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함께 사는 미국인들
영혼은 아름답다.
그것은 내가 많은 날들을 영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느낀 가장 중요한 말이다. 미국에서 그래도 3년 이상 지내면서 여러 가지 깨닫고 느낀 것이 많다. 땅덩어리가 크다는 것에서부터 많이 먹고 잘 살고 그리고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이 원리 원칙대로 움직이는 나라라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바로 이러한 얼렁뚱땅하지 않고 하나하나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성실함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내가 직업 근성이 나와서 그렇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했다는 미국, 그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도 영혼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록 음악계이 신화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덤은 바로 자신이 살던 집과 나란히 위치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가수 김정구 선생님의 묘소가 당신이 살던 집 앞마당에 있다면 아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는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그러한 ‘집 안에 무덤이 있는’ 예는 일상적인 것으로 알고 산다. 미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카톨릭 교회에서도 영혼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똑같다. 납골당 비슷한 묘지가 카톨릭 성당 지하실마당에 있어서 수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의 유해까지도 가지런히 정성껏 모셔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라면 생각할 수도없겠지만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모신 공동 묘지를 도시의 한복판에 버젓이 두고도 아무런 성가신 느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뉴욕 시의 경우도 부룩클린과 퀸스가 연결되는 한복판에 거대한 도시 속의 묘지가 펼쳐져 있다. 고속도로를 지나쳐 가는 수천 대, 수만 대의 차량 밖으로 공동 묘지가 보이는데도 그 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 나라의 한남동 아니면 영천 고개 마루에 또는 청량리역 주변에, 영동 한복판에 이러한 대형 묘지가 있었다면 ‘혐오 시설(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데 무덤을 혐오 시설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의 조상들 모두는 혐오 시설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뿐이 더 되겠는가)’이라는 흉측한 말로 떠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식 묘소와 미국식 묘소는 차이가 있으며 우리 나라식 묘소, 특히 매우 큰 묘자리를 차지해 놓고 왕릉처럼 자려놓은 골빈 양반들 때문에 미국식 합리적인 묘지가 생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뿐일까 싶다.
여하튼 미국 사람들은 여기저기 묘소가 널려 있어도 개인개인의 묘소가 덩치에 비해 작고 거의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큰 시각적인 불편함을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미국 사람들은 과학 1등국임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의 영혼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혼 하면 처녀가 머리를 풀고 칼을 물고 피를 흘리며 나타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아마도 과거 봉건시대를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계급의 압력, 그리고 허울좋은 관습 등에 눌려 지내면서 한을 지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이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다. 일본의 전래 이야기에 나오는 영혼의 모습은 영락없이 장난꾸러기나 어떤 때는 정다운 어머니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량한 힘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덤이 뉴욕이라는 세계 최대의도시속에 자리잡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일상 생활에서도 그들은 영혼들과의 교류를 기도를 통해, 또는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방법 등으로 스스럼없이 해나가고 있다.
실례를 하나 들자면 지난해 나는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법당에 오셔서 참선을 하는 젊은 불자들과 함께 자동차로 대륙횡당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도중에 인디애너라는 도시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인디애너 시는 원래 ‘웨스팅 하우스’라는 미국 가전 제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대규모 전자 회사와 인디애너 대학 그리고 유명한 인디애너 프로 농구팀, 자동차 경기장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외에도 각종 전쟁 기념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여기서 한 제자의 친구되는 젊은 미국인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미국식 예절로 너무나 편하게 대해줘서 미안할 정도였다.
밤이 되어 모두는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 나는 문득 잠을 깼다.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나타난 것은 서양 영가 한 분과 눈이 휑한 할아버지 영가 한 분이 나를 바라보고 계신 모습이었다.
물론 그 눈에는 적의가 없었으며,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제자의 친구 분을 통해 이런 말을 전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제자의 친구 어머니가 ‘자기는 매일같이 그 영혼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가 펼쳐 주는 앨범을 들쳐보자 간밤에 나를 내려보던 할아버지 영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할아버지는 바로 그 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남자 주인 어른이었다. 그리고 다른 여자 영가는 전에 이 집에 살던 아주머니로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역사적인 도시 인디애너에서 있었던 이 날의 영가 이야기는 미국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들이 생활속에서 얼마나 영혼의 세계와 밀접하게 감응하며 살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계기였다.
인간을 사랑하는 종교
나뿐 아니라 뉴욕에 사는 한인 교포들이 대부분 처음 미국에 와서 느낀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편리한 우편 제도일 것이다.
