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_3

醉月 2010. 7. 15. 17:01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③]

얼어붙은 장진호와 중국군의 참전, 그리고 기적의 흥남철수작전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유엔군은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950년 10월1일 38선을 돌파한다. 그리고 11월24일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에 도달한다. 유엔군의 진군은 거기까지였다. 전세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앞세운 중국이 30만 대군을 파병하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 해병 1사단도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돼 전멸의 위기를 맞는데….
1950년 12월 흥남 사단묘지에서 열린 장진호 전투 희생자 추모예배에서 미군 해병대 대원들이 전사자들에게 경례하고 있다.

1950년11월24일 함경남도 장진군 유담리.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장 로버트 테플렛 중령은 쌍안경에서 눈을 뗐다.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광활한 개마고원과 얼어붙은 장진호.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왔다.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북진을 계속해서 마침내 개마고원에 이르렀다. 애초의 임무는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로 진격하는 것. 그러나 갑자기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무평리로 진격해 서부전선에서 퇴각 중인 8군을 돕는 것으로 임무가 수정되었다. 중국군 따위는 두렵지 않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 속에서 험준한 낭림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솔직히 겁이 났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작전장교 케니 소령이 쌍안경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테플렛 중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전의 두 해병 장교는 기분 나쁜 정적 속에서 서서히 조여오는 공포의 실체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눈 덮인 계곡 사이사이에 하얀 악마가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테플렛 중령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정찰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오자 해병대원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차가운 비탈길에 쭈그리고 앉아 공수된 칠면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이날은 마침 추수감사절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질린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해병들을 보며 테플렛 중령은 과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호언대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지 회의가 일었다. 대대 지휘소 천막에 걸린 화환에 ‘메리 크리스마스, 제기랄!’이라고 쓰인 글은 해병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적은 두렵지 않지만 솔직히 빨리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보급도 걱정이다. 흥남항에서 125㎞나 떨어져 있는데 보급로라고는 오로지 첩첩산중 사이를 지나는 외길뿐이다. 그 길이 차단되면 해병 1사단은 꼼짝없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고립될 판이었다.

테플렛 중령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빌며 상황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테플렛 중령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하갈우리의 사단 사령부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긴급 하달된 것이다.

 

맥없이 끝난 원산상륙작전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총공격을 감행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북한군은 무서운 기세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국군은 패주를 거듭하며 낙동강까지 쫓겨 갔다. 이대로 한반도는 적화통일되고 마는 것일까. 그러나 미국이 참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의 허리를 끊고 낙동강 전선에서도 반격을 개시하며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에 섰던 미 해병 1사단은 서울이 수복되자 전선을 육군에 인계하고 다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세기의 도박’이라는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원산상륙작전은 맥없이 끝났다. 북진 속도가 워낙 빨라서 해병대가 상륙하기 전에 육군이 이미 원산을 점령한 것이다. 별 어려움 없이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 1사단은 강계로 진격했고 마침내 얼어붙은 장진호에 당도한 것이다.

평균해발 1000m에 달하는 개마고원은 한반도의 지붕이고, 장진호는 발전을 위해 장진강 상류에 일제가 조성한 면적이 64㎢에 이르는 넓은 인공호수다. 개마고원 한복판에 있는 함경남도 장진군은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무려 영하 40℃까지 떨어진다.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에 도달한 미 해병 1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포병 11연대를 장진호 초입의 하갈우리에 설치하고 예하의 3개 보병연대 중에서 5연대와 7연대를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그리고 1연대를 후방 고토리에 배치했다. 장진호 동쪽은 한·소 국경으로 진출하려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가 이동해 있었다.

   

1950년 11월29일 미국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소속 군인들이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북한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의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모습. 미 해병대 사진사가 철수 도중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찍었다.

하갈우리에 보급품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다. 북진이 계속되면서 보급로가 자꾸 길어졌다. 보급로가 끊기면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다. 그래서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하갈우리에 중간 보급기지를 설치한 것이다. 사단 사령부에는 C47 수송기도 내려앉을 수 있는 대형 활주로가 임시로 깔렸는데 이 활주로는 나중에 철수할 때 큰 역할을 한다.

불행하게도 스미스 장군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군이 갑자기 참전하면서 미 해병대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중국은 북한의 패망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1950년 9월30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지만 맥아더 원수는 무시하고 북진을 결정했다.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10월20일 평양을 탈환했다. 낙동강으로 밀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11월24일에는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되면서 미국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치하게 되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조선을 도와서 미국과 싸운다.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고 보병 30개 사단에 포병 1개 사단, 그리고 철도병 1개 사단으로 구성된 30만명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총사령은 펑더화이(彭德懷). 서부전선 사령은 린뱌오(林彪). 그리고 동부전선 사령은 쑹스룬(宋時輪).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다.

