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택 한쪽에 아담한 서가, <작은 도서관>도 만들었다. 누구나 그곳에서 우리문화와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다. 지난해에는 종가의 유물 1만643점을 충남 역사문화 연구원에 기탁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땅을 파고 유물을 묻어 지켜낸 것들이다. 그는 집안의 간장을 상품화해서 ‘교동간장’을 만들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어요. 고택을 지켜내기 위해서 한 방법이지요. 빈집이 되면 안 되죠. 사람이 사는 집이어야 하니깐. 어머니는 반대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잘했다 하십니다. 장독문화도 보존하고 싶었고 우리음식이 나이가 들수록 얼마나 건강음식인지 깨달으면서 결심했지요”라고 말한다.
봄꽃들이 만발하면 명재고택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든다. 세상 사람들과 고립되어서 홀로 외롭게 있는 낡은 집이 아니라 현대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곳이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길게 늘어선 장독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해 4계절 이곳을 찾는다. 집을 나서는데 종부 양창호 선생이 한마디 던진다. “우리 집 간장 맛 어때요?” 돌아오는 답은 “따봉.” 엄지손가락이 기와집 처마만큼 올라간다.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미리 식사를 예약하면 이 댁 간장으로 만든 된장국과 간소한 반찬을 맛 볼 수 있다. 간장은 500ml가 1만9천원, 900ml가 3만3천 원이고 된장은 450그램이 1만 원, 900그램이 1만9천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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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남 선생이 알려주는 떡전골
1. 조금 딱딱한 가래떡 준비한다. 3~3.5센티로 자른 후에 4등분한다.
2. 쇠고기 갈비뼈로 육수를 만든다. 한 5~6시간 끓인다.
3. 육수에 떡을 12시간 재워둔다.
4. 다음날 지방이 없는 순 살코기를 준비해서 곱게 다진다.
5. 다진 고기에 파, 마늘을 넣고 배도 갈아 넣는다.
6. 참기름과 전독간장으로 간을 해서 조물조물 만진다.
7. 재워 둔 떡과 육수를 분리한다.
8. 육수의 기름을 걷어내고 전독간장을 아주 소량 넣어 간을 한다.
9. 그 육수를 끓이다가 떡을 넣는다.
10. 준비한 양념 고기를 넣고 익힌다.
11. 다 익으면 황백지단과 석이버섯을 고명으로 올린다.
12. 석이버섯은 끓은 물에 불려 돌돌 말아 잘게 썰어 올린다. |
봄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꽃바람 대신 3월에 꽃샘 눈보라가 친다.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아 공포스럽다. 싸락눈이 하늘을 덮은 3월 중순 서울에서 1시간가량 거리에 있는 경기도 광명시 ‘충현 박물관’을 찾았다. 물어물어 가는 길은 팀 버튼의 ‘앨리스’로 만든다. 복주머니의 주둥이처럼 박물관 앞은 좁고, 크고 작은 집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도시 속에 꽁꽁 숨어있다. 충현 박물관에는 문화재가 많다.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는 고택은 흔히 너른 주차장과 잘 정비된 도로가 있기 마련인데 충현 박물관은 아니다. | |
3대에 걸쳐 영의정 지내…살아서도 검소 죽어서도 검소
충현 박물관은 조선시대 학자 오리 이원익 선생(1546~1634)의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 제 90호로 지정된 오리 선생의 사저 관감당과 후손이 살던 종택,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오리영우(梧里影宇)와 오리 선생의 영정 4점, 친필 임금의 교서 문집 등 각종 유물 15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교수였던 이원익 선생의 13대 종손 이승규(71)씨가 지난 2003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동갑내기 아내 함금자 씨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씨는 “유물들과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았지요”라고 말한다. “이원익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세상에 널리 알려도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등을 공부하고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만나 조언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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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 박물관에 소장된 여러가지 생활도구들 | |
오리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청렴하고 검소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의 유서에는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여/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라고 적혀있다. 충현 박물관은 종가의 후손이 문을 연 거의 유일한 박물관이다. | |
그냥 먹다 질려서 색다르게 만들다 보니 함씨표 탄생
