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찬구 교수의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_04

醉月 2011. 2. 26. 07:39
<16> 권력욕으로 무너진 장보고와 청해진
천혜 요새도 권력의 방패도, 탐욕 앞에선 모래성이었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6>   권력욕으로 무너진 장보고와 청해진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6> 권력욕으로 무너진 장보고와 청해진
  청해진. 완도를 비롯한 섬들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요새다. 그러나 그 요새도 탐욕으로 말미암아 무너졌다

부산은 남해의 동쪽 끝이다. 이 부산에서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완도까지는 대략 900리, 버스로도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다. 눈도장만 찍고 오더라도 하루가 꼬박 걸린다. 그러나 그 옛날 어린 일연 스님이 경산에서 광주까지 허위허위 걸어간 것에 견주면, 버스로 여섯 시간은 대단한 호사다. 그렇지만 여섯 시간을 내내 버스에만 있는 것이 마뜩찮아서 중간에서 갈아타는 방식을 택했다.

아침 일곱 시, 노포동에서 순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씨는 쾌청했다. 순천까지는 두 시간 삼십 분이 걸렸다. 순천에서 열 시 즈음에 완도로 들어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어지더니, 빗방울이 가끔씩 떨어졌다. 강진과 해남을 거친 버스는 정오가 지나서야 완도대교를 건넜다. 완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서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의 바다에는 크기나 생김새가 비슷한 섬들이 여럿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지. 이윽고 청해진이 눈에 들어왔다. 앞서 본 섬들과 그 꼴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문득 어찌하여 청해진을 여기에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해상 왕국의 근거지였던 청해진

오후 한 시가 넘어서야 완도 동남쪽에 있는 완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버스가 왔던 길을 거슬러서 청해진이 있는 곳으로 가려니, 시내버스는 드문드문 있다고 한다. 날씨도 그렇고 해서 택시를 탔다. 시원하게 내달리던 택시는 곧 아주 거대한 동상 곁을 지났다. 한눈에도 장보고(張保皐)임을 알 수 있었는데, 크기가 무려 34m나 되었다. 완도 이쪽에서 건너편 신지도를 향해 서 있었다.

동상을 지나니 이내 장보고기념관이 나왔고, 거기서 내렸다. 맞은편에 청해진이 있었다. 청해진으로는 다리가 놓여 있지만, 물이 빠져나간 때여서 갯벌을 밟고 건넜다. 외성문을 들어서니, 바로 앞 둔덕에 내성문이 보인다. 그 내성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고대(高臺)'라 쓰인 망루가 있다. 이 고대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저만치서 완도와 신지도(薪智島)를 이은 신지대교가 보인다. 신지대교는 남해에서 청해진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걸쳐 있다.

청해진에 올라서 둘러보니, 왜 여기에 진영을 두었는지 비로소 명확해졌다. 남쪽 바다에서 청해진으로 들어오려면 먼저 완도의 끝을 약간 에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완도와 신지도 사이를 지나야 하는데, 적선(敵船)이라면 완도와 신지도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기 십상이다. 또 청해진의 동쪽에서 들어올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쉽지 않다. 청해진 동북쪽에 있는 고금도(古今島)와 그 동남쪽의 조약도(助藥島)가 신지도를 마주하면서 좁은 해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진은 완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에서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였다. 이 난공불락의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하면서 거대한 해상 왕국을 일으켰다. 장보고의 선박이 아니면 일본의 사신들과 승려들은 당나라에 오갈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은 일본의 엔닌(圓仁, 794-864)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나서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청해진은 사라졌다. 그것은 장보고의 죽음에서 말미암으며, '삼국유사'는 그 이야기를 들려 준다.

● 권력과 손잡은 궁파

'삼국유사'에 <신무대왕염장궁파(神武大王閻長弓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의 '궁파'가 바로 장보고다. '삼국사기'에서는 '궁복(弓福)'이라고도 하였는데, 궁복이나 궁파로 불린 것은 성씨가 없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음을 의미한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후대에 '복'자에 '장'이라는 성씨를 붙여서 부른 것이리라.(백성들이 성씨를 쓰게 된 것은 고려 이후의 일이다.) 그런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던 궁파가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제왕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그는 비극적 영웅이었다.

<신무대왕염장궁파>는 신무대왕이 왕이 되기 전에 궁파에게, "내겐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있소. 그대가 그를 없애주면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라고 말한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신무대왕은 왕위를 찬탈하려고 궁파의 힘을 빌리려고 한 것인데, 그만큼 궁파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궁파는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갔고, 신무대왕을 즉위시켰다.

궁파의 이런 강력한 군사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신라 사람들이 해적들에게 붙잡혀 가서 노비로 팔리고 있으니 청해진을 두어서 이를 막자고 요청하였다. 이에 흥덕왕이 군사 1만 명을 주어서 청해(완도)에 진영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해진은 말 그대로 '진영(鎭營)'이다. 진영은 군영(軍營)이니, 1만이라는 군사들의 수를 감안하면 신라의 해군을 총괄하는 사령부나 마찬가지였다. 천혜의 요새에 청해진을 둔 까닭도 여기에 있는데, 이런 진영과 무력(武力)이 필요했던 것은 해적들을 상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력으로 해적들을 소탕하자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은 매우 원활해졌고, 그 해상 무역을 궁파의 청해진이 독점하면서 차츰차츰 재력(財力)도 아울러 갖출 수 있었다.

무력과 재력의 결합은 곧 강력한 세력을 의미한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쪽에서는 그 세력이 필요했으므로 궁파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무력과 재력을 아울러 갖추면서 신라를 넘어서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던 궁파가 권력으로부터 초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낱 촌부에서 출발하여 강력한 해상 왕국을 건설한 궁파로서는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궁파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기득권층은 언제나 신흥 세력을 경계하는 법이다. 더구나 궁파는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니. 조정의 신하들은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에 반대하였고, 왕은 그들을 따랐다. 이에 궁파는 왕을 원망하였고, 이윽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 권력에 무너진 궁파와 청해진

