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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서쪽 편에 강이 흐른다. 형산강이다. 그 강은 울산에서 발원하여 경주 북쪽으로 내달려서 안강 즈음에 이르는데, 거기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지류와 만나 동쪽으로 꺾어져 포항으로 이어진다. 포항으로 가기 전에 먼저 서쪽 지류를 따라가 보면, 그 끝에서 하곡지(딱실못)라는 큰 못을 만난다. 그 하곡지는 1993년에 완공된 저수지라는데 곳곳에 수몰된 나무들이 보인다.
이 하곡지를 끼고서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금곡사(金谷寺)를 만난다. 이 금곡사가 있는 산은 금곡산(金谷山)이다. 옛날에는 '삼기산(三岐山)'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을 보면 민간에서는 '비장산(臂長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비장산으로 불린 내력이나 금곡사 모두 원광법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금곡사는 원광법사가 창건하고 머물었으며 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남아 있는 곳이다.
● 유학을 가서 승려가 된 원광
'삼국유사'에서 원광법사는 '의해(義解)' 편의 첫머리에 나온다. '의해'란 불법의 의리(義理)를 깨달아서 안다는 뜻인데, 이는 원광법사가 바로 신라에서 최초로 불법의 요체를 터득한 승려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원광법사는 당나라 때 편찬된 '속고승전(續高僧傳)'에 그 전기가 실릴 정도로 탁월한 승려였다. 일연 스님은 이 전기를 <원광서학>에 옮겨 실었다.
원광은 처음에 문장을 익히고 노장 사상과 유학을 두루 배웠으며 제자백가의 서적과 역사서도 탐구하였다. 그 덕분에 삼한(三韓)에서는 명성을 떨쳤으나 중국에 견주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그래서 해외(海外)로 갈 뜻을 세웠다. 이윽고 원광은 스물다섯 살 때 배를 타고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금릉은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원광이 남경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경주에서 출발해 우리의 남해를 지나서 먼저 상해(上海)에 도착했던 것이 분명하다. 상해는 아시아에서 가장 길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장강(長江)의 맨 아래에 있는 도시로 중국 동해의 입구다. 그래서 상해라 불리었다. 원광은 장강의 하구에 이르렀기 때문에 금릉으로 곧바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서 금릉까지는 약 300km 거리이지만 장강을 따라 배를 타면 그렇게 멀지 않다.
원광은 곳곳에서 의문을 가졌던 문제들을 물으며 그 뜻을 풀어갔다. 이윽고 장엄사(莊嚴寺)라는 절에서 강설을 들었다. 세간의 전적(典籍)들을 읽으면서 거기에 이치가 다 있다고 여겼던 원광은 불교의 종지에 대해 듣고서는 눈이 활짝 열렸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하였다. 세간의 전적들은 오히려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졌다. 원광은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법에 귀의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빌었다.
진나라 임금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원광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원광은 이제 승려가 되어 불교의 미묘한 이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갖가지 경전들과 논서들을 두루 탐구하였다. 그러다가 소주(蘇州)의 호구산(虎丘山)에 가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선정에 드는 공부를 하였다. 그의 성취가 알려지자 승려의 무리들이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원광이 유학을 갔던 그 때는 남북조 시대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마침내 수(隋)나라가 통일을 이루자 원광은 그 서울인 장안(長安)에 가서 유학하면서 불법을 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을 이루자 신라로 돌아올 생각을 하였다. 수나라 황제는 원광을 두텁게 대접하고 신라로 돌려보내주었다. 갈 때는 그를 아는 이 없었으나, 돌아올 때는 진평왕을 비롯해서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며 맞아들였다.
● 토착신이 원광에게 유학을 권하다
'속고승전'에서는 원광이 스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신라가 아니라 중국에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 기록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원광서학>에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본래 '수이전(殊異傳)'이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둔 책에 있던 것을 일연 스님이 옮겨 실은 것이다.
원광은 중이 되고 난 뒤에 나이 서른에 삼기산에서 홀로 머물며 도를 닦았다. 그가 머물었던 곳이 지금의 금곡사다. 금곡사는 특별히 빼어난 풍광이 없는데다 구불구불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한마디로 조용히 수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 절에서 수행하던 원광에게 신이 나타났다. 물론 이 신은 삼기산을 관장하던 토착신이다. 그런데 이 신이 원광에게 "어째서 홀로 이곳에 머물며 자신만을 이롭게 하며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와서 이 나라의 중생을 널리 구제하려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원광은 자신도 중국에 가고 싶었으나 바다와 육지가 가로막고 있어서 가지 못한다고 변명하였다. 당시는 삼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던 때라 한강 유역을 지나 서해를 거쳐 중국에 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윽고 신이 중국에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신이 가르쳐준 길이 어떤 길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길은 없다. 다만 짐작하건대, 삼기산에서 내려와 앞서 말했던 하곡지의 물길을 따라서 형산강으로 갔다가 그 끝에 있는 포항의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중국에 가는 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배는 신라나 중국의 상선이었을 것이다.
