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길 끝에서 맛본 ‘태극무늬 백자’의 감동
» 이스탄불은 동쪽으로 95%가 아시아대륙에 속하고 서쪽은 유럽에 걸쳐 있다. 유럽지역인 토프카프 궁전박물관에서 남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멀리 보스포루스 다리가 보인다. 왼쪽이 아시아 쪽이고 오른쪽이 유럽이다. |
기원전부터 민족이동·전쟁·문물교류
궁전 박물관 구석 국적불명 백자 사발
태극·팔괘 우리것과 닮은꼴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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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대륙을 한품에 껴안은 국제도시다. 두 대륙이 세계 문명의 2대 본산이라는 동양,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아시아와 유럽이어서 의미는 각별하다. 이스탄불은 명실상부한 동서 문명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접점이 가능한 것은 좁은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두 대륙이 맞붙어 있으며, 그 지리적 간극을 다리 같은 물리적 매체가 메워주기 때문이다.
7500년 전 지금 모습을 갖춘 이 해협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제우스 신은 부인 헤라의 질투로부터 애인 이오를 구하려고 소로 변신시켰지만, 이 사실을 알아낸 헤라는 파리를 보내 이오를 계속 괴롭힌다. 이오는 파리를 떨치려고 이 해협을 건넜는데, 이때부터 ‘소의 문’을 뜻하는 ‘보스포루스’(카우 게이트)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길이 31.7㎞의 보스포루스해협은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점이다. 평균 깊이가 50~120m인 이 해협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은 660m, 가장 넓은 곳은 3.4㎞다.
다리 하나 건너면 대륙이동 출근
원정이건 교역이건 두 대륙을 오가려면 당연히 서로를 잇는 다리가 필요했다. 기원전 4세기 유럽 쪽 시티안으로 원정을 떠난 70만 페르시아 군대는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 가교를 만들었다. 그 뒤 2천여년 동안 배로만 오갔을 뿐 다리 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3년 사상 처음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가 놓였고, 88년에는 두 번째로 파티흐(정복자) 술탄 무함마드 다리가 세워졌다. 두 다리 밑으로 해마다 5만여 척의 각종 선박이 지나간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보스포루스 다리(일명 아타튀르크 다리)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다 오는 ‘다리 여행’을 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차량들로 붐빈다. 다리는 지난 50년 건설 계획을 짜놓고 공사는 70년에야 시작해 터키 공화국 수립 50돌인 73년 10월 29일 총공사비 2300만 달러를 들여 완공했다. 길이 1560m, 폭 33m, 바다로부터 높이는 64m다. 현수교로 하루 차량 20만대와 60만명이 지나다닌다. 2002년 현재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긴 현수교이며, 세계에서 7번째 긴 다리라고 한다.
이런 지리적 여건과 더불어 이스탄불이 동서문명 접점이 된 것은 대륙간의 빈번한 민족 이동, 전쟁, 교류 같은 역사적 배경과도 연관된다. 일찍이 그리스 도리아인들이 아시아 쪽에 와서 기원전 7세기께 칼세돈이란 도시를 건설한 데 이어, 알렉산더 동정 때는 그리스인들이 대거 옮겨와 동서융합 문화인 헬레니즘을 꽃피웠고, 로마 시대 식민도시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는 서구 기독교의 동방 보루가 된다. 한편, 이슬람화한 튀르크족과 아랍인들의 내침은 동방 문명의 유입을 낳았다. 기원전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공방전은 동서 문명의 만남을 자초했고, 중세 오스만제국의 유럽 정복전은 두 문명의 접촉 범위를 더욱 확대했다. 더불어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 이스탄불은 시종일관 동서 문물의 집산지 구실을 해 왔다.
두 문명의 접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성 소피아(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 터키어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교회를 짓기 시작했으나 곡절 끝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7년 지금 같은 규모의 대성당을 완공했다. 완공 뒤에도 몇 번 재앙을 입었다. 1453년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함마드는 점령 3일 만에 여기서 이슬람식 금요예배를 본 데 이어 미흐랍(메카 쪽 예배방향을 알리는 벽감)과 민바르(설교단), 미으잔(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 같은 시설을 증축하고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를 개설했다. 모자이크 성화들은 석회 칠로 덮고, 문에 새긴 십자가는 수직 부분만 없애 형체를 감추는 등 ‘개축’을 단행했다. 이슬람 사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건평 7570㎡에 이르는 성 소피아는 비잔틴 건축의 백미이며 이스탄불의 상징이다. 1935년 박물관이 될 때까지 성 소피아는 916년간(537~1453) 성당으로, 481년간(1453~1934) 이슬람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한 건물이 이질적인 두 종교의 성소로 이토록 오래 공존한 예는 드물다. 수난이 없지 않았지만, 두 종교, 두 문명의 만남과 공존의 상징으로 문명사의 한 장을 장식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70년 전 박물관으로 공개될 때, 성화, 장식에 가했던 덧칠을 벗기고 원상 복원한 것은 실로 가상스럽다. 이 때문에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중층적 문화유산을 경건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성 소피아는 건물 소재부터 각 지역의 융합물이다. 107개 기둥 가운데 일부는 지중해 연안국과 레바논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왔고, 돔에 쓴 가벼운 타일과 벽돌은 로도스 섬에서 구해 왔다. 그림이나 장식물도 두 문명을 아우른다. 본당에 들어가는 9개 문 중 황제가 들어가는 가운데 문 위에 9세기 모자이크 성화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왼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보인다. 오색영롱한 천장과 벽에는 초기 기독교, 비잔틴 시대 황제나 주교들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눈길 끄는 것은 이슬람 관련 유물들이다. 지름 31m, 높이 55.6m나 되는 돔 정면에 증축된 미흐랍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벽을 빙 둘러 아랍어로 알라 →아부 바크르→오스만→하산→후사인→알리→오마르→무함마드 등의 순으로 이슬람 성자들의 이름을 지름 7.의 대형 원판 속에 새겼다. 2층 갤러리는 주로 여성 예배장소로 쓰였다. 왕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오르는 길을 계단 아닌 비탈길로 만들어 조용히 다니도록 이끌었다고 하니 건축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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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간 접점답게 이스탄불은 새 융합문명의 산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비잔틴 문화다. 비잔틴 문화란 한마디로 그리스적 헬레니즘 문화에 동방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일부 서구 학자들이 이 융합적 성격을 근거로 비잔틴을 ‘낮은 제국’, 즉 후진제국이라고 호도하는 건은 편견이다. 비잔틴은 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놓였을 때 그리스-로마 고전문화를 보존해 르네상스 터전을 마련했고, 그리스 정교를 확립해 동유럽 슬라브 세계에 전했다. 이후 러시아가 비잔틴의 ‘후계자’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할 만큼 슬라브 세계의 부흥을 촉진했다. 따라서 비잔틴은 ‘낮은 제국’이 아닌 높은 제국이며, 선진 제국이었다.