왕위를 찬탈하는 데 있어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궁파였기에 조정에서는 그가 난을 일으킬 경우에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군사력으로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난공불락의 청해진을 먼저 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설령 궁파가 내몰려서 청해진을 버리고 신라 땅을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가 구축한 거대한 해상 왕국은 여전할 것이니, 그 또한 후환을 남겨두는 일이 될 게 뻔하다. 신무대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때, 염장이라는 장수가 등장하였다. 염장은 궁파가 저지른 불충을 홀로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응할 군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로지 계략으로써 궁파를 제거해야 했다. 염장은 청해진으로 궁파를 찾아가서 그 자신도 왕에게 원한이 있다고 하면서 궁파를 만나려 하였다. 왕에 대한 원망이 깊었던 궁파는 염장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이내 술자리를 마련하여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잔을 주고받다가 염장은 궁파의 칼을 빼어서 궁파를 베어 죽였다. 이에 궁파의 군사들은 놀라서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올라갔다. 어처구니없게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궁파의 일생만 끝난 것이 아니라 청해진도 무너졌다. 해상 왕국은 덧없이 사라졌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는 문성왕(文聖王) 7년(845)에 문성왕이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고, 8년(846)에 궁복이 난을 일으키자 염장이 궁복을 죽였으며,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들이 모두 문성왕 때 일어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신무대왕염장궁파>에서는 이 모두 신무대왕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궁파의 죽음은 더욱더 비극적이다. 자신이 세운 왕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 권력을 탐하지 말지어다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에서 김부식은 아주 긴 논평을 실었다. 특히 당나라 때의 빼어난 시인 두목(杜牧)과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한 송기(宋祁) 등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는 장보고를 높이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에 대한 논평으로는 이례적이다. 더구나 김부식은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귀족이자 유학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신무대왕염장궁파>에서는 궁파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민중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였고, 일연 스님은 왜 이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실었을까? 민중들은 궁파를 배신한 영웅으로 여겼다. 궁파가 청해진을 건설한 것은 신라의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무력과 재력을 갖추고 세력이 커지면서 초심을 잃었고, 마침내 권력과 결탁하여 그 자신의 영달을 꾀하다가 도리어 권력에 배신당하였다. 이는 궁파가 민중을 배신한 것이었고, 그래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되었다.

일연 스님은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려 하였다.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라는 탐욕은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다. 무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궁파의 탐욕도 덩달아 커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권력의 꾐에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일연은 이 모든 것이 궁파 스스로 지은 업이며 마땅히 받아야 할 과보였음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아, 탐욕이 바로 마구니였구나!


 

<17> 망국의 여왕 그리고 바다의 영웅 거타지
곡도에 숨겨진 무너지는 제국과 떠오르는 제국의 전설

[삼국유사 속 바다 이야기] <17> 망국의 여왕 그리고 바다의 영웅 거타지
[삼국유사 속 바다 이야기] <17> 망국의 여왕 그리고 바다의 영웅 거타지
  전남 진도 서남쪽 세방낙조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곡도. 곡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가고 오는 배들이 앞뒤로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곡도는 해상권의 상징이었다. '삼국유사'에서 '거타지'는 곡도를 구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완도의 청해진을 둘러본 김에 곧바로 진도로 향했다. 완도에서 진도로 곧장 가는 버스는 없고, 해남에서 갈아타게 되어 있다. 오후 세 시에 완도에서 해남 가는 버스를 탔고, 네 시에 해남에서 진도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가 2005년에 개통된 제2 진도대교를 건너는 순간, 역동적인 모습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진도대교는 "소리 내어 우는 다의 길목"을 뜻하는 울돌목 위에 걸려 있는데, 이 울돌목의 한자어가 명량(鳴梁)이다. 아, 명량대첩!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가로막혀 남해에서 서해로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모함으로 이순신이 파직당하면서 조선은 대부분의 전선(戰船)을 잃고 해상권도 잃었다.

이윽고 복권된 이순신은 고작 열세 척의 배로 백 서른세 척의 일본 수군을 울돌목으로 끌어들여 전멸시켰다. 1597년 음력 9월 16일의 해전이었다. 이로써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의지는 완전히 꺾였고, 전쟁의 대세도 완전히 바뀌었다.

진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다섯 시가 넘었다. 비를 쏟아 부을 것 같은 먹구름에 날도 일찍 저물고 있었다. 진도 서남쪽의 세방낙조전망대가 목적지다. 그런데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 곡도를 구하여 영웅이 된 거타지

운 좋게도 택시기사는 진도의 문화해설가였다. 그 덕분에 전망대로 가는 내내 진도 곳곳의 전설과 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30여 분만에 전망대에 이르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의 바다는 쪽빛의 이부자리를 깔아 놓은 듯했다. 그 위에 무늬처럼 떠 있는 곡도(鵠島). 이 섬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

택시기사에게 이 곡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전혀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진성여대왕거타지(眞聖女大王居타知)>에 나온다.

신라의 제51대 진성여왕(?~897) 때 일이다. 아찬 양패(良貝)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는데, 후백제의 군사들이 서해의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이 조정에 전해졌다. 이 진도가 진도(珍島)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궁수(弓手) 쉰 명을 뽑아서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배가 곡도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었고, 배는 열흘 이상이나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게 되었다. 걱정이 된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고 제사를 지냈더니,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섬에 남겨두면 순풍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궁수들의 이름을 적은 패쪽들을 물에 던져서 가라앉게 하여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居타知)'라 쓰인 패쪽이 물에 가라앉았다. 거타지가 섬에 남자 순풍이 일었다. 홀로 남은 거타지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도움을 청하는데, 노인은 자신을 서쪽 바다의 신이라 하였다. 용왕이라는 말이다.

용왕이라면 바다를 주관하는 왕인데, 바다 위의 섬에서 무슨 곤란을 겪고 있을까?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陀羅尼)를 외우고서는 노인과 그 자식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그들의 간과 창자를 빼 먹는 중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용왕이라도 가사를 걸친 중, 게다가 다라니를 외우는 중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연 해가 뜨자, 중이 나타났다. 중은 다라니를 외우면서 노인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화살을 쏘아 중을 맞혔다. 그 즉시 중은 늙은 여우가 되어 죽었는데, 곡도 또는 곡섬에 '과녁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곡(鵠)'이 붙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노인은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 속에 넣어주면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또 두 마리 용을 시켜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의 배를 따라가게 하였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거타지는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는 함께 살았다고 한다.



● 다라니로 망국을 경고한 왕거인

거타지 이야기는 곤란에 처한 왕을 도와서 그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그 보답으로 공주와 혼인을 한다고 하는 영웅 설화와 상통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앞에 역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놓이면서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뒤에 유모인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 남편인 위홍(魏弘) 잡간 등 총애하는 신하들이 전횡을 일삼았다. 이들 권신(權臣)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치는 문란해지고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도적들 가운데는 진성여왕 6년(892)에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에 웅거한 견훤(甄萱), 진성여왕 7년(893)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에서 일어난 궁예(弓裔)도 있었다. 바야흐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다라니의 은밀한 말로 글을 지어서 길에 던졌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 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라는 글이었다.

