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허명남의 도깨비를 찾아서

醉月 2011. 2. 25. 08:55

<1> 전래 스토리텔링 대표 주인공 `도깨비`

 
  참도깨비 이미지. 출처=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www.culturecontent.com)의 '한국의 도깨비' 콘텐츠 중.
저는 팔 년 동안 동화를 쓰고 있습니다. 판타지 동화에 흠뻑 빠져 재미와 감동을 고루 갖춘 판타지 동화를 쓰려고 끙끙대고 있지요. 판타지 동화는 현실세계와 비현실세계를 오가며 현실감 있게 써야 하는 건데, 비현실세계를 현실감 있게 창조해 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어린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꼭 필요한 문학 장르가 판타지 동화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언제였던가, 검은 커피를 한약 들이키듯 몇 잔 째 마시며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답니다. 화면 속에서 튀어나왔는지 천정에서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어떤 남정네가 제 코 앞에 나타났어요. 깜짝 놀라 커피잔을 떨어뜨리는 저에게 "야, 바보 동화 작가! 히힛"하고 탤런트 이덕화 목소리처럼 꺽꺽거리는 쉰 목소리로 저를 놀렸어요. 생김새는 어떠하냐고요? 그건 말 안 할래요. 우리들이랑 아주 비슷하거든요.

하지만 그 도깨비 웃는 모습이 너무나 천진해서 무서움은 사라지고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어요. "야, 넌 누구냐? 머저리 같이 생겨가지고는" 하며 눈을 부라렸어요.

"난 도깨비야! 판타지 동화를 쓰지 못해 끙끙거리지 말고 나를 등장시켜서 써봐. 바보야!" "뭐? 도깨비? 내가 왜 도깨비 이야기를 안 썼겠어. 몇 편 썼지만 사람들이 '도깨비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시시하게 생각해. 요즘 사람들은 도깨비를 믿지 않는단 말야."

저는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캐릭터가 나타나 잘 난 체 하는 게 가소로웠어요. 컴퓨터를 끄면 사라지려나 싶어 얼른 종료를 클릭했어요. 그래도 도깨비는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놀리는 겁니다.

"재미있게 못 쓰니 사람들이 안 좋아하지. 이 바보!"

저는 도도한 작가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는 도깨비 녀석이 밉살스러웠지만 '저 녀석이 무얼 알고 있을 거야. 옛이야기 속에서 늘 착한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었는데, 나도 착한 척해야 이야깃거리라도 가르쳐 줄 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네 이야기를 써 줄 테니 재미있는 이야기나 한 자락 해주고 가. 응!" 하고 애교를 떨었어요. 그제야 도깨비도 히죽이 웃으며 "책 속에서 기다릴 게. 책 속으로 날 찾아와" 하는 겁니다. "어떤 책이야?" 하고 묻는 순간 혀를 쏙 내밀고는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 때부터 옛 이야기책, 도깨비 관련 서적과 논문, 신화와 전설책 등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근래의 동화책까지 다 뒤지며 그 도깨비를 찾았답니다. 책갈피 속에서 '뿅'하고 나타날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 도깨비는 저를 만나주지 않았고, 관련 책들을 탐독하다 보니 겨우 그 도깨비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맞아! 우리의 도깨비 이야기가 살아있는 동화를 써서 사라져버린 도깨비를 살려내라는 말인 게야!'

예로부터 판타지동화는 우리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엮어졌습니다. 인터넷과 영상 문화가 발달한 요즘 부각되고 있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방식이 옛날부터 있었다는 거지요. 그렇게 전해오는 옛 이야기들은 입말이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고 사건 전개에 힘이 있어서 매우 재미있지요. 99%가 판타지 동화였고, 가장 큰 수혜자는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조상들의 과학적 영감이 새삼 놀랍습니다.

옛 이야기가 오늘날 스토리텔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린이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하여 장면을 스스로 그려낸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머릿속으로 그리는 이야기 장면이 더 훌륭한 영상일지도 모릅니다. 머릿속 화면은 배경과 음악과 빛깔이 무한대이니까요.

우리 조상들이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낸 판타지 동화 속 대표 주인공이 바로 도깨비였습니다. 그럼 제가 책속에서 만난 도깨비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편을 기다려 주실거죠?

<2> 민중의 친구
고난에 빠진 사람 어리석은 체하며 도와줘

 
  한국의 네오그라프사가 개발한 김서방 도깨비(왼쪽)와 일본의 오니.
우리 옛이야기 속 도깨비는 민중과 아주 친숙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패랭이 쓰고 장보러 가는 김서방에게는 패랭이 쓴 김서방 모습으로, 부모 잃고 혼자서 힘들게 살아가는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 모습으로, 외로운 과부에게는 정 많은 남정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도깨비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도 고작해야 돈 몇 푼 빌리는 일이나 메밀묵, 호박죽을 얻어먹는 정도이지요. 그런 걸 얻어가고는 고마워하며 금은보화를 마구 쏟아줍니다. 도깨비가 사람들과 얼마나 친구가 되고 싶으면 되로 받고 말로 갚겠습니까?

우리가 흔히들 기억하고 있거나 그림책에 나오는 머리에 뿔 달리고 삐죽삐죽한 침이 달린 방망이를 들고 있는 도깨비는 일본의 잔인하고 공포스런 귀신의 일종인 '오니'입니다. 일제 침략기 때 일본 교과서에 실린 '혹부리 영감'을 그대로 우리나라 국어교과서에 실은 것을, 해방 후에도 계속 사용해왔기 때문에 빚어진 왜곡이라고 중앙대 민속학 교수 김종대 님이 말합니다.

우리 참도깨비 캐릭터 머리에 솟아 있는 건 뿔이 아니고 옛사람들이 머리를 틀어 올린 상투입니다. 그러니까 도깨비는 그 시대 사람들과 두루뭉술하게 닮아있죠. 우리 도깨비방망이는 사람을 해칠 것 같은 삐죽삐죽 날카로운 침도 없습니다.

절에 있는 '귀면와'라는 기와에 도깨비 문양이 그려져 있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것도 도깨비가 아니라 귀신입니다. 나무등걸이나 오래된 부지깽이, 몽당빗자루에서 나타난다는 설은 나무를 숭상한 시대에 나타난 일부 생각이지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도깨비라고 부르는 것, 허주(虛主)·독각귀(獨脚鬼)·망량()·이매(魅)라고 하는 것들도 다 귀신 종류이지 도깨비는 아니랍니다. 우리 도깨비를 한자어로 기록하는 데서 비롯된 왜곡이라고 합니다. 서강대 명예교수 김열규 님은 도깨비를 이 땅의 흙에서 푸나무가 자라듯이 자연발생적으로 자라서 그 존재를 지켜온 순국산이고 순토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홀려서 골탕을 먹이는 존재는 도깨비가 아니라 귀신입니다. 생긴 모습이나 성격을 특징지울 수는 있지만 정형화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 민중의 소박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소산으로 태어났으므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도깨비를 너무나 어릿광대 같은 모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깨비는 우리 민중들의 간절함 바람에서 태어난 신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도깨비는 나쁜 사람을 징벌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무작정 사람을 도와주는 속없는 존재도 아니었지요. 착한 심성을 가졌으되 고난에 빠진, 간절한 바람이 있는 이에게만 슬쩍 나타나 받는 사람이 부담을 못 느끼도록 위장하느라 어리석은 체하며 도와주었습니다.

