질문을 한 다음 “얼굴이 중 상이고 사주에도 불도가 들었는데 왜 이제까지 속세에 있었느냐”며 흔쾌히 출가를 허락했다. 스물아홉살 때였다.

그는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3년을 살았다. 스승은 수행에는 빈틈이 없고 생활은 검소한 분이었다. 흘러내린 촛농을 긁어모아서 심지를 박아 다시 불을 밝힐 정도였다. 걸레도 너무 짜면 빨리 해진다고 살살 짜라고 했다. 그는 법문 때마다 스승의 수행담을 빼놓지 않는다.

“평범하고 미혹한 범부를 고쳐서 부처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죽을 각오로 참선하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요.”

법흥스님도 늦깎이 출가를 만회하기 위해 혹독한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송광사 선원, 동화사 금당선원, 양산 통도사 보광전, 합천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했다. ‘무자(無字)화두’를 들고 도봉산 망월사, 오대산 상원사, 김천 직지사, 문경 김룡사 등을 옮겨다녔다.

법흥스님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스님들의 이력, 송광사 역사, 경전은 물론 수십년 전 돌아가신 노스님의 열반 날짜까지 줄줄이 외운다. 아무리 오래된 일도 정확하게 기억해내 ‘불교계 녹음기’ ‘컴퓨터’로 불린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부처님 말씀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기억했다는 아난존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런 탁월한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다.

스님은 또 대단한 독서광이자 메모광이기도 하다. 송광사 방우산방에는 ‘법화경’ 등 불교경전, 큰스님들의 법어집, 법정스님의 저서와 은사 조지훈 선생의 전집 등이 가득 꽂혀있다. 스님은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은 그때그때 따로 적어둔다. 그렇게 한번만 적으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50년대 신문 사설까지 줄줄 외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스님의 말씀은 항상 열정적이다. 누구를 만나든 곧장 법문이다. 말은 속사포처럼 빠르고 막힘이 없다. 쉴 틈도 주지 않는다. 불경은 물론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철학과 문학, 유교의 경전, 한·중·일 선사들의 수행일화와 게송, 법문들을 두루 인용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기억력이 참선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선과 논리는 적이지요. 선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세상의 공부와 알음알이 따위가 들어설 틈이 애초에 없지요. 일체 선악시비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망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내력이 달리고, 병치레도 끊이질 않았어요.”

스님이 잠깐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국문학도의 꿈을 포기하고 구도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세속의 성공을 부러워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스님은 “부처님도 한 생에 성불하지는 못했다”며 “내생에 다시 사람 몸 받고 태어나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한 공부를 하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기도와 주력(呪力)이다. 스님은 새벽 3시면 일어나 어김없이 대능엄주를 독송하고 대웅전과 각 전각을 돌면서 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사형인 구산스님의 청으로 송광사 주지를 지낼 때부터 30여년 동안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스님은 적멸보궁이 있는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를 비롯해 전국의 기도처를 빼놓지 않고 찾아다녔다. 해인사 장격각에서는 340일 동안 17만배를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간절하다.

법흥스님의 책 선물과 붓글씨 보시는 불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10여년 전 ‘선의 세계’를 펴냈다. 송광사의 수행가풍과 연혁, 문화재 화보 등과 함께 ‘선과 현대생활’ ‘선가의 생활’ ‘현대인과 선’ 등 선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스님은 방문객들에게 이 책을 빼놓지 않고 선물한다. 마음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경구들을 붓글씨로 써놓았다가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불서는 물론 일반 교양서들도 잔뜩 사놓았다가 함께 선물한다.

“불교의 핵심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몸은 이번 생에 쓰고 버릴 일시적인 가아(假我)이고, 마음의 ‘본래면목’만이 실아(實我)라는 거지요. 그런데 마음은 상(相)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정처에 따라 이 자리가 정토가 되기도 하고 고해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을 닦는 것을 수심(修心), 마음을 기르는 것을 양심(養心), 마음을 쓰는 것을 용심(用心), 마음을 잘 거두는 것을 섭심(攝心)이라 합니다. 이런 마음공부를 통해 지혜가 완성됩니다.”

요즘 세상은 정토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가 시끄럽다. 한달 가까이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로 걱정이 태산이다. 학력위조로 물의를 빚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요즘같이 경박하고 급변하는 세태에 복잡하게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모두들 ‘내 것’에 집착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불화로 가득찬 겁니다.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베풀면 온 세상이 내 것인데 말이지요. 이런 시대일수록 광명정대한 마음으로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바로 행동하고, 바로 생활하고, 바로 정진하라는 ‘팔정도’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해답이지요.”