기습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국군이 10월25일에 온정과 운산에 출현했다. 하얀 눈 속에서 유령군대가 돌진해 오면서 전선은 대혼란에 빠졌다. 꽹과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며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국군을 보며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8군은 퇴각에 들어갔다. 전세가 다시 뒤집힌 것이다.

 

중국군의 포위

맥아더 사령부는 미 해병 1사단에 후퇴하는 8군의 엄호를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장의 해병대가 내륙 깊숙이 진격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에게 고민이 더해졌다. 낭림산맥을 넘어 진격해야 하는데 작전지역이 너무 넓어진다. 그렇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해병 1사단은 산악지대로 진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중국군이 아직 동부전선까지는 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러나 그것은 미군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이미 은밀히 이동을 마친 중국군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해병대가 더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중국군이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를 겹겹이 포위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되어 미 해병대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전멸이다. 철수작전은 진격보다 더 어렵다. 지원받기 힘든 산악지대는 특히 더하다.

거기에 해병대를 압박하는 적이 하나 더 있었다. 무시무시한 동장군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퇴로가 끊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해병 1사단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과연 미 해병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1950년 11월26일 덕동고개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해발 1400m의 덕동고개는 유담리까지 진출한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보급로를 통제하는 이른바 감제고지다. 덕동고개를 빼앗기면 2개 연대는 고립될 위험에 놓인다. 미 해병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1개 중대를 덕동고개에 배치해 놓고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소대 지령관 양근사가 손을 들자 정찰조는 일제히 눈밭에 엎드렸다. 발각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미 해병들이 경기관총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허공에 대고 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 진지를 정찰 중인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계속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방한복은 안쪽이 흰색이어서 뒤집어 입으면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1952년 6·25전쟁 당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 소속 수송부대 병사들이 리어카에 탄약을 싣고 줄지어 행군하고 있다. 당시 중국군은 현대식 무기보다는 인해전술로 연합군을 압박해 전황 반전을 시도했다.

“돌아간다.”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서둘러 본대 복귀를 지시했다. 그는 나중에 비학산 전투에서 폭탄을 안고 해병대 진지에 뛰어들어 자폭함으로써 중국과 북한 양국으로부터 동시에 영웅 칭호를 받는다. 미 해병들도 이제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한 듯 잔뜩 긴장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총공세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양근사는 이를 악물며 본대를 향해 내달았다. 일제 기습으로 완전 섬멸을 노려야 한다. 퇴로를 차단했다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상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미국 해병대다.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현지인들 말로는 금년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했다. 양근사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동장군은 든든한 우군이다. 제9병단 병사들은 대부분 만주 출신으로 추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대를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찰조는 날 듯 본부로 향했다.

▼1950년 11월27일 유담리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장진호가 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제재소가 눈에 들어왔다. 5연대 3대대 G중대가 맡은 정찰구역은 거기까지다. 소대장은 손을 들어 휴식을 명했다.

M1 소총을 내려놓는 잭 라이트 상병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파일캡에 셀 파카를 입은 데다 속에는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어서 걷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추위가 사정없이 살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껴입어도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무전병이 무거운 M1 소총을 휴대해야 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카빈 소총은 추위에 약해서 불발되기 일쑤니 어쩔 수 없다. 장진호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대적으로 추위에 강한 M1 소총도 밖에 오래 두면 윤활유가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판이다. 라이트 상병은 쉬면서도 집게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방한용 벙어리장갑은 방아쇠를 당기게끔 집게손가락을 따로 내놓게 되어 있어 자주 움직여주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있다. 추위는 전투의 양상도 바꿔놓았다. 총은 제대로 발사되지 않았고 수류탄도 불발이 다반사였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중국군의 대공세로 서부전선의 8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괜찮은 걸까? 라이트 상병도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중국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호적인 현지민들 중에는 미 해병대를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 해병대가 세계 최강이라 믿고 있는 라이트 상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집에서 보내기 힘들 것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이 지긋지긋한 추위로부터 속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라이트 상병은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출발, 귀대한다.”

소대장이 기지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정찰 결과 별다른 이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저들도 미 해병대의 명성을 알고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큰 어려움 없이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잭 라이트 상병의 바람은 거기까지였다.

