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18

醉月 2011. 3. 4. 08:48

유태인들의 무서운 교육열

하루는 롱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유태인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 할머니와 같이 온 며느리는 우리 나라 여성이었다. 두 분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나를 찾아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 가지였는데 바로 자신의 집에 항상 돌아가신 남편의 영혼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영혼을 천도해서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없겠는가’하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왜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일 밤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이 사는 집에 나타나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며느리가 들어간 유태인 집안은 소위 미국에서는 출세한 집안 중의 하나였다.
아들을 많이 둔 할머니는 아들들 모두 훌륭한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딸은 뉴욕에서 좋은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지내고 있을 정도여서 주위에 있는 유태인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명문 집안이었다.
물론 우리 나라 사람인 며느리의 남편도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직장에 나가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이 집안에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찾아오신 유태인 할머니는 자신의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렇게 남편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 여러 가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수년 전 남편은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생전에 남편이 소위 거액의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자식들을 모두 일류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보험을 즐겨 들고 확실하게 이를 이용하는 유태인들의 특성상 이러한 막대한 보험금을 타서 자식들 교육을 시킨 것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많은 유태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대부분 이상하다 싶을 만큼 미신, 곧 영혼의 세계를 믿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사람들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아마도 수천년 전부터 장사를 해 온 민족으로서 나만이 잘나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날씨도 좋아야 하고, 그리고 운세도 맞아야 성공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하튼 유태인들은 느낌이나 영혼의 세계를 실제 세계 이상으로 경의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일상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이러한 영혼의 세계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유태인들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하신 여러 가지 이야기는 나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나는 유태인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분의 남편은 사고를 당해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고, 바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교묘한 테크니컬한 사고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나는 유태인 할머니에게,
“당신의 남편은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자 그 할머니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자살하기 직전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부인에게도 자신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신체이상에 의한 사고사로 알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 유태인 할머니에게 남편의 고의적인 테크니컬한 자살을 이야기하자 그 할머니는 ‘며느리와 자식들이 알면 안 된다’고 말하며 사실을 이야기하지 말아 줄 것을 원했다.
그렇다면 그 할머니의 남편은 왜사고사를 가장해 교묘하게 자살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보험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그리고 자신은 막대한 교육비는 물론생활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몇 백만 달러짜리 고액의 보험에 가입한 후, 자식들의 교육과 가정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지독한 유태인들의 교육열을 한 마디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경찰이나 보험 회사측에서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내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숨 안 쉬고 죽어 질식사 내지는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에게, 자살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놀랐던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남편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구명시식을 했을 때 나는 두 번 놀라야만 했다. 구명시식을 통해 나타난 그 할머니의 남편의 영혼 뒤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여러 영가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들은 똑같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한 유태인들의 영가였던 것이다. 며느리가 대신 참석한 구명시식 제단앞에서 나는 왜 유태인들이 미국에서 성공한 민족이 됐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강한 마음을 가진 민족으로 유명하다.
우리 나라 교포들 중에도 많은 수가 그들의 건물에 들어가 장사를 하거나 또는 살고 있으나 법을 앞세워 몰인정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 그들이다. 자기들 민족말고는 모두가 적이며 어떤 때는 사악하다 싶을 정도로 남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강한 민족성 뒤에는 이같은 강한 교육열이 있었으며, 그러한 것들이 모두 오늘의 미국 사회 유태인들을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된다.
미국에 사는 유태인들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우리 나라의 어린이 교육기관에는 ‘지기 싫어하는 유태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에 자극을 받아 아이를 보내는’ 사례까지 있다.
그들은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코이쉬(Kowish:유태인의 주이쉬와 코리안을 합친 말)’라고 부르며 자기들과 비슷한 동류 의식을 가지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과연 교육열이 세계 최고라는 한국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교묘하게 사고사를 위장해 자살을 시도할 만한 우루 나라 아버지가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나 자신도 지금 현재로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꼭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혼의 세계에서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부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가 살생을 당한 중국 여인의 영가

한 부인이 사람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스태튼 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현숙한 품위를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러한 현숙함이 기를 잃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남들에게 평가 받고 있는 남편의 손버릇이 도대체 못 말릴 지역이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빈번하게 며칠이 멀다 할 정도로 부인에 대한 구타가 심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남편이 부인을 구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이 안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보따리 크기를 정하면 그만이지 ‘왜 너는 내 말을 듣지 않냐’하며 몸부림을 치면서 부인에게 또는 남편에게(이런 예는 종종 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근성이 아주 나쁜 남편들은 이런 못된 짓들을 하지만 미국의 법률 제도는 이런 깡패 남편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부인과 아이들의 신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줬다는 것이 판명되면, 아니 그런 시고가 있기만 해도 당장 수갑을 차고 철창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문의 전통을 중히 여기고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를 아직까지도 존중해 주는 훌륭한 우리 나라의 여성들은 못된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해도 ‘언젠가 달라지겠지’ 아니면 ‘얻어맞은 것을 창피해서 어떻게 남에게 이야기하나’하는 마음으로 참고 있는게 보통이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찾아오신 아주머니도 이런 부인의 모습이었다. 자신도 너무나 참을 수 없고 아이들의 교육에도 안 좋고 해서 경찰에 신고까지 해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는 것이다.
법원으로부터 강경한 주의를 받는 한편 다시 한 번만 이런 일이 있으면 영원히 격리하겠다는 엄중한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손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구명시식이 과연 그 남편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편의 흉측한 손버릇은 바로 남편의 집안 업보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 중국 여자의 원혼이 남편 집안 사람들의 남자들에게 붙어 있어 하나같이 손버릇이 나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남편의 아버지, 곧 스태튼 아일랜드 부인의 시아버지는 원래 일제시대 때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왔다갔다하는 무역상이었다. 그의 시아버지는 중국에 중국인 현지처를 한 명 두게 되었는데 이름이 ‘장소저’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장소저라는 여자가 대단한 질투심을 가진 여자라는 것이다. 남편, 즉 부인의 시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만 해도 펄쩍 뛰던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장소저에게 결국은 파국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바로 한국에 있는 본처, 그러니까 남편의 어머니이며 그 부인의 시어머니가 찾아와 한마디로 ‘자리를 잘못 잡았으니 물러나라’고 위세를 부린 것이다.
그러자 장소저가 이를 슬기롭게 잘 받아들이고 다른 현명한 방법을 택하지 못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남편의 주먹질은 장소저의 원혼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남편 집안의 식구들 중 남자들은 이 주먹질 때문에 가정이 파탄나기까지 했다. 큰 아들이 그래서 부인과 이혼을 했고 지금 그녀의 남편도 이혼일보 직전이고 나머지도 그랬다.
구명시식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많은 장소저의 영혼을 달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구명시식을 하는 동안 영혼을 천도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장소저의 영혼이 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때 성격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어서 나타난 영혼도 성격이 대단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 장소저의 영혼을 불살라 없애 버리는 영가 살생을 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구명시식을 통해 초령(招靈)을 한 영혼의 영가를 부른 초지를 태워버림으로써 영가를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젊은 시절부터 구명시식을 여러 번 했지만 영가 살생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음이 왜 그렇게 씁쓸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살아 있을 때 분신 자살을 했기 때문에 죽어서 영혼이 되어서도 이렇게 ‘영가살생’을 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이 구명시식을 하고서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보통 마약 중독이 된다거나 아니면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담배를 지독하게 많이 핀다거나, 그리고 술주정을 심하게 한다거나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 나쁜 것 일 때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심리적인 압박감이 먼저 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의 유전 인자에 이러한 약물과 기질에 대한 경도성의 유전 정보가 들어 있다면 후손들은 이러한 버릇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리고 그 유전 정보를 영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조상영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질과 가능성, 그리고 실제 그런 중독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그러한 기질을 고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위치라 느끼고, 이러한 나쁜 버릇을 멀리하면 이는 극복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그 사람은 선대의 악업을 청산하는 선업의 번식자가 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가진 살아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역사의 주인공이라 말하는 까닭이다. 성현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와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부처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어느 일본 게이샤의 슬픈 이야기