'도깨비'라는 어원은 '돗'과 '아비'가 함께 모여 만들어진 합성어라고 합니다. '돗'은 불이나 곡식의 씨앗을 말하는 종자를 뜻하고, 아비는 아버지를 뜻하는 성인 남자를 말한다고 합니다. 수많은 도깨비 이야기를 살펴보면 거의가 남성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옛날에는 남성들이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엮어 내던 그 많은 남성들이 지금은 어디에 숨어있는지 큰소리로 불러내 보고 싶네요. 요즘 신세대 작가 군단에 남성작가들이 사라져가는 현상과 도깨비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것과 연관을 지울 수 있다면 있겠지요. 세상을 남성중심사회로 몰아가자는 것은 아니고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너무 편리한 생활에 안주하여 모험과 판타지가 사라져가는 나약하고 삭막해져가는 마음들이 안타깝다는 뜻이랍니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또는 조용한 집안 구석진 자리에서 사람과 친구 되고 싶어 손을 내미는 도깨비가 있는지 둘레를 살펴보세요

 

<3> 도깨비는 힘이 세다
민중과 함께하며 삶의 지혜와 슬기 일깨워

 
  옛날 도깨비가 동네 아저씨와 씨름하는 모습. 사진은 '깨비깨비 참도깨비'(김종대 지음)에서 인용.
어린이들을 만나서 글쓰기나 책읽기 공부를 할 때 이야기부터 한 자리하고 시작합니다. 몇 십 개의 보석 같은 눈들이 반짝거리며 일제히 저를 바라봅니다. 어떤 어린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솔 듭니다. 저는 깨우지 않습니다. 이야기 들으며 자는 아이는 한 떨기 풀꽃처럼 예쁩니다. 꿈속에서 이야기를 잇달아 지어내는지 살풋 웃음을 띱니다. 옆에 있는 친구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짝꿍이 자는 줄도 모릅니다. 이 순간이 저도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옛 이야기이며 그 가운데서 도깨비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합니다. 첫째는 어린이들이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어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이 잘 반영된 판타지동화이기에 들은 후 마음을 정화시키고 삶의 희망을 가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으로 커 갈 것이라고 체험으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밤마다 들려주신 옛 이야기의 힘으로 지금까지 지난한 삶을 헤쳐 나왔으며 오늘의 삶을 굳건하게 살아가는 에너지가 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앞에 나타나도 결코 하기 싫어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너무 재미있어서 탈이라면 탈입니다. 자꾸만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 참느라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옛 민중들은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지어 내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도깨비 이야기가 최초로 책에 기록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비형랑'이야기 입니다. 진평대왕 때 신이한 출생인 '비형랑'은 밤마다 도깨비와 사귀어서 백성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냇가에 다리를 놓아줍니다. 그 후로도 민담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농촌 마을에 튼튼한 저수지를 만들어 주는 일, 어부들에게 고기를 몰아주는 일, 명당에 묏자리 잡아 주는 일을 합니다.

도깨비는 또한 씨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우리 민중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주인공이니 그 시대 민중들이 좋아하는 운동 경기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모처럼 시장이나 잔치집에서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씨름을 하자고 덤빕니다. 하지만 적당하게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어 놓고 슬쩍 져주고는 나무에 몽당빗자루나 절구공이를 대신 매달리게 하고 사라집니다. 지고도 끝까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이지요. 도깨비의 힘은 보이는 것, 즉 물리적 힘과 부를 가져다 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즐겁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슬며시 가르쳐 줍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민중들에게 한 줄기 삶의 힘이 되어 주었던 도깨비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유효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만큼 나약한 존재가 또 있을까요? 어린이들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분리 불안, 부모와 선생의 강압적인 교육,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 억압된 감정들이 가슴 속에 억눌려 있습니다. 그래서 도깨비처럼 확실하게 약한 사람 편을 들어주는 이야기에 환호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도 어릴 적에 판타지 세계를 경험해야 억압된 감정들이 분출되고 마음이 정화되어 올바르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했을 때는 사춘기에라도 꼭 그 세계를 경험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판타지 문학 책을 읽혀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 판타지를 갈망하여 엉뚱하게 마약 중독이나 사행성 게임 중독, 도박 등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밤부터 우리의 판타지동화 주인공 도깨비이야기로 자녀들이 행복의 길을 찾아서 떠나도록 도와주면 더불어 행복해지겠지요.

 

<4> 도깨비 방망이와 감투

 
도깨비이야기를 즐겨 듣는 아이들과 놀이를 했습니다.

"자, 오늘은 도깨비와 인터뷰 하는 날이에요."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합니다.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역할을 맡아서 놀이를 잘도 꾸밉니다.

아이: 도깨비 님, 그 보물방망이를 어디에서 구해왔지요?

도깨비: 헤헤헤. (머리를 긁적이면서) 사람들이 휴대폰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도깨비나라에도 방망이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요.

… …

아이: 도깨비감투 하나만 주세요.

도깨비: 뭐하게?

아이: 공부하기 싫을 때 도깨비감투 뒤집어쓰고 도망 다니며 실컷 놀고 싶어요. 또 우리 반에서 나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는데 몰래 두들겨 패주고 싶어요.



도깨비에 관심을 가진 이 시대 어린이의 무한한 상상력이지요. 옛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나 감투도 민중들의 이러한 상상력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앞에서 어린이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만 보더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지요. 어른들이라면 로또 기계에 장난을 쳐서 당첨되고 싶다, 무임승차로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등등 어른다운 상상력을 발휘하겠죠.

도깨비 방망이가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흔히들 우리 옛 이야기인줄 알고 있는 '혹부리영감'은 일본 민담이라고 2편에서 말씀드렸지요.

 
  아기도깨비 캐릭터. 이미지는 '한국의 도깨비'(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 (주)네오그라프 )에서 인용.
'도깨비방망이 얻기'의 대표적인 이야기는, 나무하러 갔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빈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효자가 도깨비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효자는 개암 주울 때 부모부터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웃 마을 욕심쟁이 나무꾼은 그 소문을 듣고 산속으로 들어가 개암을 주울 때부터 자기 욕심을 먼저 채웁니다. 그리하여 도깨비에게 혼쭐만 나게 되지요. 효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도깨비방망이로 욕심쟁이 나무꾼을 낫게 해주고 재물을 나누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도깨비감투 얻기'는 갓쟁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고달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갓쟁이 할아버지가 우연히 도깨비감투를 얻습니다. 그 감투를 쓰면 자기 몸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고, 못된 사람들에게 분풀이도 하고 재물을 훔쳐서 욕심을 채우다가 들켜 혼이 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도깨비방망이와 감투의 의미는 민중의 간절한 '소망'과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삶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보물' 입니다.