다라니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를 번역하지 않고 소리 그대로 외우는 것인데, 이는 근본 원리나 이치를 언어로 다 드러낼 수 없어서다. 그리하여 진실한 언어인 진언(眞言)이면서 비밀한 뜻을 담고 있는 밀어(密語)로 여겨지는데, 여기서는 예언이나 조짐을 나타내는 언어로 쓰였다.

다라니의 뜻은 "여왕과 위홍 잡간, 서너 명의 권신, 부호부인 등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왕과 권신들은 당연히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누구의 소행인지 알려고 했다. 이윽고 왕거인(王居仁)이 그랬다고 여겨서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은 어찌하여 징조를 내리지 않는가?"라며 하늘에 호소하였고, 이에 하늘은 벼락을 쳐서 그를 놓아주었다.

왕거인의 이름은 '왕은 어짊에 산다'는 뜻이다. 그런 왕거인을 옥에 가두었으니, 왕은 어짊에 살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또 하늘이 벼락을 쳐서 왕거인을 놓아주었다는 데서도 천심(天心)이 왕에게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심은 민심(民心)이다. 천심이 떠났으니, 이는 곧 민심이 떠났음을 의미한다.



● 거타지와 곡도의 상징적 의미

왕에게서 떠난 민심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 민심의 향방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거타지 이야기다. 거타지 이야기는 그 자체로 민중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진성여왕과 그 권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렇다. 거타지 이야기의 곡도는 신라이고, 풍랑은 도적들이고, 무능한 노인(용왕)은 진성여왕이고, 늙은 여우인 중은 전횡을 일삼는 권신들이고, 다라니는 권력이고, 간을 빼앗기고 죽은 자식들은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이다.

또 사신은 신라의 외교력이고 궁수들은 군사력인데, 곡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이는 곧 그 외교력과 군사력이 무기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거타지라는 영웅이 필요했다. 거타지는 궁수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섬에 홀로 남아서 용을 구하고 곡도를 지키면서 영웅으로 거듭났다.

두 마리 용이 그를 떠받들어 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그가 진정한 영웅이었음을 서해가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해를 차지한 이가 새로운 영웅이 되어 새 세상을 열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거타지는 민중이 갈망한 영웅을 표상한다. 그런데 왜 거타지 이야기는 곡도를 배경으로 했을까? 곡도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바닷길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가장 오래 되고 안전한 뱃길은 남해의 해안을 따라 가다가 진도를 돌아서 서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에 덕적도 앞에서 서해를 건너는 길이다. 바로 이 뱃길로 다니는 배는 반드시 곡도의 앞이나 뒤를 거쳐서 남해나 서해로 들어간다. 한마디로 곡도는 해상권을 상징한다.

용왕이 곡도에 살고 있었다고 한 데서도 곡도가 얼마나 중요한 섬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곡도가 권신들을 상징하는 중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섬이 된 것은 곧 해상력을 상실하여 쇠망으로 치닫고 있던 신라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 다툼에 눈이 멀어 멀리 내다보지 못한 신라의 왕과 조정이 초래한 재앙이었다. 문성왕(文聖王) 13년(851)에 청해진을 없애지 않았던가.



● 왕건이라는 영웅을 예고한 이야기

<진성여대왕거타지>는 왕거인을 통해 후삼국 시대(892~936)가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고, 또 거타지를 통해 민중 영웅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왕건(王建)이 떠오른다. 왕건은 왕거인과 같은 왕씨다. 또 그가 궁예 밑에서 결정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서해와 남해를 장악하여 후백제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고 또 압박을 가하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첫째와 둘째 부인인 신혜왕후(神惠王后)와 장화왕후(莊和王后)는 서해의 강력한 해상세력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는 '고려세계(高麗世系)'로 시작된다. 거기에 왕건의 조상인 작제건(作帝建)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는데, 상선을 타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서해의 용왕이라는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요청으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꼴을 한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고, 용왕의 딸을 얻어서 장가를 들었다.

이는 오롯이 거타지 이야기다. 또 작제건은 그 이름이 '황제를 낳아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 아닌가.

작제건 이야기와 거타지 이야기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민중의 이야기가 단순히 흥밋거리로 꾸며낸 것이 아니며, 이야기에도 역사가 들어 있고 또 이야기 자체가 역사일 수 있다는 사실이리라.

 

<18> 동해 물고기들의 성지가 된 만어산
깨어있는 중생만이 돌무덤 속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8> 동해 물고기들의 성지가 된 만어산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8> 동해 물고기들의 성지가 된 만어산
  만어사 앞 너덜겅의 돌들. 동해의 물고기들과 용이 저 멀리 고해(苦海)에서 올라와 해탈한 것이리라.

부산의 서쪽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있다. 낙동강은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큰 강으로, 영남의 대부분이 이 강을 끼고 있다. 그런데 왜 낙동강이라 했는가? 뜻을 풀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은 '가락(駕洛)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다. 가락은 곧 가야국이니, 고대에 강성했던 가락국이 이 강을 동쪽으로 두고 있었기에 붙여진 줄을 알겠다.

그 낙동강을 하구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김해의 신어산(神魚山)을 끼고 서북쪽으로 꺾인다. 그리고 이내 삼랑진(三浪津)이다. 삼랑진을 지나서는 서쪽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본류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밀양강이 만나 세 줄기를 형성한다. 이 세 갈래의 물결로 말미암아 삼랑진이라 불렸다. 삼랑진의 북쪽에 산이 하나 솟아 있으니, 이를 만어산(萬魚山)이라 한다.

대개는 삼랑진읍의 우곡리로 해서 만어산으로 오르는데,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뒤쪽으로 올라가도 된다. 곧장 뒷산으로 올라가서 산등성이를 따라 동북쪽으로 계속 가면 두어 시간 만에 '만어산'이라 표시된 지점에 이른다. 만어산에 이르기 직전에 저 아래 만어사(萬魚寺)가 보인다. 만어산에 만어사라. 어찌하여 산에 '온갖 물고기'가 있을까?