신이 일러준 대로 바다를 건너간 원광은 11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삼장을 통달하였다. 그리고 600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먼저 삼기산의 절을 찾아갔다. 밤에 신이 나타났고 신은 원광에게서 계를 받았다. 이로써 토착신과 불교는 오롯하게 하나가 되었다. 불교는 보편적인 종교였으니 당연히 토착신앙을 포용할 것이지만 토착신앙 쪽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민중의 절실한 바람과 열린 마음에 따른 것이리라. 이는 법흥왕 때 토착신들을 모시던 귀족 지배층이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자 이차돈이 목숨을 내던져야 했던 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원광은 자신에게 길을 알려준 신의 참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에 신은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시오"라고 말하였다. 이튿날 원광이 동쪽 하늘을 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았다. 그리하여 삼기산을 "팔을 길게 뻗은 산"이라는 뜻의 '비장산'으로도 불렀던 것이다.
● 세속을 도외시하지 않은 원광법사
<원광서학>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삼국사기'의 '열전'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그 유명한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관련된 것이다.
수나라에서 돌아온 원광은 가슬갑(嘉瑟岬)에 머물고 있었다. 이 가슬갑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동쪽으로 9천 보가량 되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자세하게 할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운문사가 있는 산이 지금은 운문산으로 불리지만 본래는 '호거산(虎踞山)'으로 불리었다. "범이 웅크린 듯한 산"을 뜻하는데 호거산은 원광이 유학을 갔던 중국 소주의 '호구산'과 이름도 비슷하고 뜻도 상통한다. 민중들의 이야기 속에서 둘이 하나가 되었으리라.
이 가슬갑으로 원광을 찾아온 두 청년이 있었다. 바로 귀산과 추항이라는 선비였다. 그들은 군자와 사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는 유교의 본령에 해당하는데 왜 굳이 승려인 원광을 찾았을까? '논어'나 '예기'를 읽으면 충분히 체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문제는 당시 신라에 전해진 유교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원광이 중국에 유학을 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원광은 세간과 출세간의 도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왜 '임전무퇴(臨戰無退)'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가르쳤는가? 이는 신라가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귀산과 추항 역시 언제든지 종군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물러나지 않는 대범함과 결단력, 용맹함을 지녀야 하고 전쟁을 한다면 살생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될 수 있는 한 줄이라는 뜻이었다.
원광이 비록 출가하여 불살생의 계를 받은 승려였으나 그가 살았던 시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또 상대가 출가한 승려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에게 승려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부처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설법을 폈던 것처럼, 원광 또한 속세의 선비에게 그 처지에 알맞은 덕목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원광이 펼 수 있는 최상의 방편설법이었다.
● 유학의 길을 열다
'속고승전'에 따르면 스물다섯에, '수이전'에 따르면 서른 중반에 원광은 유학을 떠났다. 나이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자각이 있고 난 뒤에 유학을 하였다는 데서는 공통된다. 이치를 탐구하겠다는 열정에는 거친 바다도 낯선 풍토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두루 다니며 배우고 익힌 원광은 중국 땅에서 교화를 폈다. 그의 전기가 '속고승전'에 실렸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승려였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원광은 중국을 떠나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야말로 그의 교화가 절실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토착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원광 이전에도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깨치려고 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광의 유학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제는 원광이 다음 세대에 진정한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그것은 참된 깨달음을 위한 구법(求法)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원광보다 더 멀고 험난한 길을 나선 승려들도 나타났다. 바로 천축으로 떠난 구법승들이다!
<12> 천축으로 돌아간 승려들 |
돌아오지 못했던 '구법의 길', 그 너머에는 무엇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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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沙河)에는 원귀(寃鬼)와 열풍(熱風)이 심해서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가 없고 아래로는 길짐승이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없고,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메마른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법현(法顯, 337~422)이 인도에 갔다가 13년 만에 돌아온 뒤에 쓴 '고승법현전' 또는 '불국기(佛國記)'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사하를 지나면서 본 풍경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하다. 사하는 고비사막이다. 고비사막은 중국과 몽골에 걸쳐 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이 고비사막의 모래가 편서풍을 타고 날려서 우리나라에 온다. 그것이 황사다. '고비'는 '거친 땅'이라는 뜻의 몽골어인데, 법현의 묘사에 견주면 오히려 그 의미가 약하다.
법현은 중국에 율장(律藏)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여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인도로 떠났다. 399년, 장안을 출발한 법현은 돈황(燉煌)을 거쳐 사하를 지나고, 이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서북 인도에 이르렀다. 법현은 인도의 곳곳을 다니며 율장을 필사하였다. 그리고 인도 남동쪽의 섬 실론(스리랑카)에서 배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의 청주(淸州)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때가 402년, 법현은 이미 일흔다섯이 넘은 나이였다.
