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의 숲길을 걸어서 신선봉 성인대에 오른 등산객이 장엄한 설악의 풍경 앞에 서 있다. 성인대는 울산바위와 외설악을 조망하는 그야말로 ‘최고의 자리’다. 두 명의 등산객 뒤쪽으로 보이는 등지느러미 같은 암봉이 울산바위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겨울-봄 길목의 설악산
왕관 같이 솟아오른 울산바위
드문드문 ‘잔설’에 입체감 더해
바람 거셀때 나는 ‘우우’ 소리
요즘따라 더욱 구슬프게 들려
대청봉 오르기 힘들었던 시절엔
흔들바위가 설악 대표 아이콘
등산 코스로는 시시해졌지만
겨울 정취·위용은 여전히 간직
적요한 분위기 눈밭 속 신흥사
불밝힌 법당 목조삼존불 ‘온화’
마당 끝에서 보는 권금성 일대
먹 찍어 금방 그린 수묵화 같아
울산바위 맞은편 신선봉 성인대
북설악 일대 전경·동해 한눈에
미시령 터널 지나면 황태덕장도
얼고녹기 반복하며 봄볕 기다려
고성·속초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강원 산간에 폭설이 쏟아졌지만 이제 겨울은 뒷모습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되돌릴 수 없는 일. 앞으로 몇 번의 꽃샘추위는 남았겠지만 봄은 턱밑까지 왔습니다. 다가올 봄에 대한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가는 겨울이 아쉽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지 뒤돌아서면 아쉬운 건,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 겨울을 배웅하러 떠난 길입니다. 눈 쌓인 설악에 들어 울산바위와 울산바위가 가장 근사하게 보이는 금강산 마지막 자락 성인대에 올랐습니다. 크고 거칠어서 비장미 넘치는 설악산 울산바위야말로 잔설로 뒤덮인 겨울이 가장 근사한 곳입니다. 겨우내 거센 바람이 부는 곳이라 각오를 했는데, 뜻밖에 바람이 숨죽인 고요한 날이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신흥사는 아직 눈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절집 앞 계곡에는 얼음이 풀려 물소리가 제법 청아했습니다. 봄이 지척까지 온 모양입니다.
# ‘울타리 산’일까, ‘우는 산’일까
설악의 바깥, 그러니까 외설악의 풍경을 대표하는 수직 암릉이 울산바위다. 울산바위는 해발 873m 둘레 4㎞에 이르는 6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거대한 바위봉우리. 울산(蔚山)이란 이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울타리를 설치한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워낙 바람이 거세서 바람 소리가 마치 산이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우는 산’으로 불렀던 것이 ‘울산’이 됐다고도 한다. 고지도에 울산바위는 ‘천후산(天吼山)’이라 표시됐는데, 후(吼)는 운다는 뜻이니 ‘하늘이 우는 산’이란 뜻이다.
울산바위는 규모부터 형상까지 다 압도적이다. 거대한 왕관처럼 솟은 거친 바위의 자태가 어찌나 당당한지. 도무지 올라붙을 데가 보이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미시령터널을 이용해서 인제에서 속초로 향하는 길이었다면 등장마저도 극적이다. 56번 국도 미시령터널에서 막 빠져나오자마자, 울산바위는 병풍 같은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긴 터널을 나와서 마주하는 암릉의 압도적인 모습은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극적이다.
겨울의 울산바위는 다른 계절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다. 입체감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바위에 남은 잔설 때문이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잔설들이 날 선 창끝 같은, 혹은 단단하게 뭉친 근육 같은 바위에 질감과 입체감을 준다.
희끗희끗한 잔설은 보통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법. 하지만 설악처럼 크고 장엄한 산에서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겨울을 배웅하는 여정의 목적지를 설악으로, 그리고 울산바위로 정한 이유다.
겨울 울산바위에서는 바람을 각오해야 한다. 소백산도 그렇지만, 한겨울 울산바위는 ‘바람 맞으러’ 가는 산이다. 울산바위에서 죽비 같은, 혹은 채찍 같은 바람을 맞고 오면 정신이 다 번쩍 든다. 나른한 일상의 권태쯤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울산바위의 바람이 한순간에 날려 버린다. 그래도 바람이 어지간해야지…. 바람이 심한 날에는 바람에 진짜 ‘몸이 날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울산바위 철계단에 올라붙었다가 거센 바람이 몸을 거칠게 미는 바람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기다시피 되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 바람이 불 때 산은 ‘우우’ 하는 소리를 낸다. 울산이란 이름이 ‘우는 산’에서 왔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진다.