● 독룡과 나찰녀가 만나 사귄 만어산

'삼국유사'에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은 '어산에 어린 부처의 그림자'를 뜻한다. 어산은 만어산이다. 이 만어산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자가 어린다니, 참으로 흥미롭다. 만어산은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자성산은 '자비가 이루어지는 산'을 뜻하니,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야사산의 '아야사'는 '마야사'가 옳으며, 이는 풀이하면 '어(魚)'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아야사산은 '마야사산'이 되니, 그 소리는 '만어산'에 가깝고 뜻도 '어산'이 된다. 만어산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에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다스릴 때였다. 이 나라 안에는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독룡은 만어산에 있던 다섯 나찰녀(羅刹女)와 사귀었다. 그래서 때때로 천둥을 동반한 비가 쏟아져 4년 동안 오곡이 여물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막으려 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옥지는 지금의 밀양호로 여겨진다. 낙동강 본류에서 밀양강을 따라 거슬러 가면 만나게 되는데, 2001년에 댐이 완공되면서 밀양댐으로도 불리고 있다. <어산불영>에는 고려 때의 승려 보림(寶林)이 쓴 글이 실려 있다. 거기에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인데, 이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양주는 지금의 양산이다. 따라서 밀양시 양산시 창녕군, 세 곳에 물을 공급하는 밀양호가 밀양과 양주 경계의 옥지에 해당한다.

이 옥지에 살던 독룡은 본래부터 '해독을 끼치는 용'이 아니었다. 가락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고대부터 받들었던 용신(龍神)으로, 토착신이었다. 중세에 불교라는 보편종교가 들어오면서 서서히 배척되면서 독룡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악귀(惡鬼)인 나찰녀를 만나 사귀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녀는 본래 바다에서 사는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만어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독룡과 나찰녀들의 사귐은 곧 백성들을 괴롭히는 횡포가 되었다. 이 횡포를 막으려고 왕은 주술을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독룡과 나찰녀들은 중세가 되면서 악신으로 내몰렸으므로 고대의 방식인 주술로써는 퇴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청하여 설법으로써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 동해 물고기들의 성지가 된 만어산

부처는 설법을 하였고, 그제야 나찰녀들은 오계(五戒)를 받았다. 오계는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신자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계(禁戒)로,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 등이다. 오계를 받은 것은 불교에 귀의했다는 뜻이다. 독룡과 나찰녀들은 불교에 귀의하면서 악신이 아닌 수호신이 되었고, 그로부터는 재앙이 없어졌다.

독룡과 나찰녀는 모두 강이나 바다와 연관이 있는 신격이다. 그런 신격들이 불교에 귀의했으니, 그들을 따르던 강이나 바다의 생물들도 따라서 귀의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어산불영>에서는 '동해의 고기들과 용이 마침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종과 경쇠의 소리가 난다'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그런 일을 두고 한 말이다.

만어산의 만어사 앞 골짜기에는 돌들이 가득한데,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려는 연어들처럼 산꼭대기를 향하고 있다. 만어사에서 멀리 바라보면, 운해(雲海) 사이로 낙동강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물고기들과 용은 나찰녀처럼 만어산에 오르기 전에 낙동강을 따라 올라왔다.

만어산을 내려가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하구로 가면, 강물은 부산 다대포(多大浦) 앞에서 바다와 만난다. 다대포는 동해와 남해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동해의 고기들과 용은 바로 이곳을 거쳐서 만어산에 이르렀다.

만어는 곧 '온갖 물고기들'을 뜻하니, 이는 그대로 만물(萬物)과 통한다. 여기서 만물은 온갖 유정물(有情物)이니, 곧 중생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려고 고해(苦海)에서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들과 용은 곧 백성과 왕을 상징한다. 종과 경쇠가 되어 소리를 냈다는 것은 열반에 들었다는 뜻이다. 만어산에서 물고기들과 용이 번뇌를 떨어내고 해탈을 하였으니, 만어산은 바로 피안(彼岸)이다. 이로써 나찰녀가 살던 만어산은 불교의 영산(靈山)이요 성지가 되었다.


● 만어산에 어린 부처의 그림자

<어산불영>에는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 나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부처가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의 아나사산(阿那斯山)에 이르렀더니, 다섯 나찰이 여룡(女龍)으로 변하여 독룡과 사귀며 서로 우박을 내리고 난폭한 행동을 하였고, 이에 기근과 질병이 4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의 요청으로 부처는 그 문제를 해결하였고, 용왕과 나찰녀는 부처에게 예를 드리면서 계율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만어산의 이야기와 거의 같다.

그런데 '관불삼매경'에는 더욱더 흥미로운 대목이 이어지고 있다. 계율과 가르침을 받은 용왕은 자신의 근기가 얕아서 최상의 오묘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처에게 늘 그곳에 머물러 주시기를 청했다. 그러자 부처는 용왕에게 나찰이 있던 석굴을 시주하면 거기에 천오백 년 동안 머물겠다고 말하였다. 부처는 몸을 솟구쳐 석굴의 돌 속으로 들어갔고, 이에 돌은 맑은 거울과 같아졌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밖으로 빛을 나타냈는데, 중생들이 볼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부처가 돌 속으로 들어간 것은 곧 열반에 든 일을 상징한다. 돌은 부처가 깃들면서 맑은 거울이 되었고, 이 맑은 거울은 중생의 불성을 비추는 거울로서 곧 불법을 뜻한다. 돌 속에서 부처가 밖으로 빛을 내는 것은 곧 설법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부처가 열반에 든 뒤에도 그 가르침은 남아서 법이 되어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부처의 설법은 아무나 들을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가르침, 지고한 이치는 깨닫겠다는 집착조차 버릴 때에만 비로소 체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로써 '만어산에 어린 부처의 그림자'가 뜻하는 바가 명확해진다. 역사적 존재로서 부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만어산에는 진신(眞身)이 없다. 다만 부처가 남긴 가르침, 그 법이 그림자처럼 남아서,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들릴 듯 들리지 않고 있다. 이제 보거나 듣는 것은 오로지 중생에게 달려 있다.


● 희미한 옛 불국토사상의 그림자

'삼국유사'에는 <아도기라(阿道基羅)>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에는 법흥왕(法興王)이 불교를 공인하기 전에 신라에 이미 묵호자(墨胡子)나 아도(阿道)와 같이 서역이나 고구려에서 온 승려가 들어와서 불교를 전했다고 하는 일이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어산불영>은 그와 달리 가락국을 통해서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렇게 볼 만한 실마리가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야기에서 만어산에 오른 중생은 남해가 아닌 동해의 물고기들과 용이었다. 이는 신라와 관련된다. 남해는 불교를 먼저 받아들였던 백제와 가락국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남해의 중생은 새삼스럽게 불교에 귀의해야 할 일이 없었던 반면에, 동해를 끼고 있던 신라는 아직 불교를 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였다.

