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무등산 증심사

醉月 2011. 3. 10. 08:47

무등산 증심사

부처의 心地 위에 솟은 깨달음의 산
▲ 무등산 서쪽 자락에 기대 앉은 증심사. 무등(無等)산의 차별없는 마음을 담고 있는 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릅니다. 무등산(無等山)을 오릅니다. 높이로만 치자면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만, 무등산은 애시당초 높낮이에 대한 미련을 버린 산입니다. 어찌 이 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등(無等)은 부처를 높여 부르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견줄 이가 없는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합니다. 견줄 대상 자체를 하얗게 지워버린 분이기에 ‘무등(無等)’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무등산은 나에게 깨달음의 산으로 다가옵니다. 만물은 다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깨달음의 의미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산이니까요. 어찌 이 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의제 허백련 화백이 손수 차밭을 가꾸며 '춘설차'를 만들었던 삼애다원. 증심사 뒤편에 있다.

불가(佛家)에서 이상적 인간을 이르는 표현 가운데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제종의 개조인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禪僧) 임제 의현(?-867) 스님이 보인 말입니다. 노장사상적 무위(無爲)가 아니라 무위(無位)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흔히들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풀어냅니다. 일체의 분별을 다 물리치고 절대평등의 경지를 노니는 이가 바로 ‘참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삶을 살아낸 이들을 성인이나 위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낸 세상은 철저하게 차별과 대립으로 점철돼 왔습니다. 차등(差等)의 세상을 무등(無等)으로 살아낸 것이지요. 그래서 성인이겠지요.


어쩌면 무등산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무등산은 이 땅의 역사에 새겨진 온갖 차별과 소외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전라도 지방의 정치적 소외는 신라가 통일을 한 후부터이겠지요. 백제 유민은 신라와 당나라에 끈질기게 저항했고, 후삼국시대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거점으로 한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에 맞섰습니다. 결국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평정을 했습니다.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된 후 개국 초기에 영암 출신의 도선 스님을 국사로 모시는 등 유화의 몸짓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죽기 몇 년 전에 ‘태조 훈요십조’라는 것을 남겼는데, 그 여덟째 조목은 충청도 일부 지역과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줘서는 안 된다는 당부였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걸친 수탈은 또 얼마나 심했습니까. 이러한 소외의 역사는 근대화 과정에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18일. 저항의 강물은 소외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것이 그 날의 진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날의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광주사태’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는 데 걸린 그 시간은, 뒤틀린 권력 의지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등산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무수한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바라본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무등(無等)의 마음, 무차(無遮)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등(無等)한 그 마음의 거처에 서 있습니다. 증심사(證心寺)입니다.


▲ 비로전에서 바라본 증심사의 뒷모습. 위엄 넘치면서도 위압적이지 않은 선사(禪師)의 풍모를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실천으로, 체득으로 나아가니, 곧 증(證)입니다. 깨달음입니다. 무등의 마음이 곧 증심인 까닭입니다. 무등산과 증심사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입니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 도윤(798-868) 선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선사는 9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개산조이기도 한데, 제자인 징효 절중 스님이 사자산 흥녕사(지금의 영월 법흥사)에서 스승의 선풍을 크게 떨쳤기 때문입니다. 절터를 닦을 때부터 선찰(禪刹)이었다는 얘깁니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은 오늘날까지 전해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내선일치(內鮮一致)를 구호로 한국과 일본 불교의 뿌리가 같다고 주장할 때, 만해 한용운 스님 같은 분들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일본은 염불종, 조동종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한 반면, 한국은 임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주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바로 증심사였다 합니다.


이 땅의 대부분 사찰이 그러했듯, 증심사 또한 역사의 격랑을 따라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가 중창했고, 조선 세종 25(1443)에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삼창하였는데, 이때 오백나한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고, 광해군 1년(1609)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들이 다시 재로 바뀌었고 오백전만 불길을 피했습니다. 현존 건물 중 조선조의 건물로는 오백당이 유일합니다.