도깨비감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투명망토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도깨비가 서점이나 극장에서 해리포터 이야기에 열광하는 우리 청소년들을 보면 슬프고 약이 올라 눈물을 뚝뚝 흘릴 겁니다. 도깨비 이야기에도 해리포터와 맞먹는 재미있는 모티브들이 수두룩한데도 개발을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로운 도깨비는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희망을 품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방망이를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와라 뚝딱/은 나와라와라 뚝딱.

어린이들은 도깨비나라를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순수한 상상력을 펼치며 사노라면, 도깨비가 어느 날 갑자기 진기한 방망이와 감투를 선물해 주리라 믿습니다.
 

<5> 도깨비가 좋아하는 것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에 있는 도깨비공원.
어떤 가난한 노동자 아저씨가 있습니다. 얄팍한 지갑을 털어 귀여운 자식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갑니다. 비가 내려서 행인이 뜸한 지하도를 힘없이 털레털레 걸어 할인마트로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칩니다. 돌아보니 생긴 모습이 여느 사람과 별다른 데가 없고 얼굴은 아주 후덕해 보여요. 그러나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합니다. 곧이어 "저어, 선생. 돈 있으면 돼지고기 서너 근 좀 사다주시오" 합니다.

이럴 경우에 아저씨는 뭐라고 할까요? 요즘 세상에 이런 몰염치한 사람도 있나 싶어서 모른 척 하고 갈 길을 가거나, 거절할 말을 찾느라고 망설일 수도 있겠지요.

판단이 잘 안 되시면 도깨비이야기 한 자리 들어 보실래요.


옛날 어느 마을에 매우 가난하여 남의 농사를 도우며 살아가는 김 서방이 있었어요. 어느 날 읍내 장에 볼 일이 있어서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어떤 패랭이 쓴 인상 좋은 사람이 고기를 사 달라고 부탁했어요. 김 서방은 고기를 사다 주었어요. 그 다음에는 메밀묵을 좋아한다면서 좀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친구가 되자고 해서 그러마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는 김 서방에게 돈을 한 보따리 주었고 김 서방은 그 친구가 좋아하는 메밀묵을 해다 주었어요. 그런 일이 반복되어 김 서방은 부자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자 그 친구가 싫증났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말해보자고 했어요.

친구는 말머리와 말피가 제일 무섭다고 몸서리치며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김 서방은 친구가 도깨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김 서방은 돈이 제일 무섭다고 말했어요. 김 서방은 말피를 집 둘레에 뿌리고 말머리를 높이 걸어 그 친구를 못 오게 했어요. 그랬더니 그 도깨비 친구는 화가 나서 마당으로 돈을 마구 던졌어요. 김 서방은 그 돈으로 몽땅 땅을 샀어요. 도깨비가 화나면 돈을 낙엽으로 바꾸어버리는 요술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자 도깨비는 김 서방의 논에 자갈을 산더미처럼 부려 놓았어요. 김 서방은 크게 웃으며 자갈거름 때문에 풍년이 들겠네, 쇠똥이나 말똥을 뿌려 놓았으면 농사를 망칠 텐데 했어요. 도깨비가 그 말에 속아 자갈을 다 들어내고 쇠똥과 말똥을 잔뜩 쌓아 놓았어요. 그 거름 덕분에 풍년이 들어 김 서방은 더욱 부자가 되었대요.


어때요, 길다가 인상 좋은 어떤 사람이 부탁을 할 때 들어줄만 하지요. 벼락부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일이 있네요.

이야기 속에서처럼 도깨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금 어수룩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도깨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친구는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하니까 비슷한 성격끼리 만나기 마련이지요.

먹을 것으로는 메밀묵, 호박죽, 개고기, 돼지고기 술 등을 좋아했답니다. 이 또한 그 시대 민중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지요.

도깨비가 싫어하는 것은 말피랍니다. 도깨비는 음기가 강하기 때문에 양기가 가장 강한 동물인 말피를 이용해서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위의 김 서방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영악함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이야기입니다.

도깨비는 둘만 모여도 음주와 가무를 즐긴답니다. 풍물놀이도 상당히 좋아해서 꽹과리를 잘 치는 사람을 죽게 해서 자기들 세계로 데려가 그 소리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도깨비는 우리 민중들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아무래도 도깨비는 아직까지 감투를 쓴 채 우리를 따라다니며 흉내 내고 있을 겁니다.

 

<6> 도깨비는 사람을 볼 줄 안다

요즘 청소년들 가운데 공부와 일보다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빠져있는 이들이 꽤 많아 보입니다. 아무리 게임을 열심히 한들 몇 백 년 후에 과연 이런 이야기가 생겨날까요?

'취직을 못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심심해서 늘 컴퓨터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게임을 하느라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보물이 하나씩 나왔다. …'

아마 백 년이 지나고 천 년이 지나도 이런 이야기는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몇 백년 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이야기 하나>

옛날 어느 마을에 열심히 공부했지만 과거 시험에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선비가 있었어요. 그날도 시험에 떨어져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산책을 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걷다가 책 한 권을 주웠어요. 집에 가져와서 읽는데 책장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예" "예"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들은 바로 도깨비였어요. 도깨비들은 선비가 시험 채점관의 농간으로 시험에 떨어진 것을 알아내고는 채점관을 혼내주었어요. 그래서 선비는 벼슬길에 나가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답니다.


<이야기 둘>

 
  흔히 귀면와 또는 도깨비기와로 알려진 한국 전통의 기와 문양. 최근 들어서는 이 문양에 대해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다'라 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소년이 있었어요. 어느 날 나무를 한 뒤 도끼를 산에 두고 그냥 내려왔지 뭐예요. 주위가 깜깜해왔지만 소년은 다시 도끼를 가지러 산 속으로 갔다가 도깨비를 만났어요. 도깨비가 도끼를 갖고 있다며 수수께끼 내기를 하자고 했어요. 소년이 이겨야 도끼를 돌려준댔어요. 도깨비는 수수께끼 내기를 좋아하거든요. 소년이 꾀를 써서 삼 세 판 만에 겨우 이겼답니다. 도깨비는 소년에게 비범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희귀한 보물을 한 보따리 주었어요. 소년은 그 보물을 팔아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첫 번 째 이야기에서 어릴 적 읽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떠오릅니다.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 '주인님'하면서 소원을 다 들어주는 그런 램프를 하나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었지요. 그렇지만 '도깨비가 나오는 책' 이야기를 알고부터 헌책방에 가서 헌책을 사와서 책장을 넘길 때, 도깨비가 "예"하고 대답을 할 것 같아 짜릿한 기분을 느꼈지요.

