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 조용헌의 영지 순례 ]패자들이 분을 삭힌 곳, 봉화 권씨 집안의 청하동천

醉月 2023. 3. 4. 12:06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승자의 비결만 연구한다. 패자에 대한 관심은 없다. 패자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패자가 그 쓰라림과 고독, 그리고 세상에 대한 원망심을 삭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독과 원망심을 달래는 것이 인생의 관건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승자는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패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소수이고 패자는 다수파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패자에 대한 대책이 훨씬 현실적인 삶의 지침으로 작동한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는 당쟁(黨爭)의 시대였다. 조선이 당쟁으로 망조 들었다고 보는 것이 일본 식민사관이 우리에게 남긴 폐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정치 돌아가는 것 보니까 일본 애들이 완전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요즘 좌우파의 당쟁은 조선시대 노론과 남인의 당쟁을 찜쪄 먹는 차원이다. 이걸 보면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는다. 반복되는 것의 장점은 예측이 가능하다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승자는 노론이었고 패자는 남인이었다. 대략 인조반정 1628년 이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남인들은 찬밥을 먹고 맹물을 마셔야만 하였다. 남인 중에서도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있고 영남남인(嶺南南人)이 있는데 근기 보다도 영남의 차별이 훨씬 심하였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 25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은 정치적 패자였던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미관 말직, 영양가 없는 자리나 돌다가 인생 끝났다. 노른자는 노론 차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울분이 얼마나 컸겠는가! 과거 그런 거 보지 않겠다! 울분과 고독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 번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다른 한 번은 춥고 배고픈 고독이 풍차 날개 도는 것처럼 번갈아 찾아온다. 이걸 어떻게 달랬는가. 이거 못 달래면 병으로 죽거나 술만 먹다가 손 덜덜 떠는 폐인이 되는 수가 있다. 필자는 울화를 달랜다고 술만 먹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 손 덜덜 떠는 폐인을 몇 명 본 적이 있다. 

동천(洞天)이 있다. 동천은 원래 자연 석굴이었다. 석굴이기는 한데 한쪽 구석이 하늘과 통해 있어서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굴이다. 그리고 동굴 내에 먹을 수 있는 샘물이 솟아나오면 조건이 완벽하다. 도가의 신선들이 이런 동굴에서 수도하고 기거하였다. 동천은 신선이 사는 주거 공간이었다. 중국 여산(廬山)의 여동빈 신선이 수도하였던 선인동(仙人洞)을 예전에 답사했던 적이 있었는데, 선인동이 바로 이런 조건을 갖춘 동천이었다. 중국에는 10대 동천과 36소동천, 72복지(福地)로 분류하기도 한다. 모두 경관이 수려하고 기운이 뭉친 지점들이다. 역대로 많은 도가 수련자들이 이런 공간을 선호하고 선망하였다. 선가적 공간이었던 ‘동천’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당쟁의 후유증을 달래주는 힐링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에 패배하거나 당쟁의 후유증에 시달린 유학자들에게 동천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유가는 도가를 비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도가의 공간을 찬미할 수는 없었지만 은근히 이 동천을 가까이 하였다. 즉 전공은 유학이었지만 부전공 정도로 동천을 여겼던 것이다.

당쟁의 상처는 동천에서 치유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이 산수에서 즐기고 살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젊어서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유교적 가치에 충실하였다면 세상 나가서 뜨거운 꼴을 많이 당하면서부터는 도가로 입장 전환을 한 셈이다. 물론 전면에 도가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 중기 이후로 전국 여기저기에 ‘무슨 무슨 동천’이라고 새긴 암각 글씨가 등장한다. 한두 군데가 아니고 수십 군데이다. 자세하게 조사하면 백여 군데가 넘을 수 있다. 어림잡아 수십 군데이다. 동천은 계곡과 골짜기에 있었다. 암벽이 있고 소나무가 있고 계곡물이 흐르고 경치가 절경인 곳이다. 중국 도교의 오리지널 동천인 석굴 개념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기운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조선의 동천이었다. 

경북 봉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리 잡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안전했던 지역이 양백지간(兩白之間)이었다. 특히 고려말~조선초 해안가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거리가 멀었으므로 왜구의 피해를 보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시인, 학자, 도사들이 양백지간을 조선의 무릉도원으로 여겼지 않았나 싶다. 물론 먹을 식량은 적지만 말이다. 안동, 봉화는 양백지간에 해당하였다. 이 봉화를 대표하는 양반 집안이 유곡(酉谷)에 살았던 권씨들이다. 통상 ‘닭실권씨’라고 부른다. 퇴계보다 선배 세대인 충재 권벌이 이 집안을 대표한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내앞마을, 그리고 봉화 유곡마을은 영남의 4대 길지로 손꼽는다. 그만큼 풍수가 좋은 명당이라는 것이다.


‘독립불구’ 보여주는 대졸자의 글씨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 이 영남의 양반 집안 후손들은 노론으로부터 봉쇄를 당하여 고위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대졸자(大拙子) 권두응(權斗應, 1656~1732)이 닭실 권씨의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봉화에는 삼계서원이 있고, 이 삼계서원에서 닭실의 청암정까지 가다 보면 계곡을 통과해야 한다. 약 1㎞의 거리이다. 길지도 않고 산책하기에 아주 적당한 거리이다. 석천계곡이다. 소나무와 바위, 그리고 물 소리가 어우러져 있어서 이 계곡에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시구를 읊조리게 되어 있다. 계곡을 조금 들어가면 석벽이 나오고 거기 바위에 ‘靑霞洞天(청하동천)’이라는 글씨가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나는 이 글씨를 보는 순간 반해 버렸다. 그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대졸자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우선 글씨체가 초서체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 경지에서 쓴 글씨라는 느낌이 왔다. 대졸자라는 호도 마음에 들었다. ‘크게 못난 사람’이라는 뜻 아닌가. 크게 못났다는 것은 크게 잘났다는 자부심이 그 내면에 꽉 차 있다는 의미이다. 겸양과 자부심의 양면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호이다. 이런 호를 쓸 정도가 되어야 서울에 가서 벼슬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고) 둔세무민(遁世無悶, 세상과 떨어져 숨어 있어도 근심이 없다)의 경지에 간다. 

특히 靑霞洞天 중 ‘洞’ 자의 글씨체는 예술이다. S자 모양으로 휘어진 석천계곡의 형태를 글씨로 축약해 지도처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청하는 푸른 노을이다. 푸른 노을은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벼슬과도 안 바꾸는 천하의 보물이다. 석천계곡 자체가 선경이다. 이런 계곡에 살면서 ‘청하동천’의 명필글씨를 남긴 대졸자 권두응. 300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의 정신세계에 깊은 공감이 간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