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대나무 군락 사이로 참나무,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자라는 담양읍 삼다리의 대숲. 담양의 대나무숲을 대표하는 죽녹원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숲이다. 삼다리 마을 뒷산을 다 뒤덮은 대숲은 죽녹원 규모의 두 배에 달한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스테디셀러 여행지 담양
여의도 면적 8.8배 달하는 숲
‘生金’불리며 지역경제 책임져
소나무 어우러진 삼다리 대숲
인파 적어 여유로운 산책 가능
우람한 ‘맹종죽 숲’도 가볼만
조선문인 정철의 정자 ‘송강정’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식영정’
겨울에도 靑靑한 아름다움 뽐내
복합공간으로 변신한 양조장 등
다양한 재생문화공간도 볼거리
담양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전남 담양은 여러 겹의 매력을 가진 여행지입니다.자연(대나무숲)과 역사(정자), 그리고 문화 공간(도시재생공간)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습니다. 여행하는 이의 사정, 여행지 상황과 관계없이 담양은 ‘스테디셀러 여행지’입니다. 다양한 메뉴가 있으니 코스만 잘 짠다면 계절은 물론이고 날씨마저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겨울도, 그렇다고 봄도 아닌 어정쩡한 이 시기에 담양 여행을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시기가 상관없다는 건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더 좋은 계절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담양이 가진 매력 일부를 여기 꺼내놓긴 했지만 말하지 못한 게 더 많아 아쉬웠습니다.
# 점점 더 늘어나는 담양의 대숲
담양을 대표하는 건 대나무다. 담양에는 ‘마을마다’ 대나무밭이 있다. 과장이 아니다. 담양에는 354개 자연마을이 있는데 이 중 3곳을 제외한 351개 마을이 대나무밭을 가졌다. 담양의 대나무밭 면적을 모두 더하면 25.65㎢. 서울 여의도 면적의 8.8배다. 지금도 넓은데 앞으로 대숲의 면적을 4배쯤 더 늘려나간다는 게 담양의 목표다. 담양 땅에다 여의도 면적의 약 35배가 넘는 대숲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대숲의 초록으로 둘러싸인 도시,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대숲의 도시. 그게 바로 담양이 꿈꾸는 미래다.
오래전부터 대나무는 담양의 경제를 책임졌다. 담양 사람들은 대나무로 바구니와 부채, 키, 참빗을 만들어 내다 팔아 생활했다. 오죽했으면 대나무밭을 ‘생금(生金)’, 그러니까 ‘살아있는 금’이라고 했을까. 대나무가 곧 ‘돈’이었던 건 1970년대 후반까지 이야기다. 플라스틱이 나오면서 대나무 수요가 줄었고 저렴한 동남아시아와 중국산 제품이 시장을 잠식했다. 담양의 죽물 시장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그 시절의 애잔함은 담양이 고향인 시인 최두석의 시 ‘담양장’에 있다. 대지팡이에 삿갓을 쓰고 방랑하던 김삿갓은 죽고 참빗으로 이를 잡던 시절도 이미 지난 때의 쓸쓸한 삽화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아, 요즘도 장날이면 / 허리 굽은 어머니/ 플라스틱에 밀려 시세도 없는 대바구니 옆에 쭈그려 앉아 /멀거니 팔리기를 기다리는 / 담양장.”
그런데 왜 담양은 대나무를 더 심으려는 것일까. 담양 대나무밭은 2020년 6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 한창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나무밭으로는 세계 최초이다. 정확히 말하면 ‘담양 대나무밭 농업시스템’이다. 친환경 농법 대나무밭과 거주지·농경지를 연결하는 다층적인 생산구조 농법이 세계중요농업유산이 된 것이다.
담양이 다시 대나무에 주목하고 대나무밭을 늘리려는 이유는 경관으로서의 가치가 농업경제성을 훨씬 넘어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대숲은 사계절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죽로차·대통밥 등 식품부터 건축·첨단바이오 산업까지 대나무의 활용 가능성이 높아진 점도 기대하는 부분이다.
#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
담양의 대표적인 대숲은 단연 ‘죽녹원’이다. 담양 향교의 대숲을 빌리고 인근 대밭을 사들여서 2003년 31만여㎡(9만3800여 평)의 공간에 개장한 죽녹원은 담양을 넘어 전남의 대표적 관광지다. 담양에 도착하면 어디서든 ‘죽녹원’ 이정표가 보인다.