또 만어산의 기이한 일은 천축의 야건가라국에서 있었던 일과 상통한다. 경전 속의 일이 만어산에서 재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가락국이 천축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어쩌면 똑같다고 하는 사유를 드러낸 것인데, 그 사유는 불국토사상과 비슷하다. 오늘날에는 불국토사상이 신라인들의 불교에 대한 사유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 <어산불영>에서는 가락국이 그 불국토사상의 원천처럼 묘사되고 있다. 신라가 가야를 복속하면서 이 사상도 가져갔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가야의 후손들이 옛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일까?


 

<19> 법의 바다에서 나루가 된 자장율사
깨닫기 위해 평생을 산 고승도 깨닫지 못하고 떠났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애기] <19> 법의 바다에서 나루가 된 자장율사
[삼국유사 속 바다이애기] <19> 법의 바다에서 나루가 된 자장율사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 기슭에 있는 정암사의 수마노탑. 서해 용왕이 준 돌로 세웠다고 전하는 이 탑은 떠나간 문수보살을 뒤쫓는 자장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낙동강은 1천300리 물길인데,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에서 시작된다. 함백산의 황지(黃池)가 발원지다. 이 함백산 기슭에 정암사(淨巖寺)가 있는데, 통도사를 세운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절이다. 부산에서 정암사로 가려면, 도로를 따라 가더라도 낙동강 물길만큼의 거리를 가야 한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즈음, 고속도로에 차를 올려 노포IC를 지났다. 먼저 경북 영주 부석사로 길을 잡았다. 부석사는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데, 봉황산은 태백산 줄기의 남쪽에 있으므로 함백산에 가려면 부석사를 지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오후 한 시에 부석사 입구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한숨을 돌린 뒤, 부석사 뒤쪽으로 난 소로를 넘어서 영월 쪽으로 가다가 함백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함백산 자락의 정암사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오후 네 시가 다 되었다. 부산에서 승용차로도 한나절이 걸렸다. 그런데 양산의 통도사에서 자장율사는 어찌하여 이 먼 곳에까지 와서 절을 세웠을까? 그 내력은 '삼국유사'의 <자장정율(慈藏定律)>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통도사를 세우고 계율을 정하다

자장율사는 김씨로, 신라 진골 출신이다. 그 부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관음보살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라고 빌어서 얻은 아들이었다. 법해는 바다처럼 깊고 넓은 불법을 비유한 말이다. 진량은 나루와 다리를 뜻하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대덕이나 고승을 상징한다. 이윽고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에 자장도 태어났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 성품이었던 자장은 홀로 깊숙하고 험준한 곳에서 수행을 하였다. 조정에서 자장을 불러 재상에 앉히려고 하였으나, 자장은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왕의 엄포에도 자장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하루 계율을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율을 어기면서 백 년을 살지는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결국 왕은 자장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출가를 했다고 해서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만 비로소 승려로서 자격과 위의를 갖추게 된다. 자장에게는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는 자장이 고승이 될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신라의 불교가 수계의 의식을 갖추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야기에서도 오계를 받은 자장이 속세로 내려오니 속인들이 다투어 와서 계율을 받았다고 하였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계법을 받음으로써 오롯한 수행자가 된다. 물론 몸과 마음으로 지극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지만, 당시는 불교가 전래된 초기였으므로 계법을 받는 일이 간과될 수 없었다. 그러했으므로 자장이 계법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계법을 갖추는 일이 긴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자장은 중국으로 건너갈 뜻을 품었고, 636년에 칙명을 받아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산서성(山西省)의 청량산(淸凉山)으로 갔다. 청량산은 오대산(五臺山)으로도 불리는데, 문수보살의 영험이 있는 곳이다. 자장은 그곳에서 명상하다가 꿈에 어떤 중으로부터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이는 문수보살이 준 기별(記別)이었다. 기별은 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에 성불하리라고 예언한 것이다. 이는 자장의 수행이 깊었음을 상징한다.

643년에 자장은 신라로 돌아왔고, 분황사에 머물면서 대승(大乘)과 계법에 대해 널리 가르쳤다. 이윽고 대국통(大國統)이 되어서 사찰들과 승려들이 일정한 법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힘썼고, 이로써 신라의 불법은 위의를 갖추고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불법이 흥성하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에 자장은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았다.



● 수다사에서 선정에 들다

통도사는 "모든 이들을 두루 득도(得度)하게 해주는 절"이다. 승려가 되어 수행하려는 이들에게 계법을 주기 위해서 계단을 쌓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계법을 받았다고 해서 수행이 절로 되고 깨달음을 쉽사리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득도는 "수행의 길을 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계법을 주는 승려라고 해서 반드시 깨달은 이는 아니다"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수계 의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신라에 율장(律藏)을 들여와서 널리 가르치고 편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왕실과 귀족들, 승려들과 속인들의 존숭을 받았고, 그 덕분에 대국통이 되고 또 율사(律師)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장의 수행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전국의 사찰들과 승려들을 잡도리하고, 출가하려는 바람을 세운 이들에게 구족계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장의 득도(得道)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장정율>에서는 자장이 만년에 서울을 떠나 명주(溟州) 곧 강릉으로 갔다고 이야기한다. 서울(경주)을 떠났다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통도사를 떠난 것이다. 늘그막에라도 사람들과 일들로 번다한 곳을 떠나 조용히 수행에 전념하려던 것이리라. 자장은 동해안을 따라서 강릉의 남쪽 정동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동해를 바라보면서 내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장은 선친이 관음보살에게 약속한 "법해에서 나루가 되고 다리가 되는 일"에 대해 떠올렸으리라. 자장은 이제 법해의 나루나 다리로서 구실을 다하고 그 자신이 법해를 품은 부처가 되고자 하여 다시금 길을 나섰다. 그는 다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간 것이다.

정동진역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괘방산이 보인다. 자장은 그 산의 중턱에 절을 세웠다. 동해의 물을 안을 듯이 서 있어서 '수다사(水多寺)'라 했다. 오늘날에는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다사가 신라 말에 소실되자 고려 때 다시 지으면서 등명사(燈明寺)라 개칭하였고, 조선시대에 폐사가 된 것을 1956년에 중창하면서 등명낙가사라고 하였다. '낙가사'는 관음보살이 계신 '보타낙가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등명낙가사는 고통의 바다에서 중생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등대처럼 느껴진다.