우리 나라와 비교할 때 지극히 보편화되어 있는 우편 문화는 그 양에 있어서나 정확도에 있어서 실로 선진국 수준이 어떤가를 보여주고 있다. 주소를 기입하는 요령이 과학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고 또한 이사를 갈 때나 부재중일 때 처리하는 방법 또한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다.
공공 기관에서 행정 명령을 내릴 때나, 금융 기관 등에서 청구서를 보낼 때도, 발송 여부와 횟수에 근거해 법적 조치를 강행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미국의 우편 제도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이 체신 방법을 언제부터 이용했는지는 전문가들의 연구 분야이지만 그저 선대가 발전시키고 축적시킨 기술로 손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우리들은 그저 감사하며 고맙게 편지를 주고 받을 뿐이다.
사실 정작 반가운 편지를 받았을 때나 횡재(橫財)에 가까운 소식을 들었을 때 우편 제도의 고마움을 먼저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보편적인 우편 문화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흔히 눈에 띄는 우체통을 보면서 느끼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종교라는 것,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영원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체통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뉴저지 팰리사이드 파크 부근에도 많은 우체통이 있다. 우리 나라에 있는 친구나 친지들, 플러싱에 있는 신도분들, 맨하탄에 있는 공공기관 등에 소식을 전하고자 할 때 언제 어떤 우체통에 넣어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특정한 지역에 편지를 보내고자 할 때 바로 그곳에 있는 우체통이나 우체국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이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방법인가를 일러주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사후의 세계를 의미있게 출발하느냐를 일러주는 종교는 바로 우체통과 같은 방법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 기독교, 유교, 회교 등 나누어진 종파는 각 길과 도로에 늘어선 우체통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바른 삶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종파가 제일 좋고, 어떤 종파는 안 된다는 섣부른 독단론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반사회적 종교나 사교(邪敎)들까지 모두 다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체통 중에 어떤 우체통은 망가져서 우편물이 비에 젖어 훼손될 수 있고 또 도난당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통해 지역적, 문화적 특수 환경을 토대로 형성되어 나왔던 주요 종교들은 각 지역, 사회의 정화제 역할을 하며 그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고 또한 아직까지도 수행하고 있다.
불교는 없어지는 듯 하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2천 년간을 이어왔으며 쇠하는 듯 하면서도 아직까지 아시아의 주요 국가는 물론 세계 종교가들, 사상가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영원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종교, 불교가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교만이 최상이며 지고의 가치라고 가르치는 것도 오류이다.
기독교든 유교든 심지어 미신이라고 평가받는 굿거리라 할지라도 있는 그 자리에서 각 개인들의 정신과 육체를 안식으로 이끌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종교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불교가 보다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은 바로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포용력을 발휘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종교를 가질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바로 내가 이 자리에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구명시식으로 역사적 인물 만난다
역사는 쉬지 않고 계속된다.
수많은 사건이 발생하고 발생한 그 사건은 또 다시 과거의 일로 기록되며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아마도 역사만큼이나 냉정한 것도 드물 것이다. 죽고 살며 오르고 내리는 인간 만사의 부침(浮沈)이 어느 하나 정확한 심판이 없이 하나 둘 쌓여 가는 것이 역사의 속성인가.
오직 역사의 평가는 후세의 사가들이나 역사를 판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뤄진다. 역사의 현장에서는 오직 힘과 시운(時運)을 함께 가진 이가 승리하고 역사를 주도하며 이끌어갈 뿐이다. 그러나 나는 느끼는 것이 있다. 책임지지 않는 역사는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아플 따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구명시식을 통해 영가를 천도하는 영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능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확한 상대 기준이 있을 때만 소위 영적인 힘이 작동할 수 있다.
나는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역사를 이끌어갔던 인물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가지면서 지난 수년 전부터 많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됐다.
바로 근대사를 장식했던 많은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역사를 장식한 인물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스스로 천도의 길을 걷지 못하는 영혼들이기에 소위 상대기준(일종의 정신적인 사이클)을 맞추는 나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억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영적인 대화를 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는 100%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느낀다.
다시 말하면 보통 인간들이 살면서 거짓말을 하듯이,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영혼들도 자신들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명시식을 할 때 가장 곤란한 점은 그 영혼이 진짜 그 사람인지 속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의 영혼을 모시는 무당들도 신빙성은 없다.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영혼이 바로 역사적 인물 당사자라고 짐작할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영혼은 죽었을 때의 마음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살이 있을 때 영민했던 사람도 죽을 때의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영혼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그래 쓸데없이 어린아이들처럼 떼를 쓰거나 부탁을 하기도 한다.