지난해의 일이다.
낯선 40대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심신이 편한 상태로 있을 때라서 갑자기 찾아온 전화에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묻고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이름을 듣자 충주, 아름다운 충주의 근사한 산과 강의 모습과 함께 40년 전 친구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나의 40년 전 친구였다.
40년 전 나의 아버지 차일혁 총경은 산과 강이 아름다운 충주에서 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세상이 밝은 초록빛으로 보일 시절이었다. 빨치산 토벌에 거의 매일 집을 비우던 아버지가 이제는 경찰서장이 되자 자리를 잡고 집에 계셨기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시절에 만나 많은 날들을 함께 보냈던 친구였다. 그러나 정작 반갑게 전화를 걸고 나를 찾아온 친구의 모습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충주의 추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외형적으로 봤을 때 그는 성공한 중년 남성이었다. 사업도 남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성공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부인과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있었다. 감춘 물건 꺼내듯 조심스럽게 드러낸 그의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가정의 불행은 도가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관 자살을 했다. 말 못할 불치의 병에 걸려 치료가 잘되지 않자 이를 비관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의 큰아버지 또한 자살을 했다. 그에 잇따라 큰아버지의 자식들인 사촌 남동생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사촌 여동생은 목매달아 죽었다.
그야말로 비운의 연속이었다.
여기에 자신의 우울증까지 겹쳤다. 문득문득 엄습하는 우울증은 자살만이 살길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가 나에게 전화를 했던 때는 아마도 죽을 결심을 하고 있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충주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위해 구명시식을 해본 결과 집안의 화가 끊이지 않는 원인이 드러났다.
그것은 이름없는 한 일본의 게이샤(창녀, 기생)의 원혼이 집안을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게이샤 영혼에 한을 안겨준 것은 그 친구의 아버지였다.
그이 아버지는 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일본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부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던 날 시모노세키의 한 유곽(遊廓)에서 잠을 자게 됐다.
그는 여기서 한 일본인 게이샤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게 됐는데 그녀에게 몸값을 속량해 주기로 약속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까지는 좋았다. 그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나라로 건너왔다.
한마디라도 일단 약속하면 반드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일본인이다. 더욱이 평생 도안 자신을 유곽에서 구해 줄 남자를 신처럼 기다리던 이 일본 게이샤 여성의 배신감과 비참함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약속한 말을 책임지지 않는 한국인 남자에 대한 한은 결국 그녀를 자살하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시모노세키 부근의 푸른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나의 충주 친구의 집안을 맴돌면서 ‘스스로 자살하게끔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은 바로 이 한 많은 일본인 여성의 원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명시식을 하는 동안 그 일본인 게이샤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쌓인 한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행히 구명시식을 하는 동안 일제시대 때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분이 계셔서, 게이샤 영혼의 이야기를 전해줬지만 구명시식을 하던 나 자신도 이러한 이야기에 많은 교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원혼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일본 인형과 꽃을 사서 예를 지내고는 그 꽃과 인형을 많은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허드슨 강물에 띄워 보냈다.
꽃과 인형은 한 일본인 여성의 한을 실은 듯 넘실거리면서 강물따라 흘러 내려갔다.
여자에게 그냥 던지는 말이나 남에게 그저 무책임하게 내뱉은 한마디 말이 가져온 엄청난 재앙이자 불행이었다.
이러한 약속을 한 그 친구의 아버님이 왜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몸값을 속량해 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일본을 황급히 떠났는지, 아니면 여행길에 돈이 떨어져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의 말을 완전히 믿고 또 남자의 한마디 말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었던 일본 게이샤 여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결국 그 집안의 4명의 목숨을 빼앗아가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고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게 아닌’ 상태로 만들었다.
어느 누구도 한을 주고도 그저 아무 일 없이 살 것 같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이 구명시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피아와의 만남