● 천축으로 돌아간 승려들
1600년 전, 육로로 가서 해로로 돌아온 법현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사투였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에서 인도로 가는 구법 여행의 신호탄이 되었다. 법현을 이어 현장(玄 ,602~664)과 의정(義淨, 635~713) 등 무수히 많은 승려들이 구법 여행을 떠났다. 오로지 불법을 구하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게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크게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에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귀축제사(歸竺諸師)>가 그것이다. 우선 제목부터 자세히 보자. '천축으로 돌아간 스님들'을 뜻한다. 제목의 '귀(歸)'는 단순하지 않다.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혼인하는 것을 '귀'라고 하는데, 마땅히 가야 할 곳이 시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연 스님이 제목에서 이 글자를 쓴 것은 승려라면 천축, 즉 인도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일연 스님은 고려 시대의 선승이었다. 이때는 불법을 구하러 굳이 인도에 갈 이유가 없었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흥성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라 이래로 이 땅에 불교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또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인도로 가는 구법 여행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그런 여행은 전설로도 이야기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구법 승려들의 여행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이 땅의 불교가 살아 있는 한은 기억되어야 할 고귀한 자취였다. 그래서 일연 스님은 <귀축제사>를 두었다.
<귀축제사>는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것인데, 56명의 전기가 있고 그 가운데 7명이 신라의 승려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반면 고구려나 백제의 승려는 없다. 신라 승려들의 구법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사막을 지나고 산맥을 넘은 아리나발마
인도로 떠난 승려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육로, 하나는 해로. 육로는 해로보다 더 위험하였다. 해로는 바람과 해류를 잘 타면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었던 반면, 구법 승려들이 택한 육로에는 한결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려들이 택한 육로는 오늘날에도 쉽사리 지나갈 수 없는 길이다. 걸어서는 더더욱 어렵다. 흔히 비단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거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이 가로막고 있다.
신라인으로서 가장 먼저 인도로 간 승려로 기록되고 있는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장안을 떠나 오천축(五天竺)으로 떠났다. 오천축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인도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아리나발마가 어떤 경로로 인도에 이르렀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장안을 떠났다고만 한 데서 육로로 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서쪽으로 만리장성을 넘어갔다. 이윽고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을 만나는데,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관문인 돈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까지 동서로 6천리, 남북으로 1천500리라는 거대한 사막 타클라마칸이다.
천신만고 끝에 사막을 지나면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을 뻗어 나온 힌두쿠시산맥을 또 넘어야 한다. 힌두쿠시산맥은 7천m가 넘는 산들까지 수없이 많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연 스님은 육로로 인도에 간 스님들을 두고, "천축의 하늘은 아득히 겹겹산인데, 가련하게도 유사(遊士)는 허위허위 오르는구나"라고 기리는 시를 지었다. 유사는 불법을 구하러 떠난 스님들을 가리킨다. 인도는 법의 보배가 있는 곳이지만, 참으로 험난하고 지극히 멀다. 과연 구법의 길을 떠난 승려들 가운데서 그 결실을 맺은 이는 얼마나 될까?
이윽고 아리나발마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서북 인도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먼 길을 가야 했다. 그가 가려 했던 나란타사(Nalanda)는 인도의 동쪽 비하르주 남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삼장법사 현장을 비롯해 많은 구법 승려들이 나란타사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나란타사는 불교의 요체를 배울 수 있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요 최고의 대학이었다. 아리나발마 또한 다양한 경전들과 논서들을 보고 체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고국으로 돌아와 펼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도 헛되이 나란타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바다를 건너다 세상을 떠난 무명의 승려들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두 승려가 있었다. 그들은 장안에서 남쪽으로 남해(南海)로 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의 서쪽 파노사국(婆魯師國)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둘 다 죽었다. 이들이 택한 길은 남방의 바닷길이었다.
남해는 남중국해로 나가는 항구가 있는 광주(廣州)를 가리킨다. 당시 광주를 남해군(南海郡)이라 했다. 실리불서국은 스리비자야(지금의 수마트라 항구)다.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 그리고 인도 사이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번영을 누렸던 나라다. 말하자면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중간 지점이다. 실리불서국의 서쪽 파노사국은 수마트라 서북부의 끝에 있는 브루어(Breueh)섬이다.
브루어섬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서쪽으로 곧장 나아가서 실론(스리랑카)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북쪽으로 인도의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서 미얀마 서해안을 따라서 가다가 방글라데시를 지나 동인도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두 승려에게는 어느 길이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브루어섬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두 승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했다. 일연 스님도 안타까움에,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를 떠나보냈는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는 한 사람도 없어라"라고 노래하였다. 신라의 두 승려뿐만 아니라, 육로로든 해로로든 떠났던 수많은 승려들이 인도에 이르지도 못하고 죽거나 이르렀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어찌하여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천만한 길을 떠났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목숨조차 기꺼이 내던지게 만들었는가?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 부처의 가르침으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는 것, 바로 그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일연 스님도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르며 석가모니의 교화를 보려고 인도에 갔다"고 썼다.