이럴 때 많은 혼돈이 오지만 오직 영적인 힘으로 헤쳐나간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역사적 인물들과의 영적인 대화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을 지금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살펴보고, 그들의 죽음에 억울한 점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바람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과의 영적인 대화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판단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의 영적인 만남을 내가 느낀 바대로, 그들이 이야기한 바대로, 그들이 호소하는 바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젊은 무장 단군 왕검
단군은 누구인가.
실제 살았던 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속의 한 전형에 불과한가.
최근 북한에서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떨어진 대박산 기슭에 있는 고대 무덤을 ‘단군릉’이라며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북한 사회과학원이 86개의 유골을 늘어놓고서는 선전하고 김정일이 참배하곤 했지만 아직까지 전문가들 사이에는 ‘날조된 관변(官邊)학설’이라는 게 일반적인 주장이다.
21세기를 수년 앞둔 현재 이러한 물음은 중요한 의미를 준다. 한반도를 근거로 하는 배달 민족의 정신적 원형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 인종학적 출발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로 단군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배달 민족 이해의 출발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과 관련된 종교, 학술, 예술, 생활, 문화 등 거의 전분야의 틀을 잡는 것과 동일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단군의 실체는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학문과 종교, 그리고 신화, 예술 등의 입장에서 끊임없는 도전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군 실체 규명의 실패에 대해 현재의 나로서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단군의 실재성이다.
학문과 예술 분야의 인사들이, 종교인들이 지난 수십 년 아니 고려, 이조시대부터 그의 실체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것은 모두 그의 실재성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세계를 공부하면서 역사를 살다 간 위인들, 영웅들, 천재들의 영혼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완전히 구체적으로’ 그들은 우리와 같이 물리학적, 생물학적 생명을 가지고 살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지난 80년부터 구명시식을 통해 영가들을 천도하는 일을 하고, 또한 나름대로 영혼의 세계를 공부하면서 단군을 만난 것은 여러 번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군은 실재 인물이며 강력한 정신성, 곧 뇌파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그는 샤먼(무당)과 같이 뇌파의 델타 파장 영역까지를 넘나드는 굉장한 영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자세하게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단지 배달 민족의 건국 시조로서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신화적 인물로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구명시식을 하면서 만난 단군의 모습은 도포를 입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아니고, ‘청동검으로 무장을 하고 갑옷과 투구를 쓴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 그가 젊은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실제로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서부터 들어온 선진 문명(청동기 문화)을 가지고 있었던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단군은 ‘천상에서 내려온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구 북부 만주 지방에서 먼저 청동기 문명을 발달시킨 부족의 한 명이었으며, 특히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 앞장 선 전투부대 대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단군 자신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서 환웅이 곰과 만나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한반도 북부를 평정한 단군의 아버지, 곧 환웅의 전투부대가 토착부족, 특히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상하던 부족들 중에 곰 부족의 한 귀족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낳은 아들이 바로 단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단군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쑥과 마늘을 가지고 동굴에서 견디라’는 이야기는, 그 당시 단군의 어머니와 같은 지배자의 부인들은 다른 여자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잡혼을 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무르면서 지배자만을 섬기게 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단군 영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그는 가끔 나타나 자신은 영과 육, 정신과 물질을 모두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93년 겨울 구명시식 가운데 나타났던 단군 영가가 전한 메시지를 봤을 때 이러한 말들은 사실인 것 같다.
그때 흰 도복을 입고 나타난 단군의 영혼은 나타나자마자 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말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런 일하는 것으로 말하면 내가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그는 그 당시 내가 ‘어린 시절 아버님 차일혁 총경의 죽음 이후 가졌던 영능력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현재까지 구명 의식을 행할 때마다 소위 설치고 힘이 세고 심술을 부리는 영가를 만날 때 그들이 덤비면 ‘영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기술’이 발달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요즘도 가끔 단군의 영가는 구명시식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게 강한 메시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6척 거구에 살도 많이 찐 편이며 얼굴이 붉고 눈이 작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보스 기질 넘치는 동명성왕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은 만주에서 토호를 한, 특정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해모수의 아들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동명성왕은 영화와 같은 생애를 산 끝에 고구려라는 우리 역사에 빛나는 한 부분을 이룩했다.