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이 느낀 점 중의 하나는 미국이 그렇게 풍요로운 날만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신문지상에 연일 죽이고 다치는 기사가 빠지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문제 할 것 없이 온통 문제점이 가득차 있는 것 같이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아직까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체면을 유지시켜주고 있겠지만 뉴욕, 특히 온갖 인종이 모여 치열한 삶의 경쟁을 벌이는 이곳에서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쉽게 눈에 띠곤 한다.
삶의 경쟁이 치열한 만큼 뉴욕에는 생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사는 할렘가가 곳곳에 있으며 인종의 특색에 따라 스패니쉬 할렘, 이스트 할렘, 웨스트 할렘등으로 부르고 있다.
얼마 전에 연일 신문방송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마피아 두목 존 가티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뉴욕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고 있다.
주로 마약과 매춘사업등과 관련된 범죄조직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성과 호흡을 같이하며 사회 저변의 어두운 곳에서 큰 영향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는 사람이 비교적 많고 또 그 사람들 또한 각계 각층인 친구가 지난 여름 갑자기 찾아와 마피아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깜짝 놀라고 영화 <대부>에서나 보는 살인 청부업자를 연상했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제안에서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장소가 맨하탄의 업타운 동쪽지역으로서 낮은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한적한 곳인데 그 가운데 한 건물에서 소위 암흑가의 제왕들하고 만나게 되었다.
이태리계로 생각되는 마피아들은 주로 콧수염을 대부분 기르고 있었고 한두명의 보스급을 제외하고는 티셔츠에 청바지 등 노동자같은 허름한 차림들을 하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몇마디 인사말을 나누고 앉아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보이는 것은 그저 보통 책상 의자등 가구들과 TV들 분이었다. 당시 생각으로는 아마 그곳이 아지트라기보다는 단지 일시적인 회합장소 등으로 사용하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생생하게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루치오’란 친구가 나에게 몇 마디 하더니 결국 나를 만나고자 한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당신 친구에게 들었는데 당신이 이런저런 영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하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그들이 왜 나를 아무런 목적없이 한적한 곳에서 만나고자 했는지를 번뜩 깨닫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 만나고자 할 때는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고, 친구 또한 어떤 복선을 깔고 이야기하기에 결국 이러한 입장의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바는 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현재 옆방에 자신들의 한 친구가 죽은 채로 있는데, 그 사인을 정확하게 알아 줄 수 없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교통사고로 판명된 자신들의 친구는 결코 사고로 죽은 사람이 아니며, 현재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음주 후 폭행을 당해 교통사고로위장된 채 살해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누군가를 정확히 가르쳐주는 것은 원하지 않으나, 살해의 동기나 방법들은 알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쉽게 나가지 못하리라고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시체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찔하기도 했으나 다소 위협적인 요구에 ‘잘못왔구나’하는 생각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확률중의 가장 확률이 높은 수는 99.999……가 될 것이나 인간이 현상적인 세계를 살면서 가장 선택하기 어려운 숫자는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어머니 탯속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뉘는 것도 그렇고, 젊은 남녀 사랑 사이에는 두 사람의 연인을 놓고 고민하는 청춘 남녀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하여튼 그들의 요구는 즉 타살이냐 자살이냐는 결정에서부터 타살이면 어떻게 죽었느냐는 것인데, 지극히 어려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놓고 동양에서 온 종교 수행자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그 마피아들은 죄를 지어도 큰 죄를 저지른 것이리라.
결국 끝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친구의 사인을 밝혀준 후 그곳을 빠져나오긴 빠져나왔지만, 그 이후 나는 그들의 소식도 또한 나를 그곳에 데려갔던 친구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당시 내가 본 것은 양복을 입은 웨 남자가 폭행과 함께 교살을 당한 후 차에 태워진 채 고속도로 부근의 교각에 버려지는 모습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람둥이 고양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옛날부터 경치 좋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것저것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날씨도 늘 안개가 끼여 있는 날이 많고 왠지 모르게 미국의 대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길거리를 다니는 전차가 미국에 있는 도시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활보하고 다닌 것도 그렇고, 여기 저기 언덕을 넘어서면 꿈같은 비취빛의 태평양이 눈앞으로 다가서는 것도 샌프란시스코이다.
그 유명한 금문교를 맑은 날에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심지어 예술적으로 까지 보인다. 일상적인 다리 하나가 그렇게까지 관광객을 끄는 것도 바로 샌프란시스코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학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금문교를 방문해서 그림이나 사진 엽서에서 보던 것과 같이 완전한 금문교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아주 단순한 편(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에 속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치있고 예술적인 도시라서 그런지 예술가들도 다른 어느 서부의 도시에 비해서 많고 활동도 활발한 편이다.
특히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시피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포도밭은 노벨 수상 작가인 죤 슈타인백의 작품 《분노의 포도》의 무대였다. 이러한 만큼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의 문학가들에게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랑이 있어서인지 샌프란시스코는 도시 전체에 그윽한 운치가 있고 어떤 때는 감상적이다 싶을 만큼 여행객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면 이러한 샌프란시스코의 정서가 결코 이유가 없는 감상만은 아니다.
‘태평양으로 난 창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샌프란시스코는 우리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인 이민자들이 그 넓디 넓은 태평양을 지나 미대륙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샌프란시스코가 단순한 운치의 차원일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는 ‘한’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러한 진한 감정이 있는 곳이다.
특히 초기 한국인 이민자들은 샌프란시스코 밑에 위치한 로스엔절레스와 이곳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이러한 동양계들의 초기 이민지인 만큼 샌프란시스코는 많은 한국인들이 눈물과 설움을 삼켰던 곳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러한 역사와 여행자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 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로 인해 갖가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것은 샌프란시스코가 가지고 있는 개방성이다.
동성연애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도 샌프란시스코이며,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의 열기도 서부에서는 로스엔젤레스보다 오히려 여기가 더 강한 편이다.
도시 전체가 예술적인 분위기가 있는데다가 캘리포니아 특유의 기후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열적이다.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젊은이들 같이 사랑을 만끽하면서 즐기며 낙천적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명력이 가득한 도시 샌프란시스코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사이 이런 이야기가 한 지역 신문에 나오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열기와 낭만을 상징해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꽃집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주인에게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찾아오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보기에도 금방 알 수 있듯이 한마디로 도둑 고양이의 전형처럼 크기도 크거니와, 털 색깔도 기름기가 흐르는 노란빛인 것이 야성미가 넘치는 숫고양이였다.
이 고양이는 처음 보는 꽃집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애교를 부리고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제스처(?)는 하루 이틀에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둑 고양이 노릇을 다년간 하면서 배운 것임에 틀림없을 만큼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주인은 아양을 부리는 이 도둑 고양이에게 멸치를 던져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멸치 급식이 한두 번에서 끝나면 좋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와서 종아리를 건드리고 애교를 부리고 하던 도둑 고양이는 ‘봉을 만났다’ 싶었던지 며칠 지나서는 어디서 보지도 못하던 2마리의 고양이를 한꺼번에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2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온 것까지는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도둑 고양이는 자그만치 4마리의 새로운 고양이를 더 데리고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짠’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놈의 도둑 고양이가 데리고 오는 고양이들의 배가 하나 둘씩 불러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그 놈의 도둑 고양이가 데리고 온 새로운 고양이들 모두가 암놈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놈이 자기만 거지 노릇하면 좋을 것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양가집의 젊은 암고양이들을 모두 건드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둑 고양이를 따라다녔던 얌전한 암고양이들(얌전했는지 부뚜막을 먼저 올라갔는지는 모르지만)을 키우던 이웃집의 날카롭게 생긴 할머니가 화를 머리끝까지 내면서 무슨 일을 낼 것같이 떠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놈의 도둑 고양이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난봉질을 하며(동물 입장에서 보면 난봉질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새끼를 배게 만든 암고양이는 자그만치 8마리에 달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놈의 도둑 고양이는 희대의 ‘플레이보이 도둑 고양이’였던 것이다.
여자가 한 번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던가.
문제의 도둑 고양이에게 자기가 키우던 암고양이들을 본의 아니게 시집 보내야 했던 할머니의 분노는 이 문제를 그냥 그렇고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문제의 도둑 고양이를 결국은 어렵게 잡아서 가축 병원으로 직행시켰다. 도둑 고양이에게는, 아니 플레이보이들에게는 치명적인 ‘하늘이 무너지는 죽음과 같은 거세’를 단행해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모습은 옛날의 그 자신만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깨가 처지고 꼬리가 땅바닥을 기는 맥빠진 모습이었다.
결국 며칠이 지난 후 그 도둑 고양이는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화려한 젊음과 능력을 간직하고 죽을 망정, 째째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에서 택한 죽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도둑 고양이는 가고 자신이 새끼를 배게 했던 암고양이들은 플레이보이 도둑 고양이의 새끼를 낳게 됐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어난 새끼들 가운데는 (줄잡아 수십 마리를 넘겠지만) 자기 아버지, 곧 플레이보이 도둑 고양이와 닮은 새끼 고양이는 한 마리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바로 몸집이 크고 기름기가 흐르는 노란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꽃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도둑 고양이가 무척 가엾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그 고양이에게 구명시식을 해주었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 구명시식을 해주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왠지 꼭 그렇게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 후 도둑 고양이의 영혼은 아마도 마음 편하게 천도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8마리에게서 난 새끼들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바로 낭만이 넘치고 예술과 문학이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무구행 보살