이 수다사에서 자장은 꿈을 꾸었다. 오대산에서 보았던 중이 나타나서는 바닷가의 솔밭으로 나오라 하였고, 깨어나서 나갔더니 문수보살이 와 있었다.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꿈은 곧 선정에 든 것을 가리킨다. 오대산에서도 그렇게 문수보살을 만났었다.



● 정암사에서 지혜를 얻으려 하다

문수보살이 말한 대로 자장은 동해를 뒤로 하고 태백산으로 가서 갈반지를 찾았다.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갈반지라 여겨서 절을 세웠다. 지금 정암사의 '적멸궁(寂滅宮)'이 바로 그 절이었다. 자장은 여기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죽은 강아지를 담은 삼태기를 메고 온 늙은 거사가 있었다. 늙은 거사는 자장을 보려고 왔는데, 시자는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내쫓으려 하였다. 거사는 자신이 왔다는 말이라도 자장에게 전하라 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알리자, 자장 또한 그를 미친 사람이라 여겼다. 이에 거사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라고 탄식하면서 가버렸다. 그 말을 들은 자장은 비로소 그가 바로 문수보살의 현신임을 알고 쫓아나갔다. 거사는 이미 멀리 가버렸고, 자장은 따라가다가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문수보살은 곧 석가모니불의 보처(補處)로서, 지혜를 맡은 보살이다. 따라서 찾아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곧 지혜를 온전하게 터득하지 못했음을, 즉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을 얻는 데 실패한 것은 아상 때문이었다. 이 아상은 자장이 이미 문수보살을 만난 것에 집착한 데서 생긴 것으로, 스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는 열 길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十丈)"는 말이 있다. 계율에 밝은 자장은 선정에도 들 만큼 수행이 깊었으나, 그만큼 깊고 큰 장애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장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상이었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반야지혜를 놓쳐버렸다. 이는 아무리 계율을 잘 알고 지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또 선정에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반야지혜를 얻은 것은 아님을 일깨워준다.



● 신라 불교의 토대를 마련하다

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을 말한다.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즉 계율·선정·지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수행의 단계이면서 서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다. 계율을 지킴으로써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면 선정에 든다. 선정에 들어야 비로소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자장정율>은 삼학에서 계율이 기본이 됨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지혜가 궁극이 된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또 <자장정율>은 자장의 일생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신라 불교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도 암시하고 있다. 자장이 계율을 정한 일은 신라 불교의 토대를 다진 일이다. 이제는 지혜로써 신라 불교를 완성하는 과제가 남았다. 실제로 탁월한 고승들이 잇달아 나와서 신라 불교를 더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게 했는데, '삼국유사'는 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있다.


 

<20> 동해 수호신이 된 관음보살과 두 고승
각자 길 가던 원효와 의상, 그 길 모두 보살이 서 있었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0> 동해 수호신이 된 관음보살과 두 고승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0> 동해 수호신이 된 관음보살과 두 고승
  낙산사 의상대는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이 깃들어 있다는 해변의 굴 안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곳이다
강원도 함백산 자락의 정암사에서 자장율사의 자취를 더듬어본 뒤에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아리랑의 고장 정선을 지나서 평창의 진부면으로 들어선 차가 이윽고 이른 곳은 오대산 기슭의 월정사(月精寺)다. 월정사 또한 자장율사가 지은 절에서 비롯되었다. 절을 둘러보면서, 문득 불교의 계율·선정·지혜 삼학(三學)이 떠올랐다. 자장율사는 율법을 바로 세움으로써 신라 불교의 초석을 다졌다. 그렇다면 선정과 지혜라는 기둥은 누가 세웠을까?

월정사에서 오대산을 넘어 진고개를 지나서 양양군으로 갔다. 양양군으로 향하면서 내내 남대천을 끼고 달렸는데, 이 남대천은 양양 앞바다로 이어져 있다. 바다의 초입에 들어서는 남대천에는 낙산대교가 걸려 있고, 그 낙산대교를 지나 북쪽으로 곧장 가면 낙산사가 나온다.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미리 정해둔 숙소가 있는 속초로 향했다.

늦은 밤부터 비가 내렸는데, 아침에는 활짝 개었다. 낙산사를 둘러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리라. 속초 청호항을 바라보며 늦은 아침을 먹고서 이내 남쪽으로 향했다. 20여 분 만에 낙산사에 이르렀다. 아직 오전임에도 벌써 사람들이 붐빈다. 다들 관음보살을 보러 왔을까. 2005년 4월 5일, 큰 화재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음에도 이렇게 다시 번듯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평범한 불자들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성지다. 어떻게 해서 성지가 되었는지를 알려면, 두 고승,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의 자취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그 자취는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에 이야기로 남아 전한다.



● 관음보살의 성지, 낙산사

원효와 의상은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숭앙받는 고승들이었다.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기가 실렸을 정도다. 잠깐 '송고승전'의 <의상전(義湘傳)>을 보면, 두 고승이 당나라로 유학하려고 했던 일이 나온다.

둘은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로 들어가려고 서해 쪽으로 갔다. 당진이나 화성 쪽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도중에 큰비를 만나는 바람에 토굴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튿날 보니, 그곳에는 오래된 무덤의 해골이 있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으므로 길을 나서지 못하고 다시 그곳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그날 밤, 귀신이 나타나자 놀란 원효는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로지 의식이 만든 것이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나라로 건너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랑을 메고서 신라로 되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상은 유학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으므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이때가 661년이었다.

의상은 장안 근처의 종남산(終南山)에 있던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智儼)의 문하에 들어갔다. 지엄에게서 화엄철학을 두루 배운 의상은 668년에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670년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이 먼저 찾아간 곳은 동해안에 있는 어떤 해변이었다. 의상이 이 해변을 찾아간 데서 <낙산이대성>은 시작된다.