 

중국군의 대공세

중국군 9병단은 11월27일을 기해 일제히 공세를 단행했다. 9병단 산하의 79사단과 89사단은 유담리의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를, 59사단은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그리고 58사단은 고토리의 제1연대를 향해 일제히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는 80사단과 76사단의 협공으로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미 해병과 육군의 총병력은 2만5000명.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은 13만의 대군. 거기에 미 해병대는 동장군이라는 무시무시한 적도 상대해야 했다.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면 전멸이다. 평지인 서부전선과 달리 산악지대인 동부전선은 후퇴도 용이하지 않다. 상급부대장인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은 해상으로 철수하기로 하고 해병대에 흥남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흥남은 일제가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된 함흥 남쪽의 항구도시다. 우리에게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귀에 익은 흥남철수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워싱턴은 긴장했다. 이미 서부전선에서 미 제1기병사단 8연대 3대대가 중국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한 마당이다. 그런데 해병 1사단은 그보다도 나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흥남까지 가려면 우선 유담리의 해병 5, 7연대와 장진호 동쪽의 육군 7사단 31연대를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리고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토리로 철수한 다음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로 이동해야 한다. 일단 진흥리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길도 좋고 철로도 있어 함흥을 거쳐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스미스 사단장은 5연대와 7연대에 후퇴를 명했고 고립된 31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긴급 편성했다.

▼1950년 12월2일 덕동고개

경기관총이 요란한 총성을 내며 불을 뿜었다. 고개 아래에서 중국군이 새까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중대장 바버 대위는 중대원들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했다. 고지를 빼앗기면 유담리에 있는 5연대는 퇴로가 차단되면서 그대로 고립된다. 철수작전은 12월1일 오전 8시를 기해 개시되었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는 23㎞. 덕동고개를 넘는 게 가장 큰 고비다. 마지막 부대가 덕동고개를 넘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지를 사수해야 한다.

마침내 연대의 최후미를 담당한 해롤드 쉬러 대위의 중대가 덕동고개에 당도했다. 해병들의 팔이 모두 퉁퉁 부어 있었다. 추격하는 중국군을 따돌리기 위해서 무려 1000개 이상의 수류탄을 던졌던 것이다.

포병 11연대의 155밀리 곡사포와 105밀리 곡사포가 덕동 수비대를 엄호했지만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찬 공기는 공기밀도를 높였고 그로 인해 포 사정거리가 짧아져서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대 자체 화력인 81밀리와 60밀리 박격포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해진 땅으로 인한 반동 때문에 포판이 자주 파열되었던 것이다. 소총도 불발되기 일쑤였고 중대원들의 체력은 추위로 크게 떨어져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국군을 보며 바버 대위는 전멸을 각오했다.

그때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남쪽하늘에서 콜세어 전투기 편대가 날아왔다. 포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해병항공대의 콜세어 전투기와 해군의 스카이레이더 전투기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해병대는 무사히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급강하시에 특유의 금속성 마찰음을 내서 ‘죽음의 휘파람새’라는 별칭이 붙은 콜세어 전투기가 지상으로 내리꽂히며 중국군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어서 폭탄을 투하한 콜세어는 급상승을 시도했는데 어찌나 낮게 나는지 고지 위에서 공습을 지켜보고 있는 해병들은 전투기가 밑에서 솟아오르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해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반격에 나섰다. 해병들은 비록 지금은 후퇴하지만 함흥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반격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도 참전했던 중대장 해롤드 쉬러 대위는 나중에 자신이 치른 전투 중에서 유담리 철수작전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추락한 콜세어 전투기

해병 323전투비행대대 소속의 조지 웰커 중사는 덕동고개를 향해서 몰려들고 있는 중국군을 확인하고 급강하를 시도했다. 중국군들이 일제히 대공사격을 개시했지만 큰 위협은 못됐다. 기총소사를 끝낸 조지 웰커 중사는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고 기체를 상승시켰다. 항공모함 ‘바도잉 해협’에서 발진한 F4U 콜세어 전투기에는 5인치 로켓포와 500파운드 폭탄 4발이 장착되어 있었다.

편대기 4대가 차례로 기총소사와 로켓 공격을 하자 고지로 밀려들던 중국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승해서 고도를 회복한 웰커 중사는 다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선회에 들어갔다.

   

중국군과의 첫 조우였던 운산전투. 맥아더 원수는 중국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국군은 이미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놓았다. 중국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대공사격에 피격된 것일까. 급강하를 시도하던 웰커 중사는 앞쪽에서 하얀 연기가 이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오일 냉각기가 파손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항모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낙하산으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불시착을 시도할 것인가. 빨리 결정해야 한다. 낙하산으로 탈출하기에는 고도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체가 요동치더니 엔진이 멎었다.

