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_03

醉月 2013. 2. 5. 01:30

老松 아래서 세상잊고 讀書 조선 선비들의 로망이었다

) 이명기 ‘송하독서도’ - 소나무 다 늙도록 책만 읽는 선비라니!

 

▲  이명기의 ‘송하독서도’(103.8×49.5㎝, 종이에 옅은 채색).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  조석진의 ‘소나무’(33×28㎝, 종이에 수묵 위주 옅은 채색).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중국 한(漢)나라의 왕충(王充)은 참된 사유를 지키고자 사회적 통념에 따른 생활을 포기했다. 왕충은 자신의 방문을 굳게 닫았고, 문과 창에는 칼과 붓을 걸었다. 경조사의 사회예절도 일절 그만두었다. 오로지 생각에 침잠해 독서하고 저술하기를 30여 년 하여, ‘논형(論衡)’ 85권을 완성했다. 중국 고대사상사의 최고 역작이라고도 불리는 ‘논형’. 그 논리는 치밀하고 결론은 파격적이다. 예컨대 결혼은 욕망을 위한 것이고 벼슬은 녹봉을 위한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인과관계로 설명되지만 우연도 많이 작용한다. 정치가의 위선 논리에 사람들이 속는다. 하늘이 사람에게 복을 주는 기능이 없다. 사람은 죽은 뒤 귀신이 되지 않는다 등등. 그 시절 거론조차 어려운 문제를 현대의 상식 수준으로 끌고 간 사유가 독보적이다. 선입견에 지배되지 않았고 주위를 상관하지 않았던 왕충. 그의 삶은 불우했다. 왕충의 논리에 따르면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도 불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 귀신이 이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왕충의 저술법, ‘폐문저서’

왕충이 전념했던 저술 방법을 일러 ‘폐문저서’(閉門著書·문을 닫고 책을 쓰다)라 부른다. 이후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보면 인물지에 ‘폐문저서’ 하였노라는 칭송이 종종 등장한다. ‘폐문저서’ 혹은 ‘폐문독서’(閉門讀書·문을 닫고 책을 읽다)란 말은 출세할 수 없었던 학자들에 대한 위로였고, 학자의 참된 모습에 대한 기대였다. 그리고 ‘폐문저서’란 표현은 하나의 정제된 ‘환상’이 되어 갔다.

# 왕유의 시, ‘폐문저서’의 이미지

당(唐)나라의 왕유(王維)는 시 짓고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탁월했던 귀족 문인이다. 호화로운 별장을 장안 근교에 지어 놓고 세월 좋게 살았던 인물이다. 어느 봄날 왕유가 벗을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했다. 그 벗의 뜰에 소나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왕유는 이때의 정황을 시로 읊었다.

‘폐문저서’를 여러 세월 하노라니,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
閉門著書數歲月,
種松皆作老龍鱗.

어린 소나무가 다 늙는 줄 모르고 책을 썼다니! 부재 중인 벗에 대한 칭찬이 지나치다. 세월의 길이에 대한 과장이 심하지만, 왕충의 ‘폐문저서’가 30년이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떠올려 보게 된다. 왕유의 벗이 왕충 같은 저술가는 물론 아니었지만,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에 그럴듯한 시적 표현이다.

무엇보다, 왕유의 이 시구를 읽노라면 “왕유의 시에 그림이 있다”고 한 소식(蘇軾)의 글이 정녕 빈말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선비의 서재 앞에 노송 한 그루. 그 풍경이 운치 있게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옛날 왕충의 불우한 인생과 고독하고 치열했던 저술마저도 멋스러운 영상으로 슬그머니 변조되어 기억된다. 시인의 요술이 이것이다.

왕유의 시구가 빚어 놓은 멋스러운 이미지는 이후 중국과 한국의 회화작품으로 무수하게 재탄생되었다. 특히 중국 명(明)나라에서 위의 두 줄 시구를 얹어 소나무 아래 서재에서 독서하는 화면이 유행하였다. 중국 근대기에는 오직 소나무 한 그루만 덜렁 우람하게 그려 놓고 그 위에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라 적어 넣은 그림이 적지 않다. 왕유 시의 이미지가 그림에 정착되면서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독서를 뜻하는 코드로 작동하는 경우다.

# 탈속의 여유로 그려진 그림들

조선 후기 정조 때의 화원화가 이명기(李命基)는 초상화를 잘 그린 실력파 화가였다. 18세기 후반에 활약했고, 호는 화산관(華山館)이다.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데 참여했고, 김홍도와 합작으로 그린 ‘서직수초상’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걸작이다.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산수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다. 제법 큰 화면에 정조대 왕실의 산수화풍이 반영된 그림이다. 그림 속 화제가 이러하다.

독서하기 여러 해,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

- 화산관

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鱗.
- 華山館

왕유의 위 시에서 앞구가 단축되면서 ‘책을 쓰다(著書)’는 ‘책을 읽다(讀書)’로 바뀌어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책 읽기가 느긋하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인공은 늙은 소나무다. 바위에서 자라나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선비를 호위한다. 솔잎은 살짝 휘어진 바늘침들 같고, 가지에는 솔방울이 닥지닥지. 청록의 선염을 더하여 기운이 청정하다. 소나무의 몸통은 온통 우툴두툴 용의 몸통이다.

선비는 쓱쓱 그려 작게 아래 앉히고, 소나무는 공력을 더하여 치밀하게 크게 그렸다. 말할 것도 없이, 선비의 내면을 소나무로 표현한 장치다. 세상 잊고 독서하는 선비의 기상과 여유로움. 흥미롭게도 이 화면은 왕충의 고독이나 왕유의 방문을 상기시키기보다는 ‘푸른 소나무’와 ‘즐거운 독서’의 탈속을 만끽하도록 인도해 준다. 오랜 독서에 지겨운 양 쪼그린 동자가 귀엽다. 달그락달그락 끓어오르는 차향기에 향긋한 솔향기가 어우러져, 독서하는 선비 마음이 맑고 여유롭게 보인다.