도깨비는 우선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아도 사람을 잘 알아보는 혜안이 있습니다. 부모 없이 고달프게 살면서도 밝고 건강하게 일하는 아이, 욕심 많은 형이 눈을 멀게 해버렸지만 끝까지 형을 믿고 따르며 독립의지가 강한 아우, 장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기술자 등을 알아보는 신통한 눈 말입니다.

도깨비는 백 퍼센트 순수덩어리이지요. 그래서 자신처럼 순수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만에 하나 잘못 보았다 싶으면 얼른 궤도 수정에 들어가 도깨비 방망이나 감투로 혼내 주고 원래대로 돌려놓습니다.

하는 일이 힘들다고 돈이 안 된다고 지레 포기하지 마세요.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묵묵히 힘껏 밀고 나가세요. 도깨비가 사람 보는 눈은 지금도 생생하게 빛나고 있답니다

 

<7> 도깨비가 좋아하는 곳

 
  흔히 귀면와 또는 도깨비기와로 알려진 한국 전통의 기와 문양. 최근 들어서는 이 문양에 대해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다'라 하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도깨비는 아마도 사색을 좋아하는 몽상가, 낭만파인가 봅니다. 도깨비가 사는 곳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마을 둘레에 있는 다리 아래, 고갯길, 산속 빈집, 강가, 바닷가 등에 살아요. 그런 곳에서 빛으로 지은 집에 빛의 옷인 감투를 쓰고 살 겁니다. 빛은 그늘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으니까 햇빛이 들지 않는 으슥한 곳에 둥지를 틉니다.

도깨비는 왜 그런 곳에 숨어 살까요? 그런 조용한 곳이 사색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지요. 사람을 좋아하는 도깨비는 몽상에 빠져 사람에 대한 연구도 하고 실험도 합니다. 도깨비 방망이를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감투를 주면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는지 뒤따라 다니며 살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보물이 손에 들어갔을 때는 어떤 방법으로든 보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나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길 떠나는 사람에게 한적한 곳에서 '짠~'하고 나타나는 게 도깨비입니다. 또 재미난 도깨비이야기 한 자리 해드려야 고개를 끄덕끄덕 해 주실 것 같네요.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만 좋은 어수룩한 총각이 살았어요. 늙은 부모는 바보 같은 아들이 걱정되어 세상을 배우게 하려고 집에서 떠나보냈어요. 총각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빈집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암도깨비가 나타나 총각더러 일 년을 같이 살자고 했어요.

사람 좋은 총각은 일 년을 도깨비와 같이 살았어요. 일 년 뒤에 도깨비가 죽 펴 놓고 손뼉을 치면 쌀이 나오는 보자기를 주었어요. 총각은 부모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품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집으로 향했어요.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집에 들어갔어요. 주막집 주인에게 보자기를 맡기면서 펴 놓고 손뼉을 치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주인은 무언가 있을 것 같아 총각이 잠이 들자 보자기를 펴서 손뼉을 치고 쌀이 나오는 것을 알아냈어요. 주인은 보자기를 바꿔치기 했어요. 총각은 가짜 보자기를 부모께 드렸다가 걱정만 듣고 갈 곳이 없어 다시 산속 암도깨비에게 돌아갔어요.

이번에는 일 년을 살고 엉덩이를 두드리면 금돈이 떨어지는 말을 얻어오다가 또 주막집 주인에게 바꿔치기를 당했어요. 부모가 말 엉덩이를 두드리자 똥만 찍 갈겼어요. 총각은 다시 암도깨비와 일 년을 살다가 이번에는 "때려라"하면 사람을 때리는 방망이를 얻어서 가다가 주막집 주인에게 맡겼어요. 주인은 총각이 "때려라"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총각이 잠들기 무섭게 "때려라"하고 방망이에게 소리쳤어요.

그러자 방망이는 주인을 죽도록 두들겨팼어요. 주인은 총각에게 싹싹 빌고 그전에 빼돌린 보자기와 말을 돌려줍니다. 총각은 그 보물들을 가지고 집으로 가자 이번에는 부모가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 보자기는 하도 폈다 접었다 하는 바람에 망가져서 못쓰게 되고, 말은 하도 궁둥이를 때려서 죽어버렸답니다. 그러니 요즘은 볼 수 없지요.

도깨비와 귀신은 분명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생기며, 사람을 적대시하고 홀려서 죽게도 합니다. 반면 도깨비는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 속에서 태어났고 사람과 친숙한 관계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도깨비를 귀신화해 공연히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근대로 올수록 도깨비가 사람을 홀리고 무서운 행동을 하는 이야기가 많은 걸 보면요.

이제부터는 으쓱한 곳을 지나가더라도 도깨비가 나타날까 무섭다는 생각은 하시지 말고, 길 떠난 목표에 대해서만 깊이 생각하며 느긋하게 걸어가세요

 

<8> 도깨비의 사랑

 
순수하고 사람을 좋아하며 더군다나 진기한 보물까지 가진 도깨비가 있다면 사귀고 싶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도깨비는 한적하고 으슥한 곳에 사는 탓에 늘 외롭겠죠. 그래서 사람과 친구 되고 싶어하고 이성인 사람과 만나면 에로틱한 사랑을 꿈꿉니다.

처녀도깨비는 주로 각시도깨비라고 불렸는데 그 사랑은 어땠을까요?

각시도깨비와 사람과의 사랑은 주로 인간 남성들의 낭만적인 마음에서 빚어지는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예전에는 일부다처가 허용된 사회이기에 그 시대 남성은 사랑이 오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다반사이지요. 사람인 남성이 홀로 길을 가다가 어여쁜 낭자(각시도깨비)를 만나 살림을 차리고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몇날이 지나도 사람이 오지 않으니 찾으러 나갑니다. 주로 다리 아래나 숲속에서 그 사람이 헤벌쭉 웃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무엇을 나누어 먹는 시늉을 하는데, 찾으러 간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거기서 각시도깨비와의 짧은 사랑은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총각도깨비와 낭자(사람)와의 사랑 이야기는, 도깨비가 낭자의 입에 구슬을 넣어주고 낭자는 그 구슬을 빨아 다시 도깨비 입에 넣어주며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다고 합니다. 날이 갈수록 낭자의 얼굴에 병색이 짙고 점점 여위어가자 부모가 대문에 말머리를 내걸고 집 앞에 말피를 뿌려 도깨비를 쫓아낸다는 이야기이지요.