스님은 “불자들이 계율을 지키듯이 모든 사람들이 본분사와 법도를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깨진 그릇에 물을 담는 것처럼 만사가 허사”라며 “세상 그늘이 아무리 깊어도 탐(욕심), 진(성냄), 치(어리석음) 삼독심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정진하는 마음(용맹심)을 가지면 저절로 광명한 안목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부귀, 재물, 권력을 좇아 헐떡거리는 일이 실로 무상함을 알게 되지요. 지금 이 순간 향내나는 꽃씨를 뿌렸는지, 구린내 나는 나무를 심었는지 점검해보세요.”

스님의 말씀은 송광사 승보전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 ‘십우도(十牛圖)’의 설명으로 이어졌다. 십우도는 소를 찾는 심우(尋牛), 소의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 소를 얻는 득우(得牛), 소를 길들이는 목우(牧牛), 소를 타고 돌아오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어버리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자신마저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맑고 깨끗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세상에 깨달음을 베푸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10단계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선화(禪畵)다.

“물 흐르고 꽃피는 풍경이 그려진 반본환원의 게송은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입니다.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절로 붉다는 뜻입니다. 소동파는 ‘유록화홍(柳綠花紅)’,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고 했어요. 진리를 깨치고 보면 아무런 번뇌 없는 우주자연의 본래면목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성철스님이 말한 ‘산은 산, 물은 물’도 같은 경지지요.”

그렇다면 방우산방 주인이 풀어놓은, 십우도에도 걸리지 않는 그 소 한마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스님은 그저 껄껄껄 웃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십일째 이어지는 늦여름비, 또다시 퍼붓는다. 습습한 빗속에 버들은 더욱 푸르고 꽃은 그대로 붉다.

▲ 법흥스님은

1931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청주고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74~77년 송광사 주지, 84년 조계총림 송광사 유나를 지냈다. 현재 송광사 회주. 지난 4월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됐다. ‘선의 세계’ ‘계율강요’를 펴냈다.

 

상좌 지원스님이 본 법흥스님

-“게으름·시간낭비 거부 순수한 원칙주의자”-

“스님은 부처님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분입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시간낭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순수하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라고나 할까요.”

법흥스님의 상좌인 지원스님은 “송광사 역대 조사들에게 이어져온 서릿발 같은 기개를 보여주실 때마다 저절로 존경심이 든다”고 말했다.

“신도들이 시줏돈 한푼도 헛되이 쓰지 않아요. 돈이 생기면 전부 책을 사서 공양주의 이름으로 다른 신도들에게 보시를 합니다. 그렇게 복을 지어주겠다는 깊은 배려를 담고 있는 겁니다.”

지원스님은 조계종 사회부장을 연임하면서 종단의 살림을 꾸리는 중진스님이다. 오는 11월 마무리될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를 지원하는 종단 실무자이기도 하다. 효봉스님 손상좌로서 효봉스님 출가 본사인 신계사 복원불사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뿌듯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또 쓰나미로 폐허가 된 스리랑카에 고아원, 양로원, 한국문화원을 갖춘 조계종 복지타운을 세우는 데도 중심역할을 했다.

그는 1980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해 ‘산문에 부는 바람’ ‘이별연습’ 등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서정성 짙은 잠언시집 ‘가슴 저미지 않는 그리움은 없다’를 펴냈다. 사숙인 법정스님과 고은 시인의 문향을 그가 잇고 있는 셈이다.

그는 출가 3년째인 69년 경주 불국사에서 법흥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그는 어린 시절 묘관음사로 떠나 있던 스승에게 중학교에 입학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스승은 “일찍 출가해서 부처님 법을 만난 것만큼 큰 복이 없다. 세상의 학문은 불교 공부에 장애가 될 뿐”이라고 만류하는 내용으로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다.

지원스님은 스승께 알리지 않고 부산으로 떠났다. 문수사에서 일을 거들며 그곳 주지였던 덕암스님의 도움으로 중고등학교와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했다. 나중에는 스승도 틈틈이 문수사를 찾아와 제자를 격려했다. 지원스님을 다리삼아 덕암스님과 법흥스님은 평생 절친한 도반으로 지냈다.

덕암스님 열반 후에는 지원스님이 문수사 주지를 맡았다. 오늘의 문수사는 신도만도 5000가구가 넘을 정도로 부산에서 손꼽히는 도심사찰이다. 현재는 문수사 전체를 청량산 숲속 넓은 터로 옮겨 대규모 중창불사를 벌이고 있다. 특히 대웅전은 금강산 신계사보다 규모만 클 뿐 기둥과 서까래 하나까지 똑같이 짓고 있다.

지원스님은 “노장께서는 참선을 게을리 하면 부처님 시주 얻어먹고 밥값도 못한다고 불호령을 내리신다”며 “스님에게서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스님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