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 흔히 ‘백조’라고 하지요. 겨울 철새 중 ‘기품’에 대해 말하자면 단연 고니입니다. 커다란 체구부터가 그렇고, 순백의 몸 색깔도 그렇거니와 우아하게 물 위를 미끄러지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수면을 차고 달리다가 큰 날개를 펴고 이륙하는 모습이나 목을 길게 빼고 폭격기 편대처럼 무리 지어 나는 모습에서도 당당한 기품이 느껴집니다. 경남 창원의 주남저수지에는 이번 겨울 750마리쯤의 고니가 찾아왔습니다. 청둥오리와 청머리 쇠오리, 고방오리 등 주남지를 찾은 80여 종의 다른 겨울 철새까지 더하면 대략 1만 마리쯤이랍니다. 겨울이면 줄잡아 수십 만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는 천수만이나 금강하구언에다 대면 명함도 못내밀 정도라지만, 그럼에도 주남지를 찾아가는 건 거기서 고니를 만나는 감동이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하기 때문입니다. 주남지의 고니들은 방죽 가까운 수면 위에서 깃을 치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도 했고, 저수지 너머 무논에 일제히 내려앉아 탐조에 나선 아이들과 가까이서 눈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주남지가 있는 창원. 고만고만한 지방의 중소도시쯤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지난 2010년 7월 창원과 마산, 진해시가 합쳐져 이뤄진 창원시는 말 그대로 ‘거대도시’입니다. 창원을 보겠다면 고층빌딩 즐비한 창원의 도시 풍경과 가곡 ‘가고파’에 등장하는 마산의 호수 같은 고향바다, 그리고 근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진해까지 다 돌아봐야 합니다. 진해야 벚꽃 필 때를 겨냥해 아껴둔다 해도 나머지 것만으로도 하루 일정으로 어림도 없습니다. # 주남지의 호수위로 고니떼들이 날다
붉은 겨울 햇살이 퍼져가자, 사방에서 철새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훗훗훗…, 과안 과안…. 고니들도 하나 둘 머리를 빼들고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몇 마리의 고니가 얼어붙은 무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걸 시작으로 뒤이어 고니들의 비행이 시작됐다. 붉은 햇살이 번져가는 하늘 위로 목을 길게 뺀 고니들이 마치 일사불란한 대열을 이룬 전폭기처럼 날아오르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착륙했다. 창원의 주남저수지는 낙동강의 범람을 받아주던 배후습지에 1920년대 둑을 쌓고 준설을 해서 만들어졌다. 주남지는 주남저수지 한 곳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고, 인근의 산남, 주남, 동판 등 3곳의 저수지를 한데 묶어서 이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주남지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거대한 저수지였다. 그때만 해도 ‘주남’이란 이름조차 없었다. 마을 이름을 따 산남늪, 용산늪, 가월늪이라고 불렀고, 더러는 그냥 강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후반부터 가창오리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오면서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됐다. 주남지에는 겨울이면 고니, 재두루미, 고방오리, 청둥오리, 청머리오리 등의 철새들이 날아와 한 철을 보낸다. 저수지의 수면 위는 물론이고 방죽 너머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도 온통 철새들로 수런거린다. 예년에는 가창오리와 기러기가 많이 날아들었다는데, 올해는 가창오리나 기러기 대신 청둥오리와 ‘백조’라고 불리는 고니들이 많이 날아왔다. 기러기와 가창오리들이 그해 겨울이 추우면 남쪽으로 더 내려가는데 겨울 추위가 유독 매서운 올해는 해남의 고천암호 일대에서 겨울을 나는 모양이었다. 올 겨울 주남지에 날아든 고니는 열 마리 중 일곱 마리쯤이 이름 그대로 몸집이 큰 ‘큰고니’ 들이었다. 주남지의 고니들은 겁이 없다. 고니들은 아예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저수지 복판쯤에 내려앉는 게 보통인데, 주남지의 고니들은 방죽 가까이에 몰려앉아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심지어 도로 바로 옆의 무논에 수십 마리씩 내려앉아 웬만한 기척에도 날아가지 않고 고개를 빼들고 이쪽을 살핀다. 이렇듯 주남지의 철새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탐조대 부근의 무논에 매일 오후 2시 무렵 볍씨와 고구마를 먹이로 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먹이를 주는 시간에 맞춰 주남지를 찾아간다면 탐조용 망원경 없이 맨눈으로도 고니의 기품 있는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철새탐조라면 가창오리 수만 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가득 메우는 ‘장관’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 고요한 겨울 저수지 수면 위를 오리떼와 고니들의 모습을 숨죽이고 감상하는 맛도 못지않다. 이렇듯 철새 한 마리, 한 마리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게 감동이 오히려 더 크다는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살아있는 생명과 마주하는 감동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 창원에서 만나는 의외의 세련된 도시풍경