죽녹원을 찾는 관광객은 한 해 120만 명. 4만5000여 명 남짓한 담양군 인구의 약 26.7배나 되는 관광객이 죽녹원을 찾아오는 셈이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죽녹원 산책로에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죽녹원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곳. 새삼 그 매력을 말하기가 ‘뻘쭘’할 정도다. 그렇다면 다른 대숲 얘기를 해보자. 담양에는 죽녹원의 인기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규모나 정취가 그만한, 아니 호젓하기로는 죽녹원보다 더 나은 대숲이 있다.
먼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담양의 대숲 두 곳 중 하나인 담양읍 삼다리 대숲 이야기부터 하겠다. 삼다리 대숲의 규모는 죽녹원의 2배에 육박하는 56만2000㎡(약 17만 평)에 달한다. 막상 숲에 들어서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긴 하지만 숫자로 비교하면 국내 최대 규모의 대밭이다. 삼다리 대숲은 쓸모를 잃은 대나무들이 산으로 올라가 스스로 울창해진 숲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마을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경작하던 주민들이 죽물의 경제성이 떨어지자 평지의 대나무는 다 베어내고 밭이나 논을 만들었다. 이때 산과 마을 사이의 비탈진 공간에 내버려둔 대나무가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진 사이에 저 스스로 마을 뒷산인 시루봉까지 올라가 울울창창한 대숲을 이룬 것이다.
삼다리에는 내다길 삼다리마을회관 옆에서 시루봉을 끼고 이어지는 2㎞ 남짓한 대숲 산책로가 있다. 까마득한 소실점이 보이는 울창한 산책로도 있지만, 소나무·참나무류가 대나무와 한데 어우러져서 자라는 산책로도 있다. 수직의 굵은 대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자라는 활엽수의 모습이 어쩐지 자연에 더 가까워 보여 생동감이 느껴진다.
삼다리의 한옥 민박 겸 차 체험공간인 ‘명가혜’. 여기서는 죽로차를 앞에 놓고 주인장의 판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우람한 맹종죽 숲… 만성리 대숲
삼다리라는 마을 이름은 동다(東茶), 서다(西茶), 외다(外茶) 등 3개 마을이 합쳐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마을에 모두 ‘차 다(茶)’가 들어가는 건 예로부터 이곳이 차로 이름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삼다리는 대숲에서 자라는 찻잎을 따서 덖은 이른바 ‘죽로차’의 원조 마을이다. ‘죽로차’는 대숲의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우린 차다. 삼다리 대숲에는 한옥 민박 및 차 체험공간 ‘명가혜’가 있다. 명가혜의 국근섭 대표는 연기자 겸 판소리와 전통 무용을 하는 국악인이면서 죽로차를 개발한 다인(茶人)이기도 하다. 명가혜 툇마루에 앉아 대숲을 바라보며 죽로차를 앞에 두고 판소리를 듣는 풍류를 누릴 수 있다.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또 한 곳의 대숲이 죽녹원에서 멀지 않은 담양읍 만성리에 있다. 만성리의 대숲은 2만6000㎡(8000여 평) 남짓으로 면적은 그리 크지 않지만 굵은 맹종죽이 가득 들어선 울창하고 우람한 숲이다. 나무의 키가 아찔할 정도로 크고 둥치는 두 뼘에 꽉 찬다. 굵은 대나무들이 이룬 군락이 자못 압도적인데 아쉽게도 만성리 대숲은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통제를 알리는 팻말을 세워놓았지만 왜 문을 닫은 것인지는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대숲 관광지로 조성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공사 중인 것도 아니다. 대숲 문을 열어도 별문제가 없을 듯한데…. 혹 문을 열면 죽녹원 입장객이 줄어들까 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문을 닫고 있으니 이정표도 없고 지도에서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만성리 대숲은 주소를 입력해 찾아가야 한다. 담양읍 만성리 373.
언덕 위 솔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송강정. 소나무들이 정자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몸을 기울이면서 자란다.
# 이즈음에 더 근사한 정자, 송강정
담양을 이야기할 때 대나무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정자다. 소쇄원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정자들이 담양에 모여있다. 우리의 전통 정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리에다 세우는 법. 그러니 정자가 가장 근사할 때는 곧 자연이 아름다울 때라고 할 수 있다. 말인즉 ‘겨울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주위에 늘 푸른 소나무를 두르고 있는 정자는 겨울에도 늠름하고 청청(靑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정자를 꼽는다면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이다.