● 다시 살아나야 할 이야기
<귀축제사>는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전기에서 끌어온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그들 구법 승려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들 가운데 돌아와서 그 여행에 대해 들려준 이가 없었고, 그 여행의 결과로 얻은 깨달음으로 교화를 펴서 중생들을 구제해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로 돌아갔으나, 되돌아오지 않은 승려들. 민중은 그들의 경험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니, 그들 돌아오지 않은 승려들에 대해 어찌 이야기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일연 스님은 왜 그들의 행적에 대해 글로 남기려 했는가? 잊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고, 다시 되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연 스님은 이를 글로써 남기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다시 민중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리라. 그러면 저 돌아오지 않은 승려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써 되살아날 것이고, 되살아난 그 이야기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타성에 젖은 먼 훗날의 지식인들이나 수행자들에게 새로이 일깨움을 줄 것이다. 이제 이 짧은 글은 일연 스님의 뜻을 받들어 이렇게 이야깃거리를 내놓는다. 이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의 작용이리라!
<13> 바다 건너온 부처님 사리와 불경 |
육신의 열반이 아닌 진리의 열반을 기다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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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8월 24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120㎞ 정도 떨어져 있는 법문사(法門寺). 열흘째 폭우가 쏟아지더니, 결국 천둥번개가 쳐서 13층 팔각의 진신보탑(眞身寶塔)을 두 동강을 냈다. 그로부터 5㎞년 뒤, 탑을 철거하고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바닥에 조그만 굴이 있었고, 그 굴을 파고 내려가니 돌문이 나왔다. 발굴하던 팀은 흥분했다. 숨겨져 있던 지하궁의 입구였던 것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네 개의 사리는 더없는 보배였다. 하나는 부처님의 손가락뼈, 즉 불지사리(佛脂舍利)였다. 이 사리는 영골(靈骨)이라 하는데, 바로 진신사리(眞身舍利)다. 그리고 세 개는 어떤 고승의 사리인데, 이는 영골(影骨)이라 한다. 당나라 때 여덟 명의 황제가 이 진신사리를 황궁에 맞아들여 공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온 백성이 환호하며 구경거리로 삼았다. 이는 불교가 완전히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음을 입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불교계가 타락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호들갑을 마뜩찮게 여겼던 한유(韓愈, 768~825)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써서 헌종(憲宗)에게 간하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결국 9세기 후반, 당나라 의종(懿宗)은 법문사의 지하궁을 단단히 봉해버렸다. 진신사리는 망각 속에 묻혔다. 그런데 진신사리는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 바다를 건너온 진신사리
'전후소장사리'는 "앞서서 또 나중에 가지고 온 사리"라는 뜻이다. 사리가 전해진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549년에 양(梁)나라 황제가 사신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를 몇 알 보내왔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진흥왕(眞興王) 10년조에도 "양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승 각덕(覺德) 편에 부처의 사리를 보냈다"라고 적고 있으니,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리가 '앞서서' 가지고 온 사리다.
양나라에서 보냈다고 했으니, 이 사리는 남경(南京)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의 남해를 지나서 울산항으로 들어왔으리라.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경로로 전해진 또 다른 사리, 바로 '나중에' 가지고 온 사리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전후소장사리>에서는 643년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그리고 사리 백 알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라니!
머리뼈와 어금니, '사리 백 알'이면 부처의 유골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엄청난 보물이 어떻게 신라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도 천년이 훌쩍 지나서. 일연 스님은 이를 사실이라 믿었을까? '삼국사기'에서는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는 분명 사실이 아니고, 민중이 전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삼국유사'에 실린 것은 무언가 의미심장한 진실이 담겨 있어서이리라.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탑, 태화사(太和寺)의 탑, 통도사 계단(戒壇)에 각각 두었다고 한다. 황룡사탑은 신라의 통일과 관련되며, 자장법사가 왕에게 아뢰어서 세워진 것이다. 통도사는 자장법사가 창건하였고, 계단을 세워서 계율을 정립하여 신라 불교의 토대를 단단하게 한 절이다. 그렇다면 태화사는 어떤 절인가? 바로 여기에 사리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 불경의 상징으로서 사리
중국에서 남해를 지나 울산항으로 들어오면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이 있는데, 바로 태화강이다. 이 태화강 곁에 세워진 절이 태화사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태화사 터에서 발견된 십이지상부도(十二支像浮屠)가 지금 울산의 학성공원 한쪽에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실존을 외로이 증언해주고 있다.