필자는 동서 문명의 접점인 이스탄불 현장을 살펴보면서 세계 문명사에 기여해 온 우리네 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계속 응어리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본산인 토프카프 궁전 박물관 도자기실을 찾았을 때도 그런 심정이었다. 박물관은 궁전 부엌에서 쓰던 세계 각 나라 도자기 1만2천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나, 3천점만 전시하고 있다. 소장 도자기의 3분의 2인 8천여점이 중국(7~17세기), 일본(18~19세기), 타이 등의 동양산이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수리 중이라 전시실 한 곳에 몇 백 점만 공개하고 있었다.
‘세계적 조선 도자기 확인’ 대미 장식
대부분 중국산인 도자기 속을 누비다 우연히 안테에 팔괘가, 바닥에 태극문양이 새겨진 청화백자 사발이 보였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한 느낌이 들면서 걸음이 멎었다. 설명문에는 ‘청화백자, 16세기’(Blue and White Ware, 16c)라고만 적혀 있고, 출처는 이례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근처에서 출처 설명 없는 백자 사발과 병 2개도 발견했다. 우리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반,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기대 반 속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귀국해서 보니, 청화백자 사발 문양은 1884년 처음 발행한 ‘대조선국우초’ 5문과 10문짜리에 새긴 태극 문양과도 신통하게 같다.)
한때 세계 도자업을 선도하던 우리 도자사를 반추하면서, 동서 문명 접점에서 세계의 도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했으리란 믿음으로, 수만리 오아시스 육로 답사의 대미를 꾸미고자 한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비잔틴식 돔 무더기·첨탑 버무린 ‘튀르크식 걸작’
이스탄불의 건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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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두말할 나위 없는 건축의 도시다. 동서 문명의 접점으로 이 도시가 누려온 명성은 세계 건축사의 한 정점인 돔 무더기와 첨탑군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사원과 궁전의 이미지에서 상당 부분 비롯한다. 유목민 출신의 튀르크족은 본래 노천에서 천막생활을 했으므로 이렇다할 건축적 전통이 없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정착한 그들은 아랍권의 모스크 아치형 대신 서구 비잔틴 제국의 돔형 건축양식을 절묘하게 차용해 이스탄불에 숱한 건축사 걸작들을 만들었다.
모델이 된 것은 성 소피아 사원이었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그리스 건축가를 시켜 537년 재건한 이 대사원은 정사각형 평면 위에 거대한 원형 돔을 얹은 거대한 동산 모양을 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900여년 뒤 튀르크 건축의 새 모태가 된 것이다.
비잔틴 건축 양식을 오스만 튀르크의 건축양식으로 새롭게 계승한 주역은 대가 미마르 시난(1489~1588?)이다. 동유럽 알바니아 출신으로 황실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에서 기술장교로 복무하며 군용건축으로 경험을 쌓은 그는 제국의 최전성기인 16세기 슐레이만 대제 때 기념비적 건물들을 잇달아 지었다.
소피아 사원의 거대 돔 건축 양식을 기본꼴로 삼되 딸린 반구형의 여러 돔들과 돔들을 받치는 첨탑, 그 아래 아케이드처럼 구성된 복합시설물 단지로 짜인 사원 양식은 시난 건축의 특징이다. 1548년 지어진 셰자데 모스크는 이런 대형 돔+반구 돔 결합양식을 보여주는 첫 걸작이다. 금각만(골든 혼) 해협을 마주보는 언덕에 세워진 슐레마니에 모스크(1557년 완공)는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모스크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지름 27m를 넘는 큰 돔에 동서에 딸린 반구형 돔, 영롱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으로 유명하다. 사원 134개와 토프카프 궁전의 주방, 하렘 등도 설계한 시난은 무려 477채의 건축물(현전하는 것은 196개)을 설계한 다작가였으나 무덤은 슐레마니에 모스크 한쪽에 조그맣게 붙어 있을 뿐이다.(건축사가들은 ‘이스탄불에 남긴 시난의 서명’이라고 부른다.)
시난 특유의 돔 무더기 건축은 이스탄불의 또다른 상징 블루 모스크를 지은 제자 메메드 아가 등에게 계승되었고, 17세기 유럽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곡면 스타일까지 융합시켰다. 이스탄불 사원건축은 개방적인 튀르크 문화가 낳은 최고의 예술적 성취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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