울퉁불퉁 성난 근육 같은 울산바위 암봉 능선의 아찔한 벼랑 끝에 선 등산객이 발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 지나는 겨울의 아쉬움을 새기는 곳
겨울을 배웅하는 여정의 중심에 울산바위를 놓고 ‘가는 길’과 ‘보는 곳’을 제안한다. 먼저 울산바위로 ‘가는 길’ 얘기부터.
울산바위는 외설악 매표소에서 설악산 소공원을 지나 신흥사를 끼고 오른다. 소공원에서 출발하면 울산바위까지는 편도 2시간 남짓이다. 그 길의 딱 중간쯤, 그러니까 1시간 거리에 흔들바위와 계조암이 있다.
지금이야 설악산 정상, 그러니까 대청봉을 오른 건 얘깃거리도 안 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설악산 정상 등반이 언감생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청바지에 통기타까지 들고 객기처럼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설악산 종주 등반이란 전문 등반가나 적어도 대학교 산악반쯤은 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중년들이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학생이었을 때니 가깝게는 30여 년 전, 멀게는 40여 년 전쯤의 얘기다.
그 무렵 설악산의 가장 대중적인 목적지는 흔들바위였다. 흔들바위는 명실상부한 ‘설악산의 아이콘’이었다. 흔들바위를 지나 가파른 철계단을 밟아서 당도하는 울산바위는 다녀온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는 곳이었다. 그때는 ‘설악산에 다녀왔다’는 말이 곧 ‘설악산 흔들바위를 다녀왔다’는 뜻이었다. 당시 산 아래 기념품점에서는 산 이름과 모양이 새겨진 배지를 팔았는데, 그걸 훈장처럼 등산 모자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대부분의 설악산 배지에 새겨졌던 건 흔들바위였다.
설악산 흔들바위는 이제 낡은 흑백사진처럼 쇠락하고 말았다. 잘 정비된 등산로와 최신 등산 장비를 갖춘 등산객들이 너도나도 대청봉을 목표로 삼은 까닭이다. 더불어 발길이 뜸해진 울산바위도 이제 마찬가지 신세다. 흔들바위까지는 왕복 2시간 안쪽. 울산바위까지 다녀온다 해도 3∼4시간 정도의 등산은,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는 시시하기 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흔들바위와 울산바위의 겨울 정취와 위용은 여전하다. 오히려 그때보다 좀 더 한적해져서 산을 오르는 내내 호젓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설악산을 찾는 관광객이 가장 적은, 지금처럼 ‘겨울의 끝’ 무렵이라면 더 그렇다. 봄이 늦게 당도하는 설악은 아직도 겨울 속에 푹 파묻혀 있으니 지나는 계절의 아쉬움을 새기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 먹으로 찍은 수묵화 풍경
신흥사 앞에서 계곡을 따라 들어서면 흔들바위를 지나 울산바위로 가는 길이다. 절집 신흥사는 과시적이다. 단청과 장식으로 화려한 일주문도 그렇고, 108t의 청동을 부어서 만들었다는 거대한 청동 좌상 ‘통일 대불’도 그렇다. 행락철에는 관광객의 발길로 어지럽다.
하지만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가장 뜸해지는 요즘 같은 늦겨울 무렵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직도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 속의 신흥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요하다.
겨울 신흥사의 매혹적인 경관 중 하나가 법당 마당 끝에서 보는 운하당(雲霞堂)이다. ‘구름(雲)과 노을(霞)의 집(堂)’으로 이름을 삼은 기와집 뒤로 눈 쌓인 권금성 일대 암릉이 배경화면으로 펼쳐진다. 마당을 두고 맞은편에 있는 요사채인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먹을 찍어 금방 그려낸 수묵화 같다. 관광지의 번잡스러움에 미처 몰라본 신흥사가 실은 ‘깊고 깊은 산중의 절집’이라는 게 비로소 실감이 간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극락보전의 목조삼존불이다. 이건 해가 져서 절집에 어둠이 스며들 때쯤 봐야 한다. 신흥사의 주불전인 극락보전 정면 문 두 짝은 창호지가 아니라 투명 유리다. 문을 열지 않고 마당에서도 불상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눈 쌓인 법당 마당이 어두워질 무렵에 법당 안에는 불이 켜진다. 법당에 불이 켜지자 눈을 지그시 감은 불상에서 생명력이 느껴지는 듯하다. 노랗고 따스한 법당 불빛이 마치 불상의 광배처럼 빛났다.
조선 효종 때 이름을 날렸던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는 중앙의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무릎에 놓았다.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수인(手印)이다. 이 수인은 고통의 바다에서 사는 중생이 깨달음을 통해 고통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극락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줌을 의미한다. 눈 쌓인 깊고 고요한 산중 절집에서 고통의 바다를 건네주는 불상이 따스한 불빛으로 빛나는 모습이라니….