웰커 중사는 불시착하기로 하고 하얗게 눈이 덮인 평원을 향해 콜세어 전투기를 하강시켰다. 덕동고개를 스칠 듯 지나친 콜세어 전투기는 썰매처럼 설원을 미끄러지며 불시착했다. 다행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저쪽에서 한 무리의 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중국군이라면 포로가 될 판이다. 웰커 중사는 권총을 얼른 뽑아들고 기체에서 뛰어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군인은 다행히 해병대원들이었다. 웰커 중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1950년 12월3일 장진호 동쪽 풍류천 미 육군 7사단 보급기지

7사단 13공병대대 소속 래비 헤이어 하사는 크레인을 향해 내달렸다. 보급창 일대는 새어나온 휘발유로 바닥이 철벅거렸다. 공병대대원들이 돌아다니며 드럼통마다 구멍을 내고 있었다. 후퇴하기 전에 전부 불 질러버리려는 것이다. 크레인 해체를 책임진 헤이어 하사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어디서 불똥이라도 날아들면 큰일이었다.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임무는 한·소 국경을 향해 진격한 한국군 1군단을 지원하는 것이다. 장진호 동쪽에 주둔한 7사단 31연대는 해병대보다 큰 어려움에 처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철수하려면 얼어붙은 장진호를 가로질러 유담리 해병 연대로 가든지 포위망을 뚫고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까지 가야 하는데 지원 부대인 31연대로서는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1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취약한 지점을 향해 화력을 집중했다. 하갈우리에서 급파된 특공대가 합세하면서 31연대는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대대장 페이드 중령은 전사했다. 페이드 중령에게는 나중에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된다.

철수작전의 마무리는 공병대 몫이다. 하갈우리의 해병대 기지도 그렇지만 풍류천 육군 기지에도 엄청난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철수하기 전에 보급품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조리 없애야 한다. C레이션 박스는 일차로 불도저로 밀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휘발유는 드럼통에 구멍을 낸 다음에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할 것이다. 탄약도 폭파시키면 된다. 문제는 불도저와 크레인 등 각종 중장비와 트럭들이다. 놓고 가기에는 아깝고 가지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비들이다. 그렇다고 부숴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대피하라는 고함과 함께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곧 유류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잠시 후면 탄약고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고심하던 헤이어 하사는 결심을 하고 크레인에 올라탔다. 분신과도 같은 크레인을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크레인이 철수 대열에 끼어들자 뒷줄에 선 트럭들이 클랙슨을 요란하게 눌러댔다. 느림보 크레인이 앞장선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1950년 12월4일 하갈우리

추위와 과로로 기진맥진한 해병들이 느릿느릿 기지로 들어왔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게 마치 유령의 행렬 같았다. 5연대와 7연대는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침내 사단 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당도했다. 일주일 동안 23㎞를 행군한 것이다. 기습과 추위로 137명이 죽고 4400여 명이 부상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철수였다.

5연대와 7연대, 그리고 육군 7사단 31연대 병력이 속속 집결하면서 하갈우리 기지는 1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1000여 대의 차량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었다. 다음 목표는 고토리. 그곳에서 1연대와 합류해서 진흥리를 거쳐 함흥으로 철수해야 한다. 일단 진흥리까지 가면 큰 위기는 벗어난 셈이다. 스미스 소장은 부대를 재편성하기로 했다. 11월30일부로 장진호 일대의 모든 부대는 해병 1사단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과연 해병대는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 해병대 1개 사단의 전멸이라는 전례 없는 참사가 벌어질 것인가. 전세계가 숨을 죽이고 중국군과 미 해병대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미 해병 1사단은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었지만 그렇다고 외부와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하늘길은 열려 있었다. C47 수송기가 수시로 하갈우리의 비행장에 착륙하며 보충병을 내려놓았고 부상병을 후송했다. 그리고 실전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헬리콥터도 큰 몫을 했고 공중투하되는 보급품도 해병대에 큰 힘이 되었다.

 

종군기자들의 취재

활주로 끝에 간신히 착륙한 C47 수송기에서 한 무리의 민간인이 쏟아져 내렸다. 해병 1사단을 취재하기 위해서 종군기자들이 하갈우리로 몰려든 것이다. 스미스 사단장이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향(In Other Direction)으로 진격 중’이라고 한 말도 이때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거듭되는 중국군의 기습과 밤이면 체감온도가 영하 40℃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추위. 현격히 떨어진 체력. 절망의 끝에 서 있는 해병대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자는 경계를 서는 한 해병대원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지금 가장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조국과 명예, 자유 수호와 불굴의 투지. 혹은 무사 탈출과 부모형제. 아니면 고향집과 따뜻한 잠자리…. 대략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기자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제기랄, 아무 생각도 없소. 가끔 좋아하는 여배우 얼굴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해병의 무뚝뚝한 대답은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녀로 소문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 여기자가 취재감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다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해병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마거릿 히긴스 기자는 통영상륙작전에 종군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귀신도 잡는다’는 기사를 쓴 사람이다.

“지금 가장 힘든 게 무엇인가.”

극한 상황에 처한 해병들을 오로지 취재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비정한 모습에 누군가 뒤에서 톡 쏘아붙였다.

“옷을 15㎝ 두께로 껴입고서 겨우 8㎝ 밖에 안 되는 물건을 꺼내놓고 소변을 보는 것이다.”