동명왕의 이름은 원래 주몽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 영력과 지혜를 인정받았다. 어린 시절 동 부여 금와왕의 노예로 지냈으나, 성장하면서 남다른 용력과 가능성을 나타내자 반역의 싹을 없애기 위해 금와왕의 아들 대소(帶素)의 음모 대상이 된다.
특히 주명은 당시 만주, 시베리아 일대 거주민들처럼 활을 전투병기로 사용했다. 그런데 힘이 남다르게 강해서 강궁(强弓)이라는 큰 활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냥 등을 하면서, 성장 후 있었던 부족 국가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주몽의 이러한 조직 구성력 때문이라고 후세 사가들은 적고 있다.
한편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은 《동국 이상국집》의 별미로서 주몽의 남다른 부용(附庸)과 지략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내가 90년대 말부터 역사를 이끈 영웅들의 구명시식을 위해 기도를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바로 동명왕이었다.
옛날 만주 벌판을 누비며 고구려라는 큰 나라를 세웠던 인물이 현재 21세기를 앞둔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또한 그가 지녔던 강궁이 얼마나 크고 힘있게 생겼을까?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동명왕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영가는 아니었다. 그가 나타나 한 말이라고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 같은 말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동명왕이 한 이야기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들으면 함경도 사투리 같고 또 다른 한편으론 주문 같기도 한데, 그는 단지 몇 마디의 소리만 내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은빛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었다. 그 관은 무겁게 보이지 않았으며 쉽게 머리를 움직이고 숙이더라도 빠지거나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동명왕이 나타날 때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같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인이 된 역사적 인물이 신하와 같이 구명시식에 나타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와 비슷했는데 역시 주몽, 곧 동명왕이 나타날 때도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여기저기서 말발굽 소리, 말 우는 소리 등이 나면서 수십 명, 수백 명이 빠르게 걷는 소리도 함께 났었다. 그렇다고 신하들이 밀어닥치며 사람을 밀치거나 앉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원들과는 조금 달랐다.
동명왕이 구명시식에 나타날 때 함께 왔던 신하들(대부분이 무장을 한 군인들)은 활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한 번도 실전에 쓰이는 활을 보지 못한 나는 그 활의 크기가 작은 것에 무척 놀랐다. 어쩌면 가지고 온 활은 근접전에서 쓰는 활이라 작은 것인지도 몰랐으나 모두 등뒤에다 차고 있었으며, 활의 끝이 어깨 위로까지 삐져 나와서 머리 위치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보통 성인들의 팔 길이보다 약간 컸으며 이것을 등뒤에 활 모양의 가죽 지갑에 활과 함께 꽂고 있었다.
또 발과 팔에는 ‘토시’같은 것을 찼는데 헝겊으로 단단하게 감고 거기에 색을 칠해서 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는 청나라나 몽고의 병사들처럼 색깔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명시식을 하면서 나타난 동명성왕은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이다.
점잖은 군주 박혁거세
박혁거세는 한국인에게 흔한 박(朴)씨의 시조이다.
현대 학자들은 박혁거세가 실재 인물이며, 재위를 기원전 57년에서 기원 후 3년까지로 보고 있다. 실제로 역사서의 여러 군데에서 나온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박혁거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백성들에 의해 추대된 군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명시식을 통해 박혁거세를 만났을 때 그가 이렇게 백성에 의해 추대됐고, 50년 이상 재위 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구명시식을 하기 전까지 실제로 박혁거세가 어떤 모습으로 통치를 하고 사망했는지에 대해 몰랐었다. 그러나 구명시식에 나왔던 박혁거세 영가는 우리가 체험했던 역사 중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흡사한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해마다 금성 주위의 호족들을 모아 정치를 논의했으며 양민들에게 농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거의 60년 가까운 시절을 나는 이렇게 노력하며 지냈다.
그러나 나는 자객에 의해 참살을 당했다. 어쩌면 이것은 모두나의 잘못일지도 모른다. 내가 있던 재위 기간 동안 신라 국가에 뿌리 박혀 있는 5개의 호족 세력을 평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 세력이 나를 능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13세에 즉위해 61년이 지났으니 그때 나는 74세 때였다. 늘상 있었던 연회에서 나는 신하들과 함께 있던 중, 독약이 섞인 줄 모르고 음식을 먹다 죽게 됐다.
그 후 나의 몸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처절하게 절단되어 흩어졌다. 나를 독살한 후 육시(戮屍)를 했던 것이다.
지금 경주에 남아 있는 오릉(다섯개의 왕릉)도 그때 나의 몸이 다섯 개로 잘라져 나갔기 때문에 후세들이 나의 몸을 하나씩 나누어서 만든 것이다.
