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없는 삶 상상도 어려워 고산지역 사람들
얼마 전 TV에서 산악인 엄홍길의 등반 이야기를 봤다. 네팔 고지대에 자리한 8000m급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한 그는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흔히 고지대라고 하면 해발 3000m쯤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높이를 가리킨다. 이런 고지대는 평지보다 산소가 희박하다. 해발 5000m는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높이다. 세계의 대표 고지대인 네팔과 그 북쪽 땅 티베트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고산족에게는 차가 생명수나 다름없다. 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네팔 셰르파족은 ‘찌아’라는 이름의 차를 주식과 함께 애용한다. 티베트 사람은 이를 ‘수유차’라 부르면서 끼니때마다 마신다. 중국에서 수입한 단차에 야크에서 짜낸 우유나 버터를 넣어 차를 만들고 주식인 보릿가루와 함께 먹는 게 이들의 주식이자 간식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간만 나면 마시는데, 건조한 기후에 빼앗긴 수분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산소가 적은 곳에서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네팔과 티베트 같은 고지대에서는 일터에서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는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1993년 봄, 티베트 수도 라싸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한 가족이 시장에 나와 물건을 사면서 맨땅에 앉아 차를 마시는 정경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그때 들은 바로는 차를 많이 마시는 사람은 하루에 100cc짜리 찻잔으로 30~50잔을 마신다고 한다. 몸을 위해서 마시기도 하지만, 차를 좋아하는 마니아는 하루에 300잔도 마신다고 했다. 환경이 좋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양이다. 이쯤 되면 그들 몸이 모두 찻물로 구성돼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고지대에서는 평지보다 비등점이 낮아 차를 팔팔 끓여도 우리 입맛에는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뜨겁다 해도 40~50℃다.
평지에서 살던 사람은 해발 3000m 고지대에서 산소 부족으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래서인지 고지대에 사는 사람은 천천히 걷는 것이 생활화돼 있다. 어지럼증과 피로감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고지대에서는 차를 자주 마셔야 체내에 축적되는 피로물질을 빨리 줄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차를 많이 마시면 소변을 자주 보게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평지에서보다 소변이 적게 나온다. 그래야 고산병에서 해방된다고 한다. 차의 이런 구실 때문에 세계 산악인들이 공통적으로 차를 약으로 마신다.
우리나라는 산이 높다 해도 2000m 미만이다. 히말라야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차 효능을 경험한 등산족의 배낭 속엔 어김없이 차를 담은 보온병이 들어 있다. 산행 필수품이 된 것이다. 정상에 올라 마시는 그 상쾌하고 오묘한 한잔의 차맛은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겐 설명하기 어렵다. 차를 즐기는 이들은 이런 산뜻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차통을 들고 일부러 산행을 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녹차, 겨울에는 발효차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녹차는 냉수에도 잘 우러나, 산속 옹달샘이나 석간수에 차를 타서 10분쯤 지나 파르스름한 차색을 띨 때 마시면 된다. 여름에는 냉차가 갈증을 빨리 해소해준다. 겨울에는 역시 따뜻한 차가 좋다. 보온병에 차를 우려 준비해도 좋고, 뜨거운 물과 차를 따로 준비했다가 즉석에서 우려 마셔도 좋다. 여기에 죽염을 한 티스푼 넣어 마시면 땀으로 빠져나온 염분도 보충할 수 있다.
경기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611번지 2차선 도로 가에 집 한 채가 외로이 서 있다. 시선이 하정다회(霞亭茶會)라는 입간판에 머문다. 차인으로서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집이다. 외딴 곳에 찻집이 아니라 ‘다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으니 차교육을 하거나 차 모임을 갖는 곳이라는 뜻일 게다. 차를 멈추고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활짝 핀 차꽃이 객을 맞이해 깜짝 놀랐다. 차나무는 추운 지역에서는 살지 못한다. 따뜻한 남쪽에서 잘 자라는 나무라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노지에서도 잘 자란다.
주인은 올해 88세인 김무경(金霧敬) 할머니다. 홀로 뜰을 가꾸면서 일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차 예절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27년 전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차나무를 심고 올해로 20년째 차예절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김무경 할머니는 필자와 면식이 있었다. 27년 전 아들 혼례 때 차꽃으로 부케를 만들어 며느리에게 들게 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 특별한 사례를 글(‘주간동아’ 860호 참조)로 쓴 필자와의 인연은 참으로 기이하게 이렇게 닿았다.
차를 마시면 장수한다는 문헌은 많이 접해봤고, 차에 장수를 보장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했다. 우리 차의 고전 ‘동다송’을 지었던 초의선사(1786~1866)는 81세까지 살았다. 차를 벗 삼아 살아온 사람 대부분이 장수를 누렸다. 초의선사 글에는 “마른 나무에 싹이 돋듯 늙은이를 젊게 하는 신통한 효험이 빨라, 팔십 노인의 얼굴이 복숭아빛이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현대과학은 찻잎에 많이 함유된 타닌 성분의 항노화 작용이 비타민E보다 20배, 비타민C보다 10배 강해 노화 억제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무경 할머니처럼 88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차인은 흔치 않다. 차는 그냥 수명만 늘이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머리를 맑혀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까지 키워주는 효능을 지녔음을 발견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이날도 수업을 받으려고 중년 부인 6명이 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양희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승용차로 30~40분 걸리는 이곳까지 7년째 찾아오는 것은 차 공부를 하는 목적 외에 선생님 자체가 우리의 훌륭한 멘토이기 때문이다. 귀가 약간 어두운 것 외에는 텃밭을 가꿔 손수 식사를 짓고, 수강생의 간식까지 준비하신다. 입고 계신 한복도 손수 지으셨다. 밤 시간에는 사군자까지 가르치는 능력도 지니셨다. 슬하에 아드님 두 분이 있는데도 자식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홀로 사시는데, 이런 분께 차를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다.”
계산 빠른 요즘 시대에 몇 년째 빠짐없이 일주일에 한 번 노인에게 배움을 청하러 오는 수강생들도 대단하지만 차에 대한 할머니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차인들은 차(茶)라는 글자를 풀이하면서 풀 초변에 십(十) 자가 2개 있어 20이라고 해석한다. 또 그 아래의 사람 인(人) 자를 팔(八)로 보고 그 팔 자 아래에 있는 십(十) 자를 합쳐 팔십(八十)으로 쳤다. 그래서 20과 80을 보태면 100세, 또 십 자 아래에 팔 자를 합하면 108세다. 차를 오래 마시면 108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차수(茶壽)라 부르기도 한다. 김 할머니도 지금 같은 컨디션이라면 차수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이 겨울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장수를 꿈꿔보는 것도 행복한 상상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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