무구행 보살을 생각하면 사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무구행 보살은 한국에서 엘리트라고 하는 은행 주재원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타향살이 어려움은 있었지만 남편하고 살 때는 큰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무구행 보살에게 운명의 시련이 닥친 것은 미국에 와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귀엽게 낳은 자식이 별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열 때문인지 아니면 임신 때 무슨 외부의 충격을 받아서인지 정상아보다 약간 지능이 낮게 태어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인연이 박하고 적선, 적덕을 행하지 못해 받은 업보로 돌리고 부족한 자식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무구행 보살을 진정으로 절망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그토록 무구행 보살을 사랑해 주던 남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의 사망은 무구행 보살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충격이었다. 도무지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실망과 좌절속에서 무구행 보살은 그래도 한국행을 단행하지 않고 미국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 지진아의 증상을 보이고 있는 자식이 앞으로 살기에는 한국보다 미국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미국 영주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순간 남편의 타계 후부터 무구행 보살과 아이를 제 몸과 같이 돌봐주던 친정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뿐인가. 타향에서 목숨줄이라고 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돈을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줬으나 그 사람이 다만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돈을 갚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만 하고 사라져 버리는 극적인 사태도 생겨났다.
결국 인생의 성장기와 장성기의 대부분을 편안하게 살았던 무구행 보살은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숙자 신세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무구행 보살은 여러 번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장문의 편지를 통해 보내왔다. 그러한 무구행 보살에게 나는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구행 보살로부터 또다시 절망스런 편지를 받아야 했다. ‘여러 가지 합병증과 더불어 생겨난 암으로 인해 의사로부터 남은 기간 동안 생을 정리하는게 좋겠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무구행 보살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인생을 위해, 그리고 내세를 위해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사랑해 준 모든 분들을 위해 구명시식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무구행 보살은 그때 내가 미국의 뉴저지 후암정사에 머물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의 잠실 후암정사로 일부러 찾아와 구명시식을 간청했다.
그러나 나를 찾아온 무구행 보살의 모습은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황달이다 못해 검은색으로 변해 버린 흑달이었으며, 담낭에 번진 암으로 인해 몸이 신체적으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의 마지막 순간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절망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인생의 생사화복과 길흉이 결국 크게 보면 하나이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생명을 있게 해준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들, 그리고 크고 위대한 천지신명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무구행 보살의 원기 회복과 그리고 그 악한 인연에 걸린 영계의 고리를 풀기 위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구명시식을 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구명시식 도중 무구행 보살의 친정 어머니, 곧 자신을 낳고 키워준 친어머니가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친정 어머니가 들려주신 말씀 또한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자신은 바로 자신의 딸인 무구행 보살이 건네준 약을 잘못 먹고 죽게 됐다는 것이었다.
무구행 보살이 친정 어머님의 건강을 위해 약을 드렸었는데, 그 약은 심장이 나쁜 사람들이 먹으면 안 되는 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르고 먹어 그 독성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됐다는 것이었다.
무구행 보살은 너무나 놀라고 슬퍼서 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생각없는 행동에 대해 눈물로 뉘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시하신 무구행 보살의 어머님은 영혼의 세계에 가셔서까지도 이제 60에 가까운 딸을 걱정하고 계셨다. 잇따라 닥치는 가정과 개인의 불행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한 자신의 딸을 어머님 입장에서 깊은 근심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정성을 다하여 구명시식을 해주었다. 그리고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재차 삼차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2년이 지났다. 그러나 다음 주로, 다음 달로 죽음의 길을 갈 것으로 모든 사람이 믿었던 무구행 보살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다. 그리고 오히려 살아가는 삶이 과거보다 활기가 넘쳐 있다.
절대로 다시 돌아와 빌린 돈을 갚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사업을 만회한 후 다시 돌아와 머리를 숙이고 빌린 돈을 갚아줬다.
그리고 무구행 보살은 샌프란시스코 집 주위에 있는 사찰에 다니며 수행과 사찰 일을 적극적으로 돌보고 있다.
나는 요즘도 가끔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는 무구행 보살의 편지를 받는다. 그러면 나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풍경과 함께 웃고 있는 무구행 보살의 얼굴이 생각난다.
자연도 아르답고 도시도 아름답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를 가본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한곤 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움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무구행 보살의 열심히 사는 모습이다.
운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뉴욕의 신데렐라 이야기