그때 당시의 백성들은 나를 존경했기 때문에 절단된 내 몸을 하나로 모아 왕릉을 크게 만들고 싶어했으나, 다섯 개의 부족 우두머리들은 이러한 통일된 왕릉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고 느껴서 이를 반대했다.
나는 이들이 왜 이렇게 나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알고 있다.
서라벌이 만들어지고 국가 기강이 서면서 이들은 수백 년 동안 누려 오던 기득권과 이익을 완전하게 누리지 못하는 사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나를 군왕으로 옹립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다시 원래의 체제로 돌리기 위해 나를 살해한 것이다.
이(李)가의 조상이 됐던 ‘정소벌도리’, 손(孫)가의 조상이 됐던 ‘손구데마’, 최(崔)가의 조상이 됐던 ‘최지백호’, 설(薛)가의 조상이 됐던 ‘설호진’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공모해서 나를 살해한 것이다.”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박혁거세가 했던 이같은 말이 실제로 역사적 사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알려지고 있는 설화에 의해서는 경주에 있는 오릉이 이같은 박혁거세의 억울한 죽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명시식에 나타난 박혁거세 영가가 한 말과 같이 박혁거세, 곧 신라의 시조가 신하들에 의해 참살을 당하고 그 결과 오릉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구명시식을 할 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영가들이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박혁거세 영가는 특히 그랬다.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면서도 시종 안정을 잃지 않는 자세였다. 그것은 60년간의 재위 기간동안 닦아진 일관성이겠지만 어쨌든 그는 점잖은 군주였다.
믿지 못할 사람이 많겠지만 또 한가지는 박혁거세 영가가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어(古語)를 많이 써서 그런지 때에 따라서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죽음의 홍차와 신익희 선생
신익희 선생은 결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영적인 힘을 동원해 내게 들려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익희 선생은,
“나는 홍차를 즐겼다. 그래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자리를 잡았을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홍차를 한잔 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마시고 난 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죽어 버렸던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지금까지도 해공 신익희 선생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해공 신익희 선생을 사망케 한 세력이 이승만과 그 측근들이라는 이야기부터 당시 민주당 내부에 있는 배신 세력이 저지른 독살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구명시식을 통해 만난 신익희 선생은 결코 자신의 죽음이 심장마비가 아닌 ‘알 수 없는 약 등에 의한 독살’이라고 강경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해공 신익희 선생의 영혼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은, 당시 신익희 선생의 암살을 기도한 세력들은 1956년 5월 5일, 당시에 있었던 선거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이승만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세상이 바뀌고 권력이 이양되는 순간 자신들에게 닥칠 국민의 심판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해공 신익희라는 하나의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구체제에 걸쳐 살고 있는 많은 관리,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비 내리는 호남선>의 비원을 만들게 된 것은 모두 이러한 자신의 기득권과 권력의 물맛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명시식을 통해 만난 해공 신익희 선생, 곧 그 분의 영가는 나에게 이러한 세력들의 음모와 죽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원망하거나 저주를 내리는 언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열화와 같이 솟아오르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와 이승만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하나의 결과로 보여주지 못했던 아쉬움(어쩌면 책임감 같이 느껴졌다.)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보다 정확히 세상에 알려져서 다시는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해공 신익희 선생은 구명시식 당시 나 자신도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나의 죽음이 결코 심장마비가 아닌 독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인물은 바로 ‘생존하고 있는 제헌 국회의원 ㅈ 씨’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처음에 나는 이것이 혹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본 결과 의문이 가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바로 당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인물 중에서 가장 진실을 알 수 있는 현장에 근접하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구명시식을 거부하는 이승만 영가
인간들은 대부분 3대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내가 제일 잘나고’, ‘내가 제일 오래 살고’, ‘내가 생각하는 게 가장 옳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말하려는 시점에서 이처럼 우스운 세속어에 그를 비유하는 것은 난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의 인생이란 이러한 3대 착각의 전형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에게는 ‘내가 아니면 이 나라는 통치가 안 된다’는 생각에서부터 ‘대한민국은 내가 세운 나라’라는 생각까지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신념 아닌 착각 속에 살았던 것 같아 보였다.
