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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릅니다. 무등산(無等山)을 오릅니다. 높이로만 치자면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만, 무등산은 애시당초 높낮이에 대한 미련을 버린 산입니다. 어찌 이 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등(無等)은 부처를 높여 부르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견줄 이가 없는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합니다. 견줄 대상 자체를 하얗게 지워버린 분이기에 ‘무등(無等)’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무등산은 나에게 깨달음의 산으로 다가옵니다. 만물은 다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깨달음의 의미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산이니까요. 어찌 이 산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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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佛家)에서 이상적 인간을 이르는 표현 가운데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제종의 개조인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禪僧) 임제 의현(?-867) 스님이 보인 말입니다. 노장사상적 무위(無爲)가 아니라 무위(無位)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흔히들 ‘차별 없는 참사람’이라고 풀어냅니다. 일체의 분별을 다 물리치고 절대평등의 경지를 노니는 이가 바로 ‘참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삶을 살아낸 이들을 성인이나 위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낸 세상은 철저하게 차별과 대립으로 점철돼 왔습니다. 차등(差等)의 세상을 무등(無等)으로 살아낸 것이지요. 그래서 성인이겠지요.
어쩌면 무등산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무등산은 이 땅의 역사에 새겨진 온갖 차별과 소외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전라도 지방의 정치적 소외는 신라가 통일을 한 후부터이겠지요. 백제 유민은 신라와 당나라에 끈질기게 저항했고, 후삼국시대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거점으로 한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에 맞섰습니다. 결국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평정을 했습니다.
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된 후 개국 초기에 영암 출신의 도선 스님을 국사로 모시는 등 유화의 몸짓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죽기 몇 년 전에 ‘태조 훈요십조’라는 것을 남겼는데, 그 여덟째 조목은 충청도 일부 지역과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줘서는 안 된다는 당부였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걸친 수탈은 또 얼마나 심했습니까. 이러한 소외의 역사는 근대화 과정에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18일. 저항의 강물은 소외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것이 그 날의 진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날의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광주사태’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는 데 걸린 그 시간은, 뒤틀린 권력 의지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등산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무수한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바라본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무등(無等)의 마음, 무차(無遮)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등(無等)한 그 마음의 거처에 서 있습니다. 증심사(證心寺)입니다.
- 불교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실천으로, 체득으로 나아가니, 곧 증(證)입니다. 깨달음입니다. 무등의 마음이 곧 증심인 까닭입니다. 무등산과 증심사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입니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 도윤(798-868) 선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선사는 9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개산조이기도 한데, 제자인 징효 절중 스님이 사자산 흥녕사(지금의 영월 법흥사)에서 스승의 선풍을 크게 떨쳤기 때문입니다. 절터를 닦을 때부터 선찰(禪刹)이었다는 얘깁니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은 오늘날까지 전해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내선일치(內鮮一致)를 구호로 한국과 일본 불교의 뿌리가 같다고 주장할 때, 만해 한용운 스님 같은 분들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일본은 염불종, 조동종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한 반면, 한국은 임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주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바로 증심사였다 합니다.
이 땅의 대부분 사찰이 그러했듯, 증심사 또한 역사의 격랑을 따라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가 중창했고, 조선 세종 25(1443)에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이 삼창하였는데, 이때 오백나한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고, 광해군 1년(1609)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들이 다시 재로 바뀌었고 오백전만 불길을 피했습니다. 현존 건물 중 조선조의 건물로는 오백당이 유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