종부 함금자 선생이 호박죽 만들 때 사용하는 팥과 동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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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 밥상 역시 오리 선생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다. 종부 함금자 씨는 “결혼하고 내려오니 대고모님이 계셨어요. 그분께 집안 음식을 배웠지요. 고추장, 된장 직접 담그고 콩나물이나 두부도 직접 만들었지요. 깔끔한 한식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남아서 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함씨는 파 써는 것부터 배웠다. “김치는 배추에 생태를 꼭꼭 눌러 넣으셨는데 고모님 아니고는 제대로 넣지도 못했죠.” 이 댁 송기 송편은 쫄깃하고 향긋하다. “삶은 송기(소나무 속 껍질)와 빻은 쌀가루를 섞어 만들었어요. 고모님의 맛은 남달랐어요. 낙지두루치기도 낙지 맛을 많이 살리셨지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아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함씨도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색다른 음식을 만든다. ‘함씨표 호박죽’이다. 아침마다 먹는 이 호박죽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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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호박을 키웠어요. 늙은 호박으로 처음에는 그냥 호박죽을 만들어 먹었는데 언제부터 질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색다르게 만들었지요”라고 말한다. ‘함씨표 호박죽’은 호박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흰콩, 밤, 우유, 팥, 올리브유까지 고루고루 들어가서 걸쭉하고 고소하다.
첫 한 모금이 확 입안을 당기지는 않지만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에 전해진다. 만드는 법은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고 세심하다. 채 썬 호박과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고 물을 넣어 익힌다. 흰콩도 불려 익혀두고 삶은 밤까지 합쳐 모두 믹서에 간다. 찹쌀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만든다. 완성되면 우유를 조금 넣고 삶은 팥이나 동부(팥보다 조금 큰 콩) 알갱이를 넣어 함께 먹는다. 이 댁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아침식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죽을 먹어왔다. 고혈압이나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을 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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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은 노부부 서로에 지극, 얼굴만 봐도 ‘하하 호호’
종손부부가 건강을 지킨 비법은 한 가지 더 있다. ‘사랑’이다. “무슨 사랑?” 일흔이 넘은 두 사람은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정겹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하하하” 웃음꽃을 피운다. 세상에 절대로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사랑과 방귀라고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솔솔 밥상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연애 결혼했죠. 데이트 신청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두 거절했죠. 근데 지금 남편만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어딘가 어수룩하고 투박해 보이는 점이 좋았지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60년대 초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이씨와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함씨는 대학 때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그는 학생 때 나라를 위한 지도자가 되라는 이태영 선생(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의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결혼하고 광명시 고택에 내려와서 살았다. 종가의 제사도 지내고 문중의 일들을 보살폈다. 남편은 학업을 모두 마친 것이 아니라서 서울 신촌으로 출퇴근을 했다. 인턴을 하면서 집에 내려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어린 신부는 낯선 환경에서 무섭기도 했다. 당시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집 뒤에 집안 조상들의 무덤이 많았어요. 이원익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어요.” 바람이 휙휙 불거나 폭풍우 치는 밤이면 이불 깃을 꼭 쥐고 잠을 청했다.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이씨도 “아내 같은 사람은 없다.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도 아내는 조상들이 물려준 것을 우리 대에 없애버리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했죠”라고 서로를 칭찬한다. 이씨는 젊은 날 아내의 사진을 최근까지도 지갑에 넣고 다녔다. 지금 그 사진은 빛바랜 누런색을 입고 거실액자에 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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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살림하다 뒤늦게 박물관장 맡아 꽃 펴
함씨의 꿈은 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박물관장을 맡고부터다. 정성스럽게 유물들을 관리하고 도록을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종가가 어떻게 지금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고민한다. ‘영정 보물지정 기념 이원익전’(2005년), ‘종가의 새로운 변모, 충현 박물관의 어제와 오늘’(2008년) 같은 전시도 꾸준히 기획중이다.