여기서 솔직히 밝혀야 하는 것은 내가 구명시식을 하면서 여러 역사적 인물들과의 영적인 교신을 해봤으나 유일하게 이승만 대통령만큼은 초령(招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 자신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느끼는 것이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지극히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입지를 정확하게 규정해 주지 않으면 쉽게 환경과 동화되지 못하는 성질이 있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초령하지 못하게 되자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되듯 영혼에도 또 다른 삶과 죽음, 길흉화복, 애노병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초령 단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그가 영가의 신분으로서 현생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도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현생에 있는 사람들-그의 추종자들이든, 그를 독재자로 몰고 있는 사람들이든간에 모두에게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악이 당연히 자신의 잘못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구명시식은 진실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미 만인의 역사로 고착된 사실을 단지 영적인 교류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이것이 번복되거나 바뀌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러나 구명시식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역사의 뒷부분에 감춰져 있는 망자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현재나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역사적 비극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영웅 이현상
이현상은 다음의 시를 쓴 시인이자 혁명가였다
‘지리산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를 건너오기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에 끓는 피가 있도다’
이현상은 1949년부터 1954년까지 무려 6년간, 지리산을 중심으로 계속됐던 좌익 빨치산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동족간에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남한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양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 군경과 빨치산 양측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재산과 역사적 유물, 유적의 파괴 등 실로 일일이 다 기술할 수 없을 만큼의 피해를 가져왔다.
‘공부 조금 했다거나, 책을 조금 읽었다거나, 생각 조금 했다하면 산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 당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남한 내에서 인텔리 계층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현상, 그는 위에서 든 격정적인 한시를 자유자재로 지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으며, 아무런 보급이 없는 지리산을 무대로 무려 5년 이상 신출귀몰하며 군경을 괴롭혀 온 게릴라전의 천재였다.
당시 유명한 빨치산 토벌대장이며 나의 아버지였던 차일혁 총경도 스스로 이현상을 가리켜 ‘게릴라 전술에 능통한 훌륭한 전략가’라고 감탄하였다. 한편 당신 스스로 이현상 부대의 청주 경찰서 난입 사건 등 소위 군사적 패배를 당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실제로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사망이 확인되기 직전까지 남한내 빨치산들에게 ‘신적인 조재’였으며 1952년까지는 성공적으로 남한내 빨치산 조직을 통솔했었다.
역사가 일러주는 대로 그는, 53년 지리산에서 있었던 대규모 군경합동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됐으며, 그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의 아버지 차일혁 총경의 휘하 부대에 의해 시체가 확인됐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적은 나의 아버지의 진중 기록에서는 이현상이 자살이나 군에 의한 전사가 아닌, 근거리에서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사살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현상의 죽음에 얽힌 미스테리는 내가 그를 위해 집전한 구명시식 가운데 낱낱이 밝혀졌다.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밝힌 이현상은 ‘자신을 믿고 따르던 빨치산들에 의해 사살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면서 당시 있었던 지리산 중심 빨치산 부대들의 통합과 해체, 갈등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줬다.
즉, 1952년과 1953년 겨울을 지나면서 극도로 와해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 빨치산 조직과 이로 인해 빨치산 내부에서의 불평 불만의 팽배, 미래에 대한 누군가의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이현상 영가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신은 ‘사망 직전 박헌영과 이승엽의 몰락으로 제5지구당이 해체되고 급기야 자신은 평당원으로 몰락했으며, 북한 김일성의 지휘를 직접 받는 골수 빨치산들에 의해 감금 상태에 있다가 경남 도당으로 이송되던 중 젊은 빨치산 대원들에 의해 사살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이현상의 영혼은 의외로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의 싸움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조국애, 역사를 보는 눈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진하게 감동을 느낄 만큼 진실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이 지휘하던 빨치산 대원들은 최대한 인명과 군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천국을 건설해 보고자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현상 영가는 나에게도 할 말이 많다고 하면서, 자신의 죽음 직후 자신의 시체를 수습해 정중하게 화장을 시켜 준 나의 아버지 차일혁 총경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빨치산에 얽힌 잘못도니 역사 기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어쨌든 그와 구명시식을 통해 만났을 때 그의 인품과 의지 등에 많은 배울 점이 있었다고 느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영가들
지난 늦겨울에 있었던 구명시식은 그 동안의 경험에 있어서 내게는 기념비적인 대사건이었다.
한국 심령과학협회 회장 박희선 씨로부터 의뢰 받은 집단 구명시식 현장에서의 특별한 체험 때문이다.