 

▲ 크지도 작지도 않은 증심사의 단정함을 대변하는 듯한 전각의 기왓골이 곱다. / 일주문 옆의 부도밭. 증심사의 역사가 꼿꼿이 서 있다.

지금의 절 모습은 1970년 이후 꾸준히 복원해온 결과입니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석축을 쌓아 터를 얻은 사역은 전형적인 산속 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진입로는 성큼 키를 높이는데, 석축 위로 증심사의 얼굴격인 취백루(종무소)가 상승감을 한층 부추깁니다.
취백루 모퉁이를 돌아 진입하면 곧장 네모꼴의 가운데 마당이 펼쳐집니다. 취백루와 마주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과 행원당, 적묵당과 범종각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위엄 넘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선승의 얼굴 같은 마당입니다. 어디서 봐도 모나지 않은 무등산의 얼굴을 그려보기에 딱 좋은 마당입니다.


대웅전 뒤로 살포시 단을 높인 곳에는 오백전과 비로전이 좁고 긴 네모꼴의 마당을 이루며 오체투지의 기도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백전의 나한상은 저마다 다른 표정입니다. 부처를 이루지 못할 어떤 중생도 없다는 메시지로 읽어야 하겠지요. 비로전 뒤 산신각은 누각 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엉덩이를 살짝 산허리에 걸치고 있습니다. 산을 허물지 않고 알뜰히 공간을 활용한 모습은,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과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낮은 목소리지만 크게 울리는 무등산 산신의 육성입니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솔가한 호남정맥이 섬진강을 살찌우면서 내장산까지 서남쪽으로 내달리다가 곧장 남하하여 호남의 가장 깊숙한 곳에 솟구친 산, 그 산이 바로 무등산(1,187m)입니다. 호남정맥에서 장수 장안산(1237m)과 광양 백운산(1218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도무지 그런 높이가 느껴지지 않는 산입니다. 워낙 두루뭉술한 흙산인데다 주름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산의 면모는, 광활한 억새 벌판을 이루고 있는 장불재 위에서 정상을 바라보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중봉과 천왕봉과 규봉은 커다란 세 개의 무덤처럼 보입니다. 한으로 치면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한을 저민 무덤이겠지요. 그런데도 왠지 그 모습은 일대사를 마친(一大事畢) 한도인(閑道人)의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장불재의 억새 벌판도 일제의 소나무 수탈이 남긴 상처인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평화롭습니다. 무등(無等)의 마음 덕분이겠지요.
한때 무등산은 무당산, 무진악, 무악으로 불렸다 합니다. 고려 때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등산이라 불렸다 하는데, 훗날 있을 5월의 비극을 예견한 증심사의 부처님이 ‘상서롭게 빛나는 돌산’이라는 뜻의 ‘서석’이라는 이름은 감추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등(無等)의 마음’이 아니고는 모진 세월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요.


어쩌면 무등산은 일찍이 증심사에서 해탈하고 그 ‘사리’로 서석대와 입석대, 광석대를 이루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언감생심 차등(差等)의 세상을 무등(無等)으로 살아낼 형편이 못 됩니다. 이런 내 마음, 증심사에 두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무등산 산행 쪽지정보

무등산 정상을 목표로 산행기점으로 대표적인 곳이 증심사다. 원점회귀까지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 새인봉 맞은편 약사암까지 찻길을 따라가다가 나무계단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산행만을 목적으로 할 경우 증심사에서 출발하여 중머리재를 거쳐 장불재, 규봉, 꼬막재를 넘어 원효사로 산 전체를 한 바퀴 돌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
증심사를 기점으로 삼든, 종점으로 삼든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 증심계곡 입구에 자리한 의제미술관이다. 1979년에 떠난 남종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소치라는 호를 얻었던 허유의 후손이다. 본디 진도 사람이었으나 해방 후 증심사 아래에 정착하여 자신의 집을 춘설헌이라 하고 평생 그림을 그렸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 그는, 삼애학원을 세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쳤고, 삼애다원을 세워 손수 차밭을 가꾸며 ‘춘설차’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의제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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