누군가가 왕실의 전문화원 이명기에게 요청해 이를 그리게 한 것이리라. 요청자와 화가 모두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그림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나무 아래 책 읽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은 이 그림으로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다른 예로 조선 말기 조석진(趙錫晉·1853~1920)의 ‘소나무’를 소개한다. 조석진 역시 고종의 어진을 그린 전문화가이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왕유의 시구 두 줄이 온전하게 적혀 있다. 휘어진 소나무의 가지와 그 아래 서재의 선비 모습은 다소 쓸쓸해 보인다. 세상명리에서 벗어난 한적함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준다.

# 선비는 ‘독서’만 하나

한국과 중국의 산수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재에 앉아 독서하는 선비가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그림은 대략 중국의 원나라 말기부터 은거학자의 이미지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산수화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서재와 독서 선비가 매우 작게 그려진 경우도 많다. 이는 산수 속 독서라는 운치를 말해 준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분해 그림의 주제로 끌어낼 때, ‘서재도’ 혹은 ‘독서상’ 등의 명칭이 쓰인다. 조선 후기에는 독서상이 한결 부각된다.

그림 속 서재와 독서상 때문일까. 우리에게 떠오르는 옛 선비의 대표 이미지는 낮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독서상이다. 또한 이러한 옛 그림 속 선비들을 보노라면, ‘아 옛 분들은 밤낮없이 독서만 하셨나?’라고 존경하거나 부러워하기도 한다. 답은 노(No)다. 그들이 마음껏 독서할 수 있었다면 그림으로 그릴 리 만무하다. 게다가 산수 좋은 공간에서 동자까지 거느린 느긋한 독서라니, 어느 시절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 ‘독서’ 이미지의 진짜 이유들

그러면 독서상은 조선시대 문화 속에서 무엇을 뜻하는 코드였을까.

독서는 사회적 권력이었다. 책을 들고 배울 수 있는 신분은 제한돼 있었다. 그 책이란 몽땅 외국어(중국한문)였다. 책을 읽고 저술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다. 게다가 과거를 통과해 평생 맘 놓고 책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의 관료층이었다.

관료들도 바랐던 최고의 독서가 있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임금이 여가를 내려 독서하다)다. 대제학이 10명 안팎의 신진학자를 선발해 오로지 독서하고 토론하도록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는 인재육성 제도였다. 세종대에 생겨 독서당이 운영됐고 정조 이후로는 규장각이 이어갔다. 한 시절 이른바 ‘호당독서’(湖堂讀書·풍취 좋은 동호가에서의 독서)라 운치 있게 불렸던 이 혜택은, 조선의 관료라면 누구나 선발되기를 바라던 ‘로망의 독서’였다.

독서는 경제력이기도 했다. 정보의 유통이 오직 책이라는 매체로 이뤄지던 시절이라, 책이란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명나라 출판문화가 급격히 성장하자, 조선의 문인들은 책 구입 열망에 빠져들었다. 중국 시장에 서적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를 사들이는 장서(藏書)의 취미가 조선 후기 문인사회에 크게 유행했다. 돈이 많은 이라야 장서 취미를 향유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독서 리스트를 만든 뒤 서적을 갖춰 소유하고 독서할 것을 갈망했다. 전통적인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이요, 중국 생존작가들의 신간서적, 치병을 위한 건강서적, 혹은 식물 재배와 수석의 취미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조선 후기 문인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어느 집에는 책이 몇 만 권이라더라, 어느 장서가가 근래 신간을 잔뜩 사들였다더라, 어느 독서광이 수십만 번을 읽고 또 읽어 깡그리 암송한다더라 등등.

또한 독서는 무엇보다 인격과 지식의 이미지였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하며 제자를 키워 냈던 처사(處士)들이 있었고, 이러한 분들에 대한 존경이 있었다. 독서에 내재된 권력과 경제력을 잊도록 해주는 탈속의 이미지는 이러한 존경과 바람이 더욱 크지 않았다면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문화의 욕망과 이미지의 탄생

이명기의 그림 속 소나무 아래 독서하는 저 선비를 다시 본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나라의 왕충이라 해도 그만이고, 당나라 시인 왕유의 벗이라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 눈에 이 선비는 조선 후기 선비들이 꿈꾸었던 자화상이며 그들의 정체성이다. 꿈이기에 ‘환상’이지만, 떨칠 수 없는 소망이었다.

관료 문인으로 글과 그림을 즐겼던 한 학자는 그 시절 독서상에 담긴 소망을 온전히 그림 위에 올려놓았다. 프랑스 기메미술관에 소장된 윤제홍(尹濟弘·1764~?)의 작은 그림 ‘산수도’를 보면, 너른 물가 작은 서재에 선비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윤제홍이 그림 위에 글을 적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산속에서 독서하는 것이거늘, 아직 이루지 못했지. 이에 그림으로 그려 봤다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긴 한숨으로 탄식할 뿐이지.”

윤제홍은 과거를 거쳐 대사간에 이른 문인이다. 시문과 그림에 능했고 여행과 풍류가 남달랐다. 그의 꿈은 독서, 산중 고요한 곳에서의 세월 모르는 독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지 못하는 소망이었다.

한 시절의 꿈은 그 시절의 현실과 문화 속에서 자라나 그림으로 그려진다. 조선 후기 문화의 꿈이 독서 이미지로 그려졌다면, 우리 시대의 문화적 욕망은 어떠한 이미지로 그려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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