 
  현대적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 각시도깨비(왼쪽)와 총각도깨비. 이미지 출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 (주)네오그라프.
한편 성인 남성도깨비 사랑의 대상은 남편을 여의어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과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도깨비에게도 윤리와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 트렌드인 불륜이야기가 아니라 홀로 살아가는 여인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니까요. 도깨비는 과부에게 밤마다 몰래 찾아가 물질적인 부와 사랑을 채워줍니다. 그러나 과부는 점점 여위어가고 얼굴에 병색이 짙어갑니다. 결국 이웃 할머니가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과부는 도깨비에게서 말피를 제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비방을 써서 쫓아냅니다. 그러자 도깨비는 자기가 준 돈으로 산 과부의 땅을 통째로 떼어 가려고 밤새도록 '영차 영차!'소리를 질러댄답니다. 새벽녘에야 그게 안 되는 일인 줄 깨닫고 '여보소 동네방네 사람들아, 부디 부부 정담 하지 마소, 부부라고 믿어 비밀이야기를 했더니 쫓아내는 저 사람 좀 보소.' 이렇게 울부짖으며 사라졌답니다.

총각도깨비, 각시도깨비의 사랑이야기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며, '구미호 전설'과 혼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와 과부의 사랑은 도깨비를 사귀어서 부자가 된 김서방이야기와 등장인물만 다를 뿐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재미와 역동성을 즐길 수 있습니다.

과부가 병이 든 것은 구태여 도깨비와 인간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윤리도덕이 문제일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존재이지만 아무 흠 잡을 데 없는 도깨비입니다. 하지만 동네에 소문이 퍼지자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하던 그 시대의 도덕을 지키기 위한 핑계로 여인은 몸이 아프다고 했을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르지요. 또한 한바탕 떼를 쓰고 떠나는 도깨비 가까이에 있었다면, 아마 애잔한 중얼거림이 들려왔을 겁니다.

"언젠가는 당신 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말없이 떠나면 이미 소문을 다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당신께 손가락질 할까봐 일부러 한바탕 소동을 부리고 떠나는 겁니다. 그래야 당신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할 것이지요. 그대여, 부디 행복하소서!"

 

<9> 사람들은 도깨비가 되고 싶은가?

 
  도깨비시장은 '도떼기시장'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한 도깨비시장에 나온 손때 묻은 물건들.
어느 가을 날, 회사원 김 씨는 더운 여름날 휴가도 없이 열심히 일한 대가로 포상 휴가를 며칠 받아 집에서 쉬고 있었어요.

"아빠, 도깨비가 정말 있어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집에 돌아와 인터넷 도깨비뉴스를 보고 있는 아빠 어깨를 흔들며 물어봅니다.

"글쎄, 옛날이야기 속에나 있지 요즘은 없어, 이 아빠는 한 번도 본적이 없거든."

"그렇구나! 우리 선생님이 해주시는 도깨비이야기가 참 재미있었어. 아빠도 하나 해주세요."

"갑자기 무슨 도깨비 씨나락 까먹는 말이냐? 아빠랑 컴퓨터게임이나 하자." 사실, 김 씨는 어린 아들의 청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며 자신의 개인 생활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X세대 젊은 아빠이기에 도깨비이야기는 아는 게 없거든요. 대신에 아들과 함께 나란히 놓아둔 두 대의 컴퓨터에 앉아 인터넷 게임을 합니다.

"아빠, 토마토주스 만들어 주세요."

"그래, 도깨비방망이가 있으니 문제 없지."

김 씨는 도깨비방망이에 토마토를 넣어 드르르륵 순식간에 주스를 만들어줍니다.

"게임 그만하고 아빠랑 시장구경 가자."

아이와 함께 가까이 있는 도깨비시장에 구경 나가서 골동품 탁상시계 하나를 골라 흐뭇한 얼굴로 돌아옵니다. 김 씨는 시계 모으는 것이 취미인지라 도깨비시장에 혼자서 자주 찾아다녔답니다.

저녁에 퇴근해 온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나도 과장님께 부탁해서 휴가 받았어요. 우리, 제주도에 도깨비여행(계획에 없었던 여행을 갑자기 하게 되는 경우를 '도깨비여행'이라고 부릅니다.) 다녀올까요?"

김 씨는 아내가 뜻밖의 휴가를 받고 여행을 하게 되니 싱글벙글합니다.

"그거 좋지! 인터넷 도깨비여행사에 알아보고 가면 되겠네."

김 씨 부부는 같이 인터넷 여행 사이트를 뒤져 계약을 합니다.

다음 날 오후 김 씨 가족은 제주 도깨비도로를 아무 것도 모른 채 달려가다가 차가 갑자기 뒤로 밀리는 바람에 "어어!" 놀라서 소리 질렀어요. 그러나 길 옆 안내판을 읽어보고는 모두가 "푸하하"하고 웃었답니다.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도깨비도로는 내리막길이다. 차가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도 거꾸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착시현상 때문인데 그 구간은 100m정도다. 도깨비가 조화를 부리는 것 같다하여 '도깨비 도로'라고 한다.)

그 다음날은 도깨비공원에 가서 도깨비인형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고 제주도 도깨비굿인 '영감놀이'를 구경합니다. (제주도에서 도깨비를 높여서 '영감'이라 하며, 고기잡이와 아픈 사람을 위해 소원을 비는 가면놀이 굿이다. 일종의 제의이다.)

해질 무렵, 김 씨는 바닷가 풀밭에서 아들과 씨름을 하며 뒹굽니다.

"아빠, 이게 뭐죠?"

"어어! 온 옷에 도깨비바늘이 붙었구나."

김 씨 아내는 남편과 아이의 옷에 달라붙은 도깨비바늘을 떼어줍니다. 아이가 도깨비바늘을 신기한 듯 살펴보다가 말합니다.

"아빠는 요즘 도깨비가 없다고 했는데, 도깨비가 붙는 이름은 왜 이렇게 많아요?"

"그러게, 도깨비가 다시 사람들과 살고 싶은가보네."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상하고 신기한 도깨비가 되어보고 싶은 거지? 도깨비 천지에요."

 

<10> 현대 동화에 나타난 도깨비 모습

 
  강원도 정선선 나전역(유명한 아오라지역과 한 정거장 떨어져 있다) 역사에 그려놓은 도깨비 모습.
어린이들은 도깨비이야기를 한번 해주면 만날 때마다 "도깨비이야기 해주세요. 열 가지 해주세요. 계속 해주세요"하면서 귀엽게 떼를 쓰지요.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옛 이야기답게 짜임이 탄탄하고 재미와 삶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일부러 말해주지 않아도 어린이들 스스로 느끼고 깨닫습니다. 어린이들은 도깨비이야기를 놓고서 교훈이 겉으로 드러났다거나, 권선징악의 주제라거나 그런 잣대를 들이대며 읽지 않습니다. 그건 동심이 사라진 어른들이 메마르고 딱딱한 사고로 이야기를 분석하여 그런 논리를 끌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도깨비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고 꼭 필요한 판타지동화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요즘 출판된 동화 가운데 도깨비를 소재로 쓴 동화가 꽤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거나 평론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일일이 제목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장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도깨비를 등장시켜 판타지 세계를 엮어낸 장점이 있었습니다. 도깨비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서 탄생한다는 것도 잘 그려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 도깨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의도가 많이 드러납니다. 그러다보니 스토리가 옛 이야기에 비해 탄탄하지 못해 재미성이 훨씬 떨어집니다. 단편은 주로 어린이들의 좋지 않은 버릇을 고치는데 도깨비를 이용하거나, 도깨비가 사건의 해결사로 가볍게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어린이들이 도깨비를 무서워하고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며, 어린이들을 가르치려는 것 외에는 줄 것이 없는 도덕 교과서 같은 동화가 되지요.