퍼져나간 독경 소리 달빛을 따라
희미한 안개의 삶 햇빛에 드리우니
온 세상 손아귀에 한줌으로 접히네
망망대로 허허벌판 꿈을 싣는 고독한 이여……

사바의 세계 등불이 되겠다고 회오리 바람
휘몰아치는 굴레 속에 그대로 솟구치는
돌 바위 저력은 이어받은 저 옛날의
동굴 속의 환웅의 변함인가.

소리없이 꿀꺽꿀꺽 흡수하는 두꺼비
왕좌 속에 이것은 법열, 저것은 망상,
그리고 그곳은 열반, 정좌하며
혁명보다 더 진한 열기로 생사를
가름하는 영혼의 사자여……

아! 그대는 그래도 무언의 군중 속에
보석보다 더 귀한 사랑의 인연 찾아
채울 수 없는 고독을 안고도 날개 돋친
오색의 찬란한 빛을
휘몰 수 있는 낭만의 방랑자.

그래서 그대는 겹겹이 쌓은 황토의 삶을 머리칼로
독경 소리에 번뇌를 분산하고, 시야의 저력으로
삶을 투시하며, 예리하지 못해 둔탁하게 보이는
판단으로 영과 영을 연결하며, 펄펄 뛰는
심장으로 사랑과 고뇌를 가름하여 보이지 않는
초인의 길로 만인의 우상이 되는 거목이 되려나.

이 글은 ‘뉴욕의 신데렐라’ 박희자씨가 나에게 적어준 글이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그녀를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뉴욕에서였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박씨는 호기심에 가득 찬 소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교포 2세들의 장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배려 그리고 두고 온 조국에 대한 사랑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부르던 젊은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20여년 전에 떠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말하면서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서늘한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이를 밝히기를 꺼리는 그녀를 한국계 뉴욕거주자들은 흔히 ‘신데렐라’로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미국에서 안주하기까지에는 지난 87년 4월 1일 작고한 고 레슬리(Robert Lincoln Leslie) 박사와의 만남과 오랫동안 쌓아온 교분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레슬리 박사는 콜럼비아 대학 영화과를 창설하고 뉴욕대 그래픽 연구소장, 뉴욕대학 총장을 지낸 미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1백 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박희자씨의 양부(養父)인 것이다.

그녀와 양부인 레슬리 박사와의 만남은 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첫발을 디딘 미국에서 서예전을 열었을 때 우연히 전시장을 돌아 본 레슬리 박사는 미지의 동양여인에게서 반짝이는 예술혼(藝術魂)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높이 샀다.
한마디로 그녀의 서예작품에 반한 레슬리 박사는 그 자리에서 스폰서가 되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후 이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져 그녀를 브루클린 뮤지엄 아트 스쿨 피아노학과, 뉴욕대학 영어코스, 뉴욕대학 벼룩칼리지 비즈니스 스쿨 등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 줬다.
그녀를 양녀로 맞이한 레슬리 박사의 보살핌은 그 뿐이 아니었다. 박희자 씨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배항영 씨와 자녀들을 미국에 초청, 정착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 후 그녀는 10여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지난 89년 5월 뉴욕시티 유니버시티 벼룩칼리지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학사모를 쓰게 된 것이다.
레슬리 박사의 그녀에 대한 애정은 단순한 물질적 지원에 머물지 않았다. 육친의 정 이상으로 보살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자녀들을 가족으로 입적시켜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되게 했다.
그녀의 남편 배항영 씨도 레슬리 박사의 도움에 힘입어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배씨는 세계인명사전에도 기록돼 있는 지산법(指算法) 창시자로 유명하다. 레슬리 박사는 배씨가 마음놓고 지산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연구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관련 서적을 발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뉴욕 교포사회의 평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녀가 신데렐라로 지칭되는 이유가 단순히 돈많고 명망있는 외국인(레슬리 박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뜻을 세워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세속적인 ‘행운’때문이 아니라는 게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뉴욕 교민들의 평판이다.

그녀의 모국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 못지않게 뜨겁다. 그러나 그 열정속에는 어떤 이권이나 지위를 의식한 것이 아닌 순수한 조국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과 행동이 교포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인권문제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그간의 행동은 상당한 지지와 포용력을 인정받고 있다.
전미주 인권문제연구소 뉴욕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자칫 이같은 직함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른바 재외정객들과는 뚜렷한 선을 긋고 있을 정도이다.
‘정치에는 뜻이 없고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인권문제 관심 영역을 확실히 하는 그녀는 특히 전미주 인권문제연구소의 명예이사장이며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표와 연관해서 생각하기 쉬운 일반적인 오해를 한마디로 불식한다.