영국, 미국 등 외국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영혼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하고 대학의 커리큘럼에도 심령학과가 개설되어 있어, 영혼에 대한 탐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영혼 탐구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영혼’ 그 자체에 관한 논쟁마저도 정립되지 못한 상태이고, 비판적인 소리만 분분할 뿐이다. 더욱이 그에 대한 올바른 과학적 접근조차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일찍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선구적인 인식을 가지고 연구 단체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심령과학 분야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박 회장은 나의 영능력을 인정하고 특별히 구명시식을 부탁해 온 것이다.
박 회장이 제의해 온 구명시식의 대상은 다음과 같다.
6·25 전쟁 때 파병된 병사 중에 재일 교포 출신의 학도의용대가 약 7백 명 정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20세를 전후한 청년 학도병들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일본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말을 잘하지 못했다. 또한 미군 부대 군속으로 참전하였기에 군번도 없었고 소속부대조차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투입된 이후 실종자를 포함하여 과반수인 4백 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3백여 명의 나머지 생존자도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대부분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말이 몹시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차이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가 보훈처에서 주는 혜택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생활은 거의 황폐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전쟁에서 입은 정신적, 육체적 피폐가 너무나 컸다는 점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박 회장이 바로 한스럽게 죽어간 이들 젊은 영가들에 대한 집단 구명시식을 의뢰해 온 것이다.
그 분은 그 동안 나에 대해 이미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특히 아버지 차일혁 총경의 사후에 지니게 된 나의 특별한 영성(靈性)에 대해서도 깊은 신뢰를 표해 왔다.
그 동안 내가 수많은 빨치산 영가들을 천도해 왔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로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번에 자신이 말하는 6·25 전쟁에서 억울하게 참사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의 각별한 부탁의 말도 그렇거니와 나 역시도 그 분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그 뜻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때의 희생자 명단을 입수할 수가 없었던 점이다.
명단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심령과학협회에서 국방부에 공문을 보내 정식 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명단이 없는 채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노인으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 노인은 바로 6·25 전쟁 당시 학도의용대로 참전했던 사람 중 하나로서 그때의 일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밤의 꿈이 너무 이상해서 아무래도 신몽(神夢)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즉, 꿈에 그 당시 사망했던 희생자들이 나타나 자신을 에워싸고는 도와달라는 청을 해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차 법사에게 가보라는 말까지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의 부친이었다. 평소에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더구나 얼마 전부터 중한 병을 앓고 있는 중이어서 그날의 전화는 무척 뜻밖이었다.
그 분과의 통화에서 나는 박 회장이 제의해 온 구명시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직 희생자의 명단을 구하지 못했다는 설명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구명시식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 극적으로 명단을 건네받게 되었다. 그 분의 아들이 그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 방송국의 PD가 구명시식 장면을 프로에 방영하고 싶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영혼의 세계에 대한 진실을 보다 많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평소 나의 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 초능력 현상은 TV에 여러 차례 방영된 적이 있지만, 영능력이 발휘되는 장면은 한 번도 보도된 바가 없었다. 그것은 초능력이 염력의 결정체로서 전자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데 비해 영능력은 그러한 염력과는 다르다는 점 때문이었다.
영능력이라는 것은 어떤 영계의 힘을 빌어 비로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며, 영능력자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영계에서 응하지 않고 나타나기를 거부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취재를 요청해 온 그 PD가 다루는 프로의 주제는 ‘영혼’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 그 프로에서는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고 미리 부정적인 시각으로 결론짓는 식으로 방영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꺼림직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 인간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항상 평등한 것은 아니다. 각자가 지닌 체력, 지력, 선악을 추구하는 힘, 아름다움을 느끼는 점 등에 있어 다양한 개성이 있고 능력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생길 수 있고 거기에 따라서 저마다의 적절한 예언 내지는 염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언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우리 인간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예언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 행해지는 구명시식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영계에 달린 것이므로, 잘되고 안 되고를 떠나 하나의 덕담으로라도 영가들과의 모임을 공개한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에서 취재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에 따라 구명시식을 하기로 한 목요일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진행된 구명시식에 참가한 취재팀은 그날의 구명시식 장면 전편을 촬영했다.
구명시식 도중에 기계음과 시끄러운 음향, 카메라 조명 등이 장애가 되어 진행 중 혼돈이 많았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던 경험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의 한번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영가와의 만남에 있어서 영매자가 감당해야 할 영적 위기도 늘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긴장되고 정신 집중력도 떨어졌다.
그러나 구명시식을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듯 이 또한 영매자로서의 내가 해야 할 소명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임해 나갔다.
그 자리에는 박 회장 이하 4명의 심령과학회 간부가 배석해 있었다.