그 말에 주위의 해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아직은 농담을 건넬 여유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양모 내복에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목 스웨터와 방한 바지를, 다시 그 위에 파일 재킷, 야전 상의, 파카와 방한 후드가 달린 셀 파카를 차례로 걸치면 몸을 움직이는 게 불편할 정도다. 그리고 소변이 그대로 얼어붙는 추위에서 물건을 꺼내놓는 것은 사실 큰 고역이었다.

모처럼 크게 웃은 해병들은 다시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멀고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불굴의 해병 정신으로 반드시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을 완수해야 했다.

▼1950년 12월5일 하갈우리

C47 수송기가 요란하게 쌍발 엔진음을 울리며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종사 폴 프리츠 대위는 새 기록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긴 날개로 인해 알바트로스란 별명이 붙은 C47 수송기는 본래 민간 여객기인 DC3을 군용으로 개조한 것으로 비교적 짧은 거리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면서 물자와 인원도 많이 실을 수 있어 군용기로도 크게 각광받고 있었다. C47 수송기의 승무원 정원은 조종사와 부조종사, 통신사와 수송담당관 등 4명. 그리고 수송인원 정원은 27명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부상병을 한 사람이라도 더 후송해야 할 상황이다. 하갈우리와 함흥의 연포 비행장을 오가며 보급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고 있는 수송기 조종사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후퇴가 결정되었을 때 전원 항공기로 철수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반대했다. 가능성도 별로 크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최후까지 남아서 비행장을 수비하는 부대는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중장비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대부대가 뭉쳐서 싸우며 철수하는 것이 피해가 적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해병대의 전통과도 부합된다. 그래서 부상자만 비행기로 후송키로 한 것이다.

수송담당관으로부터 지금까지 최다 탑승자 기록이 38명이라는 말을 들은 프리츠 대위는 만만치 않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갈우리의 임시 비행장은 활주로 길이가 750m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미 공군 21공수비행단의 명예가 걸려 있는 문제다. 프리츠 대위는 그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우리는 40명이다.”

프리츠 대위의 지시가 떨어지자 수송담당관이 얼른 부상병 2명을 더 태웠다. 정원 27명의 공간에 40명이 밀려들었으니 기내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일단 태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륙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프리츠 대위는 나머지는 천운에 맡기기로 하고 수송기를 활주로 끝으로 몰았다. 그때 프리츠 대위의 눈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부상병 두 명이 들어왔다. 아마도 지휘관으로부터 후송을 허가받았음에도 더 이상 탑승하는 게 무리임을 알기에 그대로 서 있는 해병대원들일 것이다. 비행기로 후송되려면 세 차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동상자와 부상자는 트럭으로 후송되었고 웬만한 경상자는 도보로 후퇴한다.

“제기랄! 저들도 태워.”

프리츠 대위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주춤하던 수송담당관이 얼른 뛰어내리더니 두 부상병을 되는 대로 기내로 밀어넣었다. 활주로 길이가 충분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고 이륙하기는 힘들 것이다. 프리츠 대위는 브레이크를 질끈 밟고서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방식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기적의 이륙

고막을 찢는 엔진음과 공포에 질린 얼굴들. 코를 찌르는 악취. 프리츠 대위가 브레이크를 놓자 C47 수송기는 맹렬한 속도로 활주로를 달려갔다. 그러나 활주로 끝에 다 이르도록 수송기는 이륙에 충분한 힘을 얻지 못했다. 이대로 활주로를 벗어나면서 땅에 처박히는 것일까. 프리츠 대위는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당겼다.

다행히 C47 수송기는 땅을 박차고 올라갔다. 승무원과 부상병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비행고도로 상승하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프리츠 대위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고 있는 양쪽 날개의 쌍발엔진에 눈길을 주며 간절한 마음으로 제발 힘 내줄 것을 빌었다. 위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고지를 점령한 중국군이 상승하는 비행기를 내려다보고 총을 쏘고 있었다.

사격이 멎어들면서 프리츠 대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무사히 이륙에 성공한 것이다. 42명의 부상자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는 고비를 넘은 셈이다.

해병대가 하갈우리에서 철수할 무렵, 서부전선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8군은 12월5일에 평양을 포기했는데 서울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붕괴된 서부전선과 전멸의 위기에 처한 동부전선. 트루먼 대통령이 수차 부인했음에도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워싱턴 정가를 떠돌고 있었다.

▼1950년 12월6일 하갈우리

전열을 재정비한 해병들은 철수를 재개했다. 다음 목표는 1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토리. 그곳에서 1연대와 합류한 후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까지 가면 일단 포위망은 빠져나오는 셈이다.

철수 준비를 마친 해병들이 소대별로 정렬했는데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은 기온이 1℃씩 내려갈 때마다 능률이 3%씩 떨어진다고 한다. 벌써 보름 가까이 강추위 속에서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투에 시달렸으니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비교적 생생한 대원은 인천상륙작전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되었다가 복귀한 해병들이거나 본토에서 날아온 보충병들이다. 해병 1사단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에 참전을 자원했던 그들은 현지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이었다.