박물관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해 67세의 나이에 숙명여대 대학원에 입학해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산을 잘 지켜낸 공로로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국 200여 곳 사립박물관이 회원인 사단법인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신임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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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조선시대 월급봉투 | |
이원익 종가는 종가로서 독특하다. 불천위제사를 비롯한 모든 제사들을 없앴다. 이원익 선생의 탄신일에 추모행사만 한다.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일이죠, 결정은 했지만 아직까지 고민은 계속 하고 있어요, 고택들이 지금 세상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 |
함금자 선생이 알려주는 호박죽
1.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겨 채 썬다. 양파도 채 썬다.
2. 올리브유를 두르고 볶다가 물을 넣고 익힌다.
3. 흰콩은 물에 불린 후에 살짝 익혀둔다.
4. 밤은 삶아 둔다.
5. 이 모든 재료를 믹서에 간다.
6. 찹쌀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만든다.
7. 완성되면 우유를 조금 넣고 삶은 팥이나 동부(팥보다 조금 큰 콩) 알갱이를 넣어 함께 먹는다(함금자 선생은 밤을 얼려서 보관하다가
만들 때마다 해동해서 사용한다). | |
‘포식혜’ 이름이 낯설다. 한국전통음식을 연구한 조리서에서도 보기 드문 이름이다. ‘식혜’하면 쌀밥을 엿기름물로 삭혀서 만든 우리나라 화채가 떠오른다. 음료가 별로 없던 시절 어머니는 얼음 동동 띄운 달짝지근한 식혜를 만들어주셨다. 우리네 훌륭한 마실거리였다. 하지만 포식혜는 마실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생선과 소금, 밥을 섞어 삭힌 ‘식해’와 비슷하다. 하지만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다. 죽순, 동아(박과 식물)를 넣어 만든 죽순식해나 동아식해도 있지만 이것과도 또 다르다. | |
이것 저것 이리저리 충돌해 요상한 맛
이 신기한 음식은 강릉 창녕조씨 종가댁의 내림음식이다. 맛은 짭짜름하고 색은 붉다.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이 댁 9대 종부 최영간(64)씨는 시어머니 김쌍기(88)씨에게서 배웠다. 최씨는 “종가라서 제사가 많았어요. 명태포나 오징어포나 각종 포들이 많이 남았죠. 어머니는 아깝다고 하셨죠. 그 포를 이용해서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말한다. 포식혜는 만들기가 간단하다. 명태포나 오징어포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물에 적셔둔다. 그 포에 엿기름, 고춧가루, 찹쌀밥, 무를 섞어 삭히면 된다. 이때 무가 중요하다.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서는 안된다. “콩알 크기만하게 썰어요, 무가 삭으면 효소가 나와요. 2주 정도 지나면 독 위로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먹으면 됩니다”라고 최씨가 일러준다.
적은 양을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먹는 음식이다. 주홍치마처럼 색이 붉어 맛을 보지 않아도 매운 느낌이다. 하지만 맵지 않다. 은은한 맛이 유유하게 흐르는 우리 강을 닮았다. 시인 백석(백기행 1912~1995)이 국수를 두고 ‘아 반가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포식혜도 반가운 음식이다. 살아남은 음식이다. 살짝 딱딱한 포와 뭉클하게 삭은 밥알들이 이리저리 충돌해서 요상한 맛을 낸다. 최영간씨는 어쩌면 사라져버렸을 포식혜같은 우리 먹을거리를 잘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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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직접 만든 메밀묵 | |
26살이 되던 해 이 댁 며느리가 된 최씨는 재미있는 장면을 만났다. 모내기를 하기로 한 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댁에 모였다. 한나절 모두 힘을 합쳐 모내기를 마치자 시어머니는 못밥상을 차렸다. 들과 산에서 자란 나물들을 뜯어 무쳐서 삶은 팥이 들어간 따끈한 쌀밥과 함께 상에 올렸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먹는 밥만큼 맛난 것이 있을까! 웃음꽃 피우고 식사를 끝내자 사람들은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일종의 품앗이였던 셈이다. 한달 동안 마을의 모내기는 이어진다. 김매기를 할 때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꾼들을 ‘질꾼’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질꾼들은 일이 끝나면 질상을 받았다. 질상은 못밥상보다 화려하다. 잡채나 호박전이나 메밀묵, 감자떡 등이 올라간다. 볍씨의 일부를 따로 두었다가 만든 씨종지떡도 한 자리 차지했다. 씨종지떡은 설탕이 흔하지 않던 시절 단맛을 내기 위해 호박오가리, 대추 등을 넣어 만든 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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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하니 차려지는 일꾼들 밥상인 질상…전통음식점으로 부활