드디어 구명시식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취재진의 존재에는 아랑곳없이 기막힌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희생된 학도의용대 292명의 명단에 실린 이름 중 그 자리에 나타난 영가는 수십 명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중 정작 전쟁에 참전해서 싸우다가 죽은 사람은 별로 없고 상당수가 겨울철 ‘동상’에 의해 사망했다 것이다.
군사 물품의 배급 현황이 극도로 열악했고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피복 분배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방한복도 없이 북쪽의 함경도 압록강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 때문에 대원들 거의가 동상에 걸린 상태였고 그중 심한 사람은 살이 썩어 들어가 결국은 동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수백 명에 달하는 대원들의 신상을 모두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에 나타난 영가들은 제각기 자신을 중심으로 겪었던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어처구니없고 묘한 일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계급이 중위라고 하는 사람이 20명 정도나 있어, 죽어 영가가 되어서도 생전의 자신의 계급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영가는 명단에 있는 자신이 이름이 실제로는 한 글자가 틀린다며 틀린 이름자 하나를 고쳐주는 해프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밖에 자신은 전쟁에 참가하기 전 일본 열도 고베 시에서 가수였는데, 조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바다를 건너와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 영가도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 담당 요리사였다고 말하는 한 영가의 고백도 있었다. 성이 차씨로 나와 같은 성씨의 사람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수원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뇌진탕으로 죽었다고 한다.
또 전후 정착금으로 받은 50만원을 여자에게 빌려 주었다가 받지 못하고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당시 생존자들은 전쟁에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사회 적응이 안 되어 불우하게 죽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한국 여인과 결혼했지만 언어 장애가 큰데다가 생활이 어려웠다. 그나마 정착금마저 떨어지면 대부분의 부인이 도망을 갔다 그래서 의지할 곳이 없어 혼자 길거리를 헤매던 사람들은 객사하거나 홧병으로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구명시식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영단에 모셔진 전쟁 희생자 명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10명의 영가들이 그 자리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간 역사 속의 희생자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들이 죽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1958년 자유당 말기 때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 동포를 북송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거기에 대한 남한의 반대 의지는 시위로 이어졌고 정부에서는 재일 교포 북송에 대한 반대 조치의 일환으로 10명의 대원을 선발, 일본에 특공대를 잠입시켰다.
그러나 함선이 미처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침몰되는 바람에 대마도 부근에서 대원 전원이 몰살되고 말았다.
이 일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기밀 사항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내무부 관계자 몇 명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30여 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 그들은 영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박 회장에 의해 베풀어지는 이러한 특별한 의식이 없었더라면 그들 10명의 영가를 포함한 292명의 학도병 출신 희생자들은 언제가지나 한을 품은 채 영계를 방황하고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속에서 다하지 못한 청춘의 한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지만 그들의 영혼이 보다 숭고한 정신으로 승화되어 가기를 비는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다.
불가에 입문한 이후, 아버지에 대한 천도의식을 하면서 나는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의 영혼을 만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느낀 이 땅의 이데올로기의 허상이 낳은 비국은 이 순간까지도 끊이지 않고 지상과 허공계를 통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은 이번 구명시식을 주관했던 박 회장의 집안에 얽힌 부끄러운 가정사까지도 그날의 구명시식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밝힐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명시식을 하다가 보면 그런 뜻밖의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의식을 끝까지 지켜보고 동참했던 모 방송국의 어느 PD와 카메라맨이 그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보고 느낀 그대로를 어떤 시각으로 조명하고 또 어떤 모습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담아낼는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인간 최고 수준의 시력은 2.5에 불과하지만 카메라 렌즈는 그보다 훨씬 더 세밀한 것까지 잡을 수 있을만큼 정밀한 것이므로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영가들의 모습이 나타나지나 않을지 자못 기대해 본다.
틀림없는 것은 그들이 6시간에 걸쳐서 구명시식의 현장을 촬영했고, 그 앞에서 분명히 그 의식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영가들과 만나는 현장을 직접 카메라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나로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행해졌던 영가들과의 체험 현장에 있어 가장 큰 획을 그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77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박 회장은 시종 진지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구명시식이 끝나자 환한 웃음으로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분은 평소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런 뜻깊은 체험을 했으므로 감격스러울 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 어떠한 인위적인 사고방식도 인간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을 수는 없다.
이미 사고방식의 장애를 뛰어넘은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때, 우리는 보다 창조적이고 소신이 있는 다양한 목소리에도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층 진보된 세계로 나아가는 데에 앞장 서야한다는 것을 얘기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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