사다리를 타고 오른 울산바위 능선 끝에서 내려다본 대명 델피노리조트와 일대의 모습. 밑에서 올려다보는 울산바위는 크고 우람하기 짝이 없는데, 울산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것들은 작아서 사소해 보인다.
# 흔들바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
신흥사에서 몇 개의 부도와 암자를 지나서 부드러운 산길을 걸어 오르면 이내 흔들바위다. 흔들바위를 예전에는 ‘우각석(牛角石)’이라 불렀다. ‘소뿔바위’란 뜻이다. 소뿔이라는 이름처럼 본래 바위가 두 개 있었는데, 한 풍수학자가 불가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걸 시기해 한 개를 굴러 떨어뜨렸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느긋한 걸음으로 흔들바위에 와서 그럴까. 그동안에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인다. 흔들바위에는 여러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애써 돌에 써서 제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이들의 흔적이다. 같은 필치로 나란히 새겨진 이름을 읽는다. ‘관찰사 권시경, 강릉부사 신후명, 양양부사 안후, 간성군수 정수준’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에서 군수까지 벼슬아치 넷이 동행했던 여행을 기념해 새긴 듯하다. 이름 옆에 ‘무진년 4월 망일(望日)’이라고 새겼다. 연대에 맞추면 무진년은 1688년이고, 망일은 음력 보름이니 ‘1688년 음력 4월 15일’의 기록이다.
그리고 72년이 지난 뒤에 설악산 일대를 유람하던 조선 후기 문인 안석경이 흔들바위에 새긴 이름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바위 아랫부분에 새겨진 이름 ‘양양부사 안후’가 자신의 할아버지 아닌가. 기행문 ‘후설악기’에서 그는 “할아버지 죽애공(竹涯公·안후) 이름이 새겨진 걸 보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올라가서 보니 슬프면서도 감격스러운 것이 새롭다”고 썼다.
흔들바위 옆에 계조암이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산중 동굴을 발견해 창건했다는 절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자그마치 1371년이나 됐다. 자장은 여기 계조암에 머물면서 훗날 신흥사의 모태가 된 향성사를 창건했다. 계조암의 석굴 법당에서는 자장에 이어, 동산, 각지, 봉정, 의상, 원효 등이 머물며 불법을 닦았다. ‘조사(祖師)’ 칭호를 얻을 만한 승려가 이어서 수도하던 공간이라 해서 ‘이을 계(繼)’에 ‘조상 조(祖)’ 자를 써서 계조암이란 이름을 얻었다.
석굴 법당을 이룬 거대한 바위는 목탁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도 적잖지만, 가장 많은 이름이 새겨진 바위는 계조암 앞의 용바위다. 용바위는 아예 칠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옛사람들의 이름이 빽빽하다. 그중 돋보이는 것이 뚜렷하게 음각된 ‘계조굴(繼祖窟)’이란 글씨다. 글씨는 조선 정조 때 판서 벼슬을 지낸 명필 윤사국의 솜씨. 글씨 옆에다 자못 자랑스럽게 ‘윤사국이 썼다(尹師國 書)’고 새겼다.
용바위의 이름 중에서 의외였던 건 연암 박지원이다. 박지원은 돈 많고 무예 실력이 뛰어난 김홍연의 부탁으로 ‘발승암기’를 지었다. 발승암은 김홍연의 호. ‘내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길 원한다’며 김홍연은 연암에게 글을 부탁했다. ‘발승암기’는 그래서 쓰인 것이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바위에 이름 새기는 일을 질타하며 이런 일의 부질없음을 자못 장황하게 말했었다.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의 이름을 맏아들 박종간의 이름과 함께 용바위에 새겨놓았다.
직벽처럼 보이는 흔들바위 뒤편의 용바위. 칠판 같은 용바위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 아슬아슬 계단을 딛고 오르는 길
흔들바위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는 딱 1㎞다. 흔들바위에서 울산바위를 올려다보면 화강암 수직 절벽처럼 보인다. 저기를 과연 어찌 오를까 싶은데 막상 올라가 보면 별거 아니다. 지금의 울산바위로 오르는 탐방로와 철제 계단은 2012년에 말끔하게 다시 놓은 것. 갈 지(之) 자로 길을 눕히고 경사 구간을 짧게 끊어 놓아 어린아이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예전의 철제계단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바위에 딱 붙어서 급경사로 오르는 계단에 딛고 서면 공포심으로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다. 철계단이 내린 눈으로 꽝꽝 얼어붙은 겨울에는 공포감이 더했다. 자칫 미끄러져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아 난간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울산바위 탐방로는 처음 누가 놓았던 것일까. 1960년대 초반쯤의 문서에 울산바위 계단과 관련해 딱 한 줄이 보인다. “근년에 도문리 오수영이 사재를 털어 고생 끝에 쇠다리를 가설하였으므로 지금은 누구나 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10년 전쯤 계조암에 머물렀던 회문 스님도 “1959년쯤 도문리에서 작은 여관을 하던 이가 계단과 쇠다리를 놓고 울산바위 앞에서 통행료로 50전씩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1950년대 말이나 1960년대 초반쯤이란 얘긴데 그 시절에 어떻게 이 거칠고 험한 벼랑에다 길을 놓을 수 있었을까.
