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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 위에 낮달처럼 저녁 햇살이 걸리자 구천리 동구입니다. 표충사의 아랫마을입니다. 햇살 한 줄기, 아쉬운 작별의 마지막 고갯짓인 양 솔숲에 걸립니다. 솔숲을 지나자 길가의 참나무들이 황급히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참나무들의 실루엣이 조각처럼 새겨집니다. 나무의 수직성이, 그 끝 모를 하늘 사랑이 극한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개울을 건너 일주문을 지나자 참나무숲 사이로 대리석으로 깐 길이 사역으로 발길을 이끕니다. 길의 주인은 참나무입니다. 이 길에서 직선의 경제성은 경망스런 종종걸음입니다. 표충사(表忠祠) 마당을 가로질러 성큼 키를 올려 지은 사천왕문을 지나자 삼층석탑 앞입니다. 높은 산을 울처럼 두른 산사는 호수 같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바람조차 조심스럽게 길을 열어야 할 것 같은 단정한 어둠입니다.
▲ 층층폭포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본 표충사 전경. 사방의 병풍 같은 산들로 하여 절은 더 깊어 보인다.
아무런 일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무슨 일을 해도 어긋날 것 같은 겨울 초저녁. 산사가 아니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역시 산사의 적막은 겨울이 제격입니다. 참으로 오랜 만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구들에 배를 깔고 눕는 호사를 누립니다. 진정 ‘쉰다’는 것은 이런 순간을 이르는 말이겠지요. 현대인의 삶이 온전치 못한 이유를 또 절감합니다. 밤을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네 반쪽 삶이 가여워서 쉬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늦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새벽 도량석과 예불 때 울리는 목탁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에 빠져든 것입니다. 늦은 시간이라지만 사실은 새벽 5시30분입니다. 보통 절집에서는 새벽 3시부터 하루를 시작하니까요. 문을 열자 알싸한 새벽 공기가 방안으로 스며듭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겨울 냄새’입니다.
는개가 내리는 아침을 맞습니다. 안개와 함께 절 마당을 둘러봅니다.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옆 배롱나무의 군더더기 없는 몸매가 또 하나의 탑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무와 산과 바람의 ‘지음(知音)’될까 싶습니다.
▲ 표충사의 주불전인 대광전. 2만여 평에 이르는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절의 주불전인 대광전(도유형문화재 제131호)과 팔상전(도유형문화재 제141호), 응진전, 종각, 우화루로 이루어진 바른 네모꼴 마당이 중심 영역입니다. 위로 관음전, 명부전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서래각, 승련암, 종무소들이 한 영역을 이루고 있고, 사천왕문을 지나 또 한 영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천왕문에서 수충루에 이르는 영역은 완전히 독립된 곳으로, 이곳에 표충사(祠)를 비롯하여 표충서원, 유물전시관, 무설전 등이 넓고 긴 네모꼴의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부분의 전각은 근래의 불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잦은 전란의 화를 입은 데다 1926년에도 큰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때 살아남은 건물은 응진전과 무안면에서 옮겨온 표충사(祠)뿐이었다 합니다.
표충사의 최초 창건시기는 신라로 거슬러 오릅니다. 신라 통일기에 원효 스님이 세웠다 하는데, 당시 절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현재 절 뒤편의 2만여 평에 이른다는 대나무숲은 그 뿌리가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죽림사는 이후 흥덕왕 대(826~836)에 황면 스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영정사(靈井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고려 말에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1천여 명의 대중을 이끌며 수행한 절이기도 합니다.
▲ 풍경 소리 대신 안개가 흐르는 산사. 범종은 자신의 몸을 비워 비로소 공적(空寂)의 꽃을 피운다.
어쨌든 오늘의 표충사는 사명 스님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현재 유물전시관에는 300여 가지쯤 되는 사명 스님의 유품이 전시돼 있는데, 그 중 선조가 고마움의 표시로 전한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土完)은 국보 제75호로 1177년(고려 명종 7)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현존하는 향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표충사는 자연적 배경도 대단히 빼어난 절입니다. 북동쪽에서 우람한 품으로 절을 안고 있는 재약산은 깊은 계곡과 폭포, 억새 평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특히 이 일대의 가지산, 운문산, 고헌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등 1,000m 이상의 7개 산을 엮어 ‘영남 알프스’로 부르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치려 해도 ‘영남 알프스’라는 이름은 영 마뜩치 않습니다. 일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글자 그대로 ‘사대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해도, 너무 자기비하적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땅을 너무 옹색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의 그랜드 캐년’ 같은 표현만큼이나 유치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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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층층폭포 아래 계곡. 빈 숲 사이로 알몸을 드러낸 계곡이 깊다.
재약산의 풍광만 해도 충분히 독자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금강폭포, 층층폭포, 흥룡폭포와 깊고 그윽한 계곡, 울창한 수림만으로도 이 산은 아름답습니다. 140~150만 평에 이른다는 사자평의 억새숲과 고원습지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억새숲이 일제 강점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일제가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베어내고 초지를 만든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화전민들이 밭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이 산나물을 얻기 위해 끝없이 불을 지른 결과가 오늘의 사자평입니다.
사자평이라는 이름도 사바나의 느낌 때문에 붙였을 법한데, 그리 오랜 연원을 가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사자평은 오리나무와 참나무 숲으로 상당히 천이가 진행돼 가고 있습니다. 본디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그런데 밀양시에서는 현재 잣나무로 인공 조림을 하고 있습니다. 수종 선택의 부적절성과 과잉 간섭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밀양참여시민연대 환경분과위원장인 이수완 선생의 안내로 사자평 일대를 둘러봅니다. 대단히 장쾌합니다. 특히 층층폭포 위에서 사자평으로 오르는 계곡은 산정(山頂) 호수만큼이나 특별한 풍광을 보여 줍니다. 사자평 입구의 고사리분교에서 우리네 60~70년대의 가난한 삶을 돌아보는 기분도 각별합니다. 66~96년까지 30년동안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초미니 학교의 교정에서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랫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섬처럼 고립된 화전민들의 아이들이었지만, 배움의 끈만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천박한 풍요와 하이에나 같은 탐욕에 비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 가난인가요. 우리는 너무 빨리 많을 걸 얻었고, 그것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옥류동천을 따라 표충사로 향합니다. 대단히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 흥룡폭포 전망대에서 땀을 식힙니다.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됩니다. 계곡을 건너자 편안한 오솔길이 표충사로 발길을 이끕니다. 아직도 마른 잎을 달고 있는 단풍나무숲입니다. 끝없이 걷고 싶은 고운 숲길입니다.
재약산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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