이른바 한국내 정치상황이 암울했던 시기인, 70년대 유신 때부터 연구소 이사로서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던 그녀는 김대중 씨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특히 김씨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는 인간적인 교분을 두텁게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
그 무렵 정치적인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던 김대중 씨의 입장과 그의 열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고국에서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같은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은 김대중 씨가 80년대 초 귀국하고 나서도 계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희자 씨의 학구적은 노력과 깨끗한 교제는 교포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남을 도와주는데 있어서도 순수하게 돕는 차원에서 끝날 뿐,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고 돕는 것이 아니다.”
재미인권운동가로 활동한 바 있는 민승현 씨의 그녀에 대한 회고담이다.
“끊임없이 배우는 자기정진적 자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행동거지 또한 예의바르고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갖추고 있다.”
한때 뉴욕에서 인권 문제 일을 하면서 보고 느낀 그녀에 대한 민씨의 객관적 평은 각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무렵 재야 특히 재미인권운동가들(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재야 정객들) 사이에서 박희자 씨는 물질적 스폰서로서 또는 순수한 인간적 교분에 있어서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에 관해서 거의 입을 다물고 있다. 자신이 좋아서 또는 고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한 일이 자칫 속되게 퇴색하지 않을 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모던 우먼입니다. 특히 그녀의 패선스타일이나 매너는 상당한 수준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절도와 절제있는 행동속에서 자신의 일을 빈틈없이 해 나가고 있습니다.”
민승현 씨의 그녀에 대한 감각적인 인상은 ‘소위 배운 여자’한테서 풍기는 지적오만이나 서양인들의 독특한 습관을 잘못 배운 ‘어설픈 미국인’의 방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많은 이들이 따른다. 수많은 미국인 친구들은 대개 학교와 관련된 교수그룹을 비롯해 특히 예술 분야의 인사들과 동문수학하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많다. 그 가운데 특별한 교분을 나누고 있는 분들이 있다. 앞서 밝힌 김대중 총재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몇몇 정객들과 버클리대 출신인 손보기 연세대 교수, 모재벌 그룹의 2세 등이 그녀와 절친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
특히 H그룹 총수의 아들인 M씨와 그녀의 관계는 남녀간의 돈독한 우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도 교포 가운데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그 중 의친왕의 딸이자 현재 콜롬비아대 동양학도서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혜경 여사와 동대학 채형석 교수와도 교분을 나누고 있다.

박희자 씨가 처음 정착하기로 마음 먹은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낯선 이국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주위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특히 결혼한 여자로서 공부를 하겠다고 유학을 온 것부터가 무리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다지고 생활환경을 바꾸기로 작정, 72년 초 뉴욕으로 근거지를 옮겼던 것. 거기서 그녀 생애를 뒤바꿔 놓은 레슬리 박사를 만난 것이다.
레슬리 박사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며 교육자지만 특히 인쇄 예술가로서의 실력은 당대에 손을 꼽을 만큼 유명하다. 그의 뛰어난 안목이 박희자 씨의 예술가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언어뿐 아니라 생활환경이 전혀 다르고 특히 동양권에서도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 등 몇몇 나라에서만 모필(毛筆)로 쓰는 글자를 예술로 승화시켜 독특한 장르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을 뿐인 서예를, 벽안의 외국인이 이해하고 심취하기는 여간한 안목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여느 방면의 예술 즉 미술(그것도 서양화부문),무용,연극,음악부분에 대한 개인적 또는 단체의 후원은 없지 않았으나 서예라는 독특한 동양적 장르는 사실 외국인에게 낯설고 어쩌면 거부감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박희자 씨가 뉴욕에서 첫 번째 서예전을 가진 것도 뉴욕에 있는 교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학자금에 필요한 돈을 다소나마 모으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적어도 미국인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연 전시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레슬리 박사가 관람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녀와의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레슬리 박사는 원래 의학을 전공한 의사이자 인쇄예술가로 미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의 인쇄예술가적 안목이 동양예술의 한 형태인 서예를 이해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특히 인쇄출판문화재단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세계 각국에 있는 2천여명의 학자,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을 만큼 문화적, 재정적 뒷받침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 레슬리 박사에 대한 뉴욕 교포들의 몰이해가 미국인들 특히 뉴욕인들에 의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박씨를 양녀로 맞이한 레슬리 박사는 그 후 박씨가 관련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앞장서 참여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해 3.1절 기념행사가 뉴욕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 레슬리 박사도 참석하게 되었다. 순전히 양녀인 박희자 씨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노구를 이끌고 식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교포들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또 어떤 지위에 있는지 관심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여느 미국인과는 달리 말석을 차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식이 끝나고 관련기사와 사진이 현지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본 뉴욕인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레슬리 박사가 한국 교포들에 의해 말석에 앉는 홀대를 당했다는 항의를 한동안 받아야만 했다.
그의 부인 사라 그리버드(73년 작고)도 의사였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인 레슬리 박사가 한쪽 눈을 실명하자 ‘한집에 두 명의 의사는 필요치 않으니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는게 좋겠다’며 인쇄 예술에 심취할 수 있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레슬리 박사의 인쇄 예술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행위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0년대 초에 박희자씨를 만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박씨는 그 후 레슬리 박사에게 한국 인쇄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팔만대장경 목판과 금속활자를 보여주기 위해 동반 귀국했다. 그때가 지난 86년 7월 2일이었다.
당시 김포공항사상 최고령 입국자로도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레슬리 박사는 1백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정열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사람과 끊임없이 만나 대화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신조이자 건강비결이라고 밝힌 레슬리 박사는 당시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가끔씩 피곤할 때만 휠체어를 타기는 했으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레슬리 박사는 미국에서도 새삼스럽게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 해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 마침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건립 1백주년 기념을 계기로 이 여신상이 세워진 엘리스 섬에 관한 얘기와 과거 유럽이민들의 관문이기도 했던 뉴욕항 입구의 엘리스 섬에서 자원 봉사자로 이민 온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의사들의 얘기도 새삼 거론되었다.