현대 동화에 등장하는 도깨비 모습도 별다를 게 없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메밀묵이나 호박죽이며, 숲속이나 빈집 또는 오래된 물건에서 나타나고 씨름을 좋아하며 솥뚜껑을 솥 안으로 집어넣는 재주까지 새로울 게 없었어요.

최근에 나온 몇몇 동화는 도깨비 모습을 뿔이 없는 친숙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조금씩 이 시대에 적응하는 도깨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 도깨비를 살려내어 현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여 기쁩니다. 사실은 저도 도깨비를 깊이 생각해본 요즘에서야 우리 도깨비를 그려낸답시고 그렇고 그런 도깨비이야기들을 써낸 것이 부끄럽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도깨비 소재의 동화는 일본에서 나온 한 도깨비 그림책이 인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유아나 저학년들이 읽는 이야기인데 전개가 힘 있고 술술 잘 읽힙니다. 빨래를 좋아하는 엄마가 천둥번개를 몰아오는 도깨비를 마구 빨아버린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엄마가 도깨비를 아주 간단하게 빨아버리는 대목에서 신나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밖에는 도깨비를 등장 시킨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유아나 저학년은 어머니가 대부분 책을 골라주고 읽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럴 때 우리 도깨비와 일본 도깨비의 다른 점을 이야기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도깨비처럼 사람을 도와주는 도깨비라면 엄마가 혼내주려고 하면 아이들이 나서서 말릴 일이지 한바탕 웃고 지나가버리지는 않겠지요.

현대적인 도깨비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려면 지금껏 두루 살펴본 도깨비이야기는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널리 알려진 성경말씀이 떠오르네요. 우리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 시대의 도깨비 캐릭터를 창조해내면 좋겠습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없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도깨비 이야기가 세계로 뻗어 나갈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세계 어린이들에게 다음 편을 사려고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하는, 도깨비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11> 이 시대, 도깨비를 닮은 사람들

 
  도깨비를 닮은 이 시대의 사람,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초상.
도깨비는 건망증이 아주 심하대요.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궂은일을 해주며 입에 풀칠을 하는 아이가 있었답니다. 어느 날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돈 서푼을 받아 집으로 오다가 꼭 저처럼 작은 도깨비를 만났어요. 도깨비가 돈 서푼을 빌려주면 내일 갚겠다고 해서 선뜻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도깨비는 다음 날 깨끗이 갚고는 그 다음날도 빌린 돈이라며 돈 서푼을 부득부득 주고 갔어요. 그 다음에는 냄비를 빌려가더니, 뚜껑만 열면 하얀 김이 나는 쌀밥이 가득 담겨 있는 냄비와 돈 서푼을 함께 갚고 방망이까지 덤으로 얹어 날마다 갚았어요.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은 도깨비가 공중에 붕 뜬 채로 울더랍니다. 살림을 헤프게 산 죄로 하늘에 있는 도깨비나라로 불려 올라간다며, 빌린 돈 서푼과 냄비와 방망이를 못 주고 간다고 사과를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 외에도 정신없는 도깨비 설화가 많이 전해오는데 모두 빌린 돈이나 물건을 끝없이 갚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도깨비 건망증이란 게 참 묘하게 느껴집니다. 신기한 보물과 방망이와 감투를 가진 신통력 있는 도깨비들이 정말로 바보스러울 정도로 건망증이 심할까요? 그게 아니라 도깨비는 건망증을 가장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자선사업가처럼 보입니다. 사람들 앞에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도깨비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체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신조어이며 이른바 '욘(Yawns)족'이라고 불리는 서구 30,40대 부자들의 특징이 '젊고 돈도 많지만 평범한(Young and wealthy but normal)족속'이라고 하지요. 욘족은 화려한 요트나 전용제트기, 명품 의류와 자동차에 거액을 쓰는 기존 부자들의 소비행태를 따르지 않는답니다. 그 대신 중고차를 굴리고, 가족과 조용히 휴가를 보내며, 평범한 캐주얼 브랜드를 즐겨 입는다지요.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재단 설립에 내 놓은 빌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회장이 세계 대표 욘족으로 보입니다. 이 욘족이 바로 이 시대 도깨비를 닮은 사람이 아닐까요. 도깨비도 보물방망이가 있지만 민중들과 같은 수수한 모습을 하고 나타납니다. 먹는 것도 소박한 메밀묵이나 호박죽, 돼지고기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재산을 사회에 환원 시키는 예가 흔하지 않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ilge)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도깨비와 닮은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옛 사람 가운데는 자신이 확신하는 정책 사업을 백성들이 반대하자 내탕고로 처리한 조선의 정조대왕을 비롯하여 널리 알려진 경주 최부자, 명의 허준 등이 도깨비와 닮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요즘엔 도깨비를 닮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기쁩니다.

평생 가난과 병에 찌들어 살았으면서도 수 십 억의 인세를 굶는 어린이들을 위해 쓰라고 남겨 놓은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김밥 할머니, 노점상 할머니, 안경점 아저씨, 연예인, 얼굴 없는 천사 등등.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깨비처럼 활개를 치며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섭니다.

봉사활동을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도 도깨비를 닮았네요. 야학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양로원에서 재롱을 보여주는 어린이들,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청소년들, 즐거운 무대를 펼치는 자선 쇼 단원들….

거짓과 막말로 서민들을 울리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비인간인 도깨비의 깊은 속마음을 닮으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을까요.

 

<12> 빌딩 숲에서 도깨비를 키우자

 
  섬진강 '도깨비마을'의 청도깨비 조각상.
초등 4학년 음악교과서에 신민요로 알려진 '산도깨비'라는 노래가 있어요.