도시의 크기나 인구뿐만 아니다. 호주의 캔버라를 본떠 만든 계획도시인 창원 도심에는 거대한 고층빌딩군과 세련된 쇼핑몰들이 늘어서 있다. 도심에는 다국적 호텔 체인의 최상급 브랜드인 풀만호텔을 비롯해 특급호텔도 여럿이다. 상남동, 용호동, 중앙동 일대는 서울 도심의 번화가를 연상케 할 정도다. ‘도시여행’을 콘셉트로 도심 이곳저곳을 돌아본대도 충분히 흥미롭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따라 운치 있는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를 걷거나 명품이 즐비한 세련된 쇼핑몰을 둘러본다면 마치 해외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겠다. 통합 창원시는 옛 창원시를 의창구와 성산구로, 옛 마산시를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로, 옛 진해시를 진해구로 편입했다. 옛 창원시였던 의창구와 성산구 일대의 명소라면 마금산 온천이 첫손으로 꼽힌다. 북면 신촌리의 마금산 온천은 조선 초부터 이름났던 온천이었다. 그러나 온천의 명성을 들은 고위 관리들의 행차가 잦아지면서 이의 폐해를 절감한 주민들은 영조때 제 손으로 온천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높은 분들의 행차를 위한 주민들의 노역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리했을까. 그러다 일제강점기이던 1927년 일본인 의사가 온천에다 마금산장을 짓고는 온천 독점 영업을 했다. 종합병원을 운영하던 일본인 의사는 이곳 온천을 환자들의 요양장소로 활용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러·일전쟁 직후 마산선 철도가 놓이면서 마산에만 일본인이 전체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6000여 명에 달했으니 일본인 손님들도 들끓었다. 해방 이후에도 마금산 온천은 이름을 날렸다. 윤치영, 안호상, 김상옥, 서정주를 비롯한 이름난 인사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자유당 부통령이었던 이기붕도 치료를 위해 한동안 온천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국회의원 30여 명이 이 부통령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들고나면서 이곳 마금산 온천은 밀실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기왕에 창원이 관광지가 아닌 탓인지 온천은 인근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온천의 전반적인 느낌은 다소 쇠락한 듯하지만, 그럼에도 온천을 찾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시설은 그다지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도 물이 좋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주민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일정에 끼워넣어 볼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매끄러운 마금산 온천수에 몸을 담가보니 ‘물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따라 백월산을 오르다
백월산에는 삼국유사 ‘탑상편’에 등장하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신라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사람이 세속을 등지고 이곳 백월산 깊은 산골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수행이 3년째로 접어든 어느 날, 한 낭자가 달달박박이 수도하던 북쪽 암자를 찾아온다. 낭자는 교태를 부리며 하루 묵어가길 청했으나 달달박박은 ‘수행중’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낭자는 다시 남쪽 암자의 노힐부득을 찾아갔다. 노힐부득은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게 보살행’이라며 낭자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목욕을 했다. 낭자는 자신이 관음보살임을 밝혔고, 일순 목욕물은 금빛으로 변했다. 결국 노힐부득은 낭자의 도움으로 성불해 미륵불이 됐으며, 노힐부득이 계를 더럽혔을 것으로 짐작하고 찾아온 달달박박도 낭자의 도움으로 무량수불이 될 수 있었다. 수도행의 자세는 달달박박이 앞섰지만, 성불은 중생의 뜻을 외면하지 않은 노힐부득이 먼저였던 것이다. 훗날 이야기를 들은 신라 경덕왕은 사신을 보내 백월산에 대가람을 조성토록 했다. 그렇게 지어진 게 바로 백월사라기도 하고 백월산남사라고도 불리는 절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집의 자취도 없다. 옛 절터에는 백월산남사란 같은 이름을 달고 있으되 옛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쑥한 절이 들어서 있다. 거기서 산길로 200m쯤 더 올라가면 백월사란 이름의 절집도 있지만, 절집이라기보다는 허름한 시골집인데다 그마저도 2년 전쯤 비워져 나무덩굴이 폐허가 되다시피 건물을 온통 휘감고 있다. 거기서 깜짝 놀란 것은 신라시대의 것임이 분명한 연꽃 문양이 뚜렷한 남사지의 석등 기둥이 절집 폐가의 처마 한쪽을 받치는 석재로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다는 것이었다. 백월산 자락에서는 비록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옛 이야기의 향기를 아무데서도 느낄 수는 없다는 게 아쉽지만, 산 아래 월배리 마을에 ‘달달박박’이란 간판을 내건 황토흙집 레스토랑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백월산을 올려다보면서 수도행의 정신과 중생의 뜻이란 함의를 되새겨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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