처음 철계단이 놓이고 나서 철계단은 1985년에 한 번, 그리고 1998년에 또 한 번 고쳤다. 그리고 지금의 계단은 2012년에 마지막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고쳐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계단과 다리를 철거하고 다시 놓다시피 한 것이었다. 2012년 마지막으로 고쳐 짓기 전까지만 해도 울산바위 탐방로는 ‘공포의 808계단’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탐방로가 순해져서 누리게 된 건 주변의 경관이다. 공포심을 벗어날 수 있게 되면서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위틈에서 훤칠한 둥치로 자라는 붉은 수피의 금강송도 근사하고,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말라죽은 고사목도 운치가 넘친다. 아슬아슬함을 덜어내니 정상에 올라 굽어보는 속초 일대의 풍경도 더 푸근하고 근사했다.
화암사 가는 숲길 옆의 부도밭.
# 바깥에서 울산바위를 보는 명당 자리
이번에는 바깥에서 울산바위를 바라보는 풍경 얘기다. ‘북설악’의 마지막 봉우리로 세기도 하고, 금강산의 남쪽 첫 번째 봉우리로 헤아리기도 하는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속초 쪽으로 미시령터널을 나오면 길 오른쪽으로 울산바위가 나타나는데, 울산바위 맞은편 그러니까 길 왼쪽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신선봉 정상은 출입 통제 구간이지만, 그 아래 능선 위의 성인대까지는 눈길을 밟으며 호젓하게 오를 수 있다.
성인대란 설악산을 바라보는 암봉 끝에 불상 모양의 바위가 우뚝 서 있어 붙여진 이름. 바위가 사람처럼 보인다 해서 ‘석인대’라고도 하고, 신선처럼 보인다 해서 ‘신선대’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645m의 성인대는 설악의 이름난 봉우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딱 하나 조망만큼은 설악의 명소를 뛰어넘는다. 설악에서 설악은 잘 안 보이는 법. 설악의 진면목은 설악에서 나와야 눈에 담을 수 있다. 성인대가 바로 그렇게 ‘적절하게 뒤로 물러선 자리’에 있다. 성인대에 오르면 울산바위를 비롯해 북설악 일대의 전경과 신선봉, 그리고 동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성인대로 오르는 길은 절집 화암사에서 시작한다. 화암사에서 성인대까지는 산행 코스가 잘 다듬어져 있다. 화암사의 명물인 우람한 ‘수바위’를 끼고 성인대까지 오르내리는 코스는 왕복 4.1㎞ 남짓. 눈 쌓인 산길이라도 2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이곳에서 본 울산바위는 마치 수반에 올린 수석 같은 느낌이다.
수시로 겨울 안개로 뒤덮이는 화암사에서는 수바위의 모습이 한옥 창문에 꽉 차는 화암사 찻집에서 차를 한 잔 마셔도 좋고, 바다 쪽을 바라보는 언덕 위의 미륵불 앞에서 기도를 하고 와도 좋겠다. 울산바위와 신선봉을 보고 되돌아가는 길. 미시령터널을 넘어 인제 쪽으로 접어들면 겨우내 눈을 맞아가며 얼었다 녹았다 한 황태가 널려 있는 황태덕장을 만난다. 겨울이 갔다고 황태를 바로 걷어내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서 얼었던 황태가 다 녹고 난 뒤에도 봄볕 속에서 보름 넘게 더 말라야 최상품이 된다. 좋은 황태를 만들려면 혹한의 추위나 따스한 봄볕 모두 다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둘 중 하나만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듯하다.
■ 울산바위가 잘 보이는 자리
신선봉 성인대 말고도 울산바위의 압도적 경관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몇 곳 더 있다. 그중 한 곳이 델피노리조트와 카페 ‘더 엠브로시아’다, 카페 유리 외벽에 울산바위의 장엄한 풍경이 가득 찬다. 또 한 곳이 ‘캠핑 느루’다. 캠핑 느루는 미시령계곡을 끼고 있는 폭포민박이 운영하는 15개 사이트 규모의 캠핑장이다. 울산바위와 가장 가까이 있어 텐트 문을 열면 울산바위의 전경이 쏟아지듯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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