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국토 불균형 발전, 부동산 투기, 불통 정치, ‘일단 하고 보자’주의 등 압축성장의 병폐 한층 줄어들었을 것 | ||||||||||||||||||||||||||||||
1964년 서독 아우토반 보고 구상 착수
경부고속도로 착공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주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고속도로를 보고 처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뜻을 가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에 따르면, 1964년에 서독을 방문해 히틀러가 건설한 아우토반을 보고 나서 그런 구상에 들어갔다고 본다. 이후 박정희는 세계 각국의 고속도로 자료를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며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가다듬었다고 하지만, 일반은 물론 정부와 여당에도 그런 구상을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67년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에는 고속도로에 관한 계획이나 예산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비로소 빛을 본 것은 1967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당시 건설부에서 일한 김의원 전 국토개발연구원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1967년 4월 말, 청와대가 느닷없이 김용희 국토계획국장을 호출했다. ‘국토계획에 포함시킬 사업을 빨리 적어 내라’는 것이었다. 김 국장은 생각나는 대로 4대강 개발, 10대항 개발, 고속도로 건설 등을 메모에 갈겨썼고, 며칠 후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메모 내용이 그대로 공약으로 발표됐다.”
아무튼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정부에서는 주원 건설부 장관, 민간에서는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 ‘투톱’이 되어 실무를 맡고, 청와대가 최고 사령탑이 되어 계획 수립, 진행, 점검 등을 두루 지휘했다. 당시 박정희는 집무실에 온통 지도를 펼쳐놓고 직접 자를 대고 선을 그리면서 계획에 몰두했고, 정주영 역시 건설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사를 독려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착공 뒤 불과 2년5개월이라는 ‘기적적인’ 속도로 공사가 완료됐고(본래 일정보다 1년을 단축한 것이다), 총길이 428km, 총공사비 429억원, 동원 인력 900만 명, 중장비 165만 대, 철근 5만t, 공사 중 사망자 77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됐으나, 그 직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신화에는 허점이 많다. 먼저 “경부고속도로가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계기가 됐다”는 신화를 보자. 경부고속도로가 이후의 경제성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기여가 과연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IBRD 보고서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예상된 물동량 수요 증대는 기존 도로를 포장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고, 굳이 국토를 횡단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필요는 없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된 뒤 한동안은 신설된 고속버스를 이용한 개인 여행용으로 주로 쓰였으며, 생각보다 화물 운송로 기능은 많이 하지 못했다. 경부고속도로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됨으로써 장기적으로 자동차 구매 수요를 높여 경제 발전에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마이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그다지 표가 나지 않는 기존 도로 포장 대신 거대한 고속도로 건설을 선택한 건 선전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당시 정부·여당에서도 반대론 비등
또한 “우리 힘과 기술로 이뤄낸 대역사”라는 신화는 어떤가? “우리 힘과 기술”이 사용된 점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부실함과 희생도 따랐다. 부족한 예산과 공기 단축이 가져오는 선전 효과 때문에, 청와대와 현대건설 회장실에서는 매일처럼 “더 빨리, 빨리!”라는 독촉이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휴일도 없이 매일 19시간 이상 작업하느라 사고가 잇달아 77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공사 현장에서 스러졌다. 또 고속도로의 핵심인 중앙분리대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중앙선을 넘는 차량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도로 전체가 부실 덩어리였으며, 개통 뒤 1년부터 보수 공사가 시작돼 10년이 지났을 때는 보수 비용이 고속도로 건설 총비용을 훌쩍 넘길 정도가 됐다. 정주영이나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말처럼 공사 기간을 1년이나 단축한 고속도로 건설이 “기업과 노동자, 그리고 전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그것이 ‘게으른 한국인’을 ‘근면한 한국인’으로 탈바꿈시키고 마침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정신적 자원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비합리적인 ‘하면 된다’, 얼마나 비인간적인 ‘빨리 빨리’였던가.