대청마루에 말리고 있는 나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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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언제부턴가 사라졌어요. 결혼해 온 이후 몇 번 못 봤어요.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시할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자애로우셨지요. 며느리, 손주 며느리 모두 아끼셨어요. 질꾼들을 잘 챙기셨어요.” 시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뭉클 들 때면 못밥상과 질상이 생각났다고 한다. 1998년 최씨는 그 그리움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
“여학교 선배가 농촌지도소(농촌기술센터)에서 일했어요. 시할아버님이야기와 못밥상과 질상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 ‘농촌주부일손가꾸기’ 같은 농촌지원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곳과 연결시켜 주었지요.” 그는 집안의 내림음식들과 못밥상, 질상을 ‘서지초가뜰’이라는 간판을 단 전통음식점을 열어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하는 식 그대로예요. 우리가 농사지은 쌀과 집 주변에 나는 산나물로 밥상을 차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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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 나물 맛도 포식혜나 씨종지떡만큼이나 독특하다. “묵나물로 만들어서 그래요. 왜 이름이 묵나물이냐면 묵혔다가 만든 나물이라서 그래요.” 묵나물은 제철에 뜯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먹는 나물을 이르는 말이다. 이 댁은 제철 나물을 뜯어서 햇볕에 말린다. 꾸덕꾸덕 마르면 삶고 집된장이나 간장으로 무친다. 마늘도 거의 넣지 않는다. 깨가루와 들기름으로 무쳐서 더 고소하다. 부드럽기가 솜털 같고 쫄깃하기가 찰떡 같다. 3~4가지 나오는 나물들이 각자 자신의 색깔을 드러낸다.
두고 온 고향땅의 흙냄새가 폴폴 고소하게 난다. 담백한 맛에 반해 버린다. 숭늉은 또 어떠한지! 잊고 지낸 외할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 “쌀을 도정하다가 남는 싸라기를 숭늉 만들 때 넣어요. 우리 쌀은 향쌀이라고 해서 맛도 좋지요.” 맛난 숭늉의 비결을 최씨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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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부부가 들르면 아주 특별히 화전 대접
조상들의 맛을 잇고 이 댁을 지킨 사람들은 여자들이다. 최씨의 시어머니 8대 종부 김쌍기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시아버지를 모시고 7남매를 키워냈다. “시어머니는 소박하고 씩씩한 여성이지죠, 지금도 팔순이 넘으셨지만 영민하셔요”라고 최씨가 말한다.
김쌍기 선생은 18살 시집올 때 가져온 농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김씨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가르침 때문이다. 농 문짝 안쪽에는 친정아버지의 당부의 글이 적혀 있다. ‘발의 거동은 무거우며 손의 거동은 공손하며’로 시작하는 글은 마지막에 ‘눈빛거동은 씩씩히 할디니라’로 끝난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최영간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지켰다. 최씨가 말한다. “결혼하고 왔을 때 막내 도련님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형수님 소리도 못했지요.” 9대 종손인 남편 조옥현(68)씨를 따라 한때 도시에 나가 산 적도 있지만 몇 년 되지 않는다. “맏이로서 동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다 보니 도시에도 나가게 되었죠.” 그런 집안의 역사 때문에 시누이들도 언니처럼 최씨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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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간씨가 만든 화전. 집 주변에 피는 꽃으로 만들었다. | |
최씨는 신혼부부가 ‘서지초가뜰’을 찾으면 종종 화전을 만들어 낸다. 집 주변에 피는 들꽃들을 따서 만든다. 태극모양으로 만든 화전도 있다. “종부로 살면서 내 아이들 잘못 챙겼어요. 우리 아들 내외 같아 보이죠. 태극모양은 태양 같은 자손을 누구든 얻으라는 뜻으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지초가뜰’로 들어서는 길은 좁다. 구불구불 길을 걷다가 쉬다가를 여러 번 하다보면 아담하고 예쁜 한옥이 나온다. 한옥 앞에는 논이 있고 뒷산에는 대나무 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휘릭 바람이 세상소리를 전한다. 여행객들에게 한자락 봄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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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 최영간씨가 알려주는 포식혜 만드는 법
1. 명태포, 오징어포 같은 말린 포들을 준비한다. 물에 촉촉하게 적셔둔다.
