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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의 영지 순례 ]용화세계의 지도자 기다린 '북미륵암의 마애불'

醉月 2023. 2. 28. 12:06

바위 속에 신(神)이 있다. 이것이 고대 신화와 종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든다면 마애불(磨崖佛)이다. 커다란 바위 평면에 새겨놓은 부처 또는 신상(神像)을 마애불이라고 하자.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마애불이 있다. 거의 다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는 바위 속에 부처가 살고 있다고, 또는 산신령이 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왜 믿냐? 왜 바위 속에 신령(神靈)이 거주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냐? 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거나 잠을 자보면 꿈에 부처나 산신령이 나타난다. 자기 꿈에 나타나는 부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개인에게 이러한 현몽이 있으면 그 꿈을 꾼 당사자는 이걸 중요하게 여긴다. 상당한 종교체험을 한 셈이다. 고대로부터 꿈에 신령이 나타나면 이 꿈을 꾼 당사자는 이걸 신비롭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몽(靈夢)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이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꿈을 중시하는 것이다. 밤무대에 나타난 꿈은 낮무대에서 현실로 일어난다.

 바위 속에 신이 거주한다는 믿음

바위 속에 부처나 신이 거주한다는 믿음은 고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 무대였던 페트라. 페트라는 온통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암(砂巖)은 모래가 뭉쳐서 이루어진 암반이므로 화강암에 비해 굴을 파기가 훨씬 수월하다. 페트라에 조성된 신전도 붉은 암반을 판 굴 법당이다. 이건 원래 용도가 왕들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왕의 무덤을 만들 때 굳이 암반을 파서 만든 이유는 왕의 혼령이 바위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기를 바라는 염원에서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바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체험, 즉 꿈 때문이다. 왕의 영혼도 바위 속에서 신이 되어 영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제국의 제왕 무덤들도 바위산 속에 인공으로 굴을 파고 그 안에다가 무덤을 조성한 점이 특징이다. 같은 이유에서이다. 서양의 고대 제왕들 무덤이나 종교시설물들은 한결같이 바위 암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집트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왕들의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왕들의 계곡’도 바위산 골짜기이다. 암반을 뚫고 조성한 무덤들이다. 바위 속에서 위대한 제왕들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영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계 모든 종교의 영험한 신전이나 사원은 바위산에 있다. 그리스의 영험한 신탁소였던 델피신전이 대표적이다. 2200m 높이의 영험한 파르나소스산이 온통 바위산이다. 그 700m 높이에 델피신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신전 뒤로는 온통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유럽 기독교의 영험하다고 소문난 성당이나 수도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 바위산에 있다. 바위산에서 영험이 나온다. 이런 각도에서 우리나라 바위산에 새겨진 마애불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마애불, 그리고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이다. 이 3군데 마애불의 공통점은 모두 영산강 하류와 섬 지역을 드나들었던 해상무역 세력과 관련이 깊은 마애불이라는 점이다. 즉 해상 물류 세력이 돈을 대어 마애불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거대한 규모의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간다. 이 돈을 누가 댔단 말인가? 배를 타고 바다를 오고 가며 장사를 하는 해상무역업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바위부처이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천혜의 해상 요새 지역이었던 변산반도에 근거지를 두었던 세력들이 조성한 마애불이다. 훗날에는 이 마애불이 반체제 불교 승려들의 조직인 ‘당취’들의 상징이 되었고, 동학 때에는 고창에서 최초로 민중봉기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월출산 용암사지 마애불도 역시 서남해안을 바라다보고 있다. 영산강 하구를 들락거리는 해상세력의 안전을 기원하는 방향임에 틀림없다. 항해 안전용 마애불이라고 짐작해도 틀리지 않는다. 마애불의 높이가 8.6m니까 결코 작은 마애불이 아니다. 이 정도 크기로 조성하려면 돈이 상당히 들어간다. 돈 없으면 결코 조성할 수 없는 수준의 마애불이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불을 보자. 여기도 역시 해상세력이 조성한 마애불이다. 좀 더 추정한다면 해상왕 장보고 세력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마애불로 본다. 장보고 세력의 전성기 시절이니까 9세기 초·중반 무렵으로 여겨진다. 가장 자금력이 풍성했을 때에 일급 장인을 불러다가 높은 봉우리 지점에 불사를 한 것이다. 필자가 본 마애불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다듬어진 작품이다. 그 예술성이 높다.

이런 수준의 마애불을 조성하려면 아마도 당대 최고의 기술자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 표정이 너무나 복스럽고 편안한 부처님이다. 양쪽 무릎 밑에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보통 마애불에는 이러한 비천상이 따로 조각되어 있지 않다. 북미륵암 마애불은 머리 뒤쪽의 광배도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고 엄지발가락의 발톱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엄청나게 공을 들인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암자 이름이 북미륵암이다. 그러니까 이 마애불은 미륵불이다. 후천개벽 세상에 나타날 부처님이 미륵불이다. 새 시대를 열어갈 미륵불 출현은 곧 영웅적인 지도자가 머지않아 세상에 나온다는 믿음으로 연결된다. 기존 세상의 혼란과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운 용화세상을 열어갈 지도자. 그 지도자가 언제 나올 것인가? 곧 나온다는 게 미륵불을 조성한 후원 세력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장보고가 미륵불이었을까?

북미륵암 마애불을 조성한 해상세력은 어느 루트를 거쳐서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해남의 유명한 향토사학자인 천기철(62) 선생은 수백 번 두륜산을 올랐던 답사가이다. 천기철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명랑 쪽의 바다, 그러니까 신안군 장산도 쪽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해남 쪽을 바라다보면 두륜산이 가장 높게 보인다고 한다. 바다의 뱃사람이 두륜산을 보면 그 정상 부분의 모양이 둥그런 마차 바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 이름을 두륜(頭輪)이라고 했다. 이 이름은 바닷가 쪽에서 산을 보았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두륜을 보고 배를 타고 온 해상(海商)들은 ‘군곡리 패총’이 있는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군곡리 패총은 마한시대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유적이 가득하다. 패총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 유명한 항구였던 것이다. 군곡리 패총에서 조금 더 배를 타고 들어가면 현산만이 나온다. 현산만에는 옛날부터 현이 있었다는 ‘고현(古縣)’이 있다. 이 고현에서 15리(약 5.8㎞) 정도 고개를 넘어가면 대흥사가 나오는 것이다. 즉 대흥사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접근하기에 아주 가깝고 적합한 위치가 된다. 대흥사로 들어온 장보고 선단의 멤버들이 북미륵암까지 올라가서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그들은 장보고를 미륵불로 생각하였던 것이 아닐까.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