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드높고(趙學士求頌)
身前身後獨靈靈 一切如來出此經 歇盡狂心便相見 水秋天淨月亭亭
홀로 드높고 신령스러운 것이여 깨달은 이들 모두 이에서 나왔네 미친 바람 자면 볼 수 있나니 가을물 맑은 하늘, 달이 떠 있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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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게(臨終偈)
夢幻空花 六十七年 白鳥煙沒 秋水天連
꿈 같고 환영 같은 아아, 육십칠 년이여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물이 하늘에 닿았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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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 진 나뭇가지(撞鐘頌)
세존승좌(從容錄第一則公案世尊陞座頌)
一段眞風見也 綿綿化母理機梭 織成古錦含春像 無奈東君漏洩何
일단의 이 진풍경을 똑똑히 보라 은밀한 조화의 할미가 북을 놀려서 옛 비단결에 봄의 모습 짜 넣는데 저 봄바람이 이미 누설했음을 어이하리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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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
산은 높은 대로(從容錄第十一則公案雲門兩病頌)
조주백수(從容錄第四七則公案趙州栢樹頌)
岸眉橫雪 河目含秋 海口鼓浪 航舌駕流 撥亂之手 太平之籌
눈썹 언덕 서리 비껴 긴 눈에는 가을이요 입바다 물결북 쳐 혀의 배 파도 위라 부딪치면 무찌르는 그 용맹에다 장막 속의 신출귀몰 그 계략이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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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읍 이후
凍眠雪屋歲頹 窈窕蘿門夜不開 寒槁園林看變態 春風吹起律筒灰
언 잠에 눈 덮인 집 나날이 퇴락하여 깊고깊은 저 문은 밤에도 열리지 않네 하나 옛집의 저 뜨락에 푸른빛 돌자 봄바람 날아와 대통을 두드리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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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리 닭울음에(從容錄第七九則公案長沙進步頌)
玉人夢破一聲鷄 轉生涯色色齊 有信風雷催出蟄 無言桃李自成蹊 及時節 力耕犁 誰春疇沒脛泥
한 소리 닭울음에 옥인(玉人)의 꿈이 깨어지네 꿈 깨진 삼라만상 더욱 새로워 바람과 마른 우레 겨울잠 뒤흔들고 말없는 복사꽃 밑에 길이 절로 나네 봄이 오면 들에 나가 밭갈이할 제 못자리 진흙 반죽 어찌 꺼리겠는가.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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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있어 알리(從容錄第二五則公案鹽官犀牛頌)
扇子破索犀牛 攣中字有來由 誰知桂千年魂 妙作通明一點秋
뉘 있어 알리 계수나무 바퀴 속 천년의 혼이 한 점 이 가을로 비치고 있음을 온 누리 빛으로 울리고 있음을.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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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산업식
一喚回頭識我不 依蘿月又成鉤 千金之子流落漠漠窮途有許愁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자네 날 알겠는가 어렴풋한 나월(蘿月)만이 낚싯바늘 모습이네 금은 보화 다 두고 무엇 때문에 떠도는가 나그네길 끝없어 근심만 쌓여 가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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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공은(從容錄第五九則公案靑林死蛇頌)
三老暗轉 孤舟夜回頭 蘆花兩岸雪 煙水一江愁 風力扶帆行不棹 笛聲喚月下滄洲
뱃사공은 몰래 노를 저어 배는 밤길을 떠나네 갈대꽃 양 언덕에 눈발처럼 휘날리고 수면에 이는 안개, 강의 근심이여 바람은 돛폭 밀어 팔짱 낀 채 젓대 소리 달 부르며 창주로 내려가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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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게(臨終偈)
當陽一句 更無回互 月落寒潭 烟迷古渡
분명한 이 한 글귀여 더 이상 머뭇거림은 없네 차가운 못에는 달이 젖어 있고 옛 나루터는 안개 속에 지워져 가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석창법공(石窓法恭 , 1102~1181) 절강성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 천동산(天童山)의 굉지정각(宏智正覺)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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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미소(拈花微笑)
世尊有密語 迦葉不覆藏
一夜落花雨 滿城流水香
스승의 은밀한 말씀,
큰 제자(가섭)에게는 숨겨 두지 않았네
하룻밤 꽃진 비(落花雨)에
성안 가득 유수(流水)의 향기여.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설두지감(雪竇智鑑 , 1105~1192)
안휘성에서 태어났다. 장려산의 진헐청료(眞歇淸了)에게 출가하여 후에 천동종각(天童宗珏)의 법을 이었다. 만년에는 설두산(雪竇山)에 머물다가 설두산의 동암(東庵)에서 88세에 입적했다. 문하에는 천동여정(天童如淨)이 있는데 천동여정은 일본 조동종의 시조인 영평도원(永平道元)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