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베스트셀러가 있다. ‘정감록’ ‘토정비결’ ‘택리지’이다. ‘정감록’은 남성 독자층이 주 타깃이었다. 정권의 향배가 어디로 갈 것이냐에 대한 참고서 역할을 하였다. ‘토정비결’은 안방 여자들의 필독서. 내 운세가 어떻게 될 것이냐를 풀었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는 무엇이냐. 바로 부동산 정보였다. 어디에서 거주할 것이냐에 대한 전국적인 정보를 수집한 명저였다. 그야말로 발로 뛴 저술이다.
‘택리지’에서 살 만한 장소로 추천한 곳은 바로 ‘계거(溪居)’였다. 계거라니? 계곡 옆에서 살면 좋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계거’의 가장 이상적인 위치가 바로 석천정사(石泉精舍)이다. 봉화의 권씨들, 충재 권벌 집안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봉화 유곡(酉谷)에는 석천계곡이 있고, 이 석천계곡의 바위에 권씨 집안의 대졸자가 바위 암벽에 새겨 놓았던 글씨 청하동천(靑霞洞天)은 지난 호에 소개를 했다. 이 석천계곡에서 좀 더 들어가면 석천정사가 있다. 역시 권씨들의 별서(別墅)이자 책 보고 공부하며 심신 수양을 하던 수도처 역할을 하던 정사이다. 불교는 사찰과 암자에서 했지만 유교는 정사(精舍)와 정자(亭子)에서 공부를 하고 도를 닦았다. 조선시대 양반은 거처가 3군데 있어야만 하였다. 우선 경택(京宅)이다. 서울에서 벼슬할 때 머무를 수 있는 집이다. 그다음이 향저(鄕邸). 지방의 고향에 있는 집이다. 그다음에는 별서(別墅), 즉 별장이다. 몸과 마음을 쉬면서 재충전하는 공간이다. 석천정사는 이 별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석천계곡 옆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계거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물이 가깝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거의 식수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깨끗하였다. 상수도 시설과 샤워 시설이 열악했던 조선시대에는 특히 삼복더위가 문제였다. 계거를 하면 수시로 코앞의 계곡에 내려가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여름 한철의 더위를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전염병 예방이다. 물이 깨끗한 계곡에 있으면 전염병 예방 효과가 있었다. 아무래도 동네와 떨어져 있으니까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환경이라는 점도 꼽을 수 있다. 대자연과 내가 하나로 일체감이 되는 느낌 말이다. 유교적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식자층이 추구했던 도의 경지는 바로 물아일체였다. 대자연과 내가 하나로 되는 경지. 그러기 위해서는 물소리를 들어야 한다. 계곡의 바위와 암반 사이로 졸졸 흐르다가 장마철 폭우가 내릴 때는 콸콸 흐르는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효과를 낸다. 계곡의 물소리를 많이 들으면 번뇌가 사라진다. 현대의 모든 명상 치료에서도 물소리를 듣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리 중에서 적당한 물소리는 인간의 정신치유에 효과가 있다. 인도의 힌두교 수행자들이 갠지스강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도 강가에서 머무르며 강물 소리를 듣고 강물 흘러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면 저절로 도가 닦인다고 한다. 그것이 갠지스강을 숭배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계곡 옆에 살다 보면 바위와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암반에서는 기가 나온다. 암반에서 나오는 기(氣)가 불이라고 한다면 계곡의 물이 이를 보완해 준다. 물이 있으면 반드시 불이 있어야 균형을 이룬다. 계곡 옆의 평평한 암반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은 이러한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이치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물 옆의 바위는 물과 불의 배합을 상징한다. 이런 데서 오래 머무르면 기운을 받는다. 오래 머무르기 위해서 장기 또는 바둑을 두는 것도 방법이다.
또 하나 체크할 포인트는 풍광이다. 소나무가 있어야 한다. 소나무는 나무 중의 귀족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면 더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동아시아 산수화는 대개 이런 풍광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였다. 바위 절벽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그 소나무에 하얀 학이 앉아 있는 모습은 그 풍경 자체로 치유의 효과가 있다.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풍광이 정신을 정화해 주는 것이다. 인간세계에 대한 깊은 환멸로 우울이 온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풍광은 이런 풍광이다. 권씨들의 석천정사는 이런 풍광 속에 그림같이 자리 잡고 있다.
시냇물과 산 기운이 어울려 빛난다
조선 후기 노론 정권으로부터 차별받았던 경북 지역의 남인들. 그 남인들의 세상에 대한 환멸을 달래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공부터가 석천정사였다. 정치독(政治毒)을 빼줄 수 있는 환경이다. 석천정사에는 현판이 3개나 걸려 있는데, 맨 오른쪽 현판 글씨가 ‘溪山含輝(계산함휘)’이다. 시냇물과 산 기운이 서로 어울려서 빛난다는 뜻이다. 시냇물과 산이 섞이면 여기에 있는 인간은 섞이지 않겠는가. 인간도 같이 어울려서 돌아간다.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3간(間)이 서로 엮여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삶이다. 여기에서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인간 삶도 바뀐다. 공간이 바뀌면 시간의 흐름도 바뀌고 만나지는 인간도 바뀐다.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인간과 이런 계곡의 정사에서 만나는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석천정사에서 700m쯤 계곡을 내려가면 삼계서원(三溪書院)이 나온다. 반대로 500m쯤 계곡을 돌아서 올라가면 닭실의 청암정(靑巖亭)이 나온다. 넓혀서 보면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만나는 석천정사, 그리고 청암정까지의 공간은 조선 유교의 유토피아적 공간이었다. 이 공간을 같이 누린 집안이 봉화 해저(海低)의 김씨들이었다. 해저를 사투리로 ‘바래미’라고 부른다. 바래미 김씨들과 닭실의 권씨들은 대략 300년 동안 혼사를 통해 피를 섞은 관계이다. 양쪽이 주고받은 혼사만 수백 건에 달한다. 양쪽이 촌수를 따지기도 복잡할 정도이다. 봉화의 대표적인 사족 집안인 이 두 집안은 삼계서원과 석천정사, 그리고 청암정을 교집합으로 하여 시를 짓고, 향음주례를 하며, 정치를 논했다. 바래미에서 석천정사까지는 거리로 따져도 십 리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바래미 김씨들도 수시로 외가집이자 사돈집이고, 처갓집이고, 동문수학의 관계이기도 한 석천정사를 들락거렸던 것이다. 봉화, 안동의 남인 집안 후예들은 21세기가 되어도 돌아갈 고향이 남아 있는 셈이다. 퇴직하고 이런 공간에 돌아와 논어를 읽고 주역을 공부하고 조상들의 문집을 공부하다 보면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전라도에서 성장한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게 부럽다. 전라도는 동학혁명의 후유증과 6·25의 피해로 이런 양반 공간들이 초토화됐다. 양반문화의 특징인 연비(聯臂, 학연·혈연 관계를 중시함)가 파괴되어 버렸다. 전라도에서는 사라진 선비문화가 석천정사에 남아 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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