레슬리 박사는 1912년 명문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자원 봉사자로 이민 온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의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로서 매스컴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로이터 통신은 그를 가리켜 ‘닥터 리버트(자유의 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레슬리 박사의 박씨에 대한 보살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박씨가 두 번째 아이를 잉태했을 때 레슬리 박사는 세계각국에 있는 지인(知人)들에게 일일이 ‘우리 딸이 임신했다’는 편지를 띄울 정도로 좋아하였다.
박씨는 그 때문에 출산 후 세계각국으로부터 약 2천여통에 달하는 전화,전보,편지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요즘 박희자 씨는 남편 배항영 씨의 지산법 보급에 앞장을 서고 있다. 남편 배씨가 몇 년 전부터 몸이 불편한 관계로 박씨가 강의와 보급운동에 직접 나서고 있다. 휠체어에 남편을 태우고 지산법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이를 보급하고 있다.
‘지산법은 바보부터 천재까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계산법으로 초급계산은 물론 고등수학까지 풀 수 있는 독특한 계산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신체장애자 중 맹인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법이면서도 그 응용 범위가 매우 넓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지산법 보급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그녀는 자신이 외국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이상으로 남을 도와주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지산법 보급도 그런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영원히 학생’이고 싶다는 그녀는 초로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카네기홀 아트 스튜던트연합스쿨에 재학중인 학생 신분이기도 하다.
“레슬리 박사가 나를 지원해 준 것은 내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 노력해서 보답하겠다”고 밝히는 그녀의 눈빛은 희망에 가득차 있었다.

어느 행복한 결혼식

어느 날 나는 한 가슴 아픈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뉴욕 맨해턴 251 West 92st에 사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이미혜라는 여인이었다. 우연히 나의 글을 읽고 자신의 사연을 적어 보낸 것이었다.
가슴 아픈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자신의 남편에게 죄스러움이 없지는 않지만, 이국 땅에서 고생을 하면서 살아 남아야 할 두 아이의 어머니라는 데에 힘이 되었던 것이다.
철없었던 때 만난 그들의 사랑은 화려한 결혼식을 뒤로 미루고 열심히 살면서 부모님께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 동안 남편과 그녀의 노력은 아랑곳없이 슬픈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19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니의 초청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만난 남편은 24살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는 당연히 그들이 감수해야 할 문제였다.
일찍이 어려서 생모와 이별하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 정을 주리며 할머니,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던 남편은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더욱이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이 매우 컸다.
그의 아버지는 20년 가까이 필라델피아에서 ‘델리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님의 하나뿐인 아들로서, 아버님의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부모님께 남편은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했다.
남편은 오랫동안 군생활(미국 군인으로 8년간 근무)과 계속하여 왔던 공부도 접어둔 채 아버지 가게에서 직접 경영을 맡아왔다.

그러나 많은 꿈을 안고 행한 그들의 미국행은 악마의 얘기처럼 남편을 영영 그녀의 품으로 돌려주지 않았다. 밤 10시에 가게 문을 닫고 나오던 남편은 2인조 권총 강도에게 돈과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막막함은 슬플 수도 없을 만큼 그녀를 세상 밖으로 밀친 채 외면하고 말았다.
뉴욕 생활과는 달리 필라델피아는 운전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능력으로는 두 아이와 함께 남편의 그림자를 안고 눌러 살 수가 없었다. 등 떠미는 시댁의 차가웠던 냉대와 떠올리기조차 싫은 인간 관계의 많은 기억들로 정신을 추스르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필라델피아의 생활은 삭제하고 싶은 한 부분이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그녀에게 이제는 며느리가 아닌 딸로 여긴다며 죽을 먹어도 같이 먹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하면서 이 일은 돈으로 해결해야 할 단순한 교통 사고도 아니니, 평생 서로 힘을 합하여 아이들만이라도 잘 키워야 된다던 따뜻한 말씀은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남편의 사고 당시 병원 수술비로 약3만 달러가 나왔었는데,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병원비 보상 문제 때문에 몇 차례 서류 서명 건으로 시부모님과 만난 이후로는 지금까지 1년 4개월 동안 연락도 없고 손주들의 안부도 묻지 않는 시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전화 한 통도 없는 현실이 살아 있는 그녀의 세 식구보다 부모님의 정을 그리워했던 죽은 남편을 더 비참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제 겨우 4살, 3살인 두 아이들의 진로와 그녀 역시 이민 두어 살도 안된 이민 초년생으로 하느님에게라도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을 무시한 남편의 목숨값이라던 남들의 비난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앞으로 많은 새털같은 날들을 원망과 한숨으로만 지내기에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책도 힘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남편이 종업원이었다면 법적인 문제로 진전되었을 것이었지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유로 부모의 처분만 바라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것이다.
남편이 가게 종업원으로 등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와사고 지점이 가게 건물밖이라는 사실 때문에 보험 문제와 보상 문제에 하나의 혜택도 없다고 하는 시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렇지만 남편은 그날 매상을 들고 가게 문을 나서자 2인조 권총 강도가 권총을 남편 머리에 대면서 그 순간 돈을 빼앗아 달아났던 것이고 그 돈을 찾으려고 뒤따라가다가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편은 강도가 쏜 권총을 맞고 그만 숨지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 경험이 미약한 어린 그녀는 어떠한 충고라도 감사히 받을 마음으로 나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생전에 남편과 정식으로 양가 합의하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늦었으나 남편과의 영혼 결혼식을 하게끔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졸한 결혼식이 있었다.
신부 한 사람만이 참석한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신부의 얼굴은 이 세상 어느 신부보다 아름다웠으며 행복한 듯 보였다. 마치 곁에 이미 먼저 가버린 신랑이 있기라도 한 듯…….
그 영혼 결혼식 후 그녀의 남편은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듯 행복해 하였단다. 그녀는 지금 아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영혼 결혼식은 의욕적인 새삶을 살아가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부디 다른 생에서나마 그녀의 남편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기를 빌어본다.