   

흥남 철수 당시 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상륙정에 다투어 타고 있다.

철수하는 해병들의 주머니가 불룩했다. 철수를 앞두고 PX 물자를 모두 나눠준 것이다. 캔디며 초콜릿은 얼어붙은 C레이션보다 훨씬 유용한 식량이 될 것이다. 해병대원들은 불도저가 전우들의 시신 위에 눈을 덮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꼭 돌아와서 전우의 시신을 수습할 것을 맹세했다. 처음에는 시신도 공수했지만 상황이 나빠지면서 현지에 가매장하기로 했다.

초신 퓨(Chosin Few). 장진호 철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중에 모임을 만들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발음으로 당시는 일본사람들이 만든 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해병대는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출발을 앞두고 대대장 로버트 테플렛 중령이 돌아다니며 대대원들이 총열을 제대로 닦았는지, 군화끈을 확실하게 말렸는지를 일일이 검열했다. M1 소총의 총열에 물방울이 맺히면 총열이 파열될 염려가 있고 군화끈이 얼어붙으면 군화를 벗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철저히 물기를 제거해야 한다. 슬리핑백 검열도 빠뜨릴 수 없었다. 지퍼가 얼어서 슬리핑백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철수 중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꼼짝없이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다. 함흥까지는 100㎞. 함흥에 도착할 때까지 해병대원들은 계속해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노숙을 해야 한다. 추위는 중국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철수는 7연대부터 시작되었다. ‘몬테주마에서 트리폴리까지…’. 하갈우리를 철수하는 해병대원들의 입에서 미국 해병대 찬가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서 포병대와 육군 7사단 31연대가 철수길에 올랐다. 사단 지휘부는 헬기편으로 철수했다. 마지막으로 5연대가 철수할 차례다. 3대대가 최후미를 방어하기로 하고 1대대와 2대대가 먼저 하갈우리를 빠져나갔다. 전차를 비롯해서 중장비는 철수 대열의 후미에 섰다. 행여 고장이 나면 길이 막혀 철수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하갈우리 기지에 남은 병력은 5연대 3대대뿐이다. 삽시간에 텅 빈 기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장진호. 악마의 입김과도 같은 삭풍. 3대대원들은 형용키 힘든 공포에 휩싸였다.

 

피난민의 합류

조금 있으면 이곳은 맹렬한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폭약 설치를 마친 공병들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 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철수를 명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본대에 합류해야 한다. 다행히 아직 중국군은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대장님!”

갑자기 후미의 경계병이 고함을 질렀다. 그 사이에 중국군이 나타났단 말인가. 테플렛 중령이 고개를 돌리니 수천 명의 무리가 이리로 몰려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대병력이라도 이렇게 대낮에 정면 공격을 감행해온 적은 없었다. 테플렛 중령은 황급히 전투배치를 명했다.

“쏘지 마시오!”

대대에 파견된 한국인 연락관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쳤다.

“저들은 우리를 따라 가려는 피난민들입니다.”

피난민이라고? 그러고 보니 중국군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와중에 피난민을 데리고 철수할 수는 없다. 테플렛 중령은 연락관을 통해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막무가내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없는 일이다. 테플렛 중령은 그 이상 만류하지 않았고, 피난민들은 머리에 짐을 지고 아이 손을 잡은 채 터덜터덜 후퇴하는 해병대의 뒤를 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난민의 수는 자꾸만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해병들처럼 당장은 함흥으로 후퇴하지만 곧 전열을 정비해서 재반격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때까지 잠시만 집을 떠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선 피난길은 정든 가족, 고향과 영영 이별의 길이 되고 말았다.

   

하갈우리를 출발한 일행은 하루 종일 눈 속을 행군하며 5㎞를 전진했다. 밤이 되면 또 중국군의 지긋지긋한 인해전술이 시작될 것이다. 해병들은 지옥 같은 밤에 대비하며 경계에 들어갔다. 낮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화력이 월등히 우세한 데다 콜세어 전투기들이 교대로 날아와서 철수를 엄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중국군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었다. 공포심을 자아내는 호각 소리와 꽹과리 소리. 산골짜기 사이로 난 외길을 따라 철수하는 해병들을 향해 중국군은 벌떼처럼 밀려들었고, 해병대는 정찰조를 산등성이에 매복시키고 그들과 대적했다.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에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길에 주저앉거나 누워서 잠을 잤다. 작렬하는 포탄과 엄습해오는 추위. 당번병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해병들을 깨웠다. 30분 이상 잠이 들면 동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잠깐 눈을 붙였던 해병들은 교대로 정찰조에 편성되어 산등성이로 올라갔고 사력을 다해 교전에 임했다.