"…

머리에 뿔달린 도깨비가

방망이 들고서 에루화 둥둥



저 산도깨비 날 잡아갈까

가슴소리만 콩닥콩닥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갔네"

이 노래는 어깨춤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정겨운 우리 가락과 함께 흘러나오는데 노랫말은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머리에 뿔 달린 무서운 도깨비가 방망이로 사람을 치려는 것처럼 보여서 무서워 도망간다는 내용으로 도깨비에 대한 왜곡이 심합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는 폭력성이 조금은 있지요. 그것을 공공연히 끄집어내는 노랫말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요. 도깨비를 만나 한바탕 어울려 놀 수 있는 분위기로 노랫말을 바꿔주면 좋겠습니다. 이 노래도 신민요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일제 때 왜곡된 도깨비 상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물려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각상이나 노랫말을 만들 때, 외국소설 또는 동화를 번역할 때 무서운 외국 귀신을 생각 없이 도깨비로 바꾸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에게서 도깨비를 멀어지게 하고 왜곡시키는 까닭이 됩니다. 그림책 작가도 모르고 그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글 쓰는 사람이 우리 도깨비 분위기를 살려 잘 써 놓아도 그림을 엉뚱하게 그려놓으면 헛일입니다. 물론 도깨비도 양면성은 있지요. 사람과 친숙한 도깨비와 무서운 도깨비로 나누어지겠지만 우리 설화 속에서 죄 없는 선량한 사람에게 무섭게 나타난 예는 거의 없습니다. 도깨비의 단면을 확대시킬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속성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도깨비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우리민족문화상징 100선 안에 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도깨비를 예술작품 속에 나타내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뜻깊은 문화운동입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거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서 다른 나라 도깨비와는 차별화된 우리 도깨비 상을 심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70%를 차지하고 있기에 도시는 대부분 시멘트 빌딩 숲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길 가다 쉴 곳을 찾으려면 힘들어요. 빌딩가에 쌈지길을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의자 하나와 예쁜 꽃 화분 하나에 도깨비 조각상 하나쯤은 그리 넓은 땅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길다가 도깨비를 만나면 씨익 웃음 나는 기분 좋은 놀라움이 따라오겠지요. 설령 그게 도깨비 조각상일지라도 잠시나마 힘들고 복잡한 생각은 사라지고 동심으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펴며 길을 갈 수가 있겠지요. 도깨비 방망이를 살짝 건드리면 '금 나와라, 뚝딱.' 야는 소리와 함께 금덩이가 좌르르 쏟아지는 소리와 호탕한 도깨비 웃음소리가 '와하하' 들려오면 더 신날 겁니다. 생각의 물꼬를 조금만 틀어보면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고 정서를 아름답게 가꿔줄 아이디어는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라도 곡성 섬진강가에 도깨비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도깨비마을의 촌장은 조각가이며 아동문학가인 김성범 씨. 그는 2001년에 동화속의 공간을 새로 만들어내 어린이들에게 쉴 곳과 상상력을 키워주려는 뜻을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우리문화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요. 2005년에는 서울 한복판에 '웃는 도깨비' 특별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도깨비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렇듯 우리 도깨비에 대한 사랑이 퍼져가고 있어서 도깨비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현대적인 감각의 즐거운 도깨비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삭막한 빌딩 숲에서도 도깨비는 저절로 자라나고 퍼져갈 것이라 믿습니다.

 

<13> 도깨비불을 찾아라

 
  불도깨비 캐릭터(출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주)네오그라프)
깊은 밤, 어느 마을 사람 몇이서 밤길을 가다가 이상한 불빛을 보았답니다. 처음엔 두 손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의 불빛이 이리 저리 흔들거리기 시작하더래요. 다시 보니 불빛이라기보다는 동그란 불덩이였고 흔들거리던 불덩이에서 이번에는 사방으로 툭하고 뿔이 나오더니 이내 그 뿔들은 불기둥을 이루면서 뻗어 나가기 시작하더래요. 동서남북으로 쭉 뻗는 불기둥이 하나는 오른쪽으로,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또 하나는 아랫마을로 향해 달렸대요.

불기둥들은 같은 속도, 같은 거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같은 빛깔, 같은 모양으로 일사불란하게 내달리더니 느닷없이 산이며 들에 불을 붙이더래요. 마을 일대는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렸고, 정월대보름에 쥐불을 놓은 듯이 주변이 환해졌대요. 불덩이는 한참이나 사방으로 뿔들이 뻗어나가 갈라지고 또 갈라지기를 반복하면서 하나의 불덩이가 사오백 개의 불기둥을 이루었답니다.

자세히 볼 요량으로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 불덩이는 갑자기 불기둥을 걷어 들이기 시작하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군인들의 절도 있는 제식훈련을 하는 듯이 보였답니다. 갈라졌던 불기둥은 원래의 가지로, 또 그 가지들은 모여서 처음의 불덩이로 하나가 되더래대요. 처음의 모양대로 되돌아온 불덩이는 도로를 따라 가는 듯하더니 사람들이 가는 길에 앞장을 서더랍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불덩이를 앞에 두고 길을 걸었대요.

마을에 도착하니 그 불덩이는 초롱불만큼 작아져서 도랑 위의 뗏장을 입힌 나무다리에서 떡 버티고 있었답니다. 물론 초롱불을 든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대요. 마침내 사람들과 불덩이는 불과 칠팔 미터로 가까워졌고 악! 하는 순간, 불덩이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다리 밑으로 쑥 들어가버렸대요.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머리칼이 쭈뼛 하였답니다.

'도깨비불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함께 본 사람들 중에는 아직 세 사람이 생존해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구전설화집'에 나와 있는데 약 50년 전의 일이래요.

도깨비불 본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아요. 때로는 왁자한 웃음소리와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났답니다. 밤길에서 사람을 인도해주는 도깨비불은 큰일 할 사람임을 미리 알아보고 보호해주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도깨비불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 뼈나 사람 뼈, 또는 오래된 나무가 썩으면서 발생하는 '인'이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물과 작용하여 스스로 불이 붙는 거랍니다. 도깨비불이 주로 공동묘지가 있는 산이나 비오기 전 습기 찬 날 밤에 많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긍이 가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인불이 맞는지 명확한 입증은 없습니다.

어촌에서는 도깨비불이 많이 나타나는 곳에 고기가 잘 잡힌다는 속설이 있답니다. 대개 섣달 그믐날 밤이나 정월 초사흗날에 도깨비제사를 지낸 다음, 산에 올라가서 어디에 도깨비불이 많이 보이나 살펴본다고 하는데 그것을 산망(山望)이라고 합니다. 육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도깨비불로 풍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도깨비불이 나타난 산 쪽에 있는 마을에 풍년이 든대요.

김승찬의 '부산 지방의 세시풍속'에 보면 부산 금정구와 남구에서도 산망을 해서 풍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깨비불을 직접 본 어르신들의 말씀이 6·25전쟁 때 총과 대포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다 사라져버려서 요즘 도깨비불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휘황찬란한 불빛 때문에 사라진 별을 찾아 어두운 하늘을 애타게 바라보듯 달무리 고운 밤, 뒷산을 바라보며 도깨비불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도깨비불은 희망의 등불이니까요.

 

<14> 여성 해방구 도깨비굿

 
  2001년 초연돼 지금까지 100만명 넘는 관객을 모은 타악 퍼포먼스 '도깨비스톰'의 한 장면.