송강정은 조선의 문인 송강 정철이 당쟁에 얽혀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나 담양에서 머물던 자리에 지은 정자다. 정철은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뛰어난 문인이면서도 현실정치에서는 ‘권력투쟁의 화신’이란 정반대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당쟁시대에 서인을 이끌었던 정철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반대파의 탄핵과 파직으로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기도 했고 기회를 잡아 화려하게 권력에 복귀해 막강한 세도를 누리기도 했다.
권력에서 밀려날 때마다 그는 담양으로 내려왔다. 사실 담양은 그의 고향이 아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을사사화로 집안이 몰락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유배생활을 했는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에 정착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이때부터 정철과 담양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정치적 실패를 거듭할 때마다 그는 담양으로 내려와 위안을 받고 기력을 차렸다.
송강정도 그가 선조의 총애를 받아 대사헌 자리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동인의 탄핵을 받고 담양으로 내려와 지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오십. 네 번째 낙향이었다. 죽녹천 물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던 정자 죽녹정을 고쳐 짓고 자신의 호 송강에서 이름을 따서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절치부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5년 동안 송강정에 은거하면서 정철은 시가 문학을 대표하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이쯤에서 송강정에서 지었다는 선조 임금에 대한 사랑을 남편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어 노래한 사미인곡 한 대목을 읽어보자. 요즘 같은 이른 봄에 딱 맞는 내용이다.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 두세 송이 피었구나/ 가뜩이나 차갑고 담담한데 그윽한 향기는 어쩐 일인가/ 황혼의 달이 쫓아와 베갯머리 비치니/ 흐느끼는 듯 반가워하는 듯한 달이 님인가 아닌가/ 저 매화를 꺾어 님 계신 곳에 보내고 싶구나 / 님이 너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 그림자도 쉬어가는 언덕 위 정자
동인이던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터지면서 서인의 영수 정철은 우의정에 발탁돼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정여립 사건 전모를 조사하면서 반대파를 무참하게 숙청했다.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게 정치적 권력욕 때문이었는지 정치적 결벽증 때문이었는지를 놓고 이견은 있지만, 다시 손에 넣은 권력의 말로는 허망했다. 파직과 유배를 거듭하던 정철은 쉰여덟의 나이에 강화도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송강정은 정철이 죽고 난 뒤에 허물어져 폐허가 됐다. 지금의 송강정은 예전의 정자가 무너진 지 200여 년 뒤인 1770년에 정철의 후손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송강정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정자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몸을 기울이고 있다.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것들도 있다. 짙은 초록의 소나무숲을 두르고 있는 정자는 담박하기 이를 데 없다. 대개 낙향한 이들은 정자에 깃들어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세속과의 결별을 말하지만 정철은 달랐다. 정철은 낙향한 뒤에도 정치적 패배를 되새김질하며 돌아갈 날을 절치부심하며 기다렸다. 그가 지은 시가의 문학적 성과는 이런 결핍과 고통이 바탕이 됐던 건 아니었을까. 패배와 소외, 그리고 은거. 이런 정치적 굴곡이 없었다면 과연 그는 이렇게 빼어난 우리말을 골라내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솔숲으로 둘러싸인 담양의 정자가 한 곳 더 있다. 한국 가사문학관 바로 옆에 위치한 식영정이다. 식영. ‘그림자가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매혹적인 이름은 담양 부사를 지낸 임억령이 지은 것인데 장자에 나오는 우화 ‘자기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림자를 무서워하던 이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아나다 힘이 다해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이야기 속의 그림자란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이야기의 결론은 그림자를 떼어놓으려면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림자도 쉬는 세속을 벗어난 공간. 그게 바로 ‘식영 세계’이고 식영정은 이런 식영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이름 아래 당대의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짓고 세속을 벗어난 삶을 꿈꿨다.
문 닫은 양조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다듬어낸 담양 해동문화예술촌 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
# 문 닫은 양조장이 문화공간으로
담양에는 ‘도시재생’으로 가꾼 문화공간이 곳곳에 있다. 도시재생이 과거의 번성을 추억하는 쇠락한 대도시에나 어울린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담양에 오면 군 단위의 소도시에서 이른바 ‘뉴트로(new+retro·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를 표방한 재생공간이 얼마나 근사하게 만들어질 수 있으며 여행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느낄 수 있다.