2. 포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찹쌀로 밥을 해둔다. (포가 밥공기로 하나:찹쌀은 1kg)
3. 무(밥공기 하나 양)는 작은 콩 크기 정도로 자른다.
4. 포와 무와 엿기름(밥공기 하나)과 찹쌀, 고춧가루(밥공기로 두 개 혹은 두 개 반)를 작은 단지에 담아 2주간 삭힌다. 으깬 마늘(한 숟가락 정도), 소금(밥 공기 1/2)을 넣는다.
초등학생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문을 열자 마당에 큰 기와집이 반갑게 맞는다. 마당 한쪽에는 덩치 큰 개들이 멀끔히 쳐다보고 짖지도 않는다. 낯선 사람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예사로 아는 모양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학인당’은 한옥체험을 하는 종가다. 조선시대 조광조의 제자였던 학자 백인걸(1497~1579)의 후손들이 살면서 운영하고 있다. 종부 고정환(79) 씨가 웃으면서 “뭐하러 내려와~, 별것도 없어~”라며 핀잔을 준다. 충청도 사투리와 비슷한 전라도 말이 정겹다. 그는 몇 년 전 본채 옆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한 뒤에는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 “먹을 게 거기서 거기지~ 다른 거 뭐시 있겄어~!” 며느리 서화순(51) 씨가 옆에서 거든다. “어머니, ‘한채’ 있잖아요, ‘생합작’도 있고.” 그때서야 고씨는 “맞어 ‘느르미’도 있고 그라재”라고 말하며 웃는다. “김장철에 많이 해먹었지, 한채.” 고씨가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 |
채 써는 손놀림이 여느 무형문화재 보유자 못잖아
한채는 추울 때 먹는다고 해서 ‘한채’, 차갑게 해서 먹는다고 해서 ‘한채’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장철 겨울 무가 주재료다. 겨울 무는 무 중에서 최고다. 맛은 달고 식감은 아삭아삭 살아 있다. 열량도 적고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생선회나 구이와 함께 먹으면 산성을 중화시킨다. 조상들이 생선조림에 무를 넣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뿌리에는 소화효소(아밀라아제)가 있어서 과식을 했을 때 먹으면 속이 시원하다.
이 댁의 한채는 무와 배를 오묘하게 배합한다. 채 썬 무와 배의 만남이다. 일단 무를 세로로 반토막 내고 채 썬다. 배도 납작하게 썰고 생강, 마늘, 밤도 글자가 비칠 만큼 가늘고 얇게 썬다. 종부가 파를 썬 뒤에 냉장고에서 석류를 꺼내 살펴본다. “으 못 쓰겠다. 맛이 안 나겠어, 색이 변했네” 한다. 고씨는 대신 붉은색을 내기 위해 피망을 채 썬다. 탁탁 채 써는 종부의 손놀림이 여느 무형문화재 보유자 못지 않다. 옆에서 지켜보던 며느리는 “석류 넣으면 아이들이 좋아해요, 빨간색이 나서 아주 예뻐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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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이 묵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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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순서대로 넣는다. 중간 중간에 소금이나 설탕, 식초, 깨소금 등을 넣어 맛을 낸다. “맛이 어떠? 겨울 무가 아니라서 어떨까 모르것네.” 고씨가 말한다. “어머니 괜찮네요, 맛나네요”라고 며느리가 맛본 소감을 밝힌다. 아삭아삭한 무의 식감이 잘 살고 단 배가 살짝 튀어나와 하늘을 나는 기분을 선물한다. 피망의 붉은색과 파의 녹색은 한채를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다. 음식에 오방색을 넣어 만드는 우리 한식의 전통을 잘 살렸다. 여름에는 무 대신 오이를 써서 만든다고 한다.