전라도 진도 어느 마을에 도깨비굿이 벌어졌습니다. 어스름 달밤에 한 무리의 부녀자들이 모였습니다. 간짓대 위에는 기세도 당당하게 여자의 중우(월경 혈액이 묻은 속옷)가 펄럭입니다. 집안에서 쓰던 밥통뚜껑, 놋양푼, 쪽박, 솥뚜껑, 주전자, 세수대야 등 소리나는 기물과 부지깽이가 손에 손에 들려있습니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거나 숯검정을 칠했습니다.

이 풍경의 시대배경은 조선 후기입니다. 얼핏 보면 여성전사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동네 부녀자들이 단체로 여성의 주권을 찾기 위해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깨비와의 전쟁이고 시위랍니다. 도깨비를 쫓아낸다며 난리 굿판을 벌이는 것이지요. 도깨비가 남성성이다 보니 여성들은 도깨비가 몸에 붙으면 병이 든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마을에 돌림병이 돌면 도깨비를 역신으로 보고 여성들이 나서서 도깨비굿을 하는 겁니다. 이 때 남성들은 접근 금지입니다.

이 장면에서 도깨비가 너무나 억울해 보입니다. 태초에는 풍어신이요 수호신으로 대접받았지만, 사람들의 과학적 예지가 자라나고 불교나 유교 같은 종교에 의지하면서 도깨비를 홀대하기 시작했어요. 종교와 과학이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도깨비가 미신이요 잡귀신으로 전락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마을에 불이 나면 도깨비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화재신으로 등급을 깎아내려 액막이 제사를 지냈으며, 돌림병이 돌면 역신(疫神:병 귀신)으로 몰아붙입니다. 원한을 가진 귀신의 장난임직한 일도 도깨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쫓아내는 굿을 합니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도깨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도깨비굿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바탕 놀이굿으로 보입니다. 여성들이 팔뚝에 힘을 올려가며 곱게 닦아 놓고 아껴 쓰는 집안 기물들을 가져나와서 마음껏 두들겨 팹니다. 이 장면은 난타의 원형을 보는 듯 합니다.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는 유교사회의 부녀자들이 자신들을 얽매고 속박하는 집안 기물들을 가져나와 부지깽이로 마음껏 두들기며 힘겨운 집안 일과 며느리·아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숯검정을 칠하여 가장행렬도 합니다. '중우'라는 월경 혈액이 묻은 속옷 깃발을 앞세워 여성들의 은밀한 곳을 보여주며 모성성을 한껏 뽐냅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정화되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 모성애를 발휘하여 집안을 돌보는 것입니다.

도깨비굿은 여성 해방구 역할을 하는 굿판으로 보입니다. 이 때 도깨비는 여성들의 결핍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신이 됩니다. 도깨비는 떼려야 뗄수 없는 생활신이었죠. 진도의 도깨비굿은 요즘 '영등축제'의 문화행사로 맛보기만 보여줄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들만의 도깨비굿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 순창 탑리의 도깨비굿입니다. 마을 부녀회장의 말에 의하면 외지에 나간 자녀들의 안녕을 위해서 지금도 정월 열이렛날에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 네 곳에서 몇몇 부녀자들이 모여서 도깨비 제사를 지내고 풍물을 울려 굿을 친답니다.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탐라문화제' 때 영감놀이를 합니다. 도깨비의 제주도말인 도채비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 영감입니다. 영감놀이는 제주도의 무당굿 가운데 놀이굿의 한 종류로 도깨비굿입니다. 해녀가 병이 들면 낫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하는 가면놀이랍니다. 이제는 신앙적인 면이 퇴색하여 풍자와 해학의 가면극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입니다. 이제 도깨비는 동화 속에서나마 사람에 대한 첫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참고도서=김종대 지음 '도깨비를 둘러싼 민간신앙과 설화', 인디북)

 

<15> 내 안에 도깨비 있다

 
  섬진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친근한 도깨비상.
우리 민담에 '거지 형제와 도깨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려서 부모를 잃고 거지 노릇을 하는 형제가 있었어요. 그런데 형은 성격이 사납고 욕심이 많아서 아우를 몹시 구박했어요. 이상하게도 아우가 밥을 많이 얻어 오는 일이 이어지자 샘이 난 형은 젓가락으로 아우 눈을 찔러 소경을 만들어 내쫓았어요. 아우는 앞이 안 보여 산 속을 헤매고 다니다가 빈집에서 자게 되었어요. 거기서 도깨비들이 소경 된 눈을 씻으면 낫는 샘물이 있는 곳과, 이웃 동네에 앓아누운 부잣집 외동딸 병 고치는 방법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서 아우는 도깨비가 이야기 한 곳에 더듬거리며 가서 샘물을 찾아내어 눈을 뜨게 되었어요. 그 다음엔 부잣집 병든 딸을 고쳐주니 고맙다며 많은 돈을 주어서 잘 살게 되었답니다. 그 후 아우는 형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형은 계속해서 동생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도깨비한테 벌을 받고 죽었다고 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끔찍할 만큼 잔혹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어도 될까?'하는 의문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줄 때는 어른이 아이를 안거나 손을 꼭 잡고 따뜻한 울타리를 만들어 준 다음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가능합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아이가 평소에 늘 정답게 대해 오던 조부모나 부모 또는 선생님이기 때문에 아이는 마음 놓고 듣습니다. 만약 이런 잔혹한 이야기를 아이 혼자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하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남아 오히려 억압으로 작용을 하겠지요. 그래서 옛이야기는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인쇄매체를 통해 나오는 옛이야기는 순화되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과 흥미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는 권선징악의 주체로만 등장한 것일까요?

이야기 속의 형과 동생의 모습은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편적인 심성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사납고 욕심 많은 형도 살고 있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동생도 살고 있지요. 그리고 어두운 삶에 기적 같은 빛을 주는 도깨비, 나쁜 마음이 생길 때 경계하도록 해주는 도깨비도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도깨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는 선과 악의 가운데 서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주는 도깨비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도깨비는 우리 삶의 희로애락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났지요. 도깨비가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나올 때는 우리가 웃고 싶을 때이고, 모습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애매모호한 성격으로 등장할 때는 희로애락을 남에게 숨겨 보이고 싶은 때문입니다. 도깨비가 점차 잡귀나 요괴로 전락해 간다는 것은 이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도깨비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없는 공상의 세계가 아니지요. 어른과 아이들 모두 즐겨 이야기하고 들으며 우리 삶의 전체성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야합니다. 거기에 도깨비는 더없이 재미있고 유익한 캐릭터가 될 수 있지요. 이야기속의 대립, 반복, 음악성, 흥미성에 매료되어 잔치마당처럼 즐겁게 놀이하듯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의 요괴나 요정, 마법사가 아닌 우리 고유의 이야기 주인공 도깨비가 등장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둘 수 있습니다.

저도 글이 안 되어 답답할 때 도깨비를 찾습니다. "도깨비, 네 글 쓰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고 그럴 수 있어. 어서 나타나서 좀 도와줘"하고 외칩니다. 그럴 때면 도깨비는 제 가슴속을 톡톡 두드리며 "네 안에 나 있어"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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