의상이 그 해변을 찾아간 것은 그곳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관음보살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낙산(洛山)'인데, 인도에 있는 '보타락가산(寶타洛伽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보타락가산은 인도 남단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산으로,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낙산 또한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 있고 관음보살도 살고 있으니, 잘못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 관음보살의 진신을 본 의상

그런데 의상은 왜 귀국하자마자 낙산으로 가서 관음보살을 만나려고 했는가? 그것은 의상이 중국에서 유학한 일과 관련이 있다. <낙산이대성>에서는 의상의 유학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는 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의상이 당나라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타락가산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온다. 천하의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니던 선재동자는 보타락가산에 이르렀고, 거기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 의상 또한 선지식을 찾아서 당나라에 갔고, 거기서 지엄을 만났다. 그리고 지엄에게서 화엄의 종지를 배워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민중은 의상을 선재동자의 현현으로 여겼다. 그래서 선재동자처럼 낙산으로 가서 관음보살을 만나려 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의상은 낙산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관음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서 이레 동안 재계(齋戒)를 하였다. 그러자 천룡팔부(天龍八部)라는 신장(神將)들이 나타나서 그를 해변의 굴 안으로 인도하였다. 의상은 굴 안에서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왔으나, 관음보살을 보지는 못하였다. 이는 의상의 수행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또 동해의 용이 나타나서 의상에게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쳤다고 한다. 여의보주를 받아서 나온 의상은 다시 이레 동안 재계하였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관음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해의 용은 본래 낙산 인근의 민중이 섬기던 신이었다. 이제 그 용은 천룡팔부처럼 호법신이 되어 관음보살을 시위(侍衛)하게 되었으니, 토착신이 불교의 신격으로 승진을 한 셈이다.

또 이야기에서는 관음보살이 의상에게 "앉아 있는 곳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지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 동해의 물이 부딪쳐 부서지고 있는 벼랑 위에 의상대(義湘臺)가 세워져 있는데, 의상이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서 재계하며 앉았던 곳이리라. 산꼭대기는 바로 낙산이고, 거기에 지은 불전이 지금의 낙산사다.

관음보살의 진신을 본 의상은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는데, 그 금당이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이다. 그래서 원통보전을 관음전으로도 부른다. 이렇게 창건된 낙산사는 원래 그곳에 있던 용 대신에 불법으로써 동해를 지키는 관음보살의 도량이 되었다.



● 관음보살의 화신을 만난 원효

의상이 낙산의 해변에서 관음보살을 만난 뒤, 원효가 뒤이어서 관음보살을 만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낙산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주문진과 양양군 사이에 있는 논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원효는 여인에게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였고, 여인은 "벼가 여물지 않았다"며 장난스럽게 대답하였다.

원효는 또 어떤 다리 밑에 이르렀고, 개짐을 빨고 있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였다. 여인은 빨래하던 그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는 자신이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가 원효에게 "제호(醍호) 스님은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고, 소나무 아래에는 신 한 짝이 있었다고 한다.

파랑새가 한 말의 뜻을 알지 못했던 원효는 낙산사에 갔다. 절의 관음보살상 밑에 신 한 짝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 여인이 바로 관음보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는 해변의 굴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풍랑이 크게 일어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다. 원효가 들어가지 못한 그 굴 위에 지금은 홍련암이 자리하고 있다.

원효가 만난 관음보살은 의상이 만난 관음보살과는 달리 평범한 여인들이었다. 이야기에서는 그 여인들 또한 진신이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화신(化身)이었다. 진신은 곧 법신(法身)으로, 부처의 참된 몸이다. 그 진신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화신이다. 여인들은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원효가 여인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화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원효 자신의 수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아차리고서도 해변의 굴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도 그런 모자람 때문이었다. 화신을 그런 모자람을 일깨우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다.



● 불국토의 상징, 낙산사와 관음보살

왜 의상에게는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났고, 원효에게는 진신이 아닌 화신이 나타났을까? 진신이든 화신이든 모두 상징이다. 결코 실상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민중은 이야기를 통해 이런 상징이 원효와 의상의 각기 다른 수행을 보여주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의상은 화엄종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의 지상사에서 화엄학의 대가로부터 그 종지를 직접 배우고 익혔다. 이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만난 것과 같다. 또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는데, 거대한 화엄철학의 세계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곧 법신이요 진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원효는 불교철학이 척박한 신라에서 일정한 스승도 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요체를 터득하였다. 그러면서도 화엄학에 관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화엄학의 고승으로도 숭앙받았다. 원효의 학문적 여정이나 수행 방식이 이러했으므로 진신보다 화신이 더 어울렸던 것이다.

동해의 해변에 낙산이 있고 거기에 관음보살의 진신과 화신이 나타나서 의상과 원효를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신라의 화엄철학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는 자장의 뒤를 이어서 두 고승이 신라를 진정한 불국토로 만드는 데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21> 벼랑 위 꽃을 얻은 수로부인
바다에서 마주친 것은 민중의 지혜였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1> 벼랑 위 꽃을 얻은 수로부인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1> 벼랑 위 꽃을 얻은 수로부인
  해가사터와 바다. 해룡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다시 돌아오게 했던 것은 민중의 노래다.
동해의 해안선은 미끈하다. 그 해안선을 따라 부산의 해운대에서 강릉까지 가노라면, 아득히 펼쳐진 새파란 바다가 도시의 혼탁함에 흐려진 눈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그런데 아무리 바다의 빛깔이 상쾌함을 준다고 해도 몇 시간을 내내 보다보면 질려서 애초의 운치가 시그러질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으니 왜 그럴까?

한없는 넓이와 깊이 속에 숱한 비밀들과 절경들을 숨겨 놓은 채 한가지 빛깔만 내보이는 듯한 바다에서 눈길을 반대편으로 돌리니, 아 바다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선을 따라 내내 이어지는 육지의 산과 들, 벼랑들. 이 물상들이 바다의 빛깔과 어우러져서 끊임없이 새로운 곡조를 풀어내고 있다. 바로 이 곡조, 바다와 육지의 이중주! 순간, 이 해안선을 따라 나들이를 했던 저 신라의 미인이 떠올랐다.

'삼국유사'의 숱한 설화들 속에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헬레나에 견줄 만한 매력적인 여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수로부인(水路夫人)'이다. 그 이름에서 이미 물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수로부인은 여전히 동해 바닷가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 벼랑 위의 꽃을 얻은 수로부인

신라 성덕왕(聖德王·702~737 재위) 때의 일이다. 왕의 명을 받아 강릉 태수로 부임하게 된 순정공(純貞公)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임지로 향했다. 그의 아내가 바로 수로부인이다. 때는 봄이었다. 부인을 대동한 행렬은 천천히 도성의 북문을 나섰고, 형산강 줄기를 만나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금의 포항 바닷가로 갔다.

행렬은 포항에서 북쪽으로 내내 바다를 보면서 나아갔다. 흔들리는 가마 위에서 수로부인은 오른쪽으로는 바다를, 왼쪽으로는 산과 들과 벼랑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한창 무르익은 봄빛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음미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다. 그러다 어느 바닷가에서, 바다를 굽어보며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깎아지른 벼랑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척촉화들을 보았다. 아, 그 아름다움이란!