▼1950년 12월9일 고토리

철수 병력은 사투 끝에 마침내 고토리에 도착했다. 중국군은 9군데에 매복지를 설치하고 끊임없이 해병대를 괴롭혔지만 해병대는 난관을 모조리 돌파하고 무사히 고토리에 당도한 것이다. 고토리까지 오는 동안에 86명이 죽고 506명이 부상했지만 그만하면 성공적인 철수였다.

이제 남은 마지막 관문은 황초령을 넘는 것. 상당한 거리를 후퇴했고 사단 병력이 전부 집결했으니 큰 고비를 넘긴 셈이지만 늘어난 부상자와 바닥을 보이는 체력이 큰 부담이었다. 부상자와 동상자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위생병들로 고토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위생병들은 모르핀 앰풀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앰풀을 입에 넣고 뛰어다녔다. 피도 얼어붙은 마당이니 수혈이 쉽지 않았다. 찬 음식 때문에 대원들은 설사가 났고 한기가 노출된 항문을 파고들면서 항문 동상환자가 급증했다. 폐렴환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강추위는 호흡 횟수를 떨어뜨리고 심한 기침을 유발한다. 빨리 난방시설로 옮기고 강심제를 먹이지 않으면 폐렴에 걸릴 염려가 있는데 그게 쉽지 않은 현실이었다. 해병들은 1m 이상 쌓인 눈을 헤치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한풍을 맞으며 전진을 계속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서.

스미스 소장은 부대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진흥리로 철수하기로 했다. 5연대와 영국군 해병대와 7사단 31연대 일부 병력이 제1 그룹이고, 7연대와 31연대 임시대대와 사단 지휘부가 제2 그룹. 그리고 고토리에서 합류한 1연대와 31연대 2대대, 사단 본부대대가 제3 그룹이다.

최대 관문은 신라 진흥왕이 북변을 시찰하고 순수비를 세운 해발 1200m의 고지 황초령이다. 황초령에는 수문교가 있다. 장진강발전소는 유역변경식 발전소여서 장진호의 물을 황초령으로 역류시켜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군이 황초령 수문교를 파괴하면서 해병 1사단은 퇴로가 끊겼다. 퇴로는 그것뿐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문교를 복구해야 했다. 해병 1사단 시설대대와 육군 185공병대, 그리고 58교량중대가 복구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다. 파괴된 부분은 채 10m가 되지 않지만 완전한 복구를 하려면 특수장비인 트레이드 웨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선 공병대에 그런 특수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와야 하는데 문제는 트레이드 웨이를 어떻게 황초령으로 수송하느냐다. 이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 공중투하뿐인데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동안 공중투하했던 식량이나 탄약, 연료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공수사령부는 긴급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중국군은 계속해서 해병대를 괴롭혔고 언론들도 쉬지 않고 호들갑을 떨었다.

▼1950년 12월10일 황초령 상공

OY2 스팀슨 정찰기에서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이 고뇌에 잠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공세 조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망원경으로 하얀 설원을 살피던 보좌관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헤이그 대위는 훗날 키신저에게 발탁되어 미국 국무장관까지 승진하는 인물이다.

   

흥남 철수 당시 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

철수 대열은 파괴된 황초령의 수문교 앞에 멈춰서 있었고 중국군 58사단과 59사단, 60사단 4만여 병력은 해병대의 후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60사단 산하 179연대는 미리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에 포진해 있었다.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동안에 중국군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기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이 전투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황초령을 넘어야 한다. 공수작전이 성공을 거둘까. 철수의 성공 여부는 이제 교량 복구에 달렸다. 아먼드 군단장과 헤이그 대위는 손에 땀을 쥐고 공중투하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요란한 엔진음을 울리며 C119 대형 수송기 8대가 날아왔다. 플라잉 박스 카(Flying Box Car)란 별칭이 붙은 C119는 최대 이륙중량이 3만8000㎏에 달하는 초대형 수송기로 숙천과 순천 공수작전 때는 105밀리 곡사포를 투하했던 적도 있었다. 공수 담당관들은 트레이드 웨이를 8개로 분리해서 8대의 C119에 싣고 공중투하하기로 한 것이다.

황초령 상공을 선회하던 8대의 C119 수송기는 지상에서 신호가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차례로 트레이드 웨이를 낙하시켰다.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고 있는 해병대 철수작전의 클라이맥스였다. 아먼드 소장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제발 파손되지 않고 아군 수중에 무사히 떨어져야 할 텐데. 8개의 트레이드 웨이는 낙하산에 매달린 채 황초령을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8개 중에 6개만 있으면 파괴된 수문교를 복구할 수 있다.