자장법사는 중국에 가서 청량산(淸凉山) 곧 오대산(五臺山)에서 기도하였는데, 문수보살로부터 게송과 함께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오대산 북대(北臺)의 태화지(太和池)로 갔다. 그 태화지의 '태화'를 빌어서 태화사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이 준 가사와 사리는 일종의 상징이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의 권화(權化)다. 그렇다면 그 가사와 사리는 자장법사가 부처의 가르침, 불교의 요체를 온전하게 체득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것은 결코 사리 자체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후소장사리>는 먼저 사리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불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565년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이 경전과 논서 1천700여 권을 가지고 왔고, 이어 643년에 자장법사가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왔다고 하였다. 정확하게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것은 삼장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보면 "자장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대장경(大藏經) 한 부를 비롯해서 복이 되고 이익이 될 만한 것을 얻어서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신라의 불교가 흥성하려면,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들, 그 경전들의 뜻을 풀이한 논서들, 부처가 정한 계율들에 관한 율장 등이 필요했다. '대장경'은 그것들을 모두 아우른 것으로, 앞서 자장이 싣고 왔다고 한 400여 상자의 삼장이 이것이다. 셋으로 나누었다는 사리는 이 삼장을 의미하리라.
<자장정율>에는 사리 이야기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리가 곧 불경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가 무엇인가? 세존을 다비했을 때, 살과 힘줄 등 몸이 완전하게 다 타고 남은 유골이다. 세존이 입멸했을 때, 남김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그때 남은 것은 그 가르침, 그 법이었다. 그래서 불교(佛敎)요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 신룡조차 도운 대장경 전래
'열반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존이 입멸하기 전에 아난을 비롯한 제자들은 "이제 우리의 큰스승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세존은 "내가 입멸한 뒤에는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설했던 법과 율, 이것이 너희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일깨워주었다. 세존이 입멸한 뒤, 제자들이 모여서 세존의 언행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모아 엮은 것이 바로 경전이다. 그리고 그 모임을 결집(結集)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네 차례의 결집이 있었고, 이 결집을 통해서 삼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삼장에 불교 관계의 사서(史書)까지 합쳐서 집대성한 것이 바로 '대장경'이다. <전후소장사리>에서는 자장법사가 먼저, 그리고 이어서 9세기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보요선사가 대장경을 가지고 올 때, 신룡(神龍)이 거센 바람과 파도로써 막으려 하였다가 보요선사의 정성스런 축원에 의해서 오히려 감화되어 함께 대장경을 받들고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은 절이 해룡왕사(海龍王寺)라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고려 때에도 여러 차례 중국에서 대장경을 구해왔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요판대장경(遼版大藏經)'은 세 부를 가지고 왔고, 그 한 부가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참 기묘한 인연이다. 고려에서 11세기에 만든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리자 다시 만든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팔만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 바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후소장사리>에는 몽고의 침입 때 부처의 어금니가 사라진 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개성에서 강화로 서울을 옮길 때 챙기지 못했는데, 관련된 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캐물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은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 없어져서 다시 '고려대장경'을 조판한 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부처의 어금니는 대장경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 이제 그 사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전후소장사리>에는 또 흥미로운 말이 나온다. 바로 변신사리(變身舍利)다. 변신사리는 진신사리와 짝이 되는 것이다. 불법으로 말하자면, 진신사리는 법신(法身) 자체이며 진실이요 본체다. 반면, 변신사리는 화신(化身)이며 방편이요 작용이다. 이를 삼장에 견주면, 경장과 율장이 진신사리고, 논장은 변신사리다. 경장과 율장은 세존이 직접 가르친 법이기 때문에 바로 진신사리다. 논장은 경장과 율장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이요 주석이기 때문에 변신사리다.
이렇게 사리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전후소장사리>에서는 사리뿐만 아니라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까지 등장한다. 법문사를 비롯한 중국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는 신라의 불교가 중국과 버금가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민중은 그렇게 이해하고 이야기를 했으며, 실제로도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이제 신라와 고려의 그 사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에서 법문사의 진신사리처럼 우리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다!
<14> 물길을 빼앗긴 백제 |
충신 잃고 패악에 빠진 왕, 바다 잃고 패망한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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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214년. 한 사내아이가 경주(慶州)의 장산군(章山郡)에서 해양(海陽)으로 먼 길을 나섰다. 장산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고, 해양은 전라남도 광주다. 대략 500리 길이다. 이 길을 아홉 살짜리 사내아이가 걸어서 갔다. 지금처럼 잘 닦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험한 골짜기와 높은 산도 넘어야 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사내아이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내아이의 목적지는 해양의 무량사(無量寺). 말하자면 아이는 승려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니 여느 풍류객처럼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으리라. 서해(西海)를 보기는 했을까? 그러나 머문 곳이, 700여 년 동안 서해를 중심으로 왕국을 유지했던 백제(百濟)의 땅이었으니, 이야기로나마 서해나 백제에 대해서 들었으리라. 그 가운데 하나가 먼 훗날 이 사내아이가 편찬한 '삼국유사' 속에 실려 있다. <태종춘추공> 속에 있는 "백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
● 변화를 미리 읽은 충신의 간언
춘추공은 곧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다. 김춘추는 진덕왕(眞德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쉰이 넘었다. 그리고 8년을 다스린 뒤, 661년에 쉰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廟號)가 '태종'이 된 까닭은 그가 일생 동안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의 통일에 힘썼고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을 떠나기 전 해, 그는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멸망 이야기는 그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태종춘추공> 안에 실린 셈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武王)의 맏아들이었던 의자왕(義慈王)이다.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었다고 한다.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 일컬어질 정도였으니, 그의 성품이 얼마나 빼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뒤, 갑자기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소홀히 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졌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왕의 패악이야말로 왕조의 멸망을 손쉽게 설명하는 길이니. 그러나 그 안에도 진실은 숨어 있다!