이 댁에는 이렇게 소박한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살려 담백한 밥상을 만들지만 제사 때는 다르다. 귀한 것들을 만들어서 올린다. ‘생합(백합)작’이 그것이다. 생합작은 손가락 만한 크기의 백합을 사서 살을 파내 잘게 다진다. 다진 쇠고기, 당근, 표고버섯, 불린 다시마도 함께 버무려서 양념장에 재운 뒤에 살짝 볶는다. 이것들을 백합의 껍데기에 차곡차곡 넣고는 밀가루를 살짝 뿌리고 달걀을 부어 익힌다. 한 개씩 들고 작은 숟가락으로 파먹는 재미가 있다. 고단백질 영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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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처럼 예뻐해준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뚝뚝
학인당 본채 마루에서 바라본 마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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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맛나지’가 있어.” 고씨가 말을 잇는다. 이름이 생소하다. 전주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맛나지’는 일종의 장조림이다. 지금의 장조림과는 다르다. 쇠고기를 손가락 반 만하게 썰어 불고기양념에 반나절 재워두었다가 통마늘을 넣고 간장, 꿀, 참기름 등을 부으면서 조려 만드는 음식이다. 오랫동안 보관하고 먹는다. 며느리 서씨는 “일종의 저장 음식이다”라고 설명한다. “양념장 만들 때 마늘, 깨소금 넣으면 안돼야”라고 고씨가 주의사항도 전한다. “예전에 집에서 만든 간장을 썼지, 3년이나 5년 묵은 거 썼어”라고 말한다. 손주들에게 밥반찬으로 주면 좋아라 했단다. 지금도 성인이 된 손주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꼭 이 ‘맛나지’를 찾는다.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손맛이 밴 음식이다.
종부의 고향은 경상도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와서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 종손 백정기(81) 씨와는 23살에 결혼을 했다. 백씨는 중앙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쟁에 휘말렸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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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이) 출세하는 것도 안 바랐어요, 그저 건강하게 일을 마치고 평범하게만 지내길 바랐지, 직장생활 할 때도 만날 아팠어”라고 고씨가 말한다. 백씨는 한동안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을 했다. 38살 뒤늦은 나이에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서 정년퇴직까지 다녔다. 시대의 아픔이 콕콕 박힌 상처는 여러 세대가 지나도 오래가는 법. 지금 백씨는 몸이 좋지 않다. 그 곁을 고씨가 지키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인복이 많아, 훌륭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만났지, 시어머니는 딸처럼 예뻐해 주셨어”라고 말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난다. “우리 대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밥 먹이셨어, 편찮으실 때 외상값 갚으러 시장에 대신 나가니깐, 외상값 안 받아도 좋으니 빨리 나으셔야 한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고씨는 2004년 큰아들, 백정우(56) 씨가 내려오기 전까지 덩그런 고택을 홀로 지켰다. “먹고 입는 데보다 집 고치는 데 돈이 더 들었지, 비도 세고. 집을 지키려고 시집왔나 싶더라구”라고 말한다. 지금 고씨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이다. 머무는 방 앞에는 고씨가 만든 작은 꽃밭이 있다. 돌멩이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울긋불긋한 꽃들을 심었다. 고씨는 ‘나만의 꽃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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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요인들이 영빈관으로 사용…주말엔 한옥체험
한참을 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백정우 씨가 손을 잡아끈다. 아늑한 한옥, ‘학인당’ 곳곳을 소개시켜 준다.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방에는 70년대 드라마에 나오는 오래된 자개농이 있고, 좁은 복도 선반에는 김추자 씨와 이미자 씨의 엘피판이 보인다. 이곳은 해방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영빈관으로 사용했었다.