많이 언급되는 신화 중 하나는 아마도 “당시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았다”는 신화일 것이다. 당시 김대중 신민당 의원이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공사를 방해했다는 유언비어가 아직까지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충분히 타당한 근거를 갖고 반대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에 반대한 사람은 야당뿐만이 아니라 정부와 여당에도 있었다. 애초에 박정희가 오랫동안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비밀에 붙였던 까닭이 정부와 여당의 반대를 예상해서였다고 볼 만큼 예산 확보나 실용성 문제를 들어 반대하는 공무원과 여당 의원도 많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국가기간고속도로 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놓고도 거의 활용하지 않고 사실상 청와대 단독으로 건설을 밀어붙였다.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의 반대론은 △첫째 IBRD가 국토횡단 노선 건설이 더 효율적이라고 분석했음에도 국토종단 고속도로를 만드는 것은 지역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둘째 부동산 과열과 특정 기업의 비대화를 초래한다 △셋째 지나치게 빠른 도시화를 부추겨 농어촌이 피폐해지고 도시 인구 유입이 증대된다 등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런 문제점은 모두 타당성이 입증됐다. 건설부는 이에 대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권역에 당시 국민총생산의 66%, 공업 생산의 81%가 집중돼 있으므로 그 권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절실하다는 해명을 했다. 하지만 이는 숫자놀음으로, 서울~강릉, 포항~광주 권역을 연결해도 비슷한 수치가 나올 것이었다. 또한 호남고속도로 등을 추후 착공하고 국민소득과 정부 예산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는 균형 발전에 충분한 예산을 투입할 수 없다고 변명했으나, 지역 불균형은 경부고속도로 이후 급속도로 심화돼 경제 규모가 커진 지금에는 오히려 예전보다 해소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렇다면 당시 박정희 정권이 IBRD, 야당 그리고 정부·여당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여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백지화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단 IBRD가 권고한 대로 동서를 횡단하는 노선을 중심으로 일반 노선 증설 공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도로 증설은 필요했으며, 야당도 그 점에는 충분히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도권에서 강원도의 발전이 뒤처지지 않고, 영남과 호남의 공업지대가 유기적으로 연계되면서 지역 격차가 불거지지 않는 균형 발전이 차근차근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도시화와 수도권 인구 집중도 좀더 완만하게 진행돼, 오늘날만큼 지방에는 일자리가 없고 농촌에는 젊은이가 없는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제력 집중과 부동산 투기 과열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본격화한 만큼, 다른 식으로 도로 건설이 이루어졌다면 이런 부작용이 지금만큼 심화돼 빈부 격차와 사회 불안 요인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경제를 해치는 병폐로 잠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서울 양재동의 땅값은 순식간에 수십 배로 뛰어올랐다.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즉 박정희 집권기에 전국의 평균 땅값은 180배가 올랐는데 이는 같은 기간 예금 소득의 10배에 달한다. 참여정부 때 대통령 정책보좌관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부동산 가격 상승폭을 보면 박정희 시대에 이룩했다는 소득 성장이 대부분 거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땅값 상승을 촉발한 계기가 바로 경부고속도로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현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게 됐으며,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정경유착’이 한동안 한국 경제 발전의 모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운영 스타일이 ‘리더십’으로 인식되고, 여당은 무조건 밀어붙이고 야당은 무조건 반대하는 식의 비생산적 갈등이 한국 정치의 상식처럼 굳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말처럼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포함한 국토개발계획은 민족사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그 사업에 정권 바깥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대통령 한 사람과 그를 추종하는 관료 및 기업인 몇몇의 목소리 외에는 깡그리 무시됐다. “소통할수록 효율은 떨어진다”는 것이 경부고속도로를 ‘성공리에 건설’한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얻은 교훈이었으며, 따라서 이후 정치를 갈수록 일방통행식으로 몰고 가게 됐다. 이러다 보니 야당 쪽에서도 여당이 제기하는 정책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기보다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을 ‘선명 야당’의 자세로 여기는 패턴이 굳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지역감정만 잘 활용하면 선거에서 백전백승할 수도 있는 구도를 만드는 데도 일조했다. 소외당한 지역의 설움도 그런 지역감정에 의존하는 정치 풍토를 더욱 공고히 하는 재료로 쓰였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중요한 병폐 또한 없었거나, 훨씬 덜한 상태로 존재하게 됐을 것이다.
철학도 영혼도 없는 ‘빨리 빨리’ 세계관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싹을 틔운 ‘하면 된다’와 ‘빨리 빨리’ 의식이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면서 이후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룩하는 코드가 된 한편, “무조건 이기면 장땡이다” “큰일을 하려면 사소한 문제는 잊어라” 등의 처세술이 꽃피게도 했다. 공작정치에 흑색선전을 해서도 선거에 이기면 그만이다. 뇌물을 먹이고 부실 재료를 써도 대형 공사를 따내면 그만이다. 입시부정을 해서라도 명문대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표절하고 사재기를 해서라도 베스트셀러를 만들면 그만이다···. 정부에서 민간까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일단 길부터 닦고 보자! 그 길이 꼭 필요한 길인지, 그 길에 문제점은 없는지 따위는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철학도 영혼도 없는 세계관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 세계관이 다리와 백화점을 무너지게 했고,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초래했다고 하여 반성하던 시기도 어느새 잠깐이 됐고, 지금 바로 여기, 온갖 소통을 거부하며 경부고속도로를 밀어붙이던 시절을 방불케 하는 일 추진 방식이 이 땅에 버젓이 재현되고 있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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