성품이 강직한 신하인 성충(成忠)은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 간언에서 성충은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시세의 변화란 곧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가리킨다. 길고 길었던 분열과 혼란의 시대, 즉 위진남북조 시대(220~589)가 수(隨)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에 의해서 종식되었고, 곧이어 당(唐)나라가 통일 제국을 이어받으면서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니, 중국 대륙의 변화는 곧 동아시아의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거듭된 고구려 원정, 당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으려 애쓰는 신라 등등. 시세를 꿰뚫어보는 현자라면 이로부터 한반도에도 안팎에서 거센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낌새를 알아챌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낌새를 알아채기는커녕, 그런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도 드물다. 의자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소홀히 여긴 것은 백제가 그런 위태로운 지경에 있지 않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이듬해(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신라의 성들을 빼앗았다. 이는 대단한 전과(戰果)인데, 이 때문에 의자왕은 오만해져서 성충의 간언에 귀를 기울지 않았던 것이다.
● 빼앗긴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
성충은 특히 "적병이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간언하였다. 탄현은 당시 도성이 있던 부여의 동쪽으로, 신라에서 백제에 이르는 고개다. 기벌포는 백강(白江) 하류를 가리킨다. 백강은 지금의 금강(錦江)이니, 말하자면 장항(長項) 부근이다. 육로로 탄현을 넘어오고 수군이 기벌포로 들어서면 도성이 양면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므로 이를 미리 막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군의 경우, 왜 미리 바다에서 막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성충의 간언 속에 이미 대답이 들어있다. 언제부터인가 백제는 바다에서 큰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643년에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데, 그 이유는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이 당항성은 지금의 화성시에 해당된다. 당항성에서 서해로 나서면 곧바로 중국의 산동(山東)에 닿을 수 있다. 한마디로 당항성은 당나라와 교통하는 데 있어 요충지다. 실제로도 당항성은 당성(唐城)으로도 불렸다. 이런 당항성이 신라의 수중에 있었으니, 백제로서는 눈엣가시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가 당항성을 차지한 뒤로 서해에 대한 제해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제해권이라도 쥐고 있었다면 바닷길을 막음으로써 당항성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터이니, 의자왕이 굳이 고구려와 화친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성충의 간언에서 바다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은 까닭이다.
660년, 마침내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렀다. 성산은 지금의 산동성 위해시(威海市)다. 덕물도는 지금의 덕적도(德積島)로, 당항성 바로 앞바다에 있다. 성산에서 서해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면 바로 덕물도에 이른다. 그런데 이 덕물도를 <태종춘추공>에서는 "신라국 서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해가 신라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월 21일에 태자 법민(法敏)이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했다"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기록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때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서해의 제해권이 신라에 넘어갔고, 그 덕분에 소정방의 군사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서해를 건너올 수 있었다. 실정이 이러했으므로 성충은 바다가 아닌 강, 바로 백강의 입구인 기벌포에서 적의 수군을 막으라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바다를 이미 잃은 백제로서는 백강이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 백강을 빼앗겨 도성이 함락되다
인체에서 '목'은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부분이다. 그래서 '길목'이나 '물목'이라는 말처럼 매우 긴요한 곳을 일컬을 때 '목'이라는 말을 붙여서 쓴다. 당항성은 신라가 서해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었고, 결국 그 길목을 차지한 신라는 서해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런 길목을 빼앗긴 백제로서는 이제 물목을 지키는 일이 긴요했는데, 바로 기벌포가 서해에서 백제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물목이었다. 성충이 이 물목을 굳게 지키라고 했음에도 백제 조정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정방의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소식을 들은 백제 조정에서는 때늦은 논의를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러다가 고마미지현(古馬 知縣, 지금의 장흥)에 귀양을 가 있던 흥수(興首)에게 물었는데, 흥수도 성충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이미 성충을 배척했던 조정에서는 흥수의 대답을 듣고는 성충의 간언을 확실하게 배제했다. 바로 당의 수군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였고, 이는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다.