척촉화는 철쭉꽃을 뜻하는데, 이름 그대로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꽃"이다. 붉은 빛의 철쭉꽃은 넘실거리는 바다 위 벼랑에서 더욱 붉게 타오르며 미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규방에서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수로부인은 그 철쭉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시종들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암소를 끌고서 행렬 곁을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들은 한 늙은이가 그 꽃을 꺾어 와서는 바쳤다. "짓붉은 바위 가에서/ 잡고 가던 암소 놓게 하셨으니/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절세미인에게 노래 부르며 꽃을 바치는 장면! 서양에서는 달빛 아래서 세레나데를 불렀는데, 신라에서는 한낮의 햇살 아래서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가를 불렀다. 연가의 주인공이 비록 시골의 늙은이지만,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그 풍류는 더욱 남다르다. 그런데 늙은이는 과연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시종들도 하지 못한 일을 대담하게 할 수 있었는가?

● 바닷속을 갔다 온 수로부인

수로부인이 정확하게 어디서 꽃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철쭉은 동해의 해안선 곳곳에서 피기 때문이다. 다만, 삼척에 이르기 전 어딘가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삼척항을 지나서 더 올라가면 증산해수욕장에 이른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 초입에 임해정(臨海亭)이 있고 그 앞에 '해가사의 터'를 알리는 석비가 서 있으며 저 만치에는 유명한 촛대바위가 보인다.

수로부인의 일행도 이 임해정에 이르렀다. 부인이 꽃을 받은 지 이틀 뒤였다. 일행은 거기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룡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순정공은 어쩔 줄 모르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런 계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방도를 일러주었다.

노인은 뭇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면서, 바닷속의 짐승이라도 뭇사람의 입을 두려워할 것이니 그 고장의 백성을 모아 언덕 위에서 노래 부르고 막대기로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순정공은 그 말대로 하였고, 그러자 과연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해가(海歌)'이며, 지금의 해가사터가 이 노래를 부른 곳이다.

해룡이 부인을 돌려주자 그제야 순정공은 안도하고서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에 대해 물었다. 부인은 칠보로 장식된 궁전에서 달고 향기로운 음식을 먹었다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도 기이한 향기가 났으며, 결코 세간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순정공을 비롯한 일행은 부인이 해룡으로부터 해를 입었으리라 여겼는데, 오히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수로부인은 무엇을 경험했을까? 별다른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저 수로부인이 최초로 바닷속 여행을 한 여인이라고 일컬어도 좋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한,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본래 평범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과 어우러지면서 비범해졌다. 요리사가 갖가지 재료들을 절묘하게 배합해서 오묘한 맛을 내는 것처럼 '삼국유사'도 갖가지 이야기들을 버무려서 또 다른 맛을 내는 기묘한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안에서는 일종의 변주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 이야기들은 상징의 물결을 일으킨다

먼저 꽃을 바친 늙은이와 순정공에게 꾀를 준 노인은 문제를 해결해 준 인물로서, 그 지방 백성의 어른이며 현자다. 이들은 관념보다는 경험을 통해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터득한 인물들이다. 늙은이가 대담하게 벼랑 위의 꽃을 꺾어서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을 잘 알았기 때문이며, 노인의 꾀로 말미암아 수로부인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노인이 백성의 힘이 갖는 의미를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해룡은 그 지방의 토착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가 견제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오히려 해룡이 지방관의 부인을 납치했고, 관리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때 노인이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노인은 백성의 힘을 얻으라고 했는데, 이는 곧 민심을 얻는 일이다. 민심을 얻은 자가 천하를 얻는데, 하물며 토착 세력을 억누르지 못하겠는가. 과연 백성의 힘에 기댐으로써 수로부인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상징이 숨어 있다. 바로 '바다'로 말미암은 것이다. 수로부인이 잡혀갔던 곳은 칠보로 장식된 궁전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바닷속의 절경을 상징한다. 부인이 먹은 음식은 바닷속에 무궁무진한 양식들이다. 이는 부인이 전혀 새로운 경험을 했으며, 바다의 양식들을 먹고서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부인은 재생한 셈이다.

수로부인의 재생은 바다가 가진 힘에 기인한다. 바다는 그 자체로 죽음과 삶이라는 이중성을 띤 공간이다. 그러나 그런 이중성을 대개는 알지 못한다. 오로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절실하게 느끼고 안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부들은 그 죽음의 공간으로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삶의 양식들을 건져 올리는 이들이니.

거대한 바다는 모든 분별과 차별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차별적 이해나 분별적 인식 따위는 바다에서는 한낱 물거품과 같다. 세상에서 견줄 이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깊은 산이나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려가곤 했다는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은 세속적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분별과 차별 위에서 인식되는 아름다움,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덧없이 사라질 아름다움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너머에 있다. 바다에서 돌아온 수로부인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얻었던 것이다.

● 인문주의의 바다, '삼국유사'

'삼국유사'가 집필된 때는 대략 1289년이다. 이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 아득히 멀리 있는 이탈리아에서 '신곡(神曲)'(1321)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단테(Dante, 1265~1321)에 의해서 탄생하였다. '신곡'은 유럽에서 인문주의라는 지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먼 훗날 르네상스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유사' 또한 그런 인문주의를 담고 있으나,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고 거의 근대에 이르기까지 버림을 받았다가 이제야 간신히 조명을 받고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재발견이며 고대의 재생이다. 고대가 중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 르네상스가 되었다. 마치 수로부인이 죽음을 경험하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근대 너머'를 이야기하는 오늘날에 과연 '삼국유사'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삼국유사'는 그 자체가 바다다. 무진장한 양식이 갈무리되어 이는 곳간이다. 다만 눈 밝은 이를 만나지 못해서 그 가치가 살아나지 못할 뿐이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쉬운 듯 어렵다. 문면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쉬우나, 이면의 의미를 알아채기는 어렵다. 이는 내가 가진 하찮은 관념이나 지식 따위로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민중의 소박한 경험, 그런 경험에서 얻은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문명에 찌든 우리는 쉽사리 그 경험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제 '삼국유사'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하면 '삼국유사'를 너머 진리의 바다에서 노닐 수 있지 않을까?

'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17  (0) 2011.02.28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끝  (0) 2011.02.27
선시(禪詩)감상_12  (0) 2011.02.26
윤제학_구룡산 안심사   (0) 2011.02.25
허명남의 도깨비를 찾아서   (0) 201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