백씨가 안내한 다락은 빛의 잔치다. 한옥의 격자 창틀을 뚫고 깊숙이 들어오는 빛은 다락방을 앨리스가 간 이상한 나라로 만든다. “이곳은 한옥체험을 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 중에 원하는 분들만 아침에 한번 공개합니다”라고 백씨가 말한다. 올해 초에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가 찾기도 했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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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당 본채 | |
‘학인당’(전북민속자료 제8호)은 백인걸 선생의 10대손인 백진석(진수, 1832~1906) 선생이 조선말기 흥선 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에 자금을 대면서 짓게 되었다. 고종이 감사의 뜻으로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궁을 짓는 목수를 부탁했다. 그의 아들 백낙중 선생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1905년부터 2년8개월 동안 지었다. 궁중 건축양식을 민간에 도입한 한옥으로 조선말 전통 건축기법을 잘 보여준다.
주말이면 한옥체험을 하기 위해 이 댁을 찾는 이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신청을 하면 백씨가 만들어주는 깔끔한 채식 밥상을 받을 수 있다. 백 씨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인생의 시련을 아내와 함께 이겨냈다. 한동안 강진에 있는 백련사에서 머문 것이 힘이 되었다. 그때 사찰음식을 익혔다. 그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양한 세상살이를 겪은 이 답게 그는 겸손하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그런 일이 있었나봐요. 지키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만든 정갈한 밥상이 ‘학인당’ 만큼이나 우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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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 고정환 선생이 알려주는 한채
1. 무 1/3을 세로로 길게 잘라 채 썬다.
2. 배 반개를 납작 썰기를 한다.
3. 마늘과 생강, 밤 한 두 개를 얇게 채 썬다.
4. 파를 손가락 마디 만한 길이로 자른다(머리 부분은 안 쓴다).
5. 석류를 까서 알갱이를 따로 둔다.
6. 그릇에 무를 넣고 굵은 소금을 조금 뿌리고 배를 섞는다.
7. 설탕을 뿌리고 마늘, 생강, 밤을 섞는다.
8. 깨소금, 식초를 뿌린다.
9. 파와 석류 알갱이(혹은 피망)를 넣어 버무린다.
10. 잣을 넣어 먹는다.
현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무엇일까요? 소주 아닐까요? 매일 전국에서 엄청난 양의 소주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주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소주는 인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원래 소주는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굳이 분류해서 보자면 우리가 시중에서 많이 먹는 소주는 주정(酒精), 즉 에탄올(먹는 알코올)에 물을 타 희석해서 만든 희석식 소주입니다. 반면에 진짜 소주는 막걸리의 원료인 ‘술밑’을 증류해서 만드는 안동 소주와 같은 것입니다. | |
우리의 소주의 유래
요즘은 소주가 마치 국민주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 민족이 원래부터 소주를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원래 청주(혹은 약주)와 막걸리(혹은 탁주)를 주로 마셨습니다. 귀족은 청주를 마시고 일반 백성들은 막걸리를 마셨지요. 우리 조상들은 소주 같이 센 술 만드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소주를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몽골의 영향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것처럼, 고려 말에 우리는 몽골의 지배를 받는데 이때 이들이 먹던 소주가 고려에 소개된 것이지요. 이 계통의 소주로 지금 세간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안동소주입니다.