담양의 대표적인 뉴트로 재생 공간은 담양읍의 ‘해동문화예술촌’이다. 반세기 넘게 운영되다 지난 2010년 문을 닫아 폐허가 된 양조장인 ‘해동주조장’을 중심으로 인근 교회, 담양의원 안채 건물을 더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듬어 2019년에 개관했다. 문 닫은 양조장을 근사하게 재탄생시켜 지역의 자산으로 만들어냈다. 예술촌에는 옛 양조장 시절의 기록과 역사, 그리고 추억을 전시하는 아카이브 공간이 있고 작품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어린이 대상 문화예술체험공간, 북카페, 식당 등을 들여놓았다. 예술촌의 레스토랑은 뜻밖에 멕시코 음식 전문이다. 대중적 음식이 아니라 어떨까 싶지만 치폴레와 케사디야, 타코 등 멕시코 음식이 젊은 관광객 사이에서 인기다.
해동문화예술촌에 앞서 재생사업이 진행된 곳이 ‘담빛예술창고’다. 담빛은 ‘담양의 빛’이란 뜻이다. 관방제림길 동쪽 끝에 있던, 1968년 지어진 대형 양곡 수매 창고가 양곡 수매제도 폐지로 방치된 것을 2005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붉은 벽돌 건물 외벽에 뽀얀 글씨로 ‘남송(南松)창고’라 적혀있다. 남송은 창고 주인의 아호다. 창고는 갤러리와 카페로 꾸며져 있다. 높은 천장과 탁 트인 실내로 개방감 넘치는 카페 한쪽에는 대나무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필리핀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업체에 주문을 맡겨 제작한 것인데 주말마다 열리는 대나무 파이프오르간 연주회가 제법 인기다.
담양군과 광주MBC가 협업해 만든 ‘담양 LP음악충전소’가 소장해 전시하고 있는 2만5000장의 LP.
# 죽물 시장 골목의 새로운 진화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곳은 관방천변 국수 거리 뒤편의 골목길이다. 이름하여 ‘담빛길’이다.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문화공간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관방천을 끼고 있는 국숫집 뒤편 골목에 책방이며 공예관, 창작소, 작은 카페 등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담빛길에는 향토사 전문서점 ‘이목구심서’가 있다. 광주 대인예술시장 총감독을 역임한 문화관광기획자 전고필 씨가 운영하는 헌책방이다.
담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지난 12일 상가를 개장한 ‘담주 다미담예술구’다. 1980년대까지 죽물 시장이던 쇠락한 시장 건물 16채를 담양군이 사들여 1930년대를 테마로 당시 담양에 있었던 근대건축물의 외양과 느낌이 연상되게 건물을 고쳐 상가를 입점시켰다. 그동안 도시재생이 문화공간으로의 탈바꿈이었다면 담주 다미담예술구는 다양한 공방과 기념품 소품가게, 카페, 베이커리 등을 배치해 여행자의 소비공간으로의 변모를 시도했다.
담양군과 광주MBC의 협업으로 원도심의 죽물 박물관 자리에 들어선 ‘담양 LP 음악충전소’ 역시 재미있는 곳이다. 3층 건물 중 1층은 커피를 파는 카페, 2층은 광주MBC가 소장하던 2만5000장의 LP와 5000장의 CD를 전시하고 헤드폰·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어보도록 만든 전시홀, 3층은 매주 토요일 오후 광주MBC 아나운서가 관람객의 사연과 신청곡을 받아 소개하는 뮤직 이벤트 홀이다. 이런 다양한 시도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기왕의 자원만으로는 낡고 정체된 과거형의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담양 여행이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이런 시도 덕분이다.
■ 담양에서 맛보는 석탄주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홍주 송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 ‘석탄주(惜呑酒)’가 있다. ‘아낄 석(惜)’에 ‘삼킬 탄(呑)’ 자를 이름으로 쓴다. 달고 향기로워 입에 머금고 있으면 ‘차마 삼키기 아깝다’는 뜻이다. 죽을 쑤어 밑술을 담그고 찹쌀로 덧술해서 빚는 석탄주는 맑은 단맛과 풍부한 향이 특징이다. 석탄주를 빚는 홍주 송씨 종가인 하심당은 고택의 빈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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