신하들은 의자왕에게, "당나라 수군이 강을 따라 들어오되 배를 나란히 하고서 오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이는 당나라 수군을 백강 양쪽에서 협공을 하자는 것인데, 전혀 지세(地勢)를 읽지 못한 것이고 조수(潮水)에 대해서도 간과한 것이다. 기벌포는 바닷물이 유입되는 백강의 초입이다. 따라서 당나라 전선(戰船)들이 조수를 이용하면 막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기벌포에서 물러서면, 소정방이 군사들의 일부를 하선시켜서 백강의 동쪽이나 서쪽을 통해 수군을 돕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도성으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다.
실제로 당나라의 전선들은 조수를 이용하여 전진하였고, 소정방 자신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성에서 30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로써 백제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고, 결국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탄식하며 달아났다. 급작스런 기습을 당했다면 일단 달아나서 회복할 기회를 엿볼 수 있지만, 전술에서 그르쳤다면 거의 회복하기 힘들다. 백제는 전술을 잘못 운용하였고, 이것으로 700여 년을 이어온 왕조는 멸망으로 치달았다.
● 역사의 바다에서 무엇을 건질까
<태종춘추공>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조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660년 6월, 왕흥사(王興寺)의 절 문으로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들어오는 것을 중들이 보았다." 이는 소정방의 군사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상징한다.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泗 水) 곧 백강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해 짖었다." 이는 소정방의 군사들이 기벌포에서 육로로 도성에 들이닥치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조짐들에 대해 '삼국사기' <의자왕>조에서도 적고 있지만, 내용을 보면 본래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야기로 전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의 멸망이 바다와 강을 잃으면서 초래된 것임을 꿰뚫어본 민중의 안목, 그리고 이야기로써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그 지혜는 참으로 놀랍다. 이는 육지에서 신라의 성들을 빼앗으며 그 전과에 만족하는데 그쳤던 의자왕 및 백제 조정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기도 하다. 백제는 두 면이 바다였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 면이 바다다. 과연 이 역사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할까?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근처의 뜰에 서 있는 중생사의 관음보살상. 그 모습이 이국적이다. 도래한 중국 화공이 중생사에 머물면서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연화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 꽤 늘씬하게 잘 빠졌다.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니, 보계(寶계)가 지나치게 높다랗게 솟아 있고, 아래 입술이 위 입술보다 두툼하며, 목은 어깨에 붙어 있고, 눈매가 약간 매섭게 느껴진다.
어딘지 부드러움보다는 엄격함이 묻어나는 게, 여느 관음보살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네 여인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아서이리라. 왜 그럴까?
이 관음보살상은 낭산 기슭에 있는 중생사 근처 밭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어 이렇게 박물관에 세워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중생사와 연관이 있을 듯한데, 다행하게도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에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 도래(渡來)한 중국 화공과 중생사 관음보살상
중국에 천자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웠으므로, 천자는 그 모습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빼어난 화공을 불러서 그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그런데 다 그린 화공이 실수로 붓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히게 되었다. 아무리 해도 고칠 수 없었던 화공은 여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붉은 사마귀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였고, 그예 고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림을 보던 천자는 배꼽 밑에 사마귀가 있는 줄을 어떻게 알고 그렸느냐고 성을 내며 벌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신하가 천자를 달랬고, 천자는 자신이 어젯밤에 꿈에서 본 사람의 형상을 제대로 그린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였다.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천자가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았고, 비로소 마음이 풀린 천자는 화공을 놓아주었다.
간신히 죄에서 벗어난 화공은 불법을 신봉한다는 신라로 배를 타고 건너왔다. 말하자면, 망명을 한 셈이다. 이는 천자라는 지존(至尊)이 자신에게 성을 내고 벌을 주려한 데서 위태로움을 느꼈고, 또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불화(佛畵)를 잘 그렸으므로 그런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십분 발휘할 수 있고 또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공은 누구일까? 일연 스님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 한다"고 적고 있다. 민중들은 그 화공이 장승요일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인데, 왜일까?
장승요는 양나라 무제(武帝) 때 활동한 화가다. 양 무제는 자신을 여러 차례나 절에 시주하여 신하들이 거금을 들여서 빼내게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는 황제다. 그리고 장승요는 인도의 화법을 배워서 '몰골화법(沒骨畵法)'이라는 새로운 화풍을 수립하고 불교 인물화나 사찰의 벽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랬기 때문에 민중들은 장승요가 천자의 여인을 그린 화공이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승요든 아니든 이 화공이 배를 타고 남해를 지나 신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라가 양나라보다, 신라의 국왕이 양나라 무제보다 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것, 그리고 신라가 진정으로 불교국가로 거듭날 나라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신라의 불교예술이 여기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윽고 신라에 이른 화공은 중생사에 머물면서 관음보살상을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서 있는 그 관음보살상이다. 이제야 이 관음보살상이 신라의 여인네와는 다른 모습을 한 까닭이 이해된다.