기도가 통했는지 다행히 8개 중에서 6개가 무사히 회수되었다. 한 개는 파손되었고 또 한 개는 중국군 지역에 떨어졌다. 아먼드 소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정찰기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해병과 육군 공병대는 신속하게 작업에 들어갔고 복구된 수문교 위로 철수 병력 전원과 1200여 대의 차량이 이틀에 걸쳐 무사히 통과했다. 마침내 해병대는 중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것이다. 진흥리에 중국군 일부가 매복해 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다. 함흥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과 한국군이 급히 진흥리로 출동해서 철수하는 해병대를 엄호했다.

사지를 헤쳐 나온 해병들은 진흥리에서 전원 기차와 트럭에 나누어 승차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을 만큼 해병대는 절박한 상황을 무사히 극복한 것이다.

장진호 포위전은 미 해병대보다 중국군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쑹스룬 9병단장은 자재를 일본에서 공수해서 황초령 수문교를 복구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엄청난 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해병 1사단이 9병단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에 함경북도까지 진격했던 미군과 한국군 1군단은 큰 손실 없이 무사히 철수했다. 그리고 전력을 소진한 9병단이 전선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중국군은 춘계공세에서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미군과 한국군은 재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1950년 12월12일 흥남

비릿한 바다 냄새로 가득한 흥남 벌판에 전에 없던 풍경이 생겼다. 하얀 십자가가 줄을 이어 꽂힌 것이다. 흥남으로 무사히 철수한 해병대는 가장 먼저 묘역을 만들고 전사자들을 안장시켰다. 반기로 게양된 성조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조총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묘지를 일일이 돌며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땅에서 귀한 생명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나중에 반드시 데리고 갈 것을 약속했다. 그래도 이들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고토리, 혹은 길가에서 눈에 덮인 채 방치된 시신들에 비하면 행복한 편일 것이다.

철수는 12월12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철수 병력은 장진호에서 철수해 온 해병 1만2000명을 포함해 전체 10만5000명에 달했는데, 피해가 큰 해병 1사단이 첫 번째로 승선했다. 철수작전에 참가한 크고 작은 수송선 200여 척으로 흥남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중국군이 간헐적으로 공세를 펼쳤지만 철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철수 병력과 맞먹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로 꾸역꾸역 밀려든 것이다. 피난민은 후송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막무가내로 배에 태워줄 것을 간청하는 그들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군 지휘부는 고심 끝에 피난민 승선을 결정했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로부터 흥남 철수작전에서 피란민을 구조한 공로로 대휘장을 받은 로버트 러니 씨(사진)와 부인. 러니 씨는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나선 피란민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피난민 철수가 결정되자 피난민들을 가득 실은 전마선들이 수송선으로 몰려들었다. 미처 보트를 얻어 타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배를 향해 헤엄쳐갔다. 그렇게 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던커크 철수에 비유해서 한국의 던커크라고도 불렸던 흥남철수작전은 민간인 철수라는 또 하나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950년 12월21일 흥남항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입항하고 있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가 레너드 라루 선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군과의 계약에 따라 항공유를 싣고 흥남항으로 향하던 중에 전세가 급변하면서 입항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냥 돌아갈 것인가. 라루 선장은 부두에 몰려든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라루 선장이 피난민들을 태울 것을 지시하자 46명의 선원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 모두의 생각이 같았던 것이다. 승선이 허락되자 전마선들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향해 몰려들었고 삽시간에 갑판이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무려 1만4000여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매서운 바닷바람을 가르며 부산을 향해 항로를 잡았다. 피난민들은 파도를 뒤집어쓰고 살을 에는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남쪽으로 가는 배에 탈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했다. 대부분 그동안 공산당의 학정에 치를 떨다 남쪽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조용하던 갑판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있는 여인을 에워싸고 욕설을 해대고 있었다. 그 여인의 남편이 공산당 간부였던 것이다. 공산당 간부를 남편으로 둔 여인이 왜 피난민 대열에 섞였을까. 말 못할 사연이 있겠지만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은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선원들이 채 말릴 틈도 없이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남편을 놔두고 어린아이와 함께 배에 오른 여인에게 사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어린 자식과 전쟁이 없는 땅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 하나만 가지고 배에 올랐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사흘 동안 항해하는 사이에 5명의 새로운 생명이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탄생한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부산을 거쳐 12월24일 거제도에 도착했다. 1만4000여 명이 사흘 동안 찬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면서 무사히 자유의 땅을 밟았다. 가히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영국의 기네스협회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등재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서 내려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 신의 놀라운 은총에 남은 생을 감사와 봉사의 삶으로 마무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거제도에 상륙한 피난민들은 현지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삶의 기반을 마련해갔다. 낯선 땅, 물선 곳이지만 동포애는 뜨거웠다. 거제도민들은 성심껏 피난민들을 도왔고 피난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갔다.

많은 수의 피난민이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들 중에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누이동생과 헤어진 채 국제시장에서 장사치가 된 금순이 오빠도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