그런데 왜 안동에서 소주를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몽골이 일본을 치기 위해 만든 병참기지가 안동과 개성에 있었던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몽골군이 이곳에 주둔해서 소주를 만들던 것이 그대로 정착되어 안동이 소주로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에서는 근자에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데, ‘아락’은 아랍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주는 아마도 아랍지방에서 만들어져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 |
소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주로 쌀을 발효시켜 그것을 증류해서 만드는 반면, 지금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소주는 이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희석식 소주는, 우선 고구마나 사탕수수 같은 원료로 당밀을 만듭니다. 이 당밀은 95%의 알코올 농도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해 에탄올(에틸 알코올)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다음 여기에 물과 그밖의 첨가물을 타면 우리가 먹는 소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주가 처음 나왔을 때 알코올 농도가 몇 도였는지 아십니까? 지금 소주는 20도 이하까지 알코올 농도가 떨어졌지요? 처음 나온 소주는 30도였답니다. 그게 뒤에 25도로 되어 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최근에 계속 떨어져서 20도 밑으로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이렇듯 소주는 도수가 높았기 때문에 처음 나왔을 때에는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쌀이 부족한 탓에 순곡주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소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막걸리의 질이 너무 떨어져 소주를 먹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1960~70년대에 술을 마셨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카바이드’ 막걸리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막걸리를 쌀로 만들 수 없으니 밀가루 등으로 만들었는데, 발효를 빨리 시키려고 카바이드라는 하얀 돌 같은 것을 넣은 경우도 있었답니다. 이 물질을 물에 넣으면 가스가 나오는데 여기에 불을 붙여 램프 대용으로도 많이 썼지요. 이런 화학물질을 넣어 막걸리를 만들었으니 이 술을 마시면 뒤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국민들은 막걸리를 외면했고 대신 소주를 찾게 됩니다. 이 관습이 굳어져 소주가 더 인기가 있는 술이 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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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안동소주. <출처 : wikipedia(Matt and Nayoung Wilson)> | |
우리나라 술의 역사
소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부터 우리나라 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보기로 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미인주’라는 게 있었답니다. 이 술은 미인인 여성이 곡물을 씹어 뱉은 것을 발효시킨 것입니다. 왜 씹은 곡물로 술을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곡물의 전분이 침 속에 있는 ‘프티알린’이라는 효소에 의해 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곡물 양조주는 이와 같이 전분을 당화(糖化)해서 발효시켜야 술이 되는데, 전분을 당화하기 위해 넣는 것이 바로 누룩입니다. 한자로는 ‘국(麴)’이라고 하는 누룩은 밀 같은 곡물을 반죽해놓으면 곰팡이의 포자가 붙어 발효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누룩 만드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쪽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이가 일본으로 누룩을 가져와 술 빚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응신’이라는 이름의 천황은 수수보리가 만들어준 술을 먹고 취해서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후 수수보리는 일본의 주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고려 때의 [고려도경] 같은 기록을 보면 ‘왕이나 귀족들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는 반면 백성들은 이렇게 좋은 술은 못 마시고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와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때 백성들이 먹은 술은 막걸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청주는 막걸리에서 나오는 술입니다. 막걸리가 다 되면 통에 ‘용수’, 즉 싸리 등으로 만든 긴 통을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그게 청주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법주 같은 여러 종류의 청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 |
소주를 고아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소주고리’. <출처 : wikipedia(karendotcom127)>
쉽게 꺼지지 않는 전통
그런데 이 청주를 약주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금주령과 관계될 듯합니다. 조선조에는 금주령이 여러 차례 내려졌는데 약재를 넣은 약주는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청주를 약주인 양 사칭하면서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술을 약주로 부르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 술을 통칭하는 이름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위에서 본 세 가지의 술만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초에 쓰인 [임원경제십육지]같은 책을 보면 170여 가지의 술 이름이 나옵니다. 술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던 것이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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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큰 가문에서는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나름대로 술을 빚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류의 술이 있었겠지요. 그러던 것이 일제기에 대규모 양조업체가 생기고 밀주 단속이나 세금을 물리는 등 우리 전통술에 대해 단속을 강화하자 그 많던 전통주들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뒤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순곡주 제조 금지령’이 발동되고 여전히 밀주를 단속해 전통주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진행되다 1980년대에 들어와 지나친 간섭을 의식한 정부가 한 도에 민속주 하나씩 개발하게끔 숨통을 틔어줍니다. 이것은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을 의식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온 게 앞에서 언급한 안동 소주 같은 지역의 명주였습니다. 그 뒤로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전통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꽤 인기를 끌었던 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주가 20도 이하로 도수를 낮추자 다시 전통주들이 고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술이 꺼져가는 것 같더니 이제는 막걸리 열풍이 붑니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막걸리는 전통의 주조법을 따르되 많은 연구를 거쳐 나온 명품입니다. 근자의 막걸리 열풍을 보면서 전통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꺼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도가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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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참이슬, 강원은 처음처럼, 경북 참소주, 전남 천년의 아침, 부산에서는 시원(C1)….” ‘서민의 술’ 소주는 프로야구 리그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지역 주류업체의 연고를 바탕으로 한 ‘전국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지역 대표선수를 자처하고 있는 소주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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