● 화랑을 구해준 백률사 관음보살
'삼소관음중생사는 "세 곳의 관음과 중생사"라는 뜻인데, 이때 '세 곳의 관음'이란 중생사뿐만 아니라 백률사(栢栗寺)와 민장사(敏藏寺)도 포함한다. 그래서 <삼소관음중생사>에 이어 <백률사>와 <민장사>가 나온다. 모두 관음보살의 영험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백률사는 중생사와 관계가 깊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거기에 북산인 금강령(金剛嶺)이 있다. 이른바 소금강산(小金剛山)이다. 백률사는 이 소금강산에 있다. 527년에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내던진 이차돈(異次頓)이 목을 베였을 때, 그 목이 솟구쳐 올라서 떨어진 곳이 바로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백률사가 아주 작고 볼품이 없는 사찰로 남아 있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을 보면 신라 때는 꽤 흥성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백률사에도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이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든 그 화공이 만들어서 안치한 것이라 한다.
693년 3월, 국선(國仙)인 부례랑은 무리를 거느리고 놀러 나갔다가 북명(北溟, 지금 북한의 원산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말갈족에게 붙잡혀 갔다. 무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왔고, 안상(安常)이라는 벗만 홀로 쫓아갔다. 그때,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고 있던 신적(神笛, 만파식적)과 현금(玄琴) 두 보물도 사라졌다. 두 보물은 부례랑과 안상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는 곧 화랑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5월 15일, 부례랑의 양친은 백률사의 불상 앞에서 여러 날 동안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 갑자기 신적과 현금이 나타났고, 이어 부례랑과 안상도 불상 뒤에서 나타났다.
붙잡혀 간 부례랑이 말갈족인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방목하는 일을 할 때, 모습이 단정한 스님이 손에 신적과 현금을 들고 나타나서는 그를 해변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안상을 만났다.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이 타게 하고, 자신은 현금을 타고서 바다를 둥실둥실 떠갔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이른 곳이 바로 백률사의 관음보살상 뒤였던 것이다.
● 장사꾼을 구해준 민장사 관음보살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도 불린다. '관음'과 '관세음'은 "소리 또는 세상의 소리를 보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는 불교의 진리를 드러낸다. 소리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쉽게 듣지 못하는 소리, 그것은 마음의 소리다. 특히 이 세상의 중생은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 신음하지만, 그 괴로운 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한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풀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그런 중생의 소리, 마음 속 괴로움의 소리를 잘 보고 살핀다. 그래서 소리를 듣지 않고 "소리를 살피는" 보살이다. 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어디에나 나타나므로 "자유자재하다"는 뜻의 관자재보살로 불리기도 한다.
화공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준 십일면관음보살의 얼굴이 열하나인 것은 모든 중생을 두루 살피기 위함이다.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이 달렸다는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또한 뛰어난 중생 구제력을 드러낸 이름이다. 이런 관음보살의 구제를 받아서 거친 바다에서 살아난 장사꾼이 있었다.
가난한 여인 보개(寶開)에게는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춘은 상인을 따라 바다를 두루 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 모친은 민장사의 관음보살 앞에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다. 그랬더니 갑자기 장춘이 돌아왔다.
바다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서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도 모두 죽었는데, 장춘만은 오나라 해변에 닿아서 살았다.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이상한 스님을 만나서 함께 동행하게 되었고, 깊은 개천 앞에서 스님이 장춘을 끼고 훌쩍 건너뛰는 순간, 신라 땅이었다고 한다.
이야기에서는 오후 네 시쯤에 오나라에서 떠나 오후 여덟 시쯤에 신라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를 믿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장춘이 남해를 거쳐서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 관음보살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특히 모친의 지극한 마음이 이루어낸 일이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과 진실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종교와 예술, 그 지극함에서 만나다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을 만나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렀고, 부례랑과 안상, 장춘 등도 관음보살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이러한 사실을 믿고 이것이 전부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믿음은 언제나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일연 스님은 그 이상을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종교와 예술은 점점 멀어졌다. 이제 예술은 종교와 그다지 관련을 맺지 않으며, 스스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둘은 그렇게 떨어져 있기만 한 것일까? 종교가 훨씬 우위에 있었던 중세에 왜 종교는 예술을 만나야 했을까? 그것은 둘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공은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지극하게 다하였다. 그랬으므로 저절로 여인의 배꼽까지 그릴 수 있었다. 부례랑의 부모도, 장춘의 모친 보개도 지극한 마음으로 빌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지극한 마음들이 바로 거룩한 마음이다. 일연 스님이 말하고자 한 것이 이것이다. 예술가의 정신과 수행자의 마음은 그 지극함에서 하나다.
왜 신라와 고려 시대에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불교예술과 탁월한 불교사상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되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지극한 마음을 지닐 때,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 종교와 예술은 하나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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