미국은 과연 축복의 땅인가

광활한 뉴저지의 하늘, 그리고 그 밑에 펼쳐진 끝없는 평원.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과 낮게 스쳐가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 미국은 하느님이 축복한 땅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러나 축복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편, 이러한 미국의 부흥과 번영 뒤에 숨겨져 있는 우리와 같은 황인종이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비참한 과거를 생각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감정이 격해지곤 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가을 미국 동부의 명승지 ‘캐스킬’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도반들과 함께 가서 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성역으로 여겨 중요한 의식을 진행했던 곳으로 성인식이나 중요한 결정 사항, 즉 전쟁의 개시나 민족의 이동 등을 결정할 때 부족의 전사들이나 사제들이 영험한 결정을 얻고자 기도를 드렸던 곳이었다.
때를 잘못 잡아서인가, 때 아닌 비가 부슬부슬 내려 왠지 일행 모두를 말없게 만들었다.
힘든 산행을 거쳐 정상에 다다랐다.
과거 인디언들이 성역을 꾸밀 때 사용했던 석조물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으며, 기도소로 사용되던 정상 부근에 올라가니 흡사 영화에 나오는 샤먼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이방인들이 자신의 성역을 침입했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잊혀진 자신들의 핏줄 한 부분이 기도를 하려고 나타났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일행이 기도를 드리려고 정좌를 하자 그렇게 꾸준히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갑자기 멈추는 것이었다.
햇살이 산마루를 타고 흐르면서 멀리 뭉게구름이 내리는 것이 보였단. 산 정상 부분에 서 있는 침엽수림들 사이로 낮은 바람이 지나가면서 새로운 생명력의 기운을 전해 주고 있었다.
구름도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자신의 모습을 더욱 밝게 드러내고 있었으며 저 멀리 끝까지 보여지는 경치는 흡사 세상 끝까지 보여질 것 같은 맑은 기운을 나타냈다.
우리 일행은 기도를 하고 나자 모두들 서로 놀란 듯 쳐다보며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온 현상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먼 산길을 내려와 다시 뉴욕에 돌아오려고 차에 탄 순간 세상이 어두워지면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무엇인가 번개처럼 내 마음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인디언들이었다. 미국 건국 당시 뛰어난 전쟁 기술과 병기를 가진 백인들에 의해 희생당한 인디언들의 한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지에서의 기도와 비를 통한 인디언 영혼들과의 공감,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드렸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쟁을 만들어 내는 인종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서 우세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죽이고 타파함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멀리 맨하탄의 모습이 보이는 워싱턴 브리지에 접어들면서 나는 미국의 번영과 그 이면에 감춰진 소외 계층들의 비참한 삶이 결코 아무 뿌리없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조국을 떠나 이민 사회에 살고 잇는 우리들은 자연스레 민족의 문제를 가슴속에 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무슨 물건을 구입하려 한다든지 관공서며, 사회서비스업 기관 혹은 업체에 출입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상대가 있어야 하는 사회적인 일을 처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상대해야 할 그 기관이나 업체에 우리 동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막상 떠오르지 않으면 이리저리 수소문하기도 할 것이다.
이민의 햇수나 영어 구사의 정도에 따라 다소의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같은 민족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의 불유쾌한 경험 때문에 ‘내가 다시는 한국 사람 상대하나 보라’하는 말을 되뇐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막상 다시 무슨 일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금방 그 얘기를 스스로 마음속으로 취소하면서 동포를 찾게 된다. 동포를 상대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 과연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그 안에 귀속시키려 하고 있을까?
우리는 왜 이국 땅에 살면서도 조국을 생각하고, 조국의 언어를 사용하며, 될 수 있으면 동포들과 어울려 조국의 정서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는가?
세계2차대전이 끝났을 때 한 무리의 사회 과학자들은 이제 지구상에서 민족 문제란 사라졌다고 단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단언이 얼마나 비약이었고 독단이었는지는 최근 들어 민족, 민족의 이익, 민족 운동, 그리고 민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지구상 도처에서 봇물터지듯 일어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게 된다.
학문적으로 말할 때 민족이란 ‘혈연과 지연의 바탕 위에 정치, 경제, 문화를 포괄하는 생활양식의 공통성과 역사적 운명의 공통 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가장 포괄적인 기초 집단으로 대개 국가라는 사회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는 말로 설명되곤 한다.
민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포괄적이며 기초 집단이란 애기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안토니 스미스는 인간이 자기 실현을 꾀하고 자유의 확장을 원한다면 민족과 일체화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간은 본래가 발전을 꾀하는 동물이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아니면 육체적이든 발전과 발달을 꾀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어 만물의 영장으로 여겨지는 근거이다.
그런데 발전과 발달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일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발전을 얘기할 때 그것은 반드시 사회적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즉, 인간이 혼자 산다면 거기엔 발전이나 발달이 아무런 의미나 힘을 갖지 못한다. 또 사실 인간의 발전은 역사를 통해 여러 사람의 합심과 협력으로 이루어져왔던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본래 발전을 꾀하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사회적 관계의 가장 우선적이며 결속력이 강한 조직의 단위가 바로 민족인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생활 단위인 가정을 이루는 가족에게 정을 쏟듯이 가족의 확장인 민족에게 정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민족을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 진정한 사회적, 역사적 의미의 발전이란 없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민족, 국가에 대한 충성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민족제일주의가 잘못 발전하게 되면 배타적 국수죽의로 흐르기도 하지만, 다민족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한번쯤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싶다.
요즘 우리 민족은 다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잘나가는 듯했던 경제가 막히면서 여기저기서 갖가지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때 우리는 동포를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를 가져야겠다.
함께 생각하다 보면 일견 답답하게 막혀 있는 듯한 우리 민족의 활로가 환히 비치게 되지 않을까?
또 고국을 떠나 있을 때, 장기판이 옆에서 더 잘 보이는 것처럼 고국의 동포들이 보지 못하는 민족의 운명의 가닥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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